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4-19 09:01:43

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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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의 초상화. 니콜라 드 라르질리예르 作, 1724~25년경

1. 개요2. 인물3. 명언과 일화4. 명언5. 비판 - 모순, 혹은 시대의 한계

1. 개요

Voltaire
1694년 11월 21일 ~ 1778년 5월 30일

프랑스의 작가, 철학자, 계몽 사상가. 본명은 프랑수아마리 아루에(François-Marie Arouet). 대표작으로는 '캉디드 혹은 낙천주의(Candide, ou l'Optimisme)가 있다.

2. 인물

드니 디드로, 장 자크 루소와 함께 대표적인 계몽 사상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며, 평생을 권위, 비관용에 맞서 싸웠다. 일대기도 거의 대부분 '무슨무슨 책을 내고 무슨무슨 성명을 발표해 누구누구의 분노를 샀으며 투옥되거나 망명했고 철학자 누구누구를 비판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1]

그의 인생역정 덕분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재치 넘치는 말을 많이 남겼으며 이런 말들은 현대에도 자주 인용되지만, 사실 그 중 태반은 그가 직접 한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나는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당신이 주장할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는 말은 1907년에 에벌린 비어트리스 홀(Evelyn Beatrice Hall)이 볼테르의 친구들(The friends of Voltaire)이라는 볼테르 평전에서 '볼테르의 태도는 이러했다'는 의도로 쓴 글이다.

또한 기독교이슬람을 매우 자주 심하게 비판했으며 대표적으로 잔 다르크에 대해서 음담패설을 하면서 비아냥거리는 작품을 남겼다. 묘하게도 사망일이 그녀가 화형당한 날이었다.[2] 또한 무함마드를 거짓 예언자라고 하며 비판하는 발언도 몇 번 했다.

하지만 무신론자가 아니라 이신론자였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볼테르는 무신론도 비판했다. "나는 언제나 무신론이 어떤 좋은 일(good)도 행할 수 없으며 큰 해를 끼친다고 확신해왔고, 현자가 미신에 반대하는 것과 미친 사람이 신에 반대하는 것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해왔다. 무신론의 체계에는 철학이나 도덕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무신론자들을 믿을 수 없다고 발언한 적도 있다.

또한 이슬람을 비판했다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저서 <휴대용 철학사전>[3]에서는 무슬림 사이에서 여성은 노예 상태이며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무지에서 비롯된 주장이 있다면서 이것은 이슬람의 잘못으로 돌리고 있는 오류라고 언급한다. 그 예로 쿠란에서는 남편이 사망했을 경우 그의 재산에 대한 아내의 권리를 인정하고 딸을 비롯한 여성 유족들도 공평하게 재산을 상속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고 언급하고 무슬림 기혼 여성들도 이혼을 할 권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자신의 가족 여성들과 근친상간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언급하면서 기독교도들은 로마 교황청에서 그런 결혼을 성사시킬 권리를 얻고 무료로 얻는다면서 기독교를 비판한다.

이런 점을 보면 종교 그 자체보다는 종교에서 비롯되는 아집과 독선을 더욱 미워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종교의 배타성을 극도로 혐오했다. 종교로 인해 발생하는 수많은 분쟁과 증오, 그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와 낭비를 비난한 것.[4]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모차르트는 그래서 볼테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볼테르가 죽던 해 '드디어 그 망나니 볼테르가 죽었다더라'라는 글이 담긴 편지를 쓰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그를 무척 흠모했던 것도 잘 알려진 사실. 결국 프랑스에서 마찰이 생겼을 때 프로이센에 머물렀지만, 얼마 안 가 프로이센에서도 충돌을 빚어 그곳을 떠났다.[5] 그래도 평생 서신을 교환하면서 지냈는데, 서신을 읽어보면 과연 이 사람이 왕인가 싶을 정도로 프리드리히의 마음이 느껴진다.

라이프니츠, 몽테스키외 등과 함께 17세기 이래 프랑스에서 유행한 중국의 물결(Chinoiserie, 시누아즈리)을 탄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을 기독교를 믿지 않음에도 윤리적으로 올곧은 사회라고 평가하고,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당시 유럽 사회를 비판하였다.

홍종우가 프랑스 유학시절 그의 사상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사실 볼테르 자신도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 대해 살짝 언급한 적이 있다. # 볼테르는 사마천의 사기에 쓰인 일화를 원대 잡극 작가인 기군상(紀君詳)이 재구성한 '조씨 고아(趙氏孤兒)'를 번안하여 '중국의 고아(L'Orphelin de la Chine)'라는 희곡 작품을 쓴 적이 있었는데, 여기에 '고려(Corée)'가 등장한다. 희곡에는 중국이 칭기즈칸의 타타르(몽골)에 의해 점령되자, 중국인 주인공들이 고려의 지원군을 기다려 중국 황자를 고려로 피신시키려 한다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작품에 실제로 고려인 역이 등장하지는 않으며 작품 정황상 칭기즈칸의 군대에 패퇴한 것으로 묘사된다. 원작인 '조씨 고아'에는 고려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아, 고려의 등장은 볼테르의 완전한 창작인 바, 볼테르가 대체 어디서 고려에 대한 이야기를 주워듣고 작품에 썼는지는 불명.

동시대의 인물은 아니지만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도 볼테르를 좋아했다. 그의 책에서는 볼테르를 거론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술서 《불안》에서 쇼펜하우어가 인용한 볼테르의 명언을 다시 인용했다.

3. 명언과 일화

굉장히 재미있는 성격(?)이라서 그에 대하여 많은 일화들이 전해진다.
  • 작가로도 유명하다 보니 여러 신인 작가들이 글을 보내오기도 했다. 하루는 한 신인 작가의 글을 봤는데 그 작가가 찾아와서 "어떤가요?"라면서 소감을 물었다. 볼테르는 한마디했다. "고칠 부분이 있어서 하나를 고쳤네." 그 작가가 책을 꼼꼼하게 봤는데 어디에도 고친 부분이 없었다. 그래서 고친 부분이 없다고 하자 "더 자세히 보게나. 난 고친 부분이 있거든." 결국 고친 부분을 찾았는데 맨 마지막에 Fin(끝)이 Fi(피. 비웃을 때 내는 그 의성어, 한국어로는 풋 정도일듯)로 고쳐져 있었다...
  • 마녀사냥을 혐오했다. 아예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아직도 마녀사냥이란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쓰레기들이 있으니 제발 좀 막아주시죠?'라고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흡혈귀 사냥 역시 혐오하여 흡혈귀를 잡는다고 무고한 사람, 병자, 장애인을 죽이는 짓을 저지르고 천국간다는 헛소리 말라는 말을 여러번 하였다. 당시 무지몽매한 평신도들은 볼테르의 이런 주장에 치를 떨었으니, 시대를 앞서도 한참을 앞선 셈. 사실 잔 다르크를 비아냥 댄 이유는 그녀가 처음 프랑스를 구원하겠다고 나서면서 댄 이유가 하느님의 계시였기 때문이다. 이성을 그토록 중시하는 볼테르 입장에서 볼 때는 웬 시골 처녀가 갑자기 나타나더니만 뜬금없이 하느님 운운하며 사기극을 벌이는 것으로 밖에 안 보였을 거다. 하지만 아래 비판 부분을 보면 볼테르가 잔 다르크를 비판하는 이유는 종교적인 부분 외에도 여성혐오와 신분차별의 태도가 없지는 않아 보이고, 과연 그가 잔 다르크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 꼭 그가 했다고 할 수 없지만,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 발견에 '사과가 떨어지는 걸 보고 발견한 거 아닐까?'라는 농담을 했더니만 이게 유명해졌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게 너무 유명해지자 그도 "이렇게 소문내자고 한 말이 아닌데, 이러다간 나중에 내가 죽으면 저세상에 있는 뉴턴에게 욕 좀 먹겠군."하며 데꿀멍했다고. 그런데 사실 사과 이야기는 진위 여부는 의심받지만 뉴턴 본인부터가 사실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 아이작 뉴턴국장으로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묻히는 것을 본 후 '영국에서는 일개 교수가 자신의 천직에 뛰어났단 이유만으로 위대한 왕처럼 묻히는 일이 벌어진다'는 식으로 말하였다. 그만큼 프랑스에 비해 영국은 과학을 중시했고, 비교적 계급보다는 실리를 추구했다는 이야기. 산업 혁명이 영국에서 발원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6]
  • 프리드리히 대왕이 편지로 ' 'ARCE\displaystyle {AR\over {CE}} P1\displaystyle {P\over {1}} a cisan\displaystyle {ci\over {san}}''라고 보내자 답장으로 'Ja'(혹은 Ga)라고 한 일이 있다. 일종의 수수께끼인데 앞의 문장은 'Ce soir un souper à sans soucis(AR 아래 CE(CE sous AR), P 아래 1(1 sous P), a, ci 아래 san(san sous ci)를 프랑스어로 읽은 것)'과 발음이 일치해서 '오늘밤 상수시 궁에서 만찬을'이라는 뜻이 된다. 답장은 독일어로는 물론 Ok라는 뜻이 되지만 프랑스어로 읽으면 'J'ai grand appétit.(큰 J/G, 작은 a(G grand a petit))'와 발음이 일치해서 '엄청난 식욕이 돕니다.'가 된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리트
  •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명작 햄릿을 읽어보고 "조야하고 야만적인 작품이다. 어떤 술 취한 야만인이 쓴 작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그 구성이 워낙 파격적이라서[7] 당대에는 기괴하다, 야만적이다, 괴물같다는 평을 많이 받았다. 특히 프랑스는 고전주의 희곡의 본산이었으니 볼테르의 눈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괴상하게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 셈. 이런 관점을 가진 것이 꼭 볼테르뿐인 것도 아니고, 괴테 같은 인물도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작중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위대한 괴물'이라고 평가한 바가 있다. 위대한 작품이기는 한데 기괴하기도 하다는 것. 그나마 작품의 주인공인 빌헬름 마이스터는 워낙 기괴한 물건이라고 보지도 않았는데, 친구가 '괴상하기는 하지만 걸작이다'라고 한번 볼 것을 권하는 장면이다.
  •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은 뒤 이렇게 편지를 썼다. "인류를 비판하는 선생님의 새 책을 보았습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네 발로 기어 다니고 싶어지겠습니다." 5년 후에 루소가 볼테르에게 편지를 썼다. "선생님... 저도 선생님이 맘에 들지 않습니다."

4.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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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위에 적혀 있는 말은 볼테르가 죽기 직전에 했던 유언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8]
나는 신을 경애하고 내 벗을 사랑하고 내 적들을 미워하지 않으며 미신을 경멸하면서 죽는다.
신이 없다면,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자연은 신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관용이란 무엇인가? 인간애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니 서로의 실수를 용서하는 것, 이것이 첫번째 자연의 섭리다.
진실을 사랑하되 잘못은 용서하라.
나는 행복하기로 결정했다. 건강에 좋기 때문이다 [9]
책에서 찾아낸 것은 화로의 불과 같다. 우리는 그 불을 이웃에게 건네고 집을 밝게 하며 다른 이에게 전하여 우리 모두의 것으로 만든다.
인간은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순간 자유가 된다.
사람들은 할 말이 없으면 욕을 한다.[10]
그들은 인간의 권리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것을 야수처럼 주장했다.[11]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12]
행복은 환상에 지나지 않지만, 고통은 현실이다.
몽테스키외는 배운 것에서 거의 항상 틀렸다. 왜냐하면 배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광신도와 노예제의 옹호자와 싸울 때는 거의 항상 옳았다.[13]
내 여행이 어디로 가든, 천국은 내가 있는 곳이다(Wherever my travel may lead, Paradise is where I am).
답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질문으로 사람을 판단하라.

5. 비판 - 모순, 혹은 시대의 한계

여기까지 써진 내용들을 읽어보면 볼테르는 정치적 올바름과 자유스러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성과 인종에 대한 부분에서 그런 모습이 무색해지게 만들 수 있는 행태를 보여왔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물론 이런 걸 일일이 따지면 공자, 루소, 칸트, 마르크스 등 과거의 철학자와 사상가들 중에서 비판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 하나도 없기도 하고, 18세기의 사람을 21세기의 잣대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현대적인 관점일 수 있다.

하지만 볼테르 그 자신도 자신의 시대 이전 사람들과 문화를 자신이 살던 시대 기준으로 비판했기에 일종의 부메랑으로 되어 돌아오는 셈. 동시대에서 그가 그렇게 조롱했던 루소와 다를 바 없이, 이른바 내로남불의 전형인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대에 자신이 올바른 관점에서 얘기하고 행동한 모습과 모순되는 사례들과 의혹들도 지적되고 있다. 물론 무작정 비난하기보다는 시대적으로 앞서나가는 사상을 가지고 시대의 모순을 비판했다는 그도 정작 백인 남성이기에 여성과 다른 인종에 대해 기본적으로는 권리와 배려를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월감과 편견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이런 시대적인 한계와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례로 읽어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 여성에 대한 시각 문제 : 당연히 계몽사상가답게 볼테르 역시 여성 인권에도 관심이 많았다. 궈허빙이 쓴 '프랑스 여성'이란 책에 따르면 디드로, 몽테스키외, 엘베시위스와 함께 성차별을 비난했으며 여성들이 받는 불평등은 사회가 만들어냈음을 주장했다. 또한 자신의 연인이기도 했던 에밀리 뒤 샤틀레의 과학 연구를 도와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다음과 같이 여성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음을 지적하는 주장들이 있다.
  • 우선 론다 쉬빈저의 책 '두뇌는 평등하다'에 따르면 볼테르는 여성은 기계, 화약, 인쇄술, 시계 같은 창의적이고 천재적인 작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상상력과 인내심이 결여되었다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볼테르는 모든 예술은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고 여성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했는데 중세, 르네상스, 그리고 볼테르의 시대에도 여성 예술가들은 남성에 비해서 많지는 않았지만 있어 왔다. 이 얘기를 한 의도가 어쨌든 제대로 조사를 하지도 않고 얘기한 것은 지식인이라는 그의 자세와 품위에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볼테르보다 약간 먼저 시대 사람인 송시열도 의외로 여성에 대해 그 시대 기준으로는 상대적으로 호의적이었다.
  • 위에서 언급한대로 에밀리 뒤 샤틀레의 과학 연구를 도와주었는데, 프리드리히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샤틀레에 대해서 "위대한 사람이지만 그녀의 단점은 여성이라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를 해석에 따라 당시 여성이 받는 차별의 현실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바로 위에 언급된 '여성은 기계, 화약, 인쇄술, 시계 같은 창의적이고 천재적인 작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상상력과 인내심이 결여되었다'라고 한 말을 생각하면 여성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편견이 샤틀레에게도 적용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샤틀레는 후작 부인일 정도로 신분이 높은 여성에 속하고 부유한 이른바 금수저에 해당되는 경우이기에, 아래에서 비판할 평민 여성 잔 다르크에 대한 볼테르의 태도에서 본다면, 만약 샤틀레가 신분이 낮거나 가난한 여성이었다면 볼테르가 호의적으로 대우했을지 알 수 없다.
  • 위에도 언급된 잔 다르크를 다룬 작품[14]에 대한 문제도 있다. 볼테르 본인은 잔 다르크에 대해 개인적인 악감정을 가지기 보다는 종교를 비판하는 의도로 그렇게 썼겠지만, 잔 다르크를 성적으로, 외설적으로 다룬 작품이기도 하다. 가상인물이면 모를까 실존인물로 그런 걸 만들었으니 문제의 소지가 더 있다. 실제로 그 당시에도 논란이 되어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15] 설령 표현의 자유와 잔 다르크 그녀 자체에 대한 비하 의도 없이 종교, 왕정, 중세를 비판했다는 의도로 만들었을지라도 문제가 될 수 있는 게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제의 만행을 비판한답시고 위안부 피해자들 컨셉으로 누드 촬영을 했다가 엄청난 비판에 직면한 네띠앙이승연의 사례가 있다. 이외에도 잔 다르크에 대한 볼테르의 조롱은 그치지 않는데, 잔 다르크가 죽은 뒤에도 20년 넘게 영국군이 프랑스에 주둔했다고 하고, 문맹이라 편지를 보낼 수 없다고 말하며, 미화된 것과 달리 사형 선고를 받자 울부짖었다며 놀리고 있다. 그러나 잔 다르크 등장 이후 백년전쟁에서 영국군이 여태까지의 우위를 잃어버리고 점차 프랑스에서 세력이 줄어든 건 무시하고 있고, 잔 다르크가 문맹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서기에게 구술로 편지를 작성하고 보내게 했다. 경우에 따라선 문맹이라고 조롱하는 모습으로도 보일 수도 있는데, 볼테르의 시대 때도 그랬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인 중세 시대에 살던 시골 평민 여성이 자신에 비해서는 현실적으로 교육을 받기 힘들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과 그 현실에 대한 비판이 없이 문맹이라고 비꼬는 듯이 말하면, 그 말을 긍정적으로 봐야 할까? 그리고 설령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독실하다고 한들, 성녀라고 한들 일단 죽는다는데 충격받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잠깐 목숨을 구걸한 적도 있긴 하지만 결국엔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믿음과 프랑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던 잔 다르크였는데 말이다. 게다가 잔 다르크는 당시 감성적으로 예민한 나이인 19살의 소녀였다. 또한 자신의 저서인 '휴대용 철학사전'에서는 헨리 6세의 왕비인 앙주의 마거릿과 브르타뉴 공작 부인이 무장을 하고 적을 물리친 걸 이야기하면서 이들에 비하면 잔 다르크도 대단한 것이 아니며 그 이유로 잔 다르크는 시골에서 거친 일을 하며 자란 반면 마거릿 왕비와 브르타뉴 공작 부인은 궁정에서 온화한 분위기에서 살아왔기 때문이고 전쟁터로 갈 때 초가집보다는 궁정을 떠나는 편이 더 특별하고 더 아름답다라고 말하는데 이것 역시 어떻게 보면 신분이 낮은 여성에 대한 편견을 드러낸 셈이다. 페미니즘 시각에서 기사도레이디를 숭상하는 문화에 대해서 신분이 높은 여성만 포함되는 거라며 여성 차별적이라고 비판하는 걸 생각해보자. 그리고 잔 다르크는 물론 왕실과 교회를 위해 나선 면도 있지만 자신의 출세욕이나 재물, 권력 등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보다는 자신이 속한 민중들의 공동체를 침략군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전쟁에 나선 시각이 지배적인 반면(볼테르의 사상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잔 다르크 자체에 대한 비판에는 동의하지 않고 민중인 그녀가 왕실과 교회에 이용을 당하고 배신당했음을 강조하곤 한다. 하지만 잔 다르크 개인은 오히려 왕실과 교회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니지 않고 자기 의지를 내세워[16] 그들과 의견이 충돌하는 등 능동적인 행보를 보였다. 아군 측한테도 그랬으니 나중에 적군과 친영파 교회에 의해 재판 당할 때는 당연히 더 그랬다) 마거릿 왕비와 브르타뉴 공작 부인은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왕족과 귀족들의 권력과 영지 싸움, 즉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의 권력과 욕심을 위해 참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볼테르의 사상과 오히려 모순되는 부분이다. 실제로 볼테르는 체제를 비판했으면서 정작 기득권에 편승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 그리고 역시 '휴대용 철학사전'에서는 남성과 여성을 비교하면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서 범죄를 덜 저지른다고 평하면서도 남성이 여성에 비해 일반적으로 육체적으로 우월하다고 언급을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문장에서 정신적으로도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언급을 한다. 물론 이 구절이 쓰여진 부분을 읽어보면 여성의 장점들도 나열하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등 여성이 나라를 지배하고 여성 입법자도 있다는 예도 들어서 여성 비하의 의도로 쓴 문구는 아니겠지만,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있는 표현일 수 있다.
  • 또한 조르주 비가렐로의 '강간의 역사'라는 책에 의하면 볼테르는 남자 혼자 여자를 강간할 수 없다는 당시의 인식에 동의하면서, 칼집이 움직이면 어떻게 칼을 칼집에 넣을 수 있겠냐고 했다고 한다. #
  • 인종에 대한 시각 문제 : 중국에 호의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캉디드에서는 학대당하는 흑인 노예를 묘사하고 노예제에 대해 비판을 하던 몽테스키외를 지지하는 등 그는 인종주의와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에 반대되는 주장들도 있다. 최윤영이 쓴 '카프카, 유대인, 몸'에 따르면 그는 "유대인은 오래 전부터 더러운 인색함을 경멸해 마지 않는 미신과 결합 시키는 무지하고 야만적인 민족"이라며 유대인을 비하했으며,[17] 흑인에 대해서도 편견을 드러내는 말을 남겼다. 1 2 자크 앙크틸이 쓴 '목화의 역사'라는 책에 따르면 볼테르는 낭트의 흑인노예무역회사의 주식 보유자였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진위여부가 불분명해서 자주 언급되지는 않는다. 이 책의 저자가 역사학자가 아니라 방직기술자이기 때문에 진짜인지는 애매한 부분.

[1] 놀라울 정도로 흥미로운 건, 이런 망명 생활 가운데에서도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는 사실이다. 동시대 유럽에서 자수성가한 갑부로는 손에 꼽힐 수준이었다. 쉽게 말해 '가장 부유한 평민'.[2] 1878년에 볼테르 사망 100주년에 프랑스 좌파 인사들이 볼테르 추모 행사를 하려고 하자 프랑스 우파 인사들은 "잔 다르크를 모욕한 사람을 그녀와 같은 날에 추모할 수 없다"며 비난했다. 그러자 좌파는 "우파에 속하는 왕정과 교회야말로 민중인 그녀를 탄압하고 화형시켰다"고 반박했다.[3] 한국에선 민음사에서 '불온한 철학사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4] 실제로 볼테르는 많은 종교를 깠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애고 싶어하진 않았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기 때문이었다.[5] 이 충돌은 볼테르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계몽주의적 사상에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프리드리히는 계몽이 절대적인 군주의 주도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계몽주의보다 군주의 절대성을 우선시했다. 볼테르는 자신의 철학이 현실에 반영이 되길 원했지만(그의 사상은 절대 군주의 전제성에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절대적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현실에는 그의 철학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6] 참고로 볼테르가 세상을 떠나고 13년 후인 1791년 7월 11일에 유해가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루이 15세의 쾌유에 감사하며 바쳐진 교회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위인들의 묘지로 바뀌었고, 볼테르는 여기에 안장될 역사적 위인으로 선택된 것.[7] 당시 희곡의 철칙이던 삼일치의 법칙은 완전히 무시해버렸고, 장과 막 구성도 파격적이었다.[8] 죽기 전에 한 성직자가 '악마를 부정하라'고 했는데, '이런 이런... 이보게, 지금은 새로운 적을 만들 때가 아닐세...'라고 답했다고 한다.[9] j'ai décidé d'être heureux parce que c'est bon pour la santé[10]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산 명언 1위이다. 그리고 심심해서 욕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논리 싸움에 패배하여 말문이 막혔을 때 욕설로 타파하려는 저급한 행동을 가리킨다. 불어 원문은 On parle toujours mal quand on n'a rien à dire. 영어 번역으로는 One always speaks badly when one has nothing to say. #[11] 『풍속시론』(Essais sur les mœurs)에 나오는 말. 과격한 혁명가들에 대한 코멘트로 보이는데 정확한 설명 수정바람.[12] 똘레랑스(관용)을 의미하는 명언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볼테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앞서 말한 볼테르의 친구들(The friends of Voltaire)라는 책에 실려있는 문구가 와전된 것이다. 다만 이 책의 작가인 Evelyn Hall은 1935년의 인터뷰에서 이 말의 원전은 볼테르가 '자기 머리로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이들도 그럴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십시오'라고 남긴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는데 이 역시 확인되지는 않았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1770년 2월 6일 르 리슈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I detest what you write, but I would give my life to make it possible for you to continue to write'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그런 내용이 실려있지 않다는 말이 있다. 일단 프랑스어판 위키백과에는 Evelyn Hall이 이 말을 했다고 적혀 있다.[13] 몽테스키외가 노예제를 비판하자 지지하며 했다는 말이다. 도대체 이게 칭찬이야 욕하는 거야 그런데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둘 다 한편으로는 인종적인 편견을 담긴 말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14] 조지 고든 바이런은 이 작품을 읽어보고 로버트 사우디가 쓴 잔 다르크를 성녀로 묘사한 서사시와 비교하며 잔 다르크는 광신적인 프랑스 창녀라고 말을 남겼다. 아무래도 볼테르의 작품이 좀 더 마음에 들었던 모양.[15] 금서로 지정될 정도로 논란이 되고 비판을 받아서 후회가 되었는지, 볼테르는 그 작품에 대해 부끄러워했다고 하며, (문제가 되는 내용들이) 사본이 변질되고 불량품이라면서 진본이 아니라고 변명도 했다고 하며, 그 작품을 쓴 1730년의 30여년 뒤인 1762년에 문제되는 부분을 편집해서 출간했다고 한다. 그러나 볼테르의 평소 행태와 1764년에 출판된 '휴대용 철학사전'에서도 잔 다르크를 깎아내리는 표현을 한 걸 보면 반성의 태도가 아니라 거짓말과 책임 회피가 거의 확실하므로 더욱 비판받을 수 밖에 없다.[16] 볼테르라면 오히려 하느님의 계시라는 핑계라고 해석하여 환호했을 것이다. 물론 잔 다르크가 실제로 그랬다는 보장이야 없지만.[17] 볼테르도 돈을 아는 지인 한테 꽤 빌려주었는데 그 과정에서 유대인들을 만나고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유대인을 싫어하게 되었을 거라고 추축이 된다. 좋은 자료로 캉디스를 읽어 보길 바란다. 캉디스는 볼테르의 인생이 꽤 담겨있음으로 Candide translated and edited by Robert M. Adams: A new translation backgrounds and criticism 을 보면 왜 이 책을 썼는지, 그 배경은 무엇인지 잘 알수 있다. 그러나 자기와 주변의 경험만으로 특정인종과 집단에 대해 혐오하는 발언을 하는 게 지식인으로 적절한 태도인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