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5-08 10:17:20

현왕(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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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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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여의 실질적인 마지막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의라왕과의 관계도 알 수 없다. 부여의 왕위계승 방식을 고려했을 때 아들일 가능성이 높지만 하필 이 시점부터 성씨가 '부여'(夫餘)로 고정되고, 당대의 사서에서 나오는 다른 부여 군주들과 달리 후대에 편찬된 《자치통감》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2. 생애

대부분의 부여 군주가 그렇지만 현왕의 즉위 및 재위 기간은 알려지지 않았다. 한편 부여는 285년 모용선비의 침공으로 나라를 잃은 후 286년 복국에 성공했지만, 315년 고구려미천왕현도군을 밀어내고, 요동을 차지하자 이를 경계한 백제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잔여 낙랑군 세력과 합세해 요서로 진출하면서, 그 수도를 서쪽 전연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야 할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346년, 전연의 군주 모용황은 태자 모용준을 앞세운 17,000명의 대군으로 부여를 공격해 현왕과 부여 백성 50,000여 명을 포로로 끌고와 부여를 사실상 멸망시켰다. 그리고 현왕에게 진군장군의 직위를 주고, 사위로 삼았는데, 부여 유민들을 회유하려는 목적이었던 걸로 보인다. 이후에도 부여는 494년까지 존속되지만 사실상 명맥만 유지했고 결국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연왕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을 보내 모용각, 모용군, 모용근 등 세 장군과 17,000명의 기병을 보내 부여를 습격하였다. (모용)준은 지시를 내리고 군사들은 모두 (모용)각이 맡아 공략하여 그 (부여)왕 현과 부락민 50,000여명을 포로로 잡고 귀환했다. (모용)황이 (부여왕) 현을 진군장군으로 삼고, 딸을 처로 삼게 했다.
燕王皝遣世子儁帥慕容軍·慕容恪·慕輿根三將軍·萬七千騎襲夫餘. 帥, 讀曰率. 儁居中指授, 軍事皆以任恪, 遂拔夫餘, 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皝以玄爲鎭軍將軍, 妻以女.
자치통감

3. 가족

부여울을 그의 아들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