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24 17:20:42

킴 캠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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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의 경우 임기가 중간에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역대 국왕 · 역대 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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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제19대 총리
애브릴 피드라 더글러스 "킴" 캠벨
Rt. Hon. Avril Phaedra Douglas "Kim" Campbell
PC[1] CC[2] OBC[3] QC[4]
파일:Kim_Campbell.jpg
<colbgcolor=#700F1E> 출생 1947년 3월 10일 ([age(1947-03-10)]세)
캐나다 자치령 브리티시컬럼비아 포트앨버니
국적
[[캐나다|]][[틀:국기|]][[틀:국기|]]
재임기간 제19대 총리
1993년 6월 25일 ~ 1993년 11월 4일
직업 정치인, 변호사, 작가, 외교관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학력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정치학 / 학사)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박사과정 / 중퇴)
서명 파일:킴 캠벨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소속 정당

[clearfix]

1. 개요

캐나다의 정치인이자 제19대 총리.

캐나다의 최초의 여성 총리이다.

2. 생애

브리티시컬럼비아주 포트앨버니의 스코틀랜드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또한 유일한 BC 출신 총리이기도 하다. UBC에서 정치학 학사를 취득했고 최초의 여학생 총학회장까지 역임한 그녀는 영국을 유학하고 돌아와 변호사로 일하면서 밴쿠버 교육청 이사를 역임한 바 있다.

1983년 BC 주의회에 BC 사회신용당[5]으로 출마하여 주의회에 입성하였으나 당대표와 낙태에 대한 입장차[6]로 인해 당을 나오게 되었으며 캐나다 진보보수당에 입당했다. 1988년 밴쿠버 센터에서 연방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브라이언 멀로니 총리의 최측근으로서 원주민부, 법무부, 국방부, 보훈부 장관을 거치며 주요 인사로 거듭났다. 장관으로서의 업적은 제법 상당한 편. 특히 법무장관 시절 1988년 무효화 된 낙태죄를 부활시키려는 시도를 했지만 하원에서 3표차로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원이 반대하는 바람에 실패한 적이 있다. 훗날 기밀해제된 자료에 의하면 캠벨 본인은 100% 프로초이스 인사였음에도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나선 편인데 멀로니 총리가 이를 시대착오적인 것 같다고 만류하는 편이었다고(...).[7] 이외에 재판 과정에서 빚어지는 각종 여성혐오적 관행을 일소하고 No means No에 입각한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했다. 오늘날 캐나다의 보다 개방적이고 성평등한 사회문화는 제도상으로 이 시절 씨앗이 뿌려져 크레티앵-마틴 총리 시절 기반을 다지고 하퍼-트뤼도 총리 시절에 결실을 맺은 것에 가깝다는 점에서 법무장관으로서의 캠벨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한 획을 그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브라이언 멀로니 내각의 장기집권에 따른 피로감과, 불경기로 인한 실업률 증가, 퀘벡 자치권 확대 논란, 낙태죄 논란과 결정적으로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고 선거를 얼마 남기지 못하고 사임하면서 총리직을 승계받았다. 사실 단 6월에 취임하고 10월에 선거를 치렀으며 공식적으로 12월에 퇴임하게 되었으니 그간 딱히 할 수 있었던건 없었고 취임하자 마자 선거운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초반에는 기대보다는 나은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지만, 자유당 당수 장 크레티앵의 안면마비 장애와 영어 실력을 조롱[8]하는 선거 광고를 내보냈다가 큰 역풍을 맞았다. 캐나다 진보보수당은 서부 지지세력이 캐나다 개혁당으로, 퀘벡 지지세력이 블록 케베쿠아로 쪼개지는 가운데 지지층이 증발해버리던 중 이런 광고를 내보내버린 것이었다. 결국 본인 포함 전부 낙선하며 156석이 2석이 되어버리며 간판만 남는 수준의 대참패를 겪었고, 킴 캠벨은 그렇게 정계에서 은퇴하게 된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엔 자서전 <Time and Chance>을 집필하여 베스트셀러에 올렸고, 1996년 로스앤젤레스 총영사로 임명되어 2000년까지 근무했다. 전직 총리에 대한 예우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되는가 싶어보이지만, 실제로는 유창한 러시아어를 바탕으로 러시아 대사라는 제법 무게감 있는 자리에 갈 수 있었지만 남편이 극작가로서 로스앤젤레스에서 일하는 김에 같이 가서 일하려고 얻은 일자리에 가까웠다. 크레티앵 총리 역시 광고에 대한 불쾌감과는 별개로 킴 캠벨에 대한 악감정은 없었던 모양.[9] 이렇듯 정계에서 오래 활동한 편이 아니어서 정무직 공무원의 연금 수령 자격도 없었다보니 허무하게 끝나버린 정치 커리어 이후의 삶을 위해 이것저것(...) 열심히 한 편이다. 메트로 밴쿠버 인근 지역구 보수정치인들을 지지하거나 각종 여성정치단체에서 활동하는등의 행보를 보였지만, 의외로 새로 창당한 캐나다 보수당에 입당하지는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에 대해 강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고, 피에르 푸알리에브르에 대해서도 거짓말쟁이이자 증오 선동꾼(a liar and a hate-monger)이라며 독설을 퍼부었다.

여러모로 극좌 진보정당과 보수정당이 합쳐 만들어진 진보보수당 체제에서 서부 캐나다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포기할 수 없었던 인물로, 멀로니와 함께 복잡한 캐나다 현대 보수정치 잔혹사를 상징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오늘날 우익 포퓰리즘 색채가 짙어진 보수당의 당원들은 캠벨을 자신들의 계보에서 지워버리고 싶어할만큼 흑역사 취급하지만, 오히려 자유당과 신민당 등의 여성 정치인들이 총리로서의 굴욕적인 말년에도 불구하고 법무장관으로서 남긴 유산을 본받자 주장하는 편이다.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협회 1980 - 1986 입당
정계 입문
브리티시컬럼비아 사회신용당[10] 1983 - 1988 1983년부터 1986년까지는 무소속 협회와, 1988년부터 2003년까지는 캐나다 진보보수당과 이중당적.

1988 - 2003 입당
정당 해산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3 - 현재 탈당

[1] King's Privy Council for Canada, Privy Counci(캐나다 추밀원)[2] Order of Canada,[3] Order of British Columbia,[4] Queen's Counsel,[5] 처음에는 사회신용이론을 바탕으로 한 정당이었으나 후엔 이름만 사회신용당일 뿐 보수정당으로 바뀜.[6] 사회신용당 출신 BC 주총리가 프로라이프였지만 캠벨은 프로초이스였다.[7] 28주차가 넘은 경우 산모의 목숨이 위험할 때에만 낙태를 허락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정신적 문제에 의한 사유도 인정해주는등 제법 유연하다못해 유명무실한 수준이어서 다른 나라, 특히 남쪽나라 바이블 벨트 기독교 보수주의의 시선에선 이조차도 사탄이 경악할 노릇(...)이었는데, 그 유명무실한 법안조차도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그 이후로 캐나다에서는 낙태죄를 재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없다.[8] 크레티앵은 영어 구사시 불어 억양이 다른 총리들에 비해 강하게 섞여있는 편이었다.[9] 애초에 크레티앵 광고 사건도 바쁜 선거 시즌에 킴 캠벨 등 보수당 인사들이 크레티앵에 대한 흔한 네거티브 광고를 한번 듣고 휙 넘겨버리는등 검토 과정이 부실해서 빚어진 해프닝일 뿐 작정하고 벌인 일은 아니었다. 더욱이 크레티앵은 샤를 드골 자유 퀘벡 만세 시절에도 현역이었던 노련한 정객이었기 때문에 이제 겨우 연방정치 5년차였던 40대 햇병아리 캠벨에게 대단한 앙심을 품을 이유도 없었다. 킴 캠벨이 법무장관 겸 검찰총장으로서 밀던 각종 여성정책에 대해서도 오히려 호의적이었다.[10] British Columbia Social Credit Par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