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 프랑크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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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 Frank 안네 프랑크 | |||
<colbgcolor=#000000> 본명 | Annelies Marie "Anne" Frank 아넬리스 마리 "안네"[2] 프랑크 | ||
국적 | 바이마르 공화국(1929~1933) 나치 독일(1933~1941)[3] 무국적(1941–1945)[4] | ||
출생 | 1929년 6월 12일 | ||
바이마르 공화국 프랑크푸르트 | |||
사망 | 1945년 3월 12일 (향년 15세) | ||
나치 독일 니더작센 유대인 강제수용소 베르겐벨젠[5] | |||
대표작 | 《안네의 일기》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000> 묘소 | <colbgcolor=#fff,#191919>독일 니더작센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 | |
언어 | 네덜란드어 | ||
민족 | 유대계 독일인 | ||
학력 | 제6 몬테소리 학교[6] (1934년~1941년) 유대인 중학교 (1941년~?) | ||
신체 | 163cm | ||
부모 | 아버지 오토 프랑크(1889~1980) 어머니 에디트 프랑크[7](1900~1945) | ||
자매 | 언니 마르고 프랑크(1926~1945) | ||
사촌 | 버디 엘리즈[8](1925~2015) | ||
링크 | 안네 프랑크의 집 홈페이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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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내 소망은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 것.[9]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자행한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이자, 전쟁 당시 유대인의 일상을 담아낸 《안네의 일기》의 저자이다. 안네 프랑크는 암울했던 홀로코스트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그의 대표작 《안네의 일기》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읽는 고전이 되었고, 역사적인 기록물로 인정 받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2. 생애
안네는 1929년, 독일의 상업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유대인 사업가 오토 프랑크(Otto Frank)와 어머니 에디트 프랑크(Edith Frank) 부부 사이에서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모친 에디트는 개혁파 유대교(진보 성향의 유대교) 신자여서 안네 본인도 자연히 개혁파 유대교 신자로 자랐다. 나치 치하에서 독일의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1933년 프랑크 가족은 중립국인 옆동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민을 떠났고, 이후로는 네덜란드에서 자랐다. 네덜란드가 중립국이니 아돌프 히틀러가 중립국인 네덜란드만큼은 결코 손을 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네덜란드로 간 거지만, 실상은 나치 독일은 유럽 전체로 동맹국이나 점령국을 확대해 가는 과정에서 이 네덜란드까지 본인들 치하로 만들어 버렸고, 이로 인해 프랑크 일가는 미국이나 캐나다,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미 국가 등으로 날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진작에 그곳으로 안 간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지나간 버스였다. 이후에 안네 일가는 홀로코스트를 피하고 나치 독일이 전쟁에서 연합군의 반격을 받고 네덜란드에서 철군 또는 패망할 때까지를 상정하고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암스테르담의 은신처에서 또 다른 유대인 가족인 판 펠스(van Pels)[10] 가족, 그리고 유대인 치과의사 프리츠 페퍼(Fritz Pfeffer)[11]과 함께 숨어 지냈다. 은신처로 사용한 곳은 안네의 아버지가 일하던 회사인 오펙타(Opekta)[12] 소속 건물이었고, 창고와 기타 업무 공간들을 제외하고도도 방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은신처로 제격인 곳이었다.[13]안네의 일기는 안네가 13세 생일 선물로 일기장을 받은 1942년 6월부터 은신처가 게슈타포에게 발각되어 수용소로 전원 압송된 1944년 8월까지 약 2년 2개월 동안 쓰였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 박물관에 일기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책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 중 일부는 안네가 일기를 은신처에 있을 때부터 쓴 것으로 잘못 아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은 은신처로 가기 약 2달 전 생일 선물로 일기를 받은 직후부터 쓰기 시작한 거다. 안네는 책을 굉장히 좋아하여 14살 때 읽은 책이 '그리스 로마 신화'와 '두 도시 이야기'이다. 수학 과목은 유급을 면할 정도로 소질이 별로 없었지만, 수학과는 180도 대조적으로 언어 점수는 늘 만점이었다. 본인이 쓴 글을 반 전체 앞에서 발표할 정도였다. 필력과 문체가 유려한 이유도 엄청난 다독 덕분이었다.
안네 본인이 독서나 글쓰기를 좋아했던 것은 맞지만, '일기'로 워낙 유명해서 뭔가 내성적인 문학소녀일 것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은신처에 가기 전 학교에 다닐 때는 수학 빼고는 공부도 잘 하고 인기가 많아 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가 많고 소위 잘 나가는 여자아이였던 것. 안네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많아서 안네 본인은 그런 남자애들을 '추종자'라고 불렀다. 당장 안네가 은신처로 피신하기 전에는 일기장에 남자애들과 썸 타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정말 키 크고 잘생기고 수줍은 남자아이와 가까워질 때도 좋아하는 남자아이와 적당히 잘 지낼 남자를 구분해서 사귀는 똑부러지는 면이 있었는데, '남자친구 여러 명 두는 게 뭐 어떻죠?'라며 열린 연애관을 가지고 있다 보니 보수적인 에디트와 늘 충돌했다.[14] 한창 감수성이 풍부할 때에 은신처에서 보내면서 자신의 상황과 성장을 겪는 고뇌를 겪으면서 성장한다.
은신처로 사용하던 회사에는 8명의 유대인들이 그 곳에 숨어 있는 걸 모르는 직원들도 있었고, 손님들도 자주 오는 곳이었기 때문에 낮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소리가 들릴까봐 제대로 대화를 나누거나 가벼운 일상 생활을 즐기기도 어려웠으며,[15] 공간도 좁아서 여러 명이 방을 같이 사용해야 했다. 은신처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물품은 늘 부족하여 작은 속옷을 억지로 입어야 하거나 개인 물건을 가질 수도 없었으며, 청결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졌다. 행여 생필품이 다 떨어지기라도 하면 아버지가 깊은 밤중에 몰래 은밀하게 나가서 암시장에서 비밀리에 구매해 오는 것이 전부였다. 누구라도 견디기 어려운 답답한 환경이었으므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해외로 휴가도 다녀올 정도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안네에게는 특히나 힘들고 낯설었을 것이다. 안네는 은신처의 상당히 열악한 환경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들에 비하면[16] 천국 같은 곳이라며 견뎌내는 성숙한 모습도 보여준다.
속이 깊고 생각이 조숙한 데다 일기 후반엔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게 어떤 건지, 성에 대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면서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였으며, 여자에게 성적인 감정을 느꼈던 일화 등 자신의 성 지향성이나 다양한 피임 방법 등 여성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어른들은 애들한테서 성에 관한 얘기를 쉬쉬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자기들끼리 올바르지 않은 정보만 갖게 된다. 아들뿐만 아니라 딸에게도 성교육을 해야 한다."라는 통찰력 있는 말도 했다. 그래서였는지 안네 프랑크의 아버지는 딸의 일기를 출판할 때 성에 대한 얘기 등 대체적으로 자신과 맞지 않는 일부는 쏙 빼놓아 후에 비판받았다.
어머니 에디트와는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건 상상해도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건 상상할 수 없다"라고 적을 정도였다.[17] 에디트는 마르고가 잘못한 일들까지 안네를 혼낸 것 때문에 어머니에 대해 가족으로써의 정조차 느끼지 못하기도 했다. 물론 에디트의 보수적인 성격이 진보적인 안네와 충돌을 불러 일으켰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을 듯하다. 양쪽 부모님과 다른 어른들이 명랑하고 수다스런 안네보다 얌전하고 공부를 잘 했던 언니 마르고를 편애했던 것도 영향이 크다. 마르고가 잘못하면 주의를 주는 것에 그치는 반면, 안네가 잘못한 것은 온 가족이 나서서 혼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마르고의 잘못인데도 안네가 잘못한 것으로 오인하고 꾸짖어 마르고가 당황하는 장면도 일기에서 몇 번 나온다. 이러한 에디트 때문에 나온 안네의 일기 중 유명한 문구가 "나는 친구 같은 엄마는 필요 없고, 엄마 같은 엄마가 필요하다."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아버지에게도 실망하고, 어머니에 대해 극렬한 증오심을 가진 것에 대해 조금 반성한다.[18]
일기를 읽어보면 안네의 성격은 크게 1942년 말과 1943년, 1944년 이렇게 구분할 수 있다. 1942년 말 은신처로 옮기기 전에는 굉장히 활발하고 항상 행복하지만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1942년 말 은신처로 옮기게 되면서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해 절망과 희망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가, 1943년 말기에 접어들면서 한층 성숙해진 모습을 보인다. 1944년에는 본인의 1942년 전쟁 이전 모습을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성장한 면모와 여성의 삶, 왜 전쟁이 일어나는지, 사람들 모두가 친하게 지낼 수 없는지 등에 대해 고민하는 굉장히 생각이 깊은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19]
역사를 너무 좋아한다고 일기에 여러 번 썼다. 또 그리스 로마 신화에 푹 빠져 뮤즈 9명의 이름을 외우고, 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 오디세우스, 메넬라오스 같은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의 이름도 줄줄이 읊었다.[20] 유럽 왕실의 계보도를 신문이나 책에서 발견하는 즉시 종이에 적어두고 외웠다.[21]
후에는 누군가의 밀고로 게슈타포에게 발각되어[22] 가족들과 흩어져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에 끌려갔지만[23], 당시 안네와 함께 있었던 수용소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대 희망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소녀의 몸이었던 안네는 중노동을 견뎌내기 몹시 힘들었지만 다행히 아우슈비츠의 의사들 중 한 명이 오토 프랑크의 친구였기 때문에 언니와 함께 진료를 받고 노동도 오후에는 면제되는 등 아우슈비츠에서도 비교적 혹독한 생활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판 단 부인과 마르고와 안네 셋이 수용소에서 제일 건강한 여성 3명으로 뽑혀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 수용소 상황은 너무나도 열악했다.[24] 안네 자매가 떠난 뒤 혼자 남게 된 어머니 에디트는 이미 뼛속까지 쇠약해져 있어 곧 정신 착란을 일으키다 숨졌고, 언니 마르고도 베르겐-벨젠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장티푸스를 앓다가 침대에서 떨어진 사고[25]가 결정타가 되어 세상을 떠났다. 다른 사람들은 안네가 충격 받을 것을 우려해 마르고의 사망을 일부러 함구하려고 했지만, 결국 어찌어찌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된 안네 또한 부모님도 분명 이미 다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절망에 빠졌다가[26][27] 1945년 3월 12일에 발진티푸스로 결국 사망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1945년 4월 15일, 영국군이 베르겐-벨젠 수용소를 해방시키고 피수감자들을 전원 구출했다. 이때까지 악착같이 살아 있어 구출된 생존자들은 약 6만 명. 그러나 해방 당시 피수감자들의 상황이 어찌나 심각했는지, 휴 글린 준장의 지도 아래 영국군이 이들을 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음에도 이후 2달도 채 버티지 못하고 숨져간 사람들이 약 4분의 1, 정확히 13,994명에 달했다. 만약 안네가 수용소에서 최대 2달만 더 버텼다면 높은 확률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독자들과 수많은 역사의 증인들의 아쉬움을 자아내고 있다. 안네와 마르고를 비롯한 수많은 포로들을 학대하고 죽음으로 내몬 요제프 크라머 수용소장, 프리츠 클라인 수용소 담당의 등 베르겐-벨젠 수용소의 주요 관리 인원들은 영국군에게 전원 체포됐으며, 이들 중 많은 수가 죄에 걸맞게 사형선고라는 철퇴를 맞고 로프에 매달려 공중부양을 하면서 저세상으로 갔다. 벨젠 전범 재판에 대한 영문 위키의 설명.
안네의 사망 1달 후 영국군에 의해 해방되는 베르겐-벨젠 수용소. 그 열악한 수용 시설을 잘 보여준다. 19세 미만 시청 불가. |
1945년에 철거된 베르겐-벨젠 수용소 |
벨젠 재판 |
안네의 일기는 프랑크 가족의 친구이자 은신처 삶을 도왔던 네덜란드 여성 미프 히스(Miep Gies)[28]가 보관하다가, 은신처 유대인들 가운데 홀로 살아남은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29]가 네덜란드로 돌아왔을 때 그에게 전하여 1947년에 책으로 펴낼 수 있었다.
안네는 일기에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고 쓴 적이 있는데, 그 말대로 안네는 비록 수용소에서 15세의 어린 나이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녀의 일기는 전 세계에서 스테디셀러가 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라 영원히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한때 유튜브에서 화제가 된 위의 영상은 1941년 7월 22일 네덜란드에서 촬영되었으며, 12살의 안네가 발코니로 얼굴을 내밀고 당일 결혼식을 치른 신랑 신부를 바라보는 모습이 수 초간 나왔다.
안네와 마르고의 시신은 행방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영국군은 베르겐벨젠 수용소를 해방시킨 뒤 수용소에 방치된 시신들을 수습해서 집단 매장했는데 이 때 두 자매의 시신도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3. 작가로서
안네의 꿈은 작가 또는 저널리스트였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다. 난 죽어서도 영원히 기억되고 싶다.'라는 문구가 있다. 알다시피 이는 적어도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는 이루어지게 되었다. 안네의 일기를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미프 히스의 회고에 따르면 안네가 글을 쓰는 모습을 우연히 미프가 보게 되었는데, 안네가 당황하며 글을 감추자 안네의 어머니 에디트는 미프에게 "보다시피 우리 딸은 작가랍니다."라고 하며 딸의 재주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실제로도 안네의 글재주는 매우 뛰어났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안네의 일기는 단순히 전쟁 상황에서 어린 청소년이 쓴 일기를 넘어서는 가치를 가졌다. 유대인 박해나 전쟁, 은신처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과 두려움, 그 안에서도 느낄 수 있는 작은 즐거움들을 사실 그대로 자세하게 묘사했으며, 안네 자신의 생각이나 성장 과정 같은 풍부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안네의 나이나 학교를 다니지 못한 것보다 문장 수준이 높아서 일기의 진위 여부가 논란이 되었으나[30], 원본이 알려지고 전문가들의 필체 감정으로 정말로 안네의 필체가 맞다고 결론내렸다, 누군가는 그것을 두고 장래에 뛰어난 작가가 되어 더욱 많은 작품을 남길 수도 있었을 소녀가 나치의 인종 학살로 안타깝게 희생됐다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 안네의 일기가 책으로 출판되고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서 '나의 소망은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 것.'이라는 안네의 바람은 정말 이루어졌다. 나치 독일 패망 이후 독일의 과거사 청산이 활발히 이루어짐으로써 안네 프랑크 본인이 현대 독일인들에게 '독일이 배출한 비운의 천재 작가'로 기억될 수 있었으니 더더욱 그 바람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 덕분에 현재 안네 프랑크의 방계 후손들은 독일 사회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는 편이다.
안네는 소설 2~3개를 집필 중이었고[31] 은신처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간간이 동화 등을 써서 은신처 식구들에게 들려주었는데, 그들도 안네의 동화를 재미있게 들었다고 한다.
4. 기타
- 안네 프랑크는 네덜란드 정부가 지정한 네덜란드 역사 캐논의 주제 중 하나로 포함되어 있는데, 이 주제는 프리츠 판오스트롬(Frits van Oostrom)이 위원장을 맡고 2006년 교육문화과학부 장관 마리아 판더르후번(Maria van der Hoeven)에게 제출되었다. 네덜란드에 있는 메리 스쿨과 처음 2년간의 중등 학교 학생들은 학교에서 그녀에 대해 배우게 된다. 2007년 10월 3일 네덜란드 정부에 그녀가 여전히 주제 중 하나로 포함된 개정판이 제시되었다.
- 안네의 은신처 생활 비밀문 복원 모습. 참고로 저기 있는 파일철들은 '밀가루 맛있게 만드는 법', '잼 보관법' 등에 대해 정리해 둔 것들이라고 한다.
- 안네의 이름은 밤하늘에도 남아있다. 1995년 2차대전 종전과 안네의 50주기에 명명된 소행성 5535 Annefrank가 그것. 이 소행성은 NASA의 혜성 탐사선 스타더스트 프로브가 목적지 81P/빌트 혜성으로 향하면서 플라이바이를 실시하기도 했다.
- 그녀의 집은 '안네 프랑크의 집(Anne Frank House)'이라는 이름으로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1960년 박물관으로 재건립했다. 이곳은 매년 방문하는 관람객이 120만 명이 넘을 정도로 네덜란드 최고 인기 관광지 중 하나다. # 워낙 인기라서 미리 예약하고 가야하는 곳이니 참고.
- 미국의 영화감독인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인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는 '곰 유대인'이라는 별명이 있는 도니 도노위츠라는 미군 하사 캐릭터가 하나 나오는데, 야구방망이로 나치 독일 군인들을 시원하게 패죽이는 것으로 묘사된다. 헌데, 그의 방망이에 마침 '안네 프랑크'라는 이름이 적혀있는 만큼 작품의 주제인 유대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저지른 나치스에 대한 보복을 타란티노 스타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32]. 안네 프랑크의 이야기는 전후에나 그녀의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으므로, 이 시기의 안네 본인은 당대인들에게는 그냥 어딘가에 숨어지내는 유대인 소녀 A에 불과한 이름모를 민간인일 뿐이었다. 당연히 그녀의 이름이 적힌 방망이는 고증 오류를 어느 정도 감수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의도적인 연출이다[33].
5. 미디어 믹스
그녀에 관하여 수많은 영화들이 제작되었으며, 여기서 그 리스트를 볼 수 있다.2023년에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로 작은 불빛이 공개되었다. 이 드라마는 안네 프랑크의 가족을 돕고 안네의 일기가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큰 역할을 하였던 '미프 히스'의 실화를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6. 외부 링크
[1] 일기를 쓰기 시작할 무렵의 안네(13세). 안네가 1942년에 유대인 학교에서 찍은 사진으로, 이 사진이 가장 유명하고 널리 쓰이고 있다.[2] 독일어와 네덜란드어 발음은 '[ˈanəˌliːs ˈʔanə\](아널리스 아너)'에 가깝다. '안네'는 관용상 인정된 표기다. 기록에 따라서는 본명을 '아넬리제(Anneliese)'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3] 거주지는 네덜란드.[4] 홀로코스트 실시 후 유대인들은 독일, 정확히는 나치 독일 국적을 박탈 당했다.[5] 사인은 장티푸스. 사망일자는 수용소의 기록이나 베르겐벨젠 수용소에 수감됐던 생존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사망 시점이 1945년 2월 말~3월 초 정도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6] 현재는 안네를 기리기 위해 '제6 몬테소리 학교 안네 프랑크(6th Montessori School Anne Frank)'로 학교명을 변경했다.[7] 혼전 성은 '홀렌더(Holländer)'.[8] 스위스의 배우이자 사촌 안네 프랑크를 추모하기 위한 재단인 안네 프랑크 재단의 회장.[9] 비록 안타깝게 요절했으나, 일기장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이 소망은 이루어지게 되었다.[10] 흔히 '판 단'(van Daan) 가족으로 잘 알려져 있다.[11] 흔히 '알베르트 뒤셀'(Albert Dussel)로 잘 알려져 있다.[12] 향신료 및 펙틴(pectin)을 취급하던 식품 회사. 1928년 설립되었으며 1995년 독일의 다국적 식품기업 독토르 외트커(Dr. Oetker)에 인수되었다. 오펙타는 원래 독일 회사였으나 1933년 네덜란드로 사업을 확장했다. 나치의 정권 장악에 두려움을 느끼던 오토 프랑크는 때마침 자신에게 온 네덜란드 지사 발령을 수락하며 가족들과 함께 네덜란드로 이주해 왔다.[13] 이조차도 오토 본인이 일찌감치 엄청난 부를 쌓아 놓은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오토 프랑크의 가문은 원래 부유한 가문이었고, 한 차례 휘청였으나 수완가였던 오토가 다시 일으켜 세웠다. 또한 이는 여러모로 운이 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가가 폴란드 최대의 양말 공장을 보유하고 있던 재력가 가문이었지만 이리저리 수난에 시달렸던 블라덱 슈피겔만의 사례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14] 68혁명 이전의 서구권은 공공연히 체벌이 허용되는 등 2020년대 기준 한국보다도 사회가 더욱 보수적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15] 안네가 일기에 쓴 바로는 외부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수단은 라디오 단 한 대뿐이었다고 하며, 심지어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려오라고 말하는 것조차도 문을 열고 바닥을 건드려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대체해야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요리할 때도 연기가 외부로 노출되선 절대로 안 되었기 때문에 밤에만 요리를 해야 하거나, 똥오줌을 싸고 화장실 변깃물을 내리면 1층 창고까지 물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밤에만 화장실 물을 내려야 했을 정도였고, 불도 못 켤 정도였고, 그릇 소리 같은 사소한 소리도 밖으로 새어나가면 절대 안 되었고, 외출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심지어 마르고가 은신처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감기에 걸리자, 낮에는 기침 소리가 나서도 절대로 안 되기 때문에 기침약을 많이 복용해야 했다.[16] 실제로도 안네 가족은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어마어마한 재산과 준비성 덕에 당시 나치 점령 하의 유대인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굉장히 좋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었다.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들을 제외하면 숨어 살던 유대인들이 대부분의 거처로 사용한 곳들은 잠도 제대로 자기 어려운 헛간이나 좁아터진 가정집 창고 같은 곳이 고작이었다.[17] 단, 이 부분은 무삭제판에만 수록되었다.[18] 그러나 크게 바뀌진 않는다. 안네는 적어도 은신처를 떠나기 전까지는 끝끝내 어머니 에디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일기를 쓴 시기를 생각하면 크게 특이한 것도 아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사춘기인 저 나이에 부모랑 원만한 사이인 사람이 그렇게 많진 않다. 어린 시절 부모와 갈등을 겪다가 나이를 먹고 부모 입장을 이해하면서 사이가 좋아지는 경우도 흔히 있었다.[19] 이건 대단한 건데, 안네 프랑크는 당시 겨우 14살이었다. 10대 중반의 소녀가 이런 진지한 고민을 깊이 한 거다.[20] 하지만 안네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 말하면 은신처 식구들은 감탄은 커녕 애가 별 걸 다 아냐면서 비웃을 뿐이었다. 특히 뒤셀은 수많은 학문들도 많은데 고작 신화나 읽느냐며 번갈아 쓰는 공용 책상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이 지체되면 안네를 내쫓았다.[21] 한 번은 깨진 꽃병의 물 때문에 이 계보도들이 젖어버린 적이 있었다. 때문에 안네가 네덜란드, 프랑스, 러시아 등의 왕실 계보를 다락방에서 말리는 걸 보고 판 단 씨가 '민족 전쟁 났구나'라며 농담하기도 했다. 또 나치 독일과 대적하는 연합군 측인 영국 왕실에 관심이 많았으며 당시 미인으로 이름난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공주 자매의 팬이기도 했다. 안네의 일기에 유럽 왕실 계보를 잇는 이 아름다운 공주님들이 누구와 결혼할지 궁금하다는 내용과 유럽 왕실 근황 신문 스크랩 중에도 이들 두 사람의 근황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22] 당시 체포조로 출동한 SD 현장 지휘관의 진술에 따르면 자신에게 은신처를 급습하도록 명령했던 줄리어스 데트만 중위에게 확실한 정보원이 있다고 들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데트만 중위는 15명의 레지스탕스를 처형한 것에 대한 재판을 받던 1945년 7월 자살해버렸다. 다만 이 문제는 현재까지도 결론이 확실히 나지 않아서, 심지어 "재수 없게 유대인 색출과 관련이 없는 일제 단속에 걸려들었다"는 설깍지 있다.[23] 그 전에는 베스테르부르크 수용소라는 곳으로 끌려갔고, 실제로 안네도 일기에 생각만 해도 끔찍한 곳이라고 적기까지 했던 곳이었다. 그 뒤에 아우슈비츠로 수용되었다.[24] 베르겐-벨젠 수용소는 나치 독일의 세력권 밖에 있는 독일인 포로들을 데려오기 위한 교환 포로들을 수용하는 수용소이자, 독일군이 포로들을 이송할 때 포로들을 잠시 머무르게 하려는 임시 수용소였다. 처음에는 10,000명을 수용하기 위해 지어졌으나, 전쟁 말기에는 무려 41,000여 명에 달하는 포로들이 이 곳에 수감되었다. 가스실은 없었으나 여러 독일 수용소 가운데 가장 비참하고 지저분했던 곳으로,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수용된 방에 침대와 변소가 같이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변소는 전부 노출되어 있었고 제대로 뒤처리할 휴지도 부족하여 대충 물로 닦아내는 게 전부였다. 이런 비위생적인 공간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하고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으니 포로들의 건강 악화는 당연지사였고, 실제로 대부분의 포로들이 배설물로 전염되는 병으로 인해 숨졌다.[25] 일반적인 침대가 아니라 3층이나 4층 침대에 2, 3명이 같이 취침하는 구조였다. 좁은 공간에 수많은 유대인들을 수용하다 보니 거의 닭장 수준이었다.[26] 그러나 안네의 생각과 다르게 아버지 오토는 다행히 마르고가 숨지기 바로 전 달인 1월 27일에 아우슈비츠를 점령한 소련군에게 구출된 후였다.[27] 안네는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언니에게 정신적으로 크게 의지하고 있었으며, 같은 생존자들의 증언에서는 배가 고파 몰래 채소와 물을 빼돌려 수프를 만들려던 계획을 눈치챈 언니가 위험하다고 크게 나무라자 순응했을 정도라고... 여담으로, 마르고 역시 은신처 시절 일기를 쓰고 있었다는 내용이 안네의 일기에 나오며, 일기에 수록된 마르고의 편지 내용으로 보아 그 또한 문장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안네의 일기가 조작이 아닌 진실임을 교차검증으로 입증하고자 재단 관계자와 네덜란드, 폴란드, 독일의 안네 프랑크 팬들이 수십 년에 걸쳐 언니 마르고가 쓴 일기의 행방을 조사했음에도 결국 찾을 수 없었다. 마르고의 일기는 미프 히스와 베프 포스콰일이 찾아내 보관한 동생의 일기와 달리 작성자와 함께 수용소로 갔다가 이동 중 모두 소실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28] 일기 속에서도 여러 번 등장한다. 안네 일가가 나치에게 잡혀가게 된 원인은 이 인물의 친지가 밀고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진실인지는 불명이다. 그러나 그런 가설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미프 히스 본인은 목숨을 걸고 온갖 심부름을 담당하며 은신처 가족들을 숨겨준 의인이다. 안네 일가가 체포될 때 빅토르 퀴흘레르, 요하네스 클레이만도 유대인을 도운 죄로 함께 체포당하던 와중 남편 행크와 함께 천운으로 끌려가지 않고 목숨을 건졌다. 은신처를 습격한 오스트리아 출신 비밀 경찰 카를 질버바우어(Karl Silberbauer)는 미프 히스가 자신과 같은 빈 출신이었기 때문에 잡아가지 않고 사무실에 남게 해 주었다고 한다.[29]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점령한 소련군에게 구출되었다.[30] 이 논란에는 안네의 일기가 유대인이 지어낸 가짜라고 주장한 나치 옹호자들도 끼어들었다.[31] 일기에는 이 집필 중인 소설에 대해 떠오르는 생각은 많은데 진도나 결말을 어떻게 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예술가적 고뇌도 담겨있다.[32] 안네 개인의 입장으로 봐도, 자신과 그 가족들을 잔혹하게 죽여버린 나치 독일에게 도노위츠 하사의 손을 빌려서 복수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이 자기 방식대로 그녀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한 것이다.[33] 실제로 쿠엔틴 타란티노는 실제 역사를 다루는 작품에서 이런 식의 연출을 집어넣는 것을 즐기는데, 샤론 테이트가 살해당한 사건을 다룬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는, 원 역사대로면 그녀의 일행들을 잔혹하게 살해했을 찰스 맨슨 일당들이 역으로 샤론의 옆집에 사는 주인공에게 호쾌하게 쳐죽임을 당하는 결말을 맞는 것으로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