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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송 大宋 | ||
1127년 6월 12일 ~1279년 3월 20일 | ||
정강의 변 이전 | 멸망 이후 | |
북송 | 원나라 | |
별칭 | 송조([ruby(宋朝, ruby=sòngcháo)]) | |
위치 | 중국 강남 | |
수도 | 임안(臨安, 1129~1276) 복주(福州, 1276~1278)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황제(皇帝)(천자) | |
국성 | 조(趙) | |
주요 황제 | 고종 조구,(1127~1162), 효종 조신,(1162~1189), 영종 조확,(1194~1224), 이종 조윤,(1224~1264), | |
언어 | 중세 중국어 | |
문자 | 한자 | |
종교 | 유교, 대승 불교, 도교 | |
종족 | 한족 | |
면적 | 2,100,000km² (1127년 기준) 1,800,000km² (1204년 기준)[1] | |
통화 | 지폐: 교자, 관자(關子), 회자(會子) 동전: 송전[2] | |
현재 국가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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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송의 후신, 수도는 임안(臨安, 오늘날의 항저우시). 1127~1279년까지 152년간 존속하였다. 동진과 함께 대륙의 절반을 보존하는데 성공한 왕조이기도 하다.나라에 일어난 변화가 너무 커서 역사학에서는 북송과 남송으로 시대를 구분하여 고찰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당시 사람들의 의식으로는 황실의 교체없이 이어져 왔기 때문에 별개의 나라가 아니라 조송(趙宋) 단일 왕조가 화북지역을 상실한 형태로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명맥은 유지하였으나 원래 근거지가 포함된 고토를 상실했다는 점에서, 동로마 제국이나 웅진/사비의 백제와 비슷하다.
대륙이 분할된 난세에 마지막 한족의 보루였으며 악비 등 한족 명장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몽골 제국과 남송의 결전으로 남송은 멸망해 전국에 행성들이 설치되고 이윽고 원나라의 탄생을 맞는다.
2. 역사
2.1. 천도
1127년, 요나라를 멸망시킨 금나라는 송나라로 진격해 수도 개봉을 점령하고 천자인 흠종과 상황 휘종을 포함한 황족과 신하를 포로로 잡아간다.이로써 북송은 멸망하였으며, 금나라는 송나라의 신하 장방창(張邦昌)을 초제(楚帝)로 내세운 괴뢰국가 대초(大楚)를 세우고 군사를 철수시켰다. 금군이 물러나자 곧 송의 군신들은 장방창에게 맹반발하며 제위를 포기하도록 요구했고 장방창은 이를 받아들여 휘종의 아들 중 유일하게 포로로 잡혀가지 않은 흠종의 동생 강왕(康王) 조구(趙構)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보내고 황제에 등극한 지 32일 만에 스스로 퇴위한다.[3]
새로운 천자로 옹립된 조구는 1127년 응천부(應天府, 지금의 허난성 상추시)에서 송고종으로 즉위하며 연호를 건염(建炎)으로 고치고 송나라를 재건하였다. 다만 남송 조정은 새 수도 항저우를 행재라 부르면서 임시 수도로 생각했고, 조정의 공식 수도는 남송 시기 내내 카이펑이었다.[4]
2.2. 계속되는 금과의 전쟁과 개희북벌
황제로 즉위한 송 고종은 곧 주전파 관료들을 기용하여 군사를 소집하는 등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으나 이런 행위는 금나라를 크게 자극하였고, 한창 기세가 오른 금이 이런 고종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마침내 금은 '송이 초를 무너뜨리고 초 황제 장방창을 죽였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다시 대규모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금의 공격이 맹렬하여지자 고종은 응천부를 버리고 양저우(楊州), 항저우(杭州), 원저우(溫州) 등으로 고종은 계속해서 달아나고 급기야 1129년에는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가기까지 한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1129년 남송 정부는 수세에 몰리자 수도를 난징에서 바다와 가까운 임안으로 옮겨 끝까지 저항할 뜻을 밝힌다. 그런데 난징을 함락시킨 딱 3달 후 금나라 군대는 임안까지 함락시킨다. 바로 이 때 고종이 바다로 달아난 것. 여기까지는 송나라의 사망 플래그였다.[5]
양쯔강 이북을 점령한 금나라는 1130년 대제(大齊)라는 제2의 괴뢰국가를 세워 항장인 유예(劉豫)를 황제로 옹립했다. 이토록 강남(중국)이 이민족에게 유린당한 적은 남북조시대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은 1130년부터 갑자기 바뀌게 되는데, 남송의 명장 한세충이 1130년 4월 강중에서 최초로 금군을 대파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6] 이후 5월에는 악비가 금군을 대파하고, 1131년에는 오린과 오개 형제, 수군장수 강민 등이 화상원에서 금군을 대파한다. 1133년에는 악비가 강광의 군도를 평정했고, 1134년이 되면 한세충이 다시 한번 금군을 대파하였다. 계속되는 패배로 실의에 빠진 금태종이 1135년에 죽자 금군은 북쪽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후 1142년 진회의 협상으로 양국은 휴전하기로 합의를 봤고, 그가 죽은 후인 1162년에 금나라 해릉양왕이 재침을 계획했으나 남송의 명신 우윤문에게 채석기에서 가로막힌다. 그 이후 금 진영에서 반란이 일어나 해릉양왕이 살해되고 금세종이 즉위하였다. 송 효종 시기 장준을 중심으로 북벌을 시도하나, 이현충과 추굉연과의 반목으로 인해 북벌에 실패하였고, 금과 다시 화평했다. 이런 과정을 거친 결과 남송은 회하까지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이렇게 기반이 쌓인 1206년에 한탁주가 자신의 권세 확장을 북벌을 시도하였지만,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강행하였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다.
이렇게 남송과 금나라 모두가 서로를 먹어버릴 역량은 없는 상태에서 어느새 강성해진 몽골이 금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남송에서는 '금을 경제적으로 도와서 몽골을 막게 해야 한다'는 주장과 '금을 먹어서 힘을 키워 몽골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하게 되었다.[7] 당시 여론은 후자가 우세했지만 어쨌든 남송은 양측 의견을 절충해서 금나라에 바치던 세폐를 끊지만[8] 금나라를 공격하지는 않기로 한다.
그런데 남송이 조용하고 싶어도 이번에는 금이 가만있지 않았다. 몽골에 패배해서 영토를 크게 잃은 금이 그나마 만만해보이는 남송을 공격해서 자신이 잃은 만큼 뜯어낸다는 발상을 한 것. 아무리 순망치한이라지만, 남송이 고분고분 침공을 용납할 수 없던 건 당연했고 이 충돌이 반복되며 양측의 국력 소모는 극심해진다.
처음에는 금이 대산관을 점령하는 등 선전하였으나 맹종정, 호재흥, 가섭 등에 의해 가로막혔다. 여기서 가섭은, 산동 일대의 홍오군과 연계하여 고토수복을 노리기도 했다.
결국 먼저 두 손 든 쪽은 몽골과 직접 국경을 맞댄 금이었다. 애종이 즉위하고 나서 남침을 중단하고 남송과 평화 협상을 제안하지만, 남송은 '이미 금의 멸망은 돌이킬 수 없으니, 괜히 금을 도와서 몽골을 자극할 바엔 차라리 몽골과 우호관계를 맺어서 전쟁을 준비할 시간을 버는 게 낫다'고 판단하여 몽골과 동맹을 맺는다. 게다가 상황이 나빠지자 금 애종도 결국 다시 남송의 사천 일대를 먹어서 근거지를 확보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삼봉산 전투이후 금 애종이 채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채주에서도 버틸 수 없었고, 삼봉산 전투에서 살아남은 무선이 사천 일대를 점거해 재기하려 했으나 맹공의 선무공작으로 인해 실패하고, 결국 전군이 복멸당하고 말았다. 그는 홀로 도주한 뒤 1234년 금 멸망 이후 몽골 수비병에게 잡혀 죽게 된다.
결국 금나라와의 전쟁은 1234년 남송이 몽골 제국과 연합하여 금을 멸망시킬 때까지 계속되었다.
2.3. 몽골-남송 전쟁
자세한 내용은 몽골-남송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3.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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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의 군사 문서 참고. 북송과 비슷했다.
4. 고려와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고려-남송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5. 문화
북송처럼 남송 역시 경제나 생활 및 문화들이 발전되고 유지되었다.물론 전성기나 다름없었던 북송만큼은 아니었지만 규모만 북송에 비해 규모가 더 작았을 뿐, 언급했듯이 여전히 문화는 발전되고 있었고 경제는 어떤 면에서는 북송보다 더 발전됐다.
대표적인 궁궐로서는 덕수궁(남송)이 있다.
6. 평가
남송의 역사는 사실상 황제의 역사라기보다 군약신강 재상의 역사다.사실 송나라 종실은 문치주의를 펼쳐 재상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다. 하물며 원래 수도를 빼앗겨 황제들이 치욕을 당해 황권이 실추되고 남쪽으로 이주한 처지였다. 이후 황제의 독재 권력이 강화되는 것은 명, 청 시기부터이다. 물론 문치주의의 좋은점이 없던 건 아닌데, 그전에는 집안 빽과 인맥으로 괜찮은 관직을 차지하던 사람들이 주류였던 중국사가, 송대에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 괜찮은 관직을 차지하는 모습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최종까지 과거시험으로 모든 공무원을 선발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과거시험 중 기본적인 하위시험만 합격하면 극소수만 합격하는 상위시험까지 가지 않아도 그중에서 빽 있는 순서로 관직을 받는 게 보통이었다.
유명한 진회를 시작으로, 그나마 멀쩡했던 효종 이후로는 광종을 폐위시킨 조여우, 한탁주의 권력 투쟁(5년), 한탁주 독점(12년), 한탁주 죽고는 사미원(26년)[이때] 그리고는 몽골의 침공 등으로 어수선했던지라 좀 조용한가 했는데 정대전이라는 인물이 조정 내 입지가 급부상하여 독재정치를 하였고(14년), 이어 가사도가 나타났다. 그래도 맹공이라는 남송 최후의 명장과[10] 문천상과 진의중 이라는 남송 최후의 재상들이 분전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원나라에 대항해 합주 조어성(중경) 등의 사천 지역이나 강릉, 양양 등의 형주 지역에서 훌륭한 방어를 자랑했던 시절도 있었고 금나라를 역으로 위협하던 시절도 있었다. 또 근대화 전까지 막을 나라가 없었던 세계제국 몽골의 총공세를 두 번이나 격퇴했고 10여 년이나 몽골과 전면전을 펼친 유일한 나라였다. 송나라 군대가 약했다는 상식과 달리, 남송의 군사력은 경이로운 수준이어서 결사적으로 몽골의 주력과 싸워 버텨냈다. 당시 송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포와 로켓을 날리던 국가였다. 물론 송대에는 총통이 없었고 투석기로 화약무기를 날렸으며, 우리가 흔히 아는 대포의 형태는 원대에 처음 나타난다.
남송의 멸망이 1279년이고 여몽전쟁이 1231년에 시작되어 1259년에 끝났으니 고려가 몽골 제국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이미 세계가 다 뒤집히고 난 뒤가 아니라, 그때만 해도 남송이 멀쩡하게 있었던 상황이었다. 멀쩡한 것은 둘째치고 20년은 더 지나야 멸망했다. 물론 몽골과 전쟁해서 아예 그냥 물리친 나라도 있고, 점령당했다가 금세 몰아낸 나라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그런 나라들은 너무 멀거나 몽골군이 소수였거나 애당초 중요한 목표가 아니었거나 하는 경우였다.[11] 반면에 남송은 중국 북부를 장악한 몽골군의 지척이요 몽골군의 최고 주력군이 공격하는 최대의 목표이자, 몽골 제국의 대칸(오고타이 칸, 몽케 칸)이 직접 '친정'하는 상대였음에도 불구하고, 1235년부터 1279년까지 무려 44년을 버텼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 44년 동안 몽골이 지속적으로 전력을 다 해서 남송을 공격한 건 아니다. 일단 몽골은 동시에 서부로 원정을 강행하기도 하였고, 내부에도 칸 자리를 놓고 내분이 많아서 남송을 치다가 회군하여 5년의 내전을 치렀던 일도 있었으며, 간신 가사도는 아예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어 몽골이 회군하게 하기도 하였다.[12] 하여 실질적으로 교전한 시간은 20년 정도로 집계된다.[13]
언급했듯 1258년도의 전쟁을 보면 몽골군 주력이 세 방향으로 갈라져 쳐들어 오는 와중에 삼군 중 일부는 저 멀리 운남 방향으로 돌아서 송나라를 치기도 한다. 이미 전방은 말할 것도 없고 후방 지역의 나라까지 다 털린 상태였음에도 송은 위에서 나온 대로 버텼다. 오고타이 칸이 이끄는 군대가 1235년부터 1241년까지 계속 공격을 펼쳤으나 실패하고 우구데이 칸이 병사해서 퇴각에서 실패, 몽케 칸이 이끄는 부대가 1258년 또다시 직접을 공격을 펼쳤으나 5개월 동안 아무것도 못해보다가 몽케 칸의 사망으로 퇴각해서 실패했다. 이후 쿠빌라이가 대칸이 된 후 송나라 방위 라인의 핵심인 양양성을 주 타겟으로 삼아 공격해서, 수만 명의 병력에다 중동에서 가져온 공성병기까지 투입했지만 무려 6년 동안 함락을 못 시켰고, 양양 근처의 허약한 성을 일단 먼저 밀어버린 후 말라죽이는 전략으로 가면서 양양 성주 여문환에게 넌지시 항복을 권해서 겨우겨우 양양을 손에 넣었고, 양양성이 떨어진 후에야 겨우겨우 직접적인 타격이 가능해져서 20만 대군을 투입시키면서 그제서야 확실한 승기를 잡았는데, 이미 대세가 완전히 넘어간 후에도 송나라 황족들과 고관들은 무너지면서도 계속해서 물러나면서 버티다가 남쪽 바다 끝까지 몰릴 때까지 버티고, 결국 남쪽 끝까지 몰린 후 애산에서 정말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하다 장군이고 재상이고 황족이고 죽을 때까지 싸우다가 멸망한 것이다. 송나라가 문약하다며 비웃는 사람들도 이런 남송의 최후에 대해선 높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이후 남중국은 명나라 때에도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할 수 있는 최고의 요지로 취급된다.
몽골과 남송의 전쟁 후반부인 1270년 무렵에 몽골과의 전투중 투항이나 무너진 지역 및 나라가 호라즘 제국, 막북, 서하, 서요, 금나라, 토번, 중동, 러시아, 동유럽, 고려, 대리국 등등이었는데 결국 멸망하긴 했어도 남송은 꽤 오래 버티고 있었다. 바투가 저 폴란드 레그니차 전투에서 하인리히의 군사를 전멸시킨 게 남송의 멸망보다 무려 38년 전이고 남쪽의 대리국이 몽골군에게 멸망당한 게 남송의 멸망보다 26년 전이었다. 바그다드 역시 남송보다 21년 먼저 무너졌다. 그렇게 먼 곳까지 쓸리는 와중에서도 코 앞에 있던 나라가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다.
남송은 북송과 달리 지방군 지휘관들의 권한이 강했기에 군벌이라는 위협도 존재했다. 실제로 남송 초기에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군벌세력들이 수도 임안을 포위하며 방어선에 구멍을 낸 덕분에 금나라가 일시적으로 임안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군벌세력중 하나인 한세충이나 악비 등의 활약으로 오히려 금나라가 밀렸는데 남송 정부는 금나라보다 군벌들을 우려하여 적당히 돈 좀 주는 것으로 전쟁을 매듭짓고 곧바로 군벌 숙청에 들어갔다. 즉, 남송과 싸우던 몽골이 다민족국가라 통합이 덜 되었다 쳐도 남송 또한 군사적인 부분에선 완전히 통합이 잘 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남송과 싸울 당시 몽골 제국은 화북지방과 중앙아시아, 중동, 동유럽 상당수를 먹어치운 대제국이므로 국력이 남송보다 많이 약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리고 남송의 화남 지역은 화북 지방에 비해 산악지대와 정글이 많아서 죄다 농경지는 아니었다.
당시 원나라의 경우 화북지방과 중동이라는 선진 문명권의 소프트웨어와 경제력까지 흡수해 국력은 물론 군사력까지 괴물 수준에 이르던 초강대국이었다. 총 인구에서 남송보다 좀 밀리는 거지, 투사하는 역량을 보면 남송 못지않게 상당했었다. 그나마 밀리는 수군조차 화약병기를 보유한 육군의 보조로 격파하는게 원나라군이었다. 당시 원나라군은 몽골 기병대에서 여러 문명권의 기술력과 힘을 흡수해 하이브리드 군대가 되었고, 야전은 물론 기동전과 공성전 등 못하는 게 없는 올라운더 군대였다.
추가로 원나라는 화북 지방의 물력과 더불어 강력한 기병까지 갖춰서 몽골 기병대의 가공할 기동전을 봉쇄하던 남송의 요새화 영역을 보병-기병-수군의 연계를 통해 기병으로 통과하지 못하는 구역을 보병과 수군[14]으로 길 열어주거나 송나라군의 반격 시도를 기병으로 분쇄시키는 등 유기적인 제병 합동으로 송나라의 모든 시도를 끝없이 격파하며 양쯔 강 수계를 체계적으로 장악해나갔다. 이는 쿠빌라이를 비롯하여 명장 바얀, 장홍범, 아릭카야 등 남송과의 전쟁 경험이 매우 풍부한 인재들이 남송의 방어선을 파훼할 열쇠를 찾은 것도 원인이었다.
더불어, 남송은 군마 육성에 용이한 목초지대와의 접촉성이 떨어지는 곳이었기에 돈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기병 육성에서 몽골 기병을 따라잡는 것이 어려웠다. 송몽전쟁 중후반에 들어설수록 남송은 유독 자연재해와 혹한기를 많이 겪으며 흉작 크리가 떠서 산성방어체제를 받쳐주는 생산력이 떨어졌다.
북송의 고질병이었던 비대한 금군 본위의 군 체제가 남송 시기 이후 각 지방 단위의 상비군이랄 수 있는 둔수 대병 위주의 방어 체계로 개편된 덕도 있다. 북송의 경우, 상비군의 규모 자체는 거란, 서하와의 전쟁이 한창이 때는 무려 140만 정도까지 불어날 정도로 크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황제가 비서 기관인 추밀원을 끼고 직접 전군의 군령권, 발병권을 행사하는 구조 자체가 군에 대한 문치에 있어서는 좋았을 지 몰라도 시시각각 변하는 전선의 사정에 맞서 응변하기에는 참으로 비효율적인 체계였다.
무엇보다 수내허외, 즉 안을 든든히 하고 밖을 허약하게 하여 만당 시기 같은 지방 번진들의 발호를 막는다는 명목하에, 무려 전군의 2/3에 달하는 82만 명을 황제 직속 금군에 소속시켜 그중 대부분을 수도인 동경 개봉부에 주둔시켰는데, 오늘날의 물색에 비견하자면, 62만 대한민국 국군 중 무려 40만가량이 동부나 서부 전선이 아니라 수도방위사령부 소속으로 서울 관내에 주둔하는 격이다. 물론 이 금군들이 수도만 지키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수도 주둔이 베이스였던 만큼 변경의 사정에 군 구성원들이 자동적으로 어두워지는 건 정한 이치고, 그로 인하여 작전능력이 날이 갈수록 현저하게 저하되는 부작용이 있었다.
거기에 송나라의 경우, 석경당이 이종가의 후당을 멸망시키고 황제가 될 욕심에, 거란의 지원을 받을 심산으로 만리장성 이남 연운 16주(지금의 베이징을 위시한 허베이 성 일원)을 거란에다가 가져다 바친 환경하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북방 방어선 구축에 있어서도 전대의 다른 중국 통일 왕조들에 비해 상당히 애를 먹어야 했다.
헌데 남송으로 밀리고 나서는, 국경지대의 지리적 조건 자체가 장성 이남에 거란을 끼고 있어야 하는 악조건에서, 회수, 장강, 사천 준령 등의, 하늘이 내린 방벽을 국경으로 삼는 호조건으로 바뀌게 되고 비대하기만 했지 제 구실을 못하던 금군 위주의 방만한 군대는 한세충, 악비 같은 근왕 군벌들이 직접 모병한 정예 둔수 대병들을 주축으로 충실하게 재편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군벌들의 발호를 걱정한 송고종이 진회를 앞세워 실행한 정치적 조처로 인해 악비는 처단되었고, 한세충은 축출되었다.[15] 한때 40만에 달했던 둔수 대병들은 21만 정도로 축소되었지만, 남송기 금군의 역할을 담당한 삼아제군의 규모가 13만 내외였던 걸 상기하면 북송 기에 비해서는 상당히 지방군과 중앙군의 밸런스가 이상적으로 재조정 된 거라고 봐야한다. 이후 남송은 금 해릉양왕의 남정군을 문관 우윤문이 장강 남안 채석에서 격파하고, 구대륙에서 몽골을 상대로 가장 오래토록 버티는 등 멸망할 때까지 상당히 견실한 방어력을 자랑하게 된다.
험요지에 국경을 이뤄놨던 바탕에 강남(중국)의 경제력 포텐셜이 최대로 터진 시기인 것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강력한 방어선에 풍부한 물자 보급선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 역시 남송이 버틸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이었다. 실제로 남송 시기는 본격적으로 강남이 잦은 전란으로 무너진 강북의 경제력을 능가하기 시작한 시기로 평가된다. 물론 북송 시기의 경제력과 군사력 지탱이 힘들다면서 효종 및 남송 지식층이 투덜거린 적도 있으나, 남송 후기쯤 가면 경제력도 매우 융성하여 남방과 사천 지역에서 끊임없이 생산되는 물자, 험준한 지형을 바탕으로 세워진 요새들은 몽골군의 침공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앞서 언급한 사천 지방의 조어성이 이런 험준한 지형에 의지해 세워진 튼튼한 요새의 대표적 예였는데 이곳은 또 물자가 풍부하게 준비된 곳이어서 송의 수비군이 물고기와 밀가루를 몽골군에게 던지며 우린 10년도 더 버틸 수 있다고 조롱했다.
그리고 내부정치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군주보다 권신들이 돋보이는게 남송의 정치였지만 어느 권신도 감히 찬탈을 기도하지는 못했고 송효종 같은 명군이 다스릴 때는 이렇다할 권신도 없었다. 광종 시기부터 맛이 가지만 그렇다고 나라가 조각조각나다시피 한건 아니었다.
이는 남송의 프리퀄격이던 동진과는 대조를 이루는데 동진은 하내 사마씨+문벌귀족+토착 호족+군벌 세력의 연립정권에 가까웠고 때문에 정치적 불안정이 심각하여 환온, 유유 같은 무인 출신의 야심가에 나라가 휘둘리고 황실은 힘이 없어 왕돈이나 사안 같은 이들이 도와줘서야 유지되었다.
이 결과 동진은 겨우 103년 유지되었을 뿐인데 황제가 11명이나 되고 사마예, 사마혁, 사마욱을 빼고는 모두 40이 못돼 죽었고 동진의 황제들은 다들 오래 재위햇지만 어린나이에 즉위해 성인이 되고 얼마 안 돼 죽거나 성인으로 즉위했지만 오래 못가 죽거나 둘 중 하나였으나 남송은 152년동안 9명이다. 이마저도 몽송전쟁 시기의 황제 넷과 광종의 재위기간이 유독 짧아 그렇지 나머지 네 명은 모두 20년 넘게 재위했고 다들 50대를 넘겼다.
7. 역대 황제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77449, #2E8B57 20%, #2E8B57 80%, #277449); color: #ece5b6;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북송(北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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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 태종 | 진종 | 인종 | 영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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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 철종 | 휘종 | 흠종 | ||
남송(南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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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 | 공제 | 단종 | 소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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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 묘호 | 이름 | 연호 | 즉위년일 | 퇴위년일 | 재위 기간 | 능호 |
1 | - | 조구(趙構) | 건염(建炎, 1127년 5월 ~ 1130년) | 1127년 6월 12일 | 1129년 | 3년 | - |
임시 | - | 조부(趙旉) | 명수(明受, 1129년) | 1129년 | 1129년 | 27일 | - |
복위 | 고종 | 조구(趙構) | 건염(建炎, 1130년) 소흥(紹興, 1131년 ~ 1162년) | 1129년 | 1162년 7월 4일 | 32년 | 영사릉(永思陵) |
2 | 효종 | 조신(趙昚) | 융흥(隆興, 1163년 ~ 1164년) 건도(乾道, 1165년 ~ 1173년) 순희(淳熙, 1174년 ~ 1189년) | 1162년 7월 24일 | 1189년 2월 18일 | 26년 209일 | 영부릉(永阜陵) |
3 | 광종 | 조돈(趙惇) | 소희(紹熙, 1190년 ~ 1194년 | 1189년 2월 18일 | 1194년 7월 24일 | 5년 157일 | 영숭릉(永崇陵) |
4 | 영종 | 조확(趙擴) | 경원(慶元, 1195년 ~ 1201년) 가태(嘉泰, 1201년 ~ 1205년) 개희(開禧, 1205년 ~ 1208년) 가정(嘉定, 1208년 ~ 1225년) | 1194년 7월 24일 | 1224년 9월 17일 | 30년 55일 | 영무릉(永茂陵) |
5 | 이종 | 조윤(趙昀) | 보경(寶慶, 1225년 ~ 1227년) 소정(紹定, 1228년 ~ 1233년) 단평(端平, 1234년 ~ 1236년) 가희(嘉熙, 1237년 ~ 1240년) 순우(淳祐, 1241년 ~ 1252년) 보우(寶祐, 1253년 ~ 1258년) 개경(開慶, 1259년) 경정(景定, 1260년 ~ 1264년) | 1224년 9월 17일 | 1264년 11월 16일 | 40년 60일 | 영목릉(永穆陵) |
6 | 도종 | 조기(趙祺) | 함순(咸淳, 1265년 ~ 1274년) | 1264년 11월 16일 | 1274년 8월 12일 | 9년 269일 | 영소릉(永紹陵) |
7 | - | 조현(趙顯) | 덕우(德祐, 1275년 ~ 1276년 4월) | 1274년 8월 12일 | 1276년 2월 4일 | 1년 176일 | 위치 미상 |
8 | 단종 | 조하(趙昰) | 경염(景炎, 1276년 5월 ~ 1278년 4월) | 1276년 6월 14일 | 1278년 5월 8일 | 1년 328일 | 영복릉(永福陵) |
9 | - | 조병(趙昺)[16] | 상흥(祥興, 1278년 5월 ~ 1279년 2월) | 1278년 5월 10일 | 1279년 3월 19일 | 313일 | 선전시 송소제릉[17] |
송나라만의 특징으로 황제를 지칭할 때 폐하는 격식을 최대한 차릴때 사용하고, 일상적으로는 '관가(官家)'라고 돌려말하곤 하였다.[18]
8. 계보
추존 황제 성조 조현랑 | ||||||||
(계보 불명) | ||||||||
추존 황제 희조 조조 | ||||||||
추존 황제 순조 조정 | ||||||||
추존 황제 익조 조경 | ||||||||
추존 황제 선조 조홍은 | ||||||||
1. 태조 | 2. 태종 | |||||||
조덕소 | 조덕방 | 3. 진종 | 조원분 | |||||
조유길 | 조유헌 | 4. 인종 | 조윤양 | |||||
조수탁 | 조종욱 | 5. 영종 | ||||||
조세괄 | 조세장 | 6. 신종 | ||||||
조영가 | 조영회 | 7. 철종 | 8. 휘종 | |||||
조자석 | 조자칭 | 9. 흠종 | 10. 고종 | |||||
조백오 | 11. 효종 | 조부 | ||||||
조사치 | 12. 광종 | |||||||
조희로 | 13. 영종 | |||||||
14. 이종 | 조여예 | |||||||
15. 도종 | ||||||||
17. 단종 | 16. 공종 | 18. 소제 |
9. 미디어 믹스
징기스칸 4에서 송 효종, 도종, 이종 시대를 다룬다. 도시는 임안과 천주 2개로 시작하며 도종 시기인 시나리오 2는 양양이 추가되었다. 시나리오 2를 제외하면 시작 시 쓸 만한 전투용 장수는 적지만 문화의 질은 금나라가 더 낮으므로 플레이어가 잡았을 때 잠재성은 남송이 더 높다. 그러므로 수호전에서도 못이룬 연운 16주 탈환을 노려보자.시나리오 1은 금나라와 우호도는 낮으나 1년, 6턴 동안 동맹상태이고 동맹 상태일때 군사 유닛이 한턴에 갈 수 있는 범위가 더 넓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여 연경까지 진격해보자. 군대를 4부대 이상 편성하여 연경(북경)을 포위하고[19] 이때 연경은 시나리오 개시 초창기라 가을 추수 횟수가 많지 않아 상비식량이 적으므로 연경의 식량이 다 떨어졌을 때 공략하여 손쉽게 정복할 수 있다. 그 후에 화포병을 이용하여[20] 임안과 연경에서 개봉을 양면공격하고 만주의 회령까지 탈환해보자. 아무리 늦어도 금나라 최후의 먼치킨이 등장하기 전에 금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 이쯤되면 흥경과 돈황, 하노이까지 정복하여 서하와 베트남 리 왕조를 밀어내어 화북과 화남을 통일하는 것은 일도 아니게된다. 또한 임안과 천주 둘 다 농업, 학술, 항해 수치가 높은 편이라 내정을 꾸리기에도 손색이 없다.
시나리오 2는 도종, 문천상, 육수부, 장세걸이 살아있을 때 대도를 함락시키면 이 장수들의 능력치가 증가하는데, 도종의 수명이 그리 길진 않아서 초반에 빨리 미는 게 중요하다. 시나리오 3에서도 공략법에 큰 차이가 없다.
컴퓨터가 남송을 조종하는 경우, 북벌보다 바다 건너 일본과 고려를 자주 공격하기 때문에 일본과 고려를 플레이할 때에는 주의해야 한다.
[1] Taagepera, Rein (1997), "Expansion and Contraction Patterns of Large Polities: Context for Russia", International Studies Quarterly, 41 (3): 475–504. #[2] 수많은 동전들이 발행되었다. 동전명의 앞부분은 주로 각 황제의 연호가 붙으며 ~원보(元寶), ~통보(通寶), ~중보(重寶) 등으로 끝난다.[3] 후에 장방창은 담주(潭州)로 유배당한 뒤, '불충'한 죄로 사약을 받게 된다.[4] 1972년 헌법 개정 이전의 북한이 수도를 서울로 명문화한 사례, 타이페이에 도읍한 대만이 난징을 공식 수도로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5] 실제로 이 사망 플래그는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 때 재반복되는데, 이번에는 악비고 의병이고 협상이고 그딴 건 없고 그대로 남송 황족 전원이 바다로 몸을 던져야했다.[6] 진회가 포로에서 탈출해 남송에 복귀하는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7] 통념과는 달리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는 측에서도 몽골이 장차 위협이 될 거라는 점은 인지하고 있었다. 몽골과 연합해서 금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 게 아니다.[8] 진덕수는 송 영종에게 금이 몽골의 공격을 받는 틈을 타 금에 바치는 세폐를 끊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고 사후 대책을 주장하였다.[이때] 금나라가 멸망했다.[10] 맹공 이후 이정지, 왕견 등의 무장들이 있었다. 전자는 1276년 남송 황실이 투항했음에도 양주 지역에서 장렬한 투쟁을 벌였고, 한 명은 1259년 조어성 전투에서 몽케 칸의 군대를 막아내었다.[11] 그나마 예외는 베트남 정도, 이쪽은 무려 3차례나 침공했는데도 못 먹었다.[12] 가사도가 몽골과 화약을 체결하였다는 부분은 현재 중국 사학계에서 논란이 많다.[13] 그리고 그 남은 20년 동안 송은 따로 전쟁이 없었지만 몽골은 그동안에도 쉬지 않고 외부 정벌 혹은 내전으로 싸웠다.[14] 몽골이 수군을 육성할 수 있었던 것은 남송 출신 항장 유정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본래 북방 한인이었고, 이후 맹공의 수하에서 활동하였으나 여문덕의 무시와 유흥의 사천제치사 부임으로 인해 불안해한 나머지 노주를 바치고 몽골에 투항했다. 유정 한 사람으로 인해 몽골군은 수군을 육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15] 이론의 여지는 있을수 있다 오늘날에도 악비, 한세충 숙청의 본의가 송 고종, 진회 누구한테 더 쏠리는지는 연구 대상이기 때문이다.[16] 원에서 마지막 황제를 송 공제 조현으로 간주하고 조병에게는 정식 시호나 묘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흥제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17] 따로 능호 없이 그냥 송소제릉이라고 부른다.[18]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라는 호칭이 원래는 '궁전에 계신 분'이라는 뜻으로 왕을 돌려말하던 용어였던 것과 비슷하다.[19] 적부대가 도시 주변 4칸을 모두 주둔할 경우 포위되어 그 도시는 식량 수입이 0이 되고 도시 바깥으로 유닛 등이 나갈 수 없게 된다.[20] 화포병을 쓸 수 있을 때까지는 투석기를 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