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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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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트라그라마톤
페니키아 문자 𐤉𐤄𐤅𐤄‎
사마리아 문자 ࠉࠄࠅࠄ
아람 문자 𐡉𐡄𐡅𐡄‎
히브리 문자 יהוה יְהֹוָה
시리아 문자 ܝܗܘܗ
그리스 문자 ΓΧΒΧ
라틴 문자 IHVH
JHVH YHVH
JHWH YHWH

1. 개요2. 상세3. 역사4. 이름과 호칭에 대하여
4.1. 진짜 이름을 갖는가
5. 특징
5.1. 유일성5.2. 초월성5.3. 전지·전능·전선5.4. 만들어지지 않은 신
5.4.1. 존재 그 자체(ipsum esse)
5.5. 성적인 존재가 아님5.6. 성향
5.6.1. 표현5.6.2. 일신인가 주신인가5.6.3. 야훼 vs 사탄
5.7. 기독교의 신관(神觀)
5.7.1. 삼위일체론5.7.2. 구원
5.8. 이슬람의 신관(神觀)
5.8.1. 다른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의 신과 동일한가
5.9. 바하이 신앙의 신관
6. 야훼의 비윤리적인 모습
6.1. 이슬람에서
7. 야훼의 모습과 창작물에서의 야훼8. 모티브를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것들9. 관련 문서

1. 개요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하고 말씀하시는 그분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출애굽기 3장 13~14절(공동번역 성서)

야훼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바하이 신앙 등의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숭배하는 유일신의 본래 이름이었고, 이들 종교가 유일신교로서 확립된 현재는 이름이 아닌 호칭이다. 타나크에서는 '야훼'/'야웨'/'여호와' 등으로 부를 때도 있지만 대부분 그냥 '아도나이(주, 主)'라고 한다. 아랍어로는 흔히 '알라'라 칭하며 아랍계 기독교인들과 무슬림, 바하이들이 주로 이렇게 부른다. 한국에서는 '하느님'[1] 혹은 '하나님'[2]이라 한다.

2. 상세

동시대 다른 중근동의 신들이었던 바빌론마르두크수메르이나 가나안의 다곤, 바알 등의 숭배는 지금은 사라졌으나 현대에까지 야훼 숭배는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세계적인 종교를 이루고 있다.[3][4]

한편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야훼에 대해 논하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 애초에 기독교 자체가 유대교에서 갈라져나온 신앙이므로 자신들의 민족신으로 여겨지는 야훼가 언급되는 걸 좋아할 리가 없다. 게다가 야훼니 여호와니 하며 이름을 발음하는 것도 유대인들한테는 금기이기 때문에 민감한 사항.

3. 역사

히브리어에서 야훼는 'יהוה'라고 기록된다. 이를 가리키는 표현은 'השם המפורש(hashem ham'forásh, 명시적 이름)'이다. 그런데 이 이름은 모세 시대에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던 신인 엘(EL)[5]에서 파생된 제의적인 이름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유대인들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최상의 신의 개념을 가지고 야훼를 숭배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신들은 거의 다 자연 종교의 신들로서 그 신들은 대부분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의 생활을 좌우하는 자연의 변화를 주기적으로 주관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 신들은 농경 사회나 유목민 사회를 막론하고 제례를 통해서 자연을 주관하는 신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신들의 행위는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먼 미래까지도 주관하는 기능을 가진 적은 없었다. 가령 바알은 매 7년마다 찾아오는 풍년과 흉년의 사이클에서 풍년을 위해서 자연법칙을 주관하는 일만 했었다. 그러나 야훼는 달랐다. 야훼는 그 어떤 자연물과도 동일시되지 않았고 각자 담당하는 분야가 있는 다른 신들과 같은 제한을 받지 않는다. 모든 것을 주재하는 신이었다. 자연을 주관했지만 오히려 자연법칙은 야훼의 전능함을 보여주는 많은 도구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리고 성경에 나와 있는 야훼의 권능은 주기적으로 반복을 거듭하는 자연계의 사건들과 관련되어 있기보다 반복될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들과 관련이 있다. 히브리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해올 때, 야훼는 자연계의 모든 권능, 예를 들면 전염병이나 바닷물, 바람, 지진, 메뚜기, 개구리와 같은 것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전능함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그는 매 역사 가운데 고통당하는 자신의 백성을 직접 찾아와서 각각의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해답을 내린다. 비록 이스라엘에도 야훼를 위한 제사가 있었지만 다른 신들의 숭배에서 보는 것과 같이 신을 달래기 위한 것이나 신들의 인간적인 관계회복을 촉구하기 위한 제사는 아니었다. 야훼를 위한 제사는 야훼가 모든 역사 가운데 직접 개입해서 그 백성을 인도해 주는데 대한 감사와 찬양의 제사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야훼는 제사를 통해서 정기적으로 만나야만 했다.

보편적으로 학계에서는 야훼 종교의 기원을 기원전 9세기 중엽에 두고 있다. 1868년에 모압의 디본에서 발견된 메샤 석비(Mesha Stone)에 의하면 이스라엘과의 영토 분쟁을 종식한 모압의 왕 메샤가 느보에 있던 야훼의 기물들을 모압의 신인 크모시 제단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반면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야훼 종교는 기원전 15세기 모세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사건에 대한 기록이 구약성경 출애굽기 3장에 나타난다. 야훼 종교라는 이름 그 자체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지만 야훼를 유일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의 종교를 일반적으로 야훼 종교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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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의하면 야훼가 자기 이름을 맨 먼저 나타낸 사건은 모세가 떨기나무 근처에서 그를 만났을 때 야훼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준 것에 기인한다.(출애굽기 3장 14절) 여기에서 야훼는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라고 말하는데 이 히브리어 음역 "예흐예 아셰르 예흐예"는 영어로 "I am who I am" 정도로 번역된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나는 나다라는 말이 될 뿐이다.

우가릿 문서에 의하면 이 '엘'이라는 어구는 '창조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단어를 '창조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나는 창조하는(탄생시키는) 야훼다"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고대 이집트의 문헌들 가운데 아문 레 신과 아텐 신에게 적용했던 정형구절 가운데 출애굽기 3장 14절과 유사한 표현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나는 존재하게 된 것을 있게 하는 그분이다"라고 나타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말의 의미는 야훼는 그 존재의 기원이 무엇이며 누구에 의해서 생성되거나 출생되었다거나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즉, 야훼는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스스로 있는 자존자라는 말이다. 이러한 야훼의 이름에 담겨 있는 속성이 아브라함계 종교와 다른 신앙의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다른 신화에 나타나는 신들은 저마다 그 기원이 있고 대부분이 창조되거나 부모 신들의 결합으로 생긴 것들이지만 야훼는 자존자로서 그 어느 누구의 간섭이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인 것이다.

족장 시대의 야훼는 한 부족의 신으로만 섬겨졌으며,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 이 네 족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족장 시대에는 야훼는 한 집안의 신으로만 섬겨졌다. 물론 성경 저자는 이 시대에도 야훼가 온 우주를 통치하는 왕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이스라엘은 부족 공동체였으며 야훼 역시 그 부족의 신으로만 섬겨졌다.

특히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창세기 12장 1-3절)에 의하면 지금은 비록 한 개인에 불과한 족장들이지만 그 후손의 시대에 가면 그 민족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번성할 것임을 약속했다. 그래서 이 약속이 족장 시대를 이어서 내려오게 되었다. 예를 들면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사악에게는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다"라고 말했고, 야곱에게는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요셉에게는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야훼의 언약이 족장 시대를 걸쳐서 계속 전수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오토 카이저나 아이히로트와 같은 학자들은 구약성경의 주제를 "하느님의 언약"이라고 보았으며 그 언약이 가장 잘 전수되는 이야기가 바로 족장들의 이야기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족장 시대의 야훼는 그저 한 부족이 섬기는 유일신에 불과했다.

왕정 시대에 들어가면서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야훼가 왕이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 되는 신정정치로 접어든다. 그러므로 야훼와의 관계가 좋은 왕들은 그 왕권을 보장받게 되고 그렇지 못한 왕들은 왕권을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 야훼와의 관계가 대체로 좋았던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유례 없는 번성을 했지만[6] 야훼를 떠난 악한 왕들의 통치가 계속되던 시기에는 마침내 나라가 분열되고 다른 나라에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결과를 낳았다. 성경 저자는 이 모든 결과가 사람들이 야훼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포로 시대에도 야훼는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끊임없이 소망을 불어 넣어 주었으며 마침내 고국 땅으로 귀환한 이스라엘은 그 동안 야훼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서 이런 결과가 왔다고 생각하고 야훼와의 관계회복을 위해서 성전을 건축하고 종교의식을 개혁하는 등의 일련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야훼의 백성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하려는 노력을 했다.

야훼가 모세에게 가르쳐 준 이름이 바로 야훼이다. 통상적으로 히브리인들은 야훼라는 이름 대신 아도나이(אדוני)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지엄한 야훼의 이름을 피조물이 감히 부를 수 없어서 야훼를 경외하는 의미에서 "주"(主)라는 의미를 가진 아도나이라고 부른다. 야훼를 가리키는 이름은 그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모든 이름이 다 야훼의 인격적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야훼는 유일신이다. 아브라함 이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야훼는 이스라엘의 친권자로서 그 권리를 행사하고, 이스라엘은 야훼의 자녀로서 그 의무와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야훼는 매우 인격적인 동시에 신적인 권위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이스라엘을 위해서 안타까워하며 때로는 분노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죄를 보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기도 하며 죄에 대한 엄중한 심판을 내리기도 한다.

한편 이스라엘은 한때 야훼를 다른 신과 함께 겸하여 섬기는 이른바 종교혼합주의가 나타나기도 했다. 1978년 시나이 사막에서 발견된 기원전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항아리에는 '야훼와… 그의 배우자 아셰라'로 해석이 되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 밖에도 많은 종류의 유물이 '야훼와 아셰라'를 함께 모시고 있어서, 몇몇 사람들이 야훼를 아셰라의 '배우자 신'으로 여기며, 아예 바알과 동일시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관련된 논문은 여기 참조.

유일신으로서 야훼는 스스로 다른 신들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숭배될 수 없다. 따라서 오직 야훼만이 숭배의 대상이므로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은 야훼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왕정 시대의 야훼주의는 강력한 정치적인 뒷받침이 있어야만 그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야훼는 왕들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잘 설정해서 그 계약 안에서 정치를 할 경우 그 치세를 축복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때 야훼와의 관계를 비교적 잘 유지했던 다윗이나 솔로몬, 히스기야와 같은 왕들의 통치기간은 매우 평화로운 날들이었지만 므낫세나 오므리와 같은 왕들의 통치는 매우 불행한 시간의 연속이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야훼는 자신의 뜻을 전달할 때 항상 예언자(선지자)나 판관(사사) 등을 통해서 말한다. 아주 특별한 경우 야훼가 직접 백성들 사이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아주 특별한 경우로서 구약에서도 단 몇 차례만 나타날 뿐이다.[7] 대부분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나타나서 자신의 의지를 알린다. 제사장들이나 예언자들은 야훼의 뜻을 알기 위해 신점 의식을 치렀는데, 그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 제비뽑기였다. 이 제비뽑기에 대해서는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제비를 뽑아서 범인을 잡거나 제자를 택하는 일은 그 당시에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

그 외에도 고대 근동에는 여러 종류의 신점 행위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행위로는 동물의 간이나 내장을 이용해서 점을 치는 행위, 그릇에다 물을 채워놓고 그 위에 기름을 떨어뜨려 기름이 퍼지는 모양을 따라서 점을 치는 행위, 막대기를 이용해서 점을 치는 행위, 화살을 이용해서 점을 치는 행위, 꿈을 통해서 점을 치는 행위 등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야훼의 방식을 알고자 했고, 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전파되었다.

바빌론 포로 시기는 야훼 종교가 매우 침체된 시기였다. 70년 간의 포로생활 동안 이스라엘은 민족적 정체성을 많이 상실했으며 종교적으로도 암울한 시기였다. 아시리아에 의해서 먼저 기원전 722년에 식민지가 된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시리아를 정복한 바빌론에 의해서 기원전 586년 식민지가 된 남유다 모두는 야훼에 대한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안식일과 할례를 제외한 모든 종교의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때에도 야훼는 포로기의 예언자인 에제키엘이나 예레미야를 통해서 야훼와의 계약관계를 기억하고 충실한 종교적 생활을 할 것을 강조했으나, 이스라엘은 너무도 쉽게 바빌론의 문화와 종교에 동화되어 버렸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바빌론의 포로가 된 것은 야훼와의 관계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동시에 포로기의 암울한 현실 가운데서도 야훼가 그들을 구원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말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하면 포로생활을 하는 기간은 야훼 종교의 암흑시기라고 할 수 있다.

바빌론 포로 시기 이후 하깨즈가리야 그리고 느헤미야, 즈루빠벨, 에즈라와 같은 젊은 개혁가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가장 먼저 실시된 개혁이 바로 야훼에 대한 종교적인 의식과 가르침의 회복이었다. 그들은 무너진 야훼의 제단을 수축하고 안식일과 할례, 파스카를 강조했으며, 도덕적 성결과 윤리적 정결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포로 시기와 같은 암울한 현실을 당하지 않으려면 다시 야훼에 대한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들은 바빌론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제2세대를 위해서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가 하면, 야훼가 그들의 조상들을 위해 한 일들을 되새길 수 있도록 토라(모세 5경)를 강조하는 교육을 강화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을 통해서 개혁가들은 야훼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포로생활을 하고 귀환한 지도층과 포로기간 동안 이스라엘에 남아서 온갖 수탈과 착취를 경험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으며, 포로생활을 하고 온 지도층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된 종교개혁은 결국 본토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방해에 의해서 일시 중단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연이어서 기원전 4세기부터 시작된 그리스의 통치는 더욱 더 심한 다신론적 상황을 야기시켰고, 기원전 54년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고 예수 시대 전까지 온갖 예언과 환상이 즐비한 혼란스러운 시대가 다시 시작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야훼 신앙은 그리스 철학, 좀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플라톤 철학과 만나게 되었다. 야훼에 플라토니즘적 존재론이 들러붙으면서 온갖 떡밥이 생성된 것이었다.

야훼는 유일신이며 창조자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야훼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나중에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야훼는 영원불변의 절대적 존재인 우주의 제1원리 같은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시간공간을 초월하는 절대 존재가 질투를 한다는 둥, 분노를 한다는 둥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논쟁이 벌어졌다. 초월적 존재가 왜 인간처럼 사사로운 감정을 보이냐는 것.

일단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플라톤 철학이 대세였기 때문에 여기서 비롯된 질문, "왜 이 이 세상을 이 따위로 만들었나?" "온 세상을 창조한 절대자가 왜 유대인만 편애하고 타민족은 잡아 죽이냐?" 하는 등의 질문이 무시될 수는 없었다. 반면 플라톤 이후에 나타난 헬레니즘 철학[8]플라톤의 불생불멸적 이데아를 수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유물론적인 경우까지도 있었으므로 기독교가 이런 헬레니즘 철학과 연결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그리스도교 신학이 나올 수가 없다. 기독교 신학에서 문제가 되는 그리스철학은 플라톤 철학을 말하는 것이다.

중세 신학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정통으로 삼는데, 전자는 플라톤 철학을, 후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활용해 신학 체계를 만들었다. 하여 현대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예수가 플라톤 주의자였는가?라는 문제다.

이와 같이 야훼 종교는 약 2천년 이상의 역사를 통해서 많은 변화와 갈등을 겪었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 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야훼 종교 역시 그 시대적인 삶의 자리에 따라서 부흥과 쇠퇴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한편, 예수가 주장하는 아버지가 야훼인지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다.[9] 첫번째로 토마스 복음서[10]에서는 예수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그리고 나의 것은 나에게."라고 말한다. 로마 황제와 야훼를 동일선상에 놓고, 자신을 따로 말하고 있다. 토마스 복음서의 내용은 현존하는 정경의 4복음서의 내용과 대부분 일치하기 때문에 대충 영지주의 문서니 하면서 넘어갈 수가 없는 내용이지만, 이게 원전에 더 가까운 자료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답할 수 없다.

두번째로, 논리적으로는 아버지라는 말 자체에 인격성이 있는데 이러한 인격신은 그 자체로 제약성을 띠기 때문에 절대적인 유일신일 수 없다는 의견이다. 이에 의하면 예수가 말하는 신의 절대성은 '존재의 절대성'이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의 절대성'이 된다고 한다. 예수의 가르침만 봐도 예수의 아버지는 구약에 나오는 야훼와는 여러 모로 차이가 있다. 애초에 신을 개인적인 아버지로 규정한다는 것부터가 구약과 매우 다르다. 이건 모세 오경이든 후대의 예언서든 마찬가지의 문제. 또한 전술/후술하듯 구약에서 야훼는 본래 유대 민족의 신이었다. 출애굽기만 봐도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는 그들에게, '해거름에 고기를 먹고 아침에 떡을 실컷 먹고 나서야 너희는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 하고 일러주어라."[11]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다. 첫째, 신구약 중간 시대의 변천에 대한 고찰이 결여되어있다. 메시아가 하느님의 아들로 올 것이라는 전승은 예수 출현 훨씬 이전부터 유대교 분파 중 에세네파 공동체에서 내려오던 전승이었다.[12] 에세네파가 소수 종파이고 그리스도교와의 관계성도 논란이므로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두번째로 예수 자신의 발언은 그가 아버지를 야훼라고 주장했음을 입증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시편의 기도문을 인용하는 등 그는 구약을 즐겨 인용하고, 스스로를 이사야서의 다음 구절에 나오는 야훼의 종과 명백하게 동일시하였다.

그리고 사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엉뚱한 곳에 매우 명확하게 제시되어있다. 바로 이레네오의 저서 "이단논박"[13]에 나오는 저술이 그것으로, 이레네오는 단호하게 "신이라 불리는 존재는 아버지(성부), 그의 아들(성자), 그리고 입양된 자들 뿐이다."라고 말한다. 사도전승/개신/개혁을 통틀어 기독교계 전반에 걸처 하느님의 자녀란 말을 자주 쓰는데, 이게 그냥 생각없이 할 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레네오의 이단논박에서의 서술은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는 것이며, 이레네오는 극초기 기독교와 중기 기독교 사이의 인물이기 때문에 매우 신뢰성 높은 서술이다.[14] 야훼를 아버지라 지칭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공동번역 성서 가톨릭 성경 개신교 개역개정
"이제 나의 종은 할 일을 다 하였으니,
높이 높이 솟아오르리라.
무리가 그를 보고 기막혀 했었지.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제 만방은 그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제왕들조차 그 앞에서 입을 가리리라.
이런 일은 일찍이 눈으로 본 사람도 없고
귀로 들어본 사람도 없다."

그러니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소식을 누가 곧이들으랴?
야훼께서 팔을 휘둘러 이루신 일을 누가 깨달으랴?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러나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 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더냐?
그렇다, 그는 인간 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

야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
그의 손에서 야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 극심하던 고통이 말끔히 가시고
떠오르는 빛을 보리라.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떳떳한 시민으로 상게 될 줄을 알고
마음 흐뭇해 하리라.
나는 그로 하여금 민중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대중을 전리품처럼 차지하게 하리라.
이는 그가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었기 때문이다.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여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수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하고
임금들도 그 앞에서 입을 다물리니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
주님의 권능이 누구에게 드러났던가?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사야 52장 13절-53장 12절[15][16][17]
세번째로, 야훼의 성전에서 모친 성모 마리아에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발언한 점(루가의 복음서 2:49, 공동번역 성서)에서 예수는 자신의 아버지를 야훼로 인식하고 있으며, 네번째로 예수는 자기 자신을 Ego sum이라고 드러내는 독특한 화법으로[18] 자신을 야훼라고 선언하였으며,[19] 자신과 아버지는 동일한 본질을 지녔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Ego sum은 존재적 절대성을 극도로 강조하는 표현이다. 다섯번째로, 애초에 유대교에서 고백하는 야훼는 인격신이다. 따라서 예수가 주장하는 아버지에게 인격성이 있다고 해서, 야훼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넌센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대교에서도 예수가 주장하는 아버지가 야훼가 아니라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유대교가 부정하는 것은 예수가 진짜 야훼의 아들이다라는 믿음이지, 예수가 스스로를 야훼의 아들이라고 믿었다는 것은 부정한 바가 없다. 애초에 그거 때문에 시비 붙어서 고발한건데.

그나마 이슬람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를 수 있는데, 이슬람교에서는 성경은 본래 야훼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으나 변개되었고, 꾸란에는 그 메시지가 100% 온전히 보전되어있다고 본다. 그리고 꾸란에서 예수가 야훼의 아들이며 야훼 그 자체라는 말이 강하게 부정된다. 어차피 성경은 이슬람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변개되어 신뢰성에 문제가 있기도 하고. 보통 예수에 대해 언급할때는 복음서의 예수를 말하지만, 굳이 복음서에 한정시키지 않는다면 가장 유효한 반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비슷한 사례로, 역사적 예수 떡밥을 도입하여 복음서의 묘사에 반론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역사적 예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거의 난장판에 가까울 정도로 정립이 안되어있고, 특히 예수가 주장하는 아버지가 야훼가 아니라는 떡밥이 학계에서 진지하게 논의된 적은 없다. 정확히 말하면 관심 자체가 없다.

결국 예수의 아버지 논란(?)을 정리하자면 이렇게 된다.
  • 복음서의 예수는 명백히 스스로가 야훼와의 어떤 특별한 관계를 이룬다고 주장하였고, 유대교에서도 예수가 자신의 신격의 아버지가 성부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예수는 그 때문에 사형당했다.
  • 꾸란에서는 예수가, 자신은 야훼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는 이 떡밥에 관심이 없다.

4. 이름과 호칭에 대하여

원래 유대인들은 신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יהוה라고 쓰는데, 이를 라틴어계 문자로 옮기면 YHWH 또는 YHVH가 된다. 테트라그라마톤(τετραγράμματον)[20]라고 불리며, 직접 불려서도 기록되어서도 안 되었기 때문에, 읽을 때는 아도나이(나의 주님)라고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고전 히브리 문자에는 모음을 표시하는 기호가 없었기 때문에[21], 세대가 지나며 어떤 모음을 붙여서 읽는지를 잊어버렸다.

그래서 후세 학자들이 YHWH를 어떻게 읽는지 연구한 끝에 여러 학설이 나왔다. 르네상스기에 신의 이름을 음역해보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재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기록된 네 자음(YHWH)에 히브리어 독음 아도나이(Adonai)의 모음을 끼워넣은 것. 야호바를 라틴어식으로 읽으면 '여호와'[22]가 되며, 이를 한국의 개신교에서 받아들였다. 덕분에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판성경은 죄다 여호와로 기록되어 있다.

YHWH의 원래 발음에 대해서는 야흐오, 야흐와 등의 다양한 학설이 있지만, 야웨 또는 야훼라고 읽는다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게 여겨지고 있다.[23][24] 다시 말하자면, 학자들간에 YHWH의 첫번째 모음이 'a' 라는 데에는 이론이 없으나 2번째 모음이 'e' 라는 데에는 이견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아무튼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성서학자들은 야훼라는 이름을 다시금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그리스어 필사본에서는 YHWH를 야훼로 발음하고 있다고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신자가 전례나 기도 중에 신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에 맞추어 가톨릭 성경 역시 그 부분을 주님(dominus, κύριος) 등으로 치환하여 재판하였다. '야훼'의 발음이 언제든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질 여지가 남아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10계명의 계명[25]에 충실하기 위해서이다. 다만 가톨릭 신자가 학술적인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개신교의 개역 성서에서는 옛날부터 사용했던 이름인 '여호와'를 존중하여 개정판에도 그대로 수록했으나, 표준새번역 및 새번역 성경에서는 YHWH를 모두 '주'로 치환하였다. 이는 70인역 및 불가타, 루터 독일어역, 제임스 흠정역 등이 모두 그 4글자를 '주'로 치환한 교회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26] 물론 YHWH와 결합된 이름인 여호와 이레, 여호와 닛시, 여호와 샬롬, 여호와 샤마 등은 그냥 개역 성서의 표기에 익숙해진 독자들을 고려해 여호와로 표기했다.[27]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비롯한 기독교하나님의성회(순복음) 교단의 경우는 개신교임에도 성경과 찬송가의 '여호와' 표기를 '야훼'로 바꿔 사용한다.

야훼라는 이름 뒤에 수식어가 붙어 하나의 뜻을 형성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다음 것들이 있다.
  • 야훼 이레(여호와 이레) - 창세기 22:14 야훼께서 준비하신다는 뜻
  • 야훼 닛시(여호와 닛시) - 출애굽기 17:15 야훼께서 승리케 하신다는 뜻
  • 야훼 라파(여호와 라파) - 출애굽기 15:26 야훼께서 치료하신다는 뜻
  • 야훼 삼마(여호와 삼마) - 에제키엘 48:35 야훼께서 거기에 계시다는 뜻
  • 야훼 샬롬(여호와 샬롬) - 판관기 6:24 야훼께서 평화를 주신다는 뜻
  • 야훼 로이(여호와 로이) - 시편 23편 전체 야훼께서 나의 목자 되신다는 뜻
탈출기(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오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표현을 히브리어로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라고 읽는데, 보통 야훼라는 명칭이 여기서 도출되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히브리어 동사 어근 '하야(hyh/HaYaH)'는 '떨어지다', '생기다', '되다', '생존하다'라는 의미인데, 이것을 토대로 야훼라는 이름을 해석하면 '나는 있다.' 또는 '나는 존재다.'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야훼는 미완료 동사형이며, 따라서 그리스 철학의 '본질'의 개념이 아니라 '현상적', '기능적' 개념에 가깝다.

테트라그라마톤에 해당하는 Y, H, W ,H 이 4문자를 게마트리아로 풀면 각각 10, 5, 6, 5로 26이 나온다.

이슬람에서는 야훼를 지칭하는 이름이 99가지나 있는데 이를 아스마 알라 알 후스나(أسماء الله الحسنى‎ 신의 아름다운 이름들)라고 한다. 그 이름들 중에서 자주 쓰이는건 당연히 알라(الله). 알라는 정관사 알(ال)과 신을 뜻하는 일라(إله)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아랍어 단어이며, 아랍어와 같은 셈어파히브리어아람어의 '엘'과 어원이 같다. 그런데 흔히 '알라'라고 하면 오직 이슬람의 신만을 뜻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랍계 기독교인들도 자신들의 신을 '알라'라 부르며, '알라'는 아랍 지역에서 신이라는 뜻을 가진 보통명사로 자주 쓰인다.

한국에서는 천주교정교회, 성공회여호와의 증인하느님, 대부분의 개신교 교파들과 후기성도 교회, 이슬람하나님이라고 호칭한다. 최초로 천주교 교리서를 동양 언어로 집필한 마테오 리치가 '신'을 대체하기 위한 표현으로 동양권 내의 문화에서 적절한 표현을 찾던 중에 불교제석천을 의미하는 '天主'를 사용했으며, 한국 가톨릭의 신자들도 '천주님'이라고 불렀다. 이 번역덕에 많은 신자들은 '기독교의 YHWH'를 상제(上帝), 제석천 등의 관념과 유사하게 이해하였고, 이것은 매우 큰 효과를 발휘하여 한국 대중들이 별 거부감이나 이질감 없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하는데 공헌했다.[28]

이후 개신교가 한국에 유입되면서, 가톨릭을 따라하여 역시 '천주님'으로 절대신을 호칭한다. 문제는 당시 개신교를 보는 가톨릭의 입장은, '빼도박도 못하는 이단 놈들'이었고, 당연히 개신교 쪽과 가톨릭 쪽의 갈등이 있었다. # 이후 개신교 측에서 '천주님'이라는 호칭을 '하ᄂᆞ님'(하ᄂᆞᆯ + 님)으로 변경하고 [하나님]이라 발음했다.[29] '하ᄂᆞ님'을 '하나님'이라고 읽은 이유는 당시 개신교 숫자가 많았던 평안도 지방에서는 '하ᄂᆞᆯ(天)'을 '하날'이라고 발음해서 '하ᄂᆞ님' 또한 '하나님'이라 발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번역 역시도 심히 적절한지라(…) 이후 한국 가톨릭에서도 이 '하ᄂᆞ님'이란 번역을 받아들였다. 다만 이 당시에는 표준어가 널리 퍼졌기 때문에 전국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ᄂᆞᆯ'의 발음을 '하늘'로 하였다. 그리고 가톨릭은 평안도뿐만 아니라 전국에 균등하게 분포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가 '하ᄂᆞ님'을 '하느님'이라 발음하였다. 그에따라 당연히 '하나님'이 아닌, '하느님'을 공식적인 호칭으로 채택하게 된다.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공동번역성서'를 출간하면서, 절대신의 호칭도 '하느님'으로 합의를 보게 되며, 공동번역성서를 사용하는 '성공회'와 '정교회' 역시도 하느님이라는 호칭을 채택한다. 다만 대부분의 개신교 종파들은 내부적인 문제로[30]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여전히 주류이고, 일부 견해로는 이를 유일신의 의미를 강조한 '하나' + '님'으로 풀이하여 '하느님' = '하늘' + '님'과 구분하기도 한다. 한국 이슬람에서도 '하나' + '님'이라는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다.

여담으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자신의 저서 <나자렛 예수>에서 다음과 같이 이 이름을 풀이한 바 있고, 가톨릭 성경에서 이 이름을 직접 서술하는 게 기피되는 까닭도 이 글로 이해하는게 가능하다.
당시에는 많은 신이 있었다. 그래서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묻는다. 실제로 하느님은 다른 신들과 비교해 특별한 권위를 지닌 분으로 당신의 신분을 밝히신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이름이라는 관념은 일차적으로 다신교를 믿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관념이다. 그러니 이런 세계에서는 모세의 하느님도 당신의 이름을 말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모세를 부르신 하느님은 여느 신이 아니고 진짜 하느님이시다. 본래 참된 의미의 하느님이란 여럿일 수 없다. 하느님은 본질상 한 분 뿐이시다. 그러기에 그분은 신들의 세계에 있는 신들 중 하나로 등장하실 수 없다. 그분의 이름이 다른 신들의 이름 가운데 하나일 수는 없다.

이와 같이 하느님이 주시는 응답은 모세의 물음에 거절하는 답이기도 하고 그 물음에 응하는 답이기도 하다. 그분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 "나는 있는 나다."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그분은 단순히 '있는 분'이다. 이스라엘에서는 하느님이 당신의 신원을 몸소 밝혀주신 이름, 곧 '야훼YHWH'라는 이름을 소리내서 부르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그것은 그분의 이 이름을 다른 신들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격하시키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성경을 새로 번역하면서 이스라엘에게는 언제나 신비에 차 있고 함부로 발음해서는 안 되었던 이 이름을 여느 이름처럼 적어놓는 경우가 있다. 그 결과 그분의 신비를 일반적인 종교사의 평범한 사례로 끌어내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하느님께는 그분을 그려 보일 수 있는 어떤 그림도, 그분을 부를 수 있는 어떤 이름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자렛 예수> 국역번 1권 221~222p에서 인용

4.1. 진짜 이름을 갖는가

흔히 '야훼'라고 불리우지만, 범재신론에 따르면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포괄하는 신은 그 자신을 다른 무언가와 분리해서 부르는 '이름'을 가질 수 없다고 한다. '이름'이 있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포괄한 그 자신의 바깥 영역이 존재한다는 소리가 되니까. 예컨대 우리는 동그랗고 딱딱한 과일에게 '사과'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사과인 것'과 '사과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데, 신학적으로 신은 모든 것을 포괄한 존재이므로 신을 신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와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철학적으로 접근했을 때 소쉬르의 이론에 따르면 이름을 가진 특정 기호는 다른 기호와 구분되는 것으로만 자신을 특정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신에게 이름을 붙이게 되면 신과 같은 층위에서 '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필연적으로 가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유일신 종교에서는 이런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신이 이름을 갖지 않는다고 하게 되는 것. 물론 성경상의 신은 "나는 나다"라는 히브리어의 한 형태로써 지칭되지 실제이름이 밝혀진 적이 없어서 회피한다고 보긴 힘들듯.[31]

5. 특징

5.1. 유일성

야훼와 고대 근동 종교 문헌의 가장 크고 분명한 차이점은 신의 숫자이다. 창세기는 다수의 신을 믿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은 오직 한 분이라고 가르친다. 창세기에서는 오직 하나의 신이 하늘과 땅, 바다, 땅과 식물, 천체, 동물과 사람 등 만물을 창조하였다고 나온다. 따라서 각 창조물이나 영역에 별도의 신이 존재하지 않고, 신들끼리 경쟁하지도 않는다. 유일신이 만물을 주재하며,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이다.

5.2. 초월성

위의 유일성과 연동해서 또한 창세기 기사에서 눈여겨 볼 점은 초월성이다. 즉 야훼는 모든 피조물 이전에 존재했었고, 만물을 창조한 주인으로, 만들어진 사물과는 구분된다. 어떤 의미에서 야훼는 자연 질서를 초월하여 그 외부에 있는 '초자연'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말에서 '초자연적'이라는 단어가 파생했다.

우리는 이런 야훼의 특성이 당시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의 신관과 얼마나 다른지 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하늘과 달, 태양 등이 곧 신이었고, 최소한 신들은 이런 자연요소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이집트의 세티 1세가 지었거나 그를 위해 지은 오시리스 신전 천장에는 누트 여신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누트는 하늘처럼 공중에 펼쳐져 있었다. 공기의 신 슈가 누트를 떠받들고 있다. 슈는 땅의 신 게브 위에 서 있다. 해와 달과 별을 포함한 다른 신들은 누트의 다양한 부위에서 형성되었다가, 적절한 시간에 다시 돌아갔다. 슈는 누트를 떠받들고 있을 뿐 아니라, 넷에서 여덟 신의 도움을 받아 하늘에 있는 물을 막고 있다. 이처럼 세상의 각 요소는 개별 신과 연결되었다.

그런데 성경에 계시된 신관은 다르다. 야훼는 태양이나 폭풍 가운데 있지 않고, 이 세계를 초월하여 다스린다. 그리하여 공간이든 시간이든 만물을 다스리는 유일신은 자연법칙에 종속되지 않는다. 자연과 우주마저 야훼의 일부가 아니라, 그가 창조한 피조물에 불과했다.

5.3. 전지·전능·전선

전지(全知, Omniscience)·전능(全能, Omnipotence)·전선(全善, Omnibenevolence)[32]

절대자답게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 말 그대로 전지전능하다. 말 한 마디로 만물을 창조하고(창세기), 홍해를 갈랐다가 도로 합쳐놓으며(출애굽기),[33] 소돔고모라를 하루만에 불과 유황으로 흔적도 없이 날려버린다.(창세기)[34] 그리고 이미 폐경한 늙은 부부가 아이를 낳고, 의미가 담긴 꿈을 꾸게도 한다. 물론 천지창조 7일째 되는 날 안식하였다고 나오지만, 일곱째 날에 피곤해서 안식했다는 암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35] 오히려 안식일의 '쉼'은 창조 활동의 마감을 뜻했다.[36] 이외에도 수많은 기적을 행했지만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해 멈추기(여호수아), 죽은 사람 살리기(4복음), 흐르던 폭포물 자르기(여호수아), 모든 첫 생명을 죽이기(출애굽기) 등등 인간이 생각할 때 과학적으로 말도 안되고 우주의 법칙을 근간째 뒤흔들며 위배하는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야훼에게는 정말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37][38][39]

이와 대조적으로 바빌로니아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에 등장하는 압수 주신은 자신의 소생 에아의 주술로 잠에 빠진다. 그는 잠을 자는 동안 결박을 당하고,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야훼는 이 정도로 유약하지 않다. 그는 창조 세계에 속하지도 않고, 종속당하지도 않고, 오히려 창조 세계를 초월한다. 성경에서 야훼는 자신을 물질세계와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계시한다. 야훼는 세계를 창조했지, 세계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7일 창조에 대한 의문에 대해 히브리 시대의 '하루'는 24시간 단위의 '하루'만 칭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하는 게 좋다. 성서의 다른 책들에서도 하루(날)이 수 일에서 수십 일을 가리키곤 한다. 즉, '창조의 날들'은 실제의 일주일이 아니라 일곱으로 나눠진 수천만년의 기간일 수 있다는 것. 이러한 해석을 신학적으로는 '골격해석'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성서무오설을 믿는 사람들이 들으면 스프링처럼 튀어오르며 반발한다.[40]

다만 오해를 막기 위해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전능'은 '절대자의 본성에 모순되지 않는 한 하고자 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을 일컫는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본성에 모순되지 않는 한 하고자 하시는 것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 하느님의 작용적 속성에 속한다. 하느님께 있어서 지성과 의지와 능력은 하나이며 서로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다. 이 능력은 하느님이 지니신 최고 권위의 표현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9)고 하신 말씀에서 그 권위가 나타나 있다. 이 능력으로 세상에 하느님의 왕국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전능은 세상의 창조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식되었고(창세 2:7, 이사 29:15-16, 예레 18:1-6, 로마 9:19-24), 지혜와 관련되었다(지혜 7:24-25, 욥기 37:14). 하느님의 전능은 또한 당신의 구원능력을 통하여 나타났고(출애 4:1-5, 예레 16:21, 이사 50:2),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루었다(마태 8:1-27, 골로 1:10-12). 그리스도의 강생, 기적, 부활 등은 그리스도가 지닌 능력의 표현이며(루가 1:35, 사도 2:22-24), 그리스도 자신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 지니신 전능의 표현이다(1고린 1:18-25). 이 전능에서 성령이 참여하고(1고린 2:4-5, 에페 3:16, 로마 1:4, 15:13:19 ), 사도계승을 통하여 교회 안에 전달되며(사도 1:8, 1데살 1:5, 2디모 1:7-8), 성세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교인들에게 전해진다(에페 6:10-13, 골로 2:12).
가톨릭 대사전, '전능' 항목
따라서 "하느님은 전능하시니까 나쁜 짓도 하실 수 있나요?" 같은 질문은, 그리스도교 교의로 볼 때 상당히 맥빠지는 질문인 감은 있다.

다만 이 전지전능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인간 언어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단어라 '선하고 전능하다면 왜 악을 방치하는가?'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인데, 그리스도교에서는 피조물에게는 자유 의지라는 창조 이념이 들어가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악을 제거하면 신 스스로가 부여한 창조 이념을 부정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기에 직접 악을 없애지는 못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설명을 하게 되면 '선하다'는 속성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전지전능'이라는 속성을 충족시킬 수가 없다. 애초에 이 논제 자체가 야훼교를 조소하기 위한 에피쿠로스 학파의 난제인만큼, 그리스도교가 특정하는 야훼의 성향을 가지고서는 풀 수 없는 문제로 보아야 옳다.

근데 이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천사=인간=악마는 동위선상에 놓인 피조물이며 인간 역시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악을 행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십계명도, '굳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특별히 교리를 설파할 이유도 없어지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이를 '악을 향하는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에 대한 신의 권고 및 부름'이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리스도교의 지옥을 '신으로부터 멀어지기 원한 인간 자유 의지의 선택 결과, 즉 無善'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존재한다.[41][42]

이렇게 악을 스스로 제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을 못한 마당에 전지전능해서 인간이 타락할 줄 알고 있었으면서 그들을 심판하는 것이 말이 되냐는 의문까지 나오게 된다. 결국 이런 질문에 시달리고 또 시달린 나머지 기독교에서 내놓은 나름의 해석이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모시는 신은 전지전능하셔서 확실히 현재와 미래와 과거를 다 알고 계신다. 허나 그는 시공간을 초월하신 분이기 때문에 시간이 우리와 같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는 과거, 현재, 미래를 우리가 너비와 길이, 깊이를 보듯이 동시에 볼 수 있기에, 그에게 과거나 미래는 없고 그저 한없는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가 보는 우주는 우리가 보는 우주와 완전히 다르며, 따라서 자유 의지와 전지전능함은 충돌하지 않는다.[43]
결국 인간의 이해 수준을 넘어서는 대답이 나오고 말았다. 이건 결국 신앙의 부분이니까 어찌보면 답이 없는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인간 인식의 한계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 듯. 대충 인터스텔라에서 가르강튀아 속 5차원을 연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성경을 읽어봐도 부활신앙이 없으면 기독교인 스스로를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는 부분이 나온다. 부활 역시 인간의 상식이나 이해 수준을 뛰어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이기 때문이다. 저런 설명이 성경에는 없다는 반박을 하기도 하는데, 애초에 성경을 문자 그대로의 준수 대상으로 보는 성서무오설의 입장은 현대 신학계에서는 그다지 받아들여지는 편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물론 아직도 상당수 개신교 교파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심지어 우리나라나 미국의 개신교 내에선 이쪽이 오히려 다수인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그러한 태도를 취한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데, 정말로 인간의 이해 수준을 뛰어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변명할 말이 없어서 우기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게 문제. 당장 그런 주장을 하는 기독교인들 자신도 인간이라는 점에서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진리로 믿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아니면 인간이 아니거나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데 그들이 이야기하는 교리가 진리라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는 정황상, 비신자들 입장에서는 가능성이 후자에 가까울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해 개신교(장로교)의 경우 신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선택받은 이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믿을 수 있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 비신자는 신이 애초에 버렸으므로 이해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며 결국엔 사후에 지옥으로 갈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 기준은 신의 고유 영역이(라 하)니 알 수 없다.

이러한 절대성의 논리에 관한 유명한 주제로 "만약 어떠한 것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신이 있다 하면, '신의 힘으로 전혀 다룰 수 없는 세계'도 만들 수 있는가?"같은 것이 있다.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삼위일체론 교리에 의하면 같은 본질이나 다른 위격, 단순하게는 외아들인 걸로 나온다. 청나라에선 기독교 신자인 홍수전이라는 사람이 뭔가 계시를 받는 듯한 꿈을 꾸고서, 이 성부의 둘째 아들을 자처하며 태평천국운동을 일으켰다. 홍수전 외에도 성부의 둘째 아들 같은 걸 자칭한 사람은 종종 있었다.

이 이외에도 기본적으로는 선을 나타내지만, 선이라는 개념을 좀 더 명혹히 하기 위해 그에 반하는 악을 만들어내고 반면교사로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악을 방치한다는 것. 악을 저지르면 지옥에 가기 때문에 현세의 사람들이 악인들이 벌받는 것을 보고 선과 악의 개념이 더 명확해진다는 설이다. 악인으로써 걸린 사람들은 그저 지못미.

또 하나로는 전지(모든 것을 알고)·전능(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성질에 있다는 것. 특히 전지(모든 것을 알고 인식한다)라는 것은 애초에 인간만이 멋대로 신이 선하다고 믿는 것일 뿐 사실 신에게는 그런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선과 악의 경계 자체를 초월하여 그냥 이것 저것 만들다보니 선인도 악인도 창조된 것이라는 설이다. 이를 자조적으로 보는 입장의 소설이나 애니메이션 등에서는 마치 신이 세상을 심시티 게임하는 것처럼 묘사하기도 한다.

등등등 이런 식으로 아예 이 전지전능을 부분을 하나의 항목으로 만들어도 될만큼 여러가지 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딱히 대다수 사람들에게 공감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특히 소설이나 애니메이션 등에서 해석된 신은 종교인들이 보면 펄펄 뛸 정도의 내용들로 가득한지라.

허나 일단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을 놓고 보면 이런데…
  • 불완전에서 시작해서 어느새 전지전능: 사실 초기 기독교의 논쟁, 특히 영지주의보편교회의 논쟁에 대해서 가장 심각하게 이뤄진 것이 이 창조의 완전성에 대한 고찰이다. 이 경우 영지주의자들은 반대로 창조가 불완전한 상태라고 주장했고, 반대로 보편교회측은 완전한 형태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던 것. 사실 창조적 불완전성의 문제로 보면 이 전능자의 문제는 해결이 된다. 불완전한 전능이란게 있을 수가 없으니… 하여 이 초기교회의 문제는 "일원적 이원론"으로 보는데, 창조를 시행한 주체는 둘, 그러나 그 근본은 하나인 것. 이 논쟁의 결과는 자유의지와 원죄를 주장하는 4세기의 교리투표로 인해서 결정되었다만, 원래 기독교의 출발에서도 신의 완전성에 대한 의문은 계속적으로 주장되었던 것이다.
  • 전능자의 의미에 관점을 맞춘 해석: 사실 유대교는 이 전능자에 대해 별로 의구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불완전한 창조를 두고 "그건 창조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정의를 내린바 있다. 즉, 실은 기독교의 개념은 이 개념에서의 "반증이나 반론"을 하면서 발전하게된 것인데, 악이라는 개념에 대해 유대인들의 발상은 "완전한 창조를 이뤄지게 하는 것에 대한 반발"을 의미하는 것으로 도태를 의미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고, 애초에 아담이 실락하게 되는 이유도 창조의 프로세스로 해석해버리는 등, "신은 완벽하기는 한데 일단 창조가 완전치 않다"는 부분을 근거로 한 주장을 제시하였던 바가 있다. 즉, 사실상 똑똑한 처사인 것이, 결론적으로 이들이 주장한 것은 현대의 진화론과도 별로 대치되지 않는 관계로… 문제는 이 사상의 근간이 민족주의화 된 것이 바로 유대인의 상대적 우월주의인데, 반대로 이 세상의 창조를 형평성있게 완성할 수 있는 존재는 유대인이 유일하다는 주장인 셈이다.
때문에 교의적인 원안을 놓고 보면 전지전능신이라는 것은 기독교 형성 이후에 갑툭튀, 그것도 한 4세기쯤에나 튀어나온 주장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정작 유대인들도 그들의 신을 전능한 하나님이라 불렀으며, 결정적으로 야훼는 출애굽기에서 이미 자신이 전능한 하나님이요, 창조주임을 밝혔기 때문에 전지전능성이 기독교 형성 이후의 갑툭튀라 보기는 어렵고 히브리인들이 아주 독특한 종교관을 가졌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초기 교부들이 모세오경을 유대인들 모르게 고쳐서 유대인들에게 나눠준게 아닌 이상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는 모세가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출애굽한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는데 이미 모세에게 야훼는 자신이 전능자이며 지존자임을 분명히 밝혔고, 모세오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위의 전능하다는 고백이 4세기에 갑툭튀 했다는 주장은 기독교로서만 본지라 정작 그 틀이 된 유대교의 교리를 고려하지 못한 것. 즉,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는 그 시초부터 야훼가 전능하다는 고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5.4. 만들어지지 않은 신

다른 종교의 신화 속에는 그들의 신들이 만들어진 과정이 나와 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는 모세가 처음 야훼를 만났을 때,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이에 대해, 야훼는 자신을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라는 말로 설명했다.

자신을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설명한 까닭은 자신은 누군가의 자식이거나 혹은 어떤 초월자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말한 것이다.[44]

인간이 섬기는 대다수의 신들이나 초월자들은 대부분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있다.[45] 즉, 그들은 스스로 존재하고 싶어서 존재한 신이 아니라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태어나거나 만들어진 신이다.

반면 야훼는 자신은 스스로의 의지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함으로서 다른 신들과 구별되는 초월적인 존재임을 부각한 것이다.[46] 물론 다른 종교에도 이와 비슷한 창조주나 조물주라는 개념은 있지만[47] 이런 신들은 우주의 법칙을 관장하지 인간사에 관여하는 신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섬기지는 않았다. 창조신이면서도 인간사에 깊게 관여하는 야훼가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 즉, "창조신을 섬기는 근본주의"임을 주장한 것인데… 이것도 좀 사연이 있는 편이다.

사실 중근동의 종교는 지역 실세에 따른 종교의 문제가 있어서, 도시국가 1이 지역의 패권을 잡으면 그 도시국가의 종교가 킹왕짱이 되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에 "주신의 위치는 언제나 변동성"이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이런 창조신 놀이는 그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주신이 부족신들 위에 서기 적당한 형평성"을 주장하기 위한 일종의 설정놀이라고 할 수 있겠고, 달리 말해서 "그 다른 신들(후대의 천사)"위에 서는 당위성은 그 신들의 "애비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고려되는 것과도 같은 논리다.

후대 유대교의 해석 개념에서는 이것이 태초로부터 스스로 존재하기로 규정된 것, 즉 태초의 무한으로부터 처음 존재하게 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실제로 이 개념은 카오스로부터 태어난 우라누스와 가이아 등과 비슷한 견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것이 나중에 "다신교의 신들보다도 우위에 있는 근본적인 신의 존재"를 부각하기 위해 공식화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이러한 특성들 때문에, 그리스도교에서는 야훼를, 삼위 중에서는 특히 다른 두 위격의 근원인 성부를 '기원 없는 기원(근원 없는 근원)'이라 고백한다.

5.4.1. 존재 그 자체(ipsum esse)

위 서술의 연장선이다. 출애굽기에서 나타난 존재론적 고찰의 연장선으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집대성한 특성이다.[48] 야훼는 그 어떤 가능태도 배제되는 순수 현실태이며, 그렇기에 야훼는 불변한다. 또한 그는 완전한 순수 현실태이기 때문에, 그 어떤 존재자도 그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야훼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은 '거기 있는 자'(신학대전 I, 13, 11)이다. 그러므로 야훼는 '그의 존재이다'(신학대전 I, 3, 4c). 따라서 존재야말로 야훼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후세의 신학자이자 20세기의 가장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로 꼽히는 카를 라너(Karl Rahner)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스승이었던 하이데거의 철학을 수용하여, 인간이 유한성(시간성)에 걸릴때 무한성인 야훼를 인식할 수 있으며, 이는 피조물 중 오직 인간에게만 부여된 능력이라 하였다. 이해가 안간다면 "I am a wiki-neet"라는 문장을 생각해보자. I와 wiki-neet는 존재자이며, am에 대응되는 것이 바로 '존재'다. 존재는, 그것을 통하여 존재자가 있게하는 그러한 완전성이다. 그리고 서방교회에서는 바로 이 '존재'를 야훼라고 해석한다.

5.5. 성적인 존재가 아님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모습이 아니시다. 그분께서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시다. 하느님께서는 성을 구별할 여지가 없는 순수한 영(靈)이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완전성’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어떠한 완전성, 곧 어머니의 완전성, 아버지와 남편의 완전성을 반영한다.
- 가톨릭 교리서 370항
다른 종교 및 신화, 전설의 신들은 사람과 비슷한 존재로 묘사된다. 중근동 신화는 물론이고 대표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북유럽 신화만 봐도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신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성적 정복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이는 피조물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야훼는 다르다. 야훼는 우월한 인간이 아니다. 야훼에게는 약점이 하나도 없다. 창세기는 야훼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 즉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고 말한다.[49] 결코 성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야훼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지만, 양성 모두 야훼의 일부분을 표현한다.

5.6. 성향

5.6.1. 표현

그리스인들은 신들을 형상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결국 성부도 제우스같은 흰 머리와 수염을 한 백인 남성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이 모습은 아마도 고대 로마의 신이었던 제우스 등의 이미지가 합쳐지면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스테레오타입도 많이 사라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와 '도그마'. 브루스 올마이티에서는 흑인 배우인 모건 프리먼이 연기하였고, 도그마에서의 모습은 충격과 공포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사실 모습 또한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는 형용할 수 없다고 하기도 하니, 흰 수염에 흰 옷 차림의 노인은 엄밀하게 말하면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천지창조처럼 유명한 그림들은 이러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으며 심지어 이런 그림들은 성당에 그려지고 있다.[50]

간단하게 말하면 전지전능한 초월한 존재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으로는 그려낼 수도 없다는 것. 간단하게 비유하자면 ∞을 100으로 나누어 봤자 간단하게 표현해도 여전히 ∞이라는 식이다. 때문에 유대교나 기독교,[51] 이슬람[52] 에서는 그림이나 석상 등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신성 모독으로 간주하거나 다른 이교도 신으로 여긴다.

5.6.2. 일신인가 주신인가

구약에서 나오는 야훼에 대한 내용은 일관적으로 일신교적이며, 다른 이방신의 실존에 대한 묘사는 찾아볼 수 없다.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에서 다른 이방신들을 서술한 내용 때문에 모세오경에서 야훼의 유일신적 요소와 다신교 신앙의 주신(主神)적 요소가 함께 묘사된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는 부적절한 이해이다. 해당 계명에서는 이방신을 섬기는 행위를 범죄로 못박고 있는 것이지, 이방신이 실제로 존재하여서 세계에 영향력을 끼친다는 묘사가 없기 때문이다. 모세오경에는 이방신이 권능을 행사하는 장면이 전혀 없으며, 야훼의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서술되지만 이방신들은 야훼의 권능 행사에 대항하는 묘사조차 없다. 창세기 천지창조 일화의 야훼는 해와 달과 별과 괴물들마저도 창조하는데, 이는 천체와 신을 동일시하고, 흔히 괴물들을 신의 대적자로 설정하는 고대 다신교 세계관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다신교에 대한 서술들은 야훼가 다신교의 주신이라는 내용 보다는, 유대인이 야훼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다신교적 습관을 버리지 못한 흔적을 후대 기록자들이 남긴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아브라함이 하란 땅에서 부름을 받을 당시에, 유대인들도 각기 다른 신을 믿고 있었다고 묘사되며, 아브라함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할 때 최초로 야훼만을 믿기로 계약하고, 그 후에 모세이집트 에서 유대인들을 결집하여 탈출한 이후에 다시 계약이 갱신된다. 그럼에도 이집트나 바빌론 지역에서의 다신교적 습관은 남아있었고, 이런 다신교적 습관을 범죄로 정한 것이 신명기 5장과 그 병행구절인 출애굽기 20장에서 나오는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인 것이다. 여기에서 야훼는 스스로를 질투하는 하느님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신명기 7장에서는 이방신의 제단은 허물어야 한다고 묘사된다. [53]

생각건대, 타나크가나안 정착 과정 및 이후에도 이방 풍습의 유입을 떨쳐내지 못하고, 혼합주의적으로 야훼와 바알을 동시에 숭배하거나, 혹은 동일시하던 유대인들을 경계하기 위해 쓰였던 점으로 검토한다면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즉 지금 너희가 동일시하는 그것들은 신도 아니며[54] 적어도 모세오경의 뼈대가 되는 텍스트가 작성되는 시기에는,[55] 유일신적 요소와 주신적 요소가 병존된 것으로 보인다.[56]

5.6.3. 야훼 vs 사탄

구약의 야훼는 매우 투쟁적이고 잔인한 신으로 묘사된다. 유대인과의 계약 때문에 유대인과 대적하는 다른 민족들-갓난 아기까지-를 학살하고, 계약을 어긴 유대인에게도 엄벌을 내리고 있다. 그렇게 구약 성경에서 죽인 사람만 숫자로 추산할 수 있는 것만[57] 다 따지면 대략 200만명이 넘어간다.[58] 사탄은 고작 9명인데, 그것도 야훼가 명령해서 죽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성경 여기 저기를 봐도 야훼 자신이 악신이나 거짓말 하는 영을 부리거나, 다윗에게 인구 조사를 명할 마음을 넣은 것이 야훼였다는 기록과 사탄이었다는 기록이 동시에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59]

그러나 신학적으로 볼 때,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사탄 때문에 인생 종친 사람들이 굉장히 많으므로 이러한 통계는 무의미하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애초에 성경이라는게 유대교/기독교 신자가 읽으라고 쓰여진 책이니, 유대교/기독교의 독서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 자체는 분명 맞는 말이다. 다만 일단 텍스트상에서는 사탄 때문에 인생 종친 사람이 크게 드러나지 않고, 비신자가 야훼의 성향에 대해 불쾌함을 드러낼 때는 그리스도교에서 고백하는 야훼라기보다는, 텍스트상에서 묘사되는 야훼의 모습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예를들어, 현대인들이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가 가지는 바람기에 불쾌함을 드러낼 때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해석하던 알레고리가 아니라 이러한 이야기 그 자체에 불쾌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텍스트상의 묘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사탄의 문제는 악의 문제와 깊게 연관되어있고 분리될 수 없기에, 제대로 된 신학적 통찰 없이 그리스도인이 사탄의 문제를 단순화시켜 비신자에게 말을 한다면, "전지전능한 야훼가 왜 사탄의 활동을 막지 않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부딪히게 된다. 악한 존재인 사탄이 전능하고 선한 야훼에게 활동을 허락 받는다는 개념이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60] 이 부분은 악의 문제 항목을 병행하여 참조하는 것이 좋다.[61]

기적을 자주 일으키면서 자신이 만든 것[62]을 자랑하면서 신적인 면을 강조하는 면이 있다.[63]

여튼 그러다가 유대 역사에 큰 전환점이 발생하는데, 바로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고 유대인 대다수가 바빌론으로 이주당한 일이었다. 이는 유대인의 인구가 소위 '바빌론 유수'가 가능할 만큼 적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치욕 때문에 성서에서 바빌론을 한결같이 나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64] 결국 페르시아 제국이 바빌론을 함락하고 유대인들을 해방하면서, 유대인들은 오랜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전반적으로 리빌딩된다. 나라도 다시 세우고, 성전도 다시 짓고, 경전도 정리하게 된다. 이때 야훼에 대한 묘사와 교리해석도 달라지게 된다.

유대인은 바빌론 생활을 통해 바빌론 문화에도 많이 물들었지만, 자신들을 해방시켜준 페르시아에도 물들었다. 그리고 유대인의 야훼 신앙도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 신앙에 영향을 받아, 기존의 다소 애매하던, 그리고 때로는 다신교적 느낌까지 있던 유일신 신앙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다신교적 요소와 완전히 결별을 하고, 유대인과의 계약을 준수하면서도 스케일이 유대인 뿐 아니라 인류 전체로 확대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신교적 요소가 전혀 없는 확고한 유일신 야훼 신앙은 이 때 이후로 형성된 것이며, 인류를 타락시키는 대적자(사탄)의 개념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물론 유대교 자체가 이 시기 형성되었다고 말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유일신 신앙적 요소, 사탄천사의 개념 등은 모세오경에서도 충분히 나온다. 출애굽기 때부터 자신 외에는 신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고 주장하며 그것은 창세기도 마찬가지이다. 사탄의 원형은 창세기에 나오는 뱀이며 욥기에서 나오는 사탄도 우리가 흔히 영화나 소설 등에서 읽는 악마의 이미지와 다소 차이가 있을 뿐이지, 현대 그리스도교의 사탄과 근본적으로는 같다. 창세기와 욥기에서 사탄이 야훼에게 깨갱하는 호구로 나오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복음서에서도 사탄이 신 앞에 무력한 것은 똑같다. 사탄의 그나마 리즈시절(?)이라 할 수 있는 것은, 40일 동안 예수에게 유혹을 시도한 사건인데, 여기서 예수가 사탄에게 반박을 한 후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예수의 말 몇마디에 줄줄이 쓸려나가는 호구로 묘사된다.[65] 따라서 페르시아와의 접촉으로 사탄의 존재감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본질은 의외로 큰 변화가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 즉 왜 모세오경에서 야훼가 때로는 유일신으로 때로는 주신으로 묘사되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 것이다. 생각보다 답은 간단한데, 바로 모세오경을 구성하는 여러 문헌의 계통적 차이이다. 즉 모세오경은 사제계 문헌(바빌론 유배 이후 작성)을 중심으로, 야훼계 문헌(BC 940년경), 엘로힘계 문헌(늦어도 BC 722년), 신명기계 문헌(BC 622년경 초기 형태가 사용됨)이 보조적으로 결합된 책이다. 즉 빠른 것은 솔로몬 시기의 문헌이고, 늦은 것은 바빌론 유배 이후의 문헌인데, 야훼에 대한 해석이 차이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5.7. 기독교의 신관(神觀)

예수메시아로 믿고 구원의 주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시작이며, 4세기 이후 여러번의 종교적인 논의 끝에 예수가 유대교의 야훼와 동일한 존재로 설파되었다. 삼위일체론을 정설로 채택한 주류 교단들은 예수와 성부, 그리고 성령의 세가지 페르소나가 야훼라는 하나의 본질 및 본성을 지닌 한 하느님으로 믿는다. 다만 예수는 특이하게도 인간의 본질 및 본성도 지닌다. 현대 기독교 종파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예수를 하느님이자 그리스도로 믿으면서 예수를 통한 구원을 인정한다.

5.7.1. 삼위일체론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삼위일체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모든 기독교가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삼위일체론을 믿는 기독교에서는[66] 야훼가 실체로는 하나이되, 성부-성자-성령의 3가지 위격을 이룬다고 본다. 그렇기에 예수 역시 실체로는 야훼라고 보며, 야훼에 대응되는 개념은 '성부'가 아니라 '주(Dominus)'로 본다.[67] 그러나 이 문서와 나무위키에서 야훼는 '성부' 쪽을 가리키는 경우가 굉장히 많으므로 이 부분에는 오해에 주의하여야 한다.
야훼란 이름의 의미에 관해서는 견해가 갈린다. ① ‘그분이다!’는 의미의 환호성(yah!)이라는 견해 ② ‘있다’는 의미의 동사(hyh 혹은 hwh)에서 유래한다는 견해, 즉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나는 곧 나다’(출애 3:14)라고 들었던 이름을 백성에게 전할 때 간접화법으로 ‘그는 곧 그다’라고 했다는 견해, ③ 모세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거절이라는 견해(소극적으로 유비적인 답변을 하신 예, 출애 33:19-23) ④ 주님의 영원성을 강조하여 ‘나는 곧 나였던 나일 것이다’(I shall be what I was)라고 번역하는 견해, ⑤ 하느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자존(自存)을 의미한다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 생각건대, 이 모든 설명은 하느님의 이름이 출애 3:14에서 동사 ‘있다’(qal)의 형태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간과하는 흠이 있다. 문법적으로 야훼는 이 동사의 원인을 나타내는 형식이어서 "그는 있도록 한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렇게 존재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묘사하는 것이다.
가톨릭 대사전, 야훼 항목 中
야훼가 성부 지칭하는 명칭이라는 주장은 당연히 틀린 것이라고 봐도 된다. 나무위키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야훼는 성부의 뉘앙스로 말해지는 경우가 많지만, 삼위일체를 전제로 할 땐 그 어디에도 예수가 야훼가 아니라는 서술은 없다. 물론 성자와 성부를 구분지어 말할 때 예수는 당연히 성부가 아니며 예수는 당연히 야훼의 아들로 신약에서 고백되지만,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고백처럼 또한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야훼의 아들인 야훼)'이기도 하다.
야훼라는 호칭이 성부에 한정된다는 오해는, 구약에서 드러난 하느님은 모두 성부라고 넘겨짚는 오해 때문이다. 하지만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야훼는 3개의 페르소나를 가진 하나의 실체이며, 그렇기에 구약에서 말하는 야훼를 굳이 성부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구약에 나온 야훼가 성부인지 성자인지 성령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도 없고, 성공적으로 구분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냥 '성부만 활동한 건 아니구나' 정도로만 이해하면 족할 것이다.[68]

근본적으로 이런 오해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나오는데,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성부는 야훼가 맞다. 그리고 성자도 야훼가 맞으며, 성령 또한 야훼이다. 예수를 보고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있고, 또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듯이, 예수는 '야훼'로도 '야훼의 아들'로도 모두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 되었을때 그 호칭이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다'라는 선언이 될 수 없듯이, '야훼의 아들'이라는 말 역시도 '예수는 야훼가 아니다'라는 선언은 아닌 것이다. 삼위일체론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합체(?)해서 야훼가 된다는 이론이 아니며, 각각의 페르소나는 완전히 100% 야훼라고 고백된다.

종합해서 정리하자면 다음 명제는 삼위일체론을 전제로 할 때 모두 참이다.
  • 성부는 야훼이다.
  • 성자는 야훼의 아들이다.
  • 성자는 야훼이다.
  • 성령은 야훼이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서는 여호와가 예수 그리스도의 전세에서의 호칭이라고 가르친다. 정확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고 인간의 모습이 되기 전의 상태였을 때의 이름이며, 따라서 여호와와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 인물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이자 아들이라고 가르치는데, 이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백성의 영적인)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에서는 일종의 대리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주 하나님이자 아버지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약을 맺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부활 이전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자 아버지로서, 부활 이후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자 구세주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5.7.2. 구원

비 기독교도이든 기독교도이건 죄가 있다면 야훼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69]예수는 복음을 전하랬지 이교도를 강제 개종시키고 무신론자를 처형하라고 한 적은 절대로 없다.] 야훼의 나라와 야훼가 죄를 거부하나 안타깝게도 첫번째 사람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죄[70]를 지은 이후로는 모든 인간의 죄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으며, 죄가 없는 깨끗한 사람은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죄 사함을 받고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그가 나의 모든 죄를 다 지고 죽었음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71][72]

예수님 믿으면 지옥에 안 간다[73]라는 구원관(매우 거친 요약이지만)을 내세웠으나, 역사적으로 수많은 굴곡을 거쳐 현대 가톨릭정교회의 구원관은 "성부도 믿고 예수도 영접하고 착한 일도 해야 천당 간다."로 바뀌었다… 라고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다. 엄밀히 따지면 이 문장은 명제 자체가 잘못되었다.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해야 구원받는다'라고 교리에 규정지어 놓지 않았다.[74][75] 자세한 내용은 가톨릭항목에서 '개신교와의 교리적 차이'부분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착한 일 하면 구원받는다'라는 주장은 가톨릭정교회가 분리되기도 전에 이단취급 받은 '펠라기우스'라는 자의 주장이다. 기독교의 기본적이고 종파를 초월한 공통된 구원관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다는 것이고 이를 베이스로 하여 종파별로 해석이 달라진다. 그러나 어느 종파든 간에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고 규정한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오로(바울)가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매우 강경한 개신교와 다르게 가톨릭정교회가 '타종교를 존중'하는 자세로 전환한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유일신을 믿으며 '구원은 주님을 통해'임은 변하지 않는다.[76]

한편 개신교에서는 교파와 상관없이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며 옳은 행위는 믿음의 열매라고 본다. 이는 신학적 진보 보수 여부와 상관없이 대다수 교파가 동의하는 것이다.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위인들이 지옥에 갔느냐는 논제에 대하여 성경에 명확하게 나오지 않아서,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런 근본주의적 맥락에서 보면 충무공 이순신이나 세종대왕예수를 믿지 않았으니 지옥에서 훨훨 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론 모른다는 것이 답이다. 성경에 안 나오는 것을 멋대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은 행위로 간주하기 때문.[77] 같은 맥락으로 보자면 '자살하면 지옥간다'란 말도 개신교 교리상 잘못된 말이다.[78] 다만 로마서엔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은 양심에 따라 심판한다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명확히 듣도보도 못한 이의 구원을 확실히 말해주진 않아서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자면, 그 어떤 정통 기독교 교단에서도,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같이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위인들이 지옥에 가거나 가지 않았다고 확정적으로 말하는 교단은 단 하나도 없다.[79] 어디까지나 성경에 없으므로 모른다이다. 이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개신교 자체가 사람은 그 자신의 의로움으로 천국에 갈 수 없으며, 무조건 예수를 향한 믿음을 통해서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교리를 확고한 진리로 상정하기 때문이지만, 듣도보도 못한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 '그럼 소위 복음을 들었더라도 예수를 안 믿은 의로운 사람이나 위인들은 지옥에 간 것이냐?'라는 비판에 대해서 말하자면 개신교 교리상 의인은 오직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하나뿐이기 때문에 이런 비판은 애초에 무시한다.[80]

여하간 이러한 구원관이 유대교와 이슬람, 기독교의 가장 중대한 차이기도 한데, 유대교에서는 구원의 대상이 유대인, 이스라엘 민족만이다. 그러던 것이 기독교에 와서는 구원의 대상이 전 인류로 확장되었다.[81] 이로 인해 유대교에서 파생된 기독교는 자신들의 교리를 널리 세계에 전파하려고 했기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유명한 종교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기독교와 이슬람 이전에도 이미 유대교는 유대 민족의 차원을 넘어 세계 종교화되는 모습을 보여왔는데, 구약성경의 많은 대목들에서 '열방(세계의 여러 민족)이 주님께로 돌아오리라'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82]

뭐 사실 이 문제는 세계화보다는 "영방이라는 개념이 가진 좁은 의미" 문제인데, 부족국가 사회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영방을 따져 봐야 그 주변국에 대한 문제만을 생각했을테니 뻔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당연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부족 국가 간의 한계가 극명하니 어쩔 수가 없었던 듯.

또한 그 기독교의 포교개념에도 실은 이런 저런 문제가 많은데, 사실 유일신의 배타적 개념은 여기서 탄생한다. 이슬람과는 다르게, 기독교가 포교 대상으로 삼은 지역들은 남미 등 대륙에서 떨어진 지역들이었고, 이런 것에는 사실 사연이 있다. 종교개혁 당시 점점 위축되는 가톨릭 세력에 위기감을 느낀 스페인-합스부르크 왕가는 이 당시부터 "가톨릭 개종을 늘려서 새로운 동맹을 창출"하는 것을 모토로 중남미로 밀고 들어가게 되고, 개신교는 북미 지역을 공략하게 되는데, 공통점은 "종교가 바로 동맹의 여건"인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무기기술의 우위를 바탕으로 해서 밀고들어간 이들이 문명화를 이유로 내세운 플롯이 종교였고, 당연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우월한 문명을 지닌 것은 유일신을 믿기 때문"이라는 주장으로 귀결되는 개종 강요는 실은 흔한 일이었지만, 실은 이 과정에서는 종교동맹이라는 요소가 강조되어 "개신교로 개종하거나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라는 사연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정교회의 경우는 좀 더 복잡한데, 사실 러시아 정교회나 각국 정교회가 부흥하게 된 시점은 합스부르크로부터 동유럽권이 독립을 하려 하고, 러시아가 동구권에 큰 영향을 주던 그 시점부터이다. 즉, 반대로 가톨릭을 고수하는 것은 매국적 관점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친러/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정교회가 주류를 차지하게 된 것.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극명해서 전자의 경우는 사실은 "이교도의 신에 대해 문명의 우월성을 기반으로 하여 개종을 강요하는 경우"다. 즉, 전자의 유일신은 "필히 전지전능해야하고, 다른 신을 찍어 눌러야 하는" 신이었고, 후자의 경우는 같은 신을 믿는데 형식주의적인 부분에서 다른 점(주로 정치적인 부분)의 논쟁이 주안점이 되며, 실은 "기독교와 이슬람" 역시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이 문제다.

즉, 정리하면 당연한 말이지만, 구원에 대한 논증을 하는 가톨릭이나 정교회의 문제 역시, 기타 교리적 상이점과 더불어서 "근본 교리의 수정은 불허하되, 지엽적 차원에서의 해석에는 개방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된다. 반대로 "개혁주의적인 입장의 개신교는 거의 무조건 과거 형식을 비판해야 하는 관계로 구원관에 대한 명확한 분기에 대해 다른 해석을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경우"였고, 이런 결론으로 말미암아서 각각의 개념 차이가 발생하고 유일신에 대한 관점해석이 달라지는 것은 뭐 별달리 이상한 일은 아닌 게 된다.

허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부분은 종파의 구조적인 면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개신교는 인정하지 않고 정교회나 가톨릭은 인정하는 것, '보편교회의 권위'라는 면이다. 이 두 종파의 경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들을 주교로 삼아 세웠고 현재의 주교들은 그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성경'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승, 사도단(주교단)의 해석 등을 모두 중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특히 성서 비평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근대 이후로는, 이 두 교회는 성경에 대한 문자주의적 오류에 빠져들 위험이 그나마 줄어들게 된다. 그렇기에 구원관에 있어서 현대에는 다소 유화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가톨릭에서 세례와 구원의 관계만 하더라도 이러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종교개혁 시기에 있었던 트렌토 공의회에서 "만일 누가 세례는 자유로운 것으로서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7차 회기 中)"라고 언급할 정도로 가톨릭 교회는 세례가 구원의 유일한 수단임을 강경하게 표현하였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러나 구원 계획은 창조주를 알아 모시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며, 그 가운데에는 특히 무슬림도 있다.(교의헌장 中)"라고 언급하고 무신론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잘못된 언행이 오히려 무신론의 발생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음을 지적할 정도로(사목헌장 19) 입장이 온건해졌다.[83]

물론 두 교회의 이러한 구조는 아전인수식 교리 해석을 부추기는 부작용이 나올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특히 전근대 시대에는 해당 사회 속에서 두 교회가 하나의 공공기관 역할을 하였기에, 교회가 세속적인 패권을 민중에게 휘두르는 폐단이 있었다. 이를테면 교무금(헌금)을 세금으로써 거두고 세례성사와 장례미사에 대하여 높은 대금을 받는 행태가 그것이다.[84] 이러한 면에서 볼때 두 교회의 구원관이 유화적 것에 대해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불리해지니까 설정놀음 하는거 아니냐?"라는 교회 밖의 비판도 비록 신자들은 억울하게 느낄 수 있을지언정, 불합리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비판이라고는 할 수 없다. 교회가 공공기관 역할을 하였고 유럽인들의 윤리관과 분리할 수도 없던 전근대와 달리, 근대에는 교회와 윤리의 분리가 시도되었고 그리스도교의 구원관이 편협하다는 비판 역시도 다수 제기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유화적 구원관을 재검토할 수 밖에 없었던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는 특히 수직적이고 단일화된 교단 체제를 갖춘 가톨릭이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다가 뒤늦게 설정 뒤집기했다는 비판이 타당한가에 대한 반론에 여지도 있을 순 있는데, 이에 대해선 extra Ecclesiam nulla salus 문서 참조.

고로 실제로 이 구원관의 차이를 보면 유일신의 해석에 대한 정도 차이가 있음은 실은 간단히 파악할 수 있는 문제랄 수 있겠다.

5.8. 이슬람의 신관(神觀)

이슬람의 신은 종교학적·계보적으로는 유대교·기독교의 야훼와 같은 존재이고, 따라서 이슬람도 기독교와 유대교랑 같이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로 묶어 분류된다. 역사적으로도 중세 유럽에서는 이슬람과 자신들이 같은 신을 믿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에는 일부 보수 개신교에서는 신학적인 노선 차이 때문에 다른 신이라고 주장하며 동질성을 부정하기도 한다. 가톨릭에서는 이슬람과 기독교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창조신이자 유일신 신앙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슬람에서 고백하는 신은 기독교의 하느님과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

5.8.1. 다른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의 신과 동일한가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신을 유대교기독교의 신인 야훼와 동일시한다.[85] 무슬림들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이 세 종교의 신자들을 가리켜 'Ahl al Kitab(People of the Book, 성서의 사람들)'이라고 칭한다. 또한 쿠란에는 "우리의 신과 너희의 신은 같은 한 분의 신이시니, 우리는 그 분께 순종함이라."고 되어있다 한다. 무함마드가 기독교인들에 대해 다른 다신교도들과 다르다고 여겼던 것도 같은 신을 믿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음은 가톨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인류의 빛〉(Lumen Gentium, 교회헌장)의 내용이다.
그러나 구원 계획은 창조주를 알아 모시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며, 그 가운데에는 특히 무슬림도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하며,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비로우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우리와 함께 흠숭하고 있다.
〈인류의 빛〉 16

또한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권고 〈아프리카 교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화의 노력에는 모든 선의의 무슬림들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무슬림들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고 십계명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권고 〈아프리카 교회〉

비슷한 취지의 말을 베네딕토 16세는 권고 〈중동 교회〉에서 하였다.
교회는 그 보편적 성격과 소명이 요구하는 대로 다른 종교인들과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중동에서 이 종교간 대화의 토대는 그리스도인을 유다인과 무슬림과 결합시켜 주는 정신적 역사적 유대입니다. 이 대화는 주로 정치적 또는 사회적 질서를 실질적으로 숙고해 보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신학적 관심사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근거하고,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과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Nostra Aetate)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은 똑같이 모든 사람을 창조하신 한분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권고 〈중동 교회〉

다만, 교리적으로는 기독교에서 보는 신과 이슬람에서 보는 신의 성격이 매우 다르다. 이슬람에서 신은 '낳지도 태어나지도 않으신'[86] '유일한' 존재이나 기독교에서 신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 특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속성이 매우 다른 존재라고 보고 있다. 기독교의 신은 예수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만 이슬람의 신은 그를 그저 한 명의 예언자로 여기는 등 차이가 많다.

또한 아랍어에서 신을 일컫는 명칭 '알라'는 아라비아의 메카 쿠라이시 부족이 믿었던 토착 종교의 최고신이었던 알라 탈라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몇몇 기독교인과 유대교인들은 알라가 야훼와 같은 존재라는 말을 불쾌히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이 부분은 후술.

가톨릭이나 온건한 성향의 개신교에서는 이슬람의 신과 기독교의 신이 종교학적으로는 동일하다고 분석하지만, 보수적인 개신교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유대교에서는 기독교의 신도 자신들의 야훼와 같은 존재로 보지는 않는다. 이 역시 삼위일체가 문제가 되기 때문.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유대교의 야훼를 자신들과 같은 존재로 보지만, 유대교에서는 이를 부정한다. 이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87]

우선 이를 이해하려면 이슬람의 교리에서 성전(聖典) 개념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신이 인류에게 내린 계시는 전체 140여개이며, 그 성전 중 가장 신성한 것은 모세에게 내린 오경, 다윗의 시편, 예수의 복음서, 무함마드의 쿠란 4종이다. 그 중에서 무슬림들은 쿠란을 신의 뜻을 전달한 가장 완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무슬림들은 쿠란과 함께 다른 계시서를 믿고 있으며 유대교와 기독교 등 계시서를 믿는 사람들을 '경전을 가진 사람들'(people of the Book)'이라고 일컫는다. 쿠란 이전에 많은 계시가 있었지만 이슬람의 기본 입장은 꾸란이며, 현존하는 "성서"들은 본래 의미를 상당부분 잃어버리고 변질되었다고 여긴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성경을 근거로 주장하다가도, 쿠란과 상충되는 부분은 "변질된 부분"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계시가 되는 성전을 보면 기독교의 신 그리고 유대교의 신은 결국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기독교의 신관과 이슬람의 신관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 다만, 종교학적으로 치면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로서 두 신은 같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 보는 신은 이른바 삼위일체로서의 하느님이고, 이슬람에서의 신은 그 어떤 중간자도 존재할 수 있다는 대원칙을 강조한다. 꾸란 112장에는 "영원하신 하나님, 그는 오직 한 분이시다. 그는 낳음당한 적도 없고, 태어나지고 않았고 그를 낳은 자도 없느니라"라고 한다. 이것은 이슬람의 신은 신민적인 신이 아니고 신의 피조물인 삼라만상의 신이라는 것이고, 신 그 자신 외에는 어떤 사람이나 동물로 신격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88]

일부 기독교 신자들 말에 의하면
"알라는 메카 지방의 여러 신들 중 최고신인 후발이고, 다만 무하마드가 메카지방에서 이동 후 유대인들을 포섭하기 위하여 유대교의 하느님과 동일하다고 변경한 것이므로 엄연히 따지면 유대교와 기독교의 하느님과는 같은 존재가 아니다. 코란의 초기 부분에 알라의 두 딸에 대한 이야기가 써있지만 이 역시 알라와 하느님을 동일시 하면서 이것들을 부인하는 구절이 적히게 된다."
고 하는데, 우선 메카 만신전의 알라는 후발과 구분되는 별개의 신이었고 원시천존처럼 명목상 최고신인지, 아니면 실질적인 기능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하다. 일단 만신전 내에서도 다른 신들과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창조자였으며, 우상으로 형상화되지 않았다. 게다가 만약 저것이 사실이라도 신의 성격이 변경된 이후의 종교가 이슬람교인 것이며, 이러한 변경은 종교의 근본 자체에 대한 수정이기 때문에 수정 전의 아랍 이교와 이후의 이슬람 종교는 서로 단절된 관계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기존의 '알라'와 이슬람의 '알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가나안의 엘과 유대교의 엘로힘이 별개인 것처럼.
개신교 내에서 바울로 신학의 권위자인 김세윤 교수는 기독교의 신은 초월자인 동시에 내재자인데 이슬람의 신은 초월자이지만 내재자는 아니라고 주장한다.[89] 즉, 같은 신으로 보지 않는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기독교의 신과 이슬람의 신이 서로 다르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이와 동일하게 이러한 두 종교 간 신관(神觀)의 차이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였다.

5.9. 바하이 신앙의 신관

바하이 신앙에서의 유일신 역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과 같은 야훼이며 이 때문에 바하이도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로 분류되고 있다. 애초에 바하이의 시작이 이슬람의 분파로 출발했기 때문에 신관 역시 이슬람과 상당히 유사한 면을 보인다. 단 이슬람은 바하이에 대해 같은 신을 믿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단적 교리를 믿는다고 보기 때문에 바하이를 이단으로 취급했고, 종교로 인정하지 않고 박해해왔다.

바하이에서의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은, 인간이 볼 수 없는 신성한 존재이다. 바하이 신앙은 현시자를 중요시 여기는데, 신은 현시자를 통해서 인간에게 계시만 내려줬을 뿐 인간과 직접적으로 소통하거나 만난 적은 없다고 한다. 인간은 신과 절대 만날 수 없다고 본다. 현시자는 이전 현시자의 계시를 사람들이 지키지 않거나 변질하려고 할 때마다 새로운 현시자를 세상에 내려보내 가르침을 확립시켰다고. 바하이에서는 총 9명의 현시자가 하느님의 계시를 전했다고 믿는데, 아브라함모세, 예수, 무함마드 등 아브라함 계통 종교 창시자들과 부처, 크리슈나, 조로아스터 등 인도 계통의 종교 창시자들, 19세기에 신의 교리와 계시를 확립시키러 온 바압과 바하울라이다. 9명의 현시자 중 가장 높게 평가받는 바하울라는 이전까지 신이 내려준 계시와 교리를 확립시키기 위해 왔고, 바하울라 이후의 또 다른 현시자는 없다. 즉, 바하울라가 마지막 현시자이다.

또한 하느님이 현시자를 통해 인간에게 내려준 계시 중 가장 중요한 계시는 토라, 시편, 복음서, 쿠란, 불경, 베다, 이베스다 이며 마지막 선지자 바하울라를 통해 선집과 케타베 이닥스(지성서) 등의 계시를 내려 과거 계시들와 가르침들을 확립시켰다고 한다.

6. 야훼의 비윤리적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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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이슬람에서

이슬람의 신은 타 아브라함교의 신과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 성경과 마찬가지로 쿠란을 보면 폭력적인 구절이 있기도 하나 긍정적인 구절도 존재한다. 애초에 쿠란 자체가 성경과 내용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렇다. 악해보이는 구절도 전후 맥락을 뜯어보면 은근히 그럴만한 상황이 있는 경우가 있다.[90] 결국 단순히 구절만 뜯어서 보면 안된다는 이야기다. 어떤 것이든 전후 맥락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7. 야훼의 모습과 창작물에서의 야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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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를 묘사한 현대 장식품.

현대뿐 아니라 고전 시대부터의 예술작품에서도 야훼는 그리스 신화제우스같은 노인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양의 고전주의적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91] 다만 브루스 올마이티같은 영화에서는 흑인으로도 나온다. 혹은 출애굽기의 묘사처럼 온 몸이 빛나는 인간의 형상인 경우도 있으며 도그마 처럼 여자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따져보자면 인간의 몸을 입고 왔을 당시 즉 예수의 모습, 보통은 예수와 비슷하게 생긴 흰 세마포 옷을 입었을 수도 있지만, 보통은 머리와 수염이 하얀 구름위에 있는 노인 정도로 묘사하거나, 말로 표현하기 힘든 초현실주의적으로 그려지거나 아예 실체가 없는 빛덩이로도 묘사한다.

한편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은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바다와도 같다.
이 바다는 끊임없이 출렁이며 물살과 물방울, 안개를 시도 때도 없이 형상하는데 이는 우리 존재물들이다.
바다는 물방울을 포괄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부분은 물방울 속에 들어있기도 하다.
바다가 출렁일 때 모든 것이 잠깐 나타났다 곧 사라진다.
허나, 이 바다는 무작정 출렁이기만 하는 것이 아닌 끝없는 지혜와 거룩한 의지로 충만해 자신의 계획대로 출렁인다.
라며 신을 바다로 비유해 표현했다.

어떤 묘사를 하든, 이는 모두 신의 영광 또는 신의 위엄으로 신이 현현한 모습이지 신의 본체는 아니다. 신은 영이라 실체가 없다.

결론적으로는 모두 맞다고 볼 수 있다. 야훼는 어떤 모습이라도 취할 수 있는 존재이며 굳이 모습을 취할 필요가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라 인간과 같은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며, 신학을 조금이나마 안다면 창세기의 "우리의 모습을 본 따 우리와 같이"의 신의 말이 물리적 형태가 닮았음을 의미하는게 아니라는 것은 알수 있다.

애초에 전지전능하다는 시점에서, 모든 것을 초월했다는 시점에서 그에게 본모습이란 개념은 통하지 않는다. 무엇을 그리거나 표현해도 그게 야훼의 모습이 될 수 있다. 전지전능하면 원하는 모습으로 언제든지 바꿀 수 있으니까.

이집트 왕자,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 십계, 이웃집에 신이 산다[92] 등 다양한 애니메이션, 종교영화에 등장한다.

심슨 가족에서는 대단히 치졸하게 나온다. 호머 심슨이 "지옥 따위 없어, 신도 없다고"라고 말하면서 플랜더스의 성경책을 불태우려하자 호머 심슨의 집 천장을 날려버리고 등장하면서 호머가 바트 목조르는것처럼 'Why you little'을 장엄한 음성으로 말하면서 호머를 목졸라 죽이고 마지한텐 플랜더스가 했다고 뒤집어 씌운다

8. 모티브를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것들

8.1. 존 로널드 루엘 톨킨 세계관의 일루바타르

대놓고 나오지도 않고, 작품만으로는 알 수 없기는 하지만, 그 이름 풀이(영어로 ALL FATHER)로 정체를 암시하고 있고, 아틀란티스누메노르의 동일화를 표현함으로 결국 동일존재로 인식함을 알려준다. 그의 본명은 에루의 경우는 영어 The One으로 번역이 되고 이건 더 노골적이다.[93] 기독교와 아무 관련이 없는 아틀란티스가 근거로 등장하는것은 작가의 성향과 관련이 있는데, 신앙심이 깊은 가톨릭 신자였던 톨킨 성향상 그의 이야기를 현실과 연관성을 둔 이상 다른 존재로 만들기는 힘들었을 것이란 점을 둘 수가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세계관인 가운데땅이 고대 지구의 이야기라는 시초가 되는 것이 저 아탈란테고(발리노르는 떨어져나가고, 땅을 둥글어지며-즉 행성이 되며-, 지형은 현재와 비슷해진다)이야기를 통해 현실과 연결시켰는데, 톨킨의 입장에서 일루바타르는 결국 야훼라는 것.

사실 반지의 제왕까지만 해도 일루바타르가 야훼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실마릴리온 등 세계관이 완성되며 확정된 것으로 봐야 한다. 다만 톨킨 자신이 일루바타르와 아훼가 동일인물이라고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다만, 소문에 의하면 톨킨은 아칼라베스(athrabeth)에서 멜코르를 창세기의 뱀 처럼 쓰다가 중간 여백에 '이렇게 계속 나가다 보면 성경의 패러디가 되어 버리지 않겠는가' 라는 말을 남기고는 HoME 10권 분량에서 이런 제반 신화에 대한 저작을 그만둔다는 말이 있다. 이건 소문이 아니라 실제 기록이다. 원문 여백에 실제로 존재한다.

다만 그가 쓴 작품의 성향과 여러 모티브를 봤을때, 일루바타르와 야훼의 연관성은 부정할 수가 없고 비현실적 세계를 다룬 소설(주로 판타지 계열)에서 가장 야훼에 가까운 존재라 볼 수 있다. 적어도 단순히 이름만 가져다 쓴 존재들과 비교하면 그 연관성은 격이 다르다.

그래서인지 누메노르인들이나 엘프들이 일루바타르에 대해 보이는 신앙을 언급하면서도 그 형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냥 누메노르에서 일루바타르에게 제사를 지냈다로 끝… 어쨌든 이들의 신앙은 기독교가 아니고 관련도 없지만(시대상으로 봐도 엄청난 과거가 된다), 작가가 작가인 만큼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아도 그 뼈대는 종종 나타난다(골룸을 살리는 것에 대한 대화나 일루바타르의 의도나 등등). 그 신이 기독교의 야훼 하느님과 동일존재라도 별 문제가 없을 정도로 톨킨은 자신이 말한대로 자신의 신화가 기독교의 교리와 조화를 이루게 저작했다. 하긴 현실상도 같은 신 두고 3개종교(기독교, 이슬람, 유대교)가 존재하고 실질적인 분리를 보면 수도 없는데(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수니파, 시아파, 등등등) 새로운 신화를 만들면서 역시 같은 신 두고 이런 종교들이 창조되기 전 원시 시발점으로서의 다른 신앙을 만드는 것은 그에게 별 부담감이 없고, 그의 신념과 조화를 이루는 선택이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일루바타르와 아훼의 인식이 위의 내용들과 차이가 나는 것은 여기서 다루는 야훼는 기원전 하고 한참 전의 구약의 야훼, 유대인의 야훼를 다루기 때문이고, 일루바타르는 톨킨이 믿는 20세기 중후반의 신약을 주 바탕으로 한 야훼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시대가 2000년 + 천년 이상 차이나는데 인식이 같을 리가 있나.

8.2. 기타

9. 관련 문서


[1]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한국기독교장로회기독교 대한감리회 소속 몇몇 개신교회들, 여호와의 증인, 한국 바하이 등.[2] 성공회를 제외한 대다수의 개신교 교단, 이슬람교(알라의 한국어 번역을 ‘하나님’이라 한다.)[3] 엘 항목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성경에서는 야훼를 엘로 부르는 용례가 많다. 성경에서의 용례를 보면 가나안의 이방신으로서의 엘과,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일컫는 엘을 개념적으로는 구분하고 있지만, 용어 자체는 가나안의 '엘'에서 영향을 받았다. 비슷한 사례로, 라틴어에서 제우스를 일컫던 이칭인 'Deus'와 불교에서 제석천을 일컫던 이칭인 '천주(天主)'가 그리스도교의 어휘에 흡수된 사례를 들 수 있다.[4] 라틴어에서는 그리스에서 제우스(Zeus)라는 단어를 들여왔을 때 'Deus'라고 표기했다. 여기서 제우스를 일컬어 'Deus Pater(아버지 신)'로 불렀고 이 단어가 변화해 라틴어로 제우스를 뜻하는 'Iuppiter'가 나왔다.[5] 엘은 가나안 만신론에서 가장 위대한 신으로서 신들 중에 최고의 신이며 신들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엘은 그는 초기 가나안 신화에서 주도적이었으나 후에는 그의 아들 바알로 대치되었다.[6] 역사상으로 이스라엘의 최전성기 시절.[7] 단 구약시대에 활동했던 야훼는 주로 성부이고, 신약성경에서는 성자가 직접 인간이 되어 예수라는 이름으로 3년 40여 일간 활동한 후 다시 하늘로 되돌아간다.[8] 스토아 학파에피쿠로스 학파 등.[9] 실제로 중세 시기에도 이로 인한 논쟁이 있기도 하였으며,(물론 다르다고 주장한 쪽이 이단이 되었다) 더 예전으로 올라가면 사도 바울로 대표되는 유대화파(기독교를 유대교의 연장선으로 봤다)와 반대파 간의 충돌부터 현대에 일부 종교학/신학자들간의 논쟁에 이르기까지 생각보다 뿌리깊은 논쟁이기도 하다.[10] 정경 아님[11] 출애굽기 16장 12절, 공동번역성서.[12] 이걸 생각한다면 하느님 아버지, 하느님의 아들이란 개념이 구약에서 없던 갑툭튀라는 주장은 할 수 없다.[13] 본래의 그리스어 제목은 "요즘 진리랍시고 돌아다니는 '소문'에 대한 산파적 접근과 분석"이며, 이것은 내막을 살펴보면 오히려 이단논박이라고 과격하게 이름을 왜곡하는 것보다도 더욱 호전적인 제목이다. 책 내용 자체가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의 키배의 정수를 보여주며 철저한 산파법으로 소문으로 떠도는 것들이 위험천만한 이단사상임을 조목조목 짚어서 고발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본래 영문 위키백과에서 원제를 제대로 언급하고 있었으나 지속적으로 해당 내용이 삭제되어왔고, 나무위키에서도 그런 경향이 있는대, 원제가 너무 정중해 보인다고 감정적인 편집을 하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애초에 이미 서술했듯 원제야말로 이레네오가 이단을 철저히 반박해 개박살내겠다는 의도를 강렬하게 담은 제목이다.[14] 애초에 별로 알려져 있지 않던 이단논박이 재발굴된 것도 수세에 몰렸던 가톨릭에게 한줄기 빛처럼 힘이 되어준 책이기 때문이었다. 이레네오라는 극초기 기독교의 기억을 아직 대다수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 그리스의 기상이 느껴지는 철저한 논리적 분석으로 이단 사상을 박살내준 것이니 당시 온갖 논쟁에서 고생하던 카톨릭 입장에서 통쾌할 수밖에.[15] 화자가 야훼인지 이스라엘 사람인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묘사되어 굉장히 독특한 느낌을 주는 운문이다. 워낙 중요한 구절이다보니, 역판 모두 번역자들이 영혼을 갈아넣어 맛깔나는 번역을 보여준다. 굳이 세 번역을 다 인용한 것도 이 때문.[16] 사실 성경에는 여러 화자가 동시에 발언하는 장절이 상당히 많다. 단순히 야훼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열조나 그리스도가 같이 등장하는 경우는 굉장히 흔하며, 심지어 화자중 성경을 읽는 독자가 껴있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모호하게 화자를 섞어둔 책 중 대표적인 것이 대관절 누가 누군지 도저히 구분이 되지 않는 요한계시/묵시록. 그나마 화자를 구분하기 쉬운 경우는 아가서를 꼽을 수 있다.(술람미 여인, 왕, 열조로 보이는 화자단이 그나마 명확히 구분된다.) 이사아 52~53장의 기록도 시각에 따라서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가 받을 고난과 그를 통해 열리게 된 구원의 길만을 말하는게 아니라, 그가 걸은 길을 따라 역시 고난을 받을 성도들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17] 이 기록에서 한가지 의문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속건제물"을 언급하는 부분인데,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예수를 명확하게 인생 전부를 위한 속건제물이라 언급하는 곳이 없으며, 그나마 있는 곳이 이 이사야의 기록 하나 뿐이다. 예수는 성경 전반에서 화목제물이라 언급되지 "속건제"에 해당되는 제물이라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냥 넘기기 쉬운 부분이지만, 제사장직이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넘어가게 되는 과정에서 정통성 부분에서 매우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반드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화목제"와 "속건제"는 전혀 다른 것이다. 끊어진 야훼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제사가 화목제이며, 그 끊어짐을 만드는 원인인 "죄"를 사하는 제사가 "속건제"이다. 옛 율법에 집착하는 것은 기독교에 있어 어처구니 없는 일이나, 기독교는 엄연히 유대교에 대해 장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claimant로 "서자"이며,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역사가 서자의 역사이기에 우습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유대인으로부터 장자의 권리를 주장해 빼앗은 것이 기독교이기 때문에 당연히 정통성의 입증이 필요하다.[18]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높이 들어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Ego sum)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것만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요한 8, 28)"[19] 이 문서에서 여러번 강조되지만, 야훼는 성부에게만 해당되는 호칭이 아니다.[20] 코이네 그리스어로 네 글자라는 뜻. 항목 참조[21] 모음 기호가 확실하지 않은 것은 중동 지역 문자의 특징이다. 현대 아랍어에서도 의미를 명확히 할 절대적인 필요성이 있는 꾸란 외에는 자음만 나열하는 것이 대부분. 아랍어에는 나름대로 모음이 붙는 규칙이 있어서 규칙에 따라 단어가 파생되기 때문에 원어민들은 읽는데 별 어려움이 없지만, 외국인에게는 이만큼 지독한 언어도 없다. 어떤 단어든지 일단 외우지 않으면 쓰여있어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원어민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모음 기호를 병기하면 글자를 읽기 굉장히 어려워진다.(…)[22] 사실 영어식으로 하면 지호바에 가깝다.[23] 사실 정확한 발음은 야훼(YHW/H)가 아니라 야웨(YH/WH)다. 히브리어에는 훼라는 발음이 없다. 그래도 이미 익숙해져서 여호와, 야훼, 야웨가 두루두루 사용되는 상황.[24] '야베'라는 주장도 있다. Yah-weh는 두 음절 단어이고, w는 이디시어 '와우'가 아니라 현대 히브리어 '바브(vav)'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25] 가톨릭, 루터교회의 경우는 제2계명, 성공회를 비롯한 기타 개신교정교회유대교의 경우에는 제3계명.[26] 'LORD', 'HERR(N)' 등의 표기.[27] 일부 보수적인 목사들은 이걸 가지고 표준새번역은 자유주의 사상에 물들었다고 까기도 했다. 반대로 다른 부분에는 문제가 있지만 '여호와'라는 이름을 남발하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오히려 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목사들도 소수 있다.[28] 가끔 왜 신(神)으로 번역하지 않았는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한자의 신(神)은 god보다는 spirit이나 ghost의 개념이다. 과거 한국 가톨릭에서 성령(스피리투스 상티)을 '성신'으로 번역한 것이 그 예. 다만 이후 神이라는 한자의 뜻이 god 의미가 강해졌기에 이를 반영하여 성령으로 번역을 수정한 것이다. 같은 원리로 과거 가톨릭은 천사를 천신(天神)으로 번역했다. 당연히 하늘의 god이라는 의미는 아니고, 하늘의 spirit이라는 뜻이다. 지금에야 어감이 이상한 건 부정할 수 없지만…[29] 가끔 하나님이나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기독교가 근래에 만들어낸 신조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이라는 표현 자체는 기독교의 전래 이전에도 한국에 있던 표현이다. 조선시대 중기의 시인 '노계가'에서도 확인되는 나름 유서깊은 표현이다. 제일 왼쪽 열을 참고.[30] 개신교는 하나의 교단이 아니므로 의견 통합이 힘들다.[31] 이것은 가정을 예를들어 볼때 집에 들어설때 굳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나다/저에요'라고 하는것과 비슷하다.[32] 유일신의 3대 속성중, 흔히들 전선을 간과하는데, 솔직히 빠져도 별 상관은 없어보이긴 하다.[33] 모세가 하긴 했지만, 하느님에게서 힘을 받은 것이므로.[34] 여기서 소돔과 고모라는 대도시였다는 사실을 유념하자.[35] 이는 2차 창작물에서도 마찬가지이며 밀턴의 실낙원에서는 자신이 만든 게 잘 돌아가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즉, 힘들어서 뻗은 게 아닌 창조활동의 마지막을 뜻하는 쉼이었다.[36] 안식일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사바트'에서 유래했다. 동사로는 '멈추다'라는 뜻이다.[37] 여담으로 그는 성경에서 시간(역사)만큼은 어쩌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태양과 지구와 달을 조정해 하루를 멈출 수 있으니(여호수아) 중력에 따라 달리 작용하는 물리적 시간은 얼마든지 통제 가능하지만 개념적 시간 즉, 지나간 역사는 되돌릴 수 없는 듯하다. 전지전능하다고 하나 상식 안의 전능이지 상식 밖의 전능은 아닌 듯하다. 만일 야훼가 역사를 수복할 수 있었다면 야훼는 선악과 사건 이후 빅 픽처를 그려가며 수많은 시간과 노력, 최종적으로 자기의 한 위격이기도 한 예수를 통해 인류를 구원할 필요가 없다. 바로 과거로 날아가서 사탄을 없애버리면 되니까. 뭐, 시간도 노력도 무한한 야훼 입장에서는 들인 시간과 노력이 별거 아니겠지만…[38] 야훼가 상식과 논리 안의 전능함만을 가졌다면 누구도, 설령 야훼 당신조차도 들 수 없는 물체를 만든 뒤 들어보아라.라던가 한 경기에서 A팀과 B팀을 모두 이기게 만들어보아라. 등의 상식과 논리 밖을 벗어난 주문은 못 이룰 가능성이 크다. 전자의 경우는 무리수를 감행하면 가능하기는한데 시공의 축이 수많이 생기며, 후자는 무한 평행 우주가 만들어진다. 즉, 실현할지라도 야훼랑은 달리 3차원 존재인 우리는 인지조차 못하며 세상은 개판 5분 전이 된다. 당장 시간축 몇 개가 더 생겨 지금의 시간이 아닌 무수히 많은 시간이 생긴다고 생각해보라.할 수 있는데 우리가 인지하지 못해서 알 수 없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39] 어쩌면 야훼는 개념적 시간도 되돌릴 수 있으나 그 자신의 전능성, 피조물에게 준 자유 의지, 스스로가 정한 법칙을 위배하지 않는 무오류성, 완전성 등의 이유로 먼 길을 돌아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이 야훼가 아니며 야훼가 이 부분에 대해 단 한번의 언급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야훼가 상식 안의 전능함을 가졌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당장에 인간도 생각하는 부분을 전능한 야훼가 생각 못했을 리도 없고…[40] 그러나 정작 신학의 양대산맥이라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문자 그대로의 7일을 부정했다. 신학에 의하면 그저 7단계로 나뉜 아주 긴 시간이라고 한다. 애당초 신학은 신이 뿅!하고 창조하는 것이 아닌 신이 뭔가에 뜻을 품게 되면 서서히 진화하면서 만들어진다고 본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이를 존재의 장(물리학적으로 보면 퍼텐셜에 가깝다.)이라고 하였다.[41] 그런데 이런 해석은 어디가서 함부로 주장하면 안된다. 이 내용을 정리하면, 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곧 선하지 않은 것이고, 그게 바로 지옥이라는 이야기인데, 이런게 바로 불신지옥과 일맥상통하는 논리인 것이다. 그러니 '신에 대한 믿음'과 '선악에 대한 판단'을 동일시하는 것은, 자칫 불신자는 선하지 않다는 식의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는 일이란 것을 기억하자. 다만 가톨릭의 경우는 이 문제를 이렇게 정리했다. 「1.사람이 착한건 하느님의 은총 2.따라서 선한 사람은 의식하지 않아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 3.따라서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무신론자이거나 이교도인 사람중에 무의식적인 그리스도인이 숨어 있을 수 있음.」 이 이론을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이라고 한며 신학자 '칼 라너'가 주장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의 영향으로, 타종교인과 무신론자의 구원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명시했다. 다만 공의회에선 다소 애매하게 표현했다.[42] 그러나 사실 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단지 지엽적인 견해차일 뿐, 어차피 둘 다 기존의 '신명론(도덕이 신에게 종속된 것이라는 주장)'의 입장을 답습한다는 점에서 그 근본논리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어느 쪽이든 야훼가 선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야훼가 하는 일이 선하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렇게 도덕을 객관화할 수 없는 임의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릴 경우 그 누구도, 심지어 야훼 스스로조차 옳고 그름의 절대성을 보장할 수 없게된다. 근데 그런 개념조차 야훼가 만들어 낸 것이니… 야훼의 기준에서는 별 문제되지 않는다.[43] 야훼는 전지해서 이미 모든 결과를 알고 있으나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불러올 결과를 모르고 당장에 눈 앞에서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동한다. 물론 야훼는 전지하기에 당연히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정도로 해석이 된다. 즉, 야훼는 인간이 범죄할 것을 알았지만, 정작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범죄하였다는 것.[44] 다만 이 구절은 개역이나 개역개정판의 번역 기준으로 영어성경이나 새번역 성경을 보면 뉘앙스가 좀 달라진다. NIV기준으로는 이 구절이 "I'm that I am." KJV기준으로는 "I'm who I am." 새번역 기준으로는 "나는 곧 나다"이다. 이쪽 번역이 보다 더 단순해 보이지만 그냥 존재하는 인격체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의미까지 더해진 초월적인 존재라는 뜻으로 봐야 한다. 사실 본 뜻 그대로라면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가 아닌 나는 있다.[45] 제우스, 바알, 심지어 옥황상제까지. 다만 첫 번째 신은 대체로 부모가 존재하지 않는다. 라, 반고, 가이아 등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는 나와도 부모는 없다.[46] 이우혁은 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설명이 감명이 깊었는지 퇴마록에도 비슷한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이란 개념이 등장한다. 복수형으로 보아 유일신은 아니지만 다른 신이나 악마들보다는 더 상위의 존재들로 언급된다.[47] 불교의 본초불이나 힌두교의 브라흐마, 한국 신화의 미륵 등이 해당된다.[48] 집대성한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이기에, 유대교와 동방교회에서는 조금 다를 수 있다.[49] 인간에게 자신의 거룩한 성품,형상을 부여했다는 뜻이다. 결코 야훼 본인의 외모대로 사람을 창조했다는 뜻이 아니다! 야훼는 완전히 영적인 존재이다. 때문에 외모라는것도 존재하지 않는다.[50] 르네상스 시기에의 화풍들을 보면, 성부와 제우스, 성자와 아폴론의 외형적 이미지가 비슷하고, 이는 천지창조에서도 그렇다.[51] 정확히 말하면 개신교, 그중에서도 츠빙글리와 칼뱅의 영향을 받은 개혁교회들이 시각적 요소를 엄격하게 배제하고 있다.[52] 매우 중요한 문제로, 이슬람교에서 신은 그 어떤 시각화한 이미지도 가지지 않는다. 인간의 형상이 아닌 하다못해 두루뭉술한 빛으로도 표현해서는 안된다.[53]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에서는 정말 극단적인 종파가 아니라면 어차피 이방신들은 존재하지도 않는데, 섀도우 복싱을 할 필요가 있나 생각해서 이런 것에 무덤덤하다. 때문에 바티칸에다가 이집트오벨리스크를 간지난다며 박아 놓는다거나 할 수 있는 것.[54] 예를 들어 바알은 근동에서 풍요의 신으로서, 바알 역시 어떤 실체가 있는 존재라기보다는 풍요 자체에 대한 욕망에서 만들어낸 기원의 대상이다. 신명기 7장 13절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들을 열거하고 이어서 이민족 징벌 명령과 우상숭배를 경계하는 계시가 이어지는데, 이는 13절의 축복들마다 그에 해당하는 우상들이 있었음을 추측케한다.[55] 야훼계 문헌: 솔로몬 시기(BC 940년경), 엘로힘계 문헌: 북왕국에서 서술되어 BC 722년 남왕국에 수용된 것으로 추정, 신명기계 문헌: BC 622년 초기 형태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 사제계 문헌: 바빌론 유배 이후 작성된 것으로 추정.[56] "만일 야훼를 섬기고 싶지 않거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여러분이 오늘 택하시오.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에서 여러분의 조상들이 섬기던 신을 택하든지, 여러분이 들어와서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인의 신을 택하든지 결정하시오.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야훼를 섬기겠소." 여호수아서 24장 15절, 공동번역성서.[57] 노아 홍수처럼 싹쓸이 살육은 숫자 추산이 되지 않는다.[58] 카더라가 아니다. 성경 내에서 야훼가 사람을 쳐죽일 경우 그 죽인 수를 자랑스레(…) 기재해 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성경을 근거 자료로 삼아 숫자로 추산될 수 있는 야훼의 의한 사망자들을 합치면 실제로 대략 200만명이 넘어간다.[59] 그렇다고 야훼와 사탄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야훼는 전능자라 그가 뭔가를 원하면 그 원한게 행해진다. 야훼가 이스라엘을 벌하기 위해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려는 마음이 들게 하려고 원했기에 사탄이 움직였다고도 볼 수 있다. 가령, 야훼가 이 문서가 있기를 원했기에 지금 야훼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이 문서가 쓰여진 것처럼.[60] 사실 이런 부분은 이슬람이블리스의 개념으로 기독교보다 훨씬 심플하게 정리해버린 바 있다. 이슬람교에서 이것을 이야기와 같은 형태로 설명한 반면, 그리스도교에서는 존재론(형이상학)으로 설명했다.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해설은 사목적으로 신자들에게 쉽게 설명하기 힘들어진 문제점을 낳았다. 당장 이것을 깊게 파고들면, 시작하자마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튀어나오고, 곧이어 토마스 아퀴나스가 나오며, 깊게 파고들면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과 카를 라너가 출현한다.[61] 사족을 달자면, 과거 리그베다위키 시절, 말락 야훼라는 야훼의 다크사이드(?)가 성경 해석에 있었는데, 유일신 신앙이 발전하면서 퇴출되었다는 서술이 있었다. 다만 이는 근거가 없는데, 말락 야훼 문서를 참조할 것.[62] 욥기에서의 베헤모스라든가. 다만 욥기는 장르가 역사서가 아니라 문학서(지혜서)에 속하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맞지 않을 수도 있다.[63] 여담으로 야훼는 항상 피조물이 타락할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모세가 죽기 전 '이 백성들이 내가 언약한 땅에 들어가고나면 나를 배반할 것을 내가 알고있다.'라던지 '그 때에는 내가 큰 벌을 내리리니 배신하지 마라. 이렇게 말해도 너희는 날 버리겠지… 그러나 내가 내리는 벌을 받은 후 회개하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면 내가 전과 같은 평안과 부귀를 약속하리라.'[64] 바벨탑을 NIV 난하주에서 히브리어로 바빌론과 유사한 발음이라고 밝힘으로서 역사적 바빌론의 등장 이전부터 바빌론을 악의 소굴, 근원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한묵시록의 악마의 나라도 로마 제국이 아니라 바빌론이다.[65] 기독교에서 사탄은 단일 개체가 아니며, 악마와 동의어이다. 악마의 왕이라느니, 진명이 루시퍼라느니 하는 신비주의자들의 떡밥이 있지만 동인설정에 불과하다.[66]삼위일체론을 믿지 않는 종파에서는 이야기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부터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종파는, 서방의 가톨릭이든 동방의 정교회이든 좀 더 동방에 있는 오리엔트 정교회이든 네스토리우스파의 후예인 아시리아 동방교회이든간에 삼위일체의 기본 개념, 곧 한 하느님의 실체가 세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는 개념은 고유한다. 다만 예수가 하느님 실체와 인간 실체를 따로 지니는지, 하느님 본성과 인간 본성이 따로 있는지, 하느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따로 있는지 등등의 '그리스도론'에서 구체적 해석이 갈라질 뿐이다.[67] 이 부분은 삼위일체론 항목을 참조해보자.[68] 구약의 야훼의 행적들에서 각 위격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지는 추측 불가다. 심지어 구약에서는 '성령'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이 나오지도 않는데 성자의 위격이 어떤 형태로 발현되었는지를 찾는 것 자체가 무리수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신구약 양쪽에서 묘사되는 하느님을 인식함에 있어서, 구약에서는 성부만 활동하다가 신약에서 성자와 성령이 '추가'되었다고 인식하는 것 역시도 곤란하다. 그보다는 신구약에서도 동일한 하나의 하느님을, 신약의 텍스트에서는 셋의 페르소나로 더 엄밀하게 표현하였다고 이해하여야 그리스도교의 성경 이해방식에 가깝다. 즉 '구약에는 삼위일체적인 표현을 안 쓰네? 그렇다면 구약의 야훼는 성부구나'라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는 삼위일체적인 표현을 안 쓰네? 그렇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페르소나 구분에 집착하면 안 되겠구나'라고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다. 한편 성부, 성자, 성령의 3가지 페르소나라는 표현을 거부하는 유대교에게 있어서도 구약에서 묘사하는 야훼가 성부만을 가리킨다는 표현은 설득력이 없다. 애초부터 삼위일체 교리가 없는 유대교에서 야훼를 '성부'로 여길 것이라는 가정 자체가, 지극히 비유대교적인 가정이다. 즉 그리스도교에 의하면 구약의 야훼를 성부에 국한시키면 오류이고, 유대교에 의하면 구약의 야훼에게 성부라는 용어를 적용시키면 오류이다.[69] 즉, 교회에 돈을 얼마를 바치고 이교도를 탄압하며 전 세계를 기독교의 영향 아래 몰아 넣는다해도 죄가 남는다면 절대 야훼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애당초 그 과정을 이루는 중에 수 많은 죄를 범하게 된다.[70] 일반적으로 원죄라고 부르는 것이나 성경에서 명활하게 원죄라는 개념이 제시된 적은 없다. 원죄와 자범죄의 구분은 어디까지나 성경의 내용을 해석하면서 나온 신학적 개념일 뿐, 기독교인 모두가 절대적으로 믿는 근본 교리는 아니다.[71] 이게 기독교의 근본, 핵심 교리이며 인간이 예수를 왜 믿어야 하는지의 이유, 예수야말로 신이 인간을 위해 놓아준 유일무이한 다리이며 모든 교회(개신교,가톨릭,정교회)가 이 부분만은 완전히 동일하다. 포용적인 가톨릭에서조차도 '''예수를 배제한 구원은 잘 모르겠으나 예수를 통한 구원은 100% 확실한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다.[72] 얼핏보면 이교도나 무신론자도 죄만 안지었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쓰여있으나 안타깝게 예수 이외의 확실한 구원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도들도 모두 100% 천국을 가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성경에서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무고죄라고한다. 완전무결하며 오류가 없는 하느님이 "이는 너희를 위해 내주는 내 아들이며 나의 대행자이다."라고 말하며 예수를 보내고 기적을 행함으로서 직접 보여주기까지 했으나 그걸 거짓으로 치부하고 결국 완전무결하며 오류가 없는 야훼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죄를 씌우는 무고죄를 범한다는 것.[73]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길로 주장하고 있으니 이게 틀린 얘기라는 괴이한 주장이 있는데, 삼위일체론 교리를 접어두고 생각하더라도 예수를 믿고 성부는 안 믿는다는 건 애초부터 성립불가다. 이 두 위격은 본질이 같기 때문이다. 물론 근본은 성부이다.[74] 일부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양대 보편교회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와 구원 문제에서 교회의 역할과 7성사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변형된 행위구원론, 혹은 구원에서 인간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여겨 잘못된 것으로 여겨진다고 이전엔 쓰여 있었으나, 교회의 역할은 교회가 단순한 인간 공동체가 아니라 성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성자의 온전한 지체이고, 성사 역시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성사라는 행위의 주체는 하느님이므로 단순히 인간의 행위로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75] 다만 이는 구원에서 교회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양대 보편교회의 입장인 것이고 개신교 종파들은 가톨릭, 정교회만이 성자의 지체라고 하는 그 교리 자체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그저 보편교회 입장에서 설명한 순환논법일 뿐이다. 개신교 종파들은 가톨릭과 정교회가 구원에서 교회의 역할과 성사를 매우 중요시하는 것과 달리 개인의 믿음이 구원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교리를 공통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개신교가 교회라는 공동체를 등한시여기는 것은 전혀 아니다.(무교회주의라고 정말 등한시하는 종파도 있기는 하다.) 허나 애초에 7성사 중에 세례와 성찬만을 성경에 나온 전통으로서 인정하며 보편교회만이 성경 해석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 개신교 종파들의 입장에서 보면 7성사나 보편교회에 구원의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은 변형된 행위구원론이라고 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는 그저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76] 물론 가톨릭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스스로의 길을 '구원의 필연성'으로 두고, 다른 종교나 믿음 혹은 무신론에서도 하느님의 뜻에 맞는 생활(아마도 사랑)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이게 만인존중사상과 더불어 '타종교를 존중하는 태도'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자세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항목을 참조하자.[77] 성경이 가라 하면 가고 멈추라 하면 멈추는 것이 개신교인의 성경 해석하는 태도이다. 성경에 자신의 사견을 가감하는 행위는 요한계시록에서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일종의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한 월권행위와 같다.[78] 가톨릭의 경우는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을 통하여 비신자들의 구원에 대해 긍정적인 해석이 나왔으며, 결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비신자들의 구원 가능성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다만 가장 올바르고 정석적인 구원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가톨릭 교회에 있다는 점도 분명하게 명시하였다. 자세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항목을 참조.[79] 개신교에서는 연옥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사람이 죽으면 1차적으로 낙원과 스올을 거쳐 최종적으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믿는다. 개신교 교리상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를 향한 믿음뿐이고, 어떤 인간도 예수를 믿지 않고 죽으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천국에 갈 방법이 없다고 하니 반박의 여지가 없다. 후술하지만 개신교 교리상 인간은 스스로 의인이 될 수조차 없다.[80] 개신교의 교리상 인간은 아담의 원죄 이후로 본성자체가 비틀어져서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없고, 의인이라고 자칭, 타칭하는 것은 신에 대한 반역행위나 다름 없다. 기독교의 의로움의 기준은 상당히 높다.[81] 예수 그리스도십자가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모든 인류의 죄가 사해진 후, 베드로의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자기 사건 이후이다.[82] 구약에서 가장 대표적인 변곡점이 바로 느헤미야서이다. 구원의 대상인 유대인의 기준이 혈통적인 유대인에서 종교적인 유대인으로 넘어가는 상황이기 때문. 물론 이 전의 율법서들을 읽어보면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는 방법에 대해 친절히(?) 설명이 되어있다. 즉 유대인 아니면 구원 못 받나요?라는 질문에, 유대인이 되세요로 대답한 것.[83] 물론 가톨릭이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한다거나 하는건 아니다. 그리고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교리 역시도 수정된 바가 없다. 왜냐하면 수세(흔히 말하는 세례)와는 별개로, 화세 역시도 엄연히 세례에 속하기 때문이다. 곧, 가톨릭적 입장에 의하면 지나가던 무슬림이나 무당이 (심지어 당사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세례를 받았던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존재한다.[84] 약간 변호를 해주자면, 전근대 시기 교회는 말 그대로 '공공기관'이고 복지, 교육, 연구 등을 폭넓게 담당하였기에 세금을 받아먹는 것 자체까지 뭐라 하긴 힘들다. 그렇다고 가진 것 없는 농노들에게서 소를 강제로 뜯어 장례미사 대금으로 쓰는 등의 행태가 잘한 짓은 아니지만. 즉 돈을 받는 것 자체보다는, 돈을 과도하게 받았냐의 여부가 문제가 된다.[85] 이슬람의 신이 만든 최초의 남자의 이름이 아담이다. 그 아내의 이름은 하와. 그리고 아브라함까지는 구약의 계보와 동일하나, 아브라함의 두 아들 중 본처의 아들이자 차남인 이사악의 후손들이 유대인이고, 후처의 아들이자 장남인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아랍인들이다.[86] 쿠란 수라 112 이클라쓰 장. 본문은 이러하다. '낭송하라,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고 영원하시며, 낳지도 태어나지도 않으셨고 이 세상에 그분과 같은 자 없노라'[87] 완전히 같은 케이스는 아니다. 우선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갈래로 시작되었고, 그 신의 존재론적 속성에 대한 설명과 타나크 해석이 유대교와 다른 것인데 이런 교리 차이는 그 내부의 교파들 끼리도 있다. 반면 이슬람은 애초 두 종교와 독립적으로 아라비아에서 시작됐고 두 종교와 무관한 인물이 "타나크가 변개되었기에 그 신에게 바른 계시를 다시 받았다"고 주장하며 등장했는데, 그 쿠란은 타나크와 전혀 다른 내러티브를 담고 있다. 관점에 따라 유대교와 이슬람의 유일신을 같게도 다르게도 볼 수 있지만, 유대/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는 수니와 알라위 사이에서 보이는 그런 신의 존재론적 차이 이전에 셈족신앙 분화과정의 다른 경로를 타고 정립된 유일신교라는 측면의 차이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뿌리지만.[88]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지음, 『세계종교사입문』(2004, 파주, (주)도서출판 청년사), pp669-679.[89] 기독교에선 신은 인간과 함께 하며 천국은 신과 인간이 합일한 상태이지만, 이슬람에서 신은 인간과 결코 합일할 수 없다. 또한 기독교에서 신은 스스로 제약을 걸지만 이슬람은 신의 절대적 초월성을 강조한다.[90] 쿠란을 보면 유대인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슬람 수립 초기에는 무함마드가 유대교를 형제의 종교로 여겨서 이슬람과 유대교가 상부상조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으나 유대인들이 이에 반발하고 오히려 군대를 모아 반이슬람 전쟁을 일으키자 유대교와 이슬람은 원수지간이 된다. 사실 유대인 박해는 기독교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91] 게다가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를 그리던 시기에는 제우스와 성부를 같은 존재로 믿기도 했다! 즉, 천지창조의 노인은 야훼가 아니라 제우스. 사족으로 미켈란젤로의 그림 최후의 심판에서 예수는 아폴론의 모습이다. 이같이 성부를 제우스로 성자를 아폴론으로 믿던 당시는 제우스를 하나님으로 고백했는데 이는 단테의 신곡에서 야훼가 제우스와 동일시 되어졌다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92] 여기선 아주 개망나니에 철저한 가부장적인 존재로 등장한다.[93] 인터넷 초기에 에루를 하느님으로 번역하는 것에 대해 논쟁이 벌어진적도 있다. 결론은 톨킨의 의도상으로는 하느님이 맞을수는 있어도 오해의 여지 등등의 이유로 번역을 한하고 그냥 에루로 부르자가 나왔다. "에루 - 일루바타르"의 번역으로 "하느님 - 만물의 아버지"로 하는게 어떠냐는 말도 나왔다. 물론 너무 지나치게 해석한다는 견해가 많아서 채택되지 않았다.[94] 성부가 변신하거나 분신 같은 게 아니라 천계에서 키우는 비둘기에 성부가 빙의한 것이다.[95] 또는 묵시록의 어린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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