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19 16:30:55

백제


파일:나무위키+유도.png   후삼국시대에 견훤이 세운 국가에 대한 내용은 후백제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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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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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1]
파일:백제의 지도 (4세기, 진출지 표시).png
-1 ▲ 백제의 진출지가 표시된 [[4세기]] 경의 지도[2]
기원전 18년[3] ~ 서기 660년 8월 29일[음력] (678년) 또는 서기 678년 8월 28일[음력] (680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마한 신라[6]
국호 십제(十濟)[7]백제[8]
위치 한강 유역을 비롯한 경기도 일대
황해도 동남부, 경기도, 충청도, 영서 일부, (전라도)[9]
충청도, 전라도 일대[10]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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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년 하남위례성 천도
260년 관등 제정
384년 불교 전래
475년 웅진 천도
538년 사비성 천도
수도 위례성[11]웅진[12]사비[13]
-3 익산 왕궁리 유적이 후기에 수도였다는 설이 존재한다.
인구[14] 당평 백제비: 24만호 620만구
삼국유사: 전성시 15만 2300호
당서: 76만호
종족 예맥, 삼한
언어 백제어 (고대 한국어)
문자 한자
종교 토착 신앙불교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어라하 / 건길지 / 대왕 / 니리무 / 마한황제 제왕[15]
주요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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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왕
근초고왕
성왕
의자왕
국성 부여(扶餘)[16]
현재 국가 대한민국, 북한
1. 개요2. 국호3. 역사4. 마한 정복에 관한 논란
4.1. 구 온조왕 완전병합설4.2. 구 근초고왕 완전병합설 4.3. 6세기 완전병합설 (정설 - 전북 동남부, 전남 지역 병합)4.4. 백제와 마한의 경계는?
5. 일본과의 긴밀한 관계6. 영역과 행정구역7. 백제의 문물, 제도, 사회
7.1. 사회7.2. 관직7.3. 군사7.4. 언어7.5. 연호7.6. 종교, 문화, 역사7.7. 건축7.8. 시가7.9. 예술
8. 여담9. 왕사10. 인물11. 참고 문서12. 백제를 소재로 한 작품13. 둘러 보기

1. 개요

고구려와 같은 부여의 뿌리가 남하해 한강변에 자리잡아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룩한 한반도의 고대 왕조.

삼국 중 유일하게 신화적인 시조탄생설화가 없으며, 삼국사기에서는 여러 전승을 동시에 전하고 있는데 부여 해부루왕 혹은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 온조왕이 나라를 떠나 건국했다.

흔히 고구려가 군사적으로 강성했던 것이 강조되고, 신라가 삼국통일과 황금으로 유명하다면, 백제는 삼국 중 가장 섬세하고 세련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강조된다.

2. 국호

세계의 백제 국호
한국어 십제(十濟)/백제(百濟)/남부여(南扶餘)/응준(鷹準)/나투(羅鬪)[17]

최초 건국 당시에는 십제였으나 이후 백제로 바꾸었다. 이후 성왕 16년인 536년에 남부여로 국호를 바꾸었으나 이후에도 중국 사서에서 백제라는 국호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제대로 정착되지는 못한듯 보여진다. 그 외에 고구려광개토왕릉비에서는 백제를 백잔(百殘)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잔인할 잔(殘)을 사용한 것으로 백제를 깔아내리는 비하어로 추정된다.
중국어바이지(Bǎi jì)
일본어쿠다라(くだら)

신라와 마찬가지로 초기부터 일본과 거리가 가깝고 서로 많이 얽혔던 관계라 일본서기를 비롯한 각종 사서에 언급된다.
아랍어مملكة بايكتشي
영어Baekje

3. 역사

4. 마한 정복에 관한 논란

마한은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구려계 유민들이 마한 지역의 일부였던 한강 하류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백제는 지속적으로 전투를 벌이며 마한 54개국을 점진적으로 복속하면서 영토를 확장해 왔다.

백제가 언제 마한 전체를 복속시켜왔는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있다. 그동안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369년 근초고왕 대에 백제가 마한 전역을 정복했다는 설이 주류였다. 그러나 근초고왕설의 유일한 근거인 《일본서기》 기록은 근초고왕 24년 남쪽 오랑캐를 무찔렀다는 식으로 표현되어 기록 자체가 애매한데다가 마한 전체를 확실히 정복했다는 이야기도 없기 때문에 근초고왕 정복설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다가 2010년 이후 전라남도 지역의 여러 고고학적 성과가 발표되면서 현재는 6세기 중반까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남부 지역에 걸쳐 독립성이 나타나는 세력이 존재했고, 백제가 이 지역에 직접 지배를 실시한 시기는 5세기 후반~6세기 초반이라는 입장이 학계에서 대세를 이룬다. 고고학계에서는 6세기 중반으로 보는 편이다.

4.1. 구 온조왕 완전병합설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마한(왕)'을 거꾸러 뜨린 것이 온조왕 대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3세기까지 경기도 ~ 충청도 일대에 걸친 통일적인 정치 세력이 존재했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온조왕이 마한 54개 소국 중 하나만 정복했거나 잠시 군사 활동만 하고 왔을 뿐 대규모적인 정복 활동은 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설령 기록이 사실이라고 주장해도 '마한 왕' 한 명을 몰아낸 것뿐이 되고 '마한을 정복했다'는 말이 무의미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마한을 정복했다'고 말할 만한 시점은 경기도 지역에 백제 토기가 대대적으로 확산되는 3세기 후반에 근거하여 고이왕 대 일어난 사건이라는 설, 벽골제 건축 기사 등에 근거하여 비류왕 대 일어난 사건이라는 설, 근초고왕 대 초기 기사의 공백과 4세기 중후반 충청도 북부 지역에서 고분군의 교체 등에 근거하여 근초고왕 대 일어난 사건이라는 설 등이 갈리고 있다. 이중 근초고왕 대에 마한을 정복했다는 설이 가장 큰 지지를 받았다.

4.2. 구 근초고왕 완전병합설

고고학적 연구가 부실했던 1990년대까지는 근초고왕 때 백제가 마한을 완전 정복했다는 설이 큰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나 현재 근초고왕이 마한을 완전 정복했다는 설은 사실상 폐기되었고,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은 차령산맥 또는 노령산맥 이북 지역까지 한정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근초고왕 정복설은 《일본서기[18]에 근초고왕 24년(369)[19] 남서쪽 오랑캐를 정발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 기사 자체가 사실적인 신뢰성이 없다고 하여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설에 대해 비판하거나 부정하는 견해도 있어 왔다.[20] 또한 기록이 사실이라 치더라도 마한 전체를 완전히 정복했다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게다가 근초고왕 이후에도 동성왕, 무령왕 등이 계속 남쪽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기록이 나온다는 점도 근초고왕의 마한 완전 정복설을 부정하는 중요한 근거였다.

한편 그 외에 일부 견해는 근초고왕 대에 마한 세력을 거의 병합했으나, 근초고왕 사후 백제가 쇠퇴하면서 마한 세력이 다시 부흥했다고 보는 다소 절충론적인 설도 있었다. 그러나 추가적인 고고학적 연구 결과 현재 이러한 절충설도 부정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전라남도의 고고학 발굴 결과들이 나오면서 6세기 중반까지 전남과 전북 일부 지역에 독자적인 마한 세력이 존재했음이 사실로 확인되었고, 근초고왕이 마한을 완전히 정복했다는 설은 현재에는 부정되고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근초고왕 대 백제의 남쪽 경계선에 대해 차령산맥 이북설과 노령산맥 이북설이 논쟁 중에 있다. 일부는 차령산맥과 노령산맥 사이 지역, 즉 지금의 전라북도 지역 중 서쪽 해안 지역은 백제에 복속되었고 동쪽 산악 지역은 마한에 남아 있다고 보기도 있다. 대체로 학계 정설은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 당시 백제의 직할지가 된 지역은 노령산맥 이북 지역이고 노령산맥 이남과 영산강 유역은 간접 지배로 있다 5세기 후반~6세기 초반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21]

이는 대소왕 이후 고구려의 보호국이 된 동부여랑 유사한 부분이다. 대소왕 이후의 동부여는 한동안 혼란을 겪다 후기 동부여로 넘어가는데 후기 동부여는 사실상 고구려의 비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고구려 경내에 속한 국가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동옥저의 경우도 건국 초기부터 복속되어 뒤에 동천왕 시기에 위나라를 격퇴한 고구려가 내친 김에 동옥저를 완전히 병합해버렸다. 동부여나 동옥저의 사례를 보면 마한 침미다례 세력도 간접 지배를 받다 5세기 후반 이후로 완전히 병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한에 대한 직접 지배의 완성은 늦어도 6세기 중반 이후라는 입장은 학계의 공통 의견이지만 현재 학계의 주류는 근초고왕 때 적어도 전라북도 북부 지역까지 정벌한 건 사실로 보고 있다. 근초고왕 시대 직후인 4세기 후반~5세기 중반 때 전라북도 서북부 지역에 소수나마 백제식 묘제가 발견되는 것은 이 지역이 미약하게나마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고분은 백제의 지원을 받는 유력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4.3. 6세기 완전병합설 (정설 - 전북 동남부, 전남 지역 병합)

과거에는 정황상 근초고왕 시기를 전후로 목지국 등 마한의 전 지역을 백제가 병합한 것으로 추론하는 시각이 우세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로 전라남도 여러 지역에서 고고학 발굴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그 결과들이 연이어 발표되자 결국 기존 학설이 완전히 뒤집혔다. 근래의 여러 발굴조사 결과, 간접통치 실시 여부와 별개로 6세기까지 전라남도 전역에 걸쳐 독자성을 유지하는 세력이 존재했음을 확인했다. 전라남도의 독자 세력들은 해상으로 백제, 신라, 가야, 왜, 중국과 교류했고, 이들이 축조한 고분들은 규모가 당시 백제의 왕릉을 능가하기도 했다. 나주시 ‘신촌리 9호분’을 만들려면 연인원 5천 명 이상이 동원됐으리라 추정하기 때문에, 이들 세력은 고대 국가체계에 근접했던 듯하다. 다만 전라남도 마한 세력이 고대 국가 단계에 이르렀는지 단언하기에는 아직까지도 자료가 불충분하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굴조사 결과가 보고되면서 '근초고왕 대에 전라남도 '마한' 지역은 정복되지 않았다.'는 설이 크게 대두되었다.

백제의 영향력은 전라남도 지역에 4세기 후반부터 침투하여[22] 방 - 군 - 성제가 시행되었을 6세기 초중반이 되어서야 끝난다. 백제는 6세기까지 이곳에 직접 통치를 이룰 여력이 없었다. 지속적으로 강성해지며 남하하는 고구려를 방어하기에 급급했고 475년 한성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바닥부터 다시 올라와야 했다. 나주 신촌리 고분군 등은 이 시기에 그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는 모습을 보인다.

초기에는 백제계 석실분으로 보아 백제 측에서 직접 개입하기도 하였지만, 전방후원분(장고형 무덤)이 등장하기도 하기 때문에 부족한 힘을 보탤 세력을 찾아 일본계 세력을 끌어들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방후원분은 한 지역에 1개, 많아야 2개가 존재하는 정도이고 고분'군'을 형성하지 못하는지라 일본계 세력은 백제와 협력한 개인이 사망하여 전방후원분을 축조한 이후에는 한반도에서 기반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현지에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는 백제의 압력이 있었을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기록상으로 볼 때 백제는 동성왕무령왕 등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정벌에 나선 끝에 6세기 초중반에 전라남도 젼역의 마한 세력을 백제에 완전히 복속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와 전라남도 마한의 관계에 대해 전쟁과 같은 긴장 관계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성곽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마한과 백제간에 전쟁이 없었다고 보여지며, 고분군의 현지 세력들 또한 대백제 협력자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전남 지역에 대한 영토화 과정 전체는 백제가 통제하고 있었고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과정이었기에, 현지 세력들이 강한 힘을 가진 백제를 인정하며 자발적으로 백제에 순응하며 점차 백제의 관료화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헌 기록과 발굴조사 결과로 추측하건대 군사적 긴장 관계가 존재한 모양이다. 우선 동성왕, 무령왕 대에 백제가 마한 정벌에 나선 기록이 있고, 백제가 마한을 완전 병합하고 나서 전라남도의 복속 지역 백성들에게 상당히 차별적인 푸대접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최근 고고학적 발굴 결과로 미루어 볼 때 마한 세력은 멸망하기 직전까지 백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고유의 문화를 유지했고, 일본, 신라, 가야와도 독자적인 교류 관계를 가져왔음이 밝혀졌다. 마한의 성곽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것은 마한의 세력이 대규모 성곽을 건설할 만큼 강력한 통일 세력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백제 입장에서 보자면 백제가 주로 공세적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만큼 굳이 성곽을 건설한 필요가 크지 않았을 것이며, 애초에 백제도 성곽을 거의 건설하지 않는 나라였다. 백제의 성곽 유적은 신라나 고구려에 비해 매우 희귀하며,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성곽도 토성 위주다.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현재 학계의 주류는 백제가 마한과 무력 충돌을 가지며 마한을 병합해 나갔던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일각에서는 현재 단순히 '마한'으로 단순히 지칭하고 있는 전남 지역을 계속 '마한'으로 부를 수 있는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 및 《진서》 동이전에서 '마한'이라는 용어가 사용된지 200년이 넘게 지난 시점까지 전남 지역이 독자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23] 때문에 최근 고고학계의 일각에서는 이 지역을 '영산강 지역' 내지 '전남 지역'이라고 하여 논란을 일으키지 않을 표현을 써서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아직까지 다수의 학자들과 전라남도 현지 지자체들은 대체로 '마한'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마한'이라는 단어 자체가 단일 세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넓게 퍼진 수십여 소국들을 통칭하는 용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변한이 가야로 명칭이 변한 것처럼, 전라남도 마한 또한 자신들을 지칭하는 별도의 별칭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라를 통해 기록이 후세까지 전달된 가야와는 달리 전라남도 마한에 대해서는 남은 문헌 자료가 거의 없고 거의 전적으로 고고학적 연구에 의존하기에 이를 밝혀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박중환 국립 나주 박물관장은, 전라남도 역사에서 100여 년에 불과한 백제라는 ‘지류’가 700여 년간 이어진 마한이라는 ‘본류’를 잠식한 형국이라면서 이제라도 역사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자세한 내용은 마한 문서 참조.

4.4. 백제와 마한의 경계는?

늦어도 6세기 중반까지는 백제가 마한을 완전히 병합해 직접 통치를 했다는 것이 정설이 된 현재는 근초고왕대 이후 백제와 마한의 경계선이 어디인지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5세기까지 백제는 적어도 경기 남부 및 충청 북부지역까지는 직접지배를 실시했고 충청 남부 및 전라도 일대에 대해서는 간접지배를 실시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경기 남부 및 충청 북부지역에서도 마한 재지세력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지역이 있는 반면 빠르게 백제화 되는 지역도 있기 때문에 지역에 따른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여주는 유적이 화성 마하리 고분군과 오산 수청동 고분군이다. 화성 마하리와 오산 수청동은 모두 경기 남부지역에 위치하지만 무덤의 변화양상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마하리 고분군은 목관묘(널무덤) 또는 목곽묘(덧널무덤)에서 석곽묘(돌덧널무덤)와 석실분(굴식돌방무덤)으로 변화한다. 반면 수청동 고분군은 주구토광묘(주구움무덤)라고 하는 마한의 특징적인 무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진다.
뿐만 아니라 같은 주구토광묘라고 하더라도 경기 남부지역과 충청 북부 그리고 각각의 지역 내에서도 무덤의 방향, 부장품(껴묻거리)의 위치 등에 차이가 나타난다. 즉, 지역적인 특색이 상당히 강했던 셈이다. 게다가 경기도김포, 충청남도 서산 등 서해안지역을 따라서는 주구토광묘와 형태는 비슷하지만 축조방법이 다른 '분구묘'라고 하는 특징적인 무덤이 확인되고 있다.(연구자에 따라 분구묘를 주구토광묘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간접지배를 실시했던 것으로 보여지는 충청 남부지역과 전라도 지역, 강원도 영서지역에서는 유력세력 또는 요충지에 위치한 세력에게 수준높은 물품을 하사함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수준높은 물품이란 바로 금동제품. 원주 법천리, 공주 수촌리, 고창 봉덕리, 익산 입점리, 고흥 길두리에 있는 무덤들에서 백제의 금동관모, 금동신발 등이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는데, 간접지배지역에 대해서만 금동제품을 하사했다고 하기 어려운 것이 위에서 언급한 직접지배에 해당하는 충청 북부지역에서도 금동제품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경기 남부지역까지가 직접지배의 한계라고 보는 시각도 있고 금동제품의 성격을 다르게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2014년 경기도 화성시 요리cook이 아니다에서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백제의 세력권과 금동제품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더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전라남도 지역은 지역마다 다르나 5세기 후반~6세기 중엽까지 마한 독립 세력이 지배했다는 것이 확정적이다.[24] 문제는 전라북도 지역이다. 전북지역은 백제의 금동제품이 확인되고 분구묘를 비롯한 마한의 무덤이 확인되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마한.백제 관련 고고학 연구는 부분적으로 시행되고 있을 뿐 상당히 미흡한 실정이다. 때문에 마한.백제 역사 규명을 위해 향후 전라북도에서 본격적인 고고학 연구가 진행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연구는 지연되고 있는 가운데, 개발로 대다수의 고분들이 파괴되고 있는 실정이다. 전북 초촌리 고분군의 경우 1978년 발굴 조사 당시 삼국시대에 축조된 고분이 211기에 달했으나, 현재는 거의 파괴된 상태다...

전라북도 지역에 대한 현재까지 고고학계의 연구 결과를 요약하면[25]

(1) 전라북도의 최북서쪽인 금강 하구의 군산 지역은 5세기 무렵 가장 먼저 백제의 영토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2) 구 이리시를 중심으로 하는 익산 지역, 그리고 완주군, 전주시를 비롯한 만경강 유역 이남 지역은 웅진 천도(475년) 시기까지는 마한 분구묘가 주를 이루지만 이후 급격히 줄어들고 백제계 석축묘가 주를 이룬다. 따라서 만경강 유역은 웅진 천도 후에야 백제에 귀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3) 정읍동진강 이남 지역은 웅진 천도 이후에도 강성한 마한 세력이 존재하다가 6세기 중엽 전라남도 마한과 같은 시기에 백제에 병합되었다.

충청남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가장 북쪽의 금강 하구 지역은 전라도에서 가장 먼저 5세기에 이미 마한의 분구묘가 백제의 석축묘로 대체되었다. 백제의 웅진 천도 무렵 이미 군산 지역은 백제 영역화가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사실 과거부터 군산 대야면 등에서 마한의 유물이 대량으로 발굴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군산, 익산 지역은 백제 무왕 시절 익산 천도설이 크게 부각되면서 백제의 중심 지역을 자처하는 분위기에 매몰된 채, 마한 관련 연구가 억제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다가 최근 전라도 마한이 재조명되자 뜬금없이 익산이 마한의 중심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군산 바로 아래인 구 이리시, 미륵산 일원과 완주지역에서는 5세기 중엽까지도 마한 분구묘의 전통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 이유는 미륵산에서 모악산에 이르는 분지형의 공간적 범위, 곧 만경강을 중심으로 군집을 이루고 축조된 토광묘 집단은 마한 성립의 주체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군산 지역에 비해 마한 분구묘의 전통이 오랜 기간 지속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전주 혁신도시 조성시 발굴된 고분에서는 이미 마한이 백제에 완전히 귀속된 이후인 백제 말기에 건설된 고분임에도 마한 분구묘 양식이 강하게 남아 있는 모습이 발견되기도 했다.

최근(2018년) 발표된 전라북도 정읍 지역 고고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정읍 지역에서는 웅진 시기(475~538년)에는 마한계 분구묘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백제계 석축묘가 소수 분포하고 있으나, 사비 천도(538년) 이후 백제계 석축묘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전라남도와 인접한 전라북도 정읍 지역은 백제의 웅진 천도 이후에도 간접 지배를 이루다 사비 천도 이후 백제에 완전히 병합된 것으로 해석된다. 즉 전라남도 마한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백제에 병합된 것이다. 정읍 지역의 마한 분구묘는 만경강 지역의 분구묘보다 규모가 크고 집단화되어 있어 이 지역에 강성한 재지 세력이 존재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일본서기에서 백제삼서를 인용해 서술한 근초고왕 때 고사부리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사실일 수 있다. 왜냐하면 백제 고사부리성의 축성 시기가 4세기 중반으로 나오고 건축 양식도 백제계 토성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할 영역이 되었다고 하나 계속해서 마한 토호 세력의 존속이 나타나고 있기에, 일부 거점만 직접 지배하며 재지 세력에 의한 느슨한 간접 통치를 이루다 6세기 중반에 완전히 직할 영역이 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5. 일본과의 긴밀한 관계

백제와 일본 지역 간의 관계는 각별했다. 4세기 이후까지 일본 열도는 아직 통일 왕국을 이루지 못한 채 기나이의 야마토 정권을 주축으로 하여 호족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이 시기에 백제가 왜에 전해준 문물은 건축, 토목, 제철, 목마, 양초, 직조, 양응, 의약, 음악 등 매우 다앙했는데, 생활에 필요한 분야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사회가 일상생활에 필요하면서도 생산력을 높일 수 있는 문물을 백제로부터 받아들인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선진문물들을 바탕으로 하여 야마토는 당시 일본에 위치한 타 국가들에 비해서 강대한 국력을 갖추게 되어 당대에 존속해있던 주변국가들을 하나 하나 병합시켜나갈수있었고, 서기 7세기 무렵이 되면 규슈 북부에서부터 간토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야마토로 통합시키는데 성공을 거둘수 있었다.

왜는 또한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이념으로 기능하는 유교, 불교, 도교 등을 백제로부터 받아들였다. 백제가 유교를 왜에 전수해 주었다는 것은 근초고왕아직기와 박사 왕인을 왜에 파견하고 또 한자, 천자문과 논어를 보내주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372년 / 404년). 참고로 근초고왕칠지도 또한 일본에 내려주었다. 이후 백제는 무령왕때 오경 박사 단양이, 고안무 등을 왜에 파견하여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516년).

불교는 사비 도읍기에 성왕이 왜에 '노리사치계'를 파견해 전해주었다(552년). 이후 백제는 많은 승려와 사찰 건립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계율을 가르치고, 사찰 건립을 도왔다. 한편 승려 관륵은 승관 조직을 정비하여 교단의 기율을 바로 잡았을 뿐만 아니라 천문지리, 둔갑, 방술 등 도교 사상도 전해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왜가 유교, 불교, 도교 등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확립하는 데 백제의 영향이 매우 컸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스이코 덴노 시절에는 "스이코 여왕과 만조백관들이 '백제옷'을 입었으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기뻐했다"라는 기록도 나온다. 이는 당시 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백제의 '선진 문물'들을 전해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증거이다.

백제가 왜에 '선진 문물'을 전수하는 방법은 기술자들이 도왜[26]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들 도왜인들은 자신의 학문이나 기술 등을 바탕으로 왜의 지배층에 편입되어 들어갔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왜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백제와 왜의 관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이렇게 문화 교류가 왕성했기 때문에 야마토 정권에서 백제계 도래인 출신들도 많이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일본 왕실과도 혈족적 연계를 갖는 수준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는 나중에 모계 혈통적인 입장에서 백제계 2세가 덴노가 되는 경우까지도 나올만큼 일본과 백제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으며 백제 왕족들이 일본에서 활동하기도 했다.[27]

심지어 비다츠 덴노조메이 덴노 시절에는 아예 왕도에 ‘백제궁(百濟宮)’이라고 호칭하는 왕궁(王宮)을 짓고 살았을 정도였다. 거기다 조메이 덴노는 백제궁(百濟宮)에서 사망하였는데 사망 후에 ‘백제의 대빈’이라고 부르는 백제 왕실식 장례를 치루었을 정도였다. “641년 10월9일에 천황이 '백제궁'에서 붕어하시다. 18일에 왕궁 북쪽에 안치하고 빈궁을 만들었다. 이것을 ‘백제의 대빈(百濟の 大殯)’이라고 부른다.”(十三年冬十月己丑朔丁西, 天皇崩于百濟宮. 內午, 殯於宮北. 是謂百濟大殯). 조메이 덴노의 장례를 '백제의 대빈'으로 모셨다는 기록으로 여기서 말하는 '백제의 대빈'이란 백제 본국 왕실의 3년상 '국장의례'를 가리킨다.[28] 어째서 조메이 덴노의 장례를 '백제의 대빈'으로 모셨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진건 아직 없지만 적어도 조메이 덴노 시절 백제계들의 영향력이 일본 조정내에서 굉장히 컸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즉, '백제궁'과 '백제의 대빈' 모두 당시 왜국에서 백제계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들이다.

이러한 백제와 일본의 밀접한 혈맹 관계나 다름없는 모습은 신라를 공격할 때 백제에 지원 병력을 파병하여 적극적으로 돕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백제 멸망기 때에는 백강 전투처럼 일본의 국력을 대거 쏟아부어서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하는 혈맹적 관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실제 백제계 유민들이 나라를 잃었을 때 상당수가 새롭게 정착한 곳도 일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제와 항상 관계가 좋았던 것만은 아닌데, 대표적인 시기가 백제 무왕 초기로 일본서기 推古天皇 16年(608) 6월 조에 따르면 隋(수나라)에 갔던 왜의 사절 오노노 이모코(小野臣妹子)가 수양제에게서 왜왕에게 보내는 국서(返書)를 소지하고 귀국하던 도중에 백제에 이를 강탈당했다고 한다(...). 소야신매자가 당에서 보낸 국서를 백제인에게 탈취당함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당시 왜의 대중국 독자 외교에 대해서 이유야 어찌되었든 당시 백제가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29] 실제로 일본서기에서도 602년 10월에서 615년 사이에 약 12년 동안 백제와 왜의 외교관계 기록이 보이지 않는 등 의외로 백제와 왜의 외교관계가 안 좋았던 시기도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고대 백제어일본어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백제어와 일본어가 같은 계통이란 설은 사실상 폐기되었다. 백제 목간에서 나타난 수사법은 현대 한국어와 유사하기 때문이다.[30] 또한 일본서기에도 "백제와 왜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역관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대에는 언어동조대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란 설이 주류이다.

6. 영역과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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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최대 판도.

각 지명에 대한 설명은 가나다순으로 한다.

한성백제 및 웅진 천도 초기에는 담로제(擔魯制)를 시행하였다. 이는 사료 《양서(梁書)》 북사 열전 백제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號所治城曰固麻謂邑擔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有二十二擔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
(백제는) 도성을 고마라고 부르며 속읍을 담로라고 부르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제와 같은 것이다. 그 나라에는 22개의 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이후 백제 성왕대에 이르러 수도와 지방을 각각 5부5방으로 나누었으며, 각 방에는 방령이라고 하는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방령은 달솔(達率)[32]의 관등을 가진 자에게 임명되었으며 아래에 두 명의 방좌(方佐, 차관)를 둘 수 있었다. 사비 천도기 이후로는 5방체제가 더욱 굳어지고 요새화되어서, 방령이 군정권과 군령권을 행사하는 등 도시의 요새화가 진행되었다.

7. 백제의 문물, 제도,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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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사회

백제의 형벌은 엄격하여, 반역자, 전쟁터에서 도주한 군사, 살인자는 참수에 처했다. 도둑귀양을 보내고 훔친 물건은 2배의 값을 치뤄서 배상하게 하였다. 관리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했을때는 종신형에 처하고, 3배의 값을 치뤄서 배상하도록 했다.

백제의 신분은 크게 지배 신분층, 평민층, 천인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 부여씨와 대성팔족이라 불리는 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성팔족은 왕실과의 혼인이 허락되어 외척이 될 수 있는 왕비족이다. 당대의 왕비를 배출하면 '길사'라고 하며, 왕권에 버금가는 세력이 된다. 신분제는 관등, 관직제를 규정하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관등, 관직, 복색, 대색에도 구별이 있었다. 왕은 금화로 장식한 오라관(烏羅冠)을 쓰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검은색의 비단신을 신었다. 지배 신분층 가운데 좌평 계열과 솔 계열은은 자복을 입고, 은화로 장식한 관을 썼다. 덕 계열은 비복을 입었고, 자대에서 황대까지의 띠를 띠었다. 무명 계열은 청복을 입되, 황대에서 백대까지의 띠를 둘렀다.

백제의 귀족층은 중국과 교류가 빨랐으며, 중국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 이들은 중국의 고전 서적을 즐겨 읽었으며,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투호바둑, 장기 등의 오락을 즐겼다.

7.2. 관직

제1품 좌평(佐平) 내신좌평(內臣佐平) / 내두좌평(內頭佐平) / 내법좌평(內法佐平) /
위사좌평(衛士佐平) / 조정좌평(朝廷佐平) / 병관좌평(兵官佐平) 佐平 계열
제2품 달솔(達率) 북사에 따르면 정원은 총 30명이었다고 한다. 率 계열
제3품 은솔(恩率) 率 계열
제4품 덕솔(德率) 率 계열
제5품 한솔(扞率) 率 계열
제6품 나솔(奈率) 나솔까지가 관(冠)을 은화장식했다고 한다. 率 계열
제7품 장덕(將德) 德 계열
제8품 시덕(施德) 德 계열
제9품 고덕(固德) 德 계열
제10품 계덕 (季德) 德 계열
제11품 대덕(對德) 德 계열
제12품 문독(文督) 武名 계열
제13품 무독(武督) 武名 계열
제14품 좌군(佐軍) 武名 계열
제15품 진무(振武) 武名 계열
제16품 극우(克虞) 武名 계열

좌평 및 '솔' 계열, '덕' 계열, '무명' 계열은 각각 자색, 비색, 청색 공복을 입었다.

7.3.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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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군기[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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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행정 구역이 바로 군사 제도의 형태의 군사 행정 제도 체제였다. 따라서 행정 체제가 군사 편제라고 볼 수 있다. 중앙은 달솔이 지휘하고 지방인 방은 방령이 지휘관을 맡았다. 즉 좌평 혹은 지휘관 -> 달솔 -> 방령 체제였는지는 애매한 편이다.

백제에 싸울아비 - 무절이라는 조직이 있었다는 주장을 하지만 싸울아비라는 말 자체가 20세기에 튀어나온 용어이며 무절이라는 용어도 위서의 용어이기에 백제에 고구려와 같은 경당(扃堂) 체제가 있었는가 여부는 불분명하다. 백제도 고대 국가들처럼 기병 - 보병 - 궁수의 병과 체제로 있었고 주력이자 정예병은 기병이었을 가능성이 크나 상대적으로 영토가 목축 지대가 아닌 지역인 경기 - 충청 - 전라도에 분포해 있었기에 기병보다는 보병이 주력이었을 확률이 매우 크다. 이는 훗날 후백제의 사례에서도 유사하게 볼 수 있다. 백제도 북방에서 내려와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찰갑을 보편적으로 이용하는 형태였다. 물론 한반도 남부의 보편화된 갑옷이었던 판갑도 나오며, 고구려와 다르게 혼용으로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 아래 길이가 크게 비대칭인 일본활(유미)과 비슷한 형태의 목궁으 출토되었으며 북방계 민족들의 영향을 받기 전까지 한반도에서도 목궁을 이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백제의 활 형태가 일본과의 교류 과정에서 일본 활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는 주장도 있지만,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

백제군의 총 병력은 확인되기 어려우나 최대 3만명 규모까지 원정에 동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성기인 근초고왕 시절과 중흥을 이끈 백제 성왕 시절의 동원 능력을 보면 3만명 규모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산성 전투 당시 성왕이 이끌던 병력은 29600명에 좌평 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략적으로 계산하면 좌평 4명이서 29600명이니 29600 / 4 = 7400명이므로, 6좌평이 거느린 총 병력은 44400명이 된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치일 뿐이며, 좌평들이 모두 동일한 병력을 거느렸을 리도 없고, 예비대도 존재했을 것이므로 백제군의 총 병력이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대중들에겐 백제가 "해상 왕국"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데, 백제의 수군 역시 그 규모가 명확하지 않으며, 백제가 강력한 해상 통제력을 발휘했다고 뒷받침할만한 사료는 부족한 편이다. 백제의 수군과 관련된 기록은 남제서에 나오는 "목간나가 침략군의 선박을 깨뜨렸다."라는 구절 하나 뿐인데, 이는 백제에 수군이 존재했다는 근거가 될 뿐, 수군이 강력했다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하지만 동남아와 중국 그리고 일본과의 적극적인 교역을 해왔던 점을 감안하면 나름의 해상력을 확보하는 수준의 수군을 운영했던 것으로 보이나 점차 쇠퇴한 형태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고구려에 의해 서해의 해상 통제권의 영향을 받았던 점이나 백제 멸망 때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을 방어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점을 기인해본다면 그러할 것이다.[34]

7.4. 언어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초기 고구려계 유이민들의 영향으로 부여계 언어를 썼을 것이고, 호남 지역으로까지 영토가 넓어지자 호남 지방에서 주로 쓰이던 마한어까지 혼용되어 후대로 갈수록 마한계 언어적 성향이 짙어졌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일단 백제 존속 시기에 성립한 중국의 문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대략 같다.
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梁書 卷54 「列傳」48 '諸夷'

중국의 사서인 주서(周書)에 의하면, 백제의 귀족들은 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불렀고 백성들은 건길지(鞬吉支)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것을 이유로 백제의 지배층들은 부여계 언어를 사용했고 백성들은 한(韓)계 언어를 사용했으므로, 백제는 지배층들과 백성들의 언어가 서로 달랐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 신하들은 왕을 주상, 전하로 불렀고 백성들은 나랏님, 임금님으로 불렀으므로 왕을 일컫는 어휘만 보고 언어가 다르다고 속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백제인들의 인명, 백제의 지명을 통해 백제어를 유추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명으로 그 나라의 언어를 연구하는 것에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학자들이 많다.[35]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백제 목간이 발견되어 학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 중 향찰 표기가 눈에 띄는데 백제의 향찰 표기가 신라보다도 이른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7.5. 연호

백제는 일반적으로 연호를 써서 년도를 표기하던 다른 국가들과 달리 60갑자로 연호를 표기했다. 《한원(翰苑)》에서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에서 "연도를 기록할 때 따로 연호를 쓰지 않고 60갑자로만 차례를 삼는다[其紀年, 無別號, 但數六甲爲次第]"라는 기록이 남아있고 후에 발견된 사택지적비도 "甲寅年正月"로 60갑자가 사용되었다.
다만 칠지도의 "태화" 연호에 대해 근초고왕의 연호가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설, 동진의 연호라는 설 등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7.6. 종교, 문화, 역사

일찍부터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 유학이 발전하였으며 고흥이《서기》를 편찬했다. 또한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백제기》,《백제본기》, 《백제신찬》등의 역사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이 백제기, 백제 본기, 백제 신찬 등의 기록을 많이 참고했을거라는 설이 있으며 이 서적들은 현재는 현존하지 않는다. 왕인을 왜에 파견하여 천자문논어를 전수했고, 무령왕 대에는 오경 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성왕 대에는 오경 박사 왕유귀(王柳貴)를 왜에 파견하여 왜가 유학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백제 불교는 침류왕 시기인 384년에 서역승 마라난타가 동진으로부터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듬해 침류왕은 한산에 불사를 이룩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하였다. 성왕 이후 백제에서는 많은 승려와 예술가들을 일본에 보내 일본의 불교 문화 융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불교 사상에 심취한 법왕은 불교 사상에 따라 생물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는 방생을 명령하였다. 민간에서 기르던 를 야생에 풀어주고, 고기 잡이와 사냥을 하는 도구들을 불태우도록 했다.

백제 불교는 계율 연구가 활발했다. 백제 승려 겸익은 대표적인 계율종 승려였다.

도교는 사비 도읍기에 성하여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의 상단 뚜껑 쪽에 새겨진 문양은 주제가 신선이 살았다는 봉래산(蓬萊山)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익산 왕궁면 왕궁리에서 발굴된 원지는 우리 나라 고유의 산악 숭배와 더불어 신선 사상 및 도교 사상의 영향을 보여준다.

7.7.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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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나라, 아스카 시기 건축물에서 백제의 흔적을 찾을수 있으며 현대 한국에 남아있는 건축물들은 분묘나 석탑 종류에 불과하다. 백제의 건축은 절터, 탑, 고분[36] 등이 있다.

한성 백제 시대 고분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돌무지 무덤이 대표적이다. 돌무지 무덤은 고구려 초기 고분(졸본 부여 시기)과 유사한 양식이다. 웅진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공주시 송산리에 있는 여러 고분들[37]은 백제 중기를 대표하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후기의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 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백제 건축물들의 남은 터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대부분 상당히 장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찰이 건축된 기록이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주로 백제의 옛 도읍지였던 공주시, 부여군 일대에서 그나마 백제의 옛 흔적을 찾을수 있다. 무령왕릉이나 미륵사지가 대표적인 유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

7.8. 시가

작자·연대가 미상인, 백제 노래 정읍사악학궤범에 전해지며,능산리 고분 근처에서 발견된 목간에서 작자 미상의 시가가 발견되었다[38]. 고려사 <악지>에 제목만 등장하는 《지리산가》《무등산가》《방등산가》《선운산가》 등이 있다.

7.9. 예술

백제 시기의 그림 예술 역시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 관계로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없다. 다행히 백제 역시 고구려와 비슷하게 고분에 벽화를 그리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39] 천마도와 나머지 몇몇이 고작인 신라보다 남아있는 회화는 오히려 더 많다. 능산리 고분에는 연화문(연꽃 무늬), 운문(구름 무늬), 사신도를 그린 벽화가 있으며, 송산리 고분이 있다. 백제 시기에 이름이 알려진 화가로는 아좌태자, 하성 등이 있다.

백제의 음악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는 고·각·공후·쟁 등의 악기가 있었다고 하며, 5세기 ∼ 6세기에 중국 남송(남조 조송)과 북위의 기록에 백제의 음악이 소개된 것이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악사가 일본에서 음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7세기 초 백제 사람 미마지가 중국 오나라 음악을 배워서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유명하다.

서예 작품으로는 사륙변려문으로 쓰여진 사택지적비, 남조 대 전형적 해서체로 쓰여진 무령왕릉 지석 등이 있다.

조경 면에서는 도교식 인공 정원을 당나라로부터 수입하여, 무왕이 궁남지를 만들고, 백제인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비슷한 것을 만들어준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안압지도 여기서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8. 여담

삼국 중에서 제일 넓은 영토를 가졌고 중화에 반대하며 군사적으로 대단한 면모를 보인 고구려, 가장 긴 역사를 지니고 삼국 통일을 이루었던 신라에 비해 관심도가 조금 떨어지는 편이며, 사료마저도 삼국 중 가장 부족하다. 고조선, 발해와 함께 사료가 매우 부족한 왕조 탑3로 꼽힐 정도다. 심지어는 대한민국 해군군함명에도 백제인의 이름은 한 명도 없다. 차별임?

고구려에 비해 작은 영토로 상당한 국력을 보여준 것을 단순히 충청·전라도 지방의 비옥한 평야의 힘으로만 볼 수는 없다.[40] 전라도 지방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보면 백제가 한창 잘나가던 시기에도 호남 지방에는 독자적인 마한 호족의 힘이 강했다. 오히려 5세기 후반에는 동쪽 대가야 계통 유물이 호남으로 침투하는 양상도 보인다. 백제가 전라도 지방과 강하게 유착되는 것은 고구려에 밀려 수도를 남쪽으로 옮기고 재정비한 후다.[41]

백제의 국력은 바다의 세력이 크게 뒷받침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자료가 너무 없어서 이것을 정확하게 재구하기는 힘들지만, 바다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 신라나 가야, 왜에 전파하는 대신 외교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다는 것은[42]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백제가 '해상 무역' 으로 발전했다는 것은 학계에서는 부정적으로 추측한다.[43] 도대체 백제가 뭘 사고 팔았는지에 대한 사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히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거나 하는 기록은 《삼국사기》나 중국 측 사서에 많이 보이지만, 그것도 그냥 '조공을 바쳤다'는 식이지 뭘 얼마나 바쳤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 이래서는 고구려나 신라보다 해상활동이 특별히 더 활발했는지 알 수 없고, 오히려 기록 적기로는 백제보다도 한 수 위인 가야가 원거리 해상교역활동에 대해서는 백제보다 사료가 훨씬 많을 지경이다.

또한 백제 지역의 고대 유적지 가운데 돌로 포장된 도로. 즉 상업용 도로가 발견된 예가 거의 없다는 것 역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즉 백제의 경제적 기반은 어디까지나 농업에 있었으며, 백제 문화제 같은 데에 가면 볼 수 있는 '해상 왕국'이라는 말도 중국의 문화를 바다를 통해 받아들이고 일본 등에 전해주었다는 의미에서라면 맞는 말이지만 '활발한 해상 교역' 어쩌고는 무리수.

생산력 면에서 고구려와 비교할 경우 백제 당시 전라도 지방의 호남 평야가 농경지로 개발되었다는 근거는 아직 없다. 고대에는 현대보다 바다가 더 높고 치수도안돼있어서 지금의 호남평야 대부분이 얕은 바다나 뻘 상태에 지금의 전주까지 해안선이 올라와있었다고 파악하고 있는데 이러면 백제가 딱히 평야가 주변국보다 넓다고 하기도 힘들다.고구려의 송화강 유역(부여), 두만강 유역(옥저)이 농경지로 괜찮았다는 기록에다 고구려와 중국의 농경 수준이 비슷했다는 기록(생산력이 비슷했다는게 아니라 농업기술)이 있다. 고구려에는 송화강 유역, 두만강 유역만 있는 것도 아니고 요하 유역과 대동강 유역의 농경지까지 있다.

이 나라에 대한 대표적인 논쟁거리로는 백제가 요서 지역에 영토를 두었다는 요서경략설이 있는데, 이는 송서 등 중국 사서의 기록을 주된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 설은 당시 요서를 관장하던 북조계 사서에 전혀 기록이 없고, [44] 이 지역에서 백제 계통이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심받고 있다. 백제가 아닌 어떤 세력(그러니까 낙랑이나 부여)의 진출 내지 다른 세력을 백제로 오기하며 빚어진 것으로 보는 학계도 있다.[45] 위의 인구 기록이나 식민 사관, 승자의 왜곡된 기록이라는 역사의 특성을 살펴볼 때 실제로 백제가 현재의 중국 대륙인 요서 지방을 영토로 포함라고 있었거나 / 강한 해상력을 통해 일시적으로 요서 지방을 통치했었거나 / 경략이라기보다는 후대의 청해진 활동 수준에 그쳤다는 3가지 중 하나를 취사 선택, 연구해야 할 것이다.

백제는 국토의 전 지역을 전제 왕권으로 다스리지 않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는 고구려나 신라 등도 다 마찬가지이지만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로 한강 유역을 잃은 시기 전후로 이런 현상이 유난히 심했다. 물론 가야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았고 이것을 단순히 국론 분열로만 보면 안된다. 어차피 과거 삼국 시대의 국가들은 죄다 여러 세력의 연합체였고, 그 연합도 매우 느슨했다. 그니까 원래 국론이 분열되어 있는 나라들인 것이다. 반란이 일어나 왕이 시해되는 것은 세력 간 조율이 잘 안 된 결과인 것이지, 단순히 신하가 왕을 시해했다고 보면 안 되는 것이다.

사실상 삼국 시대의 왕들은, 조선 왕조의 왕 같은 게 아니라, 여러 세력 집단의 대표자 정도의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게 낫다.[46][47] 따라서 각 세력은 자기 세력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며, 오늘날과 같은 민족 국가 개념과는 좀 달랐다. 백제에 있던 세력이 백제가 마음에 안 들거나 일이 잘 안 풀리면 일본으로 건너갈 수도 있고, 중국으로 건너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걸 오늘날 감각으로 반역이나 배신 같은 걸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니 서로 협력하는 것이 가장 좋기는 하다.

의자왕이 패배한 후에도 백제 전토가 제압되지 않고 계속 당과 신라와 전쟁을 벌인 것도 의자왕이 여러 세력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이후 더이상 백제가 부흥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각 세력은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중국이나 신라로 소속을 옮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와의 연합은 생각보다 꽤 빨리 이뤄진 편. 당군이 옛 백제 지역에서 벌인 패악질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며, 백제 유민들은 이에 저항하려면 신라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일본과는 그냥 친한 정도가 아니라 혈맹 관계로 역사 관련 창작물 등에 떡밥을 많이 뿌린 국가다. 특히 그 중에서도 백제 부흥 운동 당시 일본의 파격적인 부흥 운동 세력 지원은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진다. 사이메이 천황이 661년에 급서했는데 황태자였던 나카노오에 태자가 즉위식도 미뤄가면서 부흥 운동 지원에 전력을 다했을 정도였다. 이 당시 일본이 백제 부흥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한 병력의 규모는 자그마치 400척[48]에 4만 2천명의 병력을 지원했다.[49] 하지만 당시 동아시아에서 비교적 깡촌이였던 일본의 400척 대함대가 당시 전세계 최강이였던 당나라 군대 170척에게 백강 전투에서 궤멸당했다. 전투 결과는 비록 일본 함대의 참패로 끝났지만 이런 파격적인 지원은 당시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 관계였는지를 알려준다. 오늘날의 한일 관계와 비교해본다면 천지 차이. 이게 왜곡되어서 일본은 백제 꼬봉이라서 일본이 그렇게 정성껏 지원해준거라거나, 일본이 백제 정권을 막후에서 주도하던 종주국이었다는 과장된 주장이 보이기도 한다.

어쨋든간에 백제와 일본의 혈맹 관계는 매우 친밀하여 관서 지역(특히 오사카)에는 지명 이름부터 해서 백제라는 이름이 정말 많이 남아 있으며 잘 찾아보면 그 외에도 백제에서 넘어간 것으로 추측되는 문물이 매우 많다.

최근 들어 심상치 않은 내용을 담은 백제의 목간들이 계속 발굴되고 있어서 학계에 자잘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고침> 문화(<"가장 오랜 향찰 표기는 백제의 '돼지'">)

"백제 향찰 표기 신라보다 한세기 앞서"

"계양 산성 논어 목간은 400년대 백제 작품"

나주 복암리 목간, 백제 지방관 동향 보고 문서?

7세기 백제 시대 목간 28점 공개

백제에 일반 쌀 아닌 특정 품종 있었다… 부여 구아리 유적터 발굴 목간 내용 공개

일본, 신라 금속 공예술의 기원이 백제라는 증거도 발견되었다.

60년만에 나온 답은 백제였다.

예전부터 지역주의자들이 경상도 신라 놈, 전라도 백제 놈 운운하면서 서로 싸우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심지어 경상도 내에선 경상남도를 보고 가야 놈이라고 하고 경상북도 보고 신라 놈이라고 나눠서 서로 지역 드립치기도 한다. 특히 김해 쪽 경우 건국 설화까지 얽혀있다 보니 더 가야색이 짙다. 다만 이 드립의 경우 백제 드립만큼 험악하게 심하지는 않고 웃자는 것에 가까운 드립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사실 삼국시대 때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개념이 없었다. 즉 고대 국가를 현대의 행정 구역에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금산논산의 행정구역 일부도 따지고 보면 1963년의 행정 구역 개편 전에는 전라북도 소속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백제의 수도는 서울 - 공주 - 부여로, 서울특별시 -충청남도 중부 - 충청남도 남부였다. 물론 충남 부여군은 전라북도 익산시와 맞닿아 있고, 충남 남부와 전북은 백두대간으로 막힌 영호남과는 달리 평지로 연결되어 밀접한 관계에 있다. 충청도만 백제라는 인식도 상당히 무리한 게, 백제 역사의 시작점인 초 중기에는 마한 일부 지방인 경기도와 황해도, 충청도 북부 절반 지역에 국한되었으며, 나머지 충청 전라 지역에는 4세기 넘게 목지국을 비롯한 다른 마한 세력들이 공존했다. 백제국이 전라남도 지역까지 완전히 장악하는 데는 오랜 전투를 통한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걸렸고, 그 후에도 전남에 소재한 지방 세력은 백제에 상당히 배타적인 지역이었다. 물론 전라도가 백제에게 중요한 지역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으나,[50] 마한 주도권을 기반으로 한 백제의 영토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위, 즉 황해도까지 뻗어있었다.

백제 = 전라도 인식은 전라도에 거점을 둔 후백제에 의해 생긴 게 아니라, 근대 와서 생긴 지역 감정에서 현대 한국 대중 중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가 본디부터 제각기 다른 역사적 실체였을 거란 망상이 대두한 게 원인이다. 애초에 백제의 남진 이전에는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동부가 변한 -가야의 영역으로 서로 같은 공동체였다. 백제의 영역은 700여년이라는 세월에서 500여년간 마한의 일부 지역인 경기도 + 충청도 + 전북(익산 등)에 머물렀고 나머지 마한 지역인 전라남도까지 완전히 통합시킨 건 200여년 남짓. 게다가 충청북도 전체는 장수왕 이후엔 아예 고구려의 강역이었고, 진흥왕의 신라가 이 지역을 고구려에게서 탈취한 후론 백제는 의자왕이 일부 수복한 예를 제외하면 신라에게서 빼앗아오질 못했다. 그러니까 지역 감정을 머나먼 고대까지 끌어올리는건 무리수. 사실 고려 이전에는 전라도, 경상도 개념이 아예 없었다. 통일 신라 행정 구역만 봐도 전라도 경상도는 없다. 차라리 남북 갈등이라면 모를까. 지역 감정의 경우 '만들어진 현실'을 비롯한 사회학적 연구 성과들이 나와있으니 관심있는 분은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그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백제 유민 의식의 실체에 대해, 조선 시대의 행정 관념인 전라도란 개념을 소급해서 적용하는 이상한 견해가 있으나 역사적으로 진지한 분석의 대상이 될 순 없다. 노령산맥 이남의 전라도 지역은 약 800년간 마한으로 존재했다가 백제 치하에서 130년간 지낸 후 약 10년간 당나라의 통치를 거쳐 신라 치하에서 230년을 지내고 후삼국시대 36년을 거쳐 고려로 귀속되었다고 하지만, 마한 800년 동안 정말로 그 전체 지역이 전부 다 마한이었다고 볼 순 없으며, 신라 치하에서 230년을 있었다고 하지만 신라는 후백제 건국 이전에도 실효 지배력을 잃어버린 시기가 있었으며 오히려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건 그렇게 오랫동안 지배했는데도 국가 정체성을 불식시키지 못한 신라의 한계다. 또한 그렇게 따지면 충청도는 어떠한가? 아예 한성 백제가 멸망하는 시기에 충청북도 상당수는 고구려 영역이었고 진흥왕 대에 이후로는 아예 내내 신라 영토였으며 오히려 후백제에 와서야 백제의 강역이 되는데, 그러면 그걸 갖고 충청도 지역 전체로 소급해서 충청도에서 백제 유민 의식이 없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가 않다.

또한 특이한 건, 백제는 무장들 사이의 알력이나 견제가 생각만큼 가장 심했던 곳으로 군인에 대한 대접이 썩 좋지 못했다는 점이다. 무장들간에 알력은 본시 8성씨 귀족들은 각기마다 창칼을 꽤 잘다루는 귀족들이 많았으며, 무장들의 숙청은 왕조차도 신라와 고구려와 달리 백제는 제일 먼저 해구 연신의 난같은 무장 반란을 겪은 통해 무장들의 견제도 필요했는데, 성주 무인들이 터트린 간주리의 난과 귀족 무인들이 터트린 비담의 난 전에 해구 연신의 난이 터진 이후 무장들의 견제가 심해졌는데,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몇십여성을 차지하자 그때 무인들은 《삼국사기》에 흔적이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더욱이 백제 지역은 곡창 지대가 즐비했는데, 정작 백제의 마지막 전투에서 군량미의 지급이 바닥났다는 이야기가 들리는 것을 보니 군량미를 지급할 제도를 안만들 정도로 군인들에 대한 처우는 신라보다는 백제가 더 심각했다. 승려들이 무인들보다 더 대접을 받고, 무력을 기반으로 하는 8성씨 귀족들간의 알력과 군량미를 마련할 둔전 같은 것도 없었고, 특히나 귀족들에게 있어서 군량미에도 쓰일 쌀까지 절간에 내놓지 않으면 몰락했던 것과 중간중간 시행되는 무리한 왕권 강화가 큰 원인이었다. 그래서인지 무장과 군인에 대한 이야기는 고구려나 신라에 주로 쏠려있다. 백제를 좋아하는 측도 무리한 왕권 강화를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자칫 전란 중에 왕권 강화를 하게 될 경우 바깥에서 싸우는 귀족들도 숙청당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의자왕의 왕권 강화는 굉장히 시기상조라고 했다.

9. 왕사

10. 인물

시대순 정렬. 이름순에 따른 일람은 백제/인물 문서 참고.
  • 1세기
    • 비류 ( ? ~ ? )
    • 소서노 ( 기원전 66년 ~ 기원전 6년)
    • 오간 ( ? ~ ? )
      개국 공신. 온조왕이 남하할 때 동행한 십제 공신 중 한 명.
    • 마려 ( ? ~ ? )
      개국 공신. 온조왕이 남하할 때 동행한 십제 공신 중 한 명.
    • 흘우 (? ~ 48년)
    • 진회 ( ? ~ ? )
      다루왕 때의 대신. 8개의 힘있는 성씨인 대성팔족 중의 하나인 진(眞)씨 출신. 진씨 중 가장 처음 나오는 인물. 흘우가 좌보가 되자 그가 우보를 이어받든다.
  • 2세기
    • 부여질 ( ? ~ ? )
      왕족. 기루왕의 아들.
    • 길선 ( ? ~ ? )
      신라 귀족으로, 아찬을 지냈다. 155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백제로 망명한 것을 개루왕이 받아줘 대접해줬다. 이 일에 대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배신할 지도 모르는 길선을 받은 개루왕이 어리석다고 비난했다. 실제로 다음 백제 왕인 초고왕 시기에는 길선의 송환 문제로 신라와 백제는 감정의 골이 파이기 시작했고, 신라가 백제를 쳐서 많은 인명 피해가 나기도 했다.
  • 3세기
    • 보과 부인 ( ? ~ ? )
      책계왕의 왕비. 대방군(帶方郡) 태수의 딸.
  • 4세기
    • 우복 ( ? ~ 327년)
      비류왕의 배다른 동생. 321년에 내신 좌평에 임명되었으나 결국 327년 북한산성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토벌되었다.
    • 목라근자 ( ? ~ ? )
    • 막고해 ( ? ~ ? )
      371년에 있었던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등장. 백제에 패배한 고구려 고국원왕이 도망가자 "뒤쫓지 마시고 여기서 만족하며 돌아가죠"라는 뜻으로 도덕경을 인용한다. 백제가 도교가 전파되었던 국가임을 알 수 있는 근거 중 하나.
    • 고흥 ( ? ~ ? )
    • 아직기 ( ? ~ ? )
      학자. 일본에 처음 말을 전파하고,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된다. 후에 왕인을 추천하여 왕인이 일본으로 오게 된다.
    • 왕인 ( ? ~ ? )
  • 5세기
    • 도미 ( ? ~ ? )
      도미설화의 주인공.
    • 도림 ( ? ~ ? )
    • 재증걸루 ( ? ~ ? )
      고구려의 장군. 실은 백제 귀족으로, 고구려에 망명을 했다. 장수왕의 명령으로 백제를 침략하여 개로왕을 잡은 뒤 먼저 절을 한 후 다시 얼굴에 침을 뱉고 목을 배었다고 한다.
    • 고이만년 ( ? ~ ? )
      고구려의 장군. 실은 백제 귀족으로, 재증걸루와 같이 행동했다.
    • 목협만치 ( ? ~ ? )
      목례만치라고도 불린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것은 개로왕이 죽은 뒤 조미걸취와 함께 태자 문주를 모시고 남으로 피난간다. 그리고는 문주를 문주왕으로 옹립하여 웅진 시대를 연다. 그리고는 기록이 없다.
    • 해구 ( ? ~ 478년)
      문신. 병관 좌평.(최고위 관직인 좌평의 하나로, 군사 업무 관장) 해(解)씨는 8개의 힘있는 성씨인 대성팔족 중의 하나. 해구는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권력자였다. 왕이었던 문주왕을 살해했을 정도. 이후 삼근왕을 옹립하였고, 훗날 478년에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관광 당해 처형당했다.
    • 곤지 ( ? ~ ? )
      왕족. 문주왕의 동생이며, 내신 좌평(왕명의 출납을 관장)이었지만 해구에게 살해당했다.
    • 진남 ( ? ~ ? )
      좌평. 진로와 함께 해구의 반란을 진압했다. 진로와 함께 대성팔족 하나인 진(眞)씨 출신 귀족.
    • 진로 ( ? ~ 497년)
      병관 좌평. 진남이 왕명으로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해구를 진압하려 갔지만 이기지 못하자 진로가 5백명으로 해구를 제압한다. 원래 덕솔(4등급)이었으나 해구의 반란을 진압하고 482년에 병관 좌평까지 올라갔다.
    • 연신 ( ? ~ ? )
      은솔(3등급). 대성팔족(大姓八族) 중의 하나인 연(燕)씨. 해구가 문주왕을 살해한 이후부터 쭉 국정을 맡다가 해구와 같이 반란을 일으킨다. 해구가 잡혀 죽자 혼자 고구려로 도망갔지만, 가족들은 잡혀서 웅진 시장에서 처형당했다.
  • 6세기
    • 겸익 ( ? ~ ? )
      승려. 성왕 시기인 531년에 인도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
    • 노리사치계 ( ? ~ ? )
      달솔. 승려. 백제 성왕 시기인 552년에 일본에 불교 전파해준 인물이다. 《일본서기》에만 등장.
    • 아좌태자 ( ? ~ ? )
    • 금강중광 ( ? ~ ? )
      578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593년에 시텐노지를 세운 세 명의 목수 중 하나. 그의 자손들은 곤고구미를 세워 대대손손 시텐노지를 보수한다.
  • 7세기
    • 선화공주 ( ? ~ ? )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자 무왕의 왕비인 동시에 서동설화의 히로인. 그러나 미륵사에서 발견된 기록 때문에 실존했다는 것이 의문시되는 상황이다. 실존했다는 설에 의하면 무왕의 첫째 부인이다.
    • 사택적덕 ( ? ~ ? )
      좌평. 사택왕후의 아버지. 미륵사 탑의 기록에서 나온 인물.
    • 사택왕후 ( ? ~ ? )
      사택적덕의 딸로, 무왕의 왕비. 《일본서기》에는 의자왕의 어머니가 642년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택 왕후가 의자왕의 어머니라는 가정을 하면 642년에 죽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미륵사 관련 기록 때문에 선화 공주에 이은 두번째 부인이라는 추정이 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사택 왕후가 실존한 것은 사실이다. 미륵사 탑의 기록에서 나온 인물.
    • 사택지적 ( ? ~ ? )
      대좌평. 642년 일본에 갔다 왔으며, 654년에 은퇴. 642년의 일본 방문이 의자왕이 부여교기를 쫓아낸 것과 관계가 있다는 추측이 존재.관련링크. 말년에 사택지적비를 세운 인물.
    • 부여교기 ( ? ~ ? )
      의자왕의 동생. 642년에 (누군지는 정확히는 몰라도) 아버지 무왕의 왕비가 죽자 의자왕은 부여교기와 그를 따르던 신하 40여명을 일본으로 추방한다. 일설에 의하면 부흥군의 풍왕이 이 부여교기였다는 말이 있다.
    • 성충 ( ? ~ 656년)
      문신. 상좌평. 성은 부여. 일명 정충. 백제 3충신.
    • 윤충 ( ? ~ ? )
      장군. 642년 신라의 대야성 등을 빼앗음.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를 살해. 그가 부여씨이며, 성충의 동생이라는 것과 누명을 쓰고 파직되어 홧병으로 죽었다는 것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만 나오는 기록이다.
    • 아비지 ( ? ~ ? )
      건축 엔지니어. 645년에 신라로 건너가서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설했다.
    • 의직 ( ? ~ 660년 )
      백제의 장군. 의자왕 시기인 647년에 신라를 쳐서 전공을 세우다가 희대의 먼치킨 김유신과 붙어서 패배한다. 이듬해인 648년에 신라를 쳐서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으나 옥문곡으로 진격하다가 김유신에게 또 걸려서 대패하였다. 김유신이 백제 장수 8명을 사로잡자 김춘추는 이들과 자신의 딸과 사위의 유골을 교환하였다. 훗날 좌평이 되어 660년에 나당 연합군과 기벌포에서 2만명을 이끌고 싸우다가 소정방의 13만에게 패해 전사하였다. 운이 좀 부족했던 인물...(...)
    • 흥수 ( ? ~ ? )
      문신. 성충과 함께 의자왕에게 정신 좀 차리라고 하다가 유배. 백제 3충신.
    • 계백 (612년 ~ 660년)
    • 예식진 (615년 ~ 672년)
      장군. 의자왕을 당나라에 바친 매국노.
    • 풍왕 ( ? ~ ? )
    • 도침 ( ? ~ 661년)
      승려. 부흥군이었으나 복신에게 제거당했다.
    • 복신 ( ? ~ 663년)
      왕족. 성은 부여. 부흥군으로 유명하나, 도침과 반목하다가 도침을 죽인다. 결국은 풍왕까지 제거하려다 역관광 당하고 잡혀서 목이 베인다. 의외로 풍왕이 믿고 의지했었는지 복신의 처형을 망설였다는 기록이 있다.
    • 덕집득 (? ~ ?)
      달솔. 풍왕을 모시는 부흥군의 한 명. 복신이 풍왕을 죽이려다가 역으로 잡혔는데, 풍왕이 마음이 약해서 복신을 죽일지 망설이자 덕집득이 죽이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자 복신이 덕집득에게 침을 뱉고 "이 썩은 개 못난 노예 놈"이라고 욕을 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
    • 흑치상지 (630년 ~ 689년)
    • 충상 (? ~ ?)
      좌평. 김유신 열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로 황산벌에서 계백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20여명의 부하와 함께 항복하였다. 후에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나자 길앞잡이 노릇을 하며 출전하였다가 패배하였고 이로 인해 문책을 받았다.
    • 융왕 (615년 ~ 682년)
      왕족. 성은 부여. 웅진 도독으로 왕을 자처하나 실패로 끝났다.
    • 지수신 ( ? ~ ? )
      임존성의 부흥군. 배신한 흑치상지 등이 당나라 편에 붙어 공격해오자 포기하고 고구려로 망명갔다.
    • 사타상여 ( ? ~ ? )
      백제 부흥군에 속해 있었으나 흑치상지와 함께 부흥군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당나라에 붙었다.

11. 참고 문서

12. 백제를 소재로 한 작품

13. 둘러 보기

마한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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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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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운동

풍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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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국사기근초고왕 본기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겨울 11월, 한수 남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하였다.” 물론 여기서 황색 깃발이 단순 의장기인지 왕실의 상징인지 백제의 국기인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다.[2] 다만 최근의 연구결과 전라도 지역은 당시 마한이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 이 지도 내용도 수정이 필요한 상황. 이에 대해 일본서기영산강 유역의 침미다례를 백제에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백제가 근초고왕시기부터 이 지역을 간접 지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가 문헌사학계의 대세이다.[3] 다만 건국년도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건국" 문단 참조.[음력] 7월 18일[음력] 9월 8일[6] 멸망 직후 백제부흥운동, 웅진도독부, 보덕국이 들어섰다 신라로 정립된다.[7] , 건국 초기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응준(鷹準)/나투(羅鬪) 등으로도 불렸다.[8] 성왕 시기 사비 천도 후에 '남부여'로 국호를 변경했으나 이 명칭은 성왕 대에 잠시 사용했기 때문에 공식 명칭으로 부르기는 좀 애매하다. 더구나 보통 제대로된 국호에는 방위명을 붙이지 않는다는 점. 부여와 백제의 연계성, 외교 활동에서의 사용 빈도 등으로 미루어, 공식 국호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남부여'라는 국호는 일시적인 이벤트성이 짙은 것으로 보인다.[9] 전라도는 간접통치 지역인가 별도의 독립 세력인가를 놓고 의견이 갈린다[10] 5세기 후반에 황해남도 동남부와 한강 유역, 영서 지역 등을 상실한다.[11] ~ 475년. 하남 위례성(혹은 한성)에 해당하는 지역은 풍납토성몽촌토성 그리고 석촌동 고분군이 있는 오늘날의 서울 송파구 일대에 해당한다. 풍납토성 성벽 아래에서는 삼중환호가 확인되어 성벽 축조 이전부터 해당지역에 어느 정도 세력을 가진 집단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12] 475년 ~ 538년[13] 538년 ~ 660년.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난 후의 반격에 대비하여 '한산'으로 옮기기도 했다. 현재의 경기도 광주 일대가 한성 백제의 수도 중 하나인 한산으로 유력시된다. 고려 시기에도 이 지역을 한산이라고 부른 기록이 나온다.[14] 다만 편차가 있기 때문에 정확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15] 일본 센고쿠 시대의 유력한 다이묘들 중의 하나인 오우치 가문이 백제 왕실의 후예를 자처하며 자기들 족보에 임성태자를 백제국 마한황제 제왕의 제2자라 기록하였다. 단, 오우치 가문 족보의 신뢰성 문제는 물론이고 그들이 백제 왕족의 후손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아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16] 오늘날 남아있는 그들의 후손은 부여 서씨, 의령 여(余)씨가 된다.[17]제왕운기》에 따르면 백제 말고도 응준(鷹準), 나투(羅鬪)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18] 신공황후 49년조[19] 369년은 일본 학계에서 백제가 칠지도를 일본에 보냈다고 주장하는 해이기도 하다.[20] 오해를 막기 위해 첨언하자면 이 주장이 백제가 충청 ~ 전라 지역을 차지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주장은 연대나 사실 관계 면에서 신뢰할 수 없는 기록이 실제 백제, 그 중에서도 근초고왕 한 명만이 '마한'을 정복하고 확장하는 과정에 대응할 수 없다고 보며, 아예 관련 기록이 후대에 정치적 목적에 따라 소급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고고학적 사실은 인정하되, 문헌의 사실성은 비판적으로 보는 것. 《일본서기》의 기초적인 신뢰도 자체가 굉장히 의심스럽기에 나올 수 있는 주장이다.[21] 일본서기는 이 지역이 독립 세력이면서도 한편으로 백제의 간접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22] 최성락,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와 백제에 의한 통합과정」, 『지방사와 지방문화』20-1, 2017 및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형성과정 연구』, 주류성, 2018[23] 마한의 마지막 조공 기사인 3세기 후반(《진서》 마한전 등)과 '마한' 영역이 완전히 백제에게 정복된 것으로 이견이 없는 6세기 중반 사이 시기에 '마한'이 사료에 뚜렷하게 등장하는 사례는 《송서》에서 야마토 정권이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 제군사'로 책봉을 요구해 백제만 빼고 받은 사례가 유일하다. 그러나 《송서》 열전에서는 이전과 이후의 사서들과 달리 한반도와 일본 열도 여러 국가의 내부 사정에 대한 기사 없이 책봉 기사만 기록하고 있어 책봉을 받은 당사국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전혀 없다. 또한 무엇보다도 저 기사는 소위 임나일본부설 문제에서 언급된지 오래되어, 한국에서의 연구를 통해 야마토 정권이 뻥카를 던지며 외교를 한 흔적일 뿐 실제 한반도 남부의 사정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는 반박이 이미 자리잡았다. 다시 말해 사실로 믿을 수 없는 기사에만 '마한'의 이름이 잔존해 있는 것이다.[24] 영산강 일대에는 6세기까지 거대한 항아리를 무덤으로 사용하는 문화를 가진 재지 세력이 존재했음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이들이 백제의 영향력 하에 놓인 반독립 세력인지 백제와 별도의 독립 세력인지는 의견이 나뉜다. 그와 별개로 섬진강 유역 일대는 무령왕 이전까지 별도의 세력으로 본다.[25] 단,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고학계의 입장이다. 문헌사학계의 입장과는 차이를 보인다.[26] 일본에서는 이들을 건너온 사람들이란 의미인 도래인이라 표기한다. 한반도 입장에서는 이들은 일본 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이므로 도왜인이라고 표기할 수도 있다.[27] 다만 이들이 인질이었는지 아니면 백제 - 야마토(왜)간의 외교 대사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야마토 조정에 백제계를 대표하는 존재였는지는 여전히 학계의 논란거리다.[28] 백제 제25대 무령왕(501∼523 재위)이 왕도(王都)였던 곰나루(웅진, 공주) 지역에서 ‘백제대빈’을 치렀다는 사실이 1971년 출토된 무령왕의 ‘묘지명’을 통해 입증되었다. 백제 왕실의 성대한 장례 의식을 에서도 똑같이 거행했다는 것은 당시 나라 땅에 거주하던 백제계 세력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음을 추찰케 한다.[29] 노중국 교수도 당시 '백제의 국서 강탈 사건'을 왜의 독자적인 대중국 외교정책에 대한 백제측의 불만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노중국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593년부터 603년까지 왜와 백제는 긴밀한 관계를 추구하였으나. 603년 이후 614년 사이에(실제로 일본서기에서도 602년 10월에서 615년 사이에 약 12년 동안 백제와 의 외교관계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변화가 나타난다는 점, 당시 성덕태자의 관위와 憲法 시행과 朝禮 개정 등의 일련의 정책, 607년 수에 전해진 왜왕의 국서에 ‘日出處天子’라고 했듯이 왜가 독자성을 강조한 점 등을 지적하면서 (다만, 日出處天子은 당시 고구려 승려 혜자가 쇼토쿠태자의 스승으로 자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고려해 고구려의 의도가 반영된 표현이었다는 입장이 만만치 않다), 국서탈취 사건은 왜가 선진문물을 직접 받아들이기 위해 대수접근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이에 수도 사신을 파견하는 등 호응하는 상황에서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한 백제가 양국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의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30] 백제어의 수사(數詞)와 관련하여 미륵사지 목간에는 5-刀士邑도사읍(다섭,다섯), 7-日古邑일고읍(일곱), 8-今毛邑금모읍(훈독 이털읍,여덟),矣毛邑, 新台邑이라는 기록이 있다.[31] 왕의 이름자는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데, 이룰 성(成)이 너무 자주 사용되는 한자라 스스로 '이단(李旦)'으로 개명하였다.[32] 제2품. 좌평보다 한 단계 낮은 관직.[33]삼국사기근초고왕 본기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겨울 11월, 한수 남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하였다.” 물론 여기서 황색 깃발이 단순 의장기인지 왕실의 상징인지 백제의 국기인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다.[34] 물론 사료 부족이 커서 명확하지는 않다.[35] 지명이 가진 특성 중 하나가 바로 보수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외국의 사례만 봐도 런던(London)은 고대 로마 시기의 론디니움(Londinium)에서 파생되었으며, 중동 지역의 많은 오래된 도시들의 지명이 옛날 지명을 그대로 따서 쓰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반도 중부의 고구려 지명들은 오히려 기존 마한 토착 세력들이 쓰던 지명을 그대로 썼을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이유로 지명을 가지고 고대 언어를 연구하는 것에 회의감을 나타내는 학자들이 많다.[36] 백제의 장례 양식은 독특한 측면이 있는데, 시체를 한 번 가매장한 다음 일정한 기간이 지난 다음 파내며, 그 를 깨끗하게 씻고 장례 의식을 행한 뒤 다시 매장하는 복장 형식이었다.[37] 무령왕릉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대부분 도굴됐다.[38]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0024876[39] 그러나 고구려에 비해 벽화의 수는 훨씬 적다.[40] 하지만 지리적 조건에 기반한, 삼국 중 백제의 국력을 가장 높게 보았던 다산 선생의 평가 역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워낙 땅이 땅이다 보니 비옥하면서도 광활한 경작지가 별로 없었고, 신라 역시 경상도 일대 만을 점유하고 있던 시절에는 낙동강 중상류의 분지 및 하류의 김해 평야를 제외하고는 산투성이였으니…[41] 정확하게는 동성왕 시기다. 동성왕은 제주도까지 통일했다는 학설이 존재할 정도로 남부 지역의 정리에 성공한다. 무령왕 시기의 중흥은 이런 바탕 속에서 가능했다. 중국으로 치자면 남북조 시대가 되면서 장강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전까지 중국의 중심은 황하 유역으로 그외에는 오랑캐 취급받았다. 춘추 전국 시대의 오, 월, 초가 괜히 촌놈 소리 들은 것이 아니다. 물론 계속 조용했던건 아니고 동성왕 이후에도 자잘한 충돌이 있었다.[42] '선진 문물 줄 테니 군사를 빌려다오' 하는 식. 특히나 왜와 이런 거래를 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43] 물론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도 있겠지만, 공주 대학교의 정재윤 교수와 이남석 교수 등 현재 국내에서 백제사 연구를 주도한다고 할 수 있는 학자들은 부정적으로 보고있다.[44] 북조계 자료는 충공깽이라 적혀있는 것도 왜곡되거나 믿기 어렵다는게 문제.[45] 이런 설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시기 정도 되면 낙랑이고 부여고 다 망한 이후라는 것이지만…[46] 참고지만 한민족이 세운 국가는 보통 왕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때가 꽤 적은 편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보통 고서에 서술이 아주 안 좋은 왕이 그런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왕이다. 고구려는 중기까지 소노(消奴)·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이상 5부에서 왕과 왕비가 배출되었으며, 신라는 중기까지 국왕이 6부의 왕의 대표라는 노태돈의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고려의 경우에도 명군이라는 고려 현종거란의 침입 때 호족들로부터 굴욕을 당할 정도로 지방 호족들의 세가 막강했다.[47] 예외가 조선 왕조의 왕들로, 이 시대의 왕들은 말기를 제외하면, 제아무리 왕권이 미약해도 신하들이 감히 눈도 못 마주치고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고, 왕권이 절정에 달했던 태종 ~ 연산군 시기나, 숙종 ~ 정조 시기에는 왕의 말 한마디에 정승도 모가지되는 살벌한 상황까지 있었다. 심지어는 세도정치에도 초반에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세도 가문의 사람이 왕한테 무례하다고 디스당한 것 때문에, 트집잡힐까봐 무서워서 자살한 사례도 있었을 정도다. 그러나 이건 조선 왕조가 유난히 특이했을 뿐.[48] 기록에서는 1000척이라고 하지만 1000척은 과장으로 보이고, 실제로는 400척이라고 추정된다.[49] 시대와 총 인구의 차이를 감안해보면 훗날 임진왜란과 비견될 수도 있을 정도의 대병력이라고 볼 수 있다.[50] 그 증거로, 옛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의 금마, 왕궁 근처에는 백제 시대의 유적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다. 왕궁(王宮)은 아예 지명이 백제가 있던 시절에 이 지역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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