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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fff><colcolor=#23235A> | |||
출생 | 1932년 11월 29일 | ||
프랑스 파리 5구 | |||
사망 | 2019년 9월 26일 (향년 86세) | ||
프랑스 파리 6구 | |||
재임기간 | 제102대 총리 | ||
1974년 5월 27일 ~ 1976년 8월 25일 1기 | |||
1986년 3월 20일 ~ 1988년 5월 10일 2기[1] | |||
제22대 대통령[2] | |||
1995년 5월 17일 ~ 2007년 5월 15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373a3c,#ddd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ffff><colcolor=#23235a> 부모 | 아버지 벨 시라크[3] 어머니 마리 루이스 발렛 | |
배우자 | 베르나데트 시라크 | ||
자녀 | 슬하 3녀 | ||
학력 | 루이르그랑 고등학교 (졸업) 리세 루이르그랑 (프레파과정 / 학사) 시앙스포 (경제지리학 / M.A.) 국립행정학교 (졸업) | ||
종교 | 가톨릭 (세례명:야고보) | ||
신체 | 189cm | ||
의원 선수 | 6 | ||
의원 대수 | 3, 4, 5, 6, 7, 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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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제22대 대통령.정치인으로 활동하다 1995년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002년 재선에 성공하여 2007년까지 임기를 수행했다. 특이사항으로 재선 당시 프랑스 역사상 최다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그 속사정은 후술.
그랑제콜인 파리 정치대학(시앙스포 Sciences Po) (프랑스어:Institut d'Etudes Politiques de Paris)와 국립행정학교(에나 ENA) (프랑스어: 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을 졸업하고 고급공무원을 거쳐서 정계에 입문하였다.[4] 이후 농림부장관, 총리, 파리시장 등 다양한 요직을 거쳐 마침내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었다.
2. 생애
파리에서 은행원의 아들로 태어나 1954년 파리 정치대학(시앙스포 Sciences Po)를 졸업하였다.특이하게도 대학 시절에 공산당에 가입했었으며 공산당 기관지인 '뤼마니테'의 가두홍보원으로 일한 전력이 있었다.[5] 그래서 미국에 첫 방문을 했을때에는 까다로운 심문을 거치는 곤욕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조르주 퐁피두의 눈에 들어 비서실장이 되고나서는 공산당을 탈당했고 1967년 총선에 출마하여 당선된 이후로는 우파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한때 공산당 당원이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면서 스스로를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칭하기도 하였다.[6]
풍피두가 대통령이 되고나서는 농민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장관으로 이름 날린다. 이 유명세로 1974년 대선에 출마했지만 4위에 그쳤다.
낙선 후 총리에 임명되었는데, 이때는 2기 총리 재임기 때와 다르게 진보적인 정책을 다수 도입했다. 그러나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과의 갈등으로 총리직에서 사퇴했다. 1977년 지방선거에서 전국적으로 사회당과 공산당이 압승을 거두고 우파가 죽을 쑤는 가운데,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의 친구인 미셸 도르나노를 제치고 첫 직선 파리시장[7]에 당선되었다.
1986년 총선 승리로 프랑스 제5공화국 최초로 동거정부 총리가 되어 처음으로 내정에 실권을 가진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는데, 비슷한 시기에 전방위적 민영화를 추진했던 마가렛 대처도 못한 공영방송을 민영화하는 등 강경한 신자유주의 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와[8] 지지율이 엄청나게 떨어졌고, 1988년 대선에서 좌파 후보 프랑수아 미테랑한테 대패하였다.[9]
이후 와신상담을 노리다가 1995년 대선에서 같은 우파였던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를 제치고 2위(1위는 프랑스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를 차지하면서 결선투표에 진출하였고, 2차 선거에서 예상보다는 득표차가 적게 나왔지만 좌파의 대표 조스팽 후보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때는 총리 시절과 달리 사회격차의 해소와 지도주의적 노선에 기반한 경제정책을 내세우면서, 마거릿 대처와 존 메이저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앵글로색슨 초자유주의(Anglo-Saxon ultraliberalism)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기침체로 지지율은 날이 갈수록 떨어졌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샤를 드 골처럼 분위기 반전을 위해 1997년에 조기총선을 실시했으나 결과는 좌파가 대거 승리하면서 죠스팽이 총리가 되었고 우파가 원내 제2당으로 전락하며 시라크는 실권을 잃게 되었다.[10] 이후 프랑스 국민의회의 임기와 대통령의 임기를 맞추고, 선거 시기를 일치시켜 동거정부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2000년 프랑스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임기를 기존 7년에서 5년으로 단축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5년간 외교에만 전념하다 2002년 대선에서 총리 시절의 경제정책에 힘 입은 죠스팽과 접전을 벌였다. 예상대로 시라크는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했는데, 좌파 후보들의 난립으로 좌파성향 유권자들의 표가 분산되면서 죠스팽이 3위로 밀려나고 극우파인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이 2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하는 충격적인 결과가 벌어졌다. 결국 결선투표에선 중도파와 좌파들까지 오로지 르펜을 막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시라크에 몰표를 던지면서 압도적인 득표율(역대 최다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더 자세한건 2002 프랑스 대선 참고.) 직후 이어진 2002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도 우파 연합이 승리하여, 대통령으로서 강력한 권한을 쥐게 되었다.
여기에 여세를 몰아 3선까지 도전하고자 했으나 너무 많은 나이가 걸림돌로 작용하였다.[11] 특히나 2005년에 야심차게 밀어붙였던 유럽헌법안이 부결되면서 레임덕이 극심하게와 결국 2007년도에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였고, 이후 니콜라 사르코지 당선자에게[12] 대통령직을 넘기면서 재임 12년만에 퇴임하였다.
퇴임 후 4년만에 과거 파리 시장으로 재직 당시 측근 28명을 시청 직원인 것처럼 위장해 월급을 준 혐의로 기소돼 파리 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2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TF1과 유착 의혹을 받기도 했다. 1987년 TF1을 기업 부이그에게 불하하는 방식으로 민영화한 장본인이 바로 당시 총리였던 자크 시라크 본인이었기 때문. 그래서인지 TF1은 한동안 자크 시라크를 적극 지지하는 논조를 펼쳤다고 한다.
2014년 이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2014년도의 모습을 보면 이미 이 시점부터는 그렇게 건강하지 않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2.1. 사망
2019년 9월 26일 목요일에 프랑스 파리 6구에서 사망했다고 부인이 밝혔다. 프랑스 상하원에서는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대국민 특별담화를 통해 시라크 전 대통령을 '자유롭고 위대한 프랑스인'으로 추모하였다. 이외 국민연합의 마린 르펜, 불굴의 프랑스의 장 뤽 멜랑숑 등 생전 그의 정적이었던 정치인들 역시 애도를 보탰다.
30일. 파리의 생 쉴피스 성당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원래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이뤄지나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이후 아직 복구 중인 상황이라 시라크 전 대통령의 자택 근처인 생 쉴피스 성당에서 국장이 치러지게 됐다.
이 날을 '국가애도의 날'로 선포했고 학교나 공공시설에서도 1분간의 추모 묵념이 진행됐다.
이날 장례식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드 하리리 레바논 총리,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등 전현직 세계 정상들도 참석했다.
유해는 지난 2016년 사망한 딸 로랑스가 묻혀 있는 파리 남부 몽파르나스 묘지에 가족장 형식으로 안장된다.
사망 이후 평가가 높아지고 있는 편인데, 후임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고만고만하게 평가가 좋지 않은 탓[13]에 프랑스 정치권의 마지막 거인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3. 기타
러시아 대조국공훈훈장 1급 수훈자이다.과거사 문제에 있어서는 정치적 위치가 우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보수주의자라는 본인의 말처럼 나름 반성하는 모습을 꽤 보여주었다. 물론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한 사죄는 없었지만,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무려 100년만에 공식적으로 당시 정부와 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또한 비시 정부에서 일했던 과거가 있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이 2차 대전 시기 비시 정부의 홀로코스트 사건이었던 '벨디브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정부 사과를 거부했던데 반해, 시라크는 집권하자마자 바로 '벨디브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외규장각 문제에서도 반환에 회의적이던 당시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한국 측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라고 촉구했다고 한다.
2002년 프랑스 혁명 기념식 당시 개선문 앞에서 사열행사를 하던 중, 극우파 청년단체 소속인 막심 브뤼네리에게 암살당할 뻔한 적이 있다. 당시 막심은 40~5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서 22구경 소총을 발사했으나, 초탄이 불발된 뒤 곧바로 군중과 경찰에 의해 제압당하면서 시라크는 암살을 피할 수 있었다. 존 F. 케네디가 암살당했을 당시 상황과 비슷해서 유럽 사회에서 한동안 큰 충격을 몰고 왔다.[14]
히로시마 원폭 투하 50주년을 태평양 핵실험으로 기념해 1996년 이그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여성 편력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미테랑을 저리가라 할 정도로 엄청난 여성 편력을 자랑한다. '샤워 포함 5분'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파리시장 재임 시절부터 숱한 여성들과의 염문을 뿌리는 등 역대 프랑스 대통령의 화려한 사생활 계보를 충실히 이어나갔다. 개인의 자유를 신봉하는 프랑스인들은 대통령의 사생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정적인 미테랑이 시라크의 애인을 가로챘다는 낭설도 퍼졌을 만큼 두 사람은 정계 밖에서도 치열한 대결을 벌였다. 이를 두고 혹자는 "미테랑과 시라크는 누가 더 많은 애인을 갖는지 경쟁을 벌였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 시라크는 훗날 '비밀로 간직한 애인이 많이 있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일본 문화를 좋아했다고 알려져있는데, 특히 스모를 굉장히 좋아하는걸로 유명했다고 한다. 아예 반려견 이름을 '스모(Sumo)'라고 짓고 스모를 비하한 니콜라 사르코지와 말싸움을 할 정도였다.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회고하길 둘이 만날때마다 시라크가 스모와 일본 문화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그의 화려한 여성 편력과 맞물려 공교롭게도 일본인과의 사이에 혼외자가 있다는 유력한 설까지 계속 흘러 나왔다. 실제 시라크는 거액이 예치된 일본 은행 계좌를 가지고 있었는데, 나중에 이 혼외자인 딸과 함께 생활하기 위한 자금이라는 추측까지 나왔다. 한편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독일을 본받으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전 NATO 사무총장인 영국의 조지 로버트슨(George Robertson)의 권유로 해기스를 먹었고 이후 2005년 G8 정상회의에 앞서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독일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난 러.독.프 정상회담에서 "영국이 유럽 농업에 기여한 것은 광우병 밖에 없다. 음식이 형편없는 나라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면서 영국 요리와 영국인들을 싸잡아 비난해 버리는 심각한 외교적 결례를 저지른 바 있다.[15] 이 당시 영국이 유럽연합(EU) 헌법, 예산안, 공동 농업정책, 이라크 전쟁, 2012 올림픽 유치 등 주요 현안에서 사사건건 프랑스의 발목을 잡고 있어 불편한 심기를 표출한 것으로 해석되지만, 당연히 영국인들과 영국 언론은 그의 발언을 크게 비난했다. 이것도 모자라 동시에 "핀란드 다음으로 영국 음식이 형편없다"고 발언해 가만히 있던 핀란드의 어그로를 끌기도 했다.
4.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 - 1962 | - |
1962 - 1968 | - | |
1968 - 1976 | - | |
1976 - 2002 | - | |
2002 - 2007 | - |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1차 득표수 (득표율) | 2차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7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코레즈 3구 | 15,289 (42.81%) | 18,522 (50.74%) | 당선 (1위) | 초선[16] | |
1968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19,593 (54.37%) | - | 당선 (1위) | 재선[17] | ||
1973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19,667 (51.73%) | 당선 (1위) | 3선[18] | |||
1977 | 프랑스 지방 선거 | 파리 | 222,395 (26.12%) | 394,628 (49.54%) | 당선 (1위) | 초선 | |
1978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코레즈 3구 | 23,616 (54.29%) | - | 당선 (1위) | 4선 | |
1981 | 프랑스 대통령 선거 | 프랑스 | 5,225,848 (18.00%) | 낙선 | [19] | ||
1981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코레즈 3구 | 20,466 (50.60%) | 당선 (1위) | 5선 | ||
1983 | 프랑스 지방 선거 | 파리 | 526,101 (61.59%) | 68,525 (51.65%) | 당선 (1위) | 재선 | |
1986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코레즈 | ??? | -[20] | 당선 (1번) | 6선 | |
1988 | 프랑스 대통령 선거 | 프랑스 | 6,063,514 (19.94%) | 14,218,970 (45.98%) | 낙선 (2위) | [21] | |
1988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코레즈 3구 | 27,375 (58.05%) | - | 당선 (1위) | 7선 | |
1989 | 프랑스 지방 선거 | 파리 | 369,231 (53.60%) | 169,625 (51.35%) | 당선 (1위) | 3선 | |
1993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코레즈 3구 | 25,951 (60.68%) | - | 당선 (1위) | 8선 | |
1995 | 프랑스 대통령 선거 | 프랑스 | 6,348,375 (20.84%) | 15,763,027 (52.64%) | 당선 (1위) | 초선[22] | |
2002 | 프랑스 대통령 선거 | 5,665,855 (19.88%) | 25,537,956 (82.21%) | 당선 (1위) | 재선 |
보다보면 국회의원(하원)과 파리시장 경력이 동시에 적혀있는데, 이는 한때 프랑스에선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겸임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총리직도 겸임이 가능해서 1986년엔 프랑스의 하원의원 겸 파리시장 겸 국무총리라는 대기록도 세웠다. 지금은 법 개정으로 겸직이 불가능하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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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선거 |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198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1995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
관련 정치인 | 프랑수아 미테랑 ·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 리오넬 조스팽 · 장마리 르펜 · 니콜라 사르코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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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거정부[2] 안도라 공동 영주 겸임.[3] 1898 ~ 1968.[4] 좌우파를 막론하고 프랑스 정치인들의 전형적인 코스이다. 그랑제콜 인맥들의 고위직 독점과 엘리트주의는 프랑스 내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5] 반대로 전임 대통령(이자 시라크가 총리 시절 상관)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은 젋었을 적엔 극우였다가 후에 좌파로 전향하였다.[6] 하기야 미테랑의 경우도 좌파 정치인이었지만, 핵실험 반대 시위를 하는 그린피스 선단을 공격시켜 사망자까지 나오게 하는 등 우파적인 면모도 있었다.[7] 그 이전까지는 파리시장직이 오랜 시간 동안 폐지된 상태였다.[8] 미테랑은 본인은 (상대적으로 사고 날 일이 적고 본인의 권한 내에 있는) 외정 관련에만 집중하면서 이미지를 관리했고, 내정 관련으로는 시라크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하게 두어서 안 좋은 건 시라크에게 죄다 떠민 측면도 있었다.[9] 시라크도 산전수전 다 겪은 구렁이과 정치인이었다지만, 미테랑에겐 유독 약했다. 1988년 대선 당시에도 TV 토론장에서 기선 제압을 하겠다고 "지금 우리는 대통령과 총리가 아닙니다. 당신과 나는 대등한 후보로 이 자리에 나와서 유권자들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을 미테랑 씨로 부르겠습니다."라고 선빵을 날렸다가 미테랑이 당신 말이 맞소, 총리!(Vous avez tout à fait raison M. le Premier Ministre)라고 반격하는 바람에 본전도 못 찾은 게 대표적.[10] 이런 상황은 프랑수아 미테랑 시절부터 문제가 되어왔는데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때까지만 해도 항상 보수쪽에서 대통령과 의석과반을 동시에 차지해 문제가 없었으나, 1986년에 처음으로 좌파 대통령 미테랑과 우파 총리 시라크로 이루어진 좌우동거 정부가 탄생하게 되면서 정치계의 고민이 깊어졌다. 미테랑은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회당 중진을 총리로 임명하려 했지만, 문제는 여소야대라는 특성상 범우파가 불신임안을 던지면 삼일천하로 끝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미테랑은 우파 시라크를 총리로 임명했고, 각료 선임을 비롯한 내치의 전권을 시라크에게 넘겨주었지만, 핵발사권 등 군사, 외교 분야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 선언하면서 국방장관와 외무장관의 임명권을 행사했다. 이후 이것이 일종의 규칙이 되었다.[11] 임기 말에는 고령으로 인해 보청기를 착용한다는 현지 보도가 나왔는데, 대통령실에서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만큼 고령에 의한 건강 관련 우려가 많았다.[12] 원래는 시라크의 정치적 제자였으나, 1995년 대선에서 에두아르 발라뒤르 후보를 지지하면서 시라크의 눈밖에 났고, 1997년 총선에서 낙선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후 시라크의 영원한 오른팔 알랭 쥐페 전 총리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선거권을 박탈당하면서 어부지리로 UDF 후보 자리를 따냈지만, 시라크는 1995년의 배신감이 가시지 않았는지 이후에도 2012년 대선에서는 프랑수아 올랑드, 2017년 대선에서는 에마뉘엘 마크롱 지지를 선언하며 대놓고 사르코지를 골탕먹였다.[13] 니콜라 사르코지는 부패, 프랑수아 올랑드는 무능으로 재선 도전에 실패했고, 에마뉘엘 마크롱은 극우 진영의 집권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중도좌·우파의 선택받아 재선에 성공했지만 국민적 인기는 높지 않다.[14] 20년 뒤 발생한 아베 신조 피살 사건에서 경호의 실패로 아베가 끝내 암살당하자 이 사건이 잠시 재조명되기도 했다. 아베 역시 초탄이 불발됐지만 경호원들이 총격범을 제대로 제지하지 않고 어리둥절하는 사이 총격범이 발사한 2번째 탄에 맞아 사망했기 때문이다.[15] 물론 이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마이크가 꺼진 줄알고 저지른 일종의 뒷담화였으나 마이크가 켜져있는 바람에 그대로 언론에 노출이 되고 말았다.[16] 1967. 5. 7. 고용담당 장관 임명으로 사퇴[17] 1968. 8. 12. 장관 임명으로 사퇴[18] 1973. 5. 6. 장관 임명으로 사퇴[19] 1차 투표 3위[20] 비례대표제[21] 1차 투표 2위, 2차 투표 2위[22] 1차 투표 2위, 2차 투표 1위[23] 국회의원-총리직 겸임은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