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21 23:01:50

루이 14세

파일:240px-Grand_Royal_Coat_of_Arms_of_France.svg.png
프랑스 부르봉 왕조 국왕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1px"
제1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앙리 4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루이 15세 루이 16세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루이 17세) 루이 18세 샤를 10세 (루이 19세) (앙리 5세)
프랑크 · 서프랑크 · 카페 · 발루아 · 제1공화국 · 7월 왕정 · 프랑스 황제 · 프랑스 대통령 }}}}}}
파일:Louis_XIV_of_France.jpg
이름 루이 드 부르봉
(Louis de Bourbon)
출생 1638년 9월 5일
프랑스 왕국 생제르맹앙레 생제르맹앙레 궁전
사망 1715년 9월 1일 (76세)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베르사유 궁전
재위 프랑스 왕국의 왕
1643년 5월 14일 ~ 1715년 9월 1일
배우자 스페인의 마리 테레즈 (1660년 결혼 / 1683년 사망)
맹트농 후작부인 프랑소와즈 도비네 (1683년 결혼)
자녀 루이
아버지 루이 13세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안
형제 필립 1세
서명 파일:1280px-Louis_XIV_Signature.svg.png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과 즉위2.2. 재위 초반2.3. 자연국경설과 잇따른 전쟁2.4. 위그노 탄압과 낭트칙령 철회2.5. 장기 집권2.6. 죽음
3. 가족관계
3.1. 선조들3.2. 본부인과 자녀들3.3. 정부과 사생아들3.4. 여자 관계
4. 일화
4.1. 백성들에게 사생활을 공개4.2. 예술을 사랑한 왕
5. 전쟁과 루이 14세6. 트리비아7. 창작물에서

루이 14세는 영웅 같은 자태에 위엄이 배어있어서, 그의 작은 몸짓조차도 오만함이 아닌 장중함으로 보였다. 그 완벽한 표정와 위엄서린 분위기는 조각가가 모델로 삼고 싶을 정도이고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우아함과 매력을 지녔다.
생시몽 공작

1. 개요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의 3대 왕. 별명으로 태양왕(Le Roi Soleil)이 있다.

근세 이후 타국에 비해 중앙집권적이었던[1] 프랑스에서도 가장 강한 권력을 가졌던 왕. 거대한 궁궐이자 당대 프랑스 문화를 집대성한 베르사유 궁전을 개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곧 국가다(L'Etat, c'est moi(레따 쎄 무아))라는 말도 루이 14세가 한 말로 유명하지만, 실제로 그가 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루이 11세가 '짐이 곧 프랑스다'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즉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ouisXIV-child.jpg 파일:external/4.bp.blogspot.com/Louis_XIV_1648_Henri_Testelin.jpg
어린 시절 10살 때의 루이 14세, 앙리 테스틀랭 작, 1648년
위의 초상화는 미화된 초상화일 가능성이 크다. 프롱드의 난 때문에 쫓겨다니던 어린 시절 당시 우둔하고 뚱뚱하다는 조롱을 받고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후대에 나이가 들어서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 또 애매하다. 저 시대 기준으로 뚱뚱하지만 현대에서는 다를지도

부모인 루이 13세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 Anne of Austria, 오스트리아의 안)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극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루이 14세의 탄생은 국가적 축복을 받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불행 그 자체였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지나쳤던 루이 13세는 3살배기에 불과한 아들이 제대로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정없이 매질하는 모진 아버지였다. 사도세자 처지 그러던 루이 13세가 1643년 급서하면서 5살이 채 되기 전에 즉위했고, 어머니가 섭정을 했으나 대부분의 국사는 추기경이자 재상인 쥘 마자랭(리슐리외의 후임자)이 1661년까지 맡았다. 23세에 친정을 시작한 것.
파일:lois.ivx.young.jpg 파일:lois.ivx.younger.jpg
제우스로 분장한 루이. 샤를 푀르종(Charles Poerson) 작, 1653년경 1654년의 루이. 유스투스 판 에그몬트(Justus van Egmont) 작.
루이 14세 스스로가 가장 좋아했던 그림[2]

1648~1653 연간의 프롱드의 난[3] 때는 어머니와 남동생 필리프와 함께 수도 파리를 떠나 프랑스 각지로 쫓겨다니며 오랜 피난 생활을 했었다. 성난 반란군들이 모후인 안 도트리슈의 마차를 둘러싸자 모후가 울부짖으면서 "이 아이가 프랑스의 유일한 미래" 라면서 아들 루이를 내보인 덕에 겨우 풀려난 적도 있다고 한다.

프롱드의 난을 진압한 야심찬 왕족들에게서 감시를 받거나 행차할 때 귀족들이 마차를 멈추지도 않고 지나가는 등 무시당하는 일도 예사였으며, 하녀들조차 조롱하며 살았다고 한다. 또한 반란에 시달리지 않았던 평화로운 시절에는 위에 서술한 대로 나이에 맞지 않는 엄한 교육에, 오래 살아야 한다는 미신적인 이유로 남동생 필리프와 함께 여자아이 옷을 입고 신라 혜공왕? 살았다고 한다. 이때의 암울했던 기억이 절대군주가 된 이후의 행적, 즉 일을 열심히 한 대신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하고 식탐 대왕이 된 것, 귀족들을 신임하지 않으며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배경이라는 시각도 많다.[4]

2.2. 재위 초반

파일:external/www.historytoday.com/Louis-xiv.jpg
1661년 그의 모습. 샤를 르 브룅(Charles Le brun) 作

1661년 루이 14세는 친정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왕이란 무엇인지 보여주기 시작했다. 귀족들을 무척 싫어했기에 정치적으로는 귀족들의 참여를 제한하는 한편 콜베르 총리를 비롯한 총명한 부르주아 출신들을 발탁해 요직에 앉혔다. 또한 지방 곳곳에 직속 관리를 파견하여 귀족들을 감시했다. 반면 귀족들에게는 '국왕 직속 수건 담당', '국왕 직속 낭독인', '국왕 직속 심부름꾼'과 같은 차마 웃지 못할 사이비 같은 직함을 하사해 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5] 그는 왕권을 강화하려고 궁정 사람들을 과도한 에티켓으로 옥죄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교양인지 일일이 규정했으며, 이러한 규범은 남녀노소와 직책별로 달랐다.

그는 스스로 나라의 핵심이 되었고, 정치적으로든 사생활에서든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직성이 풀렸다. 이러한 심리는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가 자신에게 향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배우와 비슷한 것이었다. 실제로 루이 14세는 좁게는 궁정, 넓게는 나라 전체가 하나의 무대며 자신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권력자가 예술을 향유함에 있어서 루이 14세가 다른 왕들과 가장 남달랐던 점은 그 스스로가 예술의 주체, 즉 아티스트였다는 데 있다. 근사한 극장을 지어주고, 예술가들을 데려와서 VIP석에 관람하고 공연이 끝나면 박수로 답례하는 걸로 루이 14세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천성이 연예인이었다. 배우에게 향하는 박수조차 질투한 그는 자신이 무대에 서는 쪽을 택했다. 후대의 네덜란드계 미국인 미술사학자 헨드릭 빌렘 반 룬은 이런 루이 14세에 대해 "왕으로 태어났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한량이 되었을 인물"이라고 악평했다.

어린 시절 자신을 공격했던 파리가 영 불편했던 그는 궁정에 오래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고 아버지 루이 13세가 사냥용 천막으로 이용하던 베르사유를 자주 찾다가 아예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1662년, 친정을 시작하는 동시에 공사를 시작한 베르사유 궁전은 20년 동안의 공사 이후 일단락되었다.[6] 이사를 하고도 건설이 계속 진행되었으니까. 수십 년에 걸친 공사 결과, 오붓한 분위기의 사냥용 천막이었던 베르사유는 1만 명 이상의 왕실 식구가 상주하며 1달을 머물러도 다 돌아보지 못할 만큼 거대한 궁전으로 탈바꿈했다. 이 럭셔리한 궁정은 미적 스케일에 있어서 유럽 모든 왕실을 단연 압도했다.[7]

화려하고 장대한 베르사유 궁전 건설 이면에는 재무 장관이던 니콜라 푸케에 대한 루이 14세의 질투심이 있었다. 파리 근교에 멋진 정원을 갖춘 저택에서 살던 푸케는 루이 14세를 자기 저택에 초대했다. 그런데 왕궁보다 멋진 저택에서 사는 푸케에게 질투를 느낀 루이 14세는 이런저런 죄목을 붙여 그를 실각시켰다. 그리고 왕의 권위야말로 절대적인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푸케의 저택보다 더 화려한 새 궁전 건설에 나섰는데, 그렇게 지어진 것이 바로 베르사유 궁전이다. 문제는 무리수를 두어 베르사유 궁전 짓는다고 국가 재산을 많이 날려먹었다. 국민들에게도 증오를 받은 것도 덤.

2.3. 자연국경설과 잇따른 전쟁

파일:800px-Adam_Frans_van_der_Meulen_-_Louis_XIV_Arriving_in_the_Camp_in_front_of_Maastricht_-_WGA15110.jpg
불란 전쟁 중 마스트리흐트 공성전을 지휘하는 루이 14세.
아담 프란츠 반 데르 묄렌(Adam Frans Van der Meulen) 작, 1675년

그는 당시 찰스 1세, 올리버 크롬웰, 찰스 2세 등을 거치면서 네덜란드를 제치고 점점 부강해지던 영국에게 맞먹기 위해 세금을 왕창 거두었다. 영국에 대한 경쟁 심리는 자연히 침략전쟁으로 이어졌다. 루이 14세는 피레네 산맥알프스 산맥, 라인강이 프랑스의 국경이라고 선언했다. 이른바 '자연 국경 설'인데, 프랑스의 국경은 하느님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그것은 자연 환경에 의해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건 뭐...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렇게 말해놓고는 라인 강을 넘어서 침략전쟁을 계속 벌였다(…). 그럼 그 말은 왜 한 건데? 내 건 내 거 네 건 내 거[8][9]

대표적인 전쟁으로는...
  • 1667년과 1672~1678년의 영란전쟁 개입. 영국네덜란드 사이의 전쟁을 틈타서 처음엔 네덜란드를, 나중엔 영국 편을 들며 여러 차례 벨기에(당시 스페인령 네덜란드), 네덜란드의 영토를 마구 빼앗았다. 그 유명한 "운하를 터트려 간신히 기사회생"한 전쟁 가운데 하나. 찰스 2세와 비밀 동맹을 맺고 네덜란드를 털러 갔지만... 전쟁은 졌다. 그러나 이 전쟁 때문에 네덜란드의 피해도 만만치 않아서 열강에서 탈락하는 계기가 된다.
  • 1683-84년의 "재결합 전쟁"과 뒤이은 1688~1697년의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 (War of the League of Augsburg. 혹은 9년 전쟁, 대 동맹전쟁). 독일의 팔츠 지방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며 침입하여 신성로마제국,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다구리를 맞았지만 전체 병력은 프랑스가 더 많았다(…). 프랑스 40만 대 동맹군 35만...대충 협상 맺고 끝. 본격 왼쪽 퍼런거
파일:Louis_XIV_1694.jpg
1694년의 그.
이아생트 리고(Hyacinthe Rigaud) 作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10] 스페인카를로스 2세가 급서하면서 그 영토를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 앙주 공작 필리프(Philippe, duc d'Anjou = 펠리페 5세)에게 물려주었는데[11] 이것을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레오폴트 1세[12]가 딴지를 걸면서 전쟁이 터졌다. 이번에는 프랑스 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영국의 다구리였다. 이것이 1702년부터 1714년까지 벌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다.[13]

다만 루이 14세가 이런 모험을 강행한 것 자체는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그 다굴을 맞고도 버틸 만큼 프랑스의 국력이 우수했기 때문이다. 실제 전쟁 양상 자체가 대체적으로 프랑스가 유리하다가 사부아 공 외젠, 말버러 공작의 뛰어난 능력에 결정적 전투에서 패하여[14] 상황이 역전되다가 다시 결정적인 전투에서 이기는 것을 반복하였다. 그러나 장기전으로 돌아가자 연합국도, 프랑스도 지친 데다 프랑스의 재정은 식민지가 있다고 해도 이제 전쟁을 버티기엔 무리였고 국민들도 전쟁에 지친 상태였으며 무엇보다 영국이 엄청나게 성장하여 프랑스를 방해했다.[15]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막바지에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루이 14세는 화평을 제의했는데 네덜란드, 영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은 평화조건 40개를 제의했다. 그중 스페인에 있는 손자를 더 이상 지원해선 안된다는 요구조건을 보고 "내가 전쟁을 해야 한다면 나는 적들과 할 것이다. 상대는 나의 손자가 아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는 태양왕이자 절대왕정의 상징이었던 루이 14세는 놀랍게도 프랑스 백성들에게 대자보를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개인적인 희생을 치르고 명예가 훼손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 백성들에게 필요한 평화를 곧바로 얻기 위해서는 내 성품에 맞지 않는 일이라도 기꺼이 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우리 스스로 지킬 준비를 하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대안도 더이상 찾을 수 없다. 나는 우리 프랑스를 누르기 위해 무력과 책략으로 모인 모든 힘보다도 통일된 프랑스가 더 강력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분의 도움을 청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대결에는 여러분의 안전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힘을 모은다면 적은 우리가 결코 부당하게 대우받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왕이 직접 백성들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대자보의 파급력은 엄청나서 많은 돈과 지원병을 모을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프랑스의 빌라르 장군은 말플라크 전투를 치름으로써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경험이 애국주의에서 비롯된 자신들의 힘을 평민들이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어 수십 년 후 프랑스 대혁명에 영향을 끼쳤다는 견해도 있으니 부르봉 왕가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독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전쟁은 질질 끌다가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이 오스트리아 황제로 즉위하게 되자 영국과 네덜란드가 이탈하여 프랑스의 우세로 다시 바뀌었고, 결국 오스트리아는 위트레흐트 조약(Utrecht, 1713)과 라슈타트 조약(Rastatt, 1714년)을 통해 프랑스의 스페인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 이거 저거 받아내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 조약에 따라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의 왕이 되는 게 인정되었으며 프랑스의 실질적 스페인 지배권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대신 서로 병합하는 것은 금지한다는 내용이다.[16] 따라서 두 왕국이 향후 합쳐질 위험은 사라졌고[17],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의 적법 계승자로서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의 스페인 소속 영토를 대부분 따냈다. 거꾸로 루이 14세는 전쟁 중 왕세자와 왕세손 등손자들을 잃는 등, 말년에 주요 계승자 대부분이 요절하여 적출 소생으론 루이 15세만 남았다.

2.4. 위그노 탄압과 낭트칙령 철회

파일:S21c.jpg
1685년의 루이 14세.
앙리 테스틀랭(Henri Testelin) 作

또한 1685년에는 개신교에 대한 차별 금지를 천명한 낭트 칙령을 철회하는 최악의 오판을 저지른다. 이 퐁텐블로 칙령은 국가의 종교를 가톨릭으로 통합해 국론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였는데, 덕분에 프랑스의 칼뱅파 개신교 신자들인 위그노(Huguenot) 25만 명이 네덜란드, 영국, 독일, 스웨덴, 덴마크 등으로 대거 탈출했다. 문제는 이들이 대다수가 상공업에 종사하고 있었다는 것. 특히, 수공업의 경우는 거의 마비상태였다.[18]

그렇다고 뜬금없이 1685년에 갑자기 낭트 칙령이 폐지된 것은 아니었고, 집권 초반 절대왕정을 구축하고 했고, 종교 일원화와 더불어 위그노 탄압이 "하나의 국가, 하나의 국왕, 하나의 종교"를 모토로 이미 시행 중이었다. 조부 앙리 4세는 명군으로 평가받지만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은 프랑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톨릭교도들에게 위대한 국왕의 오점 취급을 당했고 칙령이란 것은 하나의 영구적인 법률이 아닌 국왕의 명령에 불과했기 때문에 폐지라기보다는 철회라고 봐야 한다.[19]

위그노 탄압은 낭트칙령 폐지 전부터 이미 대놓고 시행했는데 구체적으로는 위그노의 자녀를 강제로 빼앗아 가톨릭 집안으로 양자로 보내거나 위그노 가정에 당시 용기병(龍騎兵, Dragoon)을 보내서 개종할 때까지 집에서 숙식을 해결(?)[20]하게 했다. 이런 식이었으니 개신교도들은 울며 겨자 먹기라도 루이14세가 빨리 죽기를 기원하며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 모두가 개종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절대왕정 특성상 아첨꾼들이 북 치고 장구 치며 실적을 올리고 과장한 것을 루이 14세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프랑스에는 더 이상 개신교도가 없다" 는 것을 선언하고 낭트 칙령을 폐지한 것이다.

물론 낭트 칙령의 철회의 부정적 효과에 대해서는 반론도 존재한다. 1684년부터 1717년까지의 경제적 활력 상실은 위그노의 집단 이주보다는 2차례의 전쟁(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이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오히려 프랑스에 잔류한 대부분의 위그노[21]들은 거짓으로 개종한 다음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외국에 나가 있는 위그노들과도 거래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18세기를 특징짓는 프랑스의 무역 확장[22]에 기여했다는 분석도 있다.

2.5. 장기 집권

파일:루이 14세.jpg
중장년기. 대 니콜라 르네 졸랭(Nicolas-René Jollain Le Vieux) 작

1715년 9월 1일에 죽을 때까지 왕좌에 앉아 있었는데, 77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6일 전이었다. 현대를 기준으로 해도 꽤나 장수한 셈. 그의 치세기간은 최종적으로 72년 3개월 18일이었는데, 유럽의 군주 중 가장 오랫동안 재위했다.

그를 능가하는 왕은 태조왕(93년), 장수왕(78년) 등이 있다. 그 외의 랭킹으로는 고대 이집트 파라오 포프 2세(90년, BC 2566-2476)가 있다. 포프 2세나 태조왕의 경우 과장되었다는 해석이 많은 것을 보면 사실상 장수왕 다음으로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럽에서 2번째로 오래 재위한 사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프란츠 요제프 1세로써 1848~1916, 즉 68년간 재위했다. 이분은 조만간 엘리자베스 2세에게 따라 잡힐 듯.[23]

루이 14세의 치세 말년에 들어서 프랑스에는 천연두와 홍역 등의 전염병이 창궐했다. 이 때문에 루이 14세는 자신의 자손들이 전염병으로 몰살당하는 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1711년경에는 왕세자 그랑 도팽 루이가 죽었고,[24] 왕세손 프티 도팽 루이도 29세에 천연두로 급사했다. 둘째 손자 필리프는 스페인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펠리페 5세)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결과로 프랑스 왕위 상속권을 영구적으로 포기했다. 셋째 손자 베리 공작도 급사했다. 결국 맏증손자마저 천연두로 사망하자 왕위 계승을 할 만한 적통은 둘째 증손자 루이 15세만이 남았다. 이 계승한 장수왕이나 영조, 빌헬름 1세보다 한수 위.

참고로 이러는 동안 이웃 나라 영국에서는 그의 재위 동안 스튜어트 왕조의 찰스 1세, (청교도 혁명 후) 올리버 크롬웰리처드 크롬웰의 공화정, (왕정복고 후) 찰스 2세, 제임스 2세, (명예혁명 후) 윌리엄 3세메리 2세(공동 왕), 앤 여왕, 하노버 왕가의 조지 1세가 차례로 재위했다. (왕이 일곱, 호국경이 둘)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던 절대왕정국가였던 영국이 왕권과 의회의 대립에서 의회가 확고한 승리를 거두면서 입헌군주제 국가가 된 기간이었던 것이다.

2.6. 죽음

파일:20180506_155313.png
말년에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와 만난 루이 14세.
루이 드 실베스트레(Louis de Silvestre) 작, 1715년

앞서 말했듯 루이 14세의 말년은 매우 비참했기에, 그는 죽으면서 4살배기 후계자에게 다음과 같은 참회의 말을 남겼다.
“짐만큼 무수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반드시 피하도록 하라. 그 전쟁들은 신민들을 파멸시켰다. 짐은 종종 전쟁을 너무 가볍게 여겨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생각하였다.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짐이 밟은 나쁜 길을 따르지 말라. 국민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는 정치를 하여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했었다"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25][26]

프랑스 국민들은 그가 죽자 대다수가 기뻐했다고 전한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려온 해방을 주신 하느님 앞에 감사하며 크게 기뻐했다"란 말도. 또한, 따져보면 프랑스 혁명의 씨앗도 이 인간. 프랑스 혁명 이후로 부르봉 왕조는 결국...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결과적으로는 업적보다는 비판점이 많은 암군에 가까웠다고 봐도 되겠다. 진시황이나 한무제, 세조필도 나고 말이다. 다만 자신의 왕국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 하나만은 충분해서, 죽을 때까지 성실하게 집무했다. 이것도 진시황 비슷하긴 하지만...

그가 죽고 나서 부검된 뒤 심장은 암모니아에 담겨져 남았는데 프랑스 혁명 당시 왕속 물건들을 내다팔던 이들이 100프랑으로 팔아치웠다. 이걸 영국 성공회의 윌리엄 버클랜드 주교가 1,000프랑에 사가면서 영국으로 건너갔는데 주교의 후손인 의사 프랭크 버클랜드(1826~1880)가 이걸 먹어치웠다... 이 사람이 워낙에 별미를 찾던 미식가로 전 유럽에서 알아주던 괴인이긴 하지만.[27] 그런 버클랜드가 루이 14세 심장을 먹어보곤 특별한 맛은 없고 그저 세상에서 왕의 심장을 먹어본 유일한 사람이라는 자랑거리가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3. 가족관계

파일:Louis14-Family.jpg
그리스 신들로 묘사된 루이 14세와 가족들.
왼쪽부터 고모였던 앙리에타 마리[28], 동생 오를레앙공 필리프, 조카 마리 루이즈, 제수 앙리에타 오를레앙, 어머니 안 도트리슈[29], 루이 14세[30]와 좌우로 있는 작은아버지 가스통의 네 딸, 우측 밑에 왕비 마리 테레즈[31], 왕비 주위에는 자녀였던 그랑 도팽 루이, 공주 마리 테레즈, 왕자 필리프 샤를이 있다. 밑에 있는 액자에는 이미 죽은 두 딸 안나 엘리자베스와 마리아 안나가 있다.
장 노크레(Jean Nocret) 작, 1670년

가족관계가 워낙 복잡해서 아예 항목으로 분류해 서술한다.

3.1. 선조들

3.2. 본부인과 자녀들

파일:루이 14세와 가족들.jpg
부르봉 왕가의 4대가 모두 모인 단체 초상화.
왼쪽부터 루이 15세, 그랑 도팽 루이, 루이 14세, 프티 도팽 루이.
니콜라 드 라르질리에르(Nicolas de Largillière) 작, 1710년경 [32][33][34]
  • 루이 14세(1638년 9월 7일 ~ 1715년 9월 1일)
  • 스페인의 마리 테레즈[35](1638년 ~ 1683년): 스페인 왕 펠리페 4세의 딸
    • 그랑 도팽 루이(1661년 11월 1일 ~ 1711년 4월 14일) - 본래대로라면 루이 15세가 되어야 하지만 1711년 사망[36]했다.
      • 손자: 프티 도팽 루이 - 본래대로라면 루이 16세가 되어야 하지만 1712년 2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 증손자: 루이 - 본래대로라면 루이 17세가 되어야 하지만 1712년 겨우 5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 증손자: 루이 15세 - 원래대로면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
      • 둘째 손자: 펠리페 5세(1683년 12월 19일 ~ 1746년 7월 9일) - 스페인의 왕.
      • 셋째 손자: 베리 공작 샤를(1686년 7월 31일 ~ 1714년 5월 5일)

성인이 된 자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5살이 되기 이전에 죽었다.

3.3. 정부과 사생아들


이 밖에도 수십 명의 정부 사이에서 수백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정체가 확실하지 않다.

3.4. 여자 관계

스페인 출신으로 정략결혼이었던 아내 마리 테레즈[42]와는 소원한 편이었다고 한다. 경건한 분위기의 스페인 궁정에서 자란 데다가 재치가 없었던 그녀가 유럽 제일의 화려한 궁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루이 14세는 애정이 없었던 것과는 별개로 왕비로서는 나름대로 권위를 세워주었다. 애인들과 즐길 때 즐기더라도 잠은 대부분 아내의 방에서 잤고, 부부관계도 어느 정도는 챙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이가 더 나빠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루이 14세는 "그대가 짐을 처음으로 슬프게 하는군."이라고 말하며 슬퍼했다.

여담으로 마리 테레즈는 성품이 선량하긴 했지만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만연한 근친혼의 후유증 때문인지 다소 우둔했다고 한다. 때문에 마리 테레즈가 굶주린 백성에게 브리오슈라도 주자고 했던 것이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로 왜곡된 것 아니냐는 말도 있을 정도다.
정실 왕비인 마리 테레즈와의 사이에 여러 아이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적손(嫡孫)은 오로지 뒷날 루이 15세가 되는 증손자만이 남았다. 수많은 메트레상티트르(Maitresses en Titre), 즉 왕의 정부들에게서 사생아들을 보았고 자녀들에게는 상당히 자상한 아버지였다. 사생아들도 궁정에서 직접 안아 길렀으며 자란 뒤에는 작위와 재산을 아낌없이 주었다고 한다.
  • 루이 14세의 첫사랑은 섭정이었던 추기경 마자랭의 조카 마리 만치니였는데, 그녀는 국왕과 결혼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고 둘의 관계를 반대한 마자랭과 안 도트리슈에 의해 결국 이탈리아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 친동생인 오를레앙 공의 아내 앙리에트(헨리에타 앤 스튜어트)[43]와 염문을 뿌렸고, 이후에는 그녀의 시녀인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와 연애하여 아이들을 낳았다.
  • 라 발리에르와의 관계도 소원해진 후에는 신하인 몽테스팡 후작의 아내와 바람이 나서 꽤 오랫동안 동거하게 됐고 라 발리에르는 밀려났다. 둘 사이에는 6명의 아이가 태어났는데, 루이와 몽테스팡 후작부인은 당시 교양 있는 부인으로 이름나 있던 맹트농 부인에게 아이들의 양육을 부탁했다. 루이는 몽테스팡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퐁탕주 부인 등을 또 정부로 삼았고(...) 자신이 라 발리에르처럼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 한 몽테스팡은 마녀를 찾아가 흑미사를 올리며 왕의 마음을 붙잡으려고 했는데, 결국 이 마녀가 잡히면서 연루되어 있던 몽테스팡은 총애를 잃었다.
  •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맹트농 부인은 왕과 사랑에 빠지기 전에 그에게 "불륜을 그만두고 아내를 소중히 여기라"는 충고를 하였고 루이가 그 말에 따라 몽테스팡과 결별했다고 한다. 하지만 왕은 또 맹트농에게 빠졌고(...) 얼마 뒤에 마리 테레즈가 죽자 이번에는 아예 맹트농과 결혼해 버렸다. 물론 귀천상혼이라서 공식적인 왕비가 될 수는 없었지만.

4. 일화

4.1. 백성들에게 사생활을 공개

루이 14세 부처(夫妻)의 베르사유 궁전 생활은 일찍부터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도 공개되었다. 특히 일요일의 만찬은 누구나 볼 수 있었으며, 특히 루이 14세가 삶은 계란을 까먹는 모습이 우아하다고 소문이 나서(...) 구경꾼들이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왕은 그런 국민들의 기대에 답하기 위해 한 번에 5개씩 까먹기도 했다고. 서비스 정신? 먹방의 선구자 최후에는 몸의 반신이 썩어 들어갔는데, 그 상태에서도 귀족들을 불러 모아 작별 인사를 했을 정도로 쇼맨십이 강했던 인물이다. 왕으로서, 자신의 삶이 노출되는 것 정도는 개의치 않았던 인물. 심지어 평민이라 해도 정장을 제대로 갖추면 베르사유에 마음대로 들어올수 있어서, 베르사유 궁 앞에는 당시 정장에 필수요소인 스몰 소드를 대여해 주는 대여점까지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루이의 식탐은 대단했다고 알려졌는데, 연회가 열릴 때면 폭식을 해서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루이의 남동생 오를레앙 공의 부인)은 "국왕 폐하께서는 4종류의 수프를 따로, 2마리를 모두, 큰 샐러드 한 접시, 두꺼운 2조각, 마늘소스 양념된 양고기 한 접시, 페스트리 한 접시 가득 마지막으로 과일삶은 계란을 드시는 것을 자주 봤다. 폐하와 '남자 분'(루이의 동생)은 모두 삶은 계란을 지나치게 좋아하신다"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포크가 도입될 때였는데 손자가 포크를 사용하려고 해도 "나는 칼과 손가락 말고는 다른 걸 사용해 본 적이 없어"라며 못하게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포크를 사용하면 남자답지 못하다고 꾸지람을 주던 때라 포크 없이 손으로 마구 집어 먹었다.

그 외에도 왕비의 옷 입는 법, 화장법, 심지어 출산까지도 공개되었다고 하는데, 특히나 출산 때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산모(왕비)가 기절해버릴 정도였다고.[44]

또한 커피를 무척 좋아해서 당시만 해도 오스만 제국이 독점하던 커피 원두를 선물로 가득 받고 오스만 제국의 빈 침공에 대해 일절 무시한 바 있다. 물론 단순히 커피만 받아서가 아니라 당시 오스트리아를 어느 정도 견제해야 했던 현실적 이유도 있었지만. 오스트리아에서 겨우 커피 콩에나 넘어가는 뚱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당시 커피 원두는 무지 비싸서 뇌물로서 값어치가 있었던 점도 있다. 헌데 전후 노획물 중에 커피 원두가 있는 것을 본 오스트리아 병사들끼리 서로 가진다고 싸우다가 끝내 살인까지 저지른 일까지 있었던 건 안 비밀...이 아니라 커피 원두가 워낙 비싸니 벌어진 일이다.

4.2. 예술을 사랑한 왕

문학, 예술 분야에 많은 지원을 하여 라신, 코르네이유, 몰리에르 등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가 있었고, 베르사유 궁전은 이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따라서 지방의 영지에서 올라와 궁에 상주하며 중앙화된 귀족들과 이들 예술가들의 결합은 화려한 궁정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실력도 무척 뛰어나서 루이 14세 본인이 직접 공연에 서기도 했다.[45]

파일:external/www.thelatinlibrary.com/louisxiv.jpg

'음악만이 루이 14세의 유일한 취미'라고 생시몽 공작이 공헌할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으며 그중에서도 궁중 음악가인 쟝 바티스트 륄리와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관계로, 그와 그의 음악을 특별히 아꼈다. 심지어 동성애 소문까지 퍼질 정도. 그럼에도 정작 륄리가 동성애에 관련해서 좋지 못한 추문에 휩싸이자 점차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륄리가 작곡한 발레에 맞춰 루이가 춤을 추는 공연이 잦았는데, 젊은 루이가 태양신 아폴로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서면 온 귀족이 우러러보며 "태양왕 만세!"를 불렀다. 이것이 태양왕이라는 별명의 유래.

영화 '왕의 춤'(Le Roi danse)의 한 장면을 보면 저 별명이 왜 나왔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이 장면에 묘사된 공연은 1653년에 실제로 있었던 것이다.

5. 전쟁과 루이 14세

파일:Equestrian_portrait_louis_xiv_1692.jpg
9년 전쟁 중 나무르 공성전을 지휘하는 루이 14세. 피에르 미냐르(Pierre Mignard) 작, 1692년

1666년 "내 안에 있는 가장 큰 열정은 군사적 영광에 대한 사랑이다" 라는 글을 썼다.

직접 전쟁터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처음엔 비단으로 만든 천막을 짓고 귀족 부인들을 참모로(...) 데리고 참가했다고 한다. 물론 그 다음부터는 여자들은 두고 왔다고...

루이 14세는 뛰어난 군수 공학자인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을 발굴한 사람이기도 하다.

6. 트리비아

  • 여성편력 등 사생활에서는 영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프랑스를 모두 단 한 사람의 지배 아래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루이 14세의 사상은 곧 종교의 통합으로까지 이어졌다. 그가 훗날에 앙리 4세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위그노를 탄압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원인이 크게 작용했다. 온 나라의 신민을 하나로 묶으려는 루이 14세에게 있어서 시건방지게도 국왕과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강조하기 위해서, 매일 아침에 드리는 미사는 결코 빼먹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매주 목요일마다 빈민층의 아이들 중 13명을 골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직접 그들의 발을 씻어 주는 의식도 치렀는데 이 또한 거르는 일이 없었다. 루이 14세는 국왕이 하느님으로부터 막강한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 예수부활대축일, 성령강림대축일, 모든 성인의 대축일, 예수성탄대축일 때마다 피부병의 일종인 연주창에 걸린 환자들을 어루만지며 그들의 병을 고쳐주는 의식을 거행했다.[46]
  • 위장병이 심한 나머지 속이 좋지 않아 의자에 앉은 채로 똥을 쌌다고 한다. 귀족들의 반응은 글자 그대로 "폐하, 시원하시겠습니다." (…). 후빨의 역사는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다. 왕의 배변 순간에 함께한 사람들 중 일부는 닦아준다던 하는 뒤처리를 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또 몇몇 귀족들은 이걸 흉내 내서 집에서 똑같은 짓을 했었다.[47] 다만 남에게 항문을 맡긴다는 것은 굉장히 큰 빈틈을 보이는 것인 만큼 개들이 그러듯이, 암살위험 등이 없다고 확신하는 굉장한 신뢰관계를 표시하는 것이기도 했기에, 왕의 뒤를 닦아주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였다. 바다 건너 헨리 8세도 시종중에 자신의 뒤를 닦아주는 걸 전담하는 청결관이라는 직책을 뒀었는데, 그 중에는 후작급의 고관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평생 목욕도 거의 안 하고 살았고(딱 3번 했다고 한다.).[48][49] 치질에 걸려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50]
  • 주치의가 이빨을 다 뽑아버리고 입천장을 지지는(!!!) 바람에 입천장에 구멍이 나서, 음식을 먹으면 코로 음식물이 흘러나왔다고 한다.[51] 레알 코렁탕 다만 이 주치의는 당대 최고의 명문인 소르본 의대 출신의 당대 최고의 의사 다칸으로, 당시 의학에서는 치아야말로 만병의 근원이며, 건강을 위해서는 불결한 입천장을 소독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행이라고는 볼 수 없고, 그냥 무지에서 비롯된 악습.[52] 또한 가장 이상적인 장의 상태는 텅 빈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53] 왕에게 다량의 설사약을 먹였고, 그것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늘 용변을 보고 산 원인이 되었다. 심지어는 바지에다 그대로 배변을 보아서 실례한 적도 있었다고……. 그렇기에 루이 14세 시대에 화장실은 그의 주된 정무 공간 중 하나였다고 한다.
  • 물론 전술한 루이 14세의 용변 등으로 인해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실이 없다는 속설이 널리 퍼져 있는데, 원체 베르사유에는 화장실과 욕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으며, 화장실도 왕실 전용뿐 아니라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인 18세기, 베르사유궁전은 주거공간에서 박물관으로 용도를 변경하기 위해 옷방과 욕실, 변소, 다용도실을 대부분 다 없애는 공간 개조작업이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현존하는 베르사유 궁전에는 과시용 공간만 남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베르사유의 화장실이 없어서 킬힐을 만들었다고 무지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물론 킬힐 자체는 베르사이유 때문이 아니라 당시 도시의 통행로가 지저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더 신빙성 있으며, 그마저도 후대의 조사 결과 사실이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킬힐은 원래 기병용 군화에서 시작된 신발이었다. 발을 등자에 고정시키기 위해서 굽이 그런 모양이었을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베르사이유에서는 그 넓은 정원 아무 데서나 일을 치렀다는 루머가 더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정원 아무데서나 용변을 보는 것도 말이 안되는 게, 베르사이유에는 왕족 전용 용변실을 비롯하여 여기저기에 화장실이 다 설치되어 있었다. 베르사유의 중축이 한창이던 루이 14세 때 베르사유 궁전의 평면도를 보더라도 옷방과 용변실들이 체계적으로 갖추어져 있었는데 루이14세 치세 말기에는 돈을 더욱 더 들여 기존 궁전의 용변실보다 세련된 양식으로 발전하고, 면제품을 보관하는 벽장과 비누질과 행구기를 위한 두개의 욕조 더운물과 찬물, 하수관등을 가졌었으며 잠깐만, 온수가 나오는 욕조가 있는데 그렇게 많은 거사를 치른 난봉꾼 왕중왕이 평생 목욕을 안 했다고? 대리석 바닥은 고인 물을 흘려보내기 위해 지하배수로 쪽으로 기울어졌고 바닥 밑에는 방수를 위해 납판이 깔리고 벽난로는 도자기로된 난로로 대체되었는데다 최신 욕실이 있었고 용변을 위한 변소실에는 물내리기, 탱크로 연결된 분사장치를 갖춘 최신식 영국식 변기가 베르사유 여기저기에 설치되었으며 전문적으로 청소하는 일꾼들을 구하여 수시로 왕궁을 비우고 가까운 트리아농에 체류에 청결을 유지하기위한 대청소를 시켰다.

    오히려 베르사유의 불결함은 루이 14세의 개방으로 몰려든 수많은 외부 관광객들에 의한것이 피에르 구베르를 포함한 학자들의 공통된 주류사인이고 우리에게 알려진것은 이런 일부에 불과한 셈이다. 즉, 불결한 베르사유는 부르봉왕조를 비꼬기 위한 우스갯소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참고 논문은 프랑스 사학계의 권위자 피에르 구베르의 "바로크의 환상" 에서 참조.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실이 없는 진짜 이유는 원래 없었던 게 아니라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시민세력이 베르사유 궁전에 침입해서 욕실, 화장실 등 부속시설을 모조리 철거하고 본궁만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 중년 이후에는 중풍에 걸리고 앞서 언급한 치아질환, 소화기질환으로 인한 설사병[54], 유동식만 섭취한 데에서 오는 영양부족 등으로 몸이 좋지 않아 늘 누워 있었는데 초상화에서 보는 당당한 포즈들은 사실 상상으로 그려진 것이다. 물론 루이 본인은 그런 초상화에 크게 만족했다고. 다만 그 고통 속에서도 업무만큼은 방기하는 법이 없었고, 또한 그 무절제한 생활에도 당시 기준으로 엄청 오래 산 76세까지 장수했으니 나름 관리를 하긴 한 것으로 보인다.
  • 고양이에게 지옥을 열어버린 인물이기도 하다. 30년 전쟁 종전 기념을 축하할 당시 손수 10살 나이임에도 고양이를 집어다가 불구덩이에 떨어뜨려 태워죽이기도 했고, 이후 액땜이나 여러 행사로 고양이를 태워죽이는 일을 여럿 벌였다. 후계자인 루이 15세는 고양이빠로 유명하여 수십마리 고양이를 궁궐 안에 키우고 고양이 담당관까지 뒀던 거랑 대조적이다.
  • 각선미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14세의 미친 듯한 각선미.jpg 실제로 그의 초상화를 보면 하나같이 다리를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루이 14세는 발레를 배웠다고 하며 그런 선상에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당시 왕을 그리는 작화법을 따랐다는 설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당시 어진을 그리는 법은 지혜를 상징하는 머리는 노년의 지혜를 상징할 수 있게 중후하게 그리고, 다리는 현실의 통치체계 위에 굳건하게 토대를 둠을 암시하는 청년의 다리를 그러넣는 것이 당시의 작화법이었다. 이를 왕권 이체설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다시 올라가서 루이 14세의 그림을 보면 다리가 유난히 젊게 그려져 있다.
    다만 젊은 시절의 루이 14세가 상당한 외모와 각선미, 춤솜씨의 소유자였다는 점은 거의 분명해 보인다. 루이 14세는 실제로 자신의 권위와 카리스마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을 즐겼는데, 이는 그만큼 스스로의 외모와 춤에 자부심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루이 14세는 30세가 될 때까지 계속 춤을 추었는데, 이 방법이 실제로도 제법 효과를 거둔 것을 보면 그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외모와 춤솜씨가 상당했다는 점을 알려준다. 외모가 영 꽝이거나, 춤에 걸맞지 않게 몸매의 비율이 엉망이었다면 아무리 춤을 잘 춘들 효과를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 젊은 시절에 그린 초상화나 흉상 등을 보면 나름 잘생긴 미남이었다. 다만 흠이 있다면, 흉상에서도 표현되어 있듯이 뺨과 이마에 천연두로 인한 가벼운 마마 자국이 생겼다는 점이다.[55] 또한 젊은 나이에 심한 열병으로 거의 죽다 살아난 후에는 그 후유증으로 탈모가 일찍 찾아와서 가발을 맞춰야 했다.
  • 당대 청나라의 황제/대칸인 강희제와 비록 직접적으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서로 서찰을 주고받으며 교류를 했던 적도 있다. 공통점도 많은 편이지만 하지만 정작 루이 14세 본인은 오히려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와 유사점이 많은 편. 후반부에 암군 인증한 흡사점 때문 애초에 루이 14세가 대왕이라고 안불리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 평소에는 워낙 바빠서 가족들에게 무심한 듯 보였지만, 실은 혈육들을 끔찍히 아끼던 감성의 소유자였다. 평소에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왕세자 그랑 도팽 루이가 자신보다 먼저 죽어버리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실신할뻔 했고, 이후로도 자손들이 연이어 전염병으로 죽어나갈 때에도 무척 비통해해했다. 손자인 펠리페 5세가 1700년에 스페인 왕위 계승을 위해 떠날 때에도 어린 손자를 걱정하며 펑펑 울어서 그 아버지인 왕세자를 위시한 주변 사람들도 슬픔을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 궁중무용에 관심이 많았단 이유로 조선효명세자를 루이 14세와도 비교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 루이 14세의 치세에 대해 비판적으로 본 당대의 사람들 중 유명한 사람은 생시몽 공작이 있다. 그가 루이 14세의 치세를 비판한 '회고록'은 당시 시대의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국내에는 현재 '루이 14세와 베르사유 궁정'이라는 이름으로 일부가 번역되어 정발되어 있다.
  • 반면 볼테르는 권위적인 것을 싫어하는 편에 가까웠음에도 루이 14세에 대해서는 좋아했다. "그의 이름은 존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서는, 그리고 영원히 기억될 시대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고서는 입에 올릴 수가 없다."라고 이야기 한 바 있다. 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청을 받아 프로이센에서 <루이 14세의 시대>(Le Siècle de Louis XIV, 1751)란 역사서도 집필했다.
  • 국내 서적 "루이 14세는 없다."에서는 위의 회고록을 기반으로 루이 14세가 만든 절대왕정과 그의 치세에 대해 요모조모 따지면서 그가 만든 절대왕정은 허세에 가까웠다는 비평을 하고있다. 현재 책은 절판.

7. 창작물에서

  • 2015년부터 루이 14세가 절대권력과 그 상징인 베르사유 궁전을 완성해가는 여정을 그린 '베르사유'라는 프랑스, 캐나다 합작 TV 시리즈가 방영되고있다. 조지 블래그덴이 분하는 드라마 속 루이 14세는 작중 웬만한 여자들보다 더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고 있다.
  • 작곡가 장 바티스트 륄리와 루이 14세의 이야기를 다룬 2000년작 프랑스 영화 《왕의 춤》이 있다.
  • 2016년 장 피에르 레오이 루이 14세를 맡은 루이 14세의 죽음이 개봉했다. 그야말로 임종까지의 모습을 담고 있는 영화지만 감독 취향이 악취미에 가까운지라 영화가 난해하다는 얘기가 많다.
  • 먼나라 이웃나라의 네덜란드 편, 프랑스 편과 에스파냐 편에서 등장했다. 에스파냐 편에서는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파트에서 카를로스 2세 사후의 에스파냐 왕위 계승권이 손자 필립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계승권 주장에 대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작작해라(...)"고 하는 컷이 있다. 또한 164페이지에서 루이 14세의 영토 야욕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려진 날개 달린 루이 14세가 책 뒷면에도 그려져 있다.
  • 유로파 유니버셜리스 4에서는 행정, 외교, 군사 순으로 5,5,6의 스탯을 지닌 군주로 나온다. 참고로 이 게임의 능력치 상한은 6이다.


[1] 어디까지나 비교적이다. 중세시대 프랑스에도 봉국이 다 있었다. 그리고 중세에서 근세 시기까지는 비옥한 토지와 인구로 버틴 거지 프로방스, 브르타뉴, 가스코뉴 등으로 다 찢어져서 결코 다른 나라랑 별 차이가 없었다. 그나마도 근세 초에는 심심하면 신성 로마 제국에 털리는 게 일상이었으며 오늘날처럼 민족국가의 형태를 띠게 된 건 적어도 프랑스 제1제국 이후다. 하지만 당대 프랑스는 30년 전쟁의 여파로 완전히 쪼개져 있던 독일에 비하면 확실히 중앙집권적이었으며, 몰락한 스페인, 영란전쟁에서 밀리고 명예혁명에 휘말린 영국, 전성기를 맞았지만 본토 체급에서 밀리는 네덜란드 등의 당대 서유럽 국가와 비교하면 압도적인 국력을 갖고 있었다.[2] 왼손에 들고 있는 손이 달린 막대는 국왕의 종교적 권위(그리고 사법적 권력)을 나타내는 '정의의 손'이며, 훗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랑스 제국황제로 즉위하면서 남긴 초상화(앵그르의 작품)에도 이것이 등장한다.[3] 투석기의 난이란 의미. 첫 반란은 파리의 고등법원이 마자랭을 지지하지 않음으로서 일어났다. 다음 해 콩데 공작이 3개월 만에 이를 진압했으나 마자랭과의 반목으로 체포되자 2차 프롱드의 난이 4년간 지속되었다. 프랑스에서 귀족이 일으킨 최후의 난이다.[4] 비슷한 경우로 러시아 제국이반 뇌제가 있다. 어린 시절 귀족들에게 학대와 무시를 당하며 어렵게 큰 결과 귀족들을 신뢰하지 않고 절대권력을 펴게 된 케이스.[5] 그러나 나중에는 이런 자리라도 얻기 위해 귀족들끼리 암투를 벌이거나 금전으로 사고파는 일까지 벌어졌다.[6] 물론 완성된 건 아니라 공사 자체는 루이 15세의 시대에도 계속되었다.[7] 먼훗날 프랑스를 무찌르고(...) 독일 통일을 선포하며 거행 되었던, 빌헬름 1세의 황제 즉위식도 베르사유 궁전에서 개최되었다. 하지만 정작 즉위식이 이루어졌던 거울의 방은 베르사유 궁전의 난잡한 공사과정에서 급조된(...) 곳이라 협소해서 사실 즉위식에 어울릴 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절대왕권의 상징성 때문에 사용했다고.[8] 루이 14세를 뒤를 이은 프랑스 왕들 또한 이 이론을 받아들여 자연 국경을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가 자연 국경을 완성한 시기는 왕정이 프랑스 혁명으로 무너지고 난 후 전 유럽과 전쟁을 벌이던 프랑스 혁명 전쟁 때였다.[9] 다만 알아둬야 할 것은 자연국경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시점이 공화정 시기라는 것이다.[10] 루이 14세는 42세가 되는 1680년에 사경에 가까이 가는 중병을 앓았는데, 그 이후 30년간 더 전공에만 집착했다.[11] 이게 가능했던 것이 앙주 필리프 공작의 친할머니, 즉, 루이 14세의 아내가 스페인의 공주 마리 테레즈였기 때문에 그 혈통을 통해 스페인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마리 테레즈가 프랑스로 시집가서 낳은 자식은 스페인 왕위를 주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 결혼조약에 있었으나, 그때 프랑스 측에 스페인이 지불하기로 한 지참금을 완납하지 못한 탓에, 이것을 빌미로 루이 14세가 왕위계승 제한 조항이 무효라고 주장했던 것이다.[12] 서로 이종사촌 간이다. 루이 14세의 어머니인 안 도트리슈는 레오폴트 1세의 어머니 마리아 아나의 언니다.[13] 이는 스페인이 프랑스의 속국이 됨을 의미해서 프랑스의 힘이 강화되어 강력한 부르봉 제국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러니 힘의 균형을 원하는 유럽국가들로선 용납할 수가 없었다.[14] 1. 블레넘 전투(프랑스 손실률 62.5%~72%(...)-56,000명 중 35,000~40,000명 전사 or 포로, 중포 90문중 2/3인 60문 뺏김+지휘관 카미유 도스튄(탈라르 공작 1652-1726)은 포로가 되어 영국에 수감) 2. 라미예 전투(프랑스 손실률 42%-지휘관은 프랑수아 드 뇌빌 장군으로 60,000명 중 13,000명이 죽고 12,000명이 포로가 되었다)[15] 당시 영국의 국왕은 앤 여왕으로, 당시 영국이 쓴 전쟁 비용이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거의 10배나 되었다.[16] 다만 부르봉 왕조에 한정됐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나중에 이걸 명분삼아 스페인을 병합하게 된다.[17] 펠리페 5세가 프랑스 왕위를 물려받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오해가 생기는데 펠리페 5세는 루이 14세의 왕세자의 둘째아들로 왕세손은 따로 있었다. 왕세손 또한 장성하여 아들을 셋이나 두었고 애초에 펠리페(필리프)가 프랑스 왕위를 이어받을 예정이었다면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후계자로 지명할 리가 없다.[18] 여담으로, 프랑스에서 탈출한 위그노들 중 일부는 네덜란드의 케이프타운 식민지로 이주한다. 위그노들은 프랑스의 포도주 양조 기술을 케이프타운 식민지에서 활용해 현대에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와인을 수출할 수 있는 생산기반을 마련했다.[19] 당시가 절대왕정 시기라 하더라도 국왕의 정책이 영구적으로 확정 되려면 파리고등법원의 승인이 있어야한다. 영국에서는 의회가 왕의 견제 역할이라면 프랑스에서는 파리고등법원이 그 역할을 했다.[20] 말이 좋아 숙식 해결이지 왕의 병사들이 얌전히 마을에 들어가서 있었을 리가 없다. 마을 각 집마다 병사들의 숙소를 배정했는데, 거친 병사들이 집안에 들어와서 주인 노릇을 한다고 생각해보라. 조폭이 들어와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독립전쟁 때 "식민지인들은 영국 병사들의 숙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법안이 통과되었는데, 이 법은 미국의 왕당파, 독립파를 가리지 않고 다같이 치를 떨었다.[21] 스코빌은 1680년대 프랑스 위그노들의 수를 150 ~ 2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칙령 철회 전에 10% 정도가 이미 프랑스를 떠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추정에 따라 수치가 다르긴 하지만, '상당 수의 위그노는 여전히 프랑스에 잔류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물론 이 경우 모국을 등지고 이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의 이주, 한마디로 '어딜 가도 먹고 살 수 있는' 숙련공의 이주라는 상대적인 수치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22] 18세기의 프랑스는 여러 전쟁들과 많은 선박 손실, 영국에 비해 뒤처진 금융 환경에도 불구하고 카리브 지역과의 교역을 중심으로 한 높은 수준의 무역 성장을 기록했고, 이것이 프랑스 전체의 경제 성장을 주도했다.[23] 참고로 엘리자베스 2세는 52년 2월에 즉위했으니 66년간 재위하고있다. 반대로 나이는 엘리자베스 2세가 더 많다.[24] 왕비에게 얻은 유일한 적자였으나 루이 14세의 정책에 비판적이어서 그다지 탐탁지 않아했다. 그럼에도 그랑 도팽 루이가 죽어갈 때 루이 14세는 하루종일 아들의 쾌유를 기다렸고, 결국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충격을 받아 실신 직전까지 갔다.[25]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루이 14세가 살아서 그렇게 추구하던 왕권신수설을 스스로 부정한 말이기도 하다.[26] 뭐(...) 왕가가 무너지더라도 프랑스 자체가 멸망 했다든가 그런 적은 없으니까 결과적으로 따진다면 맞는 말이긴 하다(...). 국가란 개념 자체는 없어지진 않았지 지금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27] 참고로 버클랜드는 개고기고양이고기 따위는 진작에 먹었으며 이후 다람쥐, 코뿔소, 타조, 돌고래, 원숭이, 온갖 고기, , 코끼리, 기린, 해삼, 달팽이, 풍뎅이, 집게벌레 등등 지금 봐도 엽기적인 고기를 다 먹어봤다고 한다. (해삼 같은 경우엔 지금도 유럽에서 못 먹는 음식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대부분을 맛있게 먹었다고. 단 두더지돌고래 고기는 그도 요리해서 먹다가 너무 맛이 없어서 포기했다고 한다.[28] 포세이돈의 아내인 암피트리테로 묘사됨[29] 키빌레로 묘사[30] 아폴론으로 묘사됨[31] 헤라로 묘사됨[32] 가장 왼쪽의 여인은 방타두르 공작부인으로, 당시 왕가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다. 훗날에 루이 15세의 사혈치료를 반대하여 살려낸 장본인이기도 하다.[33] 불행하게도 저 그림에 보이는 아들과 자손들은 모두 루이 14세보다 일찍 요절해버리고, 아기인 증손자 루이 15세만이 살아남아 루이 14세의 후계자가 된다.[34] 어린 루이 15세가 여자옷을 입고 있는 것이 의아하게 보일 수 있는데, 본래 당시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은 어린 아이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여자 옷을 입하는 관습이 있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과거에는 이렇게 하면 아이가 튼튼히 자란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이다.[35] 스페인어로는 마리아 테레사. 참고로 부계로 보자면 고모인 엘리자베스가 펠리페 4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니 고종사촌이고 모계로 펠리페 4세는 루이의 외삼촌이니 외사촌이다.[36] 사망 당시 이미 나이가 49세였으므로 요절은 아니다.[37] 멘 공작. 2대 만에 후사가 없어져서 나중에 아래의 루이 알랙상드르의 툴루즈 백작가에 합병되었다가 이쪽도 오를레앙 공작가에 합병[38] 콩데 공비. 참고로 콩데 가는 분가인 콩티 가의 당주가 1814년 에스파냐에서 후사 없이 죽어 콩티의 재산을 합병하지만 1804년에 공세손인 루이 앙투안 드 콩데(앙기앵 공작-나폴레옹에게 처형된 그 사람 맞는다)가 죽고 앙투안의 어머니가 오를레앙 가 출신이었기에 앙기앵의 아버지 루이 앙리는 후계자로 루이 필리프의 넷째 아들을 지명한다. 이후 1830년에 Aumale 공작가와 오를레앙가에 합병[39] 오를레앙 공작부인으로 남편인 필리프 2세는 루이 15세의 섭정이다. 참고로 고손자가 루이 필리프 1세인데 현 프랑스 부르봉가 인원은 다 이 사람 후손이다. 여담이지만 몽테스팡 부인을 싫어했던 이 사람의 시어머니 팔츠 공녀 샤를로트는 이 사람도 정말 싫어해서 꽤나 집요하게 괴롭혔다.[40] 참고로 이 가문도 2대 만에 아들 없이 끊어지는데 이 사람의 손녀가 루이 필리프의 어머니기 때문에 오를레앙 가에 합병된다.[41] 본래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후작부인 사이의 소생들을 돌보는 가정교사로 있다가 루이 14세의 눈에 들어 정부가 되었고, 다른 정부들과 달리 1684년에 파리 대주교의 주재로 루이 14세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결혼식이 정식으로 공표되거나 프랑스 왕비로 인정된 적은 없어 일단 정부 항목에 둔다.[42] 참고로 그녀는 루이 14세의 고모(이자 외숙모)인 이사벨라와 루이 14세의 외숙부(이자 고모부)인 펠리페 4세의 딸이다. 따라서 루이 14세와는 내외종 사촌 간.[43] 영국찰스 1세와 루이 14세의 고모인 앙리에타-마리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루이 14세와는 내외종간[44] 원래 유럽 왕실에서 왕비의 출산은 공개적 행사였다. 혹여 딸을 낳았다가 남의 아들로 바꿔치기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귀족 부인들만 참여하는 조용한 분위기로 치러졌다.[45] 이는 당시 부르봉 왕조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었는데, 이미 대제국을 건설한 에스파냐 왕조와는 다르게 상대적으로 신생왕조였던 부르봉 왕조는 왕조의 정당성과 우월함을 직접 백성들에게 어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루이 14세의 아버지인 루이 13세도 아들만큼은 아니지만 이런 행사에서 백성들 앞에서 춤을 췄다.[46] 이 이야기는 제법 유명해서 세계사 교과서 등에서도 절대주의 시대 국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일화로 소개되기도 한다.[47] 그런데 이 시기는 유럽 어디든 도시와 귀족사회는 생겼지만 위생관념이 발전하지 못한 시기라서.. 그래서 화장실도 목욕도 오물처리도 프랑스 요리도 절대왕정기 프랑스 왕궁과 귀족사회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해 18세기 말이 되면 시민사회에 전파된다.[48] 물론 이건 근세에 보편적인 것이긴 했다. 청결 면에선 중세만도 못했던 게 이 시대의 특징이다.[49] 더러운 물로 인한 질병이나 전염병에 몇 번 데여보고, 물이 질병의 전파원이라고 여겨서 물로 몸을 씻거나 하는 건 최대한 적게 하는 게 좋다고 여겼다.[50] 이 때문에 그는 수술을 받았는데, 신하들이 같은 방에 있는 상태에서 마취도 없이(!) 수술을 받는 동안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신하들 앞에서 위엄을 지키기 위한 놀라운 자제력을 가진 인간이었다. 사실 당시의 의학기술로는 이 수술자체가 대단히 위험했기 때문에, 비슷한 증세를 가진 수많은 평민들을 마루타 삼아 시험해 본 후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51] 그러니까 사람 입이 아니라 개구리 입.[52] 루이 14세도 "아무리 건강을 위해서라도 이건 좀 너무 심하다"고 주저했지만, 결국 "나의 건강은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것"이라면서 이를 전부 뽑고 입 천창을 지지는데 동의했다. 사실 루이 14세는 단 음식인 과자, 초콜릿, 사탕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충치가 심각했다.[53] 실제로 1800년대에도 웬만한 병은 다 관장(…)으로 치료했다. 자연과학의 발전이 의학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였다. (생리학 혁명은 갈레노스혈액소멸 설을 무너트린 혈액 순환이 등장한 1600년대의 일을 말한다.)[54] 나중에 루이 14세가 사망하고 나서 의사들이 부검을 해보니, 과식으로 인해 위와 장이 일반인보다 3배나 부풀어 있었다.[55]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두꺼운 화장으로 커버가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