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7 21:06:38

모히 전투

파일:몽골 제국 및 원나라 문장 white.svg 몽골 제국의 대외 전쟁·분쟁
{{{#!wiki style="color: #fff;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 #1D1D1D; margin: -6px -1px -11px"
전쟁·전투 교전국
<colbgcolor=#004DB1> 몽골-서하 전쟁
,1205 ~ 1227,
서하
몽골-금 전쟁
,1211 ~ 1234,
<colbgcolor=#004DB1> 오사보 전투·야호령 전투·회하보 전투
,1211,
금나라
대창원 전투
,1229,
도회곡 전투
,1231,
삼봉산 전투
,1232,
몽골-호라즘 전쟁
,1219 ~ 1221,
파르완 전투
,1221,
호라즘 왕조
칼가강 전투
,1223,
여몽전쟁
,1231 ~ 1259,
레그니차 전투
,1241,
모히 전투
,1241,
헝가리 왕국
몽골-남송 전쟁
,1235 ~ 1279,
단평의 입락
,1234,
남송
악주 전투
,1258,
조어성 전투
,1259,
정가주 전투
,1275,
양양 공방전
,1235~1273,
애산 전투
,1279,
삼별초의 난
,1270 ~ 1273,
아인 잘루트 전투
,1260,
일본 원정
,1274, 1281,
베트남 원정
,1257, 1284, 1287,
쩐 왕조 }}}}}}}}}

파일:헝가리 국장.svg 헝가리의 대외 전쟁·분쟁
{{{#!wiki style="color: #FFF;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전쟁·분쟁 교전국
<colbgcolor=#477050> 하람 전투
,1128,
시르미온 전투
,1167,
모히 전투
,1241,
제2차 코소보 전투
,1448,
모하치 전투
,1526,
1848년 헝가리 혁명
,1848,
제1차 세계 대전
,1914 ~ 1918,
헝가리-슬로바키아 전쟁
,1939,
제2차 세계 대전
,1940 ~ 1945,
유고슬라비아 전역
,1941 ~ 1945,
독소전쟁
,1941 ~ 1945,
1956년 헝가리 혁명
,1956,
프라하의 봄
,1968,
걸프 전쟁
,1990 ~ 1991,
}}}}}}}}}

모히 전투
Battle of Mohi
시기 1241년 양력 4월 11일
장소 헝가리 무히, 셔요 강 인근
원인 몽골의 유럽 침공
교전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1]
오스트리아 공국
성전기사단
몽골 제국
지휘관벨러 4세
갈리치아의 칼만[2]
우그린 차크
라토트 마차시
토머이 데네시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2세
성전기사단의 렘발트 드 보손
바투 칸
수부타이
시반
베르케
보롤다이
바카투
병력 25,000 ~ 80,000명15,000 ~ 30,000 기병대
20,000 ~ 70,000
피해 10,000 이상 혹은 궤멸큰 피해
결과 몽골군의 승리
영향 헝가리 왕국 붕괴 위기
몽골군의 대량 파괴, 약탈
보스니아 교회의 기사회생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


[clearfix]

1. 개요

1241년 4월 11일 헝가리의 모히 평원에서 수부타이바투가 지휘하는 몽골 제국 군대와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의 국왕 벨러 4세가 지휘하는 헝가리 군대가 맞붙어 몽골군이 승리한 전투로 레그니차 전투와 함께 몽골 제국이 동유럽을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히 평원과 그 근처 셔요 강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셔요 강 전투라고도 불린다[3].

2. 배경

칭기즈 칸 사후 1229년 몽골 제국의 카간에 즉위한 오고타이 칸은 1234년 금나라를 멸망시킨 이후 호라즘 정벌 이후 중단되었던 서방 원정을 재개하고 주치의 아들 바투를 총지휘관에, 수부타이에게 보좌를 맡기고 나머지 황족들로 이루어진 약 20만 정도의 원정군을 파병하였다.[4] 몽골군은 유럽 러시아 일대를 정복하고, 곧바로 동유럽 쪽으로 진격했는데 수부타이는 군대를 나눠 일부는 폴란드를 침공해 배후의 위험을 차단하고, 본인은 바투와 함께 본대를 이끌고 헝가리를 침공했다.

한편 헝가리에서는 몽골의 침공 소식을 접하고 벨러 4세가 주변 국가들에 지원을 청하고 군대를 모으려고 했으나 주변 국가들은 헝가리에 지원을 해줄 여력이 없었고, 헝가리 내부에서는 국왕과 귀족들간의 오랜 분열로 인하여 제대로 방어 준비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벨러 4세는 자신이 직접 모은 군대와 성전 기사단의 일부 지원 병력 등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3. 전개

당시 몽골군은 수부타이와 바투가 폴란드 방면 군대를 제외한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왔는데 그들은 군대를 둘로 나눠 각각 지휘해 헝가리를 침공했다.

한편 벨러 4세는 충분한 준비를 거친 후 몽골군과 싸울려고 했지만 일부 귀족들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부대를 이끌고 몽골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여기서 몽골의 전위 부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런 전과에 도취한 귀족들은 오만해져서 몽골군을 얕보기 시작했고 급기야 일부는 영지로 철수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결국 벨러 4세는 군대를 이끌고 마주치는 소규모 몽골군을 격파하면서 모히 평원에 도착했고 곧바로 마차를 이용해 요새화된 야영지를 건설했다.

몽골군은 새벽에 헝가리 야영지를 공략하기 위해 양측 진영 사이에 있는 사요 강의 다리를 건너 기습을 감행했는데 때마침 역시 몽골 진영을 공략하려는 헝가리군과 다리 가운데서 마주치며 전투가 벌어졌고 몽골군은 큰 피해를 입으며 패주했다.

헝가리군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몽골군을 추격했으나 때마침 합류한 수부타이에 의해 저지당했다.

바투는 이에 본대를 도하하게 했고, 벨러 4세는 도하를 저지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도하에 성공한 몽골군과 헝가리군은 치열한 백병전을 펼치게 되었다. 허나 중무장한 헝가리군에 의해 몽골군의 피해가 늘어났고, 바투의 부관 바카투가[5] 전사하는 등 몽골군은 차츰 패배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여기서 본대 도하가 바투의 실책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나 수부타이의 작전안을 무시한 독단적 돌격이었는가, 아니면 작전 자체의 난이도가 워낙 높아서 수부타이의 작전을 무시했다기 보다는 그냥 순전히 전술적 실수였다고 하는 의견이 갈린다. 어찌되었든 이때 바투는 패닉에 빠져 전투에서 패배하였다고 여겼으나...

그러나 이러한 양상을 바꾸는 상황이 벌어졌다. 때마침 수부타이가 이끄는 별동대가 부교를 건설해 사요 강을 도하, 헝가리군의 후위를 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공격으로 헝가리군은 무너지기 시작해 야영지로 후퇴하려고 했는데 이때부터 몽골군의 장기인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이 추격전 끝에 헝가리군은 궤멸되었고 벨러 4세는 간신히 도주했다.

4. 결과

전투에서 승리한 몽골군은 헝가리를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후 헝가리와 동군연합이였던 크로아티아 왕국을 침공해 무장이 빈약했던 자그레브 지역을 성당을 불태우며 파괴했고, 1년 후인 1242년에는 크로아티아로 도망친 벨러 4세를 노리고 재침공해 많은 도시들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나 결국 몽골에 재침략에 대비해 1년동안 무장한 크로아티아군에 의해 격퇴당했다.

몽골군은 오고타이 칸의 사망으로 인해 몽골 본토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몽골의 대규모 유럽 원정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몽골군의 철수에는 여러설이 있는데 가장 흔히 알려진 것이 오고타이 칸의 사망으로 인한 철수이다. 이 설의 출처는 John of Pian de Carpine라는 이탈리아 외교관이다. 하지만 일칸국의 역사학자인 Rashid Al-Din는 바투는 오고타이 칸의 사망을 몰랐다고 기록했다.

몽골군은 유럽에서의 치열한 전투(모히 전투 등)로 큰 피해를 입었고, 동유럽은 부유한 지역이 아니기에 약탈을 통해 큰 보상을 얻을 수 없었고, 몽골군이 유럽 원정을 오게 된 이유인 쿠만족 토벌은 완수했기에 더 이상 진격할 이유가 없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이외에도 악천후로 인한 헝가리 평야의 습지화로 몽골군이 후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귀환 도중에 바투는 점령한 러시아와 동유럽 지역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 킵차크 칸국의 토대를 닦았고 명장 수부타이는 다시 몽골로 돌아간 뒤 병사했다.

보스니아는 당시 보고밀파 이단으로 취급되어온 보스니아 독립교회를 믿고 있어 갈리치아의 칼만이 이끄는 헝가리군으로부터 십자군 원정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운좋게 몽골이 쳐들어와 헝가리군을 격파해주면서 상당기간 종교적-정치적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갈리치아의 칼만은 헝가리로 돌아온 뒤 전투 이전에는 크로아티아에 봉해져서 보스니아 교회를 거의 전멸 직전까지 몰아세웠으나, 모히 전투에서 패하고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6]

벨러 4세는 몽골군이 철수한 이후 헝가리로 귀환해 중앙집권화를 단행하고, 부더로 천도하면서 성벽과 요새를 보강하고, 군제를 서유럽식으로 개혁하면서 몽골의 재침입에 대비했으며 이후 후신인 킵차크 칸국의 1280년까지 지속된 연속적인 공세를 모두 막아냈다.


[1] 헝가리-크로아티아 동군연합 시기[2] 벨러 4세의 동생이자 갈리치아/할리치의 대공(헝가리 기록에는 왕)이었으며 전투 당시에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달마티아의 대공이었다.[3]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칭기즈 칸 캠페인에서는 사요 강 전투, 결정판에서는 사조 강 전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4] 각 울루스의 장자들이 참가했다고 하여 장자 원정이라고도 불린다.[5] 한국 인터넷에서는 팔합독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는데, 이는 이 글의 영향으로 보인다.[6] 보스니아 입장에서는 천행이고 오늘날 헝가리에서는 칼만의 동상을 만들고 용장이라고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