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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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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화[1] 1485년에 그려진 잔 다르크 그림.[2]
파일:external/www.schola-sainte-cecile.com/Sainte-Jeanne-dArc-patronne-secondaire-de-la-France.png 파일:external/www.travellinghistorian.com/jeanp1ppr.jpg 파일:external/982cd88e38ced4510c4b87b4bb1a07739179e786ed54233063128d5bf3e1df5e.jpg
1505년에 그려진 잔 다르크 그림 기도하는 잔 다르크,
페테르 파울 루벤스 , 1620
샤를 7세의 대관식의 잔 다르크,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854
이름 한글 표기 잔 다르크
프랑스어 Jeanne d'Arc
라틴어 Ioanna Arcensis / Ioanna de Arc[3]
영어 Joan of Arc
이탈리아어 Giovanna d'Arco
중국어 聖女貞德[4]
일본어 ジャンヌ・ダルク
아명 자네트(Jeannette)[5]
출생 1412년 1월 6일[6], 프랑스 왕국
사망 1431년 5월 30일 (만 17세), 잉글랜드령 프랑스 루앙[7]
시복 1909년 4월 18일, 교황 비오 10세
시성 1920년 5월 16일, 교황 베네딕토 15세
축일 5월 30일
수호 걸스카우트, 순교자, 여군, 포로, 프랑스
부모 자크 다르크 / 이사벨 로메[8]
형제자매 피에르 다르크, 자크 다르크, 장 다르크, 카트린 다르크
국적 프랑스 왕국
업적 프랑스 왕국 구원

1. 개요2. 생몰년3. 표기4. 생애
4.1. 어린 시절4.2. 위기에 처한 프랑스4.3. 나라를 구하다4.4. 시련기4.5. 체포와 재판, 죽음4.6. 명예회복
5. 사후의 평판과 영웅화, 시복, 시성6. 잔 다르크와 여성7. 군인으로서의 잔 다르크
7.1. 잔 다르크에 대한 논란, 정말로 군사적 천재인가?
7.1.1. 보충 - 잔 다르크는 군사적 천재가 맞다
7.2. 전쟁에 끼친 영향
8. 잔 다르크가 과대포장된 인물이다?9. 잔 다르크에 대한 다른 전설
9.1. 잔 다르크의 외모9.2. 대한민국에서의 잔 다르크
10. 어록11. 잔 다르크 신드롬12. 대중문화와 잔 다르크
12.1. 별도의 문서가 존재

1. 개요

15세기까지 이어진 백년전쟁에 활약한 프랑스의 구국 영웅이자 가톨릭 성인[9], 그리고 프랑스수호성인[10] 중의 한 명이다.[11]

프랑스와 영국이 영토의 지배권을 두고 수십년 동안 싸움을 반복하던 도중 프랑스가 궁지에 몰렸을 때 오를레앙에서 종교적 신념으로 일어난 평민 소녀. 잔의 기적적인 활약으로 전세가 역전되었고, 결국 프랑스가 백년전쟁에서 이기고 영국을 대륙에서 구축해내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잔다르크는 영국군에 사로잡혔으며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프랑스로부터 구명도 받지 못하고 영국에서 마녀로 판결받아 억울하게 화형되었다. 사후 명예가 복권되었으며 프랑스의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2. 생몰년

생몰년은 1412년 1월 6일(추정) ~ 1431년 5월 30일. 생일로 알려진 1월 6일은 주님 공현 축일인데, 잔 다르크가 샤를 7세를 왕위에 올린 것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또는 잔 다르크에게 신성함을 부여하기 위해 사람들이 날짜와 이야기를 지어냈을 수도 있고, 대충 그 무렵에 태어났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가톨릭유럽에서는 부모들이 자식들의 생일을 실제 날짜보다는 가까운 가톨릭 축일 날짜로 기억하는 예가 흔하였다. 생일이나 나이를 사소하게 생각해서, 공문서의 나이조차 라틴어로 대략(vel circlter, ver circa)이란 말을 덧붙여 썼다.[12] 잔이 태어날 무렵 밤에 들이 몇 시간 동안 날개를 퍼덕이며 울었다는 전설이 있다. 1412년이라는 생년도 종종 의심을 받는데, 1407년이라는 설도 있지만 잔이 스스로 재판정에서 19살쯤 되었다고 말하였으므로 1411년에서 1412년쯤에 태어난 것은 확실해 보인다. 1407년설은 후술된 공주 설과 얽히기도 한다. 프랑스는 1412년 1월 6일을 공식 탄생일로 보고 2012년에 600주년 기념식을 하는 등 후하게 대접한다.

3. 표기

흔히 알려진 'Jeanne d'Arc'는 현대 프랑스어식 표기이며, 중세 프랑스어로는 'Jehanne Darc(주안 다르크)'라 썼다.[13] 영어로는 조운 오브 아크(Joan of Arc)라고 쓴다. 잔(Jeanne)은 라틴어 이름인 요안나의 프랑스어식 표기. 이외에 패색이 짙던 프랑스군에게 전환점이 된 오를레앙에서의 첫 승리를 기려 '라 퓌셀 도를레앙(la Pucelle d'Orléans, 오를레앙의 처녀)'이라고도 불린다. 어린 시절에는 잔이 아니라 자네트(Jeannette)라고 불렸다고 한다. 다르크 외에도 타르트(Tart), 다르트(Dart), 데이(Day) 등 다른 성씨를 썼다는 말도 있다. 사서에 따르면 동레미 남쪽의 아르캉바루아(arc-en-barrois)에서 태어나 성을 다르크(d'arc)로 썼다는 소리도 있다. 현재 통용되는 이름으로 확정된 것은 사후 25년이 지나서의 일로, 재심 재판 공문서에 johanna darc로 기록됐다. [14] #

한국에서는 구한 말에 약안으로 불렸다가 일제강점기와 1950년대에는 '잔 닥크', '짠 닥크', '짠 다크'로 불리었고,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는 '잔 다크'라는 표기가 많이 쓰여졌다.

1980년대 이후로도 '쟌 다르크', '잔느 다르크' 등 다양한 표기가 있지만 현대 국어 표준어 표기로는 '잔 다르크'로 통일한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녀 요안나 아르크'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가톨릭 세례명으로 쓰일 땐 '요안나'이다.

4. 생애

4.1. 어린 시절

잔 다르크는 알자스-로렌 지방에 속한 동레미(Domrémy)[15]라는 프랑스 동부의 시골 마을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양치기 아버지 자크 다르크와 어머니 이사벨 로메의 5남매 중 넷째 또는 막내[16]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애칭인 자네트로 불렸다는 얘기가 있다.

아버지 자크 다르크는 1380년생으로, 딸이 화형당한 이후 비통해하다가 2개월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1440년 무렵까지 살았다. 잔이 계시를 받아 집을 떠나겠다고 할 때에는 자신의 아들한테 "잔을 돌에 묶어놓고 물에 던져야 한다"는 말까지 했지만, 랭스의 대관식 때 잔과 재회했을 때는 그런 감정이 다 풀렸던 듯하다.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감히 구국의 영웅한테 감정대로 화를 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애초에 그런 말을 한 것도, 자신의 딸이 전쟁에 나가 위험하고 끔찍한 일을 당할까봐 염려하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을 테니 말이다.

어머니 이사벨 로메는 남편보다 3년쯤 일찍 태어난 1377년생으로 추정된다. 결혼 전 로마성지순례까지 다녀올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고 하며[17][18] 자녀들에게도 가톨릭 교리와 신앙을 열심히 가르쳤다. 잔이 순교한 이후로는 오를레앙으로 이사를 가서 그 곳에서 살았다. 1457년까지 살았으니 당시는 물론 지금 기준으로도 꽤 장수한 셈이며, 덕택에 자신의 딸을 죽인 원수인 영국군이 프랑스 땅에서 완전히 쫓겨나고[19] 딸이 명예를 회복하는 것까지 보고 갔다. 잔의 명예회복 재판을 위해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교황에게 탄원했다고 하며 파리에서 열린 재판에도 참석했다고 하고, 그 모정을 기리기 위해서인지 잔의 고향인 동레미에는 이사벨의 동상도 있다.

잔의 형제로는 자크, 피에르, 장이라는 세 오빠와 카트린이라는 누이가 있었다. 카트린은 잔의 언니인지 동생인지 분명하지 않으며[20] 잔이 활약할 당시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는 것만 확실하다. 피에르는 여동생 잔을 따라 전장을 누비고 다녔으며, 잔의 마지막 전투에도 동행해서 같이 붙잡혔는데, 잔과 달리 무사히 풀려났다. 사실 잔과 달리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굳이 심문해서 죽여야 할 이유가 없어서 무사히 풀려났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잔의 집안에 대한 묘사는 서로 엇갈린다. 가난한 소작농 집안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의 학습만화 및 위인전에 나오지만, 실제로는 지방의 부농이며 동레미의 말단 관리[21]였다는 설이 유력하다.[22] 물론 그렇게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고, 끼니 걱정을 하지 않는 정도. 집안 생활은 검소했다고 한다.

잔 다르크가 위인전에 나오는것 처럼 시골 출신의 평범한 소작농 출신이 맞다면 대다수의 농부 아이들이 그랬듯이, 잔 역시도 부모의 농사일과 가축 돌보기, 바느질요리 등의 집안일을 돕는 평범한 소녀였다. 다만 보통 아이들과 다른 점은,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신앙심이 아주 독실했다는 점. 그리고 대다수의 농부들이 문맹이었고 잔 다르크 또한 문맹이었다. 이 문맹이었다는 점 때문에 이후 잔 다르크의 업적이 하느님의 은총을 입었다는 심증의 근거로 채택되고 있다.

4.2. 위기에 처한 프랑스

한편 잔이 살던 당시는 백년전쟁의 막바지로 전황은 프랑스에 대단히 불리했으며[23], 왕이 되어야 할 도팽(왕세자) 샤를은 대관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 그가 왕세자라 자칭하기는 했지만, 아버지인 샤를 6세가 그를 호적에서 파버리고 잉글랜드 왕 헨리 5세를 프랑스 공주와 결혼시켜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으로 추대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샤를은 잔존 아르마냑파와 스코틀랜드의 도움에 힘입어 프랑스 남부에서 여전히 적법한 왕세자로 인정받고 있었고, 북프랑스를 장악한 잉글랜드와 부르고뉴는 이를 토벌코자 하였으나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같은 해에 사망하고 갓난아기인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이 되면서 정국이 어수선해져 본격적인 남하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전쟁은 장기전, 약탈전 위주로 변하였고 서로 자기 영역권 내에서 기반을 닦는 데에 치중하고 있었다.

한편 전쟁의 여파는 잔 다르크가 살던 동레미 마을에도 들이닥쳐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이 동레미 마을에 쳐들어와 약탈하고 불을 지르는 일들이 발생하였고, 잔 다르크의 가족을 포함한 동레미 주민들은 그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인근 마을 뇌샤토[24]로 피난해야 했다. 그리고 동레미는 샤를 7세의 아르마냑파를 지지하는 마을인데 비해 잉글랜드와 부르고뉴파를 지지하는 마을이 근처에 있어 동레미와 그 인근 마을 청년들이 서로 패싸움을 벌이는 일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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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혼란이 지속되던 와중 1425년, 불과 13세의 잔 다르크에게 성 미카엘, 성녀 마르가리타, 성녀 카타리나의 모습과 함께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랑스를 구하라"는 목소리에 처음에는 당황해서 거절했으나 그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1428년, 마침내 16세의 나이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할 것을 결심하였다.[25]

이 부분에 대한 현대 무신론적 역사학의 관점은 이렇다. 중세인들의 사고방식은 당연히 현대인들과 다르다. 이들은 기적이나 하느님의 음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민감했다. 현대인들에게는 당연한 현상도 이들에겐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26] 실제로 중세인들은 모든 사물에서 기적을 보았다. 잔 다르크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했을 때, 샤를의 궁정과 이후 잔이 받은 종교재판은 그것이 하느님의 음성인지 사탄의 음성인지 여부를 검증하려 했을 뿐, 음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잔의 체험은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잔 생전의 유럽천지는 하느님의 섭리가 만물을 움직이며 그 권능이 성인들을 움직여 이적을 보여주고 있다고 믿는 세계였다.

정신의학에서는 잔 다르크에게 환각, 환청 등의 조현병 증세가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조현병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군대를 지휘해서 승리로 이끌 수 있나 이상할 수도 있겠으나, 일반의 통념과 달리 조현병 증상을 가지고도 각종 전문직에서 문제 없이 일하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있다.

또한 잔 다르크의 성녀 이미지 어필이 본인이 지휘권을 잡고 통솔하는데 있어 유리하는데 작용했었던 점, 실제로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른 실제 잔 다르크의 성격상은 가슴이 이끄는데에 충실한, 열혈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고무시켰던 인간형이 아닌 냉철하고 지성미 있고 박력있는, 머리를 앞세워 행동하는 냉철한 인간형에 가까웠단 점을 들어 잔은 마냥 신앙심에 이끌렸던게 아니라, 오히려 그 점을 철저하게 이용한 것이 아니냐라는 말도 나오곤 한다. 그러나 당시는 민중 신앙이 뜨거울 때라 잔의 신앙심은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고 잔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켰고 전쟁 중에도 가톨릭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했고 신앙심이 깊었기에 시성될 수 있었다. 그리고 문맹의 평민 소녀가 어떻게 제정신으로 자신에게 천재적인 군사적 능력이 있는지 알며 목숨을 걸고 성녀 코스프레를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4.3. 나라를 구하다

결심을 굳힌 잔은 곧바로 보쿨뢰르 지방의 영주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에게 찾아가서 시농 성에 머무르고 있는 도팽 샤를을 알현하게 할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거절당했으나, 잔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곳에 머물러 지냈다.

영주는 잔이 마녀라고 의심하였기에 구마 의식을 할 수 있는 사제를 보내 시험해 보았으나, 오히려 잔은 그를 반갑게 맞아들여 고해성사를 하며 그 의심을 풀게 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끈질긴 요청에 장 드 메스와 베르트랑 드 폴뤼니를 비롯한 기사들은 잔의 뜻에 동조했고, 결국 영주는 샤를에게 연락을 취한 다음 잔을 시농으로 보내게 된다. 그곳으로 가려면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이 점령한 지역을 지나가야 했는데, 시농까지의 거리는 무려 435 km로,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인 325 km보다도 더 먼 것이다. 시작부터 그런 어려운 조건이 있었으나, 아무런 신변의 이상 없이 무사히 도착한다.

그러나 샤를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해서 자신의 시종에게 화려한 옷을 입힌 다음 자기의 자리에 가게 하고, 초라한 옷을 입고 구석에 숨어서 잔을 불러냈다. 그런데 변장한 시종을 한번 보고 곧바로 외면한 다음 샤를을 찾아내서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래도 마녀의 속임수라는 주장이 측근들에게서 계속해서 나오자, 다시 푸아티에로 보내서 성직자들의 심문을 받게 했다. 물론 잔은 거짓 없는 언변으로 이 심문에도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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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잔 다르크에게 신통력이 있다고 판단한 샤를은 잔 다르크에게 일군을 주고 질 드 레, 라 이르, 장 돌롱 등의 유능한 기사들을 딸려주어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도록 출병시켰다. 당시 오를레앙은 루아르강의 요충지로서 잉글랜드군에게 포위당한 상태였다. 잉글랜드군의 계획은 오를레앙을 함락시킨 뒤 루아르강을 건너 대번에 샤를의 본거지인 부르주까지 내려쳐 긴 전쟁을 끝내고자 했던 것인데, 오를레앙 함락이 오랫동안 지체되어 양쪽이 서로 모두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출발 전에 기적 같은 일화가 있었는데, 잔은 "천사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트 카트린 드 피에르부아 성당의 제단을 파보면 검이 있을 겁니다."라고 했는데, 정말로 그 곳에서 검을 찾아내어 자신의 지휘용 검으로 삼았다. 오래되어 녹슬은 검이었지만 한 번 닦아내자 새 검처럼 되었다고. 곧바로 오를레앙을 구원하러 간 잔 다르크는, 현지 사령관 장 드 뒤노아의 홀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람들을 설득해 군대를 조직하여 싸웠다.

한편 오를레앙에 입성할 때도 기적같은 일화가 있었다. 잔 다르크가 군사들과 함께 오를레앙 성으로 입성하려면 성 앞을 가로지르는 큰 강을 건너야만 했다. 그러나 바람이 잔의 군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불거나 또는 바람이 불지 않아,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잔 다르크가 기도를 올리자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리하여 어려움 없이 잔의 군사들은 강을 건너 오를레앙에 무사히 입성할 수 있었다.???:도독! 동남풍이 붑니다!!![27]

떠도는 말 중에 있는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 전투엔 참전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며, 영어와 프랑스어 위키피디아에서 오를레앙 전투 항목이나 잔 다르크 항목 어디를 봐도 잔 다르크가 참전하지 않았다는 소리는 없다. 오히려 전장에서 심각하게 눈에 띄는 순백의 갑옷과 옷을 입고 선두에서 싸웠으며[28] 잉글랜드군을 차례차례로 패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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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429년 5월 오를레앙을 해방[29]한 잔 다르크는 한때 잉글랜드에 충성 서약을 하고 트루아 조약을 지지해서 프랑스 왕실의 의심을 사던 리슈몽 백작이 이끌던 군대를 만나 그에게서 "네가 성녀라도 두렵지 않고 마녀라면 더 두렵지 않다." 하는 말을 들었으나 결국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 이어서 파타이 전투에서 숫적 열세에도 적장 탈보트[30]를 포로로 잡으며 잉글랜드군을 무찔렀고, 루아르 전역[31]을 이끌며 루아르 강변에 주둔하던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을 연달아 격퇴했고, 여러 교량[32]을 확보하였다.

당연하지만 이때 프랑스군은 포로로 잡은 잉글랜드군 중에서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포로들은 전부 몰살시켰다고 한다. 이 내용은 다른 것도 아니고 잔 다르크 위인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물론 잔 다르크 본인이 직접 학살 명령을 내린 건 아니어서 가능하면 학살을 자제시켰고, 오히려 전장에서 죽어가거나 부상당한 잉글랜드군을 직접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기도 했다. 보장시 성에서는 패잔병들을 보자 각자 소지품을 챙기고 가도록 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 그리고 포로 학살이라는 부분에서 잔 다르크가 개입했다고 해도 비판받을 부분이 아니다. 사람들 '포로를 죽인다는 건 잔인한 행위다!'라는 시각을 갖게 된 것은 불과 수십 년도 채 되지 않았다. 포로를 사람답게 대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약이 처음 나온 것이 1864년이며, 현재의 인권 개념이 담긴 협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9년에 나온 4차 협약인데, 현대에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수두룩하다.[33] 대인배의 전형이자 비기독교인임에도 당시 중세에서 인정받았던[34] 살라딘리처드 1세와의 교섭이 실패하자 기독교 포로들을 학살했으나, 당시에 이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포로는 승자의 취득물이며 따라서 사로잡은 이들이 어떻게 처리하든 상관 없다는 개념이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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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가 이끈 프랑스군의 진격로[35]

잔다르크의 진격로는 매우 비범해서, 지금도 종종 무슨 의도로 저런 진격로를 짠걸까에 대한 갑론을박이 생기곤 하는데, 저 진격로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협공을 받기 정말로 좋은 루트다. 때문에 샤를의 측근을 비롯해 잔의 동료들도 이 계획을 뜯어 말렸는데, 놀라운 건 정작 가보니 행군 내내 눈을 씻고 봐도 잔의 말대로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을 찾기 힘들었다는 것이다.[36]

잔의 대우회기동이 절묘하게 먹혀든 이유는 간단하다.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은 잔이 파리로 오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잉글랜드-부르고뉴 군대의 대부분은 파리 인근에 모여 있었다. 그런 예상을 한 이유도 정말 간단하다. 지도를 보면 딱 봐도 오를레앙 바로 북쪽에 파리가 있다. 잔이 파리에 가지 않은 이유도 더더욱 간단한데, 파리는 센강에 위치한 생루이섬-시테섬을 중심으로 발달한 요새도시다. 손쉽게 함락할 수 있을 턱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잔이 랭스를 함락시킨다면?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연결이 차단됨은 물론, 측면을 빼앗긴 잉글랜드군은 파리에 손발이 묶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인적, 물적 자원이 월등한 프랑스로서는 말 그대로 물량 어택만 하면 된다. 그렇다고 오를레앙과 랭스, 트루아가 잉글랜드로서 공격하기 만만한 도시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사실 저 계획이 성공한 시점부터 백년전쟁은 잉글랜드의 패배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37]

5차례 거듭된 승리[38]로 랭스[39]까지 진격한 잔 다르크는 샤를이 대관식을 거행할 수 있게 해 주어[40] 그를 프랑스의 왕 샤를 7세로 만들었다. 샤를 7세는 잔의 공로를 인정하여 소원대로 고향 마을 동레미에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기 전까지 동레미는 조세 면제구역이 되었다.

4.4. 시련기

하지만 영광은 거기까지였다. 이후 잔 다르크와 잔의 수행자들은 프랑스 전역을 돌며 소(小) 영주나 국민들이 새로운 프랑스 왕 샤를 7세에게 돌아올 것을 호소했고 그것은 그런대로 먹혔으나 이는 왕실에게 양날의 칼로서 다가왔기 때문이다. 즉, 잔 다르크의 성녀 타이틀을 보고 프랑스 왕실을 지지한 사람들인 만큼 잔 다르크의 말 한 마디에 프랑스 왕실을 흔드는 내부의 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령 자크리의 난처럼 농민반란이 일어날 경우 농민 출신인 잔이 그들에 동조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게다가 왕실로부터 의심받는 리슈몽 백작을 잔이 신뢰하고 있었음은 샤를 7세파에겐 눈엣가시 같은 조건 및 설정이었다. 게다가 잔 다르크가 이전에 보드리쿠르에게 "프랑스 왕국은 왕세자의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 속하며, 주님께서 왕에게 맡긴 것에 불과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해석 방식에 따라 샤를과 그 측근들에게 있어서는 대놓고 표현은 못하더라도 내심 불편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즈음 샤를 7세 파의 주교 등이 잔 다르크가 갑옷 위에 입은 금실로 짠 옷과 말 안장 밑을 장식한 비단으로 만든 천 등을 가지고 사치[41][42][43]를 문제 삼기도 하는 등 서서히 잔 다르크와 프랑스 왕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게다가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 전투 및 곧바로 이어진 랭스의 진격처럼 공격적인 전략과 신속한 공세를 취했는데 이는 대관식 이후 비용이 많이 드는 전투를 통한 승리보다는 협상과 조약 등으로 이득을 취하려 하는 왕실과 상반되는 입장이었다. 물론 잔 역시 협상을 시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저 부르고뉴에 협력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샤를은 몇 주만 기다리면 파리를 바치고 항복하겠다는 부르고뉴의 제안에 낚이는 삽질을 하고 만다. 그래서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의 원군이 파리에 들어오도록 시간을 벌게 해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걸 알아차린 잔 다르크는 샤를을 설득하여 생드니 등 파리 주변 지역을 탈환한 다음, 1429년 9월 8일 성모 마리아의 탄생 축일[44]에 마침내 파리의 생 토노레 성문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을 물리치며 성문을 열고 맞아주리라는 잔의 기대와는 달리, 파리 시민들은 잔을 여자의 모습을 한 괴물, 마녀, 창녀, 탕녀[45]로 욕하면서 입성을 거부하며 오히려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과 합류하고 말았다. 결국 전투가 벌어지고 잔 다르크는 허벅지에 화살을 맞으면서도 지휘를 멈추지 않았지만 공성전이 조금씩 장기화될 듯하자 불과 이틀만에 냉랭해진 왕실의 지원 부족으로 퇴각하였다.

물론 샤를 7세가 영지를 저당잡힐 정도로 프랑스 왕실의 재정난은 당시 상당한 수준이기는 했지만 파리 함락이 성공할 경우 잔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경우를 두려워해서 일부러 이른 날짜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부르고뉴인이 쓴 연대기 <파리의 부르주아의 저널>에 따르면, 파리 시민들은 당시 잔 다르크가 군대를 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성당으로 가 기도를 올리거나 집에 들어가 문을 닫고 숨거나 무기를 나르는 등 잔 다르크와 맞설 준비를 했다고 한다. 잔 다르크도 이러한 파리 시민의 반응에 열받아서 "저녁 때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힘으로 들어가서 인정사정 안 보고 모조리 다 죽인다."고 윽박질렀다고 하는데 당시 부르고뉴파가 잔 다르크에 대해 적대감을 가져서 과장하거나 왜곡해서 썼을 수도 있고 설령 파리를 함락시켰다고 해도 그 전이나 그 후의 일을 생각하면 학살이나 약탈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이 연대기는 잔 다르크의 화형 모습도 묘사했는데 딱히 적대감을 드러낸 건 아니지만 다른 증언들과 달리 잔 다르크의 화형대 위에서 십자가를 찾는 등 경건한 모습은 의도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생략했기 때문에 명예회복 재판 당시의 기록과 증언처럼 교차검증 하거나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잔 다르크의 업적이 그리 큰 영향력을 지속하지 못했으며 잔을 이단자로 몰아넣은 재판이 합법적이었고 공정하다가 얘기하는 등 부정적인 인식을 표현하는 영국의 역사가 줄리엣 바커조차도 자기 저서에 화형 당시 모습에 대해선 십자가를 손에 쥐고[46] 예수의 이름을 외쳤다는 표현을 썼으므로 화형 당시에 십자가를 쥐고 예수의 이름을 외친 일화 자체는 사실인 듯 하다.

이후 잔 다르크를 반대하는 국왕 측근 조르주 라 트레무유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라샤리테 전투에 나섰다가 물자 지원을 못 받으며 또 실패, 생피에르르무티에를 탈환하고 부르고뉴의 기사 강도들을 토벌하는 일 외에는 이렇다 할 승전을 올리지 못하면서 프랑스 왕실에서는 잔 다르크의 성녀 역할에 대해 서서히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듯 보인다. 결국 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와 휴전을 하면서 잔의 뜻에 반대함을 대놓고 드러냈다. 일단 겉으로는 공로를 치하하며 잔과 가족들에게 귀족의 칭호를 주긴 했지만 그리 큰 봉토나 병사를 거느릴 권한도 없는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운 자리를 주었다.

사실 샤를 7세는 이전부터 잔 다르크를 껄끄러워 하고 있었다. 중세에는 잔 다르크처럼 자신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주장한 것 자체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이 무렵 서양에서 왕이 되려면 형식적이게나마 교황의 승인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오직 교황만이 신성을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홀연히 나타난 잔 다르크가 앞으로의 왕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는 교황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논란이 일기에 충분했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가 진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는지 확신할 수 없는데 마지못해 선택한 상황에서, 섣불리 교황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파리를 비롯하여 잉글랜드와 부르고뉴가 점령한 지역을 공격해야 한다는 잔 다르크와 달리 샤를 7세는 전쟁을 계속할 의지가 없었다. 되도록이면 전쟁을 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서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외교는 힘의 논리로 통한다는 것을 샤를 7세는 몰랐던 것이다. 그는 조용히 끝내고 싶었다. 한편으로 전쟁으로 잔 다르크의 명성이 계속 올라간다면 역으로 자신의 왕권이 추락할 것을 염려했을지도 모른다.

생피에르 르무티에를 함락시켰을 당시, 프랑스 병사들이 약탈하려고 하자 엄하게 이를 금지시키고 주민들을 지켜주었으며 (링크) 스코틀랜드인 병사가 약탈한 송아지 요리를 자신에게 내놓자(또는 그가 약탈한 식품을 먹은 걸 알게 되자) 먹지 않고 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때렸다는 설도 있다.) (1 링크 2) 또한 휴전기간 동안 부르주에서 빈민들을 구제하는 선행을 베풀었다.

다만 잔 다르크가 약탈을 금지시켰고 포로를 보호했다고 하는 등 선행 사례 대부분은 사후 명예회복 재판 당시 증언이나 그 이후 전설에서 미담으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적당히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사실 잔 다르크가 참여한 전투에 민간인 약탈과 학살이 발생한 적이 있기는 하다. 잔 다르크가 자르조라는 마을을 함락시킨 다음에 포로와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고 마을과 성당까지 약탈당했다는 사례인데 (링크) 일부 경우는 심지어 잔 다르크의 위인전에도 내용이 실렸다. 물론 잔 다르크가 관여되지 않은 투로 말하지만 말이다. (링크)

일단은 잔 다르크가 이걸 지시했거나 직접 약탈에 참여했는지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잔 다르크 스스로는 약탈 자체에는 찬성하지 않은 듯 하다. 다만 이게 사실일 경우라도 잔 다르크의 군사들에 대한 영향력과 통제력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던 듯 보인다. 즉 약탈과 학살에 잔 다르크가 관여하지 않았을 경우 잔 다르크의 지휘력 등 실질적인 능력이 있는지에 여부가 논란이 될 수밖에 없어 진퇴양난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민간인들이 죽은 경우 해당 웹사이트에도 간접적으로 표현되었듯이 당연히 잔 다르크가 직접 학살하라고 명령 내린 게 아니라 대포로 성을 공격하는 와중에 빚어진 참사로 보인다.

만약 잔 다르크가 직접 학살과 약탈에 관여했다면 훗날 잔이 재판을 받을 때 언급되었거나 피해자나 관련된 민간인 증인이 나왔을지도 모르는데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문제가 우선시되긴 하지만 재판하는 측에서 결정적인 도덕적인, 법적인 약점으로 물고 늘어졌을 찬스였는데도 거의 얘기가 나오지 않고 상리스 주교의 말을 훔쳤다는 정도의 내용으로만 추궁받은 정황을 보아 직접 관여했을 가능성은 적은 듯하다.

잔 다르크도 프랑스군의 간부에 속한 이상 군사들의 약탈과 학살 등 민간인과 포로들이 비극적인 운명을 맞은 일에 대한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중세시대에 인권이 현대보다도 훨씬 부족할 수밖에 없고 현지에서 보급을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인에 대한 약탈이 당연시된 시대이긴 했지만 말이다. 재판에서 언급이 거의 없던 이유도 잉글랜드군조차도 약탈을 당연시해서일 수도 있다.

한편 이 웹사이트에 따르면 잔 다르크가 민간인 약탈에 관여한 사례는 없고, 약탈한 물건을 쓴 사례는 적이 쓰던 검을 빼앗아 쓴 거라고 하는데 이건 현대 전쟁에서도 당연히 여기는 전리품 획득이다. 역사가 스티븐 웨슬리 리치, 레진 페르노드, 낸시 골드스톤 등은 "잔 다르크가 약탈을 금지했다"고 자신의 저서에 밝히고 있다. (링크 1 링크 2 링크 3)

4.5. 체포와 재판, 죽음

1430년 5월 23일 휴전한 사이에 다시 힘을 키운 선량공 필리프[47] 휘하의 부르고뉴파 군대가 콩피에뉴에 침입하자 잔 다르크는 왕실의 무관심 속에 대략 200명에서 400명으로 추정되는 자기 휘하의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급파, 부르고뉴군을 기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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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는 이들을 물리쳤지만 증원군 6천 명이 나타난 뒤 상황이 역전되어 성으로 후퇴하면서 후방을 방어해야만 했다. 잔은 자신이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자신의 병사들을 최대한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하지만 잔이 들어오기 전에 성문과 연결된 다리가 끌어올려져 고립되었고[48], 리니 백작 소속의 병사가 쏜 화살에 맞은 뒤 옷을 잡혀 낙마당하면서 포로로 잡힌다. 훗날 지원군이 뒤늦게나마 오면서 콩피에뉴의 방어에는 결과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잔 다르크 본인에겐 치명적인 상황을 맞은 것이다.

리니 백작은 포로로 잡은 잔이 탈출을 시도하자[49] 더 굳게 가두는 한편 자기 집안의 여자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해주는 등 정중히 대접도 했다. 이때 잔 다르크와 가까이 지내던 리니 백작의 이모 '잔'[50]은 잔 다르크에게 친절했는데 조카에게 "잔 다르크를 잉글랜드에 넘기지 마라. 이 말을 듣지 않으면 영지를 상속하지 않겠다."고 경고 섞인 설득을 했으나 불행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해 9월에 사망했다.

한편 리니 백작은 샤를 7세에게 전형적인 중세 유럽식 포로 처리법대로 "몸값을 내고 잔 다르크를 데려가라"고 제의했지만, 왕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샤를 7세에게서 잔의 정치적인 용도는 이미 다 사라져 버린 후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체포당하는 과정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왕의 측근들이 콩피에뉴 전투 당시 체포되도록 배신 혹은 방관했다는 말도 있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리니 백작은 1만 리브르 트르누아(Livre tournois)[51]의 거액을 받고 잉글랜드 측에 잔 다르크를 넘겨버린다.[52]

파리로 호송된 잔 다르크는 당시 잉글랜드파 및 부르고뉴파에 소속되어 있던 파리 이단 심문관들에게 넘겨져 이단 재판을 받았다. 흔히 잔 다르크가 마녀 재판을 받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이단 재판이었다. 이 재판을 위하여 코숑 주교[53]가 이끄는 무려 70여 명의 이단심문단이 만들어졌으나 잔 다르크의 혐의를 입증하거나 자백을 받아내는데 실패했다. 주교 이하 신학 전문가 70명이 달려들었지만 말 그대로 일자무식인 시골 소녀 한 사람에게 말빨로 발린 셈이다. 1대 70이라는 수적인 열세, 재판 성립부터 과정까지 당시 기준으로도 말도 안 되게 잔 다르크에게 불공평했던 상황이었던 것은 물론, 건강까지 악화된 상태인 등 모든 면에서 잔에게 극도로 불리한 조건이었음에도 말이다.

이 재판의 특이한 부분은, 바로 첫 번째 재판은 공개재판으로 했었는데, 해당 재판에서 얼마나 심하게 잔 다르크에게 발렸는지 다음 재판부터는 비공개 재판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재판 과정의 자세한 기록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으며, 논리정연하고 침착한 대응으로 인해서, 해당 내용에 의거해서 잔 다르크가 정신병을 가지지 않았다는 유력한 증거로서 사용되고 있다.

잔 다르크는 "검과 깃발 중에 어느 것이 더 좋냐"는 질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을 피하고 싶어서 깃발을 들었으며, "한 번도 사람을 직접 죽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만약 제가 은총의 상태에 있지 않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만약 제가 은총의 상태에 있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계속해서 은총을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은총을 받았다면 함부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고 몰고 갔을 것이고 반대로 은총이 없다고 말하면 저주에 들렸다고 몰아갈 의도로 파놓은 함정이었지만 도리어 종교재판관을 당황하게 만든 것이다.

또 "미카엘 대천사에게 털이 있냐", "천사가 옷을 입었냐" 등등 천사의 외형에 관한 질문도 함부로 외형을 논하면 이단으로 몰릴 만한 질문이나, 오히려 상대에게 외형에 대해 역으로 논하게 만드는 답변을 했다. 글을 전혀 모르는[54], 즉 수사학에 대한 지식을 구하기 매우 힘든 상태인 어린 소녀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던 신부들과 추기경들의 악의적인 추궁을 물리친 건데, 현대적으로 비유하자면 무학의 미성년자가 변호사 한 명 없이 혈혈단신으로 당대 최고의 재판관과 검사를 상대로 재판을 대등하게 벌이는 정도이다.

그 일부를 직접 살펴보자. 다음은 실제로 코숑 주교를 비롯한 재판관들이 던졌던 질문과 그에 대한 잔 다르크의 답변을 간추려서 재구성한 것이다.
문. 주님의 기도를 이 자리에서 외워, 그대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임을 증명하라.[55]

답. 주교 예하께서 저의 주님의 기도 암송을 들을 만큼 독실한 신자임을 신앙고백하여 먼저 입증하세요.

문. 다른 성직자들을 불러서 암송하게 하겠다.
답. 저에게 질문하신 주교 예하께서 직접 하셔야 합니다.

문. 넘어가겠다. (...)

문. 법정에서 항상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하는가?
답. 저는 언제나 진실을 이야기할 것이지만, 필요하지 않은 부분에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문. 천사의 목소리를 얼마나 자주 듣는가?
답. 제가 필요한 때에 못 들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문. 그대가 목격했다는 천사들이 옷을 입고 있던가?
답. 주님께서 그에게 옷을 입힐 능력이 없다고 믿으시는 건가요?

문. 성 미카엘의 몸엔 털이 나 있던가?
답. 그럼 밀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문. 성녀 마르가리타는 프랑스어로 말을 하던가?
답. 성인들이 잉글랜드의 편에 서 있지 않은데 왜 영어로 말을 하겠습니까?

문. 그분께서 잉글랜드를 미워하신단 말인가?
답. 저로서는 하느님께서 잉글랜드인을 미워하는지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분께서 잉글랜드인들을 프랑스에서 쫓아내시리란 것만은 압니다.

문. 천사들의 앞에서 순결을 맹세했던데, 만약 그대가 결혼하면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거라 보는가?
답. 그것은 지금으로선 저도 알 수 없으나, 저는 우리의 주를 믿습니다.

문. 천사들이 그대가 심판받을 것이라고 미리 위험을 경고해주진 않던가?
답. 제가 무슨 위험에 처해 있나요? 천사들의 목소리는 재판하는 동안 제가 자유로울 것이라 말했습니다. 저의 것이 될 천국을 위해, 저의 순교에 대해 불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문. 지금이라도 도망칠 생각은 없는가?
답. 문이 열려 있으면 나가야지요. 그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셨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문. 왜 남자의 옷을 입고 다니는 금기를 저질렀는가?
답. 옷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일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문.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낱 소녀인 그대에게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냈다고 생각하는가?
답. 그 한낱 소녀를 쓰는 것이 그 분의 기쁨입니다.

문. 그대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답. 제가 만약 은총의 상태에 있지 못하다면 하느님께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기도할 것이며, 은총을 받고 있다면 계속 그 상태에 머무르게 하시기를 기도드릴 것입니다.

문. 피고가 행한 일에 대해 교회가 내리는 결정에 승복하며 순명하겠는가?
답. 저를 보내신 주님과 동정녀 성모 마리아와 천국의 모든 성인들의 뜻에 순명하겠습니다. 저는 교회를 사랑하지만, 당신들은 저를 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제 말과 행동은 모두 주님과 그분의 천사들에게만 호소할 뿐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를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문. 교회의 결정에 불복하겠다는 말인가?
답. 여러분, 제가 보기엔 주님과 교회의 뜻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신들입니다.

결국 이렇다 할 혐의를 입증해내지 못한 코숑 주교는 마지막으로 잔 다르크에게 남장 혐의를 추궁했다. 죄라고 절대 할 수 없는 전혀 말도 안 되는 이유지만 괴상하게도 당시에는 여성이 남장을 하거나 남성이 여장을 하는 일은 성경에 위배되는 종교적 범죄였다. 이에 잔 다르크는 "순결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잔의 재판 이전에 순결을 지키기 위해 남장을 한 여성이 무죄 판결을 받은 사례가 이미 있었으므로 잔의 주장은 정상적인 재판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러나 재판 자체가 교회법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만 예를 들자면 먼저 종교재판의 판사 노릇을 하려면 일종의 자격증 같은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코숑은 그런 거 없었다.[56]

또한 잔 다르크에게 불리한 증거나 증언이 나오지 않았다면 재판을 열 수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측은 일단 재판부터 열고 보라는 지령을 내려보냈고, 잉글랜드 측은 70명에 달하는 법률 고문들의 도움을 받으며 재판에 임했지만 잔 다르크 측에 유리한 증인이 1명도 없었다. 잔은 이것을 알아차리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이 또한 교회법을 어기는 일이었음은 당연.

불리한 상황에 처해진 잔은 교황청에 항소를 신청했지만[57] 재판정에서는 이를 저지했다. 게다가 잔에 대해 재판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잔의 고향 동레미로 조사관으로 니콜라 바이이라는 사람을 보냈는데 잔에 대한 나쁜 소문이나 증거를 전혀 얻지 못하고 바이이가 돌아오자[58] 코숑은 그에게 화를 내고 욕을 퍼부으며, 여행 경비[59]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잔이 이미 푸아티에의 종교심문에서 문제없음을 환기킨 성직자 니콜라 드 우프빌은 오히려 감옥에 갇혔다가 영향력 있는 친구의 보증으로 겨우 풀려났고, 잔의 재판 자체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한 장 로이에라는 성직자도 나타나자 그를 살해하려는 위협을 가해서 그 성직자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결국 로마로 도망치고 만다. 그리고 잔의 고향 사람으로 꾸민 사람을 독방에 보내어 위로해주면서 대화하는 척 하면서, 엿보기 구멍을 통해 잔에게서 이단으로 보일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얻어내려는 수작까지 부렸다.

그나마 잔이 이단자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목숨은 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감옥에 여러 번 찾아와 회개하라고 설득하려고 했던 이상베르 드 라 피에르와 마르탱 라드브뉘가 있었는데, 코숑은 그 소식을 듣고 해명을 요구하며 닥달했고, 심지어 워릭 백작은 드 라 피에르에게 "센 강에다 던져버리겠다"고 말했다. 즉 "잔을 조금이라도 도우려는 의도가 보이면 죽여버리겠다"는 뜻이다.

다만 이러한 행위로 잔 다르크를 처음부터 죽이려고 재판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잔 다르크의 재판은 처음에는 공개재판을 통해서 잔 다르크에게 엄청난 망신을 주고 그 권위를 깎아내리려고 하는 등 사실 잔 다르크를 농락해서 무력화 시키는 것에 중점을 둔 것이며, 아무리 중세 시대라고 해도 잔 다르크에게 줄 수 있는 범죄 혐의들로 일반적으로 사형을 언도할 수는 없었다. 특히 샤를 7세가 잔 다르크에게 무관심했던 이유 중 하나는 "잔 다르크를 별 것 아닌 일로 사형할 수 없다"고 본 것도 있으며, 잔 다르크의 사형 소식에 온 프랑스가 충격에 빠질 정도로 사실 어처구니 없는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받았기 때문으로 잉글랜드도 이걸 모르지는 않았다.

문제는 공개재판에서 오히려 잉글랜드 측이 개박살나서 첫번째 공개재판 이후 모든 재판이 비공개 재판으로 이루어졌을 지경이고, 재판 내용을 기록한 내용을 토대로 보면 잔 다르크가 굉장히 논리 정연하고 좋은 대응을 했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죽일 생각이 없이 모욕하고 권위를 떨어뜨릴 생각이었지만 재판이 진행되어감에 따라서 잉글랜드에 협력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라는 극단적인 선택지만 남게 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당연히 잉글랜드 및 부르고뉴파의 시각에서 진행된 재판이 공정하기는 힘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당파도, 잔 다르크의 요청으로 당시 재판관이 프랑스 왕실에 잔이 바라는 증거물들을 제출하라고 요청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잔 다르크를 구할 만한 문헌 기록 및 증거자료들을 전혀 제출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프랑스는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이미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인 탈보트를 포로로 붙잡은 상태였다. 당시 잉글랜드군 측은 탈보트와 잔 다르크를 교환할 의사도 있었지만 당시 관례였던 포로 교환 제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후 잔 다르크의 부하이기도 했던 프랑스 장군 장 포통 드 생트라유가 붙잡히자 바로 포로 교환을 제의해 성사시켰다.[60] 이걸 봐도 사실상 샤를 7세는 잔을 구해줄 생각 자체가 없었고 아무것도 안 한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오를레앙 시민들이 자신들을 구한 잔 다르크를 구해내기 위한 몸값을 자발적으로 모금하자 그걸 몰수해버렸다.[61] 다만 잉글랜드가 잔 다르크를 1만 리브르 트르누아나 혹은 1만 파운드라는 거금을 들여서 데려온 포로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는 잉글랜드인 포로 중 1만 리브르 트르누아나 1만 파운드의 가치가 있는 포로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잉글랜드 지배하의 노르망디에서도 잔 다르크를 손에 넣기 위해 특별세를 도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어머니 이자보 드 바비에르 대비는 한술 더 떠 잉글랜드에 잔 다르크를 죽일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다만 이자보 대비는 트루아 조약 이후 부르고뉴파를 지지하였기에 아들 샤를 7세와 관계가 좋지못해 적대적 수준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역사가 줄리엣 바커는 잔 다르크의 재판은 공정하고 합법적이었으며 잔은 이단의 혐의를 결코 피할 수 없었고 잔의 편을 드는 사람도 많았다고 주장하지만, 이 사람이 잉글랜드 출신이고 자신의 저서에서 아쟁쿠르 전투 등 잉글랜드의 승리를 강하게 묘사하고 잔 다르크가 나오는 책 제목도 "정복(Conquest)"으로 다분히 잉글랜드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위에 있는 언급처럼 그 당시에 내부에서조차도 공정하지 않다고 비판이 있었던 재판이었고, 잉글랜드 출신 변호사 브라이언 해리스도 자신의 저서 인저스티스에서 잔 다르크의 재판을 두고 사법살인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프랑스 왕당파 학자들은 이 재판을 맹렬히 비난했다.

재판을 받을 때 잔은 7년 안에 오를레앙에서의 패배보다 더 큰 재앙이 잉글랜드에 닥친다고 경고 혹은 예언을 했는데, 단순히 전투에서의 참패는 아니었지만 정말로 잔의 죽음 몇년 안에 잉글랜드 왕의 섭정 베드퍼드 공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급사하고, 아라스 조약에 의해 부르고뉴파가 프랑스 왕실에 협력하면서 파리까지 잃게 된다.

결국 잔은 고문과 화형 위협을 포함한 협박을 받아 교회의 처분을 따르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62] 그러나 잔은 문맹이었으므로 자신이 어떤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63] "서명하면 수녀원[64]에 감금시킨다"는 약속과 달리, 여전히 군사 감옥에 가둬놨고 여자 옷을 입게 하고선 병사들을 보내 위협을 가했다. 이 상황에서 순결을 지키지 못하면 악마와 관계를 맺은 마녀로 몰 것이 뻔했다. 결국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잔은 남자 옷을 다시 입을 수밖에 없었고, 그걸 빌미로 재판정은 이단 판결을 내린다.

가혹한 감옥 생활로 병에 걸린 잔은 화형 선고가 아니더라도 감옥에 계속 갇혀 있으면, 병으로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았다.설령 종교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어도 잉글랜드에게는 군사재판이나 정치재판을 통해 포로나 반역자라는 죄목으로 처형하는 방법, 또는 독살이나 암살 등의 방법도 충분히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잉글랜드 측이 잔을 이단자이며 마녀로 몰아 종교재판을 고집한 이유는 잔이 감옥에서 자연사하거나 다른 죄목으로 처형당하거나 암살당하면 프랑스측에게 오히려 영웅의 이미지로 민중들에게 보일 수도 있고 샤를 7세의 위신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단자나 마녀로 몰아서 죽이면 샤를 7세의 위신 실추가 제대로 될 것이고 다른 처형 방법에 비해서 민중들의 반발심이 상대적으로 적었음을 계산한 일. 물론 결과적으로 이 계산은 소용없게 되었다. 오히려 역효과만 제대로 불렀을 뿐이다.[65]

이로써 잔 다르크는 화형을 선고받아 1431년 5월 30일, 루앙에서 억울하게 화형에 처해졌다. 잔은 마지막 소원대로 화형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루앙 시민들과 잉글랜드 병사들 몇몇으로부터 십자가를 받았고, "나를 화형대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경건한 태도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수백 년 후 잔다르크가 성인으로 선포되면서 루앙의 화형장 터에는 잔에게 봉헌된 천주교 성당이 지어졌으며, 특히 화형이 집행된 바로 그 지점에는 대형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그런 잔 다르크의 화형식을 본 군중들과 잉글랜드 병사들, 재판관들 대다수, 심지어 헨리 6세의 비서까지도 눈물을 흘렸고 "성녀를 죽였다"고 탄식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 날은 물론이고 이미 처형 집행을 많이 한 베테랑 사형 집행인인 조프리는, 훗날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에서 "잔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증언했다.

결국 잔 다르크는 불길의 열기와 연기에 질식해 사망한다. 그러자, 잉글랜드 측은 일단 불을 끄고 잔의 알몸을 구경하러 모인 군중에게 내보였다. 이는 잔 다르크가 성녀도 마녀도 아닌 평범한 여성이라고 부각하려는 '술수'였다.

잔 다르크가 죽는 순간 비둘기가 몸 속에서 나타나 날아갔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성해(聖骸)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잔 다르크의 몸이 3번씩이나 태워졌고 그 재는 세느 강에 흘려보내졌다는 것 뿐이다. 19세기 무렵에 잔 다르크의 화형 장소에서 잔의 유해로 추정되는 갈비뼈가 발견되었다며 보관했으나, 2006년 조사 결과 고대 이집트 미이라의 것으로 밝혀졌다. 아마도 프랑스 국민, 신자들의 자작극이나 착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잔 다르크의 죽음 이후 루앙 시민들은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댔다고 한다. 루앙이 친잉글랜드파 도시였음에도 잔 다르크를 지지하거나 동정하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잉글랜드 정부가 당시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잔의 재판과 화형 때문에 책임질 일이 없으리라고 보증서를 발급해줬는데, 이게 잔의 재판에 대해 당시에도 비판적인 말이 많았고 민간 여론도 그리 좋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실제로 피에르 보스키에라는 수도자는 잔의 화형 당일 "악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했다가 처벌 받기도 했다.

당시 재판을 주도한 파리대학교가 잔 다르크를 화형한 후 교황과 교황청에 보낸 서한(국역본). 마치 잔 다르크를 배려하면서 공정하게 재판을 하고 자신들은 원래 잔 다르크를 살리고 싶어했는데 잔 다르크가 이단이 재발한 탓에 할 수 없이 화형을 판결하고 집행해서 괴로워한 것인 양 교황과 교황청에 사기를 치고 있다.

4.6. 명예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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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의 고향인 동레미 라퓌셀에 세워진 잔의 어머니 이사벨 로메의 동상.

샤를 7세는 25년이나 지나서야 잔 다르크의 명예 복권을 선언하였고 교황청은 프랑스 왕실[66]의 요청을 받아들여 1456년에 잔 다르크에 대한 복권재판을 지시했다.

장기간에 걸쳐 파리, 루앙, 오를레앙, 동레미 등 잔 다르크와 관련된 지역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전 유럽에서 성직자들을 초청해서 재판에 참여시키고 주민들에게 증언을 듣는 등의 조사를 한 다음, 잔 다르크 생존 당시 휘하에 있던 병사들과 관련지역 주민들, 그리고 재판에 참여했던 재판관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증인들을 불러모아서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명예회복 재판을 실시한다. 이 재판에서 이단자이자 마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 잔 다르크에게 내려진 판결을 무효화하였으며, 잔 다르크에게 내려진 이단, 마녀 혐의 및 파문 조치를 철회하여 무죄라는 결론을 내리고 잔 다르크를 이단으로 판결내렸던 피에르 코숑을 이단자로 선언하고 주교 자리에서 파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건 이단자이자 마녀로 판결받은 잔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 꺼림칙한 샤를 7세와 유족들의 이해관계가 합일된 면도 있다. 정작 잔에 대한 종교재판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 아직 살아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코숑을 포함한 이미 죽은 관계자들이나 잉글랜드인들에게 죄를 떠넘기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등 얼버무리며[67] 처벌을 피한다. 이 때 잔에 생전의 모습과 행동이나 화형 당시에 대한 증언은 분위기상 찬양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교차검증해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잔이 당하던 종교재판보다는 공정했지만 말이다.

재심 요청에서 실제로 재판이 열리기까지는 몇 년 걸렸다. 이유는 그 전에 잔 다르크의 재판에 대한 증거를 수집해야 하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 당시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 중 핵심 인물 대다수는 죽은 사람들이어서 증언이나 증거를 찾기가 쉽지가 않았으며, 그나마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 중 살아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이나 증거를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으니깐. 게다가 교황청에서도 오스만 투르크의 유럽 침입을 막는 데에 지원해준 잉글랜드의 눈치를 보느라 재판을 여는 것이 늦어졌다. 사실 잉글랜드 측의 인물도 거의 파문당하지 않았다. 헨리 6세와 베드포드 공, 워릭 백작은 그렇다고 쳐도, 피에르 코숑이 재판을 맡긴 했지만 실질적인 우두머리로 관여한 종교인은 잉글랜드 왕실 인사이기도 한 윈체스터 추기경인 헨리 보퍼트였는데, 이 사람은 화형 당시에도 잔의 알몸을 보이라고 지시하고 재를 센 강에 버리라고 지시까지 한 인물이다. 일부 기록에선 화형이 정해진 잔에게 "잘 가라, 교회는 더 이상 지켜줄 수 없다"고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잔의 죽음을 보고 울었다고 하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추기경 명단에 당당히 있고 심지어 윈체스터에는 이 사람 이름을 딴 학교가 설립되어 있다. 참고로 헨리 보퍼트는 잔 다르크 재판에 관여한 것뿐만 아니라 종교인이면서 사생아(딸)까지 둔 위선자였다.



피에르 코숑이 잔 다르크에게서 반지를 빼앗아 헨리 보퍼트에게 바쳤는데, 이 반지는 이후로도 영국에서 쭉 소유하고 있다가 2016년 2월 프랑스에서 경매로 약 24만 파운드(한화 4억 원 가량)에 구입하여 반환되었다. (기사 1, 기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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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출처를 기록한 문서가 있으나, 이것이 진품인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했는데[68] 어쨌거나 프랑스에서는 잔다르크 반지의 귀환을 성대하게 축하하는 행사까지 열었다. 다만 영국 정부가 행사에 찬물을 뿌릴 뻔했는데, "영국 법률상 문화재를 국외로 반출하기 위한 허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반지를 반환하라는 명령을 할 수 있다"면서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이에 발끈한 반지의 구매자가 군중에게 "여러분 이 반지가 영국의 것입니까! (군중 야유) 아니면 프랑스의 유산입니까! (군중 환호) 야이 영국 놈들아 갖고 싶으면 와서 가져가 봐라! 이미 늦었다[69] 이건 우리 거다!"라며 공개적으로 응수해 주었다.

5. 사후의 평판과 영웅화, 시복, 시성

잔 다르크는 사후 프랑스 내에서 꾸준히 존경 받는 인물이였다.[70][71] 공식적으로 시성하려는 움직임은 그저 오를레앙 일대의 주민들과 스코틀랜드에 그쳤다. (스코틀랜드는 1295년에 프랑스와 함께 잉글랜드에 맞서 동맹[72]을 맺었으며 이는 1560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백년전쟁 시기에도 헨리 5세의 활약으로 궁지에 몰린 프랑스가 스코틀랜드에 구원을 요청해 스코틀랜드군이 샤를 왕자를 돕게 되었는데, 이때 샤를이 지원 온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편성한 것이 1830년에 샤를 10세가 퇴위할 때까지 존속한 스코틀랜드 근위군[73]이다. 이후 위그노 전쟁 때에도 2백명의 스코틀랜드군이 위그노 편에 서서 싸웠으며, 2차 대전 때는 자유 프랑스의 수장 샤를 드골이 영국에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을 기리는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했다. 또한 1995년에는, 동맹 7백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영국과 프랑스에서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시성과는 별개로 민중으로부터는 꾸준히 사랑 받았고,[74] 1580년에 프랑스 퐁타무송의 예수회 학교 학생들이 잔 다르크를 묘사하는 연극인 '오를레앙의 소녀'를 상연하는 등 결코 듣보잡은 아니였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시골 출신 평민 처녀가 왕국을 구했다는 사실을 외면하려 했고, 위그노 전쟁 때 신교도들은 오를레앙에 있는 잔의 기념물을 부수기까지 했다. 계몽사상이 보편화된 근대에 와서는 오히려 잔의 행동 자체를 광신도의 전형으로 보았는데, 몽테스키외, 볼테르[75] 같은 학자들로부터 '까놓고 말해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게 딱 잔 다르크 가리키는 것'이라는 식으로 전방위로 까이는 처지로 전락한다. 프랑스 혁명 때 혁명공화파들은 한술 더 떠 잔 다르크를 왕당파이자 가톨릭의 끄나풀로 규정짓고 오를레앙에서 잔을 기리는 기념행사를 폐지하는 한편, 위그노가 그랬던 것처럼 기념물들을 파괴하고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프랑스 혁명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집권을 거치며 사실상 전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게 되자,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고취시킬 만한 떡밥으로 잔 다르크를 다시 들고 나와 잔 다르크에 관한 저작들이 프랑스 정부의 지원하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는 나폴레옹과 잔 다르크가 프랑스 본토 출신이 아니면서도 프랑스를 위해 싸운 것, 시민군을 주력으로 쓴 것 등등 닮은 점이 많아 나폴레옹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 잔 다르크가 과장 된 인물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 대한 내용과 반박은 아래에 따로 서술되어 있다.

이후 19세기 중반에서부터는 좌우파 모두가 자신들의 상징으로 여겼는데, 앙드레 모로아(André Maurois, 1885.7.26 - 1967.10.9)의 "프랑스사(Histoire de la France, 1947)"에 따르면 좌파는 잔이 하층민 출신임을 내세우고, 우파는 잔이 왕권의 회복을 위해 싸웠음을 내세웠다고. 한편 전 프랑스 및 프랑스령 식민지에 걸쳐 잔 다르크의 동상이 2만기 가까이 세워졌는데, 그 중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 있던 동상알제리 전쟁 당시 참수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슬람 국가에 세워진 지배국의 여성 우상이지만 해방의 상징이기도 하기에 그대로 있었으나, 프랑스의 몇 년째 계속되는, 갈수록 강도가 높아지는 무자비한 진압에 알제리인들이 분노했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을 반달리즘이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이 동상은 결국 프랑스로 옮겨져 수리한 다음 보쿨뢰르에 다시 세워졌다. 보쿨뢰르로 옮겨진 동상 모습.

현재의 알제리에도 잔 다르크 동상이 있긴 있다. 스킥다에 있는데, 알제에 있던 동상처럼 광장에 높이 세워져 있는 게 아니라 박물관 근처에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모습으로 있다. 보기크게 보기

잔 다르크의 시성 움직임 역시 국가적인 지원하에 일어나, 1910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고, 1920년 교황 베네딕토 15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엔 잔 다르크를 앞세운 포스터가 나오기도 했고, 제2차 세계대전 연간에 패텡 정권하에서는 반영[76]/반유태[77] 및 프랑스 통합의 상징으로 잔 다르크가 이용되기도 했다. 나치페탱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인 자유 프랑스 역시 국기에 잔 다르크를 상징하는 로렌의 십자가를 넣어 잔 다르크를 추종했다. 특히 샤를 드 골이 잔 다르크를 무척 찬양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극우파이자 인종차별주의자로 악명이 높은 정치인 장 마리 르 펜은 종종 잔 다르크 동상 앞에서 유세를 하고, 잔 다르크를 자신의 정치이념 아이콘으로 이용하여 유색인종과 이민자들의 차별을 정당화하려고 해서 논란이 일었다. "잔 다르크가 잉글랜드인을 추방한 것처럼, 지금 프랑스인들도 쳐들어온 외국인을 추방해야 한다"는 병맛스러운 논리. 하지만 우습게도 잔 다르크가 이끌던 병사들 전부가 프랑스인은 아니었고, 외국인 용병들도 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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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말까지만 해도 잔 다르크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프랑스의 상징 중 하나로서 존경받았는데, 극우파가 하도 설쳐서 좌파 진영에서는 혁명 정신을 형성화한 '마리안'라는 가상의 여성 캐릭터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쓰는 경향이 강해졌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잘 표현되어 있는 바로 그 인물.. 그 뒤로는 잔 다르크가 우파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몇몇 잔 다르크 동상들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곤 한다. 일부 프랑스 좌파가 잔 다르크에 대해서도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 심할 경우 잔 다르크를 왕당파와 파시즘의 상징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2012년 1월 6일 탄생 600주년을 맞아 역시나 르 펜 부녀가 잔 다르크를 팔아먹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도 잔 다르크의 고향을 방문하여 극우만의 아이콘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시도했다. 이런 프랑스 정계의 움직임에 대해 잔 다르크는 외국인 혐오의 상징도 아니고, 정치적 이용의 도구도 아닌 모두의 인물이라고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가 지적했다. 해당 신문은 잔 다르크가 전장에서 진두지휘한 것이 아니라 군량미를 나른 수준이었다는 등 직책이 다소 과장된 것임을, 또 당시 프랑스인들이 배신한 것(…)을 강조해서 언급했다.[78] 선거를 앞둔 노동절을 맞아 또 르 펜 부녀가 잔 다르크 동상 앞에서 유세하기로 하자, 보다 못한 좌파진영에서는 하루 먼저 같은 곳에서 집회를 열어 잔 다르크의 우파만의 독점을 반대하기도 했다.

앙드레 모로아는 잔 다르크를 가리켜서 "프랑스인이 진지하게 행동할 때 불가능할 것 같은 일도 이루어 낼 수 있음을 증명한다"고 찬양했다.

6. 잔 다르크와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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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참정권자 잡지 표지의 잔 다르크[79]1911년 조지 5세의 대관식 날에 잔 다르크로 분장하며 행진하는 여성참정권자

20세기 초반 영국미국의 여성 참정권자들은 자신들의 상징 및 단체의 수호성녀로 잔 다르크를 내세워서 잔 다르크로 분장해서 행진을 하기도 했다. 1913년 경마 경기장에서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다가 사고로 사망한 영국의 여성 참정권자 에밀리 데이비슨은 사고 하루 전날 잔 다르크의 동상에 헌화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잔 다르크는 페미니즘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대의 사람이니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는 없고, 여성 권리에 대한 주장을 딱히 한 적도 없지만, 활약하던 당시 시대로서는 실로 파격적인 여성상이었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심볼로서의 이미지는 강하다.

한편 잔 다르크와 다른 여성들 사이에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카트린 드 로셀이라는 여자가 잔 다르크를 만나 "내가 만난 성인이 밤마다 나타나 금은보화를 놓는다"는 주장을 해서, 어이가 없다고 생각한 잔이 "집안일이나 돌보라"고 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직접 확인해보라"고 말했고, 잔도 궁금해져서 그에 동의했다. 그런데 첫째 날 잔이 그만 피곤해 잠이 들어서 확인하지 못했고, 카트린은 "그날 성인이 왔다 갔다"고 말했는데, 아마 거짓말일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어이가 없어진 잔이 둘째 날엔 중간에 잠들지 않고 끝까지 확인했으나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카트린 드 로셀이 거짓말을 했다고 판단한 잔은 "어리석은 일 하지 말라"고 무안만 주고 헤어졌다. 사실 카트린 드 로셀의 행위는 미신 수준을 넘어서 사기꾼에 가까운 행태라서 강력히 처벌해도 모자라지 않은 지경이었으나 그냥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잔이 종교재판에 회부될 때 카트린 드 로셀의 얘기가 인용되었는데도 잔에게 유리한 증거가 되지 못한 듯 하다.

또한 군사들을 따라다니는 매춘부들을 비롯한 여성 장사꾼들을 쫓아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중 한 명이 생계를 보장 해달라고 매달리자 열받아서 칼등으로 뒷목을 때려 기절시켜서 내보냈다고 한다. 21세기 기준으로 볼 땐 이런저런 구설수가 나올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당시는 15세기였고 잔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니 자신의 병사들이 매춘부를 사서 놀아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당대에도 잔 다르크를 경애하고 추종한 여성들이 존재했다. 브르타뉴 출신의 피에론(Pierronne)이라는 여인은 신비체험을 주장하고 잔 다르크를 추종하며 다니다가 잔 다르크가 붙잡히기 전인 1430년 3월에 친잉글랜드파에게 체포되었고 종교재판을 거쳐 같은 해 9월에 화형당했다. 천사들의 차림새에 대한 질문에 지혜롭게 돌려 말하며 대처한 잔 다르크와 달리[80] 천사들의 옷차림을 자세하게 말해버리는 바람에 이단으로 신속하게 판정되어 화형당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피에론이 잔 다르크를 동경하고 따른 것에 대한 보복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랭스에서의 대관식 때 잔을 성녀로 여기며 공경하는 여인들이 성화와 기도서를 들고 잔이 그걸 만져주길 바랐는데, 잔은 웃으면서 "자기 손으로 쓰다듬으세요, 여러분들 손이나 내 손이나 마찬가지인 걸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잔 다르크가 출정을 할 때 지원을 해준 이는 샤를 7세의 장모인 욜란다 데 아라곤[81], 또한 포로로 붙잡힐 때 적의 진영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 잘 해준 이들 중에선 같은 여성인 리니 백작의 이모 잔과 베드퍼드 공작 부인 등 귀족 여성들이 있었다.

7. 군인으로서의 잔 다르크

7.1. 잔 다르크에 대한 논란, 정말로 군사적 천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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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논란은 매우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어떻게 아무런 군사적 교육을 받지 않은 17세 문맹 소녀가 단 1년 만에 멸망의 기로에 선 한 나라를 극적으로 회생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먼저 따져 봐야 하는 점은 잔이 실제로 총지휘를 맡았느냐 하는 점이다. 사실 이 점이 그동안 가장 논란이 큰 문제였는데, 관련 기록과 주변 인물의 기록 등을 참고해 봤을 때 실제로 총사령관의 직위를 행사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적군 잉글랜드군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인 베드포드 공작이 자신의 조카이자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 6세에게 오를레앙에서의 패배 상황을 설명하면서 시말서 비슷하게 쓴 편지와, 샤를 7세에게 '적법한 헨리 6세를 두고 프랑스 왕을 참칭하는 발루아의 샤를'이라며 가짜 왕이라는 식으로 비난하는 편지를 보낸 바 있다. 이 두 편지 모두 잔 다르크를 비난하는 언급을 했다. "사탄의 추종자이자 끄나풀인 남장한 퓌셀[82]이 백성들을 홀리고 있다"고 했다. 이를 볼 때, 적군에서도 잔 다르크를 단순히 얼굴마담 수준으로 본 게 아니라 실질적인 위협을 주는 적장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그 명령의 수준은 어떨까? 이 점이 매우 흥미로운데, 잔이 내린 지시 중 90% 이상이 공격 또는 공세적 지시라는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잔이 보급이나 상세한 포위작전 등 세부적인 명령은 내린 기록이 드물다는 것. 대신 알랑송이나 뒤노아, 또는 질 드레에게 이러한 지시를 일임하는 내용이 더 많았다. 이는 좋게 말하면 잔이 매우 공격적인 지휘관, 나쁘게 말하면 무리한 공격[83]을 일삼는 무모한 지휘관이라는 것. 그리고 이는 잔 다르크가 추상적인 목표(공세)를 잡고 세부사항을 휘하 장수들에게 맡겼다는 뜻이 된다. 오늘날의 군사용어로 따지면 대단히 공세지향적이고 임무형 전술을 적극 활용하는 지휘관이고, CEO로 비유한다면 큰 그림은 그리고 세부사항은 담당자에게 맡기는 정도일 것이다. 잔은 현장 지휘관의 의견을 항상 존중했고, 비록 자기 의견에 반하더라도 항상 장수들의 말을 경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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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적 능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미 활약 챕터에서 소개된 위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전쟁을 보는 잔의 큰 시각, 즉 전략적인 감각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장이다. 부르고뉴와 잉글랜드 사이를 지나가는 대우회기동을 성공시킨 거나, 파리를 중심으로 한 대포위망을 완성시킨 점이나... 더군다나 저 행군로는 철저하게 잔의 고집을 따른 것이다. 그러면 저 계획에 실효성이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상기했듯이 어느 정도의 도박성이 있었지만) 당연히 YES. 실제로 랭스 함락 이후 전투는 파리와 그를 위시한 센 강 이북-노르망디 지역에 국한된다. 게다가 기록에 따르면 잔은 이 대담한 공세계획 입안에서 단순히 닥치고 돌격해야 한다는 주장만 내세운게 아니라 최종 목표와 이에 도달하기 위한 기동로, 그리고 필수 조건으로서 루아르 강 도하를 위한 다수의 핵심 교량 탈취 등의 요소를 조리있게 설명하여 프랑스군 주요 지휘관들을 납득시켰다고 한다. 적어도 전략적 관점에서 잔 다르크의 군사적 천재성은 부인할 수 없다.

허면 잔 다르크는 어떻게 자기와 달리 오랜 세월 칼밥을 먹어왔을 장수들에게 명령을 순순히 내릴 수 있었을까? 이는 철저하게 중세적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잔 다르크가 바로 성녀였기 때문이다. 중세에 왕은 교황보다 아래였는데, 그런 교황보다 높은 하느님이 직접 선택한 성녀. 그것도 왕이 직접 인증(?)한 성녀의 지시를 장수들이 무시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즉 잔 다르크는 성녀라는 무적의 타이틀과 권위 그리고 그것에 동반된 총지휘관의 직책을 이용, 소위 닥치고 돌격을 명령한 것이다. 처음 몇 번은 회의적이었고 마지못해 따르던 프랑스 장수들도 잔의 이 방식이 의외의 성과를 거두자 곧 잔을 인정하고 ‘성녀가 맞나보구나’하고 그냥 순순히 지시를 따른다.

성녀라는 타이틀은 병사들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 당시 프랑스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어 제대로 전투를 하지도 못하고 패배를 거듭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는 중세 사회에서, 둘 다 그리스도교 국가인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받은 성녀가 프랑스에 출현해 군을 지휘한다는 건, 하느님이 프랑스 편을 든다는 의미로 받아져서 마치 하느님이 지원군을 보낸 듯이 프랑스군은 사기가 크게 올랐고 잉글랜드군은 사기가 떨어졌다. 거기에 프랑스가 연패를 끊고 승리를 하자 과장된 신앙적 열정이나 공포가 잔 다르크의 하느님이 내린 군사적 능력에 대한 과장된 소문이나 심지어는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낳았다. 이런 병사들의 사기 역전이나 승리에 대한 확신이 전투의 승패에 대한 자기실현적 예언이 된 것이다. 말하자면 잔 다르크가 성녀를 자처한 건 역사상 최고의 성공적 심리전인 것이었던 것이다.

헌데, 잔의 이런 공세적 전략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했다. 물론 공세적 전략을 통해 전쟁의 주도권을 뺏는다는 것은 좋았지만, 이런 전술에는 기본적으로 공세종말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쉽게 말하자면 어느 시점이 되면 병사들도 지치고 보급이 딸린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잔은 초기 1년 동안 미친 듯이 공세를 펼친다. 그것도 쉼없이.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바로 샤를 7세의 무제한적인 지원 때문이었다. 그러면 샤를 7세는 왜 그랬을까? 단순하다. 잔 다르크를를 직접 인증하고 사령관의 자리에 앉힌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본인이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즉 랭스 점령까지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왕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잔에게 무제한적인 지원을 퍼부은 것. 이를 이해한다면 랭스 점령 이후 잔과 샤를의 관계가 틀어진 것도 이해가 된다. 그 이유는 단순하게도 그동안의 지원으로 인해 왕실 재정이 파탄 직전에 이르렀기 때문.[84]

그리고 잔은 엄밀히 보자면 외부인사였다. 축구로 따지면 외국인 감독을 국가대표 자리에 앉힌 셈. 덕분에 잔은 선입견 없이 능력에 따라 인사를 배치할 수 있었다. 100년 전쟁 내내 보여준 잔의 합리적인 군사 행동은 여기서 도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잔은 귀족, 평민, 용병을 가리지 않았고 필요하다면 적(부르고뉴 파)과의 합작 또한 꺼리지 않았다. 그리고 후에 이단 심문 과정에서 확인되는 잔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 잔은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잉글랜드의 상태 또한 환상적이었다. 군대는 오를레앙만 함락시키면 전쟁은 끝이라는 낙관적 태도에 빠져 방심했고, 내부는 젖먹이 헨리 6세가 왕위에 오른 덕분에 귀족들 간에 치열한 권력 다툼이 진행 중이었다. 때문에 잉글랜드는 잔의 미칠듯한 공세에 효과적인 대처가 힘들었다. 아니, 지역적 방어는 가능했을 지라도 이전처럼 국가적인 반격을 펼치는 것은 버거웠을 것이다. 여기에 부르고뉴파와의 동맹은 매일이 위태로웠고, 아무리 때려도 무너지지 않는 프랑스 때문에 국고는 바닥을 찍고 있었다. 때문에 백년전쟁에 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잉글랜드는 장미전쟁이라는 내전에 돌입한다.

즉 종합적으로 보자면, 성녀 타이틀(+그로 인한 프랑스 군의 사기 상승) + 잔의 공세적 전략과 정확한 목표 설정 + 휘하 장수들의 뛰어난 보조 + 왕의 무제한적 지원 + 적국의 혼란으로 희대의 역사가 터졌다고 볼 수 있다. 무명의 소녀였던 잔 다르크가 중세 유럽에 갑자기 나타나 성녀를 자처하며 프랑스를 구할 수 있었던 것에는, 잔 다르크 개인의 능력 외에도 이로한 상황과 행운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잔 다르크는 분명히 잉글랜드군을 모든 면에서 압도할 능력이 있음에도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며 병림픽을 하던 프랑스군의 정신을 질타하고 그들이 가야할 길을 정확히 제시하여 일으켜 세웠으며, 그 길을 가는 동안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함으로 마침내는 강력한 침략군인 잉글랜드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잔 다르크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신화에나 나올법한 영적인 힘으로 적을 홀로 무찌른 완전 무결의 초인이 아니였다. 허나, 잔은 여자에 배운 것 하나 없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매우 뛰어나게 지휘했고,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프랑스군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마침내는 지겨운 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끝냈다. 이러한 점이 무엇보다 잔이 역사에 남긴 의의일 것이다.[85]

7.1.1. 보충 - 잔 다르크는 군사적 천재가 맞다

외국의 잔 다르크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묘사를 보면 단순히 '하느님이 여기를 공격하라고 명령하셨다"는 정도의 수준으로 보기엔 잔다르크가 제시한 작전은 훨씬 세세하고 세련되었다고 묘사되고 있다. 예를 들면 오를레앙의 승리 이후 프랑스군의 공세계획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나오는데 잔 다르크는 르와강을 신속하게 도하하여 랭스로 진군하는 최단지점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 르와강 인근의 특정 다리들을 신속히 확보해야 하는 전술목표를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게다가 이를 샤를 7세에게 직접 설득하여 오를레앙 전투 이후 중구난방이던 공세계획을 단번에 정리해버리는 주도면밀함을 보인다.

결국 알랭숑 공작은 잔 다르크의 전략을 채택하게 되지만 알랭숑을 비롯한 다른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잔 다르크의 계획이 무모하기는커녕 매우 합리적이고 효과적이라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었다는 기술이 많이 등장한다. 물론 잔다르크의 공세계획이 효과적이란건 샤르트르 공방전, 파타이 전투 이후엔 프랑스군은 별다른 저항없이 랭스로 접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증명되며 영국은 이에 대해 손을 쓸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샤르트르에서의 공성전에선 성벽에 설치된 적군의 캐논포의 사거리와 접근시 위험지역에 대해 잔다르크가 면밀하게 경고해서 실제로 알랭숑 공작은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즉 잔 다르크는 닥치고 신의 이름으로 닥돌같은게 아니라 당시 공성전의 접근법이나 화기에 대한 지식도 충분히 있었던 걸로 보인다. 동시대 잉글랜드의 신학자나 역사가는 "농부의 딸내미 같은 무지랭이가 이렇게 세련된 군사작전으로 잉글랜드군을 패배시켰다는 것은 악마의 도움을 받았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음"이라고 기록하는 걸 보면 잔 다르크의 작전은 같은 프랑스군이나 적군인 잉글랜드군이 보기에도 매우 훌륭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아무튼 오를레앙부터 랭스 함락 이후 파리 포위까지 잔 다르크가 주도적으로 행한 공세작전을 검토해보면 '이건 뭐 한니발의 귀신이라도 씌였나?'는 느낌이 들 정도이고 잔다르크 이전/이후의 프랑스군 지휘관에서 이런 군사적 능력을 보여준 장군은 찾아볼 수 없다. 고급 귀족이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전략 전술과 프랑스군 화포 운영방법과 스펙만이 아니라 잉글랜드군의 전술과 병력 구성도 꿰고 있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 로마 이후 우회기동 포위 집중섬멸이라는 전략은 로마 이후 처음 나온 것이기도 했다. 배운 것 없는 시골처녀가 자기 부대 화기스펙 줄줄 외우고 그에 맞춰서 전술짜고 다 성공시킨 건 여러모로 잔이 천재가 아니라면 보일 수 없는 것이었다.

7.2. 전쟁에 끼친 영향

잔 다르크가 활약한 기간은 길게 잡아 2년에 불과하지만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잔 다르크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뒤노아 경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군 1천 명이 잉글랜드군 2백 명만 만나도 도망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잔 다르크의 등장 이후 이것이 사라졌다." 즉, 적을 보면 등을 보이기 바쁘던 병사들이 드디어 싸우게 되었다는 것.

사실 프랑스군의 군사적 역량은 잉글랜드가 미칠바가 되지 못했다. 잉글랜드군은 다른것은 몰라도 병력 동원능력과 그 병력을 유지할 경제력에서 프랑스군의 한 수 아래였다. 다만 오랜 패전으로 인한 사기 저하로 병사들이 사실상 허수아비보다 못한 존재가 된 점과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라는 극단성으로 프랑스군이 소극적으로 움직인 점이 잉글랜드군에게 버프를 달아준 셈이었다. 하지만 갑툭튀한 성녀로 인해 본래의 역량을 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 장군들이 구사할수 있는 전략적ㆍ전술적 선택폭은 크게 넓어지고, 이는 전술적 유연성이 구현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된다.

기존 프랑스군은 그냥 닥치고 돌격의 기사중심의 전술을 고수해왔다. 그도 그럴게 중세의 시작이라 불리는 기사가 처음 등장한 나라가 프랑스인 데다가, 당시 프랑스는 자국 내의 평원 지대에서 품질이 좋은 군마를 생산할 수 있었으니... 즉 오랫동안 쌓여온 기병 양성 체제 + 훌륭한 자원의 시너지 효과로 인해 발달했던 강력한 중기병 전술을 포기하기는 힘들었던 것. 또한 당시 기사들의 기득권 때문에 기사 중심의 전술을 포기할 수가 없었던 측면도 있다[86]. 이를 바꾸려면 공동체적 합의와 추진의 중심이 될 만한 강력한 인물이 존재해야 하는데, 백년전쟁 동안 프랑스에는 추진력 있는 인물이 부재했다. 당장 왕이 중심이 되자니 대관식도 못한 존재였고, 그렇다고 달리 구심점이 될 만한 영주나 귀족도 없었기 때문. 그런데 이 모든 장애요소가 잔 다르크가 등장하며 해소되어버렸다. 애초에 기사 계급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던 잔 다르크는 중기병 돌격 전술에 연연할 까닭이 없었고,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나름 당대 프랑스군의 구심점까지 되어줄 수 있었기 때문.

물론 기사중심의 중기병 돌격전술을 아예 포기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중기병에 대한 의존을 떨쳐내고 상황에 따라 적시적소에 쓸 수 있게 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위에서 서술된 파타이 전투인데, 잉글랜드 군이 전방에 목책과 말뚝을 설치하자 전면돌격이 아닌 측면으로 우회하여 돌격한 것이었다. 또한 대포의 사용도 등장한다. 물론 당시에 대포는 정확도나 연사력이 크게 낮아 효과적인 타격수단이 아니었지만 알랑송 공작을 위시한 프랑스 장군들이 전투에 대포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부터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잔의 등장 이후 실로 오랜만에 프랑스가 전쟁의 주도권을 쥐었다. 이는 매우 의의가 큰데, 잔의 사후 프랑스가 백년 전쟁을 이길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잔의 행보에서 얻는 군사적 자신감을 밑바탕에 깔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대로 말하면 잔이 없었다면 프랑스는 멸망, 또는 최소 루아르강 이남으로 밀려 났으리란 것. 대표적인 증거로 잔 이전 프랑스군은 전투에 패배하면 바로 성으로 퇴각했지만 잔 이후에는 전투에 패배해도 좀비마냥 쉬지 않고 잉글랜드군을 몰아쳤다. 전체 인구수에서 크게 뒤지는 잉글랜드는 결국 질적 물량적으로 월등히 앞서는 이런 프랑스의 공세를 견디지 못한다. 그 결과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대륙의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

8. 잔 다르크가 과대포장된 인물이다?

잔 다르크는 나폴레옹 시대 이전에는 듣보잡에 영웅이 아니라 대단하지도 않은 인물이지만 나폴레옹이 영웅으로 과대포장하여 조작했다는 의견이 있는데, 일단 과대포장되었다는 모습은 전술했던 잔의 활약상 부분과 전쟁에 끼친 영향에 대한 부분만 읽어봐도 충분히 반박되는 주장이며, 나폴레옹이 잔 다르크를 부각시키긴 했지만 그 전에도 영웅으로 알려져서 아는 사람들은 아는 인물이었다.

일단 15세기에 잔 다르크는 기사도를 상징하는 인물 중 유일하게 여성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12 그리고 오를레앙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지방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했으며, 생전에 베드포드 공이 쓴 잔을 비난하는 내용의 문서와 16세기의 잉글랜드에서 쓰여진 연대기와 아래에 언급될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나쁘게 묘사되어 오히려 잉글랜드에게 커다란 치명타를 줬음이 확실해지며, 주로 플랑드르에서 활동한 16세기에서 17세기의 화가 루벤스는 항목 상단에 있는 십자가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87]

게다가 나폴레옹이 잔 다르크를 찬양하고 공경하면서 기리는 일을 추진한 때가 1803년경인데, 아래에도 언급되지만 그 전에 이미 프랑스의 적대국이었던 영국의 로버트 사우디와 독일의 프리드리히 실러가 이보다 조금 앞서 잔을 찬양하는 작품을 썼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출신의 유명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이 쓴 <영국의 역사>라는 책에도 잔 다르크가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오는데, 흄은 1711년에서 1776년까지 살았는데 나폴레옹은 1769년에서 1821년까지 살았다. 흄이 프랑스에 체류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벽지인 코르시카에 살던 어린 나폴레옹이 늙은 흄을 만나 잔 다르크를 언급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흄이 프랑스에서 잔 다르크에 대한 언급을 처음 듣고 그렇게 썼다면 오히려 잔 다르크가 프랑스에서도 듣보잡 인물이었다는 주장이 무색해진다.[88]

한국에서 나폴레옹이 잔 다르크를 띄웠다는 주장은 모 일간지에 실린 칼럼과 그걸 바탕으로 하여 실은 역사서적에 의해 널리 퍼졌는데, 이 책 자체가 가십성 역사를 과장되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해서 쓴 책이기 때문에 정론을 쓴 책이라고 읽고 믿으면 곤란하다.[89] 그리고 위에 이미 언급된 잉글랜드가 지불한 잔 다르크의 몸값을 보자.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소녀를 가지고 단지 이단자로 처벌하겠다고 왕자의 몸값 정도 되는 그런 엄청난 금액을 지불한 걸까?

9. 잔 다르크에 대한 다른 전설

  • 잔 다르크 생존설: 당연히 이런 역사적이고 전설적인 인물에게는 생존설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특히 잔 다르크의 경우 화형 직후 잔 다르크를 자칭하는 인물들이 여럿 나타났으며, 최소 1명 이상은 잔 다르크의 가족조차 본인으로 인정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잔 다르크의 가족들에게 가짜로 판명되어 재판에 넘겨져 처형당했다고 한다. 혹은 잔 다르크의 오빠들이 돈을 벌기 위해[90] 용병 여기사와 짜고 잔 다르크가 부활했다는 사기를 쳤다가 발각되어, 세간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 당시부터 잔의 생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부분에 주목하여 잔을 사랑하고 존경하여 죽음을 인정하기 싫은 민중들이 많았다는 추측을 하는데 쓰이기도 하는 설.
  • 잔 다르크 공주설: 생존설에서 파생된 것으로, 잔 다르크는 샤를 6세의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91]불륜으로 낳은 딸이라는 설이다. 이 경우 샤를 7세와 잔 다르크는 남매가 된다는 이야기인데… 아무튼 공주설을 더 파고 들어가면 잔 다르크가 공주임을 알아차린 잉글랜드 측에서 비밀리에 가짜를 내세워 화형에 처하고 잔 다르크는 풀어주었으며, 잔 다르크는 나중에 지방 영주와 결혼하여 잘 먹고 잘 살다가 늙어죽었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잔 다르크의 묘가 프랑스에 몇 개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근거가 부족한 내용이라 창작물과 유사역사 수준의 영역에 그치고 있다.
  • 잔 다르크 용병설: 잔 다르크가 단순한 시골 소녀가 아니라 여성 용병대장이라는 설도 있다. 특히 백년전쟁 직후의 어떤 문서에 의하면 잔 다르크는 '포술에 능하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기록 자체의 신빙성이 높지 않고 다른 기록과의 교차 검증에도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어 그다지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다. 무엇보다 대포가 전술적으로 의미있게 사용된 기록은 잔 다르크 사후인 포미니 전투(1450)에서부터 나타난다.
  • 잔 다르크 예비설: 잔 다르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갑툭튀한 성녀가 아니라, 친왕파 귀족들에 의해 프랑스의 구국 영웅으로 미리 엄선되어 준비과정을 거친 뒤에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라는 설. 어떻게 보면 가장 현실성이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 주장을 따르자면 한낱 시골 처녀에 불과한 잔 다르크가 생전 얼굴조차 본 적이 없었던 왕세자를 쉽게 알아보았던 것, 프랑스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녀로 손쉽게 인정받았던 것 등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 비록 왕세자 본인은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쉽게 말해 그의 측근들이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는 것. 사실 이 주장도 역시 잔 다르크와 친밀한 귀족은 잔과 전장에서 함께 한 기사들 정도에만 해당되고, 그들을 제외하면 잔 다르크의 구출 시도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반론이 제기된다. 샤를 7세의 최측근인 조르주 라 트레무유는 심지어 샤를 7세에게 잔 다르크에 대해 "미친 여자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순 없습니다!"라고 비난했을 정도다. 한편으로는 샤를 7세의 장모인 욜란다 데 아라곤이 잔 다르크를 카드로 써서 이용하고 조종했다가, 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하자 토사구팽으로 내쳤다는 주장이 있는데…[92] 결국 이렇다 할 물증이 없어서 있을 법한 주장 정도로 여겨진다..

    또다른 예비설은, 진짜 잔 다르크가 등장했으나 전장에서 사망하거나 큰 부상으로 이탈하자 이를 다른 사람으로 메꾸었다는 설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당시 잔 다르크의 목격담이 다른 부분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덩치가 큰 여성이었다는 것과 덩치가 작은 여성이라는 목격담이 있으며, 잔 다르크의 성품에 대해서도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을 좋아해 혼이 난 적이 있다거나 하는 등 알려진 잔 다르크와는 상당히 다른 기록들도 존재한다. 또한 위에는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처형 당시 본인은 잔 다르크가 아니라며 살려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지막으로 이것이 있을 법한 주장인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잔 다르크의 처형 이후 잔 다르크라 주장하는 여인들 중 하나가 샤를 7세를 만났고 진짜 잔 다르크라고 인정했다는 점이다. 후에 그 여자에게 후한 포상을 쥐어 돌려보냈기 때문에 생존설과 엮어지는 가설이다.
  • 잔 다르크 강간설: 잔 다르크가 포로로 잡힌 다음 강간을 당했다는 주장. 실제로 잔 다르크는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바지를 입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바지를 입었기 때문에 당시 여성들이 바지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풍기문란 죄목을 구실로 화형을 당했다는 말이 있다. 애초에 잉글랜드군은 어차피 몸값을 받지 못할 상황이었고, 아군의 명분과 사기를 높이고 프랑스군의 명분과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어떻게든 잔 다르크를 이단자로 몰아서 죽이려고 했지, 단순히 바지를 입었다고 화형을 시킨 것은 아니었다.[93] 이 외에도 적군인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 측에서는 전장에서 지휘하던 잔 다르크를 보고 샤를 7세의 정부라고 욕하기도 했고, 마녀라고 욕설을 들은 잔 다르크가 충격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는 말도 있다.
허나 이것은 근거 없는 낭설에 가깝다. 일단 공식적인 기록에 의하면 잔 다르크는 1431년 1월 9일부터 3월 29일까지 시작된 예비조사에서 베드퍼드 공작이 뽑은 귀부인들을 통해 처녀성을 검사받았고, 순결한 처녀임을 인정받았다. 이는 꽤 중요한 문제였는데, 마녀는 악마와 통정한다고 믿어지는 중세의 통념상 잔이 만약 비처녀로 밝혀진다면 매우 불리한 증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5월 30일날, 화형이 집행되는 날 잔 다르크는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고 한다.
아, 나를 잔인하게 대하다니, 화형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곱 번 참수당하는 편이 나으리라. 나의 몸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았는데 이제 타버려 재로 돌아가누나.

따라서 잔 본인이 이 설을 가장 확고하게 부정하였기에 옥중에서 겁탈당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참조
  • 잔 다르크 간질설: 잔 다르크의 언행을 연구한 학자들 중에는 '발작증상을 동반하지 않고, 환각 증상만을 일으키는 측두엽 이상에 의한 간질'이라는 견해를 내놓은 경우도 있다. 잔 다르크는 지나칠 정도로 도덕적이며 율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으나, 때때로 공격적인 면을 드러냈다는 점이 전형적인 간질의 증상이라는 것이며, 이 부분이 간질설을 지지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1991년의 국제간질협회 논문에서도, 당시의 증언 및 재판기록을 토대로 간질 증상이었을 가능성에 대해 고찰한 바 있다.
  • 잔 다르크 외계인 접촉설: 20세기 들어 UFO와 외계인 연구가 시작되면서 나온 주장으로, 제니 렌들즈(Jenny Randles)의 <외계인 납치(Alien Abduction)>라는 책에서 언급되었다. 잔 다르크가 들었다는 하느님의 음성, 혹은 천사를 본 것이 사실은 외계인과 접촉한 것이라는 주장.
  • 잔 다르크 진짜 마녀설: 현대에는 시대착오적이고 괴이한 주장이지만, 마가렛 머레이(Margaret Murray)라는 학자[94]는 실제로 그런 이론을 주장했다. 영어가 된다면 원문을 한번 읽어보자. 요정 숭배,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의 토속신앙 의식, 재판정에서의 이상 행동과 발언, 질 드 레와 연관시켜서 주장하기도 했지만 논리와 설득력이 없어 묻혀버린 주장이다. 애초에 타당하고 납득이 가는 이론과 연구 결과였으면 잔 다르크를 설명하는데 지금도 자주 언급될 수 있는 이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물론 가톨릭과 프랑스에서 불만과 유감을 제기했을 가능성은 있었겠지만. 아무튼 토속신앙 문제는 푸아티에에서의 심사 통과와 명예회복 재판에서 고향 사람들의 증언 사실만 살펴봐도 논파되며, 재판정에서 '하늘의 왕' 등의 발언 문제는 잔 다르크가 분명히 예수임을 밝히고 있고, 주님의 기도를 외우는 것을 거부한 것은 잔이 문맹임을 노골적으로 노린 데다가, 부당하게 성립된 재판에 호락호락 승복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 때 잔 다르크는 재판정을 향해 오히려 "당신이 주님의 기도를 외울 만큼 독실한 신자임을 증명하시오."라고 일갈하며 반격했을 정도다.참조
질 드 레와의 연관성은 질 드 레의 타락 자체가 창작물을 제외하면 잔 다르크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입증할 자료가 없으며, 그의 범죄 사실조차도 정치적으로 악용된 것 아니냐는 추측이 현대에 나오고 있어 얼마나 신뢰성 있을지가 의문. 결국 머레이의 의견을 항상 지지하던 사람들도 이 주장을 듣자 상당수가 지지를 철회했다고 한다.[95] 머레이가 활동하던 시기가 잔 다르크의 시성 시기와 겹치기 때문에 시성에 방해할 수 있는 이론일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실제로 잔 다르크가 마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도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 이 외에도 재판 과정에서 지혜롭게 대처했다고 사이코패스라고 주장하는 논문까지 있으나 이것 역시 신뢰할 만한 주장은 아니다. <UFO 신드롬>이라는 책에서는 위에 언급된 잔 다르크의 UFO 접촉설을 머레이의 이론을 근거로 하여 주장했다.

다만 머레이는 잔 다르크를 비롯해서 마녀라고 불린 여성들을 부정적인 의미의 마녀로 본 건 아니고 일종의 토속종교나 여성 중심의 종교를 연구하면서 잔을 마녀라고 언급한 것이었다. 실제로 몇몇 학자들은 잔 다르크 마녀설을 포함한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머레이의 잔 다르크 연구를 긍정적으로 언급한 책도 있다.[96] 허나 머레이의 잔 다르크를 포함한 마녀로 몰린 여인들이 정말로 마녀였다는 연구는 허점이 굉장히 많았다. 마녀사냥 당시 마녀로 몰린 여인들이 고문과 협박에 견디지 못하고 억지 자백을 받은 걸 유일한 근거로 하여 마녀가 진짜로 있다는 식으로 발표를 했으니(...)[97] 결국 잠깐 동안만 반응이 있었을 뿐 시간이 지나자 묻혀버렸다(...) 결정적으로 머레이는 역사학자이긴 하지만 유럽사가 아니라 이집트사 전공을 한 분.
개신교에서도 잔 다르크는 성녀는 아닐지언정 독실하고 참다운 신자로 인정되는 편이 강한 편. 하지만 일부 근본주의적 개신교에서는 "잔 다르크가 사실은 악마나 악령과 접촉했다"고 망언을 한다.
  • 잔 다르크 인터섹스설: "잉글랜드에 잡혀있던 동안 월경을 안 하고 털이 없었다"는 기록에서, 인터섹스 사례의 하나인 안드로겐 무감응 증후군으로 의심하는 설이다. 다만 지속적인 강한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 월경이 몇달씩 끊기는 사례는 너무나 흔하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쓸만한 가치는 없는 설.
  • 후스파 협박편지 사건: 신성로마제국에 속해있던 체코 보헤미아 지방에는 존 위클리프의 사상에 따라 종교개혁을 주장하던, 잔 다르크가 3살 때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얀 후스가 있었다. 그의 사상을 따르는 후스파 신도들과 농민들이 귀족들과 가톨릭 세력에 맞서 1419년 반란을 일으켰는데, 후스 전쟁이라고 기록될 만큼 커다란 규모의 종교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430년 3월, 잔 다르크는 뜬금없이 이들의 본거지인 프라하 대학에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의 내용은 대략 '얼른 회개해서 이단 그만 믿고 전쟁 그만두고 가톨릭으로 돌아와라. 안 그러면 내가 십자군 끌고 와서 응징한다.' 잔 다르크의 흑역사로 분류할 수 있을 내용. 잉글랜드군 부상병을 위로하기도 한 잔 다르크의 모습과 대조되는 내용이기에 충공깽할 내용이다.
    하지만, 이 편지에 대한 의심의 목소리도 많이 있다. 먼저 잔 다르크는 문맹이라 장문의 편지를 쓸 수 있었을 리 없다. (대외 활동을 시작한 이후 글을 조금 배웠다고는 하나 자기 이름을 겨우 쓸 수 있는 정도였고, 실제로 현전하는 잔의 친필은 본인의 서명 두세 개 정도가 전부이다) 대필하는 사람이 잔 다르크가 불러주는 내용을 대신 썼을 수 있겠지만, 그 내용이 편지보다 더 심했는지 대필한 사람이 부풀려 썼을지는 알 수 없다. 또 당시 후스파는 결과적으로 가톨릭 교회를 파괴하고 약탈을 일삼았던 것이 사실이기에, 그런 소문을 듣고 잔 다르크가 편견을 가질 여지가 충분했다. 아무튼 이 편지는 잔 다르크가 이단이 아닌 정통 교회를 따른다는 명확한 증거인데, 종교 재판에서나 명예회복 재판에서나 이 편지의 언급은 전혀 없다. 가짜일 확률이 높겠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 흔히 중세시대 인물이란 인식이 강한 편이고 실제로도 활동하던 시대가 그렇긴 했지만, 워낙 어린 나이에 활약하고 세상을 떠나서 그렇지 자기 어머니처럼 오래 살았으면[98] 르네상스 때 인물이 되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년생)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년생)와 같은 시대 사람이 되어 그들의 활약을 어느 정도 보았을 것이다.

9.1. 잔 다르크의 외모

잔 다르크의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으나, 잔의 외모를 묘사한 기록들은 간간히 남았다. 잔의 개인시종 장 돌롱과, 이단재판 당시 잔을 직접 심문한 보페르 등이 잔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또 잔 다르크와 동행했던 달랑송 공작이 잔에 대해서 묘사한 문장이 있다. 대체로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다.
머리색은 어둡고, 남자처럼 하고 다녔다(짧은 단발머리). 튼튼한 체격에 몸집은 꽤 컸다. 가슴이 풍만하여 그것을 보는 것이 큰 기쁨을 주었다. 얼굴은 그냥 평범한 농민 같았다

재판관 보페르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여성스럽고 섬세하며 목소리는 굉장히 부드럽다.

달랑송 공작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함께 잤다. 가끔 그녀의 아름다운 가슴을 보았으나 육체적인 욕망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장 돌롱의 말이다.
매력이 넘치고 덩치가 큰 소녀였다.

종합하면 흑발머리 소녀에 얼굴은 크게 못나지도 어여쁘지도 않지만, 덩치는 꽤 있고 동시대 여성들에 비해 키와 가슴이 컸다고 한다. 놀랍게도 잔 다르크의 가슴 이야기가 사료에서 여러 번 언급된다. 달랑송이 잔의 가슴을 콕 집어서 묘사한 기록과, 가슴이 풍만했다는 동시대 사람들의 증언들, 포로 생활 당시 영국의 어떤 못된 기사 한 명이 잔 다르크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성추행해 잔이 소리를 지르며 밀쳐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현대의 잔 다르크 창작물에는 서양인의 스테레오 타입인 금발 벽안 미소녀로 나오는데, 사실 당시 프랑스 농촌의 현실을 고려하면 모델 같은 외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매력이 넘친다는 평을 제법 들은데다 추녀라는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을 보아 평균 이상의 건강미 넘치는 소녀였던 것은 사실 같다.
왕세자는 잔 다르크에게 왕궁 내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이 곳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는 대귀족인 알랑송 공작과 알게 되어 이후 오래도록 가깝게 지냈다. 두 사람은 전투 중에는 같은 곳에서 잤는데, 공작은 묘한 기록을 남겼다. "우리는 밤을 같이 지냈다. 가끔 그녀의 아름다운 가슴을 보았지만 육체적인 욕망은 느끼지 않았다." 'DNA 이상설'과 상관없이 최소한 잔의 겉모습은 여성스러웠던 것이 분명하다.[99]

9.2. 대한민국에서의 잔 다르크

대한민국에서는 잉글랜드와 싸운 잔 다르크의 모습이 구국 영웅의 모습으로 비춰진 듯, 잔 다르크를 '성녀'라기보다는 '애국자'로 생각하고 있다. 한국에 잔 다르크에 대해 처음 알려진 것은 구한말 개화기 때였다. 경술국치 3년 전인 1907년, 장지연은 잔 다르크의 생애를 다룬 《애국부인전》을 발표했다.[100] 제목 그대로 조선 내의 모든 국민들이 일제의 침탈에 맞서 싸우자는 취지인 듯하지만 현실은… 이때 잔 다르크를 그린 삽화는 갑옷을 입은 일반적인 모습이 아닌 당시 선교사 부인들 차림새이다. 이 작품이 잔 다르크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음을 증명하는 흔적인데, 사실 그보다 먼저 잔 다르크를 처음 알게 된 한국인은 프랑스에 다녀온 민영익과 그 일행이거나 아니면 홍종우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들이 잔 다르크에 대해 전혀 기록을 남기지 않아 추측에 그칠 뿐이다. 일단 최소한 파리를 다녀온 이상 잔 다르크가 어떤 인물인지는 몰라도 파리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잔 다르크의 동상 자체는 봤을 것이다.

유관순이 잔 다르크에 대한 위인전(아마도 애국부인전)을 읽고 감명받았다는 내용이 소개되는데 확실하게 기록된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러모로 겹치는 면이 많아 평행이론, 환생 등의 이야기에 종종 언급된다. 이웃 섬나라에 침범당한 조국을 위해 깃발을 들고 일어서다가 10대의 나이에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은 공통점. 굳이 더 들자면 잔 다르크의 탄생 590주년 되는 해에 유관순이 태어났고, 유관순이 순국한 해는 잔 다르크가 시성된 해이다.

어린이들 위인전 시리즈에 높은 확률로 포함되기도 한다. 설령 빠진 경우라도 유관순의 위인전에 곁다리로 소개되기도 한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펴낸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 1930년 1월, 8권 1호에 실은 위인 이야기가 잔 다르크의 이야기였는데, 그의 성향 상 독립정신을 고취하려는 의도였던 듯. 그 밖에도 독립운동가 한용운의 시 이별 마지막 행에 잔 다르크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는 등, 당시 잔 다르크는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많이 언급되었다.

한편 진취적인 여성의 상징으로, 김우진의 산돼지에서 최영순을, 박경리토지에서도 유인실을 잔 다르크에 비유했다. 현대 한국에서는 여성 개혁가나 운동가, 지도자 등에게 'XX계의 잔 다르크'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는 '추다르크'라는 별명이 붙은 여성 정치인 추미애가 있다. 하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는 개그 코너어떤 여배우, 학력위조범, 그리고 영 좋지 못한 정치인처럼 자기들 혹은 그 주변만 잔 다르크라고 자부하는 경우도 있다.

스토리 잡스에서는 잔 다르크를 신으로 모시는 무당사연이 소개되기도 했다.

세계사 과목 교과서나 참고서에 적어도 이름이 한 번이라도 꼭 나오는 인물이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품종은 아니지만 무궁화 중에 잔 다르크라는 이름의 품종이 있다. #

또한 이순신과 비교되기도 한다.

10. 어록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잔 다르크, 재판관에게.

11. 잔 다르크 신드롬

신기술이 등장했을 때 젊은 세대가 두각을 나타내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100년 전쟁이 시작되는 시기의 전투는 석궁과 기사로 대표되지만, 한 세기가 지나면서 대포의 화력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귀족계급의 고위층은 여태까지 그랬듯이 여전히 중무장한 기사들의 돌격전술에 의존하고 있었다. 반면 100년 전쟁 말미에 등장한 잔 다르크는 대포 위주의 공격적인 전투를 통해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기마충격술에 대한 인상도 옅은데다 귀족계급도 아닌 잔 다르크가 "기사는 장식입니다"를 외치며 위와 같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에 신기술에 대해 신세대가 강세를 보이는 것을 '잔 다르크 신드롬'이라 말하게 되었다. 이전 기술에 대한 경험이 고정관념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새로운 기술에 노출되고 이전 산업에 이해관계를 가지지 않은 초보자가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현실의 대표적 예시인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를 독자적인 상품으로 인식하여 운영체제 개발사로서의 강점을 이용, 로터스나 넷스케이프 등의 유망회사를 밀어내 MS의 급성 성장을 이루어진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2. 대중문화와 잔 다르크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잔 다르크/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1. 별도의 문서가 존재

모티브만 차용한 경우가 아니라, 문서명까지 잔 다르크로 표시되는 경우만 언급.

[1] 초상화를 남기지 못했다. 살아 있을 때 그려진 스케치도 적진인 파리에서 남장을 한 처녀가 군대를 이끌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린 상상화라고 한다. 생전에 스코틀랜드인 용병이 잔의 모습을 그렸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2] 제일 오래된 그림은 1451년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이 그림과 달리 그다지 유명하지 않고 잔 다르크임을 얼른 알아보기는 힘들다. #[3] 어느 쪽이든 '아르크의 요안나'란 뜻이다. 요안나는 잔의 라틴어식 이름.[4] 貞德은 잔 다르크를 음차한 것이다.[5] 잔의 애칭. -ette는 불어의 여성형/지소형 어미로, 단어의 원형에 이 어미가 붙으면 작거나 귀엽다는 뉘앙스를 더하게 된다.[6] 정확한 것은 아니다. 잔 다르크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412년이라는 것도, 훗날 재판을 받을 때 '나이는 몇인가'라는 질문에 '아마 19살쯤?'이라고 대답한 것을 근거로 잡은 것. 프랑스어판 위키백과에도 '1412년 무렵 출생(née vers 1412)'이라 되어있다. 동시대 역사가들이 기록해두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개 농민의 딸 따위가 태어난 것에 관심을 갖는 연대기 작가는 없었다.[7] 현재 센마리팀 주(Seine-Maritime) 루앙 시.[8] 원래 프랑스어로는 '이자벨'이 맞는데 '이사벨'로 표기한 곳이 많다.[9] ‘아르크의 성인 요안나', 축일은 화형이 집행된 5월 30일, 가톨릭의 종교재판에서 파문과 사형을 당하고 성인으로 인정받은 보기 드문 사례다. 이는 파문이 편파적인 파문이라서다. 교황청의 허가 없이 잉글랜드를 지지하는 지역 교회 혼자만의 기준으로 진행했던 재판을 통해 내린 파문이기 때문에, 잔 다르크에게 내려진 파문은 사실상 무효라고 봐야 옳다. 그 이후 역사에서 잔 다르크를 나쁘게 본 대표적인 유명 인물은 적국이었던 영국인 윌리엄 셰익스피어, 기독교를 까는 데 열중했던 볼테르몽테스키외, 음탕한 생활로 개망나니 소리까지 듣던 조지 고든 바이런 같은 사람들 빼고는 정말 몇 없다.[10] 파리의 성 디오니시오, 투르의 성 마르티노, 성왕 루이 9세, 리지외의 테레사(통칭 소화(小花) 테레사)와 더불어, 프랑스의 수호성인. 이 중에서 소화 테레사 성녀는 잔 다르크를 무척 존경했다고 하며, 연극에서 잔 다르크로 분장한 모습도 사진으로 남겨져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잔 다르크와 소화 테레사를 엮는 가톨릭 교회, 신자들도 꽤 있는 듯하다.[11] 여군걸스카우트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미군 군종교구도 미군 병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잔 다르크를 지정했다.[12] 후술했다시피 잔 다르크는 평범한 농민 출신이었고, 본인조차 자신의 나이를 정확히 몰랐다. 귀족도 아닌, 그 시대 농민 소녀의 생일을 알 수 없음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13] 현대에 전해지는 잔의 친필 서명은 Jehamme로 잘못 적혀 있어서 잔이 문맹이었으리란 유력한 증거로 꼽힌다. 사실 성녀로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 글자를 조금 배우긴 했는데 남긴 서명이 링크 포함 3개 정도 되고 그게 다였다.[14] 잔 다르크를 주인공으로 다룬 만화인 마법소녀 타루토☆마기카 The Legend of Jeanne d'Arc에서는 잔 다르크가 Tart라는 이름을 쓴다... 하지만 일본어 표기 문제로 작중에서는 "타루토"라고 나온다.자세한 건 타루토 항목 참조.[15] 잔다르크를 기념하여 1578년에 동레미-라-퓌셀(Domrémy-la-Pucelle)로 개칭되었다. 프랑스 국내에 이름이 같은 곳이 여럿(이곳 외에 동레미-라-칸(Domrémy-la-Canne), 동레미-랑데빌(Domrémy-Landéville)이라는 곳이 있고, 동레미-오-브와(Domrémy-aux-bois)라는 곳도 있었는데 합병개칭되어 소멸) 있는 것도 원인인듯. 인구 125명(2015).[16] 하술하겠지만 잔에게는 오빠 셋과 카트린이라는 누이 하나가 있었는데, 이 카트린이 잔의 언니인지 동생인지가 불명이다.[17] 그래서 이사벨의 성씨 '로메'는 '로마'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다.[18] 교통이 불편하고 위험했던 당시에 일개 농민 여성이 성지순례를 다녀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당시는 중세 시대였고, 교통수단도 발달하지 않았고 도로가 제대로 포장되지도 않았다. 로렌에서 로마까지 지름길로 가려면 알프스 산맥을 넘어야 했고, 아니면 멀리 돌아서 가야 했다. 좋은 길은 통행료가 비쌌다. 도적, 사나운 짐승 등의 위험한 요소들이 도사리는 먼 길을 성지순례할 정도면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이다.[19] 칼레 제외[20] 잔이 5남매의 넷째라면 카트린이 동생이고, 카트린이 언니라면 잔이 막내이다.[21] 세금을 거둬들이고 영주와 마을 사람들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높게 봐야 동네 이장 정도.[22] 동레미에는 잔 다르크의 생가라는 곳이 있다. # 일부러 구경하러 갈 정도는 아니지만 이 근처로 간다면 지나는 길에 들르는 정도의 가치는 있다는 듯. 화요일은 휴관.[23] 1422년까지 헨리 5세가 프랑스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그후로도 접전이 계속되었다. 큰 것만 해도 크라방 전투(1423.7.31)와 베르뇌유 전투(1424.8.17)를 들 수 있고, 잔 다르크가 시농 성에서 샤를 7세를 만난 것이 1429년 3월, 오를레앙 입성은 같은 해 4월의 일.[24] Neufchâteau. 동레미 근처에서는 비교적 규모 있는 마을로, 2007년 기준 인구 7,000명 정도.[25] 이 때 잔에게서 결혼 약속을 받았다는 청년이 법정에 나타나 주장을 하는 바람에 잔이 그걸 해명하고 반박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걸로 보아 사귀는 남자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26] 과학이 발전한 현재에도 깜짝 놀라게 만든 소리라던지 기괴한 소리가 들렸을때 온갖 카더라음모론이 나도는 걸 생각해보자. 아폴로 10호의 우주비행 중 들린 괴음성 사건이라든가... 이것의 정체는 라디오 주파수끼리 부딪혀 생긴 소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물며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아온 중세시대에는 사소한 일에도 신앙적인 의미를 부여한다.[27] 사실 잉글랜드군은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 군사가 오를레앙에 입성하도록 놔뒀다. "원군으로 와봤자 이미 바닥나고 있던 성 안의 식량만 축내서 우리에게 더 유리하게 흘러갈 것"이라고 여겼고, 게다가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소녀 따위가 이끄는 군대가 뭘 할 수 있겠냐?'고 비웃고 만만히 본 모양이다.[28] 특히 투렐 요새 전투에서는 갑옷의 목과 어깨 사이 틈을 정확히 파고든 석궁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근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심각한 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응급처치만 하고 얼마 후 전장에 돌아와 전투를 지휘했다는 점.[29] 사실 오를레앙 해방 과정이 참으로 먼치킨스러운데, 오를레앙 공방전은 1428년 10월 12일부터 1429년 5월 8일까지 계속되었으며 잔이 참전한 날은 1429년 4월 29일이었다. 즉 잔 다르크가 등장하기 전까지 반 년 넘게 계속되었던 공방전이, 소녀 1명의 등장으로 열흘도 채 되지 않아 결말이 난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현대의 과학 상식과도 같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유닛의 등장은 아군에게 실로 엄청난 사기 버프를 주었을 것이다.[30] 공교롭게도 탈보트에게는 잔이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다.[31] 오를레앙 공방전 이후 잔은 '곧바로 랭스로 진격하여 샤를 왕자를 왕으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샤를의 측근들은 '노르망디 탈환이 먼저'라고 주장했다. 이에 논의를 거듭하던 끝에 '랭스로 진군은 하겠는데, 먼저 루아르 강 연안부터 탈환한다.'는 대안이 나온 것.[32] 당시 프랑스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에게 털리고 털린 끝에, 루아르 강을 건너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랭스와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서는 루아르 강을 건너야 하는데, 오를레앙 공방전 당시 오를레앙이 중요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루아르 강에 면한 도시로 아직껏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도시이며 교량이 있었다는 것. 하지만 이 교량은 공방전 도중에 파괴되고 말았고, 루아르 강 연안부터 차지한다는 것도 '교량부터 확보해야 랭스고 파리고 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33] 과거 미군이 운용한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잔혹한 테러범뿐 아니라 민간인들도 집어 넣었는데 처우가 너무나 부실해 논란이 되었다.)나 아프리카에서 지금도 벌어지는 군벌 세력 간의 내전만 봐도 알 수 있다.[34] 단테신곡에도 등장하는 몇 안되는 비 기독교인이 살라딘이다.[35] 설빨간 화살표가 6월 26일부터 7월 17일까지, 오를레랑 전투이후 랭스(Reims)까지의 잔의 진격로다.[36] 물론 전투가 없던 건 아니지만, 그들이 우려했던 대규모 야전은 오를레앙 전투 직후 벌어진 파타이 전투를 제외하곤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소소한 공성전이 대부분이다. 그마저도 잔의 활약으로 대부분 무혈점령했다.[37] 프랑스군은 잔의 사망 이후 부르고뉴파를 다시 포섭한 다음, 무한 물량을 바탕으로 잉글랜드를 밀어붙였다. 반면 방어를 강요당한 잉글랜드는 내부 사정이 겹쳐 제대로 된 반격도 못해보고 쭉 밀린다. 반론으로 당시 남서 프랑스, 즉 보르도 지역과 부르고뉴로부터 프랑스가 협공을 받을 수 있지 않는냐는 의견이 있는데 애당초 부르고뉴는 양 전쟁에서 눈치를 보는 입장이었고, 남프랑스와 북프랑스, 즉 잉글랜드의 오랜 금밭이었던 노르망디 지역의 중요성을 저울질 해봤을 때 어디가 더 중요한지는 명확한 문제다.[38] 이 승리들은 오를레앙과 루아르 강 원정도 포함된 수치이며, 샤를의 측근들이 가장 걱정했을 랭스 진군은 거의 무혈행군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그 길목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곳은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었고 잉글랜드 왕실을 지지하는 트루아였는데, 잔이 편지를 보내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하기를 권유했음에도 트루아 시민들은 잔과 샤를의 입성을 거부하고 성문을 닫고 리샤르 신부를 잔에게 보낸다. 리샤르가 마녀를 퇴치한다면서 잔에게 성수를 뿌렸지만, 잔은 화내거나 겁에 질리지도 않고 경건하게 리샤르를 만났다. 이후 성문을 계속 열지 않아 잔이 할 수 없이 공격 개시를 알리자 트루아 시민들은 알아서 성문을 열고 잔과 샤를을 맞아들였다.[39] 서프랑크 이래로 프랑스 왕이 대대로 대관식을 한 도시다.[40] 왕관이나 왕홀 등 국왕의 상징물은 없었지만, 그리스도교 국가의 국왕 대관식의 핵심은 주교가 축성한 성유(聖油)로 도유(기름 바름)를 받는 것이다. 도유를 받아야만 비로소 합법적인 국왕이 되는 것이다.[41] 사실 시골에서 올라온 소녀가 자신이 진짜로 공을 세우게 되자 들뜨게 되고, 화려하고 비싼 물품 등을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대관식 이후 샤를 7세의 측근 귀족들과 마찰이 더욱 본격화되면서 그들에게 시골 소녀라고 무시당하기 싫어서 그런 듯. 소녀다운 일면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42] 다만 전쟁에서 갑주를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은 단순한 데코레이션 이상의 위력을 지닌다. 이걸 대표적으로 사용한것이 나폴레옹 휘하 기병 지휘관인 조아킴 뮈라. 임진왜란의 홍의장군 곽재우, 동오의 하제 등이 있다. 연전연승하는 잔 다르크의 네임드는 실로 강력한 것으로 잔 다르크를 상징하는 치장은 적이 잔 다르크를 알아보고 공포심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뮈라 말고도 전투기나 갑옷을 화려하게 치장해 자신을 돋보임으로서 적에 공포를 심어준 사례는 제법 된다. 특히 대단히 공격적인 지휘관인 잔 다르크에겐 필요한 행동이었을것이다. 아래부분의 "잔 다르크가 묑에 다가가기만 하자 수비군이 일제히 도망쳤다."는 등의 일은 자신을 상징하는 치장을 함으로서 "잔 다르크가 여기 있다."는것을 시각화시켜 줌으로서 사기를 폭락시킨것으로 당시 이러한 활약상은 소문을 타고 뻥튀기가 되기 때문에 잔 다르크의 존재만으로 당시 잉글랜드군 눈에는 무적불패를 자랑하는 공포의 상징으로 보였을것이다.[43] 그러나 반대로, 대관식 이후 파리 탈환이 성공하지 못한 이후 적군에게는 잔 다르크가 눈에 띈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두려운 상대로 느끼지 않고 오히려 자신감을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결과적으로는 하단에 있는 언급처럼 콩피에뉴 전투에서 부르고뉴군이 화려한 옷을 입은 잔 다르크를 쉽게 알아보고 옷 끝자락을 잡아당겨 사로잡을 수 있었다. 차라리 화려한 옷을 걸치지 않고 그냥 갑옷을 입고 나섰으면 탈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비싼 몸값을 받을 수 있는 잔 다르크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적군이 그냥 평범한 기사인 줄 알고 공격해서 전사했을 수도 있긴 하다. 물론 잔 다르크가 실제로 들떠서 사치를 부리려던 목적이 있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44] 원래 이런 날에는 전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재판에서 집중적으로 추궁당했다. 잔은 "그 날의 전투는 하느님의 뜻으로 한 게 아니라 나의 의지로 한 것이며, 그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45] 중세 시대, 서양에서는 주로 남성들이 전쟁에 참여했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하여 살 곳을 잃고 생계가 막연한 민간인들 중에서 일부 여성들은 전쟁하는 군 부대를 따라다니며 요리와 세탁, 잡일을 하거나 몸을 팔아서 돈을 벌었다. 따라서 잔 다르크도 창녀로 오인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잔 다르크가 죽은 뒤에도 여러 창녀들이 잔 다르크 행세를 하면서 군 부대 내에서 매춘을 벌였다.[46] 그런데 "동정심 많은 잉글랜드 병사"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오히려 잉글랜드의 관대함과 자비심을 강조했을 의도도 있다.[47] 선량공의 아들이자 후계자가 용담공 샤를인데 샤를 7세의 뒤를 이은 루이 11세 때 자신의 서로 떨어진 영지인 플랑드르와 부르고뉴 사이를 가로지르는 땅을 차지함과 더불어 아예 그 정복을 통해 부르고뉴 왕국의 왕이 될 것을 노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잔 다르크를 재판에서 몰아넣은 주교 코숑의 관할 구역이었던 보베를 공격하던 중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이 된 해인 1456년에 태어난 '잔'이라는 소녀가 농성하는 도중 도끼를 들고 닥돌해서 부르고뉴군의 깃발을 빼앗아버리는 믿기지 않는 일로 인해 군사의 사기가 떨어져 보베 점령에 실패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로렌의 낭시라는 지방에서 로렌공의 군대를 상대로 직접 전투에 나섰는데 스위스 용병이 휘두른 무기에 얼굴이 쪼개져 전사하고 시체가 늑대까마귀에게 뜯어먹히고 말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낭시는 잔 다르크의 고향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고 용담공이 전사한 날은 잔 다르크의 생일 하루 전날인 1월 5일이다. 결국 이 일로 인해 부르고뉴 공국과 그 가문은 쇠락해졌고, 용담공 샤를의 유일한 상속자인 공녀 마리와 합스부르크 가문막시밀리안 1세와의 결혼으로 합스부르크에 흡수당해 독립된 부르고뉴 가문의 나라는 사실상 멸망한 거나 다름없게 되었다.[48] 이거에 대해 "국왕과 그 측근이 잔이 적에게 잡히게 만들어서 제거하려고 했다"는 말이 많았다. 게다가 성주 입장에서도 잔이 입성하면 지휘 체계가 복잡하게 돌아갈 수도 있을 테니깐. 물론 현실적으로는 잔까지 들여보내다가 적군까지 같이 휩쓸려서 성이 함락당할까 봐 그런 거라고 봐야 할 듯 하다. 아무튼 하필이면 잔이 입성하려고 할 때 다리가 올려지고 성문이 닫혀졌다는 것이 절묘하다.[49] 높은 탑에서 뛰어내렸는데, 외상은 없었지만 의식을 잃고 쓰러져 결국 다시 붙잡혔다. 나중에 재판에서 이걸 자살 시도로 규정 짓고 몰아붙였다. 참고로 이 때 언급된 다른 죄는 상리스 주교의 말을 훔친 혐의와 부르고뉴의 도적 기사들을 토벌할 때 포로를 처형한 것이었는데, 잔은 "상리스 주교의 말은 내가 타기에 적합하지 않아 값을 지불하고 돌려줬다"고 해명했으며, 도적 기사 포로 처형은 "적군에 붙잡힌 아군 포로와 교환을 시도했으나, 아군 포로가 죽자 재판에 넘겨서 합법적으로 처리된 것"이라고 해명했다.[50] 샤를 7세의 대모이기도 하다.[51] 리브르 트르누아(Livre tournois)는 시대에 따라서 다르지만 1262년 정해진 도량형으로는 고순도 은 80.88g이거나 금화 6.74g으로 정해져 있는 화폐다. 프랑스 위키피디아를 보면 1549년부터 해당 화폐의 도량형 수정이 있다고 하기 때문에 잔 다르크 당시에도 은화 80.88g이거나 혹은 금화 6.74g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은화로 따지자면 은 808.8kg이 잔 다르크의 가치가 되며 금으로 따지자면 금화 67.4kg로 잔 다르크의 몸무게보다도 더 나가는 금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난 액수라고 할 수 있다. 단 프랑스 위키피디아는 리브르로 표기하는데 이게 도량형 리브르인지 혹은 영국 파운드화와 같은 가치를 지니는 리브르인지 리브르 트르누아인지 은화의 하위 단위인 리브르인지 제대로된 구분이 안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독일(독일 위키피디아는 프랑으로 표기하며, 당시 프랑은 리브르 트르누아와 같은 가치를 지닌 화폐였다고 평가받는다.), 영국 위키피디아에 나온 리브르 트르누아로 대체한다. 만약 파운드와 같은 가치를 지닌 카롤루스 대제 시절의 리브르를 뜻한다면 잔 다르크의 몸값은 1만 파운드 무게의 은으로 4톤에 달하는 무게이다. 아무튼 굉장한 양의 액수로, 이 정도 몸값이면 적국의 왕자를 포로로 잡았을 때 몸값 수준이다.[52] 뒤노아, 라히르 등 잔의 장교들이 잔을 무력으로 구출하려고 4차례나 시도했고 이 때문에 부르고뉴 측에서 프랑스에 넘기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53] 근현대의 창작물에선 같은 프랑스인이고 주교라는 신분으로 잔 다르크를 동정하고 목숨을 살리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묘사되긴 하나, 애초에 잉글랜드군에게 잔 다르크의 종교재판을 주선하도록 제일 먼저 요청하고 몸값을 모으느라 안달이었던 이 인간이 잔 다르크를 배려했을 가능성은 낮다. 오히려 코숑은 잔 다르크의 랭스 입성으로 인해 랭스의 주교가 되지 못해 잔 다르크에게 보복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이를 갈던 사람이었다. 참고로 잔 다르크가 죽은 이후 코숑도 곧바로 죽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급사하긴 했지만 그보다 더 나중인 1442년까지 71살로 살만큼 살다 죽었다. 물론 잔 다르크의 죽음을 만든 재판 이후 출세하고 한창 잘 나갈 때 면도 도중 뇌졸중으로 급사해서 벌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코숑 외에도 재판을 주도한 장 르메트르는 루앙 시외의 외딴집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또다른 주도자인 장 데스티베는 루앙 하수구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54] 전술했듯 성녀로 활동하기 시작하고서부터 좀 배우기는 했는데, 결국 자기 이름을 쓸 줄 아는 게 고작이었다.[55] 이 당시엔 성경이 번역되지 않았고, 기도문과 미사가 모조리 라틴어였다. (자국어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은, 1960년대(!)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부터다.) 오늘날처럼 의무교육, 제지술, 인쇄술, 유통 등이 발달하지 못해, 책을 가질 수 있는 사람,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심지어 수도자, 성직자 중에도 라틴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중세의 문맹률은 꽤 높았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의 교육기관으로서 수도원이 그 중심을 이루고는 했지만, 정작 수도자들 중에서도 라틴어로 된 성서를 읽을 수 있는 수도자가 따로 있었다.[56] 한 예로 잔 다르크가 붙잡힌 곳은 콩피에뉴고, 코숑의 관할 구역 보베는 그 콩피에뉴와 인접한 곳이기에 명목상 그가 자기 관할 구역 가까에에서 체포된 잔 다르크를 재판했다. 그러나 재판은 보베가 아니라 루앙에서 열렸는데, 물론 루앙이 프랑스 내 잉글랜드 점령지 중에서 가장 안정적인 탓도 있지만 보베는 이미 잔 다르크의 활약 때 잉글랜드와 부르고뉴가 아니라 프랑스의 관할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칙대로 보베에서 재판을 하면 코숑이 오히려 체포당할 판국이었다. 그래서 보베의 주교가 자기 관할 구역이 아닌 루앙에서 재판을 하는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 (링크)[57] 당시는 교황들이 분열되어 있던 시대인데, 잔 다르크는 로마의 교황을 지지했다. 잔 다르크의 재판이 있었을 당시 로마 교황 마르티노 5세선종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을 때고 그래서 윈체스터 추기경과 친잉글랜드파 프랑스인 보베 주교 피에르 코숑이 정치적으로 제멋대로 재판을 진행할 수 있었다. 물론 잔 다르크의 항소 시도 자체가 막혔고 로마 교황청에 전달되었다고 한들 잔 다르크의 운명이 크게 바뀌었으리라 장담하기는 힘들었지만 말이다. 나중에 명예회복 재판은 교황청에서 정식으로 열었다.[58] 어떻게든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조사관이 빈 손으로 돌아왔음은, 잔과 그 집안이 신앙적으로나 평소에나 마을에서 꽤나 평판이 좋았다는 얘기다. 평소에 부농이라고 제멋대로 하고 다녔으면 같은 고향 사람들이라도 원한을 가지고 있다가 일부러 그 틈에 나쁘게 말했을 테고, 동네 교회 사람들도 뭔가 한 몫 하고 싶어서 잔이 이단이라고 말했을 테니깐 말이다.[59] 정확히 말하면 수고비[60] 풀려난 탈보트는 이후 뛰어난 지휘로 프랑스군을 계속해서 물리치며 백년전쟁의 조기종결을 막다가 마지막 카스티용 전투에서 전사한다. 헨리 6세 1부와 오를레앙의 처녀 등의 작품에서는 잔 다르크의 강력한 맞수로 나온다. 이렇게 적이지만 프랑스인들에게 인상을 크게 남겼는지, 그가 주둔했던 보르도 지방에는 그의 이름을 딴 샤또 딸보라는 와인이 있다고. 여담으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좋아하는 와인이라고 한다.[61] 이 외에도 구출시도가 없던 건 아니어서 잔 다르크의 전우 라 이르가 잔 다르크가 갇혀 있는 루앙으로 군사를 이끌고 닥돌했지만 실패하고 포로가 되고 만다. 한편 이 구출대의 배후에 질 드 레가 있다는 설이 있다. 라 이르는 나중에 풀려났지만 잔 다르크는 끝내 구출되지 못했다.[62] 사실 잔 다르크도 재판이 진행될수록 점점 총명함이 사라지고 증언이 오락가락하고 빌미를 잡힐 만한 말이 나오는 등 약간 실수를 범하기도 했는데, 나이 어린 소녀를 험악한 감옥에 가두고선 심심할 때마다 재판에 관련된 사람들이 인신공격과 고문 위협을 비롯한 협박 등 지속적으로 정신적 고통을 주니깐, 정신이 멀쩡할 리가 없다.[63] 이 때 잔이 살짝 웃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의미였는지 알 수 없다. 일단은 살아났다는 기쁨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신념을 포기했다는 허탈함과 멘탈붕괴로 쓴 웃음을 지었을 가능성도 있다.[64] 원래 잔처럼 종교재판을 받는 여성은 수녀들이 관리하는 수녀원에 수감시켜야 한다. 그러나 잔은 잉글랜드에 넘겨지고 나서 처음부터 남자 간수들이 관리하는 군사 감옥에 갇힌다. 이것은 매우 불공평한 일이다. 물론 수녀원에 수감되어도 엄격하거나 종교적으로 강한 신념을 가진 수녀들이 있었다면 잔 다르크를 호의적으로 대했을지, 아니면 괴롭혔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군사 감옥보다는 대우가 나았을 것이다.[65] 만약 잔 다르크가 화형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확실하게 인정한 수감자로 계속 남았으면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더니 목숨을 위협받고 바로 포기하고 죄를 인정한 어리석은 소녀"라고 조롱거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화형에 처해질 때 오히려 경건한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기존에 잉글랜드에 반대하던 프랑스인들의 반잉글랜드 감정만 제대로 불러일으키고 잉글랜드는 어린 소녀를 석연찮은 재판으로 잔인하게 죽였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66] 프랑스 왕실도 움직였겠지만, 그보다는 잔의 어머니인 이사벨 로메가 교황청에 직접 호소한 것도 한 몫 했다. 이에 교황은 파리에 조사단을 보냈는데, 이 때도 이사벨은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파리로 향해 조사위원들에게 다시 한번 호소했고 그것이 끝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를 기리기 위함인지 오늘날 잔 다르크의 고향인 동레미에는 이사벨 로메의 동상도 서 있다.[67] 뻔뻔하게도 잔의 종교재판 당시에 잔을 고문하자는 주장을 한 사람도 그 중에 있었다.[68] 아주 간단하게 탄소연대측정을 받아서 진품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프랑스 측에서 이를 거부했다. 따라서 학자들 중에선 이 반지를 진품이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69] 위 영상 8분 경부터이다. 이미 늦었다를 'It's too late'라고 친절하게 영어로 말해주는 걸 볼 수 있다.[70] 요한 호이징거의 <중세의 가을>에서는 이에 대해 '당시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는 쟌느 편에서 혹은 쟌느에 대항해서 싸운 모든 류의 장수들이 동레미의 작은 처녀 농부보다 더 크고 명예로운 위치를 차지했다.'라고 하며, 뒤노아, 쟝 뒤 붸이유, 생트라이유, 라 이르 등과 그보다 덜 유명한 사람들이 연대기에 등장하더라도 잔 다르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다만, 같은 책 바로 앞 문단에서 기사도의 아홉 용사군에 대해 '데샹은 막 생겨나던 군사적 애국심에 고대 영웅들에의 숭배를 연결시켜, 그 당시 프랑스인인 베르트랑 뒤 게스클랭을 10번째 용사로 덧붙였다. (중략) 사람들은 11번째 여걸로서 쟌 다르크를 기대한다. 그리고 실제로 15세기는 잔에게 그 위치를 부여하였다'고도 설명하고 있다.[71] 앙드레 보슈아는 '그녀가 살아 있을 때도 프랑스인잉글랜드인은 그녀를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중략) 16세기에 신교도들이 그녀의 동상을 파괴해 버렸지만 다른 구교도 동맹측은 그녀를 수호성인 비슷하게 존경했다. 그 후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화적인 인물로, 겨우 콩트의 소재로 사용하기에 알맞는 인물로 만들어져 버렸고, 잔다르크는 아카데미 회원인 샤프랑이 지은 비루한 시에서부터 볼테르가 지은 파렴치한 시편으로 이행해간다. 간신히 18세기 말기에 이르러서야 그 2번의 재판이 햇빛을 보게 되는 한편, 학자들이 그녀에 관해 언급된 연대기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에 잔의 이야기는 견고한 토대 위에 서게 되었다.[72] Auld Alliance, 스코트어인데, 'Auld'는 오늘날 영어의 'Old'라는 단어다.[73] 미디블: 토탈 워에 등장하는 그 친구들 맞다.[74] 앞의 각주들에서 보듯 위그노들이 잔 다르크에게 비판적이였음은 사실이지만, 그게 프랑스에서 잔이 홀대 받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오히려 존경받는 가톨릭 성인이기에(물론 당시엔 시성이 안 되었으나), 위그노들의 표적이 되어서 까인 것에 가깝다. 일부에서는 20세기나 되어서야 시성된 것을 근거로 홀대론을 펼치기도 하는데, 가톨릭에서 선종 후 한참이나 지나서 시성된 성인은 결코 특이한 사례가 아니다. 단적인 예로, 스콜라 신학의 시작이며 후배 스콜라 학자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며 꾸준한 존경을 받았던 성 보에시우스(470/475?~524)는 사후 1400년이나 지난 1883년에 시성되었다. 잔 다르크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위상이 올랐음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홀대론의 근거는 될 수 없다. 이는 충무공 이순신박정희에 의해 강조되었다는 이유로, 조선시대 내내 충무공이 받던 존경들을 모조리 무시해 버리는 것과 같다.[75] 아이러니하게도 볼테르는 잔 다르크와 똑같은 5월 30일에 사망했다. 1878년에 볼테르 사망 100주년에 프랑스 좌파 인사들이 볼테르 추모 행사를 하려고 하자 프랑스 우파 인사들이 '잔 다르크를 모욕한 사람을 잔과 같은 날에 추모할 수 없다.'며 비난하자 좌파는 '우파에 속하는 왕정과 교회야말로 민중인 잔을 탄압하고 화형시켰다.'고 반박했다. 참고로 볼테르의 잔 다르크 비판과 조롱을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여겨 긍정적으로만 수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볼테르 문서에 있는 그의 다른 글을 보면 잔 다르크에 대한 태도는 여성혐오와 신분차별이 없지 않아 보인다.[76] 어차피 페탱 정권이나 나치 독일 모두 영국과 전쟁중이었다.[77] 종교재판관 중 하나가 유태인이었다는 유언비어를 만들어냈다.[78] 영국인이 쓴 역사서에는 자신들이 아니라 프랑스가 잔 다르크를 죽였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책임 떠넘기기. 게다가 잉글랜드 왕의 섭정인 베드포드 공이 잔 다르크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변명도 한다.[79] 표지에 나온 이름인 편집자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는 유명한 여성참정권(서프러제트) 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장녀이다. 여동생들인 실비아와 아델라도 여성참정권 운동에 참여했다.[80] 잔 다르크는 미카엘 대천사의 차림새를 묻는 종교재판관들의 질문에 "하느님께서 그 분에게 옷을 입히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냐"고 대답했고 머리카락에 대한 질문에 대해선 "머리카락이 없어야 합니까?"라고 되물었다.[81] 공교롭게도 잔 다르크의 원수라고 할 수도 있는 헨리 6세의 왕비 마거릿 앙주의 할머니이기도 하다. 손녀 마거릿이 어렸을 때 돌보기도 했는데, 마거릿이 태어난 게 잔 다르크가 붙잡히기 해인 1430년 3월이니 잔 다르크와 마거릿이 직접 만났을 가능성은 낮다.[82] Pucelle. '처녀'라는 뜻으로, 잔의 별명이기도 하다. 잔은 오를레앙을 수복한 공으로 '오를레앙의 처녀(La Pucelle d'Orleans, 라 퓌셀 도를레앙)'라고 불렸다.[83] 잔 다르크 참전 직전 프랑스군의 상태를 고려해 본다면, 잔의 작전은 조금만 잘못 되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84] 그 때문에 랭스 함락 직후 왕이 대관식을 성대하게 하지 못한 것이 이러한 재정적 압박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85] 잔과 비슷한 유형의 지휘관을 더 뽑으라면 나폴레옹 전쟁의 블뤼허가 있을 것이다. 블뤼허는 비록 무식했고 저돌적인 성격으로 나폴에옹에게 큰 패배를 당한 적도 있었지만 왕을 비롯한 온 국민이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프로이센군을 질타하고 본인부터가 전진원수라는 별명에 걸맞게 나폴레옹에게 끝없이 도전했고 그 도전 동안 그나이제우나 샤른호르스트 같은 명참모들의 말을 항상 경청했으며 마침내 비록 혼자만의 힘은 아니지만 희대의 천재 나폴레옹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86] 달리 말하자면, 기사 중심의 전술을 구사하지 않으면 기사의 필요가 없어지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던 기득권에 위협을 받는다. 기사 기득권은 백년전쟁 당시와 그 직후에는 몰락하지 않았으나, 이후 파비아 전투에서 몰락하고 만다.[87] 플랑드르 지방은 잔 다르크의 적이었던 부르고뉴파가 다스리던 영토였다. 따라서 그 지방에선 잔 다르크를 좋게 볼 이유가 없는데도 루벤스는 그런 그림을 그렸다.[88] 근데 어째 흄의 책에서는 오타인지 몰라도 잔의 나이가 20대 중후반 쯤 나이로 나온다.[89] 해당 책의 저자는 조선 역사에 대한 책도 썼는데, 대표적으로 조선왕조 이전에는 금씨로 불리던 김씨가 음향오행설을 믿어 금씨가 나무를 뜻하는 이씨를 누를 것이라고 두려워한 이성계의 명령으로 김씨로 바뀐 사연이라는, 조선왕조실록이 아닌 야사의 내용을 실제로 기록된 역사의 뉘앙스로 묘사하기도 했다. 꼭 잘못되거나 나쁜 책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비판의 눈으로 보기 바란다.[90] 잔 다르크가 이단으로 몰려 파문당한 시점에서 가족들의 재산도 강제로 동결당했다.[91] 그런데 바로 위에 언급한 잔 다르크를 죽이라고 잉글랜드에다가 사주한 왕비다.(...)[92] 참고로 조르주 라 트레무유도 욜란다와 불화를 빚다가 쫓겨났다. 그의 후손 중 한 명이 그 유명한 카트린 드 메디시스[93] 하지만 바지를 입은 것은 재판과정에서 큰 문제이긴 했다. 잔은 재판이 진행되고 있던 중 갖은 협박과 회유에 시달리다가 결국 5월 24일 남장을 버리고 여자 옷을 입을 것을 승낙했다. 그 결과 종신형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틀후인 5월 26일 다시 남장을 하였다(잉글랜드 병사들이 추행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를 이유로 재차 재판을 연 후 '또다시 이단의 죄에 빠졌다'는 이유로 화형이 선고되었다.[94] 1863년에서 1963년까지 무려 100살까지 살았다. 흠좀무.[95] 다만 그 전에는 마녀에 대해 진지하고 깊숙하게 연구한 역사학자가 없었기에 대중들에게 어느 정도 흥미를 끌 수 있었고, 실제로 제랄드 가드너라는 사람이 머레이의 마녀 얘기를 듣고 빠져들어서 위카(Wicca)라는 마녀에 관련된 신흥 종교를 창시했다고 한다(...)[96] 참고로 머레이의 연구를 인용한 이 책의 저자 메리 데일리(Mary Daly)는 잔 다르크에서 이름을 따온 페미니스트 가톨릭 단체인 성녀 잔 다르크의 동맹의 일원이기도 하다.[97] 머레이는 "그 당시에도 고문은 불법이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당연히 실제 마녀사냥 때는 그런 거 잘 지켜지지도 않았다.[98] 잔의 모친인 이자벨 로메는 무려 80대까지 장수해서 생전에 딸의 명예 회복까지 보고 갔다.[99] 출처 -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권: 잔다르크 편[100] 여기서 말하는 부인은 婦人으로, 결혼 유무와 상관없이 성숙한 여성을 가리킨다. (예전 일본에서도 婦人을 같은 의미로 사용, 여경은 부인경찰관(婦人警察官), 여성 자위관을 부인자위관(婦人自衛官) 등으로 불렀다. 오늘날 일본에서 婦人은 다소 예스러운 표현으로, 婦人보다 女性이라고 쓴다고.) 다른 사람의 아내를 가리키는 부인은 夫人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