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 위대한 캐나다인 | |||||
<rowcolor=#FFF>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 2005년 캐나다의 공영TV인 CBC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The Greatest Canadian" 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토미 더글라스 | 테리 폭스 | 피에르 트뤼도 | 프레더릭 벤팅 | 데이비드 스즈키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레스터 피어슨 | 돈 체리 | 존 맥도널드 경 |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 웨인 그레츠키 | |
11위~5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루이스 리엘 | 장 바니에 | 스톰핀 톰 코너스 | 닐 영 | 피터 지조우스키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로미어 달레어르 | 스티븐 루이스 | 샤니아 트웨인 | 바비 오어 | 마이크 마이어스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무명용사 | 해롤드 A. 로저스 | 모리스 리샤르 | 아서 커리 | 넬리 맥크룽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노먼 베순 | 셀린 디옹 | 아이작 브록 | 짐 캐리 | 릭 핸슨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피에르 버튼 | 마이클 J. 폭스 | 고든 라이트풋 | 할 앤더슨 | 로라 세코드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어니 쿰스 | 테쿰세 | 마리오 르미외 | 브렛 하트 | 에이브릴 라빈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존 캔디 | 샌포드 플레밍 | 윌프리드 로리에 | 매리 맥스웰 | 장 크레티앵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레너드 코헨 | 존 디펜베이커 | 빌리 비숍 |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 | 릭 머서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500d0c, #700f1e 20%, #700f1e 80%, #500d0c)"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제1대 | 제2대 | 제1대2 | 제3대 |
존 맥도널드 경 | 알렉산더 매켄지 | 존 맥도널드 경 | 존 애벗 | |
제4대 | 제5대 | 제6대 | 제7대 | |
존 스패로 데이비드 톰프슨 | 매켄지 보얼 | 찰스 터퍼 | 윌프리드 로리에 |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제9대2 | |
로버트 보든 | 아서 미언 |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 | 아서 미언 | |
제10대2 | 제11대 | 제10대3 | 제12대 | |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 | 리처드 베드퍼드 베넷 |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 | 루이 생로랑 |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존 디펜베이커 | 레스터 B. 피어슨 | 피에르 트뤼도 | 조 클라크 | |
제15대2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
피에르 트뤼도 | 존 터너 | 브라이언 멀로니 | 킴 캠벨 | |
제20대 |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
장 크레티앵 | 폴 마틴 | 스티븐 하퍼 | 쥐스탱 트뤼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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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4년 1월 11일 ([age(1934-01-11)]세) |
캐나다 자치령 퀘벡주 셔위니건(Shawinigan) | |
국적 | [[캐나다| ]][[틀:국기| ]][[틀:국기| ]] |
재임기간 | 제20대 총리 |
1993년 11월 4일 ~ 2003년 12월 12일 | |
부모 | 아버지 웰리 크레티앵 어머니 마리 보이버트 |
가족 | 배우자 알린 크레티앵[1] 장녀 프랑스 크레티앵 데스마라 장남 허버트 크레티앵 차남 미셸 크레티앵[2] |
학력 | 라발 대학교 (법학 / B.A.) |
정당 | |
의원 선수[3] | 12 |
의원 대수[4] | 26, 27, 28, 29, 30, 31, 32, 33,[5]34, 35, 36, 37 |
지역구[6] | 생모리스 라플레슈[7] 생모리스[8] 부세주르[9] |
종교 | 가톨릭 |
신체 | 키 183cm |
서명 |
[clearfix]
1. 개요
제20대 캐나다 총리. 1993년부터 2003년까지 10년간 재임하였다.2. 생애
1934년 캐나다 퀘벡주 셔위니건에 위치한 프랑스계 캐나다인 가정에서 19남매 중 18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웰리 크레티앵은 제지공장 기계공으로서 장 크레티앵은 그다지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지 못하였고, 설상가상 12세 때 안면마비 증세로 장애인이 되었고 후일 이 장애는 그의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10]크레티앵은 성장하면서 퀘벡 주의 명문 대학인 라발 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하였으며 대학 재학 중인 1957년 결혼하고 1959년 대학을 졸업하며 자신의 고향 퀘벡주 셔위니건의 한 로펌에서 변호사로서의 인생을 시작한다.
3. 정치 경력
1963년 크레티앵은 캐나다 하원 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그의 정계 커리어를 쌓아나가기 시작한다.하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그는 1967년 레스터 피어슨 내각의 무임소장관을 역임하였고, 이어서 피에르 트뤼도 내각에서는 1968년부터 1974년까지 북부개발부 장관, 1974년부터 1976년,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재무부 장관, 1976년부터 1977년까지 산업통상부 장관, 1980년부터 1982년부터 법무부 장관,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에너지광물자원부 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피에르 트뤼도의 신임을 받았다. 그 후 트뤼도의 후임인 존 터너 내각에서도 외무부 장관과 부총리직을 역임하며 역량을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1990년, 캐나다 연방선거에서 패배한 존 터너를 대신하여 자유당 당수로 취임하였고 1993년 연방선거 승리를 이끌며 총리에 취임, 캐나다 최초의 장애인 출신 총리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3.1. 총리 시절
크레티앵은 총리로 취임하면서 재정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재정 긴축 정책을 실행하였으며 그 결과 크레티앵 재임 기간 내에 420억 달러의 적자를 해소하고 360억 달러의 채무를 상환하였으며 5년 연속 흑자 예산을 기록하게 된다.## 그리고 그 외에도 아동 복지 정책의 도입도 크레티앵 내각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퀘벡주의 분리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도 1995년 크레티앵 내각에서 이루어졌는데 퀘벡주가 분리 반대로 결론나자 명료성법을 입안시켰다.[11]대외 정책으로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개입하였고 9.11 테러 당시 알 카에다에 맞서 캐나다군을 파병하였으며 이라크 전쟁에 참전을 거부하는 대신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아프가니스탄에 미국의 요구대로 캐나다군을 파병하였다.
그리고 이외에는 중국과 관계협정을 체결하여 중국과의 경제 관계 개선에 주춧돌을 놓았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해서 1999년에는 반대하였으나 2003년에는 합법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2003년 12월, 폴 마틴과의 갈등 끝에 2004년 2월 퇴임 예정이었지만 2월 앞당겨 2003년 12월에 사임함으로서 장 크레티앵의 10년 집권은 종료되었다.
4. 총리 퇴임 이후
크레티앵은 퇴임 이후 2007년 6월 캐나다 훈장을 수여받고 2009년 7월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3 | 1963년 캐나다 연방 선거 | 생 모리스-라폴레슈 | | 16,358 (45.7%) | 당선(1위) | 초선 |
1965 | 1965년 캐나다 연방 선거 | 14,395 (44.1%) | 재선 | |||
1968 | 1968년 캐나다 연방 선거 | 생 모리스 | 13,895 (44.5%) | 3선 | ||
1972 | 1972년 캐나다 연방 선거 | 19,840 (56.7%) | 4선 | |||
1974 | 1974년 캐나다 연방 선거 | 20,465 (65.3%) | 5선 | |||
1979 | 1979년 캐나다 연방 선거 | 27,243 (71.1%) | 6선 | |||
1980 | 1980년 캐나다 연방 선거 | 27,356 (76.7%) | 7선 | |||
1984 | 1984년 캐나다 연방 선거 | 24,050 (58.9%) | 8선 | |||
1990 | 1990년 캐나다 연방 하원 보궐선거 | 보세주르 | 17,332 (51.5%) | 9선 | ||
1993 | 1993년 캐나다 연방 선거 | 생 모리스 | 25,200 (54.1%) | 10선 | ||
1997 | 1997년 캐나다 연방 선거 | 22,266 (47.3%) | 11선 | |||
2000 | 2000년 캐나다 연방 선거 | 23,345 (54.1%) | 12선 |
6. 여담
- 자크 시라크와 절친했으며 그의 재단인 호감 시라크의 명예 회원이다.
- 자신의 고향인 퀘벡의 분리주의자들과 유독 트러블이 많았는데, 이와 관해 두가지 사건이 있다. 한번은 크레티앵을 암살하려고 한 정신병자가 총리 관저에 침입한 사건으로, 크레티앵의 부인이 괴한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경호원을 불렀고 크레티앵이 문을 꼭꼭 닫고 숨어서 구사일생한 바 있다. 이때 크레티앵은 괴한과 마주치면 흉기로 휘두르려고 원주민들이 선물한 조각상을 꼭 붙잡고 있었다고 한다. 암살 미수범은 강경한 퀘벡 분리주의자였는데, 정신병이 참작되었고 크레티앵도 선처를 요청했기에 실형을 선고받지는 않았다. 이때가 1995년 퀘벡 분리 독립투표에서 분리파가 근소하게 패배한지 얼마 되지 않은때라, 캐나다 정계가 크게 뒤흔들렸다.
또다른 사건은 Shawinigan Handshake이라 불리는 사건인데, 이번에는 반대로 크레티앵이 가해자였다. 1996년 한 행사에 참석한 크레티앵은 퀘벡 민족주의자 겸 빈곤퇴치 운동가와 마주쳤는데 암살 위협때 일이 안좋게 떠올랐는지 그 사람의 목을 조르고 길바닥에 내동댕이쳐 이빨을 부러트렸다. 크레티앵은 이 일로 폭행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퀘벡 주 법무장관이 정치적 파장을 고려해 기소를 기각하면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으로 크레티앵은 오늘날까지도 캐나다인들에게 "최초로 국민을 암살하려고 한 총리"라고 웃음거리가 된다.[12] 이때 크레티앵에게 목졸린 남성은 퀘벡 민족주의자들의 영웅이 되어, 퀘벡의 주권을 주장하는 극좌정당 퀘벡 단결(Québec solidaire)의 후보로 2번이나 주의회 선거에 출마하기까지 했다.
- 캐나다 총리로 재직하며 온갖 기행과 웃긴 행동으로 유명하며, 이런 여러 일화 때문에 여러모로 현대 캐나다 총리 중에는 가장 인기가 많은 총리로 꼽힌다.[13] 물론 그다지 깨끗하지 못한 개인적인 스캔들도 많은 편이다.
- 현재 캐나다 보수당의 전신인 캐나다 진보보수당은 1993년 총선 당시 장 크레티앵의 안면장애를 비웃는(...) 인격모독성 TV 광고를 내보내는 짓을 저질러서 156석에서 2석으로 의석이 줄어드는 대참패를 당했다.[14] (#)
7. 저서
- Straight from the Heart (1985)
- My Years as Prime Minister (2007)
- My Stories, My Times (2018)
8. 어록
솔직히 말해 정치는 권력을 원하고, 얻고, 행사하고, 지키는 것일 뿐이다. (To be frank, politics is about wanting power, getting it, exercising it, and keeping it.)
[1] 1936년생. 1957년 결혼. 2020년 별세.[2] 입양하였다.[3] 하원[4] 하원[5] 1984년 당선, 1986년 사퇴.[6] 하원[7] 26-27대.[8] 28-33대, 35-37대.[9] 34대.[10] 실제로 장 크레티앵은 반대파들에게 안면마비 장애로 총리직을 잘 수행할 수 있겠냐는 정치 공세를 당했다.[11] 크레티앵은 퀘벡주 주민투표 이후 분리주의자들에 의해 암살 위협을 받기도 했다.[12] 크레티앵이 아직도 캐나다 국민들에게 인기가 좋아서 이런 유머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지 일국의 총리로서 민간인을 가격한건 꽤 부적절한 행동이다.[13] 피에르 트뤼도나 브라이언 멀로니도 존경받지만 크레티앵은 순수하게 친근감이 느껴진다는 여론이 많다. 빌 클린턴과 비슷한 셈인데, 둘의 정치적 방향성도 비슷했고 사적인 관계도 가까운지라 자주 비교대상이 된다.[14] 당시 캐나다 진보보수당이나 크래티앵의 반대 세력들이 크래티앵의 안면장애를 들먹이며 "이게 한 나라의 총리의 얼굴이냐", "연설도 제대로 못하는 저런 사람을 어떻게 총리로 세울 수 있겠냐"라는 식으로 쏟아내는 인신공격에 맞서 크레티앵은 "제가 입이 삐뚤어졌어도 보수당처럼 한 입으로 두말은 안합니다.(It's true, that I speak one side of my mouth. I'm not a Tory, I don't speak on both side of my mouth.)"라는 한마디로 여론을 제대로 반전시켜 버렸고, 총리로 당선될 수 있었다. 당시 인터뷰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