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4-23 12:09:24

의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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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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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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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년 ~ 316년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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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라(依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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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행적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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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여의 군주.

2. 행적

의려왕의 아들로 285년 부여가 모용선비에게 큰 타격을 입자 서진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당시 동이교위인 하감이 독우 가침(賈沈)[1]을 파견해 의라를 돕자, 모용외 역시 손정을 보내 대응했다. 하지만 가침은 손정을 죽였고 선비족 군사들이 물러나서 부여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모용외는 부여를 공격했으며, 부여인들을 잡아 그들을 서진노예로 팔아먹었다. 설상가상으로 316년경 고구려가 요동 일대로 진출을 꾀하자 백제는 요서로 진출하였고, 이에 부여는 수도를 녹산에서 모용선비와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사마염은 이를 가엽게 여겨 사주(司州), 기주(冀州) 2주에서 부여인의 매매를 금지시켰으며 부여인 노예들을 부여로 되돌려보내 주었다.

사실상 마지막 부여의 군주로 기록된 현왕과의 관계는 확실치 않다. 의라왕과 같은 시기 활동한 모용외의 아들인 모용황이 현왕과 동시기 인물임을 고려하면 부자관계가 유력해보인다.

3. 기타

환빠들이 환단고기를 근거로 의려왕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숭신천황이 되었다는 괴설을 주장하지만 애초 환단고기가 위서로 판단된 점과 의라왕은 서진에 구원을 요청하면서 부여에 남아있던 점이 확실해서 환빠들 외에는 주장하지 않는 편이다. 애초 의려왕은 이미 285년 모용선비의 침공 때 자살했고, 의라왕은 286년 부여왕으로 즉위하고 있었다.

신찬성씨록에 백제계 성씨 중 依羅連이 있는데 의라왕과의 관계가 있는지는 불명이다. 일단 현대 일본에서는 저걸 음역이 아니라 훈역해서 "요사미"라고 읽어서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依羅連은 物部依羅連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1] 가심(賈沈)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