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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계왕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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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9대 국왕 책계왕 | 責稽王 | |||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 연대 미상[1] | ||
백제 | |||
사망 (음력) | 298년 9월 (향년 불명) | ||
백제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음력) | 백제 제9대 국왕 | ||
286년 11월 ~ 298년 9월 (1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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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왕 | 고이왕 | ||
왕후 | 보과부인[3] | ||
왕자 | 분서 | ||
왕호 | 책계왕(責稽王)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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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방은 우리 장인의 나라이다. 그 요청을 돕지 않을 수 없다.”
“帶方, 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대방의 구원 요청을 받은 후 남긴 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발췌
“帶方, 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대방의 구원 요청을 받은 후 남긴 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발췌
백제의 제9대 군주이자 건길지. 제8대 고이왕의 장남. 체구가 장대하고 키가 컸고, 의지가 굳세었다고 한다.
2. 생애
286년(책계왕 1), 허물어진 위례성을 수리했다. 이후 고구려의 서천왕이 대방군을 공격할 때 책계왕은 대방왕의 딸 보과를 아내로 삼은 상태였기 때문에 대방왕은 사위인 그에게 구원군을 요청했고, 책계왕은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가 맞붙은 첫 번째 기록으로 책계왕의 대방군 구원 때문에 백제는 고구려와의 사이가 나빠졌다. 책계왕 이전까지 백제는 부여와 고구려에서 분할되어 나온 나라였으므로 동류 의식이 있어서 직접 충돌은 자제해 왔는데 중국 한족(漢族)의 지배를 받는 낙랑군과 대방군이 예맥-한인(韓人)의 혼합계열 국가인 백제와 예맥계 국가인 고구려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으니 직접 충돌할 사안도 별로 없었다. 책계왕이 죽고 17년 후인 315년 미천왕이 낙랑군과 대방군을 멸망시키면서 고구려와 백제가 국경을 맞대게 되자 양국의 관계는 험악하게 변했는데 어쩌면 책계왕의 이 사건은 17년 후 고구려와 백제 관계의 프로토타입일 수 있다.287년(책계왕 2년), 음력 1월에 동명묘에 참배했다. 책계왕은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차성(阿且城)[4]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였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책계왕- 대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같은 해 <고구려본기> -서천왕- 대에는 기록이 없다. 그 해는 서천왕 17년으로 일우와 소발이 모반하였으므로 그런 여유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역사학자 이병도는 "당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낙랑이 개재(介在)하였으므로 이는 불가능하다"고 했고 "미천왕 15년에 대방군을 공격하였으므로 백제 비류왕 11년의 일이 옳은 이치"라 보았다. 그 외에 타국의 군사를 고구려의 군사로 착각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근데 사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예조'를 보면 강원도 지역의 동예가 늦어도 3세기 중반에 고구려에게 복속되어 있었으므로, 아마 고구려에게 복속된 강원도 지역을 통해 백제와의 접촉이 있었을 수 있다. 애초에 낙랑이 막아서 고구려와 백제가 접촉을 못하고 있었다면 백제와 똑같이 남쪽에 있는 대방은 어떻게 침공했겠는가.
十三年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爲敵兵所害薨
13년 가을 9월에 한(漢)이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막았으나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13년 가을 9월에 한(漢)이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막았으나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298년 한군(漢軍 : 낙랑의 군대)과 맥인(貊人 : 동예로 추정됨.)의 침입에 책계왕 본인이 친히 맞서 싸우다가 적병에게 피살되어 전사했다. 위의 기록에서 한군은 당시 중국의 서진 제국을 말하는데 중앙 정부 차원에서 백제를 침공했다기보다는 낙랑군 태수의 판단으로 추정되고 있다. 맥인은 고구려를 의미하는 단어로 많이 쓰였지만 이 시대 한사군이 고구려를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동예로 해석하는 편이다. 사실 이 무렵은 강원도 춘천 일대에 맥국이 있었다고 전하는 등 예맥족 소국들이 여기저기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상한 건 아니다.
3. 기타
- 가뜩이나 기록이 적은 백제의 군주들 중에서도 특히 기록이 적은 군주들 중 한명이다. 재위 기간이 13년이나 되지만 기록이 대단히 짧다. 특히 287년 동명묘 참배 이후 298년 왕이 사망할 때까지의 12년 동안 기록이 없다. 또한 책계왕이 대방태수의 딸인 보과와 언제 결혼했는지조차도 불명이다. 대방태수의 딸과 결혼한 것은 고이왕 대에 낙랑군을 공격했던 것 때문에[5] 대방태수와 정략결혼하여 화근을 덜어보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중국 한사군인데 낙랑군과 대방군이 왜 사이가 나쁜지는 당시 중국이 삼국시대 혼란기에 조위도 내리막을 걷던 시절이라 변방의 군현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고 추정해볼 수도 있다. 문제는 책계왕 재위 후반부쯤 되면 중국에서 삼국시대가 끝나고 서진이 등장해 이후 한사군 세력이 다시 부활해 반격을 시작한다는 점인데 책계왕이 목숨을 잃은 건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추정된다.
- 풍납토성의 최초 개축 시점이 책계왕의 재위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고고학적 시료 분석이 있다. 분석 과학 제25권 제5호 2012.10 《OSL 연대 측정을 통한 풍납토성 축조 연대 산출이란 자료》는 풍납토성의 축조 연대 편년을 위해 각 토기 시료의 OSL 연대와 고고학적 맥락, 14C 연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풍납토성의 초축 시점을 294 ± 52 yrs AD (1σ SE), 제 III 단계 증축을 328 ± 30 yrs AD (1σ SE), 최종 성벽의 완성을 400 ± 76 yrs AD (1σ SE)로 비정한 바 있다. 294년이라는 연대에서 오차가 앞뒤 52년이니 고이왕 대에 개축했을 가능성도 있고, 이후 임금 대[6]에서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으나 문헌 자료와 비교해볼 때 적어도 고이왕 대에 고대 국가의 모습이 갖춰져 풍납토성이 개축되었거나 고이왕 대에 개축이 이뤄지지 않았더라도 책계왕 때에는 개축이 완료되었을 개연성 정도는 생각해볼 수 있다. 신라사 전공으로서 백제사에도 꽤 관심이 많아 삼국사기 초기 사실에 대해 전반적으로 많은 걸 규명한 강종훈 교수는[7] 최근 저서에서 책계왕의 재위기가 다소 앞당겨져 있고 실제로 책계왕은 4세기 초반에 재위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강종훈 교수의 추측이 이번에도 맞다면 풍납토성의 시료 분석상 초축 중간 연대인 AD 294년도는 온전히 고이왕 재위기로 맞춰진다.[8]
- 한편 풍납토성 발굴시 발견된 서진계 전문도기로 인해 풍납토성의 최대 상한은 3세기 4/4분기로 유력하게 추정된다. 즉 275~300년이 최초 개축 시기로 추정된다는 얘긴[9]데, 이 또한 앞서 시료 분석 결과와 묘하게 일치하는 부분이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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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 ||《삼국사기》 <책계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책계왕이 즉위하다
一年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보수하다
一年 대방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구원을 요청하다
二年春一月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다
十三年秋九月 책계왕이 죽다
재위 13년인데 기록이 고작 5줄이다. 심지어 재위 3년차부터는 사망 기사 전까지 기록이 전무하다. 한국, 중국, 일본의 모든 역사서를 뒤져봐도 책계왕의 기록은 저게 전부. 그야말로 눈물이 앞을 가린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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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 ─ | ─ | 동명왕(?) | 구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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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좌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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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13대 근초고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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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근구수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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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신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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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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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타태자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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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법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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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교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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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선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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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사 | 부여문선 | 부여덕장 | 부여사 | 부여창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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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실재 혈통 기준 세로선(│) 부자, 부녀, 사위관계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 |
[1] 아버지인 고이왕의 출생년도에 관해 여러 의견이 나오고 있어 책계왕의 출생년도 또한 추정하기 힘들다. 굳이 추정하자면 아들인 분서왕이 못해도 280년대 이전에 태어났을 확률이 높기에 책계왕은 늦어도 260년대 이전에는 확실히 태어났을 것이다.[2] 《삼국유사》.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도 오기라 했다.[3]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 대방왕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대방이라는 나라 또한 사서에 언급자체가 없는 수준이다. 그냥 대방군 태수의 존칭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씨낙랑국처럼 막 대방군의 영향에서 벗어난 나라일 수도 있다.[4] 지금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성.[5] 낙랑태수 유무가 침략 소식을 듣고 매우 분노하자 고이왕은 잡아왔던 낙랑의 백성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6] 최대 하한으로 미뤄보면 근초고왕 재위 초반까지 내려가기는 한다.[7] 2000년대 초반에 주장한 내용이 둘이 있었다. 그 중 하나인 삼국사기 초기 기년 수정론 중 일부는 2020년대에, 충주에 유력한 삼한 거수국이 있었고 목지국 몰락 당시 백제와 상당한 마찰을 빚었을 거란 나머지 한 추정은 2010년대 중후반 들어 고고학적 발굴로 확증되었다.[8] 대체로 삼국사기 기록은 고이왕 재위기 후반부 때부터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어느 정도 시기가 맞춰져 합리적 설명을 할 수 있으나, 아무리 봐도 고이왕계와 초고왕-근초고왕계 사이 징검다리 임금인 비류왕의 재위기가 지나치게 길다는 문제가 있다. 책계왕의 기년을 약간 하향조정할 경우 재위기 조정이 필요한 임금을 굳이 들자면 비류왕이 유력하다.[9]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백제사시리즈 1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