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1 13:18:38

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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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위구태왕(尉仇台王)(?)
성씨 해(解)? / 우(優)?
구태(仇台)
생몰 미상[1]
조상 동명왕(東明王) 동명
비고 백제의 시조로 추정

1. 개요2. 구태의 정체에 대한 여러 입장3. 관련 기록들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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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정사에 속하는 역사서인 《주서》, 《북사》, 《수서》 그리고 《책부원귀》[2]백제의 시조라고 전해지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공손도(동연 1대 수장)의 사위라고 하므로 공손도의 아들 공손강(동연 2대 수장)과 세대가 같을 것이고, 따라서 그 활동 시기를 2세기 후반 ~ 3세기 무렵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구태의 정체는 아직도 미스터리이며, 구태를 실존 인물로서 실질적인 백제의 건국자로 보는 견해부터 관념상의 건국 시조로 보는 견해까지 다양한 설들이 있다. 일단 《북사》에 전해지는 구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동명(東明)[3]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4]는 딸을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여 가[百]가 건너 왔다[濟]고 해서 백제(百濟)라고 불렀다.
《북사》 열전 백제
이렇듯 중국 기록에서는 (동명의 후손이라고 하니까 부여 출신으로 추정되는) 구태가 대방군의 옛 땅 즉 낙랑군에 백제를 세웠고, 요동태수 공손도의 사위가 되었다고 전한다. 공손도가 서기 2세기에서 3세기 초의 인물이니, 그의 사위가 된 구태 역시 그 시대의 인물일 것이며, 백제의 건국 연대도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기원전 18년보다 늦은 시기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책부원귀》에서는 백제가 수도에 구태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백제는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도읍에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네 번 제사를 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잡지 제사

2. 구태의 정체에 대한 여러 입장

구태라는 인물 자체가 다른 기록에는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오리무중인 것도 있지만, 다른 기록과 교차검토해봐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삼국지》에 따르면 공손도가 사위로 맞아들인(엄밀히 말하면 친딸은 아니고 宗女, 즉 친척 딸을 시집보낸) 사람은 부여의 왕 위구태(尉仇台)[5]이기 때문이다.

구태는 중국의 사료에서만 특징적으로 나타나며, 국내 사료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고주몽, 우태에 이어 《삼국사기》에 적힌 백제의 세번째 시조 구태에 관한 이야기는 중국의 사료를 참조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단순한 중국 측의 기록 오류일 가능성도 있다. 백제가 부여에서 출자하였다는 전승을 받아들이면서도, 우태(優台)와 (위)구태를 착각하여 기술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태와 우태는 둘 다 부여계에 해당되지만 활동 시기가 다른 별개의 인물이고, 백제는 소서노가 재가했다고 전해지는 우태를 시조라고 소개하면서 부여계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하였는데, 중국측에서는 후대의 구태로 오해하여 기록하였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반대로, 백제와 교류한 중국 여러 나라의 사서에 시조 구태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백제 지배층이 자신들을 그렇게 소개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구태가 누구인지에 대한 설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제시되기 시작했다. 일본인 사학자 오타 료(太田亮)는 구태를 고구려미천왕이 대방군과 낙랑군을 축출하고 옛 군현의 땅에 파견한 군사령관이라고 했다. 이에 따르면 구태는 옛 군현 땅에 잔류한 중국인들을 감시 및 통제하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고구려가 전연모용황에게 두들겨 맞고 휘청거리는 사이에 옛 대방 땅에서 독립하여 백제를 건국했다는 것.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나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는 선비족 모용씨에게 부여가 털렸을 때, 옥저 방면으로 도망친 부여족들이 4세기초에 남하하여 옛 대방군 땅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의 백제국과 연합한 것이 백제의 기원이라고 추론했다. 이 주장들은 백제의 초기 역사를 부정하는 불신론에 뿌리를 둔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이병도의 '구태 고이왕 설'이다. '구태(仇台)'라는 이름이 '구이'라고도 읽힐 수 있으며, 이것이 곧 '고이(古爾)'와 이어진다는 것이 주요 논거이다. 이 견해에 따라 제8대 고이왕을 백제의 실질적 시조로 보고, 이미 3세기 중반에 백제가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다고 판단한 것은 한국 사학계의 백제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음상사에 의존한 주장이며, 심지어 음운적으로 제대로 일치하지도 않는다. 이(爾)는 중고한어 발음이 /niëx/라서 엄밀히 따지자면 古爾는 고니로 읽어야 한다. 반면 이(台)는 현재와 같이 /yie/라서 仇台는 구이로 읽힌다. 둘의 등장 시기 사이 긴 공백이 존재하는 것도 문제이다.

구태가 곧 위구태이며, 그가 건국 설화 상의 우태라고 보는 시각 중에는 구태를 제6대 구수왕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구수왕의 아들이 제11대 비류왕이니, ‘우태-비류’라는 건국 설화가 여기서 나왔다는 것이다. 곧 비류왕이 사실상 백제의 건국자이며, 비류왕의 아버지인 구태는 백제의 시조로 숭앙되었다는 생각이다. (우태-비류 계보와 다른 전승인 추모-온조 설화는 부여 멸망 이후 백제가 부여 혈통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삽입된 것으로 본다.)

구태가 고구려 벼슬인 우태(于台)에서 왔다는 의견도 있다. 1) 대소왕이 죽은 뒤 그 사촌동생이 10,000여 명을 이끌고 항복해 고구려의 소노부에 편입됨 2) 대소왕의 막내동생이 세운 갈사국도두왕이 고구려에 항복하여 우태로 임명됨 3) 산상왕 즉위에 불만을 품은 그의 형 발기와 소노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공손강에게 넘어감. 1) 2) 3) 세 가지 기록에 백제의 비류 설화를 잘 엮어보면, “고구려의 부여 출신 세력이 소노부(게다가 소노부의 다른 이름은 비류부이다?!)와 함께 반란 후 동연과 손잡아 대방군 지역에 백제 건국”이라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한편, 혼인동맹을 고리로 한 아래와 같은 추측도 있다. 부여의 위구태왕은 혼인동맹의 댓가로 동연으로부터 훗날의 대방군에 해당하는 영역을 영지로 하사받았다. 이후 동연의 지휘에서 벗어난 낙랑군을 견제할 목적으로 공손강이 대방군을 설치하자 부여 왕은 대방왕을 겸임하게 되었을 것이다.[6] 그러나 286년 부여는 모용선비에게, 대방군은 고구려에게 동시에 침략당했고, 부여와 대방군의 공동왕이었을 부여의 의라왕은 자신의 사위인 백제의 제9대 책계왕에게 사실상 관리가 불가능해진 대방군을 처분한다. 즉, 동연과 위구태왕의 혼인으로 부여의 영지가 된 대방군이 의라왕의 사위 책계왕에게 넘어가자 위구태왕이 백제의 시조 중 하나로 추앙되었으며 이 인물이 2C~3C에 백제를 건국했다는 전승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도 서로 모순되는 문헌들을 하나로 엮으려는 시도일 뿐, 정설은 아니다.

구태설화와 《삼국사기》에 전해지는 온조설화가 세부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구태를 온조왕과 동일인물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그 근거로 먼저, 구태는 동명의 후손, 온조왕은 주몽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동명과 주몽 두 인물은 후대에 같은 인물로 혼동되었으니, 전승 과정에서 혼란이 생겨 이름이 다르게 적혔을 것이며, 각각 선조와의 관계가 후손과 아들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으나 그 혈통적 연계성에선 유사함을 보이고 있는 점, 백제가 대방(帶方)의 옛 땅에 건국되었다는 구태설화의 내용도 고대 중국인의 지리관념[7]을 고려하면 한산(漢山)에서 건국되었다는 온조설화의 내용과 표현의 차이가 없다는 점, 구태가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의 '백성들이 편안하였고 …… 그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人民安泰 … 其臣民皆歸於慰禮)'는 기록 및 《삼국유사》남부여 조의 '체격이 크고, 성품이 효도와 우애를 좋아하며, 말 타고 활 쏘기를 잘하였다(體洪大 性孝友 善騎射)'는 기록과 상통한다는 점, 백제의 국호 유래에 대해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왔다는 일화에서 유래했다는 구태설화의 내용이 '10명의 신하가 보좌하여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 백성이 즐겨 따랐으므로 다시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 百姓樂從 改號百濟)'라는 온조설화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을 들었다. 온조와 구태의 이름이 다른 이유에 대해서 이 주장에선 백제에서 군주를 의미하는 단어인 건길지(鞬吉支)라는 단어가 중국에 인물의 이름처럼 잘못 전해졌기 때문으로 본다. 관련 주장

실제 인물이라기보다는 관념상의 시조로 보는 견해 중에는, 6세기 중반 백제의 제26대 성왕이 사비에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면서 부여계승의식을 강조할 때, 중국적 예제에 입각하여 종묘를 구성하면서 구태(부여왕 위구태)를 태조로 추존한 것이 아니냐는 말도 있다. 결국 초기 백제사가 왜곡된 것은 성왕이 작정하고 조작한 탓이다.

그 외의 정보는 백제/역사 문서를 참조할 것.

구태 설화는 6~7세기경 기록되기 시작해 북조 계열 중국 역사서에 계속 나타나는 것으로서, 그 당시 북조 측이, 혹은 백제 측이 백제 건국 과정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보여준다. 곧이곧대로 역사적 인물이라 생각해서 이렇게 저렇게 꿰어맞추려고 하면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는 얘기. 어쨌든 백제의 건국 과정이나 기원을 다룰 때는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실제로 2015 개정 교과서에서는 구태 설화가 직접 실리기도 할 정도로 중요한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다.[8]

3. 관련 기록들

아래에 기록이 만들어진 순서대로 정리하였다.
부여는 원래 현도군에 속하였다. 한말에 공손도가 해동에서 힘을 일으켜 바깥 오랑캐들을 복속시키니 부여왕 위구태는 이제 요동에 속하였다. 구려선비가 강성해지고, 부여가 (구려와 선비) 두 오랑캐 사이에 있는 것을 본 공손도는 종실의 여자를 (위구태왕에게 보내) 처로 삼게 했다. 위구태가 죽자 간위거가 즉위했다.

夫餘本屬玄菟。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彊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尉仇台死簡位居立。
삼국지》 위서 권30 오환선비동이전 동이전 부여

백제(百濟)는 그 선대가 대체로 마한(馬韓)의 속국이며 부여(夫餘)의 별종인 듯 하다. 구태(仇台)란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帶方)에 나라를 세우니, 그 땅의 경계는 동쪽으로 신라(新羅)에 닿고 북쪽으로 고구려(高句麗)와 인접하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큰 바다로 경계지어져 있다. 동서의 길이는 450리이고 남북은 900여리이다. 도읍은 고마성(固麻城)이다.
주서》 권49 이역열전 상편 백제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자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대방(帶方)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한나라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여 가(百家)가 바다를 건너 왔다(濟)고 해서 백제(百濟)라 불렀다. 그로부터 십여대 동안 대대로 중국의 신하 노릇을 하였는데, 이전 나라의 역사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수서》 권81 동이열전 백제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는 딸을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여 가(百濟)가 건너 왔다(濟)고 해서 백제(百濟)라고 불렀다.
북사》 권94 열전 백제

구태의 제사를 받드는데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하였다. (중략) 괄지지(括地志)에서 말하길, 백제는 성에 그 조상 구태묘를 세우고 4계절에 제사를 지낸다.
한원》 권30 번이부 백제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帶方)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자기의 딸을 구태(仇台)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백제는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도읍에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네 번 제사를 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사

4. 관련 문서



[1] 동시대의 인물로 공손도가 언급되는 걸로 보면 2세기 후반-3세기 무렵에 활동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공손도 시기보다 300여년 뒤에나 기록된 인물이기 때문에 단정짓기 어렵다.[2]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 원년의 기사에도 김부식이 《북사》와 《수서》의 기록을 인용하여 "구태라는 자가 백제의 시조라고 하는데, 잘은 모르겠다."라고 적었다.[3] 고구려의 동명성왕 추모(주몽)가 아니라 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을 말한다.[4] 공손탁(公孫度)이라고도 한다. 이름 마지막의 도(度)이라고도 읽힌다.[5] 참고로 위구태의 위(尉)를 백제의 근(近)이나 고구려의 위(位)처럼 ~2세라는 뜻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위구태는 구태라는 조상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선 구태 2세라고 했다는 뜻이다.[6] 고구려 이북에 있는 부여가 대방군 지역을 하사받았다는 것을 선뜻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과거 진번국이 현도군 지역까지 관할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그 당시 기준으로는 심리적으로 가까운 지역이었을 가능성도 있다.[7] 고대 중국인들은 한반도 일대의 지리 정보를 이해할 때 자신들이 과거에 설치했던 군현인 낙랑군대방군의 위치를 통해 이해하고 있었다. 이 점을 백제인들이 고려하여 자신들의 건국지를 대방의 옛 땅이라고 표현하지 않았겠냐는 것.[8] 위에 정리한 여러 입장들은 김기섭, 〈백제 국가형성사 연구 동향과 과제〉, 《동북아역사논총》 61호, 2018의 기존 연구사 소개를 상당 부분 참고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