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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히 전투 Battle of Mohi Schlacht bei Mohi | ||
<colbgcolor=#004DB1,#5E253C><colcolor=#fff> 시기 | 1241년 (오고타이 칸 13년) 4월 11일 | |
장소 | 헝가리 무히, 셔요 강 인근 | |
원인 | 몽골의 유럽 침공 | |
교전국 | <rowcolor=black> 몽골 (공세) 승 | 헝가리-크로아티아-오스트리아-성전기사단 연합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바투 칸 수부타이 시반 베르케 보롤다이 바카투 | 지휘관 벨러 4세 (헝가리 국왕) 갈리치아의 칼만[1] 우그린 차크 라토트 마차시 토머이 데네시 프리드리히 2세 렘발트 드 보손 |
병력 | 몽골군: 35,000명~100,000명 - 보병: 20,000명 ~ 70,000명 - 기병: 15,000명 ~ 30,000명 | 연합군: 25,000명 ~ 80,000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사상자: 10,000명 ↑ 또는 궤멸 |
결과 | 몽골의 승리 | |
영향 | 헝가리 왕국의 붕괴 위기 - 몽골군의 헝가리 대량 파괴 및 약탈 - 보스니아 독립교회의 기사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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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41년 4월 11일 헝가리의 모히 평원에서 수부타이와 바투가 지휘하는 몽골 제국 서방 원정군과 헝가리 왕국 및 크로아티아 왕국의 국왕 벨러 4세가 지휘하는 헝가리 군대가 맞붙어 몽골군이 대승한 전투로 레그니차 전투와 함께 몽골 제국이 동유럽을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히 평원과 그 근처의 셔요 강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셔요 강 전투라고도 불린다[2].2. 배경
칭기즈 칸 사후 1229년 몽골 제국의 제2대 카간에 즉위한 오고타이 칸은 1234년 금나라를 멸망시킨 이후, 호라즘 정벌 이후 중단되었던 서방 원정을 재개하고 주치의 아들 바투를 총사령관에, 명장 수부타이를 부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나머지 황족들로 지휘부가 이루어진 약 200,000명 정도의 대군을 파병했다.[3] 몽골의 서방 원정군은 유럽 러시아 일대를 정복하고, 곧바로 동유럽쪽으로 진격했는데 수부타이는 군대를 나눠 일부는 폴란드 제공국을 침공하게 해 배후의 위험을 차단하도록 했고, 본인은 바투와 함께 본대를 이끌고 헝가리 왕국을 침공했다.한편 헝가리에서는 몽골의 침공 소식을 접하고, 국왕 벨러 4세가 주변 국가들에 지원을 요청하며 군대를 모으려고 했으나, 주변 국가들은 헝가리에 지원을 해줄 여력이 없었고, 헝가리 내부에서는 국왕과 귀족들간의 오랜 분열로 인하여 제대로 된 방어 준비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벨러 4세는 자신이 직접 모은 군대와 성전 기사단의 일부 지원 병력 등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3. 전개
당시 몽골군은 수부타이와 바투가 폴란드 방면 군대를 제외한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왔는데, 그들은 군대를 다시 둘로 나눠 각각 지휘하면서 헝가리를 침공했다.한편 벨러 4세는 충분한 준비를 거친 후 몽골군과 싸울려고 했지만 일부 귀족들이 이에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부대를 이끌고 몽골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여기서 몽골의 전위 부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런 전과에 도취한 귀족들은 오만해져서 몽골군을 얕보기 시작했고, 급기야 일부는 영지로 철수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결국 벨러 4세는 직속 군대를 이끌고 마주치는 소규모의 몽골군을 격파하면서 모히 평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바로 마차를 이용해 요새화된 야영지를 건설했다.
몽골군은 새벽에 헝가리군의 야영지를 공략하기 위해 양측 진영 사이에 있는 셔요 강의 다리를 건너 기습을 감행했는데, 때마침 역시 몽골군 진영을 공략하려는 헝가리군과 다리 가운데서 마주치면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 다리 전투에서 몽골군은 큰 피해를 입으며 패주했다.
헝가리군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몽골군을 추격했으나, 때마침 합류한 수부타이에 의해 저지당했다.
바투는 이에 본대를 도하하게 했고, 벨러 4세는 도하를 저지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도하에 성공한 몽골군과 만난 헝가리군은 치열한 백병전을 펼치게 되었다. 허나 중무장한 헝가리군에 의해 몽골군의 피해는 늘어났고, 바투의 부관 바카투가[4] 전사하는 등 몽골군은 차츰 패배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여기서 몽골군 본대의 도하가 바투의 실책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나 수부타이의 작전안을 무시한 독단적인 돌격이었는지, 아니면 작전 자체의 난이도가 워낙 높아서 그냥 전술적인 실수였는지, 이에 대해 의견이 갈린다. 어찌되었든 이때 바투는 패닉에 빠져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여겼으나...
이러한 양상을 바꾸는 상황이 벌어졌다. 때마침 수부타이가 이끄는 별동대가 부교를 건설해 셔요 강을 도하한 후, 헝가리군의 후위를 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공격으로 헝가리군은 무너지기 시작해 야영지로 후퇴하려고 했는데, 이때부터 몽골군의 장기인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이 추격전 끝에 헝가리군은 궤멸되었고, 벨러 4세는 간신히 도주했다.
4. 결과
모히 전투에서 대승한 몽골군은 헝가리 왕국을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후 헝가리와 동군연합이었던 크로아티아 왕국을 침공해 무장이 빈약했던 자그레브를 파괴하고 성당을 불태웠다. 이로부터 1년 후인 1242년에는 크로아티아로 도망친 벨러 4세를 노리고 재침공해 많은 도시들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나 결국 몽골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1년 동안 무장한 크로아티아군에 의해 격퇴되었다.몽골군의 철수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가장 흔히 알려진 것이 오고타이 칸의 붕어로 인한 철수설이다. 이 설의 출처는 John of Pian de Carpine라는 이탈리아 외교관이었다. 하지만 일 칸국의 역사학자였던 라쉬드 알-딘(Rashid Al-Din)은 오고타이 칸의 붕어를 바투는 몰랐다고 기록했다.
몽골군은 유럽에서의 치열한 전투(모히 전투 등)로 큰 피해를 입었고, 동유럽은 부유한 지역이 아니었기에 약탈을 통한 큰 보상을 획득할 수 없었다. 또한 몽골군이 유럽 원정을 오게 된 이유인 튀르크계 쿠만족에 대한 토벌을 완수했기에 더 이상 서유럽까지 진격할 이유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외에도 악천후로 인한 헝가리 평야의 습지화로 몽골군이 후퇴했다는 설도 있다.
한편 귀환 도중에 바투는 점령한 러시아와 동유럽 지역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 킵차크 칸국의 토대를 닦았고, 명장 수부타이는 몽골로 돌아간 뒤 몇년 후인 1248년 몽골의 톨 강에서 73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당시 보스니아는 이단인 보고밀파로 취급되어온 보스니아 독립교회를 믿고 있어, 갈리치아의 칼만이 이끄는 헝가리군에 의한 십자군 원정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운좋게도 몽골의 서방 원정군이 쳐들어와 헝가리군을 모히 전투에서 격파해주면서 상당기간 종교적-정치적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갈리치아의 칼만은 모히 전투 이전에 크로아티아에 봉해져서 보스니아 독립교회를 거의 전멸 직전까지 몰아세웠으나, 모히 전투에서 패배하고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5]
벨러 4세는 몽골군이 철수한 이후 헝가리로 귀환해 중앙집권화를 단행하고, 부더로 천도하면서 성벽과 요새를 보강했으며, 헝가리의 군제를 서유럽식으로 개혁하면서 몽골군의 재침공에 대비했다. 이후 헝가리는 1280년까지 지속된 킵차크 칸국의 연속적인 공세를 모두 막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