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파티아 Ὑπατία | Hypatia | |
출생 | 350~370년경 |
동로마 제국 아이깁투스 알렉산드리아 | |
사망 | 415년 3월 (향년 45~65세) |
동로마 제국 아이깁투스 알렉산드리아 | |
직업 | 사서, 수학자, 철학자, 천문학자 |
학파 | 신플라톤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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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초의 여성 수학자로 널리 알려진[1] 학자이자 철학자. 고대 로마의 사서[2], 천문학자이기도 했다.종교적 광신에 맞서 문명과 이성을 보호하려 한 순교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정치 싸움에 휘말려 죽은 희생자에 가깝다.
2. 생애
정확한 출생 시점은 기록되지 않았으나 약 350~370년경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 테온(Θέων, Theon; 335~405)은 알렉산드리아 대학 수학과의 저명한 교수였고, 후에 대학 책임자가 되었다. 히파티아는 유년기를 무세이온(Μουσεῖον, Musaeum)[3] 연구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성장했다. 히파티아는 유년기부터 학습, 질문, 탐구의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서로의 학문을 공유하기 위해서 모든 문명국으로부터 학자들이 모여드는 세계적인 학문의 중심지였다. 테온의 딸로서 히파티아는 이런 자극적이고 도전적인 환경에 둘러싸여 있었고, 예술, 문학, 자연과학, 철학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균형 잡힌 교육을 받았다.당시 수학은 어떤 행성에 태어난 한 개인의 자취 같은 불명료한 문제를 계산하는 데 주로 이용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수학적인 계산을 통해 한 인간이 어느 날 정확히 어떤 위치에 있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천문학과 점성술을 하나의 과학으로 간주했으며, 수학은 과학과 종교를 결합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런 원리는 히파티아가 일찍이 교육을 받은 바 있었고, 더욱이 테온은 헬레니즘 세계에 알려진 모든 종교 체계를 가르쳐 주었다. 테온은 선생으로서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지고 있어 히파티아에게 축적된 지식을 전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식을 형성하고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식별력도 가르쳐 주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그는 딸이 종교에 대한 분별력을 가질 수 있도록 각별히 배려하였으며, 새로운 진리를 배척하는 어떠한 완고한 신앙도 히파티아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가르쳤다. 그는 히파티아에게 "무릇 모든 형식적이고 독단적인 종교는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이어서 자존심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라고 가르쳤다. "네가 생각하는 권리를 비축하여라. 왜냐하면 틀리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히파티아의 정신은 놀랍고 신속하며 잘 단련되어 있었다. 테온은 이러한 정신에 어울리는 건강한 육체를 가질 수 있도록 식이요법을 개발하였다. 그는 히파티아가 규칙적으로 연습할 수 있도록 일종의 부드러운 미용체조도 고안해냈다. 히파티아는 노 젓는 법, 수영, 승마, 등산 등을 배웠고 하루 일과 중 일정한 시간을 이러한 운동을 하는 데 할애하였다. 로마인에게 웅변술, 수사법 같은 예술은 사회적 품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한 개인의 성향을 드러냄으로써 타인을 감명시킬 수 있는 이 능력은 신으로부터 인간이 부여받은 위대한 재능으로 생각되었다.
테온은 딸 히파티아가 자신이 이미 규정해 놓은 '완전한 인간'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기 위한 하나의 준비 단계로 히파티아는 연설에 필요한 정규교육을 받았다. 미사여구를 시도하는 방법, 언어의 힘과 최면을 유도하는 힘, 음성을 적당하게 조절하는 법,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만들 정도의 부드러운 음성을 내는 방법에 관련된 수업이었다.
테온은 히파티아가 환경의 변화에 좌우되지 않기 위해 매 순간마다 아주 정확하게 히파티아의 생활을 감독하였다. 그러나 타인에 대해 지녀야 할 책임감조차 도외시하는 강력한 인간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쉽게 영향받고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의 마음은 쉽게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였다. 그리고 미사여구를 사용하는 것은 단지 화장을 하는 효과가 있을 뿐이며, 타인에게 영향을 미쳐 타인을 조종하는 것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그의 교육은 감수성이 강하고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여 언변이 뛰어난 스승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외국을 여행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왕족처럼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여행은 오랫동안 계속되긴 하였으나 연속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동안은 젊은 플루타르코스와 그의 딸 아스클레피게니아가 운영하는 아테네의 한 학교의 학생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여기서 수학자로서의 명성이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을 때, 그곳의 행정장관이 수학과 철학을 가르치도록 대학으로 초빙하였고 암모니우스, 히에로클레스, 그 외의 훌륭한 학자들이 가르쳤던 그 곳에서 강의를 하며 여생을 보냈다. 히파티아는 인기 있는 선생이었다. 그 시대의 가장 훌륭한 학자들이 강의실은 물론이거니와 집에도 종종 방문하였는데, 그곳은 도서관, 뮤지엄과 더불어 위대한 학문의 도시에 있는 가장 확실한 지성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고 역사학자 소크라테스[4]는 쓰고 있다.
히파티아는 마치 제사장처럼 여겨졌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로부터 온 열정적인 학생들이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히파티아는 디오판토스의 산술과 디오판토스가 고안한 기호에 관하여 강의하였다. 히파티아의 강의는 수학 자체로서, 그리고 호기심이 많은 히파티아의 마음을 자극한 순수하고 예민한 기쁨으로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2.1. 학자로서의 삶
수학에 관한 몇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10세기 말경의 그리스 문학사전 편찬자인 수이다스(Σουίδας, Suidas)는 몇 권의 책이 히파티아의 것이라 썼으나 이런 책들의 대부분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함께 완전히 파손되었거나 폭도들이 세라피스 신전을 약탈할 때 없어졌다. 히파티아의 연구는 단편적인 부분만 남아 있을 뿐이다. '디오판토스의 천문학적 계산에 관하여'는 히파티아의 저서 일부분이 15세기경 바티칸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디오판토스의 대수는 일차와 이차방정식을 주로 다루고 있다. 히파티아가 단 주석은 몇 가지의 다른 풀이과정과 자신이 최초로 시도한 상당수의 새로운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들은 히파티아의 연구업적이라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 외에도 디오판토스의 책을 대중화시킨 아폴로니오스의 원뿔곡선론에 대한 해설을 남겼다. 그러나 로마가 쇠퇴하고 혼란에 빠져들면서 원뿔곡선에 대한 흥미는 점점 시들해졌다[5]. 원뿔곡선에 대한 연구가 답보 상태였던 이유는 단순히 당시에는 이걸 실생활에서 이용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6]. 원뿔 곡선의 이론이 이후 과학 기술의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하게된 건, 17세기에 요하네스 케플러가 행성의 공전 궤도가 타원이라는 사실을 처음 밝혀내고 이를 수학적으로 입증한 이후부터다. 포물선이 실용적으로 쓰이게 된 것도 아이작 뉴턴에 의해 중력장 개념이 도입된 이후의 이야기라서, 그런 사실을 모르던 중세기의 과학자와 성직자들에게는 원뿔곡선의 개념만 알려졌을 뿐, 실생활에는 쓸모없는 재미있는 수학 상식 취급받았을 뿐이라서 연구가 정체된 것이다. 관측 기술의 미비로 인해 천문학이 그리 발달하지 못했던 당대의 과학 수준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수학자들은 히파티아 이후부터 17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곡선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별에 관련된 많은 연구자료가 들어있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체관측 규범인 알마게스트에 관한 해설서도 집필하였다. 그 뿐 아니라 아버지 테온과 함께 유클리드에 관하여 최소한 한권 이상의 책을 썼다. 이러한 연구 활동의 대부분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로 준비된 것이었다. 원뿔곡선에 대해 히파티아가 주석을 쓰고 난 후 수세기가 지나 데카르트나 뉴턴 그리고 라이프니츠 등의 연구가 나올 때까지는 수리과학에서의 발전은 더 이상 없었다.
2.2. 평가
동시대 사람들은 히파티아의 천재성에 대하여 대부분 서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코스, 니케포로스, 필로스토르기오스 등은 모두 히파티아와 다른 교파의 역사학자였으나 성품이나 학문을 찬양하는 데 인색한 법이 없었다. 히파티아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철학자로부터 여러 차례 구혼을 받았으나 히파티아는 "나는 진리와 결혼하였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수학자로서 유명한 것만큼이나 철학자로서도 잘 알려져 있으며 '무사 여신에게' 또는 '철학자에게'라고 주소가 쓰인 편지는 당연히 히파티아에게 배달되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온다. 히파티아는 '신플라톤주의'라고 불리는 그리스 사상을 추구하는 학파에 소속되어 있었다.
3. 죽음
3.1. 배경
서기 412년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테오필루스가 미처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지명하기도 전에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가 후계자로 가르치고 있던 조카 키릴로스(치릴로)와 부주교 티모시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사흘간에 걸쳐 거리에서 양측의 지지자들이 폭력사태를 벌인 후 키릴로스측이 승리하여 대주교직에 오를 수 있었다. 당연히 그 뒤에 상대측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를 폐쇄하는 등 일련의 보복이 행해졌는데, 이 때문에 히파티아의 제자들 중 한명이 키릴로스에게 이러한 행위를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414년에 키릴로스는 마찬가지로 티모시를 지지했던 유대교측을 압박하기 시작하고, 심지어 도시 내 유대교 회당들을 모두 폐쇄하고 유대인들을 추방하기까지 한다. 당연히 이러한 행위들은 당시 이집트 총독이던 오레스테스가 분노하게 만들었고[7], 이를 황제에게 보고하기까지 한다. 이에 키릴로스측의 지지자들은 폭동을 일으켜 오레스테스를 거의 죽일 뻔 했고, 이에 분노한 총독은 폭동의 주동자인 수도승을 고문하고 죽여버린다. 키릴로스는 이 수도승을 순교자로 포장하려 하는데, 종교 때문에 죽은 것도 아니고 일련의 폭력사태와 총독 살인미수 때문에 죽임당한 것이었으니 기독교 내부에서도 별다른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보다못해 나선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내 유력자들에 의해 키릴로스는 순교자 주장을 접고 오레스테스와 강제로 화해하게 된다. 물론 양쪽다 억지로 한 화해니 실질적으로 양측의 불화는 계속된다.[8]
3.2. 전개
히파티아는 오레스테스의 친구로서, 자주 조언을 해주던 사이였다. 그녀는 이교도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도 널리 존경받고 있었고, 신중한 처신으로 키릴로스와 오레스테스 양측의 분쟁에도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키릴로스측에게는 명성높은 그녀가 오레스테스와 친분이 있는 것이 눈엣가시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그녀에 대해 여러가지 소문과 유언비어를 통해 명성에 흠집을 내려 했다. 예를 들어 그녀가 이교도 마녀로서 오레스테스와 기독교 유력자들에게 마법을 써서 조종함으로서, 오레스테스와 키릴로스 사이의 불화를 조장하고 있다는 식이었다.[9]
결국 415년, 이를 사실로 믿은 베드로라는 기독교인을 주축으로 한 집단이 집으로 귀가하는 히파티아를 마차에서 끌어내어 머리카락을 다 뽑고 벌거벗긴 후 날카롭게 간 굴 껍데기 혹은 깨진 그릇 조각으로 피부를 벗겨내는 고문을 하여 죽였고, 시체를 갈가리 찢어 불태워 버렸다.
3.3. 여파
제국 전체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는데, 알렉산드리아 의회는 키릴로스에게 경고를 보내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자를 보내었다. 이에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조사단을 보내 키릴로스가 이 일에 연루되었는지 여부를 조사했고, 416년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와 함께 칙령을 발해 파라발라니[10]의 지휘권을 키릴로스에게서 빼앗아 오레스테스에게 주고, 파라발라니의 숫자와 행동범위를 제한했다.[11]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오레스테스를 포함한 반(反)키릴로스 진영에서 히파티아는 대체불가능한 존재였고, 그녀의 사후 급속도로 무너지게 된다. 다음해인 417년에 키릴로스는 이러한 칙령을 다시 뒤집어 파라발라니의 지휘권을 되찾았으며, 수년 후에는 알렉산드리아 의회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게 된다.[12]
3.4. 기타
명백한 증거는 없으나, 키릴로스가 이 살해를 직접 지시했을 거라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다. 설사 직접 지시하지 않았더라도, 그가 조장한 일련의 흑색선전이 계기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13]이 사건으로 오레스테스는 완전히 정치적인 영향력을 상실했지만 알렉산드리아인들은 키릴로스를 비롯한 알렉산드리아 기독교 공동체들을 비난했다.
5세기 기독교 교회 역사가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는 히파티아의 죽음이 정치적 동기에 의해 이뤄진 것이고, 그녀의 이교도 신앙은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또한 그녀가 오레스테스와 자주 만났던 것이, 기독교 군중들에게 오레스테스와 키릴로스의 불화를 조장하는 원인이 그녀라는 흑색선전이 먹혀든 원인이었다고 여겼다. 그리고 기독교 군중에 의해 이뤄진 이러한 끔찍한 살해를 가리켜, '이러한 종류의 학살과 분쟁, 처리방식이 허용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정신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라고 서술했다.[14]
키릴로스는 교부로서 가톨릭, 정교회, 루터교와 성공회의 성인이다. 그는 현재 기독교 교리에 있어 떼놓을 수 없는 성인이고, 가장 중요한 성인 중 한 명이지만 이교도와 유대인에 대한 강경한 모습으로 많은 적을 만들기도 했다.
4. 여담
- 영화 아고라가 바로 히파티아의 이야기. 다만 히파티아의 사망 당시 나이는 추정 40대 중후반 혹은 그 이상이었지만 주연배우인 레이첼 바이스는 39살이었다. 영화에 대한 평가는 제법 좋은 편. 사실 히파티아의 죽음을 그린 그림에서도 히파티아가 젊게 묘사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 이해하지 못할 구상도 아니다.
- 라파엘로의 작품 아테네 학당에 그려져 있는, 흰 옷을 입은 유일한 여성이 히파티아이다.
- 초기 기독교 순교자 전설의 주인공인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는 관련 자료가 미비하며 추정 생몰년, 인생사가 히파티아와 매우 유사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해롤드 데이비스 등의 신학자들은 성 카타리나의 전설이 히파티아의 인생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전설로 보고 있다.
- 앗! 시리즈 에도 등장한다. 여기에서는 히파티아가 먼저 기독교에 어그로를 끌었고, 그 결과 살해당했다는 식으로 왜곡되어 묘사된다. 그것도 공개 강연에서 기독교인 열 명을 사자 다섯 마리가 있는 우리에 던지면 몇 명이 남을까요?라는 식으로 떠들고 다녔다고.
- 굿 플레이스 시즌 4 12화에서 중요한 역할로 등장한다. 치디가 히파티아는 굿 플레이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15] 철학에 대한 토론과 질문을 하려고 하지만 그런 치디에게 "굿 플레이스에 너무 오랜 시간 있으면서 뇌가 둔해졌고, 이젠 거의 아는게 없다"'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주인공들이 굿 플레이스를 변화시키게 하는 역할을 한다. 참고로 배우는 프렌즈의 피비 부페이 역으로 유명한 리사 쿠드로인데, 작중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피비와 그냥 판박이다.[16]
- 로마 디펜스에서는 주인공의 등장으로 인한 나비효과의 수혜자가 됐는데 아버지와 도서관의 후원자 문제로 논의하면서 하늘에서 후원자가 뚝하고 떨어지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뜬금없이 찾아온 친위대에게 호노리우스 황제가 도서관을 후원하기로 한 사실을 통보받으며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후원자를 보게되어 놀라게 된다. 그 뒤 길도의 반란 때 알렉산드리아가 폐허가 되면서 도서관의 수리가 필요하다고 스틸리코에게 요청하게 되는데 마침 많은 학자들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게르마니아로 가는게 어떻겠냐는 스틸리코의 제안을 받고 게르마니아로 가게 된다. 그 뒤 마리우스와 만나 도서관을 아그리피넨시스로 옮기는 대신 게르마니아 경제 개발 계획을 도와주기로 합의를 본다. 추가로 길도의 반란이 규모가 커진 것에 대한 수혜자이기도 한데 규모가 커진 반란으로 알렉산드리아가 초토화되면서 원역사에서 히파티아를 죽게 만든 키릴로스가 그 난리통에 휘말려 죽었다는 작가의 간접적인 언급이 있었기 때문이다.[17]
- 만화가 홍승우의 과학 만화 <빅뱅 스쿨> 4권에서 피타고라스, 아르키메데스에 이어 현대로 구출되는 세 번째 과학자다. 그녀가 구출되는 데에는 빅뱅 스쿨의 여학생 세 명, 노소심[18], 나정의, 공조아의 역할이 컸다. 5권에서는 어릴 적부터 동양(주로 동아시아와 인도, 이슬람 세계[19])의 과학에 관해 궁금해했음을 밝히고, .네 번째로 구출된, 후한 시대의 명의 화타가 정다운을 비롯한 학생들과 시간 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다.
[1] 사실 역사(기록)상 최초의 여성수학자는 피타고라스의 제자이자 아내인 테아노이다. 테아노는 기원전 5세기경 활동했다.[2] 아버지 테온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마지막 관장이었다. 간혹 관장으로 아는 사람들도 있다.[3] 박물관이라는 뜻의 영단어 뮤지엄(Museum)의 어원이다.[4]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코스를 말하는것으로 우리가 잘아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와는 동명이인인 5세기경 교회 역사학자이다.[5] 기독교의 전파는 서로마 멸망 이후 혼란에서 헬레니즘 시대의 산물들을 보전하는 방패 역할을 했다. 키릴로스가 유독 근본주의 성향이 심했을 뿐이라서, 실은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인들도 그의 이런 행보에 어이없어했다.[6] 오늘날에도 단순히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자연과학에 대한 연구비 조달에 어려움이 생기거나, 역시 같은 이유로 우주 개발에 들어갈 비용을 전부 다른 용도로 전용해야된다고 개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이 있는 마당에, 전근대시대 유럽에서 자연과학에 대한 탐구는 비실용적이라는 이유로 아오안 취급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아는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이 크게 발전한 건, 그리스와 로마의 경제력이 크게 성장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중세 초기에는 로마 제국이 반토막나고 여러 이민족들이 대거 침략해오는 상황이라서, 새로운 자연과학 이론에 대한 연구를 지원해줄 여력이 없어서, 당시에 이런 지식을 가진 지식인이었던 기독교의 성직자와 헬레니즘 철학자들이 필사의 힘을 다해서 실전될 위기에 놓인 수많은 논문과 도서들을 보전하는데 급급했다.[7] 기독교인이기 이전에 로마 제국의 총독인 만큼, 특정 민족이나 종교 신자를 차별대우해서 폭동이 일어나게 만든 주모자들을 달가워했을 리가 없다.[8] Watts, Edward J. City and school in late antique Athens and Alexandria. Vol. 41. Univ of California Press, 2008, pp.196-198.[9] Watts, 2008, p.198[10] 주교 휘하의 행동대 같은 존재로, 폭력사태 때 앞장서는 집단이다.[11] Watts, 2008, p.200[12] Watts, 2008, pp.198-200[13] Watts, 2008, p.200[14] Watts, 2008, p.199[15]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는 노예제도를 옹호한 죄로 배드 플레이스에 있다고 한다.[16] 웃긴 점은 굿 플레이스 세계관 내에서도 프렌즈라는 드라마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마이클이 프렌즈 얘기를 많이 한다. 작중 그가 젠 판사에게 굿 플레이스로 가는 사람들의 비율이 너무 낮다며 다른 프렌즈 멤버들은 몰라도 피비까지 배드 플레이스에 보낼 수 있겠냐고 열변하는 개그가 있는데 나름 복선이었을지도?[17] 정확히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이는 엄청난 비극이다라는 언급이었지만 삼촌인 주교도 죽은 와중에 키릴로스라고 무사할리 없다.[18] 본인 아빠에게 배운 승마 기술로 키릴루스가 보낸 수도사들과 기독교 광신자들의 무리 사이를 거침없이 통과하여 히파티아에게로 달려갔다.[19] 5권에서 중국 고대사를, 6권~8권에서 세종 시대까지 한국 전근대사 쪽을 다룬다. 그런데 다음 권인 9권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 시대를 다루는 것을 보아, 인도와 이슬람 세계의 전근대사 쪽은 아예 제외한 듯하다.9권이후로는아예출간이중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