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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요제프 크라머 (Josef Kramer) |
복무 | 나치 친위대 |
최종 계급 | 친위대 해골부대 대위[1] |
정당 | |
출생 | 1907년 11월 10일 |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뮌헨 | |
사망 | 1945년 12월 13일 (향년 38세) |
연합군 점령하 독일 하델 |
1. 개요
독일의 군인. 슈츠슈타펠 대위이자 여러 강제수용소에서 반인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안네 프랑크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기도 하다.2. 초기 행적
뮌헨 출신인 크라머는 중산층 집안 출신이었으며 부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부모는 그를 엄격한 가톨릭식 교육으로 가르쳤다. 그는 1920년 부터 전기 기술자로서 견습생 생활을 시작했으며 1925년 부터 1930년 까지는 백화점에서 회계사로 일했다. |
친위대 소위 시절 요제프 크라머 |
3. 강제수용소에서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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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쉬바일러 슈트르호프 강제수용소의 가스실 |
파일:StaffJosefKramerAschwitz_1944_04.jpg |
1944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 의사 요제프 멩겔레와 담배를 피며 휴식을 취하는 크라머[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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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 |
1944년 12월부터는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베르겐-벨젠 수용소는 가스실은 없었으나 매우 위생상태가 나빴는데 이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대부분이 티푸스 등의 감염 및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안네의 일기로 잘 알려진 안네 프랑크도 그 희생자 중의 하나다. 전후 베르겐-벨젠에서 해방된 수용자들이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나갈 방법은 이 굴뚝 외엔 없다>라고 소각로를 가리킨 말은 매우 유명하다.
다른 SS 장교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에 대해 병적인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수감자들을 폭력적으로 대했다. 수틀리면 수감자를 구타하는가 하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즉결처형하기도 했다. 그는 유대인 학살을 '효율적으로 해낸 일'로 1945년 1월에 1급 전쟁공로 십자훈장을 수여받는다.
나치의 패망이 눈 앞에 오면서 강제수용소의 운영 시스템은 마비되었고, 많은 경비원들은 보복을 두려워해 도주했지만 크라머는 수용소를 지켰다. 그리고 영국군이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에 도달하자 크라머는 영국군을 맞이해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들을 소개시켜 준다.
4. 전후 재판과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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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17일, 영국군에 의해 체포되는 요제프 크라머[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