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18 16:08:03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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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계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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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선정했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 여성들뿐 아니라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 혹은 논란 있는 인물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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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민주 사회주의 공화국 제6대 총리
시리마보 라트와테 반다라나이케
සිරිමාවෝ බණ්ඩාරනායක | Sirimavo Ratwatte Bandaranaike
파일:260px-Sirimavo_Ratwatte_Dias_Bandaranayaka_(1916-2000)_(Hon.Sirimavo_Bandaranaike_with_Hon.Lalith_Athulathmudali_Crop).jpg
<colbgcolor=#00534E><colcolor=#FFBE29> 출생 1916년 4월 17일
영국령 실론 라트나푸라
사망 2000년 10월 10일 (향년 84세)
스리랑카 카다와타
재임기간 제6대 총리
1960년 6월 27일 ~ 1965년 3월 27일
1970년 5월 29일 ~ 1977년 7월 23일
1994년 11월 14일 ~ 2000년 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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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34E><colcolor=#FFBE29> 배우자 <colcolor=#373a3c,#ddd>솔로몬 반다라나이케[1]
학력 콜롬보 성 브릿지 수녀원
자녀 1남 2녀
정당
종교 불교
의원선수 4 }}}}}}}}}

1. 개요2. 생애3. 첫 총리 재임4. 야당 시절5. 2기6. 야당 대표 시절

1. 개요

이름: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싱할라어: සිරිමා රත්වත්තේ ඩයස් බණ්ඩාරනායක
영문: Sirimavo Bandaranaike

스리랑카의 정치인이자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2][3]

싱할라족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카톨릭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불교 신자였으며 영어와 싱할라어 둘 다 구사했다. 당시 스리랑카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1940년 남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와 결혼했고 1959년 9월 26일 총리였던 남편이 암살된 후 정치에 입문하여 스리랑카 자유당 의장이 되었다. 1960년 7월 선거에서 당을 승리로 이끈 후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총리에 취임한 후 은행, 교육, 산업, 미디어 및 무역 부문의 여러 조직을 국유화하여 실론[4]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개혁하려고 시도했다. 행정 언어를 영어에서 싱할라어로 변경하였고 임기 초 인플레이션과 세금 인상, 과도한 식량 수입, 높은 실업률, 싱할라족 민족주의 정책으로 인한 싱할라족과 타밀족 사이의 갈등에 시달렸다. 1962년 쿠데타 시도가 있었고 1965년 3월 총리에서 물러났으나 1970년 다시 총리가 되었다. 1971년에는 극좌 청년단체인 인민해방전선(JVP)이 정부 전복을 시도했으나 진압에 성공했다. 이듬해인 1972년 새 헌법 초안을 작성하고 국명을 스리랑카로 바꿨다. 1975년에는 스리랑카 여성아동부(Sri Lankan Ministry of Women and Child Affairs)를 만들고 스리랑카 최초의 여성 장관도 임명했다.

1977년 선거에서 패배해 물러났으며 임기 중 권력을 남용했다는 혐의로 1980년 시민권을 박탈당하고[5] 7년 동안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후임 총리들도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1983년 마침내 내전이 일어났다. 1986년 해금된 반다라나이케는 당 지도부로 돌아왔으며 그녀는 스리랑카에 주둔중인 인도 평화 유지군이 스리랑카의 주권을 침해한다고 생각하여 내전에 개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198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당선에 실패했고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야당 대표를 역임했다. 1994년 딸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자 반다라나이케는 3번째로 총리에 임명되어 은퇴할 때까지 재직했다. 2000년 8월에 물러났으며 두 달 뒤인 10월 집으로 귀가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 생애

1916년 4월 17일 영국령 실론 라트나푸라에서 4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명성있는 의사였고 아버지는 정치인이자 귀족이었다. 가족들은 외할아버지의 저택에서 살았다고 한다.

콜롬보에 있는 세인트 브리짓 수녀원이라는 기숙학교를 다녔는데 그 학교는 카톨릭 학교였지만 정작 본인은 불교신자였다.

19살 때 학교를 마친 후 사회운동에 뛰어들어 정글 마을에 음식과 약품을 공급하고 진료소를 짓고 여성들을 교육시키는 일 등을 하였다. 그러다 1940년 부모의 중매로 한 남성과 결혼하는데 그는 옥스포드 대학교 출신의 변호사이자 정치인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였다.

파일:1940년 10월 3일 반다라나이케 부부 결혼 사진.jpg
1940년 10월 3일 결혼 당시. 참고로 나이 차이가 17살이다.

부부는 1남 2녀를 낳았고 반다라나이케 본인은 정치인인 남편 뒷바라지를 하며 여성 자원 봉사 단체에 가입해 식량 보급 활동, 여상 인권 운동, 의료 활동 등을 했다.

1948년 실론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남편 솔로몬은 보건부 장관, 하원 원내대표 등을 지내다 1951년 자유당을 설립한다.

1956년 남편이 총리에 선출됐고 이듬해에는 아버지가 사망했다.

1959년 9월 25일, 솔로몬 반다라나이케 총리는 정부에 불만을 품은 한 승려가 쏜 총에 맞았고 다음날 사망한다.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죽은 남편을 대신해 자유당 대표가 되어 선거 유세를 다녔는데 이 때 하도 많이 울어서 울보 과부라는 별명이 붙었다.[6] 그러나 1960년 3월 총선에서 자유당은 통합국민당에게 패배했고 더들리 세나나야케가 총리에 올랐으나 취임 한 달 만에 신임 투표에서 패배하고 7월에 다시 총선이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는 자유당이 승리했고 7월 21일 마침내 총리에 취임한다.

파일:Sirimavo_Bandaranaike,_Prime_Minister_of_Ceylon_1960.png
1960년 7월 20일, 총리 취임 전 날의 반다라나이케

3. 첫 총리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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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연설 중인 반다라나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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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자식들과 식사 중인 반다라나이케

총선에서 자유당이 압승하며 그녀는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지만[7] 당시 그녀는 선출된 국회의원이 아니었고 스리랑카 헌법에 따르면 국회의원이 아닌 제1당 대표는 총리가 될 수는 있지만 3개월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마나멜두라 피야다사 데 조이사(Manameldura Piyadasa de Zoysa)상원의원이 국회의원직을 내려놨고 1960년 8월 5일 올리버 어니스트 구네틸리케(Oliver Ernest Goonetilleke)총독은 그녀를 상원의원에 임명하며 문제는 해결되었다.

처음에 그녀는 내각 구성원이자 조카인 펠릭스 반다라나이케에게 너무 의존해서 야당은 그녀를 "주방 내각"이라고 부르며 조롱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국유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던 남편을 계승해 은행, 무역, 보험, 석유 산업을 국유화했고 인민 은행을 새로 설립해 기존해 은행이 없었던 시골 지역에서 서비스를 확대했다. 또한 경제적, 사회적으로 엘리트 계층이었던 가톨릭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불교의 영향력을 확대시켰으며 1961년 1월에는 싱할라어를 공용어로 지정했다.[8] 이에 타밀족이 크게 반발하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대를 파견했다.

외교적으로는 이스라엘과 관계를 단절하고 친중 외교를 펼쳤으며 소련, 인도, 영국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1962년 중인전쟁 당시 실론이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더딘 경제 성장과 싱할라족, 불교신자만 편애한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인플레이션으로 물가마저 상승했고 긴축 정책으로 인해 외국으로부터 식량 수입, 특히 주식인 쌀 수입이 감소해 국민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그녀의 싱할라족, 불교 우대 정책에 타밀족과 기존의 기득권층인 기독교 신자들이 큰 불만을 나타냈고 실제로 그녀의 정책에 반발한 일부 군 인사들이 쿠데타를 계획했다 발각되기도 했다. 구네틸레케 총독이 쿠데타에 연루됐다는 소문이 돌았고 결국 3월, 총독직에서 물러난 후 영국으로 망명했으며 후임 총독으로는 반다라나이케의 삼촌인 윌리엄 고팔라와가 임명되었다. 1964년 9월에는 인도와 협정을 맺고 인도에 거주하는 무국적 타밀족 52만명을 스리랑카로 송환하기로 합의했다. 1965년 3월 22일 총선에서 패배했고 27일 그녀는 자신의 첫 번째 총리 임기를 마감하게 된다.

4. 야당 시절

1965년 총선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또한 자유당 최초의 여성 대표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반다라나이케의 국회의원 지위가 문제가 되었는데, 반다라나이케가 총리 재임 중에 뇌물(정확히는 차량)을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후 조사를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조사를 받았지만 무혐의로 풀려났다.

5년 동안 야당 대표를 지내며 다른 좌파 정당들과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1966년 11월부터 1967년 4월까지 치러진 7차례의 보궐선거 중 6차례는 반다라나이케의 지도 아래 야당이 승리했다. 지속적인 인플레이션, 무역 불균형, 실업, 외국 원조 감소 등으로 인해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졌고, 특히 당시 정부가 주간 쌀 수당을 줄인 긴축 조치로 인해 민심이 더욱 악화되다. 반다라나이케도 이런 점들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며 정부를 공격하는 캠페인을 무수히 벌였다.

5. 2기

1970년 5월 실론에서 총선이 열렸다. 반다라나이케가 이끄는 통일 전선은 총선에서 127석 중 무려 91석을 차지하는 압승 끝에 권력을 되찾았다.

반다라나이케는 집권하자마자 재정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중앙집권화 경제정책과 가격 통제를 시도했다.

1970년 9월에는 잠비아 루사카 에서 열린 제3차 비동맹 회의에 참석했다.

중동 문제에서는 아랍 국가들 편을 들며, 이스라엘이 이웃 국가들과의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할 때까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12월에는 기업 인수법을 통과시켜 국가가 100명 이상의 직원을 둔 모든 기업을 국유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조치는 명목상으론 스리랑카 내 차, 고무 생산에 대한 외국의 통제를 줄이는 것이 목표였지만, 국내외 스리랑카 산업에 대한 투자를 저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실업과 인플레이션은 억제되지 않았다.

1971년에는 좌익 청년들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3월 6일 무장 세력이 콜롬보 주재 미국 대사관을 공격했고, 3월 17일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봉기 진압이 힘들어지자 스리랑카 정부는 동맹국들에 지원을 요청했다. 소련은 항공기를 보냈다. 결과적으로 반란은 진압에 성공했다.

1972년 5월, 새로운 헌법이 비준되었다. 일단 국명을 실론에서 스리랑카 공화국으로 바꿨다. 이로 인해 영연방에는 남지만 엘리자베스 2세를 더 이상 국가원수로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1971년 이후 정지되었던 상원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불교의 우월성을 인정했지만 불교,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보장한다고 명시했다. 그 외에도 싱할라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인정했다.

같은해 반다라나이케 내각은 주요 토지 개혁을 도입했다. 토지 개혁법 제1호가 제정되어 사유지를 최대 20헥타르로 제한하는 법안이 추가되었다.

1975년에는 개정 토지 개혁법이 제정되어 공기업이 소유한 농장을 국유화했다. 토지 개혁의 목적은 토지가 없는 농민에게 토지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1973년 오일 쇼크는 스리랑카 경제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애초에 당시까지만 해도 스리랑카 경제는 호주, 캐나다, 중국, 덴마크, 헝가리, 세계은행의 지원에 의존할 정도로 좋지 못했다.

1975년에는 연합 전선(연립 여당) 구성 정당 중 하나인 랑카 사마 사마자당(Lanka Sama Samaja Party)을 연정에서 내쫓았다. 또한 국제 여성의 해를 기념하여 여성아동부를 신설했다. 그녀는 스리랑카 내각 최초의 여성인 시바 오베예세케레를 보건부 장관에 임명했다.

1976년 콜롬보에서 회의를 주최한 제5차 비동맹 국가 회의에서 1년 임기의 의장을 맡기도 했다.

2차 임기 당시 국제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지만, 국내에서는 부패와 족벌정치 혐의로 계속 어려움을 겪었고 경제도 계속 침체되었다.

결국 1977년 총선에서 연합 전선은 단 6석만 얻는 대참패를 겪었고[9] 2차 임기를 마감한다. 또한 이 때 연합 전선은 해체되었다.

6. 야당 대표 시절

1978년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바꾸는 새 헌법이 비준되었다. 대통령 임기도 6년으로 바뀌었다. 행정 언어는 싱할라어로 유지되었지만 타밀어를 국어로 인정하는 내용도 추가되었는데, 이는 타밀족 분리주의자들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러한 조항들은 타밀족과 싱할라족 사이의 갈등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1979년 테러 방지법이 통과되었습니다.

1980년 JR 자야와르데네 대통령 은 반다라나이케가 총리 시절 권력 남용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 특별 대통령 위원회를 설치했다. 정부는 1980년 10월 16일 의회에서 반다라나이케, (부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조카 펠릭스 디아스 반다라나이케의 시민권을 7년 동안 박탈하는 동의안을 채택했다. 결국 반다라나이케는 국회의원에서 제명되었지만 당 대표직은 유지했다. 대신 아들이자 국회의원인 아누라가 원내에서 자유당 대표직을 수행했다.

1983년 7월 타밀족이 내전을 일으켰다.

1986년 1월, 자예와르데네 대통령이 발표한 대통령령에 의해 반다라나이케의 시민권이 회복되었다.

반다라나이케는 1988년 대선에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 해 대선에서 44.95%의 득표율을 얻어 50.43%을 얻은 라나싱헤 프레마다사(Ranasinghe Premadasa) 에게 패배했다.[10]

1989년 총선에서 반다라나이케는 당선되었고 다시 야당 지도자로 복귀한다.

1990년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가 13개월간의 휴전을 깨자 정부는 협상을 중단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한 뒤 LTTE를 향해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한다.

1991년에는 런던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딸 찬드리카 쿠마라퉁가가 귀국했다.[11] 같은 해 반다라나이케는 뇌졸중을 겪었다. 뇌졸중 외에도 관절염으로 고통받았다.

1993년 5월 1일 프레마다사 대통령이 LTTE에게 암살당하고 딩기리 반다 위제퉁가(Dingiri Banda Wijetunga) 총리가 남은 임기 동안 대통령을 맡게 된다. 위제퉁가는 반다라나이케의 아들 아누라를 설득하여 자유당을 탈당하는 대신 고등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같은 달, 딸 쿠마라퉁가는 인민동맹(People's Alliance(PA))을 결성했다. 이듬해인 1994년 8월 열린 총선에서 인민동맹은 승리했고, 같은 해 11월에 열린 대선에서도 승리한다. 17년만에 정권이 교체된 순간이었고, 쿠마라퉁가는 스리랑카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어머니 반다라나이케는 총리에 임명된다.
별개로 반다라나이케는 관절염과 당뇨 합병증 때문에 이때쯤부터 휠체어에 의존해야 했다.

2000년 8월 총리에서 물러났고, 10월 10일 총선에서 투표를 하고 귀가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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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당일 총선에서 투표중인 반다라나이케. 이 후 집으로 돌아가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 스리랑카 2대 총리[2] 다만 세계 최초의 여성 국가수반까지는 아니다. 세계 최초의 여성 국가원수는 지금의 러시아 시베리아 연방관구에 위치했던 투바 인민공화국의 헤르테크 안치마토카(Хертек Анчимаа-Тока)로, 시리마보의 총리 취임 때보다 20년 더 앞선 1940년에 취임하였다.[3]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아르헨티나이사벨 페론이다.[4] 당시 스리랑카의 국명[5] 1986년 1월이 되어서야 회복한다.[6] 사실 이 별명은 반대 진영이 비꼬려고 붙인 별명이었으나 그녀를 대표하는 별명 중 하나가 되었다.[7] 국방부 장관도 겸임했다.[8] 그 전에는 영어가 제1언어였다. 이 조치로 인해 200만명이 넘는 타밀족이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9] 반다라나이케 본인은 당선되었다.[10] 프레마다사는 1993년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의 폭탄 테러로 암살당했다.[11] 1988년 남편이 암살당한 게 망명의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