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3 23:50:33

빈(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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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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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인구4. 교통5. 관광6. 문화
6.1. 요리6.2. 스포츠
7. 기타8. 관련 문서9. 둘러보기

1. 개요


(Wien / Vienna)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Wien_3_Wappen.svg.png
국장
국가 오스트리아
인구 2018년 1,889,000명[1]
면적 414㎢
시간대 UTC+1 (서머타임 준수)

빈(오스트리아) 연방주에 해당하는 빈(오스트리아)의 인구는 빈(오스트리아)/인구 참조.

오스트리아수도. 독일어식 명칭인 빈 대신 흔히 영어식 명칭인 비엔나(Vienna, /viːˈɛnə/ 비에너)로도 불린다.

과거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헝가리 왕국의 주요 도시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아래 오스트리아가 주요 국가였을 때는 많은 인구를 가진 유럽의 대도시였고 지금도 국가는 작아졌지만 인구가 줄어든 것은 아니고 비슷한 수준으로 계속 유지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위상과는 별개로 영향력은 여전하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2] 중 하나다. 유럽의 다른 이웃 도시들보다 거리가 매우 깨끗하고 치안이 잘 되어 있다.[3] 지하철이나 대중 교통도 유럽치고 굉장히 깨끗하고 노선망도 우수하다. 지금은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와 특히 가깝기 때문에[4] 쌍둥이 도시(Twin City)라고 부르며 왕복이 잦다.

오스트리아는 영세 중립국이며 국제연합의 유럽 거점 도시로 지정되어 있어 국제 연합 기구 도시(UNO City)가 있으며, IAEA(국제 원자력 기구)의 본부도 빈에 있다. 오스트리아가 더이상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유치를 한 결과다. 국제 기구가 많은 만큼 스위스 제네바와 함께 스파이가 많은 도시로 유명한데 세계에서 외국인 정보 기관원의 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다. 2015년 미국과 이란 간의 핵협상이 최종 타결된 곳이기도 하다.

2. 역사

도시 명칭은 고대 로마의 전선 기지인 빈도보나(Vindobona)에서 유래되었다고 여겨지며, 12세기 바벤베르크 왕조가 도읍으로 삼기도 했다. 1278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루돌프 1세가 정복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거점이 되었지만, 막시밀리안 1세 황제가 수도를 서쪽의 인스브루크로 옮기면서 잠시 수도의 위치를 상실하기도 했다. 후에 루돌프 2세는 동생인 마티아스와의 권력 다툼에 밀려 보헤미아프라하로 수도를 이전당하고 죽을 때까지 감금당했다.

1529년과 1683년에 두 차례의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았는데 둘 다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오스트리아가 본격적으로 높은 위상을 가졌을 때부터 인구 수만명을 보유한 주요 도시였다. 1683년에는 인구가 110,000명에 달해 집중적인 공격을 받을 정도로 신성 로마 제국의 핵심 도시였고 1804년에는 인구가 230,000명으로 당시 주변의 주요 도시들이 인구 수만명에 불과할 때 독보적인 위상을 가졌다.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5년만에 두 차례나(1805, 1809) 굴복했다. 1814~1815년 빈 회의로 다시 복귀해서, 1848년까지 30년 남짓한 빈 체제가 논의된 곳이 되었다. 1848년 3월에는 혁명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1857년 구시가지를 둘러싼 성벽을 해체하여 현재의 링슈트라세를 조성하였다. 이 도로를 따라 국회 의사당, 시청사, 대학, 오페라 하우스와 극장, 기타 관청과 증권 거래소 등이 조성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없어진 뒤인 1920년대에는 사회민주당의 거점 도시가 되어 붉은 빈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1938~1945년에는 나치 독일에 합병당해 제국의 수도였던 도시가 일개 지방 도시로 전락하는 일을 겪기도 했고, 대전 말기에 소련군독일군의 전투로 큰 피해를 입었다.

1945~1955년에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승전국들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군정의 공동 통치를 받았고, 1955년에 영세 중립국을 선언하면서 통치에서 해방되어 오스트리아의 수도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1961년 흐루쇼프존 F. 케네디는 빈의 임페리얼 호텔에서 미소 정상 회담을 가졌다. 1956년 헝가리 혁명으로 헝가리인들이 빈을 찾았다.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체코, 슬로바키아인들이 빈으로 도피했다.

3. 인구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빈(오스트리아)/인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교통

도시 철도는 빈 지하철(U반/S반/전차)이 있다. 고속 철도는 레일젯으로 오스트리아의 주요 도시들과 부다페스트, 프라하, 뮌헨과 연결된다. 또한 동유럽, 서유럽의 주요 도시로 가는 열차가 많아서 유레일 패스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들르는 도시다. 도로는 주변국의 수도들인 체코프라하, 헝가리부다페스트, 슬로바키아브라티슬라바와는 모두 자동차로 2~3시간 거리 내에 있어 동유럽 여행의 시작지로 삼기도 한다. 공항은 빈 국제공항이 있다.

5. 관광

오래 전 신성 로마 제국 시대부터의 중요한 역사적 유물과 건물이 많이 남아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박물관과 전시관을 관람할 때, 박물관, 전시관 내에서 플래시를 포함한 사진 촬영이 매우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그냥 사진 촬영은 허용하는 곳도 많다.

호프부르크 궁전,[5] 쇤브룬 궁전,[6] 슈테판(성 스테파노) 대성당,[7] 성 카를 성당, 링슈트라세를 중심으로 건축된 국회 의사당, 시청사(라트하우스), 보티프 성당, 빈 대학,[8] 국립 오페라 극장,[9] 자연사 박물관, 예술사 박물관, 제국 극장, 사부아 공자 외젠의 거처였던 벨베데레 궁전,[10]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본거지인 빈 악우협회의 대강당,[11] 합스부르크 황족의 묘소인 카푸치너 성당, 빈 전쟁 박물관 등이 있다.

루브르처럼 엄청난 규모는 아니지만 좋은 미술관이나 박물관들이 많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컬렉션이 모여있는 빈 미술사 박물관, 황실 가구 박물관, 에곤 쉴레의 작품이 많은 Musuem Quartier 박물관 지구의 레오폴트 미술관, 훈데르트바서의 건축물을 개조하여 만든 훈데르트바서 박물관 등 볼거리가 많다.

런던이나 파리 못지않게 유적과 문화 유산이 넘쳐나기 때문에 도시의 중심부인 구시가지(Innere Stadt)가 전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탈리아처럼 절대로 외관을 바꾸는 건축 허가는 내지 않아서 리모델링만 해서 사용중이다. 20세기 초반 아르누보분리파 미술의 중심지였던 탓에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해 에곤 실레, 아돌프 로스 등 이 사조와 운동에 참가했던 미술가와 건축가들의 제체시온(secession), 로스 하우스 같은 작품이 많이 남아있다.

시내에 있는 빈 중앙 묘지는 클래식 음악의 성지라 할 수 있는 곳인데, 빈에서 활동한 유명 음악가들의 무덤들이 밀집해 있다.

<비엔나 워킹투어>라는 책을 보면 빈의 오래된 거리와 건축물, 전설들에 대해서 상세히 알 수 있다. 어지간한 여행 전문 서적을 능가하는 수준.

6. 문화

음악 도시로 불리는 지역인 만큼 유명한 연주자들도 매우 자주 와서 공연하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빈 교향악단, 빈 방송 교향악단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현악단들의 연주회나 양대 오페라단인 국립 오페라단(Staatsoper)과 국민 오페라단(Volksoper)의 오페라 공연, 세계적인 합창단인 빈 소년 합창단 공연 등을 즐길 수 있다. 비엔나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는 저렴한 비용으로 입석으로 얼마든지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입석으로 보통 3유로에서 비싸봤자 6유로 이내로 볼 수 있다. 다만 늦게 가면 별로인 자리를 배정받아 오페라 소리밖에 듣지 못하지만 제대로 자리를 차지하면 오히려 좌석보다 더 괜찮은 시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12] 좌석값은 엄청나게 비싸다.

6.1. 요리

유럽에 커피를 전파한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두 차례의 오스만 투르크 침공 때 투르크 병사들이 커피와 커피 조리 기구, 기술을 남기고 갔고, 전쟁 후 이것들을 응용해 20종의 레시피를 만들어서 현재는 15종을 가게들에서 판매 중인데 이중 비엔나 커피도 있다. 빈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카페(커피숍)가 굉장히 많고, 시민들이 카페를 거의 집안 거실처럼 빈번하게 이용하는 문화도 유명하다.

요리 쪽에서도 인근 동유럽 국가들이나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아 나름대로 소박하면서도 이국적인 향취를 내는 메뉴들이 많은데, 돈까스와 매우 유사한 고기 튀김인 비너 슈니첼(Wiener Schnitzel)[13]이나 비엔나 소시지라는 영어식 명칭으로 흔히 불리는 비너 뷰어스트헨(Wiener Würstchen)이 유명하다. 다만 이 소시지는 모양도 작지 않고, 맛도 좀 다른 편이다. 그 외에 유명한 먹을거리는 빈의 카페 자허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던 오리지널 초콜릿 케이크인 자허토르테와 역시 빈에서 최초로 개발된 페이스트리인 아펠슈트루델 등이 있다. 특히 자허토르테는 꼭 먹어봐야 할 명물 중 하나로 꼽힌다.

음식이 짜다. 암염이 채굴되어 나트륨 함량이 낮은 소금도 많은 것도 이유가 되지만 음식이 짜면 짤수록 귀한 대접[14]을 하는 것과 같은 오스트리아 고유의 전통 때문이다.[15] 밥도 안그런 밥도 있지만 소금물로 지어서 짜다.

5월에서 9월 사이만 조금 덥고 해를 볼 수 있으며, 그 외의 기간은 겨울같은 축축하면서 흐릿한 날씨가 계속되는데 이 때문에 시민들은 초콜릿을 아주 많이 섭취한다. 초콜릿 끊으라는 말이 담배 끊으란 말보다 더 심한 말이다.

6.2. 스포츠

빈을 연고로 하는 축구 구단으로 FK 아우스트리아 빈SK 라피트 빈이 있으며, 그 외에도 퍼스트 비엔나 FC 등 다른 팀들도 있지만 보통 이 둘이 유럽에서 알려진 오스트리아 구단이며 리그 우승 횟수도 1~2위를 다투고 있다.

7. 기타

독일어권의 유명 작곡가들이 많아서 빈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생애의 상당 기간을 여기서 보내며 수많은 명곡들을 남겼기 때문에 음악도나 음악 애호가들에게 중요한 지역이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빈에서 35년동안 살다가 여기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베토벤의 제2의 고향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프란츠 슈베르트도 비록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기는 했지만 말년에 빈에 머물며 최후의 대작들을 남겼다. 안톤 브루크너는 린츠 근교의 시골에서 태어나서 중년기에 빈으로 이주한 뒤 교향곡 작곡가와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고,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막내딸 발레리 공주의 도움으로 벨베데레 궁전에서 만년을 보내기도 했다. 구스타프 말러나 신 빈 악파로 불리는 아르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도 빈에서 파격적인 음악들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중요한 작품을 남겼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왈츠의 왕으로 칭송받는데 슈트라우스 가족들도 빈을 본거지로 활동했고, 이들이 남긴 수백여 곡의 춤곡들도 지금도 오스트리아의 전통과 자부심을 상징하는 음악이자 중요한 관광 상품으로 많은 곳에서 연주되고 있다. 프란츠 레하르는 헝가리계 작곡가로 1905년에 이 도시에서 자신의 최대 히트작인 오페레타 유쾌한 미망인을 초연해 대박을 터뜨렸다. 다만 그는 히틀러가 좋아했기에 나치가 극진히 우대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친나치는 아니지만, 나치가 좋아했다는 이유로 안 좋은 말을 들었다. 자신은 내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초청받은 것뿐 나치의 사상을 지지한 적도 없다고 끝까지 주장하다가 죽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으나 생의 후반기에는 빈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빈에서 여생을 마쳤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1859년 가족과 함께 빈으로 이주한 뒤, 나치의 탄압으로 1938년 6월에 영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생애의 대부분을 빈에서 보냈다. 유명한 저서《꿈의 해석》(1900)도 이 시기에 나온 것.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서유럽의 주요 도시
안트베르펜 헨트
브뤼셀 브뤼헤 파리
리옹 루앙 보르도
뉘른베르크 쾰른 뤼베크
아우크스부르크 나폴리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제노바
로마 볼로냐 팔레르모
암스테르담 런던 리스본
그라나다 발렌시아 바르셀로나
코르도바 세비야 마드리드
코펜하겐 헬싱키 오슬로
스톡홀름 취리히 아테네


[1] 빈(오스트리아)/인구 참조.[2] 기후가 온난하고 도시 구획 분리가 아주 잘되어 있다. 도로 정비도 대단히 깔끔해서 교통 체증이 발생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 시설이 즐비해있고 도시 시민들의 소득 수준도 상당하다.[3] 물론 유럽이고 유명 관광지니까 소매치기 등의 경범죄 등은 항상 주의하자. 다만 다른 서유럽만큼 심하지않고 조금만 조심한다면 안심하고 다닐 수 있다.[4] 열차로 1시간 거리. 그러다 보니 매일 외국으로 출퇴근 하는 사람도 있다.[5] 방이 무려 3천 개가 넘는데, 전대 황제와 황후 내외가 쓴 방을 쓰지 않는다는 합스부르크 황실의 불문율 때문이다. 현재는 전체를 구성하는 건물들 중 일부 동을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고 있다.[6] 여름 궁전으로 베르사유 궁전과 배치만 다를 뿐 매우 흡사하다.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가 좋아한 옅은 노란빛, 마리아 테레지아 옐로우로 칠해져 있으며 1,2층만 공개되고 3,4층은 아파트로 쓰이고 있다.[7] 모자이크 지붕과 높은 첨탑이 아름다워 사람을 압도한다. 빈의 심장.[8] 단과대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다. 방학이 많고 길다. 노벨상 수상자가 많다.[9] 처음 지을 때는 설계 변경이 잦아 건축가들은 불만이 많았다. 완공 뒤 푹 꺼진 상자란 혹평을 받았고 두 건축가는 자살과 뇌졸중으로 죽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불탄 뒤 국민 투표로 제일 먼저 재건되었으며, 가장 사랑 받는 건물이다. 건물 외관이 얼룩덜룩한 이유는 불탄 잔해를 국민들이 주워다 집에서 보관하다가 재건 작업에 보탰기 때문이다.[10] 현재는 미술관으로, 클림트의 키스나 유디트 같은 유명 작품들과 조각이 전부 진품으로 전시되어 있고 내부 촬영은 금지다. 직원들과 CCTV가 항상 주시하며 촬영을 시도하면 가차없이 끌려나간다. 내장이 나무라 과거 소련군이 주둔할 때 손만 대어도 부서져서 내장 70%는 다시 복원시켰는데 매우 화려하다. 관리가 철저해서 유일하게 빈에서 냉방, 난방 시설도 완비해둔 곳이다.[11] 무지크페라인(Musikverein)이라고 한다. 그중 메인 홀은 내부의 화려한 장식과 금빛 기조의 도색 때문에 황금홀(Goldener Saal)이라고 불리며, 클래식 공연장 중 최상의 음향 조건을 갖춘 곳으로 손꼽힌다. 그 화려한 면모는 매년 1월 1일에 거행되는 신년음악회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12] 오페라 시작 80분 전부터 입석 좌석을 판매하는데, 40등까지는 1층 좌석의 바로 뒤에서 감상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유명한 성악가가 나오는 날에는 이른 시간부터 아예 접이식 의자까지 준비해서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13] 소스는 없고 레몬과 감자가 함께 나오는 음식. 소금을 곁들인다.[14] 기후상 음식이 상하기 쉬운 곳이라 손님이 오기로 한 날짜 전에 여러 번 소금을 쳐두며 정성을 들였기 때문이다.[15] 빈 사람들은 음식이 전반적으로 짜긴 해도 국물을 먹지 않기 때문에 섭취량이 월등히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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