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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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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누구도 노예상태에 놓이지 아니한다. 모든 형태의 노예제도 및 노예매매는 금지된다.
2. 어느 누구도 예속상태에 놓이지 아니한다.
3. (a) 어느 누구도 강제노동을 하도록 요구되지 아니한다.
(b) 제3항 ''(a)"의 규정은 범죄에 대한 형벌로 중노동을 수반한 구금형을 부과할 수 있는 국가에서, 권한있는 법원에 의하여 그러한 형의 선고에 따른 중노동을 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아니한다.
(c) 이 항의 적용상 "강제노동"이라는 용어는 다음 사항을 포함하지 아니한다.
(i) "(b)"에서 언급되지 아니한 작업 또는 역무로서 법원의 합법적 명령에 의하여 억류되어 있는 자 또는 그러한 억류로부터 조건부 석방중에 있는 자에게 통상적으로 요구되는 것
(ii) 군사적 성격의 역무양심적 병역거부가 인정되고 있는 국가에 있어서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법률에 의하여 요구되는 국민적 역무
(iii) 공동사회의 존립 또는 복지를 위협하는 긴급사태 또는 재난시에 요구되는 역무
(iv) 시민으로서 통상적인 의무를 구성하는 작업 또는 역무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B규약) 제8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lavezanzibar2.jpg
1890년 잔지바르의 노예 소년

1. 개요2. 종류3. 역사
3.1. 유럽3.2. 한국
3.2.1. 조선 노예제 사회설
3.2.1.1. 긍정론3.2.1.2. 부정론
3.3. 동아시아
3.3.1. 일본
3.3.1.1. 전국시대 당시의 일본의 노예제와 노예무역
3.3.2. 중국
3.4. 동남아시아3.5. 티베트3.6. 남아시아3.7. 중동
3.7.1. 성노예3.7.2. 백인 노예
3.8. 아메리카3.9. 대항해시대
4. 노예제가 폐지된 이유 : 효율 문제
4.1. 태생적 비효율4.2. 높은 유지 비용4.3. 집단 반발 가능성4.4. 산업혁명 시기의 반전과 노예제의 효율성
5. 현대의 노예제
5.1. 중동5.2. 국내 사례
6. 명언7. 관련 인물8. 창작물
8.1. 노예이거나 노예였던 캐릭터
9. 비유적 표현10. 관련 문서

1. 개요

/ Slave

노예란 다른 사람의 소유권 하에 놓아져 강제로 부림을 당하는 사람을 뜻한다. 국제연맹이 채택한 노예제 조약(Slavery Convention, 1926)에서는 노예를 "소유권에 관련된 권한의 일부 또는 전부가 행사되는 사람의 상태 또는 조건(the status or condition of a person over whom any or all of the powers attaching to the right of ownership are exercised)"로 정의하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노예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발견되는데 고대 함무라비 법전성경에도 노예가 언급되며,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국, 고대 그리스, 로마 제국, 인도, 중남아메리카, 그리고 당연히 한반도에도 고조선 시절부터 존재했다. 광범위하게 노예가 나타난 만큼 그 형태도 다양했으며, 노예에 대한 대우 역시 큰 차이를 보인다. 이에 따른 논의도 고대부터 존재하였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서도 언급된다.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한자로는 奴隸라고 쓰고(북한에서는 '노례'라고 쓴다.), 영어로는 Slave 로, 슬라브에게서 유래하였다는 말이 있다[1]. 항목참고. 중국 고대 은나라갑골 문자에는 奴자가 이미 보이는데, 여기서의 奴란 포로로 붙잡아 복종시켜 부린다는 것을 의미했다[2]. 隸 역시 붙잡다는 뜻과 종, 죄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최초로 奴隸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후한서 서강전으로 보인다. [3]

Slave는 고대 프랑스어인 sclave에서 유래하였는데, 이것은 중세 라틴어로는 sclavus라 한다. 중세 그리스어로는 σκλάβος라고 하는데 이는 전부 슬라브인을 뜻하는 말이다. 9~10세기발칸 반도에서는 전쟁이 잦아 많은 포로가 발생하였는데, 대부분은 슬라브인들이었다. 슬라브인들이 주로 노예로 거래되면서 자연스럽게 슬라브인이라는 말은 노예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되었고, 그 결과 대부분의 유럽어와 아랍어에서 노예를 지칭하는 말로 자리잡게 되었다.[4]

16, 17세기에는 포르투갈에서는 노예를 분류하기 위한 다양한 용어가 있는데, 아프리카 동해안의 카프리부터 중국해 주변, 일본까지 포함해 지칭하는 동인도로 분류한 포르투갈에서는 아시아인 노예를 인디오스 데 나송으로 포르투갈이 지배하는 지역의 선주민으로 분류되어 남자는 인디오, 여자는 인디아라 했다. 이들의 구분하면서 여성 노예는 에스크라바, 유대교도는 주디아,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남성은 시노, 동아사아의 여성은 시나라고 했다.

청년기부터 노년기의 남성에 해당하는 노예를 모수(moço), 결혼적령기, 가임기의 여성에 해당하는 노예를 모사(moça)라고 했으며, 노예와 하인인 경우를 포함한 경우는 모수 데 세르비수(moço de serviço), 생포된 노예는 모수 카치부(moço cativo), 타인과의 한시적인 계약으로 노예적인 봉공인이 된 경우는 모수 포르 아누스 데 세르비수(moço por anos de serviço), 소년 노예는 메니누(memino), 소녀 노예는 메니나(memina)라고 했다.

중국의 젊은 여성 노예 또는 마카오 주재 어린 아시아인 여성 노예는 비샤(bicha),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에 해당하는 피부색이 짙은 인종의 노예는 네그루(negro), 모잠비크 주변의 사람들은 카프리(cafre),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포르투갈인의 노예를 카스타(casta)라 했다.

노예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노예에 대해서는 임금노예(에스크라보스 데 가뇨)라 불렀고, 손으로 만든 상품과 주전부리 등을 팔아 푼돈을 벌었는데, 이 수익은 모두 주인에게 넘겨졌다.

노예의 이름에 대해서는 주인의 이름에서 따오는 경우도 있으며, 출신지를 구분할 수 있는 이름을 넣기도 하는데, 벵가라는 벵갈 지방, 프레트는 검다는 의미로 아프리카인, 하폰은 일본인이라는 것이다.

궁중에서 일하는 환관은 엄밀히 따지면 궁중노예이다. 진짜로 노예와 동일한 업무를 담당하기 때문이다. 다만, 진짜 노예처럼 천대받지는 않았는데 그 '노예'를 부리는 주인이 다름아닌 황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노예이기 때문에 외출은 자유롭지 못하며 궁녀들이 많이 상주하는 궁궐 내부에서만 생활하기 때문에 환관이 되려면 남근을 절단해야 했다.

노예무역은 따로 서술한다.

2. 종류

사실 고대 로마에서도 노예는 그냥 인신의 자유가 없는 사람을 일컫었을 뿐이고 전부가 하급 육체 노동자는 아니었다. 고도의 기술을 가진 학자와 기술자 집단인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물론 그런 노예는 주로 그리스인이었다. 로마 귀족 자제에게 기초 교양인 리버럴 아츠를 가르치는 것은 거의 그리스인 노예 강사였으며 귀족의 대리로 상업활동을 하거나 토목, 건축, 미술 분야에서 전문인으로 활동하였다. 심지어 주인에게 명을 받아 배를 지휘하는 노예 선장이 자유민 선원을 부리는 경우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 로마 시대의 노예는 사유재산과 가족을 가질 권리가 있었으며[5] 일정액 이상의 재산을 모으고 주인에게 돈을 지급한 경우 해방되는 제도가 있었다. 이를 해방 노예라고 불렀으며 이들은 로마의 기술, 경제인으로 활약했으며 프리기아 모자라는 독특한 모자를 썼는데, 이는 공화제의 상징이 된다.

성노예도 존재했다. 과거에도 광범위했고 현대에도 암암리에 행해지기는 하지만 가장 유명한 건 제국주의 시대 일본군에서 운영한 일본군 위안부. 군 주도로 전선에다 공창을 운영한 것인데 여인들에게 사기를 치거나,[6] 아예 납치하다시피 해서 여기 투입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른바 한국 사창가의 '인신매매' 패턴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을 정부 주도로 행했다.

2.1. 노비

동북아시아에도 노비라고 불린 노예 계급이 있으며, 이들이 일반적인 노예 이미지에 더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이들도 독자적인 재산권이 인정되는 등, 통상적인 노예와는 달랐다. 한국 사회의 노비들은 이와 달라서, 제아무리 주인이라도 노비 소유의 재산에 손을 댈 수 없었다. 자기 노비의 재산을 강탈했다간 절도죄로 처벌받았으며, 때문에 대신 돈 좀 만지는 노비들에게 몸값을 받아내는 조건 하에 집 밖에서 생활할 권리를 주는 경우도 많았다.[7] 그리고 이런 덕분에 노비의 재산은 그 자녀에게 그대로 상속되었고, 노비에게 자녀가 없을 때만 주인이 그 상속자가 되었다.

재산 소유가 인정됐다는 점 때문에 노비들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보유하기도 하여 꽤나 괜찮은 경제력을 갖추기도 했고, 때문에 이를 이용해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기도 하는 등[8], 인신의 자유가 없고 천민으로 분류되어 차별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만 빼면 생각보다 괜찮은 삶을 누리는 경우가 꽤 있었다. 웃기는 사실은 이 때문에 종종 자기 주인보다 부유한 노비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님은 쫄딱 망해서 거지나 다를 바 없이 비참하게 사는데, 노비는 고래등같은 기와집에서 살면서 떵떵거리는 아이러니한 일도 많았다.

주인 입장에서는 추노꾼을 고용하거나, 아예 자기가 직접 노비한테 가서 몸값을 받아내서 한몫 챙기려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노비 쪽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미 공명첩이나 족보 매매를 통해 양인 신분을 사놓은 데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 사또나 지역 유지들을 돈으로 구워삶아놨기 때문에, 대부분은 휴지 조각에 가까운 노비 문서를 들고 추노를 시도했다가 되려 가짜 문서로 구라쳤다는 누명만 쓰고 몰매를 맞고 내쫓기기 일쑤였다.

2.2. 머슴

농가에서 약간의 월급이나 혹은 월급이 없이 그냥 식사와 잠자리만 제공받으며 일을 해주는 머슴들도 넓은 범주에서 보면 노예에 포함될 수 있다.

한국의 경우를 본다면, 일제 강점기 무렵이던 1930년 통계에서 고용주 442,908명에게 머슴 537,432명이 고용되었다.링크

일제에서 해방된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머슴들은 많았는데, 1950년 통계로 보면 남한에 270,578명의 머슴이 있었다. 심지어 한국전쟁이 끝난지 7년 후인 1960년에도 머슴의 수가 244,557명에 달할 만큼, 여전히 많았다.링크

머슴들은 대체로 가난했으며, 아버지가 머슴이면 아들도 머슴으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머슴살이를 벗어날 돈을 모으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고, 시대적으로 보면 1950년대에는 도시로 간다해도 실업률이 40%에 달한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여전히 시궁창스러운 생활을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이후로 머슴들이 급격히 줄어드는데, 이는 1960년대에 들어서 도심지를 중심으로 공장들이 크게 늘고, 건설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도심지에서의 실업문제가 해소되었고, 이에 따라 시골에서 머슴으로 일하느니 도시에서 공장에 취직하거나 건설일을 하는것이 처지면에서 더 나았기 때문에 머슴들이 도시로 몰려나왔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머슴을 부리던 주인들한테 정부나 사회가 무슨 인권 운동이나 도덕성 회복 운동을 벌여서 그들이 죄책감을 느끼고 머슴들을 풀어주어서가 아니라, 사회 구조가 농업 위주에서 공업 위주로 바뀌어 더 이상 머슴들이 많이 있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머슴이 소멸되었다는 뜻이다.

3. 역사

3.1. 유럽

로마 공화정 ~ 제국 초기 시기 노예들의 삶은 대체로 비참했다. 1세기 초기까지는 노예에 대한 로마인들의 인식은 같은 인간이라기 보단 '가축'에 가까웠다. 의외로 물건이 아닌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도 있었는데 세네카를 비롯한 소수의 철학자들 정도였다. 예컨대 트리말키오는 "운명에 짓눌려 살고 있긴 해도 노예들 역시 사람이며 우리와 같은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라고 했으며 노예 해방은 주인의 명예를 드높이는 일로 받아들여졌고, 통념과는 달리 로마법 어디에도 노예를 물건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물론 주인에 비해서는 열등한 인간이라는 인식은 있었고 주인은 노예들을 처벌할 수 있었다. 심지어 해방노예마저도 노예를 학대한 것으로 유명하다.[9] 아우구스투스의 친구 중 베디오스 폴리오(Publius Vedius Pollio)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노예가 자신을 실망시키면 칠성장어의 연못에 먹이로 던저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번은 아우구스투스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연회에서 그의 노예가 당시 대단한 사치품이었던 유리잔을 깨뜨렸을 때도 노예를 칠성장어에게 던지려고 했었다. 이를 보던 아우구스투스는 그 집의 모든 유리제품을 가져오게 해 폴리오가 보는 앞에서 모두 깨뜨려 노예를 죽일 수 없도록 만들고 장어의 연못은 메워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뒤집어 말하면 절대권력자인 아우구스투스조차 노예 값보다 훨씬 큰 손해를 입히고 경고를 할 수는 있었을지언정 노예주인이 자기 노예를 죽이는 것 자체를 처벌할 수는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노예가 자신의 주인의 암살을 막지 못하면 그 집안의 노예들은 수십 명이든 수백 명이든 처형당했다. 이러한 무자비한 처형을 반대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하기도 했는데 결국 처형은 이루어졌다고 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칙령으로 주인이 노예를 죽인 경우에도 사형이나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다고 했으나 이는 노예를 처벌할 정당한 이유가 없는 경우에 한정되었다. 즉 주인이 노예를 죽일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주인은 얼마든지 노예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이는 로마가 강력한 가부장제 사회였던 데서 기인한다. 심지어 자식을 노예로 팔 수 있었다. 로마의 십이표법에는 "아버지가 자식을 3번 노예로 팔면 자식은 아버지의 지배권에서 해방된다."는 조항이 있다. 바꿔말하면 3번씩이나 노예로 팔 수 있다는 거다.[10] 다만 시대가 흐름에 따라 노예의 처우는 조금씩 좋아지는데 AD 2세기에 쓰인 가이우스의 법학제요를 보면 노예에 대한 주인의 과도한 폭력은 금지되었고 만일 폭력에 그 정도가 심할 때에는 국가가 강제로 노예를 매각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이전까지 금지된 노예의 결혼과 재산보유가 합법적으로 인정되는 등 전반적으로 노예의 직위가 상승하기도 하였다.

이런 신분상승은 로마의 정복전쟁이 중단되면서 정복지에서의 노예수급이 함께 끊어진데서 기인했다. 즉 이전 같으면 말 안 듣는 노예는 족쳐버리고 다시 들여온 노예로 메우면 그만이었지만, 이제 한정된 수의 노예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다보니 자연스럽게 근로 동기를 부여할 여러 당근이 필요해진 것이었다.

한편 노예를 해방시켜 아내나 첩으로 삼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여겨졌다.[11] 자유민 남성이 소유하고 있는 여성 노예를 성적으로 착취하고 임신시키는 것은 문제시되지 않았으나[12], 해방시켜서 첩이나 후처로 삼을 경우 그 자식은 그냥 로마시민이 되므로 노예의 수가 줄어들기에 문제시 된 것이다. 같은 이유로 여성 자유민이 남자노예와 성적관계를 맺는 것도 금기로 여겨졌다. 반면에 강제로라도 소유하고 있는 노예끼리 자식을 만들게 하는 것은 권장되었다.

또한 제국 후기에 그리스도교의 만민평등 사상에 따라 노예들의 삶이 전반적으로 개선된다. 물론 노예제 폐지까지는 사상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대전의 노예 관련법 개정에서 어떤 이유로든 주인이 노예를 죽이거나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따위의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등의 진전이 이루어진다. 이후에는 제국내에서 노예에 대한 성적착취나 매춘 목적을 위한 성노예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고대가 끝난 중세 유럽에도 노예는 존재했다. 이는 특히 지역에 따라 큰 편차를 보이는데 농업이 중시된 내륙부에서는 농노제가 선호되면서 노예 수요가 크게 줄어든 반면[13] 해상무역에 두각을 보인 지역에서는 노예 무역이 계속 성행했다. 11세기와 12세기에 에스파냐는 서유럽에서 가장 큰 노예무역 시장이었고, 1128년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온 상인들이 제노바 시장에서 이슬람 노예를 팔고 있었다. 1348년 흑사병이 돈 이후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갑자기 가내 노예 수요가 늘어나기도 했다. 피렌체에서 1336년에 공포된 시 법령은 노예들이 이교도, 즉 기독교도가 아니라는 조건으로 노예 수입을 공식 허가했고, 곧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거의 모든 부유한 가정이 노예를 두게 되었다. 한편 로마 제국이 성노예를 금지한 것과 달리, 서유럽 해양 국가에선 가사 목적 등으로 사들인 여성 노예에 대한 성적 착취가 여전히 가능했다.

유럽의 지중해 노예무역은 대규모라기보단 다른 상품에 노예를 덤으로 끼워 운송하는 형태였다. 1396년 5월 21일 로마니아 지방에서 제노바로 들어온 한 선박의 화물목록에는 순례자용 의복 37자루, 납덩이 191개와 함께 80명의 노예가 기록되어 있다. 시라쿠사에서 마요르카로 들어온 또 다른 선박은 짐승 가죽 1,547필과 노예 열 명을 운송했고, 베네치아에서 이비사로 가는 한 선박은 대청 128자루, 놋쇠 55자루, 원면 열다섯 자루, 면사 다섯 자루, 종이 네 자루, 오배자 다섯 통과 함께 아홉 명의 터키 노예를 운송했다. 포르투갈 등에서는 일본을 포함한 타국으로부터 성노예의 공급 또한 이루어졌다.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로마 제국을 제외하면 가장 먼저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노예 제도가 기승을 부렸던 곳이기도 했다.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인인 성 패트릭도 아일랜드 해적들에게 붙잡혀 아일랜드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아일랜드의 노예 제도는 무척 오래되었다.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에는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서유럽에서 가장 큰 노예 시장이 있었다. 이러한 아일랜드의 노예 제도는 대략 서기 8세기 무렵에 점차 줄어들다가, 바이킹들이 아일랜드를 침입하면서 다시 노예 제도를 되살렸다. 바이킹들이 서기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아일랜드인들의 저항에 부딪쳐 쇠퇴해지자, 노예들은 바이킹에서 토착 아일랜드인으로 대체되었다. 잉글랜드헨리 2세가 군대를 보내 아일랜드를 공격했던 1171년에 아일랜드의 노예 제도는 최고조에 달했다.[14]

중세 말 흑사병의 유행으로 이탈리아 북부의 부유한 도시 국가들이 인구가 감소하며 타격을 받자 14세기 말을 기점으로 제노바 공화국에서 흑해의 무슬림 타타르인들로부터 슬라브인[15][16] 노예를 수입했다. 한 때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의 중산층들이 집집마다 노예를 한두명씩 둘 정도였으나,[17] 오스만 제국의 등장으로 제노바의 흑해 식민지들이 함락되면서 이탈리아 노예 시장의 주 공급처는 아프리카 서부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포르투갈의 대서양 항로 개발을 촉진시키며, 상술된 대서양 노예 무역의 시발점이 되었다.

또한 이탈리아의 북동부 프리올리에는 16세기까지 노예 제도가 있었다. 프리울리의 법령에는 노예 신분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아버지가 자유인인 경우에도 노예가 된다는 조항이 적혀 있었다.[18]

한국 인터넷상에선 "12세기 이후로 서양에서는 노예가 사라졌다. 혹은 있었어도 같은 기독교도들은 노예로 삼지 않았다."라는 말이 돌아다니지만 실제론 절대 아니다. 16세기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가인 존 녹스의 경우 1547년 7월 프랑스 군대에 붙잡혀 1549년까지 약 19개월 동안 프랑스의 갤리선 '노트르담'에 끌려가 노를 젓는 노예로 살았다.#1,#2 아울러 프랑스의 국왕인 루이 14세와 루이 15세는 살인범, 좀도둑, 밀수업자, 탈영병 같은 범죄자들에다가 게으름뱅이들(거지, 실업자, 노숙자 등)와 집시들을 비롯한 부랑자와 빈민들은 물론 심지어 1660년에는 프랑스에 있는 한 성지를 방문한 폴란드인 순례자들까지[19] 강제로 징집하여 갤리선으로 보내 노를 젓는 노예로 만들도록 하였다.#1 이 노예들은 아주 가혹한 환경에 시달리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갔다.#2

영국도 아일랜드의 반란을 진압한 후 많은 아일랜드인을 계약제 하인 형태의 노예로 만들고 이들을 싼 가격으로 판 케이스가 존재한다 https://edition.cnn.com/2019/02/11/us/indentured-servants-and-slaves-explainer/index.html https://m.fmkorea.com/2102158025 이들을 노예제와 다르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들은 명백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인신매매당했으며 주인의 소유라는 점에서 노예제에 속한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게다가 이들은 결혼을 주인 허락없이 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주인이 이들을 흑인 노예와 결혼시키는 경우까지 많았다. 이렇게 태어난 물라토들은 주인의 노예가 되어 매매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리고 서양에 노예가 없었으며 노예로 삼더라도 기독교인은 노예로 쓰지 않았다는 주장은 수많은 흑인노예들이 19세기 초반까지 존재했던 점, 그리고 이들 일부는 기독교를 믿었다는 점, 심지어 백인들까지 노예로 부려먹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특히 전근대의 서유럽 국가들도 동양의 국가들처럼 노예제도를 공인했으며 노예무역의 주체가 되어 서로 경쟁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국이 대표적인데 영국은 1672년 노예무역 독점회사로 왕립아프리카회사를 설립하고 이전에 서인도무역회사를 통해 노예무역의 많은 부분을 독점하던 네덜란드를 경쟁에서 밀어낸 뒤 위트레흐트조약을 통해 에스파냐령에 대한 노예무역의 독점권까지 얻어내며 막대한 이득을 보았다. 서양에 노예가 없었다는 주장은 흑인노예 무역의 주체가 서양의 국가들이였으며 이렇게 들어온 노예들 대부분은 식민지로 가긴 했으나 일부는 서유럽의 본국에서 노예생활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전혀 없는 주장이다.

오스만 제국의 노예 제도는 고대 로마의 노예제도를 상당부분 이어받은 것이기도 했으며 동시대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과도 유사했다. 일반적인 노예도 존재하기는 했지만, 오스만 제국 특유의 빡빡한 재산법 때문에(...) 노예를 소유하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재산적 손실이라, 보통 노예 소유주는 가사노동을 시킬 하녀나 하인 두서너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해방시켜 자기 토지에 소작하게 하는 방법을 선호했다. 특히 학식이 높은 그리스인 등 유럽인 노예를 아이들을 위한 가정교사나 재산관리자로 삼는 것은 로마시대의 전통과(...) 비슷했다. 한편 전쟁에 참가한 이들 중 집안이 가난해서 이슬람 문화권 특유의 지참금을 낼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여자를 포로로 잡아와 해방시켜서 혼인하는 것을 선호했다. 오스만 제국 시기의 노예법은 상당히 관대한 편이어서, 일단 노예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무슬림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자동으로 해방되었고, 노예 소유주들도 재산세 때문이긴 하지만 노예를 부리기보다는 해방시켜 소작을 부치는 걸 선호했고, 노예를 해방시키는 행위가 상당히 명예롭고 관대한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에 집안에 경사가 나거나 잔치를 열 때 노예를 해방시키는 일도 흔했다. 또한 아나톨리아 반도 본토와 발칸 반도에서는 아랍 이슬람 제국과 달리 성적 착취를 목적으로 노예를 부리는 행위는 불명예스러운 행위로 간주되어 심하게 비난받았다.[20][21]

3.2.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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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중국동아시아에서는 남성 노예를 奴(), 여성 노예를 婢()라고 칭하였다. 고조선의 팔조법금에는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고 하였으며, 부여의 법률에 “살인자의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는 규정이 있었다. 중국 당나라의 형법인 당률(唐律)의 명례(名例)에는[22] 노비에 대한 법률이 존재하였는데 이것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노비에 대한 기준적인 법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은 나이 16세 이상 50세 이하의 장년 노비의 값을 저화 4,000장, 15세 이하 50세 이상은 3,000장으로 규정하였으며 노비의 반품기한과 등록기간을 명시하기도 하는 등 상속, 소유, 매매에 대한 상세하고 구체적인 규정이 존재하였다.

고려시대때도 노비제가 있었는데 원간섭기 시절 고려의 노비제도를 철폐하려고 했으나 충렬왕이 “이것은 조상 대대로의 풍속입니다. 천한 무리가 양인이 되도록 허락한다면 나라를 어지럽게 하여 사직이 위태롭게 됩니다. 쿠빌라이칸은 고려의 풍속을 존중해주기로 했으니 이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호소해 결국 무산시켜버렸다. #

3.2.1. 조선 노예제 사회설

조선시대노비제에 관련해서 제임스 팔레, 에드윈 라이샤워 등은 조선 17세기 경 호적의 노비호가 전체의 1/3에 달한다는 점을 들어 조선을 노예제 사회라고 주장한다. 이 사람은 시민혁명 이전 남부 미국도 노예제 사회라고 본다. 팔레 교수의 조선 노예제 사회설. 주의해야 할 점은 노비 비율이 전체 인구의 30 - 40% 내외라고 주장하는 시기는 17세기 기준이라는 것이다.

팔레 교수의 견해가 특이한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 많은 서양인들은 조선의 노비제를 노예제와 다를 바 없는 제도로 인식했다. 조선의 노비제도에 대한 프랑스 정치국 극동과의 보고.

조선은 세계사적으로 독특한 노비제를 운용했는데 동족을 19세기까지 노비로 세습시켰다는 점 때문이다. 조선은 국가적으로 이를 운영하였다. 중국과 일본은 사적으로는 노비가 있었지만 국가에서 노비에 개입하진 않았다. #
3.2.1.1. 긍정론
한때 "조선의 노비는 노예도 아니고, 농노도 아닌 노비 그 자체일 뿐이다."라며 제임스 팔레 교수의 조선 노예제 사회설을 부정했던 이영훈 교수는 최근에 자신의 이전 주장을 번복하고 팔레 교수를 지지하며 조선은 명백한 노예제 사회라고 주장하고 있다.[이영훈의 역사비평] 14. 조선왕조의 정체는 노예제 사회

논란이 되는 것은 외거노비의 존재이다. 조선 노예제 사회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조선의 외거노비는 신분제상 양인보다 아래에 놓였을 뿐 실제 생활 모습은 양인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는식으로 얘기를 한다. 그들은 조선 노비의 다수를 차지하는 외거노비는 사유재산 소유가 가능했고, 노비가 다른 노비를 소유하는 경우도 있었고, 돈을 벌어 양인 신분을 살 수도 있었다는 등 특수한 사례들을 거론하며 전체를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노예가 신분상승하는 이러한 일부 케이스들은 전근대 시절 어느 나라에서나 발견되어지고 있으므로 일부 케이스를 가지고 전체를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해선 안되는 것이다. 비록 조선의 외거노비들이 결혼, 출산 및 사유재산의 소유가 가능했다지만 언제든지 양반의 개인결정에 따라 그 지위가 더 낮은 솔거노비로 전환될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외거노비들 역시 수확의 반을 양반에게 바쳐야 했으므로 개인 재산을 축적하여 신분 상승을 하기란 매우 어려웠다.[23] 또한 외거노비의 실태를 논할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도망노비'의 숫자다. 조선 전기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24]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는데[25], 이러한 노비들의 도망은 17세기에 본격화되어 18세기가 되면서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서자, 정조 때인 1778년에 국가는 노비의 추쇄를 중단한다.[26] 참고로 노비의 도망률에 관해서는 1484년 한명회는 공노비 45만 가운데 22%인 10만여구가 도망 중이라고 하였다. 1528년 경상도 안동부 주촌의 이씨 양반가의 호적에서 노비는 총 51명, 그 가운데 1/3인 17명이 도망 중이었다. 1606년 단성현에서 노비의 도망률은 무려 51%로 나타나고 있다.# 과연 이들에 대한 처우가 인간적이었더라면 하루 일해서 하루 먹고살기도 바쁜 전근대 농경 사회에서 어째서 저렇게 많은 외거노비들이 도망다니는 신세였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외거노비의 실태를 알려주는 또 다른 중요한 단서가 바로 '위조 족보' 등으로 대표되는 노비들의 '면천'에 있다. 19세기들어 조선의 신분제가 문란해지자 이틈을 타 외거노비들이 지속적으로 면천을 시도한 사실 자체가 외거노비에 대한 처우가 부당했음을 보여주는 반증인 셈이다. 만약 외거노비들이 일각에서 주장하는것 처럼 평소 양인과 다를바 없는 처우를 받고 살았더라면 사회가 혼란해졌을때 굳이 막대한 금전을 치르면서까지 양인으로 신분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시대 동유럽 농노들도 도망다니는 사례가 간혹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노비를 유럽의 농노에 견주기도 하는데, 유럽 농노들의 도망 사례는 조선 노비들의 도망 사례처럼 광범위하게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건 '농노의 노예화'가 원인이지 노비가 농노 보다 신분적으로나, 실제 대우로나 낫다는 근거가 절대 될 수 없다. 설령 동시대 노비에 대한 처우가 농노와 비슷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게 곧 노비가 노예가 아니었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 경우에는 노비와 농노 둘다 노예인 것이다. 노비가 노예가 아니었다는 주장을 하고 싶거든 노비들이 인신의 구속에 얽매지지 않는 존재였다는 보편적 사례를 제시해야만 한다.

두번째는 노비 인구다. Rodriguez, Junius P. 같은 일부 학자들은 조선의 노비 비율을 평균 10% 정도로 추정하기도 하나 여기에는 추정의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아 신뢰하기 어렵다. 대체적으로 15~18세기 조선시대 전 인구의 30~40% 정도를 노비로 추산하는게 일반적이다.[27] 한영국은 1609년의 울산부 호적에서 인구의 47%가 노비임을 확인하였다. 노진영은 1606년의 산음현 호적에서 41.%, 1630년의 동 호적에서 34.5%, 한기범은 1606년의 단성현 호적에서 무려 64.4%에 달하는 비중을 확인하였다. 일찍이 사방박이 1690년의 대구부 호적을 통해 확인한 노비의 비중은 44.3%이다. 1663년에는 한성부 호적에서 73%로 기록되기도 했다. 15세기 문신인 성현(成俔 1439 ~ 1504)은 우리나라의 사람 중 절반이 노비라고 증언하였다. 이와 관련해 조선 노예제 부정론자들은 조선시대 호적은 전근대 행정력 미비와 세금, 군역을 피하기 위해 평민들이 호적에 등록되는 것을 기피하는 현상으로 인해 실제보다 노비 비율이 높게 추산되었다는 점을 고려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만으로는 구체적으로 양인의 수가 얼마나 누락되었는지를 파악하지 못한다. 설령 양인의 수가 누락되었다 한들 노비들의 도망이 비일비재하던 동시대 노비들의 수 역시 누락되었으므로 결국 조사 결과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게 된다.[28] 정진영(2004)에 따르면 경주최씨 양반가의 분재기와 호적자료를 비교 분석한 결과 년도에 따라 기재율이 다르기는 하나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 사이엔 대체로 60% 수준, 18세기 중반에는 대체로 60~70% 정도의 노비가 호적에 기재되어 있었다고 한다. 년도에 따라 분재기 상에 존재하는 노비의 83%가 호적에 기재된 경우도 있었지만 이상의 논거를 종합해보더라도 30~40%에 달하는 도망노비의 존재를 감안한다면 실제로 누락된 양인의 비중 못지 않게 노비들의 누락 역시 비중이 컸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배경의 원인에는 일반 양인이 스스로 양인 신분을 버리고 권세가의 노비를 자진하는 투탁 현상이 있었다. 일부 양반들이 그들의 권세를 빙자해 국가로부터 사노비에 부과된 요역이나 공부의 면제는 물론 전조도 가볍게 징수하는 특전을 베풀었는데, 이들 노비에게 부과되었던 요역과 공부까지 더해 부담해야만 했던 양인들이 그들의 과중한 부담을 피하기 위해 양반들이 경영하는 농장에 투탁함으로써 노비 수가 증가하게 된 것이다.[29] 즉, 이러한 '투탁 현상'은 조선 민중의 "총체적 노예화"가 원인이지, 결코 노비가 일반 양인보다 법적으로 더 나은 처우를 받았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세종 때 만들어진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박탈한 노비고소금지법(奴婢告訴禁止法, 1422년)은 양반이 노비를 학대하는 것을 법적으로 묵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번째는 노비와 양인의 결혼 및 출산에 대한 부분이다. 조선 노예제 부정론자들은 노비들은 양인과 언제든지 맘대로 결혼하고 출산도 할 수 있었으므로 노예 상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경우는 앞서 이미 언급했듯이 일반 양인의 투탁 현상이 원인이라 볼 수 있다. 즉, 중앙정부의 과도한 세금을 피해 양반집에 의탁한 양인들이 신분적으로는 양인이지만 노비와 별다를 바 없는 생활을 영위하게 되어 양천교혼이 가능해진 것이다. 양반이 노비를 취하는 것과 관련하여서는, "여자 노비를 타는 것은 소를 타는 것보다 더 쉽다"는 속담이 있을 지경이었으며, 조선시대 양반들이 남긴 기록을 보아도 노비에 대한 학대와 사적 제재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0] 또한 노예 신분으로 귀족과 결혼하여 출세하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타나고 있으므로 그러한 특수한 사례를 가지고 전체를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여서는 안된다.

네번째는 노비들은 그들만의 복장을 강요받았다는 사실에 있다. 조선 시대 노비는 성씨(姓氏)를 가지지 못하고 이름만 있으며 외모도 양인과는 달리 남자는 머리를 깎고,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어 창두적각(蒼頭赤脚)이라 불렀는데, 흔히 노비를 창적(蒼赤)이라 부른 것은 여기에서 붙여진 이름이다.[31] 이러한 노비들의 외모는 당시 풍속화인 경직도(耕織圖)에 아주 잘 드러나는데 남자 노비들은 모두 대머리처럼 짧은 머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발견된 '노비 계 모임 문서'에 노비 이름과 함께 성도 적혀 있으니까 조선 시대 노비는 성씨를 가졌겠구나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것은 노비들이 스스로 국가 공민(公民)임을 표현하기 위해 행한 "자의적인 기록"이었을 뿐이고 실제 법적 효력은 지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되려 실제 법적 효력을 지니는 가문 분재기(分財記) 등을 보면 노비들은 성 없이 이름만 적혔음을 알 수 있다. 한 책임연구원은 "분재기에는 양반의 예속민으로 이름만 적혔지만 계원으로 기록할 때는 성을 함께 적어 국가의 공민(公民)이라는 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노비들이 성씨를 가지기 시작하는 것은 조선 말 갑오개혁 및 민적법이 시행되면서부터이며, 이 경우 주인의 성씨를 그대로 따라 쓰는 경우가 많았다.
3.2.1.2. 부정론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규정한 주장에 반박하는 주장들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제임스 팔레 교수가 타계할 때까지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규정한 주장들에 계속 반박해온 이영훈 교수의 주장 등이 있다. 이영훈 교수의 반박 조선의 노비제 숙의 단, 이영훈 교수는 이후 입장을 번복하고 노예제 사회를 인정하는 쪽으로 돌아섰기에 현재 그의 부정론은 무의미해진 상태이다.

주요 반박 논거로는,
  • 우선 노비제의 대확장기를 거치는 가운데 노비들의 존재양태가 '노예'로 단순화시킬 수 없을 만큼 다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노예제 사회설은 이러한 변화 추이를 고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비 가운데는 주인의 집과 멀리 떨어진 다른 군현이나 도에 거주하면서 연간 일정량의 공물을 상납하는 '납공노비(納貢奴婢)'가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시대 노비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납공노비는 고려말기에 팽창한 사원노비가 조선왕조 국가권력에 의해 공노비로 몰수되어 양반관료층에게 분배되었던 데서 기원했다. 그들은 농촌에서 자신의 토지와 가족노동으로 독자적인 경리를 보유한 농민으로 존재하였으며, 그 점에서 주변의 양인신분 농민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존재였다. 비교사적 범주를 적용해보자면 '''납공노비는 '노예'보다 '농노'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전체 노비들 중 이들 납공노비가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분재기나 호적 자료가 허락하는 범위에서 추론해보면 적어도 절반 정도는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조선의 노비 중 상당수는 외거노비로 이들은 주인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 않고 신공이라는 몸값만 정기적으로 납부하면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외거노비, 솔거노비의 여부와 전환 여지는 주인에게 달려있었으며[32], 외거노비의 비율이 높았던 이유는 필요이상의 노비를 통제하는 건 비효율적이기에 자율을 대가로 가외로 독립시킨 것이었다.
  • 전근대의 호적은 기본적으로 세금을 최대한 확실하게 걷기 위해서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납세의 의무가 있는 양민들은 호적 작성을 피했고 노비들은 호적에 들어도 세금을 더 뜯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노비의 수는 비교적 많게 집계되는 데 반해 양민의 수는 적게 집계되었다. 그나마도 전통 사회에서 정확한 호적 작성은 흔히 학정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33] 조선시대 호적에는 양인의 절반, 노비의 거의 대부분이 등재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물론 백골징포 황구첨정처럼 조세를 걷기위해 혈안이 된 정부에서 그런 조세회피에 대해 손을 놓고 있을 리는 없으므로 여러 이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당대에도 호적 조사와 실제 인구가 크게 차이가 난다는 점은 조정에서도 오래전부터 인식하고 있었던 고질적인 문제였었다.
  • 또한 『노예제와 사회적 죽음: 비교사적 연구』를 저술한 올란도 패터슨(Orlando Patterson)은 '노예'를 공동체로부터 추방되거나 다른 지역에서 끌려온 자, 그리하여 자신의 소속 공동체를 보유하지 못한 자로 규정하면서, 노예의 상태를 '사회적 죽음(Social Death)'으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내지 문화적 관점의 노예의 정의를 조선사회의 노비제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먼저 법적인 혼인 문제의 경우, 발달된 노예제사회에는 자유민과 노예는 성적 교섭은 가능할지언정 법적인 혼인은 이뤄질 수 없었다. 자유민과 노예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깊은 심연의 경계가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조선사회에서는 노비와 하층 자유민은 법적으로 자유롭게 혼인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점이 조선의 노비와 미국 남부의 흑인 노예의 결정적 차이였다. 미국의 흑인 노예들은 마을의 가난한 백인과 결혼할 수 없었지만, 조선의 노비들은 마을의 가난한 양인들과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었다.
  • 무엇보다 발달된 노예제사회에서는 이름이나 의복, 두발 등의 복식에서 노예만이 지녀야 하는 고유한 상징이 강요되었고[34], 그러한 노예상징을 통해 노예들은 자유민과 쉽게 구별되고 또 차별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의 노비들에게는 그러한 노예상징이 강요되지 않았다. 실제로 노비의 복식은 일반 상민의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조선왕조는 신분에 따라 복식을 차별하면서 양반만이 비단옷을 입거나 가죽신을 신을 수 있다고 규정하였을 뿐[35], 노비들이 반드시 그들만의 두발 모양을 갖추고 그들만의 옷과 신발을 신어야 한다고 규정하지는 않았다. 신분을 차별하는 여러 법령에서 노비와 상민은 동격으로 간주되고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1554년의 한 법령은 서인(庶人)과 천구(賤口)가 사족(士族)을 구타하였을 때 동일한 처벌을 받도록 규정하였고, 이후 1746년의『속대전(續大典)』은 상천(常賤)이 사족을 욕한 경우 동일하게 장(杖) 60 대에 처한다고 규정하였다. [36] 이처럼 상민과 노비는 사족과의 신분 차별에 관한 한 동격으로 취급되었다. 요컨대 조선의 노비들로부터 그들이 자유민의 공동체로부터 절망적으로 분리되었다는 노예상징을 찾기는 어려운 실정인 셈이다.[37]

조선의 노비들은 미국의 흑인노예에 비해 예속의 강도가 약했다. 그렇다고 이러한 분석이 조선의 정치나 사회경제상이 비교의 대상이 된 다른 사회들보다 역사적으로 더 높은 수준이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농노제사회가 노예제사회보다 발전단계가 높다는 등식은 애당초 성립하지도 않을뿐더러, 순수한 형태의 노예제사회는 인류의 역사에서 극히 예외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전근대 인간예속의 유형과 그들을 둘러싼 사회구조의 성격을 "노예인가, 농노인가?'와 같은 서유럽 중심의 잣대만을 기준으로 하여 양자택일 방식을 통해 규정하려는 협소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연구자와 역사대중 스스로가 좀 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노비는 노예도, 농노도 아니다. 노비는 어디까지나 노비 그 자체일 뿐이다. (pp.155~159) - 이영훈,「한국사 연구에서 노비제가 던지는 몇가지 문제」(『한국사시민강좌』40, 2007). 출처

조선 정부는 노비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심플한데 노비는 개인에게 예속된 존재라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38]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세금을 거두어야 중앙정부의 국고가 풍족해져서 여러 정책들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는데, 노비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만큼 세수가 줄어들어서 중앙 정권의 힘이 약해지고, 중앙 정권이 약해지는것에 반비례하여 힘 있는 지방 정권이 등장하여 중앙 정권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통일신라가 이렇게 힘 있는 지방 정권(호족)들에 의해 몰락했고, 바로 그 힘 있는 지방 정권으로 시작하여 한반도를 통일한 고려 왕조는 무척이나 지방 정권의 힘이 커지는 것을 경계해왔으나 여러 현실적인 문제로 제대로 된 견제책을 내놓지는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지방 정권의 힘을 약화시키는 방법을 모색해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노비들의 호적을 조사하여 노비 일부를 양인으로 바꾸는 노비안검법이었다. 즉 세금도 안내는데다가 지방 정권들의 '사병'이 될 수도 있는 노비들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한 것. 상기한 노비에 대한 조건이 엄격한것은 달리 말하자면 그 정도 조건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노비가 될 수 없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건 매우 매력적인 조건이었기 때문에 노비가 되기를 원하는 양인들이 있어서 노비 계급은 씨가 마르지는 못했고, 조선 왕조에 들어서야 지방 정권에 대한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확실해지면서 노비가 새로 생겨날 여지를 최대한 줄여나갔고 실제로 태종 대에서는 사병 보유를 금지시켜 노비가 사병이 되는걸 막음으로써 노비의 가치를 줄여버렸고(사병으로 쓸 수도 없는걸 많이 데리고 있어봤자 좋을게 없으니까), 영조 대에서는 그동안 부모 중 한쪽만 노비여도 자녀도 무조건 노비가 되던 '일천즉천'[39]을 모친이 노비여야만 자녀가 노비가 되는 '노비종모법'을 도입시켜 새로운 노비가 탄생할 가능성을 더욱 줄여놓았다. 실제로 이영훈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이미 영조시절에 조선의 노비 비율은 10% 미만으로 줄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런 변화는 이념적인 이유도 한 몫 했다. 유학은 기본적으로 군신관계, 부모관계 등 어느 정도의 사회적인 상하관계는 긍정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사람간의 차별을 크게 두지 않고 미천한 존재도 노력에 따라 귀하게 될 수 있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노비 같은 명확한 하위 계급의 존재를 긍정하지 않았다. 유학은 통일신라 시기부터 이미 들어와있었고 이 당시부터 유학은 통치 이념으로, 불교는 영적 이념으로 공존하며 존재해왔다.[40] 그게 고려 말에 불교의 타락이 심해지자 숭유억불이 된 것이다. 즉 한반도의 왕조들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이유 뿐만 아니라 이념적인 이유로도 노비제는 나쁜 것이었고 그래서 역대 정권들은 꾸준히 노비를 줄이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41][42]

앞서 제시된 긍정 부분의 서술은 다소 오류가 많은 주장들이다. 조선 노예제 부정설에서는 노비가 당대의 양민과 같았다는 주장을 하는게 아니라 노비의 처우가 열악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비교사학적으로 노비가 당대의 노예라고만 보기엔 힘들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비의 법적인 처우에 대해서도 일부 특수한 케이스들을 근거로 노예가 아니라 주장하는게 아니라 당대의 노예들과 법제적인 대우가 달랐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의 흑인노예들의 경우 재판에서 백인에 대해 진술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어떠한 종류의 계약도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의 노비들의 경우 주인에 대해 고소하는게 금지되기는 했지만 사유재산권에 대해 주인에게 소송을 하는 것은 허용되었으며 주인 외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법적인 권리가 완전히 박탈되었다 보기엔 어려웠다. 이런 것을 다 무시하고 어쨌든 제한된 환경에서 누군가의 소유물처럼 부려지며 종속되어 있으니 노예라고 한다면 사회안전망과 복지제도가 없던 18~19세기 근대시대 초기 자본주의 시절의 상주 임노동자조차 노예라고 몰아붙일 수도 있다. 공장에 종속되어 숙식제공 비용을 지출하면 그날 일당이 다 떨어지는 수준의 형편없는 임금을 받고[43][44] 1일 16시간 이상 일하며 법정공휴일 그딴 거 없고 쫒겨나면 블랙리스트 올라서 굶어 죽던 시절이었으니까. 사실 상술했듯 조선시대에도 세금 부담을 피하기 위해 노비가 된 평민의 사례는 비일비재했고, 결국 하류 계층은 노예'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신분적, 제도적 차별이 있었냐, 없었냐, 있었다면 어느 정도 수준인가? 이다.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규정지은 제임스 팔레 교수 역시 자신의 저서 Views on Korean Social History(1998)에서 예속의 정도에서 노비는 동시대 유럽, 미국의 노예보단 농노에 가까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도망노비가 많았다는 사실이 노비를 노예로 규정하는 근거가 되기엔 힘든게 동시대 동유럽도 농노가 도망치는 경우가 많아 이를 막기 위해 도망친 농노를 재판 없이 교수형 시킬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였다. 또한 역사학회에서 저술한 <노비.농노.노예>(1998)에 따르면 동유럽의 농노들은 지주에게 재판권이 종속된 존재였으며 지주들은 농노들이 자신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경우 구금, 구타하거나 유형시킬 법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반박 항목의 두 번째 문단에서 서술된 이유들로 노비를 노예로 규정한다면 동시대 동유럽의 농노 역시 노예로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도망노비가 100만이라는 한명회의 발언 하나로 당시 조선의 도망노비 수가 100만이라 단정짓는 것도 다소 무리가 있는 주장이다. 당시 조선의 관료들은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발언을 할 때 수를 과장해서 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저 시대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군사수가 100만이라고 하는 발언도 등장하는데 [45] 이 발언 하나를 가지고 조선이 백만대군을 보유한 강국이었다고 추정하면 심각한 오류가 생기는 것처럼 한명회가 도망노비 수가 100만이라고 한 발언 하나를 가지고 당시의 사회구조를 추정하는 것 역시 심각한 오류가 있는 주장일 가능성이 크다.

긍정 항목의 세번째 문단에선 노비의 비율이 15~18세기에 3,40%였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 주장은 '일반적인' 주장이 아니다. 일단 조선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이영훈 교수의 경우 15세기 중반에 노비 비율이 폭증해 노비 비율이 3,40%가 됐지만 영조 시대, 즉 18세기 중반에 노비의 비율이 10% 미만으로 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규정지은 제임스 팔레 교수의 경우 노비 비율이 30%가 된 것은 협호현상이 활발해진 16세기의 일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Rodriguez, Junius P.의 The Historical Encyclopedia of World Slavery(1997)에선 조선시대의 노비비율이 평균적으로 10% 수준이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영훈 교수가 15세기 중반에 노비 수가 폭증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세종 시대의 전문가인 박현모 교수 등 여러 전문가들이 반박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반박 항목에 서술된 비율에 대한 주장은 일반적인 주장이 아니며 학자마다 의견이 심하게 갈린다.

긍정 항목의 네번째 문단에선 양천교혼은 일부 권력형 사노비만 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근거가 부족한 주장이다. 1609년 울산 지방의 호적을 분석해보면 외거노비 배우자의 53.4%가 양인여자였다. 반박 항목에 서술된 주장대로라면 1609년 울산 지방에서 배우자를 가진 외거노비 중 절반 이상이 권력형 노비였다는 얘기이다. 애초에 양천교혼이 소수 권력형 노비만 할 수 있는 특수한 케이스였다면 양천교혼 문제 때문에 노비 수가 유의미하게 증가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긍정 항목의 다섯번째 문단에 서술된 내용의 경우 성씨를 쓰지 않는 것을 노예상징의 일종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의 평민들은 일반적으로 성씨를 가지지 못했다. 성씨의 유무를 노예상징으로 간주한다면 에도 시대의 일본 평민들은 노예 상징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비가 남자는 머리를 깎고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도록 강요받았다는 서술도 의문이 가는게 당시 사회모습을 그린 풍속화에선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그런 노예상징을 강요받았는데 왜 풍속화에는 그런 복장을 한 노비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지 의문이다. 또한 창적이라는 단어는 조선 시대엔 거의 쓰이지 않던 단어였고 그냥 백성을 지칭하기도 하는 단어였다는 점에서 창적이라는 단어가 조선 시대 노비들의 노예상징에서 유래되었다고 보긴 힘들다.[46]

3.3. 동아시아

3.3.1. 일본

일본은 야마토 시대(3세기)부터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예제를 폐지할 때까지 공식적인 노예제도를 운영하고 있던 나라였다. 일본의 노예와 관련한 최초의 기록은 후한서 동이전으로[47] 왜국 왕 스이 쇼우(帥升)가 후한의 안제(安帝)에게 노예 160명을 바친 기록이 최초이다. 이외에도 왜왕 히미코가 239년 위(魏)의 명제에게 사절을 보내 남녀 노예를 바첬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등 적어도 야요이 시대때 부터 노예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노예들은 당시에는 세이코(生口)라고 불리웠다. 결국 일본의 노예제도는 에도시대 이후 쇄국에 의해 자유교역이 제한된 것과 전쟁이 끝나고 인구가 늘어나 노동력 부족이 대부분 해소되어 매매가 상업적으로 성립되지 않을 때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 물론 에도시대 이후에는 그 대신에 농노제가 그만큼 크게 발달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

다이카 개신 이후 일본은 중국의 율령제를 본떠 국민들을 양인천인으로 나누고 천인은 5가지로[48] 구분하였다. 8세기에는 노예를 누히(奴婢)라고 부르며 노예 제도에 관한 일련의 법률들이 발표되었다. 10세기 초 율령제가 붕괴되면서 법적인 노예 계급은 사라졌으나 실질적인 노예제도는 여전하였고 노예매매와 인신매매 역시 전국시대때 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굶주리던 사람들이 자신과 배우자, 자녀를 판매하는 등 인신매매가 증가하면서 [ruby(人商人, ruby=ひとあきびと)]라 불리는 노예상인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가마쿠라 막부는 1239년 인신매매 금지를 명하기도 하였으나 심한 기근이 발생했을 때에는 자매[49]를 묵인하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후 전국시대에 다시금 인간사냥과 노예매매가 빈번히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전국시대 전쟁이 터지면 아시가루 등 잡병들이 침략지의 농민들을 상대로 일명 란보도리(乱妨取り) 또는 란도리로 불리우는 인간사냥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노예사냥을 해왔기 때문이다. # 노예사냥과 인신매매는 전쟁에 참여하는 아시가루들의 궁극적인 목표였으며 이는 전국시대의 아시가루들은 부족한 급여의 대안으로서 적지에서의 약탈을 합법적으로 인정받아 자신들이 침략한 침략지의 주민들을 잡아서 노예로 팔아 먹는 것이 귀중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 당시는 대항해시대포르투갈 같은 유럽 세력들과도 교역을 하였기에 많은 일본인 노예들이 유럽 상인들에 의하여 전세계 각지로 팔려나가게 되었다. # # # 이는 덴쇼 소년사절단이 해외에서 직접 목격했던 일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

이렇게 전국시대 당시 일본은 농민들이나 전쟁포로같은 자국 일본인들을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마냥 해외에 노예로 팔아먹은 사례가 매우 많았다.[50] 주로 서양인들과 교류가 잦은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자국민 노예들을 팔아넘겼으며[51], 포르투갈인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인 노예 무역이 기승을 부렸다. # 여기에는 서양 선교사도 가담한 경우도 있어서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독교를 금압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화약값 대신 팔려나간 일본인 노예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 중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들도 노예로 팔려갔다. 훗날 16세기 말에 에도 막부는 일본 내에서 노예 매매를 금지했으나, 천민계층인 부라쿠민이나 '요시와라 유곽 같은 집창촌에서 여성을 매매하는 등 실질적으로는 노예라고 규정지을만한 이들이 계속 잔존했다. 거기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농노들이 노예처럼 의복 등에서 '노예상징'을 강요받는 등 노예에 가까운 취급을 받기도 했었다. #

1570년에 포르투갈에서는 세바스티앙 1세가 포르투갈 내의 일본인 노예 거래를 금지하는 법령으로 세바스티앙법을 공표했지만, 포르투갈령 인도에서는 준수되지 않았고, 1603년에 스페인에서 펠리페 3세가 고아에서 일본인 노예 금지를 위해 세바스티앙법을 다시 공표했으며, 고아에서는 이를 반대했다. 1605년에 펠리페 3세가 인도 부왕에게 세바스티앙법을 공표하도록 했고, 1607년에 고아에서 일본인 노예를 삼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암암리에 이루어졌고 단속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11~17세기 일본에는 게닌(家人, 下人)이라는 피지배 예속민 계층이 존재했다. 이들의 정확한 규모에 대해선 여러 주장들이 있으나 17세기의 일부 지방들의 인구대장에서 이들의 비중이 3,40%였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은 주인에게 예속된 존재였으며 주인에 의해 매매, 양도, 상속, 임대가 가능했고 주인에게 소송할 권리가 없었다. 주인들은 자신의 게닌을 죽여도 일반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닌의 신분은 세습되었으며 주인이 서로 다른 게닌들이 결혼해 낳은 아이의 경우 종모법에 따라 여자 게닌의 주인의 게닌이 되었다. 많은 연구자들은 이들이 노예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영훈 교수는 자신의 논문 '11~16세기 한국의 노비와 일본의 게닌(下人)'(2004)에서 이들이 노예 상징을 강요당했고 심한 차별을 당했던 점, 일본 막부에서 이들을 완전한 주인의 재산으로 인정하고 주인과 게닌 사이의 관계에 개입을 안했던 점, 그리고 조선의 노비는 주인을 제외한 다른 자유민들에 대한 법적인 권리는 보유했다는 점 등을 들어 일본의 게닌이 조선의 노비보다 더 노예적인 범주에 가까운 존재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인신매매와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마리아 루스 호가 쿨리들과 맺은 계약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창녀의 인신매매는 무엇입니까? 그녀들은 어릴 때 돈으로 팔려서 가혹한 조건 아래 홍등가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일본인 창녀의 매매가 합법이라면, 페루인 선장의 행위도 합법적인 것이 되지 않습니까."
마리아 루스 호 사건 당시 영국인 변호사 디킨스의 변론
"설사 창녀 매매에 의해 예증될 만한 노예제가 일본에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노예를 국외에 내보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청나라인 노동자를 요코하마에서 국외로 이송하려 한 페루인 선장의 행위는 위법이다."
마리아 루스 호 사건 당시 특명재판장 오오에 타쿠(大江卓)의 판결

이와 별개로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요시와라 유곽에서 일하던 일본의 유녀들도 사실상 성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는 마리아 루스 호 사건 당시 일본측의 판결문에서도 이들이 사실상 노예임을 인정한것을 보면 일본내에서도 이들을 사실상의 노예라고 판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근대화 시절인 19세기 메이지 유신 무렵부터 20세기인 1920년까지 일본에서는 가라유키상이라고 하여 규슈 지역의 가난한 여자들 30만명을 해외에 성노예로 팔아넘기기도 했다. 링크1, 링크2, 링크3, 링크4

가라유키상에 대해 일본 사회는 매우 상반된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초창기에는 "귀중한 외화를 벌어다주는 애국자다!"라고 칭송하며 낭자군(娘子軍)이라고 불렀으며, 심지어 근대 일본에서 가장 추앙받았던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조차 "매춘부의 해외 수출은 적극 장려되어야 하며, 결코 막아서는 안 된다."라고 긍정적으로 볼 정도였다. 그러다가 1905년 일본이 러시아와의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국제 사회에서 국가의 위상이 올라가자, "더 이상 외국인들 보기에 부끄러운 가라유키상이 계속 있으면 나라의 체면이 깎인다."라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결국 1920년 가라유키상은 폐지되었다.[52]

그런가 하면, 보기 드문 경우지만 조선에서 일본인 노예를 사들이는 일도 꾸준히 있었다.왜인 노비를 사는 것을 금하다 도망갈 것을 우려하여 왜노(倭奴)를 궁벽한 곳에 옮겨 두게 하다 심지어 고려시대에는 일본(日本) 상인 100여인이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고려(高麗)로 들어갔다가 고려에서 그 재화를 모두 빼앗고 원나라에 표문을 올려 일본인들을 전부 다 노비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한 경우도 있었다. 고려에서 표류한 일본상인을 노비로 삼기를 요청하다
3.3.1.1. 전국시대 당시의 일본의 노예제와 노예무역
대항해시대 당시 유럽과 접촉한 전국시대 일본에서도 같은 일본인들을 유럽인들에게 노예로 갖다 팔아버리는 경우가 매우 많았었는데 이는 당시 수출할 상품이 없던 일본이[53] 긴 전쟁 기간 동안 외국에 판 주력상품이 다름아닌 자국민 즉, 일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국시대 당시 일본은 농민[54]들이나 전쟁포로같은 자국 일본인들을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마냥 해외에 노예로 팔아먹는 사례가 아주 많았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저술한 '일본사'에서도 16세기 규슈지방의 노예사냥 현장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다. 전국시대 전쟁이 터지면 아시가루 등 잡병들이 침략지의 농민들을 상대로 일명 란보도리(乱妨取り) 또는 란도리로 불리우는 인간사냥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노예사냥을 해왔다. #

노예사냥과 인신매매는 전쟁에 참여하는 아시가루들의 궁극적인 목표였으며 이는 전국시대의 아시가루들은 부족한 급여의 대안으로서 적지에서의 약탈을 합법적으로 인정받아 자신들이 침략한 침략지의 주민들을 잡아서 노예로 팔아 먹는 것이 귀중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이다. 잡힌 주민은 여성들은 창녀로 팔려나갔고 노인과 어린이와 남자는 노동력이 부족한 마을에 노동 노예로 팔려나갔다. #1 #2 이러한 노예 판매는 일본이 통일되기 전에 세상을 하직한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등의 간토지방의 유력 가문들이 인신매매 1, 2위를 다투며 이들에 있어 노예 매매는 주요 수입원이기도 하였다.

노예가 존재한 만큼 전국시대에는 분쟁의 희생양으로 대신 처형당하는 해사인(解死人)이라는 슬픈 존재도 존재하였다. 전국시대에는 마을과 마을이 물싸움 등에서 무기를 들고 큰 분쟁을 빚기도 했다. 1592년, 셋츠국(摂津国)의 나루오 마을(鳴尾村)과 가와라바야시 마을(河原林村) 사이에 농업 용수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면서 치열한 전투로 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천하는 통일되었으므로 제멋대로 전투를 벌인 두 마을에 대해 히데요시는 격노해, 책임자를 불러내 책형 탁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을에서 처벌 대상으로 받친 것은 쇼야(庄屋: 촌장)나 명주(名主)가 아니라 이때를 위해 마을이 돌보던 거지들이었다고 한다. 이런 존재를 해사인이라고 하는데, 마을들은 거지나 떠돌이 같은 정규 마을 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굳이 몇 명 더 길러 두었다가 마을에서 큰일이 일어났을 때 책임자 대신 내놓아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이들의 존재 가치를 보았을때 일본내에서 노예로 팔린 사람들도 이 해사인들과 똑같이 제물로서 바쳐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전국시대의 악폐인 이런 노예 사냥의 피해는 비단 일본내로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16세기는 포르투갈스페인의 선박들이 세계의 항구에 출현한 대항해시대였으므로, 일본인 노예는 노예 매매를 통해 유럽에도 판매되기에 이른다.[55] # # # #
「我が旅行の先々で、売られて奴隷の境涯に落ちた日本人を親しく見たときに は、こんな安い値で小家畜か駄獣かの様に(同胞の日本人を)手放す我が民族への激しい念に燃え立たざるを得なかった。」

"우리가 여행하는 곳마다 팔려나가 노예 신세가 된 일본인을 가까이 보았을 때는 이런 값싼 값에 작은 가축이나 짐승처럼 (동포인 일본인을) 놓아주는 우리 민족에 대한 격렬한 생각이 불타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全くだ。実際、我が民族中のあれ ほど多数の男女やら童男・童女が、世界中のあれほど様々な地域へあんなに安い値でさらっていって売りさばかれ、みじめな賤業に就くのを見て、憐憫の情を催 さない者があろうか。」

"사실 우리 민족의 저만큼 많은 남녀라든가 동남동녀가 세상의 저만치 여러 고을을을 그렇게 싼 값에 휩쓸려가서 팔아치우고 비참한 천업에 종사하는 것을 보고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덴쇼 소년사절단의 회화록 중에서 # #

이것은 1582년(덴쇼 10년) 덴쇼 소년사절단이 해외에서 직접 목격했던 일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 이러한 해외로의 일본인 노예 판매는 주로 서양인들과 교류가 잦은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일본인 노예들을 해외에 헐값에 팔아넘기고 그 대가로 조총화약등을 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56] 실제로 포르투갈인들은 중국인과 일본인과 같은 아시아인들에 대해서 지성과 근면 같은 좋은 자질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노예로서 선호하였다고 한다. # 이러한 측면에서 볼때 일본인 노예들은 유럽에 도착한 최초의 일본인들로 간주되고 있으며, 1555년 교회의 기록에 따르면 포르투갈은 다수의 일본인 노예 소녀들을 매입하여 성적인 목적에서 포르투갈 현지에 데리고 있었다고 한다. # 그 당시 일본인 노예는 이러한 성적인 이유 탓인지 남자보다 여자가 더 선호되었으며 행선지는 고아를 중심으로 한 동남아시아이지만, 포르투갈 본국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

가령 시마즈 가문의 팽창 당시 오오토모 가문은 자신들의 영지였던 붕고 지방을 빼앗기면서 붕고지방의 농민들은 대규모 노예사냥의 희생냥이 되게 된다. 이후 붕고 지방의 농민들은 히고 지방으로 노예 상인들에 의해 헐값에 끌려가게 되었으며 이렇게 수 많은 노예들을 싼 값에 확보한 노예상인들은 시마바라 반도(16세기 일본인 노예 수출의 전진기지였다.)로 이동시킨 뒤에 바로 이 일대에서 캄보디아 상인, 태국 상인,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수 많은 일본인 노예들이 여전히도 헐값에 인도, 필리핀, 마카오 같은 아시아 지역들 뿐만 아니라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 같은 중남미 지방에 이어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유럽 지역으로까지 전세계 각국으로 팔려나가게 된다. #
"일본인 수백명 남녀 불문하고 남만선(유럽인들의 배)에서 사들여, 짐승처럼 손발에 쇠사슬을 묶은 채 배 밑바닥으로 몰아넣었다. 지옥의 가책보다 심하다. 중략.. 게다가 우마(牛馬)를 사들여, 살아생전 껍질을 벗기고, 중(서양인 선교사를 가리킨다)도 제자도 손을 써서 먹고, 부모 형제도 무례한 법, 축생도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日本人が数百人、男女問わず南蛮船に買い取られ、獣のごとく手足に鎖を付けられたまま船底に追いやられた。地獄の呵責よりひどい。 ──中略── その上、牛馬を買い取り、生きながら皮を剝ぎ、坊主(宣教師を指す)も弟子も手を使って食し、親子兄弟も無礼の儀、畜生道の様子が眼下に広がっている……")
- 『규슈어동좌기(九州御動座記)』

이 당시 해외로 팔려나간 일본인 노예들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당시 히데요시의 측근이자 히데요시의 규슈 원정에까지 같이 동행하였던 오오무라 유키(大村由己)가 일본인 노예가 서양인들에 의해 나가사키항에서 노예 매매로 대량 연행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는 자신의 저서인 『규슈어동좌기(九州御動座記)』에서 위와같이 분개하여 쓴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배 한척 당 약 200명 정도는 실은 것으로 추정된다. # 추정치이기는 하지만 해외로 끌려간 일본인 노예는 포르투갈 출신 노예 상인들이 주도한 경우가 대부분으로, 그 피해자는 대략 5만명에 이른다고한다. 하지만 이 5만명이라는 숫자에 관해서는, 덴쇼 10년(1582년)에 로마에 파견 된 덴쇼 소년사절단 일행이 세계 각지의 가는 곳마다 일본의 젊은 여성들이 노예로 착취 당하고 있는 모습들을 목격한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 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일본인 노예들이 전세계로 팔려나간게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하는 견해 또한 존재한다. #

당연하지만 오오무라 유키는 자신이 목격한 서양인들에 의한 일본인 노예 매매의 끔찍한 참상을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고, 히데요시는 격노해, 즉시 포르투갈 출신으로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료(Gaspar Coelho)를 불러와 "왜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렇게 열심히 기독교 포교에 기를 쓰고, 그리고 일본인들을 사서 노예로 배에 끌고 가는가?(何故ポルトガル人はこんなにも熱心にキリスト教の布教に躍起になり、そして日本人を買って奴隷として船に連行するのか)"라고 왜 그런 심한 짓을 하느냐고 직접 추궁했다.

하지만 코엘료는 "파는 사람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코엘료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일본인 노예 매매에는 판매자 역할을 하던 '키리시탄 다이묘'들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어떤 형태로든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서양인들의 만행을 보고 따라 하여, 「이웃의 일본인이, 자식을 팔고 부모를 팔고 처자를 판다(近所の日本人が、子を売り親を売り妻子を売る)」라고 하는 막장 상황도 있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로 「규슈어동좌기(九州御動座記)」에 그러한 실상이 기록되어져 있다. #

이렇듯 일본인 노예 매매에는 서양 출신 선교사들도 가담한 경우들이 있어서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기독교를 금압하는 주된 이유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57][58] 화약값 대신 팔려나간 일본인 노예들 결국 대항해시대가 막을 열었던 16세기 국제 노예시장의 네트워크에 일본도 포함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임진왜란때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 일부가 서양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리기도 했다.[59] # # 이후 일본에서 이러한 노예무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재를 받게 된다.
"대당, 남방, 고려일본인(日本人)을 매견(賣見: 팔아서 보내는것)하는 일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曲事(くせごと): 부정한 일 = 범죄)이며 덧붙여, 일본에 있는 사람을 매매하는 일을 정지시킨다. 굳게 정지하지 않으면 엄벌해야 할 자이다."

大唐、南蛮、高麗え日本仁(日本人)を売遣候事曲事(くせごと = 犯罪)。 付(つけたり)、日本におゐて人之売買停止之事。 右之条々、堅く停止せられおはんぬ、若違犯之族之あらば、忽厳科に処せらるべき者也。
(伊勢神宮文庫所蔵 「御朱印師職古格」)[60]

1587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러한 상황에 위기감을 느끼고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한 일본인의 노예매매를 금지시켰다. 동시에 히데요시는 전국의 다이묘들에 대해서도 노예매매를 금지하는 취지의 명령을 내렸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 정벌 이후 일본인 노예들의 국제 매매를 금지하면서 발령했던 행동지침 중에는 중국, 포르투갈, 조선 등에 일본인 노예 판매를 금지한다 라는 문구 또한 있었다. 일본을 통일한 사람으로서 자국민을 노예로 해외에 판매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히데요시의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조치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노예매매는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포르투갈 상인이 직접 일본인을 구입하지 않았더라도 국내에 노예들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노예매매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실제로 일본에 있었던 포르투갈인 선교사는 동포 상인의 일본인 노예매매를 매우 싫어하여 본국에 단속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당시 포르투갈의 국왕이었던 세바스티앙 1세(Sebastião I)는 1570년 9월 20일에 일본인 노예매매 금지령을 내렸으나 효과는 없었다고 한다. (세바스티앙 1세(Sebastião I)는 포르투갈의 노예 무역이 규모가 커졌기 때문 일본에서의 가톨릭 개종에도 그로인한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1571년에 일본인들을 대상으로한 노예 무역의 중단을 명령한 것이었다.[61][62]) 당시 이러한 현상을 한탄하며 포르투갈의 석학 안토니오 베이라는 이렇게 말하였을 정도였다. "법이란 것은 있어도 위반자는 끊이지 않는 법이다. 예를 들어 일본인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이 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국내에는 다수의 일본인 노예가 존재하는 사실에 의해 이를 증명할 수 있다."[63] #

결국 1595년 포르투갈은 중국과 일본 출신 노예들의 매매를 완전히 금지하는 법을 통과 시켰지만 계약 및 계약 노동의 형태로 강제 노동이 지속되었으며, 심지어 일본 노예 여성들은 1598년 문서에서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인 Luis Cerqueira가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에서 무역하는 포르투갈 선박에서 일하는 유럽인과 아시아인 또는 아프리카 선원들에게 성노예로 팔리는 경우마저도 있었다. # 노예매매 금지령은 그 후에도 종종 발령되어 에도시대에 들어서는 1626년에도 금지령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노동력이 필요한 수요가 있고, 인간을 노예로서 파는 데 이익이 되는 공급이 존재하는 이상 이 악폐를 뿌리뽑기는 어려웠다. 결국 노예매매가 사라지는 것은 쇄국에 의해 자유교역이 제한된 것과 전쟁이 끝나고 인구가 늘어나 노동력 부족이 대부분 해소되어 매매가 상업적으로 성립되지 않을 때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

3.3.2. 중국

중국에는 노예라고 할 수 있는 세습 노비와 천민 계층이 존재했으며, 청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중화민국 초기에까지 존재했다. 한족 왕조였던 중국 한나라 시대에는 노비들을 전문적으로 사고 파는 시장인 노시(奴市)가 있었다. 한나라 시대 대부분의 노비는 파산한 농민이 전락하여 형성되는데 노비는 각종 중노동에 종사했으며, 주인의 사적인 소유물로 간주되어 주인의 마음대로 사거나 팔 수 있었다.[64] 또한 송나라 시대에 방호(旁户)라고 하여 사천과 섬서 지역의 소작농들은 대를 이어 세습하면서 지역의 부호들을 위해 노비처럼 일을 해줘야 했다. [출처:] 당나라 측천무후 시절,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켜 당군을 격파하자 다급해진 당나라 조정에서 노비들을 군대에 보내게 했다거나, 장보고 시절 당나라 해적들이 신라인들을 납치하여 당나라로 끌고 가 노비로 팔았다는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중국에도 엄연히 노비는 존재했다. 조선, 일본 등과 같이 중국에서도 식솔을 노비로 매매하는 경우도 흔했다.

몽골족이 중국을 정복한 원나라 시절에는 강남 지역에서 부유하고 권세가 있는 집안에서 수천에서 수만 명 가량의 일반 백성들을 노비로 부렸고, 이러한 현상은 원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명나라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이렇게 부림을 당하던 명나라 시대의 노비들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자, "황제도 이미 바뀌었으니 주인도 마땅히 노비가 되어 우리를 섬겨야지!"라고 외치며 자신들을 부리던 주인들한테 반란을 일으켜 그들의 재산을 빼앗거나 죽였다. 심지어 이때의 정황을 기록한 문헌인 명계북략에서는 명나라의 노비들이 "길을 갈 때에는 흩어져서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고, 사대부를 만나면 횃불을 들고 포위하여 즉시 모든 것을 빼앗고 반드시 사지를 찢어 죽였다."라고 기록했다.[66] 이렇게 노비들의 반란을 겪고 불안감에 떨던 명나라의 사대부 같은 지배층들은 차라리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무사히 보존해 줄 수 있는 청나라에게 대거 항복하게 된다.[67]

조선과 같은 시대인 중국 청나라에서는 가생자(家生子)라고 하여 일부 세습 노비가 존재했다. 청나라 시대 노비들은 주인이 하녀으로 삼거나 다른 사람한테 첩으로 넘겨주는 경우를 제외하고 양민과 결혼할 수 없으며, 노비가 낳은 아이는 가생자가 되어 역시 부모의 신분을 물려받아 노비가 되었다. 아울러 청나라의 옹정제는 동화록(東華錄)에서 노비 관계를 “하인(노비)들은 자손 대대로 영원히 주인에게 복종해야 하며, 하인의 신분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라고 옹호했다.[68]

청나라의 노비들은 사회 최하층에 있었으며, 인신자유가 없으며 주인이 시키는 대로 따르고 학대를 당해야 했으며 짐승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른바 노비는 천민이며 법률적으로는 축산품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청나라 시절의 노비들은 여러 부류들이 있었다. 첫째는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진격하기 전에 붙잡아 노예로 부린 한족이었고, 둘째는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진격한 후에 붙잡아 노예로 부린 한족이었으며, 셋째는 범죄를 저질러 국경지역에 보내져 주둔 군대의 노예로 전락한 자이고, 넷째는 너무나 가난해서 노예로 팔린 빈민들이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첫째와 둘째 부류의 노비들이 많았고 후기에는 넷째 부류의 노비들이 많아졌다.

첫째 부류와 두번째 부류의 한족은 쿠투러(노예병)이 되는 경우가 좀 있었는데 이렇게 노예병이 되어 팔기군에 소속된 한족노비는 1720년 기준으로 241494명으로 전체 팔기군 69만명 중 1/3 이상을 차지했다.

높은 벼슬을 지내는 집안에 필요한 노비들을 공급하고자 전문적인 인신매매꾼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소군(蘇郡)에는 등돈호(等囤戶 어린 여자 아이를 일정한 나이가 될 때까지 키워 파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자)가 있었는데, 가난한 집의 딸을 보면 사다가 집에서 키워 많은 돈을 받고 먼 지역으로 첩이나 노비로 팔아버렸다. 혈육을 서로 갈라놓고 사람의 평생을 망치는데 이보다 더 한 것은 없을 것이다.(옥화당양강시고玉華堂兩江示稿의 57쪽)"라는 기록이 있다.

어떤 지방은 매 번 장날이면 백화가 진열되고 사방 멀리에서 팔려는 노비들이 몰려오곤 했다(장심태의 월유소식 권 3).

또 어떤 지방에서는 홍수나 가뭄 등 자연재해로 인해 가난한 집안에서는 하는 수 없이 아들 딸들을 팔기도 했다. 예를 들어 강희제 20년, 대동과 선부 등지는 연속 몇 해 동안 흉년이 들어 가난한 백성들이 아들과 딸을 팔았는데, 어린 아이는 백 문도 안 되고 장정도 은 1~2냥도 안 되었으며 크고 작은 수레들이 끊이지 않고 들이닥쳐 여러 손을 거쳐 판매되곤 했다.

또 어떤 지방에서는 노예 매매가 창궐했는데 인신 매매꾼들은 집단을 구성해 관병서리들과 결탁해 유괴와 납치와 약탈을 저질렀다. 사천성에서는 토표(土豹 시라소니)라는 이름을 가진 불량배 수십 명이 여자를 납치해 으로 입을 틀어막고 커다란 자루에 넣어 둘러메곤 도망쳐서는 배에 싣고서 천강을 건너 호북성에 가져가서 팔았다(납치당한 여자는 개당자開堂子라고 불렸다). 이 토표들이 관문을 지날 때마다 관부의 하인과 서리들한테 돈을 주고 그 대가로 무사히 통과했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관리들도 이를 보고도 못 본척 그냥 지나갔다(청인종실록 권97 7년 4월).[69]

또한 중국 청나라에는 타민(惰民). 세부(世仆), 반당(伴當), 단민(蛋民) 같은 세습 천민 계급들도 존재했다.[70] 이들은 옷차림과 가옥 등에서 모두 엄격한 규제를 받았고, 규모가 작은 수공업에 종사하거나 노동에만 종사할 수 있을 뿐, 지식인이나 농민이나 장사꾼이 될 수 없었다. 더욱이 글을 읽지도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었으며, 양인과 결혼하지도 못했다. 이 천민 계급들은 청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중화민국 시대에 되어서야 비로소 없어졌다[71].

아울러 청나라 건륭제 36년인 1771년, 청나라 정부는 천민 호적에서 벗어난 사람이 과거시험을 보려면 먼저 자격을 심사해야 하는데, 4대(증조부, 조부, 아버지, 본인)에 걸친 성분을 모두 조사하여 본 가족의 직계친속이 모두 청백해야 과거 응시 자격을 주었으며, 만약 그들 중 제 1대와 2대 및 삼촌 이내의 사람들이 여전히 천민들의 직업인 취고수나 심부름꾼 같은 직업을 갖고 있다면 과거 응시 자격을 주지 않겠다고 규정했다. 당시 대다수 천민들은 여전히 먹고 살기 위해서 천민 시절의 직업에 종사하는가 하면 대부분이 차별을 받고 있었다. 그 예로 소주의 걸호(거지들)들은 봄을 맞을 때 할 수 없이 심부름꾼으로 일하거나 취고수로 일해야 했다. 안휘성 남부에서의 세부들도 청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중화민국 초기 시절까지 계속 있었으며, 절강성의 타민들도 여전히 배를 집으로 삼고 살면서 육지에 오를 때는 신발을 신지 못했다.[72]

그리고 중국 쓰촨성 지역과 섬서성 지역에는 방호(旁户)라는 이름의 소작농들이 지주들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는데, 송사에는 이들을 가리켜 "서민임에도 소작농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노예처럼 일했다."라고 기록했으며, 20세기 역사학자 범문란(范文澜)의 중국통사에도 방호에 대해 "실제로는 소작에 의존해 살아가야 했고 대를 이어 세습하면서 마치 노비처럼 사역했다."라고 기술했다. 이들 역시 넓게 본다면 노예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73]

3.4. 동남아시아

다른 동남아시아도 태국과 사정이 비슷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노예무역이 매우 성행하였으며 주 공급처는 노예가 된 자국민, 전쟁포로, 약탈과 해적질로 사로잡은 노예였다.

3.4.1. 태국

전국민의 30%가 노예였다가 점진적으로 폐지되었다.###

3.5. 티베트

전국민의 절대다수가 농노였는데 이들에게 1913년까지 사지를 절단하는 등의 형벌이 공식적으로 있었다고 한다. 다만 중국의 프로파간다라는 반론도 있다. #

3.6. 남아시아

3.7. 중동

고대 페르시아 제국은 어떤 황제의 치세냐에 따라 다르긴 하나 대체로 노예 소유가 불법이었다. 페르세폴리스의 웅장한 궁전 유적들도 노예들이 아닌 임금노동자들의 손으로 지어졌고 고대인들의 사고에서 노예가 되는 것이 당연했던 정복지 주민, 빚쟁이 등의 계층들도 제국의 보호를 받았고 노예가 되지 않을 권리를 보장받았다.

고대 로마나 대항해시대 신대륙 플렌테이션에 가려져서 그렇지 이 쪽도 만만치는 않았다. 중세 때 노예 수요가 중동으로 집중되었다는데 있다. 중동의 노예무역이 매우 알려진 데에는 노예의 출신 및 처우가 매우 다양했다는 것도 한몫한다. 고대 로마와 마찬가지로 노예의 처우도 극과 극을 달렸는데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말을 탈 줄 아는 노예의 경우 도심 2~3층짜리 건물 한 채 수준의 가격이 매겨져서 서민보다 나은 대접을 받은 받았다. 튀르크계 군인 노예의 경우 운이 좋은 경우 합법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도 있었으나 흑인 노예의 경우 운이 나쁘면 뙤약볕 아래 모기가 들끓는 늪지대를 개간하는 극한 작업을 맡았다. 현 이라크에 위치했던 압바스 왕조에서 흑인 노예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적도 있을 정도다.[74]

역사적으로 흑인 노예무역에 열을 올린 사람들 역시 유럽인이 아니라 아랍인, 페르시아인들이었다. 북아프리카 외에도 중근동 역시 인도양을 중심으로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티오피아, 말리 등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와 부족들은 고대시대 때부터 아랍 상인들과 많은 교류를 해왔다. 이는 근대까지 이어졌으며 아랍에 대한 아프리카의 주요 수출품은 상아나 황금 외에도 약탈로 노획한 노예였다.

고대 쿠시 왕국이 정기적으로 노예를 상아와 함께 페르시아에 조공으로 바친 것을 최초로 본다. 아랍인들은 흑인들을 열등하게 여기는 경향이 심각한데 18세기 오만 제국의 경우 흑인 노예 20~50명의 시세 가격이 전투용 말 한 마리 가격과 맞먹었다.[75] 유명한 아라비안 나이트를 비롯한 중동 문학에서 흑인은 추악하고 우매하게 묘사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76] 참고로 이슬람 문화권에서 노예들 중 흑인 남성들에 대해서 성욕이 과해 일을 할 수 없는 존재로 간주하여 생식권을 박탈하고 예외없이 거세를 시켜버렸기 때문에 흑인 노예의 자손들은 흑인 여성 노예로부터 태어난 후손들을 제외하면 극히 드물다고 한다. 아프리카男을 노예로 삼고 거세한 아랍인들한테 카다피가 사과하기도 했다.

근세 이란에서 발흥한 사파비 제국의 경우 오스만 제국의 데브시르메 제도[77]를 모방하여 군인 대부분을 캅카스 지역에서 납치한 혹은 투항한 조지아인으로 채웠는데 이는 사파비 제국 초창기 종파 차이 문제로 각지에서 반란이 빈발하여 믿을만한 세력이 이들 노예병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믿었던 아르메니아인이나 체르케스인, 조지아인을 강제로 이슬람 시아파로 개종시켜 순니파 봉기군들을 진압하도록 활용한 것인데, 어차피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요새에서 고립된 노예병들은 어쩔 수 없이 현지 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할 수 밖에 없었다. 조지아인 남성이 군인으로 끌려갔다면 조지아인 여성은 술탄의 하렘으로 끌려갔다. 하렘의 후궁을 납치한 기독교인으로 채우는 관습은 사파비 제국의 후신 카자르 왕조로도 이어졌다. 1829년 당시 테헤란의 주 페르시아 러시아 대사관에서 아르메니아인 노예들을 해방하고 구출한 일을 두고 이란인 군중들이 샤한샤를 모욕했다고 여겨 폭동을 일으키고 습격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문인으로도 유명했던 러시아 대사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경향은 근대에도 이어지는데 특히 이들 아랍 국가 중 오만 제국은 당시 포르투갈 왕국, 스페인 제국 등과 함께 잔인하고 악랄한 제국주의자 노예 상인으로 유명했다. 오만 제국 치하 동아프리카 탄자니아다르에스살람과 바가모요, 잔지바르세계 최대의 노예 무역항이었다.

더욱이 아랍 국가들에서 아프리카계 아랍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은 현재진행형으로 심각하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흑인 국가들은 자기 나라들을 식민지배했던 유럽계 백인 못지않게 아랍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하다.

특히 차드나 말리, 니제르, 세네갈, 탄자니아, 케냐 등 과거 아랍인들에게 침략, 식민지배를 받았거나 전쟁을 겪었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흑인 국가들의 사람들에게 이집트나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같은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면 바로 그것들은 아프리카인들이 아니다. 라고 바로 욕부터 튀어나오거나 나쁘게 여길 정도이다.

이집트 남부와 수단에 흑인 아랍인은 누비아인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경우이다. 모리타니,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이라크에서는 흑인의 후손도 있으며, 무함마드도 한창 박해를 받았을 때 같이 탄압을 받았던 에티오피아로 신도들을 내보낸 것도 있기도 하다.

이슬람권은 세계에서 가장 뒤늦게 노예제를 폐지시킨 지역이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여러 국가에서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노예를 부리고 있었다. 극단주의자들은 다시 부활시키자고 하고 테러단체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보코 하람 등은 실제로 노예제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아프리카엔 이슬람이 발흥하기 이전에도 흑인노예 무역루트가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평등과 평화를 약속한 종교가 뻔뻔하게 똑같이 악랄한 노예 장사를 했다는 점, 그리고 그게 현대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노예무역과 마찬가지로 정상참작의 여지는 없다.

3.7.1. 성노예

이슬람에서 성노예는 적어도 20세기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다른 문화권에서 노예는 남자가 많았지만 이슬람에서 노예의 대부분은 여자였다. 쿠란과 샤리아는 성노예의 사용을 공식화하고 후대의 율법학자들도 이를 지지했다. 왕실하렘은 물론 일반가정도 가사와 성적봉사를 제공하는 노예 서넛정도는 두는게 일반적이었다. 부인과 친척의 노예를 돌려쓰는 경우도 흔했다.[78] 노예는 이슬람으로 개종해도 노예였다. 남자가 소유할 수 있는 성노예의 수에는 제한이 없지만 여자가 성노예를 두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성노예는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고 종류와 역할도 매우 세분화되어 있었다.[79] 성노예를 빌려주고 돈을 받는 사업도 성행했다.

이슬람 초기 성노예는 자유롭게 매매될 수 있었고 노예의 아이도 노예였지만 후에 법이 개정되면서 주인의 아이를 낳은 움왈라드는 매매가 불가능해진다.[80] 그러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대대손손 노예로 부려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무왈라드라고 한다.[81] 이슬람 법학자들은 무왈라드가 친자식과 산파와 함께 주인의 아이를 낳은 것을 증언하면 움왈라드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자유민 여성도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마당에 성노예가 증인을 데리고 나돌아다닐 수 없었으므로 유명무실한 조항이었다.[82][83]

물론 피임을 하는 편법도 있었다. 저명한 이슬람 법학자 알 가잘리는 성노예의 상품성을 유지하기 위한 피임을 권장했다.[84] 이슬람 법학자들은 불임이거나 월경을 안 하는 척하는 노예들이 많으니 월경을 눈으로 확인한 후 구입하라고 충고했다.

위의 언급된 오스만 제국과는 딴판인 상황이다. 오스만 제국도 16세기 이후로는 무슬림 인구가 다수인 국가가 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의 노예법은 노예의 세습을 금지하고 (단 농노와 같이 영주에게 매인 영민들은 존재함) 노예가 이슬람을 받아들인 즉시 자동해방이고, 성노예는 아예 교리상의 해석을 근거로 금지했다. 하렘같은 예외도 있지만 그야말로 예외일뿐 군주를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해당사항 없는 내용이다. 애초에 하렘제도는 고대 튀르크인들에게서 이어져온 것으로 이슬람과는 무관한 전통이다. 성노예나 첩을 금지하는 해석은 상호 평등한 신분이고, 상호 자유의지로 동의해 결혼계약을 체결한 부인 4명까지만 허용하는 샤리아법에 근거한 것이다. 말하자면 아랍권의 성노예 관행은 이슬람적이지도 않고, 아랍권의 악습에서 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7.2. 백인 노예

압바스 왕조맘루크 왕조에서는 튀르크인 노예들로 구성된 맘루크라는 직업 군인 집단이 따로 있었다. 그런데 맘루크는 일반적인 노예가 아니라 고도로 전문화/제도화된 용병 집단에 가까우며, 서아시아의 정치/군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후우마이야 왕조의 경우 지리적인 이유로 튀르크인 대신 프랑크 왕국을 통해 수입해온 슬라브인 백인 노예를 맘루크로 활용했다.

북아프리카 같은 경우 중세 초부터 사라센 해적들이 날뛰었는데 이들은 서유럽과 남유럽 국가들을 공격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을 노예로 잡아 중동 이슬람 국가에 매매했다. 중세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이어진 아말피,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들은 사라센 해적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던 어민들과 상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명목상 무슬림은 같은 무슬림을 노예로 삼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유럽 기독교인들을 납치한 것인데, 같은 무슬림을 잡아다 팔 때도 적지는 않았다. 대표적으로 우크라이나 일대를 완전히 황폐화시켰던 크림 칸국의 경우 루테니아 지역 기독교인들만 납치한 것이 아니라 종종 동쪽에 이웃한 무슬림 체르케스인들도 납치하여 비싼 값에 팔았다. 중세 초에는 유럽에 비해 경제적으로 우월했던 이슬람권으로 노예가 유입되었다면 근세에는 경제적으로 우월했던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크림 반도의 카파 항에서 노예들을 수입하였다.

3.8. 아메리카

3.9. 대항해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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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의 이동표
근세 식민주의 시대에 이르러 아프리카 노예무역이 세계적인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초기에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선취권을 얻은 포르투갈이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후에는 영국을 포함한 후발국가들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유대인 상인들이 노예무역과 노예시장을 장악했다. #

당시 노예무역은 가장 많은 이윤이 남는 장사로 통했다. 때문에 노예상인들은 족장과 물물교환을 하는 형식으로 거기에 있던 노예들을 받아내거나,[85] 용병들을 고용해 아프리카로 가서 눈에 보이는 아프리카 주민들을 무더기로 납치했다. 포르투갈도 아랍과 아프리카 현지 상인들의 방식을 답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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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항해는 기간도 최소 한 달 이상인데다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는 장거리 항해 자체가 목숨을 건 여정이었기 때문에, 한번에 최대한 많은 노예를 수납하기 위해 위 사진처럼 노예를 실었다. 이 배에 실려있던 식량들은 당연히 항해사들을 위한 식량이 대부분이었고, 아프리카 노예들은 이러한 상태에서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한 달 이상을 버텨야 했다. 다만 이건 배 자체의 적재량의 한계와 노예를 최대한 많이 실으려는 욕심 때문이고, 노예는 살려둬야 가치가 있는 거니 간신히 목숨만 연명할 정도로라도 먹을 것을 주기는 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죽으려고 입을 꾹 다물고 음식을 거부하는 노예들이 나오면, 노예상들은 시뻘겋게 타오르는 석탄을 쇠집게로 집어 얼굴에 들이대서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한 다음, 목구멍에 금속 깔때기를 쑤셔박아서 음식을 쳐넣는 잔혹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비참한 항해 과정에서 지독한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바다에 뛰어들거나 상처를 일부러 곪아들게 만들어 자살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노예들이 사망하였지만, 절반만 살아남아도 남는 장사였던 관계로 저것보다 더 심하게 적재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위의 사진은 꽤나 깨끗하게 재현한 것이지만, 저렇게 쇠사슬로 한 달간 묶어놓았으니 당연히 대소변도 저렇게 누운 채로 봐야 했다. 당연히 아래칸에 있는 노예는 그 대소변을 다 몸으로 받아내야 했고, 그렇지 않아도 쇠약해져 있는 몸은 병에 걸려 죽어나갔다.

대표적으로 영국에서 1781년 Zong호라는 배에서 400명의 노예를 싣고 서아프리카 상토메에서 자메이카로 가던 도중 선장의 실수로 기항지를 놓쳐 항해가 길어져 식량과 물이 부족해졌다. 본인들의 살길은 물론이고 이 노예들은 화물로서 보험처리가 되었는데 후에 병으로 죽은 노예들에 대한 배상도 걱정되어 약하고 병든 노예들 중 133명을 골라 바다에 던져버려 그대로 익사시키게 만들었다. 후에 법정은 이들한테 죽은 노예의 소유주에게 화물에 준하는 배상금을 지불하는 걸로 다소 가벼운 처벌을 내렸지만, 후에 영국에서 노예제 폐지를 논의하는 큰 사건이 되었다.

노예제의 역사와 함께 노예 탈출의 역사도 시작되었다. 1526년 현재의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동쪽에 위치한 스페인 정착지에 노예로 잡혀와 있던 아프리카 흑인 한명이 탈출한 것이 미국 대륙 최초의 노예 탈출이다. 원주민 족의 보호를 받았다고. 영국의 초기 식민지였던 제임스타운이 1622년 원주민들에게 습격당해 파괴됐을 때 백인들은 살해됐으나 흑인들은 원주민들에 합류했다.

18세기~19세기에 들어서면서 체로키, 세미놀 족 등의 아메리카 원주민도 흑인 노예를 부리며 플랜테이션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다만 이 경우는 경제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이 백인 국가와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로부터 정당한 문명국으로 인정받기 위해 정부를 구성하거나 심지어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지만 미국은 무시했다.

그러나 19세기가 되면서 흑인 노예무역은 사그러들게 되는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유럽에서 열대농산물 수요가 늘어나 아프리카 현지에서 생산 및 조달하기 위해 노동력이 필요해졌고, 인권의식이 커지면서 아프리카인들은 자주 집단반란을 일으켜 노예주들이 관리하기 어렵게 되었다. 노예무역의 악폐가 널리 알려지면서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더이상 아프리카인을 함부로 다루지 말자는 여론이 커졌다.[86]

1807년 영국이 노예무역을 불법화하고[87] 노예무역 단속을 시작하자 영국의 압박을 받은 프랑스나 스페인, 네덜란드도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단속에 동참한다. 이후로 노예무역은 음성화되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미국 남부에서는 이에 대해 노예간의 통혼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흑인노예를 대폭 늘려 공급 중단에 대처했으나 결과적으로 50년쯤 지나자 노예제의 이익 상실과 수가 급격히 많아진 흑인들에 의한 해방 운동과 미 정부에 의한 노예제 폐지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1833년 영국을 시초로 1847년 오스만 제국[88], 1848년 프랑스, 스페인어권 라틴아메리카에 이어 남북전쟁으로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이때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노예제도 폐지가 되고 이들은 자치구에 합류했다. 2000년대 들어 자치구들에서 흑인들의 거주를 금지하는 안건들이 통과되었으나, 법원과 미국 정부가 반대하여 논란 중이다. 1886년 쿠바, 마지막으로 1888년 5월 22일 브라질에서 노예제가 폐지됨으로서 모든 서구 국가에서 노예제가 사라진다. 그 이후로 서구 열강들이 새로 차지하는 모든 식민지에서 노예제가 폐지되게 된다.

4. 노예제가 폐지된 이유 : 효율 문제

노예 제도는 산업 혁명 이래로 산업 혁명에 성공한 사회에서도 존재하였지만 그 사회의 경제적 기반이 되지는 못하였는데 이는 노예제의 근본적인 문제인 비효율성 때문이다. 산업혁명이후 노예제를 유지하는 것보다 노예제를 폐지하고 그냥 노동자한테 월급을 주는 것이 돈이 덜 든다는 계산이 나온 것이다.

때문에 노예로 유명한 미국 남부에서도 노예제 폐지에 대한 논란이 자발적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노예 제도는 개척 과정에서 등장하였는데 초기의 주력 산업은 담배 농사였다. 하지만 담배 재배에 의해 지력 고갈이 심각해지면서 약탈 농업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고 이걸 노예 유지비용과 비교하면 적자에 근접하고 있었다. 《국부론》을 저술한 아담 스미스는 이것이 이해득실의 문제라는 것을 간파하고 만일 이익으로 결판이 나면 논란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4.1. 태생적 비효율

아무래도 노예 입장에서는 열심히 해봤자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이 시킨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그 결실도 자유민이 일한 것에 비하면 매우 적다.

농장주들도 이를 대비하여 할당량을 정해두거나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노예를 처벌하거나 죽이는 등 채찍을 가하기도 하였으나... 이러자 곧 효율저하가 나타났다. 모두가 다 약속하고 일을 못해 버리는 것. 그럼 주인이 죽이거나 두들겨 패면 되지 않나 하겠지만, 폭력을 써도 손해는 결국 노예주에게 돌아간다. 당시 건장한 청년층 노예의 가격이 현대의 1억원에 달하는 고가였는데,[89] 이런 노예가 일을 못한다고 죽이면 당연히 주인의 손해이다. 맘에 안 드는 노예를 팔아치우려고 해도, 등에 채찍자국이나 도망자 낙인 등이 있으면 노예의 가격이 1천만원 이하로 급격히 떨어진다. 결국 공포로 통제할 수는 있어도, 이 방법으론 장기적으로 갈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예를 통제하는 간부들을 고용하는 것에도 비용이 들었다. 이런 감시꾼 역할은 보통 동네에 할 일이 없던 백인 하류층들이 주로 했는데, 이들이 하루종일 땡볕에서 노예들과 같이 있으며 근무를 감독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채찍을 휘두르며 때리는 것도 상당히 중노동이며, 이를 반복하는 것도 육체적으로도 힘들지만 정신적으로도 더 힘든 것이어서 이들은 보통 술에 의지하며 한 철 버티다가 오래 일을 못하고 폐인이 되거나, 일을 그만두기 일쑤였다.

거기에 이런 간부들의 폭력이 강해질수록 노예들의 도망이 늘었고, 이런 도망을 막기 위해, 철망을 치거나, 사냥개를 사들이고, 추적자들을 고용하고 하는 것도, 전부 다 주인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었다. 그렇게 도망간 노예를 잡아서 채찍질하고 다시 일시키며 팔아버린다고 해도, 노예의 가치는 떨어졌으니 주인에게는 계속 손해가 날 뿐이다.

남북전쟁 전의 남부의 경제는 이러한 비효율이 상당히 만성화되었다는 점에서 훗날의 현실 공산주의 국가나 오늘날 블랙기업에서 나타난 것과 유사한 폐단을 보였다. 남부의 대농장/대저택을 다룬 작품들을 보면, 엄청난 수의 노예들이 있는데 이들은 오직 자신에게 정해진 한두 가지의 업무만 하고, 다른 일은 하지 않으며 틈만 나면 주인과 감시꾼들의 눈을 피해 시간이나 때운다. 예를 들어, 이 노예는 거실만 쓸고, 이 노예는 설거지만 하고 이런 식이다. 결국 북부의 자유민들에게 돈을 주면 10명이 한 시간이면 할 일을, 노예를 쓰려면 100명을 데려가서 20명의 자유민들로 감독해야 10시간 만에 간신히 마무리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90]

4.2. 높은 유지 비용

우선 노예를 먹이고 입히는 비용 등과 재우기 위한 주택 건설에 대한 비용 등도 전부 주인이 부담해야 하는데, 노예들은 매맞기를 두려워해서 어떠한 일도 주도적으로 하지 않았고, 상을 준다고 해도 이들이 올리는 성과는 자유민들에 비해 극히 낮았다.

가혹하게 수탈하는 경우에도 생존과 노동력의 보존의 비용이 주인에 부과되는데 그 득실을 맞추기 상당히 어렵다.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는 자신의 사유지인 콩고 자유국에서 사실상 자신의 노예나 다름없는 콩고원주민들에게 고무 채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을 절단하는 형벌을 가하여 원주민들을 학살하였다.[91] 그 결과, 1893년엔 250톤도 되지 않았던 콩고 자유국의 고무 수출량은 1901년엔 6,000t으로 엄청나게 증가하여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재산을 크게 불린 것은 물론, 벨기에에 수많은 공공건물들을 건설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는 보통의 노예제와는 달리 원주민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반적인 노예 제도의 경우 주인이 노예를 먹이고 입히고 하면서 나름의 돈을 써야 하는데, 콩고 자유국의 경우 그냥 원주민들을 강제로 죽을 때까지 노역을 시키는 걸로 해결했다.

이 역시 초기에는 노예로 전락한 콩고인들의 단결력과 기술 수준이 떨어져서 레오폴트의 방식이 먹혔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콩고의 인구감소와 지속적인 저항으로 군대를 항상 동원해야 했고 군대 동원비용도 만만치 않게 되었다.

4.3. 집단 반발 가능성

대다수 노예들에게 공통적인 목표가 생긴다면 집단 반발의 가능성까지 존재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추가적인 관리 비용까지 요구된다. 노예 경제를 기반으로 둔 고대 사회에서도 이 비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예가 스파르타이다. 아테네 등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은 노예가 노력해서 자유를 사거나 전장에서 공을 세워 해방될[92] 수 있는 권리라도 주었지만 스파르타는 그것도 없었다.[93] 그러다보니 스파르타의 노예들은 틈만 나면 반란을 일으켰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며 무기를 들고 일어난 노예들은 수도 없이 많다. 당연히 이를 진압하거나 혹은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감시하는 것에도 많은 비용이 소모되었고 도망간 노예를 잡기위해 수색하는 것도 엄연히 주인 몫이었다.

거기다 아이티처럼 처음에는 빈약한 무장과 낮은 단결력으로 주인들에게 굴복한 노예들도 점차 주인인 프랑스인들처럼 최신무기를 장착하고 단결하면서 주인인 프랑스인과 프랑스를 몰아내고 국가 단위로 해방된 사례도 있다.다만 나라꼴이 막장이 되었다.

이것은 미국 남부에서 가장 우려하던 일이었는데 하필 가까운 아이티에서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했고 남부 내에서도 냇 터너 같은 이들이 존재했기 떄문이다.

4.4. 산업혁명 시기의 반전과 노예제의 효율성

이런 상황을 극단적으로 뒤집은 것이 산업혁명의 주역인 면방직 공업의 발전이었다. 이때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은 방직기, 방적기를 포함한 기계화가 이루어져 면방직 공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이 때문에 목화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목화를 재배하는 데에는 농기계도 없던 시절이라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때문에 노예제는 더욱 공고한 형태로 지속된다.

미국의 면방직 산업은 영국과는 달리 그리 발달하지 않았고 목화 자체를 수출하는 것이 주력이었다. 1791년 당시만 해도 미국의 목화 재배량은 90만 kg 정도에 불과했으나 불과 10년 뒤인 1801년에는 2200만 kg에 달할 만큼 늘어났다. 남북전쟁이 발생하는 1861년에 이르면 미국 수출품목 전체의 비중이 거의 60%에 달할 만큼 커졌다. 방적기는 목화에서 섬유를 빼내는 기계이고 방직기는 이를 이용해서 천을 만드는 기계이다. 둘 다 목화를 재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며 오히려 목화 수요가 크게 늘어나서 일손이 더욱 필요해졌다. 때문에 기계화로 인해 노예의 필요성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났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노예의 재산적 가치도 높아졌으며 이 때문에 많은 노예주들은 노예 해방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남북전쟁이 일어난다. 이후 다들 알고 있다시피 북부가 승리하여 노예는 해방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결과가 존재한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경제역사학자 로버트 포겔은 1974년 경제이론과 계량적 방법을 사용해서 미국의 노예제도가 오히려 생산 측면에서 더 긍정적인면을 지니고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면화 생산량, 진료 기록 등을 살펴본 결과 주인은 노예를 재산으로 여겨 최소한 가축 수준의 복지를 제공했을 뿐더러 오히려 그들의 처지가 북부의 노동자에 대한 대우보다 나은 수준이였음을 밝혔다. 노예제도를 통해서 얻는 이윤과 생산성으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노예를 포기할만한 유인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포겔이 인종 차별주의자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사실 그의 연구는 노예제도의 효율성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노예제도는 오히려 미국에 있어서 효율적인 제도였으며, 남북전쟁, 인권, 정치 등 경제외적 요인에 의해서 노예제도가 해체될 수 있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것이다. 또한, 포겔은 1949년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에니드 카산드라 모간과 결혼해서 두 아이를 둔 사람으로 당시 반인종적 정서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이다.

5. 현대의 노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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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도는 국가별 인구대비 노예 수를 나타낸 지도이다. 모리타니아이티, 파키스탄, 인도는 인구대비 노예 비율이 1%를 넘는다. 이 네 나라는 전세계 인구의 20%와 전세계 노예의 55%를 차지한다. 특히 모리타니는 모리타니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세계에서 가장 노예 비율이 높은 나라이고, 4% 수준으로 그 다음인 아이티의 두 배에 이른다. 대한민국의 경우신안 덕분에, 5,000만 명의 인구 가운데 0.195%인 9만 명 정도가 노예라고 하여 167개 국 중 137위를 기록했다. 그 밖에 미국도 3억 1,000만 명의 인구 중 40만명이 노예라고 한다. 주요 국가의 통계 수치는 아래 표를 참고하자.
  • 2018년 8월 1일 기준으로 GSI의 자료를 토대로 한 추정치.
국가 인구 노예 수 인구대비 비율 심각도 순위[94]
북한 25,234,927 2,640,000 10.456% 1위
에리트레아 4,846,976 451,000 9.303% 2위
부룬디 10,199,270 408,000 3.995% 3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4,546,100 101,000 2.225% 4위
아프가니스탄 33,736,494 749,000 2.219% 5위
대만 23,485,755 12,000 0.049% 165위
캐나다 35,949,709 17,000 0.048% 166위
일본 127,974,958 37,000 0.029% 167위
러시아 143,888,004 794,000 0.551% 64위
중국 1,397,028,553 3,864,000 0.277% 111위
미국 319,929,162 403,000 0.126% 158위
대한민국 50,593,662 99,000 0.195% 137위
프랑스 64,457,201 129,000 0.201% 136위
벨기에 11,287,940 23,000 0.203% 135위
독일 81,707,789 167,000 0.204% 134위
영국 65,397,080 136,000 0.208% 132위
스페인 46,397,664 105,000 0.227% 124위
이탈리아 59,504,212 145,000 0.243% 122위

대체로 사회가 작거나 군소도서가 없어 통제가 용이할수록 노예가 적음을 알 수 있다.[95] 공권력이 지방 토호와 유착한 인도, 파키스탄, 에티오피아, 아이티 같은 개발도상국들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고,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생각보다 오지나 작은 사회가 많은데[96] 이런 지역을 배경으로 상당한 규모의 노예가 존재하며 한국도 역시 주로 남부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작은 사회가 형성되있다.

반면 상대적으로 작은 사회가 형성되기가 어려운 소국인 아일랜드나 아이슬란드 등은 노예가 적은 편. 이외 미국처럼 노예를 부리기가 쉬울 만큼 나라 전체가 넓고 신분이 불안정한 사람들도 흔하지만 대신 국가 차원에서 강한 공권력을 바탕으로 조사하는 미국 같은 경우가 있다.[97]

물론 통계상 노예가 거의 없는 국가일 경우에도 몇몇 문제 가정이나 집단에서 노예를 비밀리에 부리는 것은 못 막아서 꽤 적발되곤 한다. 당장 2013년에 터진 영국의 30년 노예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또한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영국 등의 서유럽 국가들도 2018년 통계 기준 대한민국보다도 노예 비율이 높은 등, 현대사회에서도 노예는 세계적으로 아직 완전히 근절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 형법상에서는 노예라는 표현보단 인신매매라는 표현을 쓰기 때문에, 형법상의 해석은 이점을 유의하는 게 좋다. 자세한 사항은 인신매매 문서를 참조.

일단 전세계에서 법적으로 노예 제도는 불법화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1세기에도 노예는 실존한다. 노예'처럼' 일하며 어렵게 사는 은유적인 의미의 노예가 아니라 정말로 사고 팔리며 계급적인 차별을 받는 노예. 인신매매 이후 여러번 되팔리는 사창가 여성들, 부채로 예속되어있는 인도, 중동, 중남미, 동남아시아 등지의 부채 노예 등등 단순히 생각한다면 그냥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하층민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이 처해있는 상황과 노예의 사전적/사회적 의미를 잘 생각해 본다면 이들은 분명히 노예이다.

꽤 부유층에서 태어나 세상 걱정을 모르던 체 게바라가 젊은 시절 친구와 같이 모터바이크를 타고 남미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가 목격한 사탕수수 농장에서 족쇄를 차고 힘겹게 일하면서 채찍으로 맞으며 살아가던 노예를 보고 충격에 빠져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사회 저항 운동으로 나서게 된 것도 유명한 일화다.

전 지구상에 노예제가 합법화되어있는 나라는 단 한 곳도 없지만[98] 2003년 미 국무부 인신매매 보고서에 따르면 매년 100만명 이상이 밀매되고 그들이 소유물로서 인식되며 불법 노역에 시달리는 나라는 약 106개국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러한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2,700여 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는 상당수의 국가에서 인신매매가 일어나고 있다는 말로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부터 유럽의 선진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나라의 상당수는 지역 사회에서 불법인 줄 알면서도 모른척하거나 심지어 옹호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문제가 아주 심각한 편이다.

21세기의 노예는 법적인 굴레가 아닌 폭력 또는 비정상적 금전채무로 인해 구속되어있고 이것이 대대로 세습되며 고착화되고 있다. 즉 법적인 노예제가 없으니 더욱더 브레이크 없이 가혹해져가는 측면이 있다고 한다. 특히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네팔/부탄/몰디브/스리랑카 등등 인도 반도 주변국들이 심각한 상황인데 상기한 2,700만 명 중 2/3인 1,000~1,500만 명의 노예가 이쪽에 존재하고 특유의 사회문화 덕분에[99] 사회적 제재 없이 고대 노예제 못지 않은 특성을 띄게 된 것이다.

더불어 빚과 아동노동제도 심각하다. 가난한 시골 지역 사람들에겐 돈이 필요한데 은행은 대출이 까다롭고 결국 사채업자에게 터무니없는 이자로 돈을 빌리지만 돈을 갚지 못하면 아이들을 대신 데려가서 채석장이나 여러 곳에서 종일 막노동을 시키고 그 임금을 이자 대신 사채업자가 가져가는데 일부에선 아이들이 달아나는 것을 막고자 족쇄를 채우기도 한다. 게다가 이쪽은 현지 경찰 등 공권력의 부패가 굉장히 심각한데다 사채업자에게 협조적이기까지 해서[100] 더 문제.

마이크로크레디트로 수십여만 이런 노예들을 해방시키는데 기여해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방글라데시의 무함마드 유누스 그라민은행 총재를 봐도, 노예 해방은 그야말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정도로 봐도 될 지경이다.

낮은 단계의 산업- 즉 농장이나 단순공업 등에서는 열악한 노동 조건을 필요로 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노동 조건을 그대로 적용시키지는 못하기 때문에 인신매매 등을 통해 인력을 확보하고 부채를 강요하여 노예로 부리는 일이 벌어진다. 나름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에서조차 지방의 오렌지 농장 등에서 이러한 불법 착취와 인신매매로 적발되는 일이 벌어지는 게 현실이다. 그나마 공권력이 썩지는 않아서 걸리면 바로 잡아내고 기소하여 수백 년 징역, 종신형 등 엄벌을 때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애당초 사형이 존재한다고 연쇄살인범이 살인을 안 하는 게 아니듯 이런 짓으로 이익을 보는 사회 구조 자체를 없애야만 문제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심지어 이 오렌지 농장에서는 가공의 화폐를 사용하여 노동력 유출을 막기도 하였다. 즉 완벽하게 출입을 통제한 농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수표를 발행하고 생필품 판매를 통해 다시 회수하는 형태를 취한 것. 이렇게 되면 부채를 영원히 갚지 못한다. 가격 책정도 자기 맘이니까. 사실 일제강점기 징용 현장들 중에서도 이런 방식을 취한 곳이 몇몇 있었다고 한다. 만화 《도박묵시록 카이지》에 등장하는 제애그룹 지하노역장 같은 게 엄연히 실존하는 셈이다.[101]

현대의 노예들은 그 값이 놀라울 정도로 싸다. 국제 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단체인 Freetheslaves.net이 조사한 현대 노예의 국제 평균 가격은 겨우 90달러, 즉 10만원이 좀 넘을 정도다. 이런 푼돈으로 사람을 한 명 살 수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노예가 이렇게 쌌던 시대는 없었다(예를 들어 미국에 노예제가 있었던 시절 노예 한 명의 가격은 지금 돈으로 약 4~5만 달러였다). 이는 지구에 지금만큼 인간의 수가 많고 소수의 인간이 다수의 인간을 (총을 이용해) 탄압하는 것이 간단했던 시절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예의 값이 싸다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싶겠지만, 노예가 비쌀수록 귀중한 자산으로 취급받으며 노예가 쌀수록 함부로 사용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일하다 죽어도 싼 값으로 교체 가능) 이는 큰 문제이다.

전세계에 현존하는 노예들의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등등에 있어서 노예들이 동원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미국의 '노예해방' 등의 인권단체들이 여러가지로 노력하곤 있으나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의 일부 노동자들을 구제하는데 그치고 있다고 한다. 세계 여러 나라의 NGO에서 활발하게 추진 중인 공정무역 운동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5.1. 중동

중동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으로 아직도 노예 제도 개선에 대한 의지가 없는 국가들이 많다. 예를 들어 카타르가 2022년 월드컵을 위한 경기장을 건설할 당시 이주노동자들의 처우나, 쿠웨이트나 사우디 등에 일하러 간 남아시아 노동자 등을 대하는 태도이다. 카타르 월드컵 건설 노동자 경우, 여권을 압수당한 후, 50도가 넘는 사막에서 하루종일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하면서 일을 시키는 바람에, 투입된 노동자 중 1,000명이 넘게 숨지는 대참사가 벌어졌지만, 카타르 정부는 상황을 알면서도 수수방관하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경우 이슬람 신학 잡지에 파키스탄인, 방글라데시인 외국인 노동자들을 노예라고 대놓고 써놓은 경우도 있다.

카타르에서는 카펠라 체제라는 중동 고유의 노동계약 시스템을 쓰는데, 노동자들이 고용주의 동의없이 직업도 못 바꾸고, 그만둘 수도 없고, 임금체불에도 항의할 수가 없다고 한다. 무려 21세기에. 사실상 세습만 되지 않는 노예계약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이스라엘과 시나이 반도의 베두인 인신매매가 악명 높다. 이스라엘의 베두인 중 적지 않은 수가 이집트에 있는 베두인 범죄조직과 그리고 동유럽계 마피아와 연결하여 시나이 반도를 통해서 동유럽 출신 여성들을 사창가로 인신매매하는 일에 관여했었다. 요즘은 이스라엘 정부에서 자국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성매매 관련 인신매매를 강하게 단속하자 에티오피아, 에리트리아 출신 난민들을 시나이 반도 쪽을 통해서 인신매매하는 방향으로 업종을 전환하는 추세이다. 이들 이스라엘,시나이 베두인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집트가 싸울 때 돈 몇 푼 때문에 이스라엘 편을 든 부족 출신이다. 인신매매 범죄로 이미지가 깍였을 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에게는 이스라엘 군에 봉사하는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이스라엘 흑인들에게는 에티오피아, 에리트리아 난민을 가혹하게 다루는 일 때문에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슬람권에서는 이들 이스라엘 베두인들을 말로만 무슬림이고 죽어서는 지옥 제일 밑바닥에 떨어질 위선자라고 비판하며, 이들의 존재를 매우 수치스러워하고 있다.

그런데 시리아와 이라크의 무장세력 단체인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에서 21세기에 공식적으로 노예제 부활을 선포하고 실천했다! 이들은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수종교집단인 야지디교도들을 공격해 살해하고 또한 1,500명이 넘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납치해 성노예로 삼은 것이 밝혀졌다. 이들은 이슬람교의 성경인 꾸란에 이교도들은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노예나 첩으로 삼아 자신들의 아이를 낳게 하라는 교리를 부활시키고 실천한 것이라고 당당히 나서고 있다. 물론 꾸란에 노예 관련 구절들이 상당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노예해방을 권장하는 쪽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원을 끌어모으려고 곡해하는 쪽이기는 하다. 야지디교도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믿는 이라크인들이나 시아파 여성들이 납치당하여 군인들을 위한 매음굴에서 강제 매춘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5.2. 국내 사례

대한민국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신안군에서도 섬노예 건으로 논란이 된 바 있다. 매춘부들의 경우도 자발적이 아닌 인신매매→강간 및 억지 사채→협박과 부채, 폭력으로 매춘행위 지속시키기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면 이에 해당한다. 또는 불법 직업소개소에서 직업 알선을 해준다면서 어선에 팔아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래놓고 항해 갔다오면 돈 쥐꼬리만큼 준 다음 항구에서 못 벗어나도록 통제한 다음 다시 또 어선에 팔아버리는 식으로 진행된다. 어선 측에서 신고를 하거나 하면 당연히 적발되지만 심신박약자를 낚는 경우가 많다. 혹은 멀쩡한 사람을 납치, 마구잡이로 폭행하여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만들어 어선에 넘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선에 감시자가 동승하거나 교묘하게 부채를 갖도록 해서 자의적으로 빠져나가기 어렵게 한다. 무엇보다 사용자 측인 어부들이 이런 식의 불법 노역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 작업 여건이 열악해지고 수지가 안 맞는 어로 활동에 몰린 나머지 이러한 불법 노역을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는 몸이 불편한 사람이나 장애인을 직업 알선으로 유인하거나 그냥 끌고 간 다음 섬으로 옮긴 뒤 평생 노예 노동을 시키는 경우도 있다. 신분제 폐지 이후에도 관행이 계속되었으나 잘 알려지지 않다가 긴급출동 SOS24에서 이슈화되었다. 여기 하지만 경찰 등과 유착되어 있는데다 주민들도 무관심해 문제 해결이 쉽지는 않은 듯...이렇게 아주 운이 좋은 사례도 있지만 평생 행방을 알 수 없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이 외에도 곳곳에 사례가 적발되는데 지상파에서 노예 할아버지 어쩌고 하는 아이템이 방송될 정도면 문제가 상당히 심각한 것이다. 더더욱 안타까운 건 섬 지역이나 뱃사람들은 의식상 신분제를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혹은 극도로 폐쇄적인 소규모 지역 사회인 탓에 적극적인 피해자 구제가 힘들다는 것. 게다가 현지 공권력이 매수되어 섬노예를 묵인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아 상부에서 직접 조사에 나섰다가 적발. 말 그대로 피바람이 부는 경우도 꽤 된다. 한국에서 사실상 노예로 취급되어 온 것이 드러난 사례는 다음과 같다. 긴급출동 SOS 24방송을 타서 파급력을 얻은 케이스가 많다. 안산의 선감원처럼 일제강점기부터 역사가 이어지기도 한다.
  • 삼청교육대 근로봉사 처분 - 죄없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해 훈련을 빙자한 가혹행위를 가하고 이후 국가에 봉사한다는 빌미로 부대에 수용하며 군 통신선 가설, 막사건축, 공병도로 포장 등의 중노동에 동원했다. 국가 주도의 노예수용소 격인 제도..
  • 서울 잠실야구장 노예 사건 - 2018년 언론을 통해 드러났다. 서울시 장애인인권센터가 청소노동자인 지적장애인 60대 남성이 17년 가량 분리수거 일을 하고도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한다.#
  • 석암재단 인권침해 등 - 석암재단은 석암 베데스타요양원(김포 양촌면)[112], 재암마을(성인장애인자활작업장), 석암재활원, 김포수산나의 집, 수산나 노인전문요양원 등 총 6개의 장애인 및 노인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시설 생활인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장애인들에게 지급하지 않고, 시설 운영비 등 명목으로 빼돌렸으며 인권 침해도 발생했는데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고 약을 먹이고 묶어놓고, 썩은 김치를 씻어서 형편없는 밥을 주고, 외출을 허락하지 않는 환경에서 20여 년을 살아왔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 성람재단 복지시설 사건 - 2004년 방송을 통해 알려졌다. 성람재단은 1982년 어린이집으로 출발하여 1984년 종로구에 한 빌라에 정신지체장애인 몇 명을 수용하면서 사회복지시설화되어 경기 양주와 강원 철원까지 확장되었다. 재활훈련 명목으로 원생들을 건설현장, 주방시설 등에서 일을 시켰다. 심지어 장애인이 금전문제로 원장 등 직원들에게 구타당해 숨진 사건도 있었다. 사망자는 자연사로 진단 위조 후 화장했다고 한다. 1994년부터 2000년 사이 사망한 원생만 160명이라고 한다.
  • 파주 소망기도원 사건
  • 강릉노예사건 - 강릉에서 지적장애 모친(母親)이 가장으로 있던 다섯 식구를 ‘현대판 노예’로 부린 최모씨(여· 2018년 기준 47세) 일가가 드러난 사건이다. 최씨는 2011년부터 지적장애 3급인 ‘이웃사촌’ 김정실(53·가명)를 다방에 취직시킨 뒤 월급을 가로챘고, 이후 7년간 최씨는 정실씨가 잡일로 벌어들인 6000만원을 쌈짓돈처럼 썼다. 초등학생 수준의 지적 수준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정실씨 앞으로 나오던 장애지원금 7300만원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최씨 아들 안씨는 당시 13살이던 정실씨의 큰 딸을 성폭행한 혐의까지 받고 있다. 최씨 아들 안씨는 2015년부터 정실씨 큰 딸을 성매매로 내몰아 4000만원을 벌어들였다. 이 기간 최씨의 남편 전모(49)씨는 정실씨의 네 자녀를 상습적으로 폭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 원주 사랑의 집 사건
  • 원주 ㅊ시설 장애인 학대 - 2008년 밝혀졌다. 소초면 교항리의 ㅊ장애인시설은 1988년 미신고시설로 운영되어오다가 정부의 미신고 양성화 정책에 의해 2002년 개인운영시설로 전환해 37명의 인가를 받아 운영해오고 있었는데 원주 관내 초 중 고교에서 남은 잔반을 수거해 수용된 생활인들에게 제공했다고 한다. 또한, 못 견디고 퇴소의사를 밝히는 생활인들에게는 ‘마음의 평온을 주겠다’며 안수기도를 빙자, 엄지손가락으로 눈을 강하게 찔러 피가 나는 등 엽기적인 가혹행위를 하기도 했다.###
  • 홍천 실로암 연못의 집 사건
  • 청주 타이어 노예 사건
  • 청주 지적장애인 축사노예 - 2016년 언론을 통해 드러났다. 축사 주인인 68살 김 모 씨 부부가 2004년 소 판매업자에게 돈을 주고 남성을 데려와 일을 시키고 12년간 돈을 주지 않았다. 피해 남성은 언론에 드러날 당시 40대였다.
  • 청주 애호박노예 사건 - 2016년 공개되었다. 피해자인 청각장애인(당시 54세)에게 농장주(당시 70세)는 17년간 일을 시키고 급여를 주지 않았다. 더군다나 피해자의 친누나(당시 69세)는 17년간 장애수당을 빼돌려 사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 청주 김밥집노예 - 흥덕구 봉명동의 한 김밥집에서 A(36)씨가 2008년부터 2016년 11월까지 일당 10,000원을 받고 일했다. A씨는 매일 오전 9시부터 늦은 저녁까지 분식집 청소를 하고 음식을 배달했다고 한다.
  • 충주 토마토노예 - 2016년 밝혀졌다. A씨(당시 58세)는 2004년부터 2016년 경까지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동네 후배 B씨(당시 57세)에게 1년에 100만~250만 원의 임금만 주고 자신의 방울토마토 농장에서 노동을 시켜왔다. A씨가 B씨에게 13년간 봄부터 가을까지 농사일을 시키며 지급한 임금은 총 2,740여만 원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A씨는 2011년부터 8차례에 걸쳐 B씨에게 지급되는 장애인 수당과 생계·주거 급여 등 8,600여만 원을 가로채기도 했다.
  • 괴산 배추농사 노예 - 지적장애인을 2006년부터 8년간 농가에서 배추 재배를 시키는 등 머슴처럼 부렸고 임금을 한푼도 주지않았다.
  • 옥천 지적장애인 노예 - 2016년 공개.. 청성면 A씨(39.지적장애 2급)의 경우 10년이 넘도록 이웃 집의 축사일을 돕고 있지만 임금착취와 구타 등의 의심이 있어 경찰 등이 조사를 벌였고, 안내면 B씨(65.지적3급)도 10년 넘도록 같은 마을의 한 농가 임시주택에서 머물며 농사일을 돕고 있지만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아 시설에 입소시키는 등 4명 모두가 임금착취와 인권침해가 드러났다.
  • 태안 청소년 유괴 및 혹사 - 1971년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당시 17세와 12세 등 2명의 소년을 태안 황도로 유인했던 최련춘(당시 46세)의 증언에 따르면 황도에 자신의 형제 5가구 등 7가구가 사는데 6명이 유괴되어 혹사당하고 있다는 것이다.[113][114] 또한 황도 이외에도 인근 오도, 비근이도, 먹음도 등에 최소 50여 명의 청소년들이 유괴되어 있다고 전했다.#
  • 태안 꽃게잡이 섬노예 - 2014년 'MBN 시사마이크'에서 꽃게잡이어선 피해자 양기동이 출연해 "배에서 이동하는 시간에만 잘 수 있었다"며 "많이 자도 4시간이다. 하루 종일 노예처럼 일했다"고 말했다.##
  • 세종 노예계약 - 2012년 JTBC 취재원이 현장에 잠입하여 추적·취재했다. 세종시 인근 판자집에서 집 주인 김모씨와 사는 지적장애인 상구씨의 말에 의하면 20년 가량 함께 살았다고 한다. 상구씨가 도망을 시도한 이후에야 1년에 50만원(월 약 41,000원)을 주는 계약서를 썼다고 한다.#
  • 양지마을 사건 - 충남 연기군에 있던 사회복지법인 천성원 산하 부랑인재활시설을 운영하면서 충남 및 대전 인근 기차역 노숙자나 인근 파출소 직원에게 밉보인 사람 등을 납치하여 감금하고 무임금으로 작업을 시켰다.
  • 동탄 노예 할아버지 - 2006년 방송을 통해 밝혀졌다. 농가 주인이 70이 넘는 나이를 가진 할아버지를 부려먹고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돈도 못 받고 일을 했으며 기간만 50년이 넘었다고 한다.
  • 천안 종살이 식모 - 2008년 방송으로 밝혀졌는데, 두 장애인 여성이 30년간 식당 종살이를 했다고 한다.#
  • 천안 방앗간노예 - 2009년 방송을 통해 알려졌다. 천안시 동남구 동면 화계리 한 정미소에서 집주인에게 학대를 받은 김모씨(당시 55세) 이야기로 김모씨는 2003년 전남 화순에서 올라와 수년간 임금을 못 받고 강제노동에 시달렸다고 한다.#
  • 당진 과자공장노예 - 충남 당진의 과자공장(뻥튀기공장) 사장 정모(68)씨가 지적장애 2급인 황모(64)씨와 최모(37)씨 모자를 15년간 무임금으로 일하게 했다. 체불한 임금과 퇴직금은 4억 4,000여만 원이었다.#
  • 서천 장항 수심원 사건 - 1992년부터 1997년 사이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여러 차례 보도했다. 충청남도 유부도에 위치한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는 시설인 장항 수심원에서 20년 넘게 인권유린, 착취, 폭행이 이어졌다. 1997년 폐쇄되었다.
  • 서천 절도노예 - 2017년 발생한 사건으로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은 지적장애인을 범행에 이용한 '절도 노예'사건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A군(당시 19세)은 지적장애 3급 장애인 C씨(당시 22세)를 시켜 충남 서천의 한 편의점 유리문을 깨고 들어가 금품을 훔치게 하는 등 서천과 군산 일대 편의점에서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80만원 상당의 현금과 문화상품권, 담배 등을 훔치게 했다. A군은 C씨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C씨의 양손을 청테이프나 전선정리용 케이블 타이로 묶은 뒤 모텔이나 차량 등에 감금했다.
  • 군산 섬노예 - 2016년 해양경찰에 의해 적발되었다. 이모(47)씨 등 일당 6명은 1992년부터 군산에 K여관을 운영하면서 지적장애인과 길거리 노숙자 등을 상대로 '먹여주고 재워주며 돈도 벌 수 있게 해주겠다'고 유인해 군산 또는 목포 지역의 어선과 낙도 등지에서 강제로 일하게 한 뒤 30년간 임금을 가로챘다. 심지어 이씨 일당은 자신의 친모로부터 이 일을 대물림 받아 관리해온 100여명 중 70여명을 목포 등의 선박과 섬 등에 팔아넘기고 나머지 지적 연령수준이 낮고 오갈 데 없는 30여명을 노예처럼 부려왔다는 점이다.#
  • 김제 영광의 집 사건 - 김제시 입석동에 있었던 기독교 관련 시설이었다.[115] 2007년부터 전북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시민단체 조사로 점차 드러났는데 목사인 원장이 지적장애 1급 여성들을 수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성폭행하고 입소 생활 장애인들에게 유통기한이 지나거나 상한 음식을 주고, 말을 듣지 않으면 독방에 감금하는 등의 인권 유린이 있었다.# 심지어 성폭행 사실 은폐를 위해 자궁적출 수술까지 받게 했다는 말이 있다.
  • 광주 인화학교 사건 - 2000년부터 5년에 걸쳐 교장을 비롯한 교직원들에 의해 7세부터 22세까지의 남녀 장애학생들에게 실제로 자행된 비인간적인 아동학대+집단 아동 성폭행 등이 이루어졌다.
  • 장성 축사노예 할아버지 - 2016년 방송을 탔다. 2006년부터 지적장애인을 고용한 후 임금을 한푼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가해자는 전라남도의원도 역임했다고 하며 피해자는 2016년 당시 67세였다.
  • 2014년 신안 염전 노예 사건 - 2014년 방송을 통해 알려졌다. 2008년 지적장애인 채씨(당시 42세)는 직업소개업자 고씨(당시 64세)를 만나 일자리를 소개해준다는 말에 속아 30만원에 염전 운영자 홍씨(당시 42세)에게 팔리게 되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시각장애 5급 김씨도 2012년 팔려왔고, 채씨는 이후 약 5년 2개월, 김씨는 약 1년 6개월간 강제노역을 했다. 2014년 1월 김씨가 몰래 편지를 써 서울 구로구 자신의 어머니 배씨에게 보냈고, 서울구로경찰서에서 소금구매업자로 위장하여 여러 섬을 탐문수사하여 겨우 구출되었지만. 지역적 관행이라는 말도 안되는 판결을 받고 노예주들은 제대로 된 처벌조차 받지 않고 풀려났으며. 이같은 '우리가 남이가' 마인드로 일관한 결과 2016년에도 노예 사건이 일어나는 등 문제가 심각하다.
  • 신안 새우잡이노예 - 2014년 경찰에 의해 구제되었다. 직업소개소 직원 B씨(당시 65세) 등은 선원들을 직업소개소 업주 A씨(당시 60세)의 아내가 운영하는 술집에 데리고 가 양주를 먹이고 도우미를 부른 뒤 하루 술값으로 최고 330만 원을 청구하는 등 술값과 숙박비, 생활비 명목으로 임금을 가로챘다. 선원들은 신안군 임자도 해역의 새우잡이 배에 넘겨져 임금도 받지 못한 채 강제노동을 했다고 한다.#
  • 완도 고금도 염전노예 - 지적장애 3급인 김동식(2018년 기준 53세)은 1997년 외환위기로 서울역 앞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당시 염전주인 이배남(가명, 2018년 기준 71세)의 쌍둥이 동생 이배순(가명)을 만났는데, 섬에 사는 자신의 형네 집에 놀러가자는 말에 넘어가 고금도에 도착했다. 도착 다음날부터 10여년을 일하고 임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당한 착취에 대한 기억과 증언 등을 통해 광주지방검찰청 해남지청이 2009년 3월 ~ 2014년 3월까지 최근 5년 기간 한정분으로 추산한 체불임금만 해도 6,000만원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2018년 현재도 법정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 진도 나배도리 유괴 및 강제노동 - 1966년 기사에 따르면 주로 목포 역전에서 12~15세 청소년들을 유괴하여 진도 조도면 나배도리 등의 농가에 분산시켜 나무를 하거나 농사를 짓게 했다고 한다. 당시 경찰이 구출한 인원만 28명인데 유괴된 피해자 중 9명은 부모가 있고, 나머지 17명은 고아였다.#
  • 진도 전복양식장노예 - 2014년 드러났다. 전복양식업자 D씨(당시 49세)가 지적장애 3급 장애인 E씨(29)에게 하루 11시간에 이르는 중노동을 시키며 임금 83만원을 가로챘다. E씨는 2014년 1월 진도군 조도 양식장에서 일하다가 D 씨의 감시 소홀을 틈타 탈출했다.#
  • 해남 김양식장노예 - 2001년 강진경찰서 수사로 드러났다. 약간 어눌한 말씨와 행동 때문에 따돌림을 당했던 김영록(당시 26세·강진 작천면)은 2001년 8월 15일 광주에 놀러갔다가 막차를 놓치게 되고, 새벽 첫차를 기다리면서 터미널에서 잠들었다. 김씨를 깨운 박모씨(당시 43세·광주 광산구)는 '돈을 많이 벌게 해 주겠다'며 김씨를 유인·협박해 전남 해남의 여관으로 끌고간 뒤 김 양식업자 강씨(당시 28세·해남 화산면)에게 100만원을 받고 현장에서 팔아넘겼다. 김씨는 해남 김양식장에서 그물발에 김 포자를 붙이거나 그물발을 수선하는 작업을 하는 등 새벽 4시부터 오후 7시까지 일하다가 11월 5일 인부들과 배를 타고 탈출했다고 한다.#
  • 대구 하우스노예 할아버지 - 2008년 방송으로 밝혀졌다. 20여 년간 임금을 한 차례도 지급하지 않았다.
  • 대구 북구 성보재활원 장애인 노예노동 - 장애인 손모씨가 1994년부터 20여 년간 시설 내 청소, 쓰레기 분리수거, 운동장 청소 등을 하면서 비정기적으로 월 10,000~50,000원의 돈만 받는 등 착취를 당했고, 실상이 드러나자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가 이루어졌다.#
  • 대구시립희망원 - 2016년 내부고발로 밝혀졌다. 1958년 대구광역시청이 설립하고, 1980년부터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수탁·운영하는 시설인데, 폭행 및 금품갈취, 강제노동, 구금, 사망자 은폐, 생활인들의 생계비 유용 등이 드러났다. 공직자와 종교인(신부)까지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줬다.####
  • 안동 노예 할아버지 - 2009년 방송으로 드러났다. 약 30여년간 착취당한 것으로 보이며 방송 당시 연령은 62세였다.
  • 상주 농사노예 - 2016년 언론에 밝혀졌다. 약 15년간 폭언과 폭행 속에 중노동에 시달렸다고 한다. 월급은 13만원을 지불했다고 한다.
  • 상주 양계장 부부노예 - 2006년 밝혀졌다. 1988년 3월. 장씨의 친척과 친분관계가 있던 박씨가 "월급 줄 테니 우리 농장에서 일하라"고 제안해 상주 남적동 박씨의 양계장으로 오면서 시작되었는데 장모(58, 지적장애 3급), 박모(46, 지적장애 3급)부부는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명절이나 되어야 쉴 수 있는 생활을 무려 18년간을 했다고 한다. 박씨는 생활비 명목으로 임금을 지급한 것처럼 속인 것도 모자라 부부 몰래 이들을 기초생활수급권자를 만들어 생계주거비와 장애수당, 거택구호비, 월동비 등 지난 1992년부터 2006년까지 3,300여만 원을 횡령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부부와 지적장애 2급인 막내아들(22) 명의로 핸드폰을 개설해 수년 동안 요금 할인혜택을 받아왔으며, 일을 제대로 못한다는 이유로 심한 욕설과 폭행을 가했다.#
  • 성주 참외노예 할아버지 - 2016년 방송을 탔다. 2010년 즈음부터 한달에 16만원 남짓을 받고, 마을주민 박모씨(농민) 집에서 일해왔다. 피해자인 고씨는 50여 년 전 마을에 정착한 후 지금과 비슷한 처지로 이 집, 저 집을 떠돌고 있었다고 한다. 고씨의 나이는 2016년 당시 77세.. 노예생활한 할아버지를 취재한 기자에게 공무원이 전화를 해서 고용인 박씨가 인망이 두텁다고 사회파장을 줄이기 위해 기사 축소를 바란다는 전화를 했고, 취재 중 현장에서 만난 공무원은 고용인 박씨를 대신해서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전했다는 말이 있다. 심지어 지역신문사에서도 기자에게 전화를 해서 사실과 많이 다르다라는 의견을 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예천 공장노예 - 2004년 임성훈의 세븐데이즈 '현대판 노예 만득씨 가족 상봉' 편을 통해 알려졌다. 만득이라 불려온 옥해운씨(43)는 정신지체장애인으로, 19세때 길을 잃고 헤매다가 예천지역의 한 공장 주인에게 발견돼 25년간 폭력과 학대를 당하며 공장에서 일했다.##
  • 경북 노예할아버지 - 2018년 공개. 간이 컨테이너와 창고에서 지내면서 경북 농가에서 20년 넘게 일했지만 임금은 한푼도 받지 못한 케이스다. 피해자는 당시 62세며 지적장애인 2급 판정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 형제복지원은 1975년 설립되었다고 한다. 12년 동안 국고 횡령, 아동 강제 노동 등의 천인공노할 범죄 행위를 자행해오다 1987년 직원들의 구타로 1명이 사망하고, 35명이 집단 탈출하면서 실상이 드러났다. 12년간 사망자만 513명이라고 한다. 암묵적으로 돈을 주고받으면서 폭력, 비리에 방조하였고 납치도 적극적으로 밀어주었으며 원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이 원래 사는 곳을 알려주어도 찾아줄테니 경찰차를 타라고 말하고는 형제복지원으로 데려다주었다고 한다. 후에 수사가 이루어지자 당시 김주호 부산직할시장은 담당 검사에게 청탁 전화를 하고, 보건사회부 장관에게 박인근 원장이 바로 석방되도록 건의하기도 했으며 부산시 의료 관계자들 역시 부검서류를 날조하거나 사망원인을 고의로 날조하기도 했다.
  • 창원 노예 할아버지 - 2008년 방송으로 밝혀졌다. 피해자인 할아버지는 방송 당시 73세였고, 약 40년간 목장 노예 취급을 받으며 일을 했다.
  • 마산 소망의 집 사건 - 2008년 관련 내용이 방송되었다. 소망의 집은 1978년 무연고자 시설로 시작된 개인운영신고시설이었다. 목사부부가 운영하면서 생활인들에게 강제노동을 시키고, 매일 점심을 라면으로 주는 등 생활인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행위가 적발되었다. 라면도 유통기간이 2~3년이나 지나 썩고 벌레가 나오는 지경이었음에도 생활인들에게 식사로 제공하는 등의 인권유린이 자행되었다고 한다. ##
  • 통영 양식장 노예- 2020년 7월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통영해양경찰서가 노동력 착취 유인 등의 혐의로 구속한 A씨(2020년 현재 58세)는 1998년 당시 17세의 2급 지적장애인(2020년 현재 39세)에게 접근하여 ‘일을 잘하면 보살펴주겠다’라고 유인하여 2017년까지 19년동안 임금을 주지 않고 일을 시켰다는 것이다.## B씨는 국가로부터 매달 장애인 수당이 38만원씩 지급되었지만 A씨가 이마저 일부 착복했으며 손이나 주먹 등으로 폭행도 가했다고 한다. 해양경찰 측은 최저임금을 적용해도 A씨가 B씨에게 지급했어야 할 돈이 2억원 가량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정치망어업 선주 C씨(2020년 현재 46세)까지 가세해 B씨에게 최저임금도 안 되는 돈을 주면서 일을 시키고 상습 폭행했으며, 주민 D씨(2020년 현재 46세)는 구매대금을 줄 것처럼 속인 뒤 B씨 명의로 침대와 전자레인지 등을 사는데 장애인수당을 사용했다고 한다.##
  • 합천군 정신지체 1급 노예 모자 - 2007년 방송으로 드러났다. 이들을 관리했다는 안대훈 씨의 말에 따르면 30년 전 무호적자로 자신의 아버지 일꾼으로 들어온 모자가 불쌍해 노예모자의 아들인 타관 씨를 동생으로 입적시켰다고 하는데 이를 감안하면 착취당한 기간은 약 30년 정도로 보인다.
  • 경기도 여주 중식당 노예 모녀 - 2021년 방송 보도로 알려졌다. 현재 경찰에서 피해자들을 조사후 가해자로 지목된 중국집 사장들을 불러 조사할 예정.###
  • 마포 오피스텔 감금 살인 사건
  • n번방 성착취물 제작 및 유포 사건

6. 명언

If slavery is not wrong, nothing is wrong.
노예제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에이브러햄 링컨
하루의 3분의 2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
프리드리히 니체
내가 '노예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리고 한마디로 답해야 한다면, '그것은 살인이다'라고 답을 할 터인데, 내 뜻은 즉시 이해될 것이다.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안전한 노예생활을 하느니 불안전한 자유민이 되는것이 좋다
벤자민 프랭클린

7. 관련 인물

  • 만적
    고려의 노예인 노비였으며, 자유를 찾기 위해 만적의 난을 일으켰다.
  • 모세
    야훼의 명에 따라 히브리 민족을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해방시켰다고 전해진다.
  • 냇 터너
    미국의 흑인 노예 반란 지도자.
  • 알렉스 헤일리
    뿌리(소설)의 작가이며 이 '뿌리'는 자신의 직계 조상이자 흑인 노예인 쿤타 킨테와 그 후손들이 노예에서 해방되기까지의 일대기를 다뤘다.
  • 장영실
    국가 소속 노예인 공노비로 태어났지만 탁월한 재주를 인정받아 면천되고 벼슬까지 한 인물이다.

8. 창작물

  • 모에계 취향 중 하나이기도 하다. 국내 양판소 주인공의 초기 직업으로 꽤 많이 채택되어 있는 듯. 일본에서는 이세계 트립 계열의 양산형 소설에서 흔하게 나오는 히로인의 타입 중 하나이다. 그런데 해당 양판소들이 주로 배경으로 채택하는 중세 내륙 사회는 노예가 아니라 농노 형태의 계약 관계가 주류였고, 상기한 에스파냐, 북이탈리아 등 해양 사회의 노예도 타민족을 사와서 뱃노예나 하녀를 시키는 수준의 계약관계지 양판소에서 흔히 묘사되는 것 같은 심각한 수준의 노예는 지극히 드물었다.[118] 특히 같은 국가 동포를 노예로 학대하는 것은 범죄자나 부랑자를 국가가 직접 형벌부대처럼 부리는 등의 상황에만 거의 한정되었다.[119] 대대적인 노예매매나 노예전시같은게 없었던 건 아니긴 한데, 그건 서유럽보다는 이슬람권에서 흔히 보이던 모습이며 그 이슬람 노예조차 운좋으면 왕위에 앉을 수도 있는 등 대우가 개차반은 아니었다. 주류유럽 생활권에서 가난 때문에 자녀를 노예상에게 판다는 식의 상황은 중세가 아니라 고대 로마 시대에서나 있었을 일이고, 타국가 혹은 타민족 노예의 비참한 처우도 전쟁 포로의 경우를 뺀다면 고대나 대항해 시대~산업혁명기 직전 시대에 어울리는 소재이다. 그냥 작가의 빈곤한 상상력으로 어떻게든 현대인 천재론을 성립시키기 위한 편의주의 장치[120]
  • 현대 사회에서만 해도 효율성 문제로 사라져가는 노예이지만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에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스타워즈아나킨 스카이워커같은 경우가 대표적. 몸에 칩을 넣어 도망치거나 반항하면 자동제압되거나, 뇌에 어떤 조작을 가해서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거나 명령에 절대복종하도록 되어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현실의 노예와 다르게 효율성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생체기계에 가까울 것이므로 좀 더 현실성이 있다. 이 정도로 인체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기술력이 있다면 당연히 복제인간도 제조할 수 있으므로 그렇게 공장에서 뽑혀나온 복제인간들이 노예 계급을 대체하기도 한다.
  • 문명 4》에서는 청동기 기술 개발을 통해 이용할 수 있는 사회제도로 노예제가 등장한다. 인구를 희생해서 생산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사회제도이다. 《문명 4》에서는 인구를 증가/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인구부양력(식량/위생/행복)이 필요한데 이를 충족하지 못하는 초반에는 맬서스 트랩의 상황이 반복된다. 즉, 인구 증가→인구부양력(식량/위생/행복)이 소요량에 미달→기아로 인한 인구감소 or 정체의 과정이 반복되는 것이다. 인구가 많아질수록 도시의 유지비도 증가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인구를 생산력으로 전환하고 덤으로 유지비도 절약하기 위해서는 노예제의 활용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기술혁신이 멜서스 트랩을 깬 것처럼, 《문명 4》에서도 기술의 발전에 따라 충분한 인구부양력을 갖추면 노예제로 인구를 희생하는 것보다 높은 인구를 유지하는 것이 생산에 더 도움이 되는 시점이 도래한다. 이 타이밍을 적절하게 캐치하고 사회제도를 갈아타는 것이 《문명 4》의 초보와 고수를 가르는 기준이다. 일반적으로 길드 개발시점부터 노예제가 소용없어진다는 것이 중론이다. 자세한 사항은 문명 4/시빅 일람 참조.
  • 대항해시대 시리즈에서는 다른 상품 무역은 실제 역사대로 다 나오더라도 노예 무역만큼은 고증을 무시하고 아예 안 나오거나 언급되더라도 유저가 직접 할 수 없다. 사실 대항해시대 3의 초기 발매판에서는 발견품 중 하나로 나오며, 발견 이후에는 교역소에서 노예무역을 할 수 있도록 구현되었다. 다만 이후 윤리상의 문제로 노예 자체가 삭제되었고, 국내에도 삭제된 버전이 들어왔다.[121] 여담으로 이 3편의 노예도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내구도가 존재하며 오랫동안 방치해두면 내구도가 0이 되어 상품가치가 사라진다. 즉, 노예들이 시체가 된 것(...). 4편에선 스토리상 악역이 노예 무역을 한다는 설정만 있고 주인공은 그 악역을 무찌르는 역할을 맡는다.
  • 닥터 후에 나오는 티볼리안이라는 종족은 겁이 많고 맞서싸우는 용기도 없어 종족 전체가 노예가 되는 식으로 연명하고 있다. 심지어 수도에는 "우리 행성을 침략하신 분들, 이제 여기가 당신들의 고향 입니다!"라고 쓰여진 플래카드까지 있다고.
  • 워크래프트 시리즈스랄의 이름도 Thrall. 노예란 뜻[122]인데, 이는 자신이 노예였던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함이라 한다. 참고로 스랄이라는 이름은 에델라스 블랙무어가 자신의 노예라는 의미로 이 오크에게 지어준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 워해머 40K의 세계관의 세력들은 노예를 부리는 경우가 많다. 인류제국에서는 서비터라 불리는 사이보그 노예를 부리며, 하이브 월드 하층민과 죄수들이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다. 오크들은 오코이드(Orkoid) 종족 내에 그레친이나 스노틀링 같은 하급 종족이 있어 노예나 다름없이 취급한다. 다크 엘다 사회는 쾌락을 얻기 위해 잡아오는 고문용, 역용 노예와 검투사가 거의 필수 수준. 카오스 스페이스 마린들도 노예를 부린다. 노예나 그 비슷한 것을 부린다는 설정이 없는 건 그나마 이성적인 타우 정도이다. 대신 이쪽은 종족 절대다수가 페로몬 노예일지도 모른다는 떡밥이
  •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에서는 노예가 티빈터 제국과 쿠나리 종족에게 노예로 부려진다. 제일 심하게 부려먹히는 게 엘프. 인간 역시 엘프처럼 많이 부려먹힌다.
  •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는 작중의 무대인 웨스테로스에서는 노예제가 금지라서 노예를 부리지 않지만, 에소스 대륙 전역에서 노예가 부려진다. 유일한 예외가 노예 출신들이 세운 자유도시 브라보스. 강철 군도에서도 노예가 부려지는데, 웨스테로스 대륙이 노예제를 금지하다 보니 '하인'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다.
  • 외모지상주의(웹툰)에서는 4대 크루 중에서 호스텔일해회가 분명히 아이들을 납치하고 호스텔은 범죄 목적으로 일해회는 수익창출을 목적으로 인물들을 가두고 대사에서 언급되었다시피 사고 파는 등등 세계관에서 노예가 실존한다. 이상한건 이 웹툰의 세계관은 21세기 현재 그것도 대한민국이라는 배경인데다 그것도 수도인 서울인데도 공권력이 전혀 눈치를 못채거나 그대로 냅둔다는 것이다.
  • Europa Universalis 시리즈 에서 아프리카 일부 지역 무역특산품으로 노예가 나온다. 일반적인 흐름으로 게임플레이를 진행하면 역사대로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이 지역을 차지하여 노예무역을 한다. 게임 후반기에는 노예무역이 쇠퇴했다며 노예 무역품이 사라지고 다른 무역품으로 대체된다.
  • 한국 사극에서는 역사 고증 따위는 무시하고 주인공이 노예가 되는 일이 잦다. 2005년 해신(드라마)에서 처음 등장한 클리셰인데, 이후 한국 사극이 해신과 유사한 트렌디, 퓨전 사극으로 성향이 바뀌면서 이 클리셰를 너도나도 끌어다 쓰는 것.
  • Kenshi에서는 노예제가 게임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이다. 일부 세력은 노예제를 금지하고 있지만 여러 세력들, 특히 최강의 세력인 도시연합이 노예제를 적극 이용하고 있다. 또한 반노예상이라는 반 노예제 반군 세력도 등장한다. 플레이어는 누군가를[123] 잡아다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릴 수도 있고, 반대로 납치당해서 노예가 되어버릴 수도 있으며 노예가 되었다면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할 수도 있다. 그런데 노역장이란 곳이 위험한 적들로부터 플레이어를 보호해주는데다, 밥도 먹여주고, 다치면 치료해주고, 오래 머물면서 노동 능력도 키우고 근력도 키우는 등 안전하게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최적의 환경이라서 일부러 찾아가서 입소하는 플레이어들도 있다.
  • 림월드에서는 구버전에서는 설정상 노예제는 분명히 존재하고 플레이어가 노예를 구입해서 해방시키고 영입하거나 잡은 포로를 노예로 팔아먹는 것은 가능했지만 정작 노예를 직접 부릴 수는 없었다. 때문에 이것이 아쉬워서 노예 노동을 구현한 모드가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데올로기 DLC 출시와 함께 노예제가 정식 구현되었다. 일반 정착민과 달리 기대치가 낮고 오락을 시켜줄 필요가 없으며 죽거나 팔아도 무드 패널티가 없지만 기본 작업 효율이 낮으며 관리가 허술하면 반란을 일으킨다.
  • 스텔라리스에서는 권위주의나 외계종 혐오 윤리관을 채택시 노예를 부릴 수 있다. 특이하게도, 평등주의 윤리관을 가지고 있어도 외계종 혐오를 가지고 있으면 외계인 노예를 부리는게 가능한데, 외계인을 2등 혹은 3등 시민으로 취급하기 때문인듯. 노예의 유형에는 동산노예, 계약하인, 가정노예, 전투노예, 가축이 존재하고 동산노예는 자원+10% 계약하인은 전문가 직업에도 투입 가능한 대신 정치적 압력이 크게 증가하며 전투노예는 지상군 데미지에 보너스를 주고 군인 직업에 종사 가능하며 가정노예는 연예인 직업에 투입 가능하며 아무런 직업을 가지고 않는 경우에 하인이 되어 편의를 늘려준다. 가축은 일반 유기체일 경우 식량을, 암석류일 경우 광물을 생산한다. 군체의식과 기계지능의 경우 가축 유형의 노예만 부릴 수 있으며, 자유민 보다 식량, 소비재, 주거, 편의를 적게 소비하지만 낮은 행복도로 행성 내 범죄를 크게 늘려주며 계약하인의 경우에도 일부 직업에는 종사가 불가능 하여 노예제의 비효율성도 일부 구현해두었다. 특히나 가축 유형의 노예는 컨셉이나 뽕의 용도로 식량과 광물을 몹시 적게 생산해 아주 효율이 나쁘다.

8.1. 노예이거나 노예였던 캐릭터

9. 비유적 표현

실제 노예는 아니지만, 하루종일 일만 하며 제대로 쉴 틈이 없지만 제대로 된 보상을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를 노예라고 비유한다. 주로 중소기업에서 박봉을 받으며 과로하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임금을 받으며 생활하는 임노동자들을 비유적으로 노예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10. 관련 문서


[1] 하지만, 반대로 슬라브족이라는 말이 노예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이 설에 따르면, 고대 영어로 노예는 sclava라고 하는데, 이 말이 변형돼서 슬라브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2] 참고로 갑골 문자에서 民자는 원래 '백성'의 뜻이 아닌 산 제물로 바쳐지는 사람을 뜻했다. 을 찔러서 눈을 멀게한 제물이 될 사람을 줄에 묶어서 끌고가는 모습을 본딴 상형자다.[3] 羌無弋爰劍者秦厲公時爲秦所狗執以爲奴隸,不知爰劍何戎之別也[4] 참고로 고대 라틴어로 노예는 servus(여성은 serva), 고대 그리스어로는 δοῦλος(둘로스). 성경 번역에서는 보통 '종'(servant)으로 의역한다.[5] 다만 유대인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던 모양이다. 탈무드에서 자신이 죽으면 아들이 먼 곳으로 여행간 틈을 타 노예가 재산을 가로채고 도망갈까봐 한 가지를 뺀 모든 재산을 노예에게 준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돌아온 아들이 랍비와 상담했을 때 '노예의 재산은 주인에게 귀속되는 것이니 노예를 물려받는다 하면 되지 않느냐'고 답변했고 그대로 행해 재산을 온전히 물려받게 된다.[6] '정신대'라고 해놓고(공장에서 일하는 것이다) 막상 모이니까 위안부로 끌고 가는 일이 빈번했다.[7] 이를 대행하는 이들이 바로 드라마 추노에도 나오는 추노꾼들이다.[8] 공명첩 등을 통해 합법적으로 양인(양반+평민)의 신분을 얻기도 하고, 족보를 사들이는 방법으로 양인으로 행세하기도 했다.[9]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처지라고 해서 완전히 자유는 아니었다. 해방 노예는 자신을 풀어준 주인의 은혜를 갚기 위해 그를 지지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믿음이 로마 사회에 있었고, 이를 어기면 배은망덕한 자라고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해방 노예는 주인의 씨족의 구성원이 되었는데, 각 씨족의 호주는 구성원을 노예로 팔 수 있는 권리가 있었기 때문에 해방 노예가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면 다시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10] 다만 자식을 팔 경우는 일정기간이 지나면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야 했다. 그리고 3번이나 팔면 아버지의 지배권에서 해방된다는 말은 반대로 말해 자식을 3번이나 팔 정도로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이자 가장 자격이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11] 스파르타쿠스 같은 드라마만 보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으나,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졸부들이 첩으로 삼은 노예와 함께 지나가면 사람들이 야유와 저주를 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12]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노예를 성적으로 착취할 경우는 재물손괴죄에 해당하여 배상이나 처벌을 받아야 했다.[13] 물론 특정 목적의 노역을 위한 노예는 계속 활용되었다. 우선 중세까진 징역형이 따로 없었으므로 노역형이라는 것은 민간에 매매만 되지 않을 뿐 사실상 당국에 의한 노예화를 의미했다. 이런 경우 일반적인 노동이 아니라 노를 젓는 노역 등 특수 목적에 투입되었다. 전쟁포로 역시 몸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노예로서 이러한 노역을 했는데, 민간에서 노예매매는 사라졌지만 그 대신 종종 국가가 나서서 부랑자는 물론 멀쩡한 타국인까지 납치해 포로랍시고 노예화시켜 노역을 시키곤 했다.[14] 출처: 바다의 늑대/ 라스 브라운워스 저/ 김홍옥 역/ 에코리브르/ 141~142, 337쪽[15] 물론 다 슬라브인은 아니었고, 크림 반도의 그리스인과 고트족, 볼가 강 유역의 핀 우골 민족들이 포함되었다.[16] 반면 같은 타타르인들과 전쟁 와중에 사로잡힌 타타르 전쟁 포로나 산악 지대에 살며 기골이 장대한 체르케스인들은 이탈리아 대신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의 군인 노예로더 비싼 가격에 수출되었다. 이탈리아의 중산층 사이에서는 가사 노동을 시킬 여성 노예의 수요가 많았던 반면 맘루크 왕조에서는 군인으로 쓸 노예가 주로 필요했던 것[17] 오늘날 이탈리아어 인사말 Ciao는 본래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노예들이 주인에게 쓰던 인사말 Suo Schiavo(저는 당신의 노예입니다.)가 어원이라 한다.[18] 출처: 치즈와 구더기/ 카를로 진즈부르그 저/ 김정하,유제분 공역/ 문학과지성사/ 93쪽[19] 이 폴란드인들은 프랑스인들과 같은 종교인 가톨릭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유럽 기독교도들이 같은 기독교도들을 노예로 안 부렸다는 한국 인터넷상의 말들은 틀린 것. 그나마 일반적인 노예들과 차이가 있다면 이런 사례에서는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지는 않고 관할 기관이 직접 부려먹었다는 점 정도이다. 따라서 사고파는 노예 개념보다는 강제징집된 죄수 부대 취급에 더 가깝다.[20] 고대 로마 제국과는 반대로 노예를 해방시켜 결혼하는 것은 문제시되지 않았다.[21] 오스만 제국은 결혼, 재산같은 민사법들은 각 종교공동체(밀레트)의 법에 따르도록 하고 있으나, 모든 밀레트에서 첩제도는 금지였다. 특히 이슬람에서는 동등한 4명까지의 정처만 인정하고 그 외의 모든 성적관계는 전부 다 간통으로 간주한다. 노예를 해방시켜 2,3,4번째 부인으로 삼는다 하더라도 기존의 모든 부인들의 동의를 받아야하고, 노예출신으로 주인의 정실부인이 된 여자는 다른 부인들과 마찬가지로 남편이 자기에게 불공평하게 대한다고 생각할 경우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법원에 상소하여 이혼판결과 위자료를 받아낼 권한이 있었다. 이스탄불에 위치한 오스만 제국시절 옛 문서고에는 관련 판례들도 꽤 많이 남아있다.[22] 당률소의 6권 名例 "奴婢賤人,律比畜產"[23] 여기에 납공노비와 입역노비 같은 경우 양반에게 바치는 절반의 수확 외에 중앙정부에서 부과하는 각종 세금까지 부담해야 했다.[24] 거의 인구의 20%로 오늘날 탈북민 숫자보다도 많은 노비들이 도망을 다닌 셈이다.[25]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다고 한다.#[26] 다만 한명회가 말한 저 수 자체는 심하게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명회가 도망 중인 공사천구가 100만이라 발언한 것은 성종 15년의 일인데 같은 연도에 한명회는 도망한 공사 노비 중 추쇄한 것이 30만, 추쇄하지 못한 것이 10여만이라 하고 있다. 물론 이것도 대단히 많은 수이긴 하나 100만이란 것과는 차이가 크다. 그리고 동시대 양민들도 도망 중인 자들이 꽤 있긴 했다.#[27]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18세기 후반까지도 조선의 노비 비율은 무려 전체 인구의 30%를 차지했다고 한다.#[28] 되려 한성부 호적 같은 경우는 조선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수도의 호구를 조사한 문서인데, 설마 여기서도 양인의 누락을 주장하는 거라면 조선이란 나라는 수도에서 조차도 행정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비록 한성부 북부장호적이 한성 전체의 호적이 아닌 683호의 호적이며, 1개년도의 호적만 남아 있어 17세기 한성 전체의 인구비율을 대표한다고는 볼 수 없으나, 683호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며 수도 한성의 호적 조사라는 점에서 신뢰도가 높다 할 수 있다.[29]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노비' 항목[30] 실제로 여러 일기에서 양반들이 사사로이 노비를 처벌하고 심문하고 매질하고 성관계를 요구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31] 「한국민족문화대백과」'노비' 항목[32] 다만 외거노비가 솔거노비로 바뀌었다해서 그동안 해당 노비가 가지고 있던 재산을 함부로 빼앗고 그러지는 않았다.[33]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확한 호적 작성은 이런 것들을 위해서다. 다만 인구동태 파악 면에서 유럽은 교회의 세례명부라는 훌륭한 대체재가 있었다.[34] 고대 스파르타에서 자국의 속국이던 메세니아의 주민들에게 가죽으로 된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강요하던 것이 그 예다.[35] 그나마 양반도 혈연에 의해 세습되는 신분이 아니라, 과거 시험 합격자나 전현직 관료에게 부여된 특별 계급인 만큼, 이쪽도 서구권 및 일본귀족 계층과는 판이하게 다른 이들이다. 즉, 전근대 시대에 흔치 않던 공직자나 고학력자같은 엘리트 집단들에게 군역 면제와 같은 특혜를 주어서 대우하던 것에 가깝지, 대대로 양반을 배출한 명문가가 아니고서야 양반 신분 자체가 고착화된 계급으로 여겨지진 않았다는 얘기다. 따라서 노비와 평민, 양반끼리는 유심히 살펴보면 어느 정도 구분이 가능한 부분은 있었으나, 조선 사회를 잘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는 이들 사이에서 눈에 띌 정도의 신분 격차는 없었다는 얘기다.[36] 함무라비 법전같은 노예제가 있는 사회에선 평민과 노예에게 범죄를 저질렸을 때 처벌에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37] 참고로 에도시대 '일본의 농노'들에게는 이런 식의 노예의 상징이 실제로 강요되었다. 출처[38] 단, 토지세는 노비도 냈다. 그래서 납공노비의 경우 호적이나 양안에 올라가서 토지세를 납부했다.[39] 부모 중 한쪽(일)만이라도 천민(천)이면 자손도 즉시(즉) 천민(천)이 된다는 법칙.[40] 조선 개국을 찬성하던 정도전도, 반대하던 정몽주도 둘 다 공민왕의 지원으로 유학(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 출신이었다.[41] 마찬가지로 '불의한 권력자들에게 억울하게 눌려지내는 사회적 약자'라는 통념과는 달리 백정들은 차별받는 존재들이 아니라 스스로 차별을 고집한 존재들이었다. 원래 이들의 호칭은 '양수척'으로, 조선 왕조는 어떻게든 양수척들을 일반 사회로 편입시키려고 했고 그래서 원래는 '백성'의 의미로 쓰던 '백정'이란 호칭도 양수척들에게 쥐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양수척들은 이런 특별 대우에도 여전히 일반 사회에 편입되기를 거부했고, 이에 원래 '백정'이던 일반 백성들이 양수척들과 똑같이 백정으로 불리기 싫다며 '백성'으로 호칭을 바꾸면서 '백정'은 '양수척'만 의미하게 바뀐 것이다. 즉 노비건 백정이건 한반도 왕조들은 어떻게든 신분 차별을 없애려고 노력했는데 오히려 대중이 스스로 신분 차별을 긍정해왔던 것이다.[42] 사실 남북전쟁에 참가한 남군 측 병사들 중 상당수는 노예를 소유해본 적도 없고 소유할 전망도 없는 하층민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노예제를 '남부의 전통'으로 사수해야 한다며 스스로 총을 들었다. 이유는 간단한 것이 노예제가 사라지면 그들 자신이 흑인과 똑같은 사회의 최하층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43] 최저임금제, 기초생활수급, 표준근로시간 그딴 거 없던 극초기 자본주의 시절이었으니까. 실제로 이 시기에는 농노제의 영주와 초기 자본주의의 자본계층(부르주아)가 공존했으며 , 현대 자본산업사회로 이행되는 과도기였던 관계로 농촌지역에의 농노가 도망쳐서 도시로 온 다음 나라, 지방에 따라 1개월~2년을 버티면 자유민 임노동자가 되던 시절이었지만, 여전히 농노생활을 선호하는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차피 사회안전망과 복지제도가 없는 초기자본주의 체제하의 최하층민의 삶은 노예나 다름없을 만큼 형편없기 때문. 21세기 현대사회에도 가끔씩 특수한 사정 때문에 복지제도의 구제를 받지 못하는 경우 노숙자로 사느니 차라리 밥 주고 난방 되는 교도소에 가겠다며 적당한 수준의 범죄(소액 절도 등)를 저질러 자유를 포기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44] 다만 이것도 21세기 현대국가의 관점에서는 노예에 준하는 것으로 본다. 정확히는 노예는 아니지만 위압 및 위력에 의한 예속상태로 본다. 농장이나 공장 등 소속된 생산시설을 벗어나면 생존이 전혀 불가능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것도, 다른 사업장에 취직하는 것도 사업주의 통제나 경제적 예속때문에 불가능하다면 설령 법적으로는 자유민이더라도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없게끔 위력에 의해 박탈당했으므로. 아프리카의 일부 아동노동 사례나 대한민국의 경우 섬노예, 염전노예 같은 것들이 이런 부류. 정말 안타깝지만 일부 아프리카 제3국가들에는 21세기에도 이러한 행위가 불법이 아니거나 불법이더라도 공권력의 부재로 구제 및 탈출할 방법이 없는 국가들도 많다.[45] http://sillok.history.go.kr/id/kha_10106029_002[46]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128&cid=41826&categoryId=41826[47] 安帝永初元年, 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48] 陵戸、官戸、家人、官奴婢、私奴로 구분하였으며 입은 옷의 색으로 구분하였기에 五色の賤라고 한다.[49] 自賣 - 스스로를 다른 사람더러 노예로 사 달라고 하는 것[50] 심지어 구매해가는 사람들도 똑같이 서양인들이었다.[51] 대가로 조총화약등을 받기도 했다.[52] 그러니까 일본인들도 가라유키상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사실 외국에서 가라유키상으로 있다가 운 좋게 일본으로 돌아온 일본인 여성들은 주위 사람들한테 더러운 창녀라고 손가락질을 받다가 자살하는 일도 있었을 만큼, 평판이 안 좋았다.[53] 이런 상황은 일본이 1853년 미국의 압력을 받아 막 나라의 문을 다른 나라들한테 열었던 19세기 중엽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만 해도 일본은 가난한 농업 국가였기 때문에 해외에 내다팔 상품이 별로 없었고, 일본은 한동안 외국들과의 교역에서 무역 적자를 보았다. 그러다 나온 해결책이 바로 일본의 가난한 농촌과 어촌 처녀들을 해외에 성노예로 팔아 외화를 버는 일이었는데, 그렇게 해서 1920년까지 무려 60년이 넘게 가라유키상이라는 이름으로 30만 명의 일본인 여성들이 해외 각국으로 성노예가 되어 팔려갔다. 일설에 의하면 이 가라유키상들이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여 벌어들이는 수익이 일본 정부 연간 수익의 10%나 되었다고 하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일본 정부가 사용했던 전비에도 이 가라유키상들이 벌어오는 돈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일본 정부는 이런 가라유키상들이 외화를 벌어오는 애국자라고 추켜세우기까지 했으며, 근대 일본의 지식인인 후쿠자와 유키치도 "매춘부의 해외 수출은 장려되어야 하며, 막아서는 안 된다."라고 긍정적으로 보기까지 했다.[54] 당시 일본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농노들이 노예처럼 의복 등에서 '노예상징'을 강요받는 등 노예에 가까운 취급을 받기도 했었다. #[55] 일본인을 유럽인들에게 노예로 수출하는 움직임은 포르투갈인들이 처음으로 타네가시마에 표착한 1540년대 후반 무렵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56] 화약 100kg = 노예 20명 같은 식으로 교환되었다고 한다.[57] 히데요시 초기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정책을 이어받아 천주교에 대해 긍정적이었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꿔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는데, 동기로는 일본의 천하인으로서 일본의 전통 종교인 불교-신토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생겼다는 것, 규슈 정벌 중에 구마모토현 아마쿠사 제도(熊本縣 天草諸島) 지방에서 일본 백성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의 행태를 목격한 사건이 주로 꼽힌다.[58] 전국시대 카톨릭 신자 다이묘들 이른바 '키리시탄 다이묘'들도 이 노예매매 시장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로마 가톨릭 역시 일본인 노예 수입에 깊이 관여하였는데 이러한 노예 매매에 로마 카톨릭이 개입하여 있었고 이를 목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로마 카톨릭이 일본의 '키리시탄 다이묘'들을 조종해서 일본을 장악 할 것을 우려하여 카톨릭 탄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59] 베니스의 개성상인은 픽션이지만, 실제 조선인 포로 중 일부가 서양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렸다는 것은 검증된 역사적 사실이다.[60] (이세신궁문고 소장 「어주인사직고격」)[61] Nelson, Thomas (Winter 2004). Monumenta Nipponica (Slavery in Medieval Japan) . Vol. 59 . Sophia University .. p. 463[62] Jōchi Daigaku. Sophia University (2004). p. 463[63] 『入門』百六十五頁[64] 출처: 중국을 말한다 6권/ 90쪽[출처:] 민, 란 - 중국 민중의 항쟁 기록/ 최종명 (지은이)/ 썰물과밀물[66] 출처: 증오의 시대/ 자오위안 저/ 홍상훈 역/ 글항아리/ 306~307쪽[67] 실제로 청나라는 항복해 온 명나라 사대부들을 우대했다. 당장 이름이 높던 명나라의 학자이자 조정 대신이었던 전겸익도 한 때는 청나라에 맞섰으나, 남명의 수도인 남경이 함락되자 자진해서 청나라에 항복했고, 심지어 "이제 명나라는 더 이상 가망이 없으니 모두 청나라에 항복하라."는 글을 쓰면서 청나라에 적극 협조했다. 물론 그 대가로 전겸익은 청나라로부터 예부우시랑(오늘날의 교육부 차관)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얻었다.[68] 출처: 한 권으로 읽는 청나라 역사 (하)/ 따이이 저/ 전영매, 김선화 공역/ 김승일 감수/ 경지출판사(27~30쪽)[69] 출처: 한 권으로 읽는 청나라 역사 (하)/ 따이이 저/ 전영매, 김선화 공역/ 김승일 감수/ 경지출판사(27~30쪽)[70] 이들 천민 계급이 생겨나게 된 유래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는데, 하나는 원나라가 절강을 점령한 후 남송 백성들을 징벌하여 육지에서 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며 혹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자신의 적수인 장사성의 부하들에게 대대로 타민이 되어 배 위에서 살아가라는 벌을 내린 것이라고도 한다. 출처: 중국을 말한다 14/ 멍펑싱 저/ 김순림 역/ 신원문화사(248~250쪽)[71] 출처: 중국을 말한다 14/ 멍펑싱 저/ 김순림 역/ 신원문화사(248~250쪽)[72] 출처: 중국을 말한다 14/ 멍펑싱 저/ 김순림 역/ 신원문화사(248~250쪽)[73] 출처: 민, 란: 중국 민중의 항쟁 기록/ 최종명 저/ 썰물과밀물/ 2015년 11월/ 158쪽[74] 아랍권에서 흑인 노예의 반란은 여러 차례 일어났지만 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한 것은 잔즈 반란이다.[75] 당시 동유럽에서도 평균 시세로 말은 500루블, 남자 농노는 200루블, 여자 농노는 100루블 정도에 거래되던 시절이긴 했다만 정도가 더 심했다.[76] 아라비안 나이트의 첫부분이 바로 왕비가 사이드라는 이름의 흑인 노예와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인데, 아라비안 나이트 본문에서는 이 장면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77] 관료 또는 근위병인 카프쿨루 등을 위한 인재 징집용 제도. 주요 관료들은 일단 명목상으로는 술탄의 노예였다. 맘루크와 비슷한 셈[78] 율법상 노예와의 간통은 채찍형으로, 자유민과의 간통은 투석형으로 처벌되어야 했지만 둘다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79] 일부는 아주 어린 나이에 성노예로 육성되기도 했다. 이런 성노예는 비싼 값에 팔렸다.[80] 주인의 아이를 낳는다고 자유민이 되는 것은 아니고, 주인이 결혼을 통해 해방시켜주거나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물론 흑인노예의 아이들은 얄짤없이 죽임을 당했다.[81] 무왈라드가 해방되도 무왈라드의 자식은 노예였다.[82] 율법상 노예는 재산으로 취급되었고 매매시 품질을 검사받아야 했기에 얼굴과 몸을 가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를 통해 자유민과 노예를 구별할 수 있었다.[83] 노예를 실은 배가 풍랑을 만나면 화물을 버려서 가볍게 해야 했다.[84] 이슬람에서 피임은 불법이 아니다.[85] 주로 값은 엄청 저렴한데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신기해 보이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유리구슬이나 희한하게 만든 장신구 등이 이에 해당된다.[86] 정작 아프리카 현지에서는 흑인 부족들이 다른 부족들을 포획해 유럽과 아랍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먹었다. 노예를 매매한 부족은 노예로 팔린 부족에게 지금까지도 인종주의적 우월 의식을 지니고 있다.[87] 노예 자체를 금지하는 급진적인 방법보다 노예무역을 금지시켜 공급을 완전히 끊어버리면 얼마 뒤 노예제 자체가 메리트를 잃고 자연스레 소멸하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노예제 폐지에 대해서는 Amazing Grace가 잘 묘사하고 있다.[88] 탄지마트 이후 노예제 금지가 논의되기 시작했고 1847년에 이스탄불과 바스라에 설치된 노예시장을 철거하고 노예거래를 금지했다. 다만 이 조치는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에 한해서 시행되었으며 1854년에 카프카스 지역에서, 1857년에는 북아프리카 속주에서 노예제가 금지되었다. 다만 아라비아 반도를 비롯해 변경에서는 몰래 노예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제2차 입헌혁명(1908년) 이후에야 사실상 제국 내 모든 지역에서 노예제도가 사라지게 되었다.[89] 노예가 이렇게나 비싼 '재산'이었던 관계로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 남부의 모든 자산들 중 노예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남부가 노예제 폐지에 적극 반대했던 것은 다른 이유도 있지만 노예제 해방은 이런 '재산'들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해서였다. 한편으로 같은 이유로 정작 남부에서는 노예를 소유한 사람은 정말 적었다. 그럼에도 아이러니하게 이들이야말로 가장 노예제 철폐에 반대했는데 당시 미국 남부 사회의 많은 것은 인종주의에 기반한 노예제가 떠받치다시피 했었기 때문이다.[90] 조선의 노비제에서도 비효율이 드러나는데 도망가서 도시의 임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남자노비의 경우 주인이 어르고 달래고 일정부분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관리를 해 의외로 운신의 폭이 넓었다.[164] 반면 도망가기도 힘들고 도망가봤자 먹고살기도 힘든 여자노비의 경우는 무자비한 착취의 대상이었으며 이는 프랑스쪽 보고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91] 이 때 학살당한 콩고인들의 수는 알 수 없다.다만 천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다는 설은 현실성이 없다고 본다.[92] 실제로 아테네가 벌인 전쟁의 상당수가 시민만으로는 그 수가 부족하여 노예까지 포함해서 치른 것이다.[93] 국가적 위기에서는 정말 그런 약속을 하여 군사로 쓰기도 했는데 그런 다음엔 토사구팽했다.[94] 비율 순위와 거의 일치하지만, 완전히는 아니다. 당연히 낮을수록 긍정적이다.[95] 슬로베니아 (심각도 순위 67위), 폴란드 (61위)와 예멘 (92위), 스리랑카 (118위) 같은 예외도 꽤 많다.[96] 중국의 경우 땅이 워낙 커 공권력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많으며 일본의 경우도 접근이 어려운 여러 작은 섬들이 많이 존재한다.[97] 다만 작은 사회는 말 그대로 규모가 작은 사회로서 닫힌 사회와 동의어는 아니다. 닫힌 사회가 흔히 말하는 유착, 노예 등이 나타나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작은 사회는 무조건 닫힌 사회가 되지는 않는다. 특히 한국은 수많은 개발과 통상으로 인해 시골과 도시를 불문하고 수많은 작은 사회들이 큰 사회들의 속성 일부를 교류하고 있기 때문이다.[98] 북한의 경우 노예제가 딱히 없지만 국가에 전 국민이 노예로서 사실상 귀속된 상태고 민간에서도 여러 노예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노예제 합법국가로 분류하기도 한다.[99] 카스트 제도 등[100] 당연한 일인 게 현지 경찰들에게 사채업자나 조폭들이 적당히 돈을 찔러 준다. 그나마 중국은 이게 잘 먹히지 않으니 걸리면 구출이라도 되지만 인도나 다른 남아시아 국가들은 그런 것도 없다.[101] 그나마 제애그룹 지하노역장은 이런 짓을 봉급의 일부에만 적용해 다른 돈으로는 빚을 갚도록 하고 이자 추가도 중단함으로써 살아서 나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므로 오히려 현실이 픽션의 제애그룹 지하노역장보다 더 가혹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102] 대부분이 빚 혹은 납치로 끌려온다. 자식을 소유물 취급하는 남아시아 국가들 특성상 부모가 팔아넘긴 경우가 상당수라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도 불가능하고 대부분 보육원 등에서 맡거나 난민 등의 형태로 선진국 혹은 중진국에 보내기도 한다.[103] 대부분이 빈민가인 파벨라 출신 혹은 나라꼴이 말이 아닌 중앙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 주변국 출신 노예노동자들에 의해 이뤄진다. <일회용 사람들> 이라는 책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가혹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나와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도 최하층 계급은 아니며 진짜 최하층은 이들 지역에서 강제 매춘을 하는 여자 노예들.[104] 웬 폭죽이냐 할지 모르겠지만 전 세계에서 폭죽에 가장 환장하는 사람들이 중국인들이다. 일본인들도 한 폭죽 사랑 한다지만 중국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워낙 수요가 많고 업체가 난립하는지라 닥치고 최저비용으로 생산해야 하니 당연히 아이들에 대한 안전 대책 따위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해마다 수많은 중국의 아동노예 아이들이 제조장의 학대와 폭발 사고로 불구가 되거나 죽어가고 있다. 인도도 폭죽을 많이 쓰느라 아이들을 저임금으로 부리긴 하지만 그 수요가 중국이 압도적이다.[105] 내전 당시 시에라리온의 RUF라는 도적떼는 사람들을 납치하여 힘없고 약한 사람은 손목을 자르고 그렇지 않으면 다이아몬드 광산에 보내 강제 노역을 시켰다.[106] 주로 수단 공화국, 에티오피아에서 온 가난한 사람들이 대상이다.[107] 2003년 수단에서 비이슬람계 및 남수단 흑인들로 이뤄진 노예 매매단이 적발되었다. 물론 수단도 노예가 금지라서 합법적은 아니다. 문제는 그 피해국인 남수단 공화국조차도 다른 부족 아이들을 노예로 부리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노예가 된 아이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국제구호단체에 의해 구출. 난민으로 인정받아 해외로 나가는 것.[108] 상당수의 농장에서 불법 이민자를 고용한 다음 사실상 노예처럼 부린다. 그나마 미국은 공권력이 썩지는 않아서 적발하려는 노력이 있고, 적발될 시에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최대 수백년까지 징역을 때리는 등 처벌이 엄격하다. 물론 상당수의 개발도상국들의 대농장들도 똑같은데 여기는 공권력이 썩어빠져서 제대로 단속도 안하고 처벌도 약한게 문제.[109] 소수 유흥업소 종사자 중에 빚을 지고 그걸 이유로 감금 및 성매매를 강요하거나 처음부터 가짜 계약서를 만든 뒤 신체적 자유를 빼앗고 성매매를 시키는 경우도 존재한다. 21세기에는 한국인 피해자는 정부에서 처벌과 단속을 강화함에 따라 별로 없지만 중국, 필리핀, 러시아, 동유럽 등 외국인 여성 입국자 중에 이런 사례가 많아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110] 관리 및 감시도 북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 중동, 아프리카 등에서도 외화벌이 목적으로 노동력 착취중.[111] 태국 영화 옹박 2에서 태국의 성매매 여성들이 유흥업소 사장에게 학대당하는 장면이 나온다.[112] 관리감독기관은 양천구청인데, 시설은 김포에도 있다.[113] 보령경찰서가 이 사건을 맡았는데 이는 태안군이 1989년에서야 신설되어 1971년 당시에는 태안경찰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태안경찰서는 1948년 설치되었다가 1956년 서산경찰서에 통폐합되었고, 2017년에 재설치되었다.[114] 보령은 전혀 관계없느냐를 보면 그것도 아니다. 2018년 현재 보령 행정구역 내에 포함된 오도, 외연도 또한 납치된 청소년들이 혹사당한 곳이다.[115] 2008년 12월 김제시청폐쇄조치했다. 수용 장애인 전원이 타 시설로 분산 조치됐다고 한다.[116] 첨언하면, 오스만 제국 역사상 노예 출신으로 고관이 된 예나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 된 예는 셀 수 없이 많다. 휘렘 술탄이나 이브라힘 파샤는 그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예시들. 일단 하렘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문서상으로 황제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했고,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1453년 이후 오스만 제국의 정치, 군사적 실세는 데브시르메 제도로 징집된 기독교도 소년들이 잡게 되는데, 그들 가운데 노예로 팔려왔다가 징집된 이들도 종종 있었다. 예니체리도 문서상으로는 황제의 노예들.[117] 이후 자유인의 신분을 찾았다.[118] 물론 뱃노예의 생활은 비참했지만 당시에는 뱃사람들의 처우 자체가 나빴다.[119] 이는 상기한대로 기독교 만민평등 사상의 영향으로 로마 제국 후기부터 노예의 신분이 상승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 실제로 동로마 제국도 12세기 이후엔 노예가 없는 거나 다름 없었고.[120] 진지하게 이유를 찾자면 작가 대부분은 역사 전문지식이 얕기 때문에 외형적 배경은 유럽 중세를 본떴어도 세세한 부분은 결국 자국 역사의 그것에 세간의 스테레오타입이 더해진 개념을 바탕으로 했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 헤이안~전국시대 사이에 그런 노예가 많이 매매되었다.[121] 다만 도서관 패치를 사용하면 이벤트 진행이 가능해져 노예 발견이 가능해진다.[122] 특히 바이킹들이 약탈 과정에서 포획한 노예를 뜻한다.[123] 플레이어를 선제공격하는 도적을 팔아버릴 수도 있고, 아무 죄없이 평범하게 살던 사람들을 납치해서 팔아버릴 수도 있다.[124] 리오 스나이퍼와의 내기에서 져서 리오의 시중을 평생 동안 들게 되었다. 리오는 원하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는 그녀가 불쌍해서 노예라는 명목으로 그녀를 거두어 주어 상부의 보복을 막았다. 게다가 세계관상 여성 노예는 성폭행을 포함해 무슨 짓을 당해도 이상할 게 없고 일단 전쟁포로의 신분으로 노예가 된 것이라 본인도 각오하고 있었던 듯한데 리오는 건드리지도 않고 그녀를 계속 보호해 준다. 하지만 서로 같이 있는 시간도 많고 해서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었는데 이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리오랑 어디까지 갔냐고 묻기도 하는데 본인은 무시한다. 애초에 그녀를 하대할 수 있는 사람은 명목상이지만 그녀의 주인인 리오뿐이다. 그 리오 역시 후반부에는 그녀에게 존대를 하며 작전지휘권을 넘기기도 한다. 말 그대로 이름만 노예. 그런데 진행하는 동안 아예 진짜 노예근성이 되었는지 하이엘바인을 박살내고 리오를 거의 죽일 뻔한 중간보스의 위엄은 어디 가고 후반부에 리오가 존대를 자꾸 하자 당황해서 이러지 말라고 하며 리오에게 주인님 주인님 그런다. 그리고 결국 진히로인화하며 오랜 기간 벌어져 온 히로인 쟁탈전의 최후의 승자가 된다.[125] 서룡족의 용제 바이칼이 고아가 된 그녀를 거두어 주었는데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쑤밍은 적대세력인 동룡족이기 때문에 그냥 거두면 서룡족과 동룡족 양쪽에서 극딜을 당할 수 있는 정치적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이다.)노예 신분이다. 그러나 암암리에 차기 황후 후보로 거론되는 등 노예라고 보기에는 애매하다.(쑤밍은 브리간트의 총애를 받을 뿐 아니라 루이체의 절친이고 그 외 신계의 고위 장군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126] 막시무스는 본디 귀족이자 장군이었지만 콤모두스의 계략에 빠져 사막을 헤메다 정신을 잃은 사이 검투 노예 상인에게 납치되어 검투사로 팔린다. 당시 검투사들은 단순한 검투노예라기 하기 힘들지만 (항목 참고), 이 영화에선 그냥 사고 팔고, 죽으라면 죽는 노예 신분으로 설정됐다. 실제로 막시무스가 가면을 벗으라는 콤모두스의 명령을 어기고 돌아서자 그가 분노해 "노예가! (Slave!)"라고 외친다.[127] 메이는 일찍이 정령화장의 조수로 전직하여 제대로 게임을 즐기고 있고, 브리즈는 지안트의 멘탈 수습을 위해 엘프 상담가로 전직했다.[128] 황재호의 부탁으로 꽃집 건설을 돕고 있지만, 엘프들의 감독 하에 부려먹히고 있는 모습이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다. 본인들도 스스로를 노예라고 인정할 정도.[129] 재호에게 약점을 잡히는 바람에 사실상 재호의 노예로 전락했다.[130] 아직 불곰 길드 소속이었을 때 재호를 방해하러 갔다가 흨우 선장에게 붙잡혀 고잉헬 호의 노예가 된 뒤, 재호가 고잉헬 호 소유권을 손에 넣으면서 재호의 노예가 되었고, 푸른 산호섬에서 또 재호를 방해하는 바람에 재호가 출항집합 명령을 내리면 강제로 고잉헬 호로 소환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재호와 같이 원정을 떠나면 얻는 이득이 많아서 2부에서 새 길드를 만든 후에는 오히려 노예에서 풀려나는 걸 두려워한다.[131] 유곽의 유녀들의 처지가 노예와 다를 게 없는데다 유녀가 낳은 아이들도 유곽의 소유가 되는 관계로 어머니가 유녀인 규타로와 다키(오니화 이전에는 우메) 역시 유곽의 소유나 다를 게 없었다.[132] 스폰지밥과 징징이는 집게리아의 직원이지만(스폰지밥은 주로 조리 담당, 징징이는 주로 계산 담당.) 집게사장의 성향과 이윤을 우선시하는 경영 방식, 직원에 대한 태도를 고려하면 말이 직원이지, 실상은 노예와 다를 것이 없다. 정작 스폰지밥은 집게리아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133] 크라미의 주인인 필 닐바렌이 크라미를 노예가 아닌 친구로써 대하며 그 영향으로 크라미도 필을 애칭인 '피이'라고 부르고 말도 놓기 때문에 필하고의 관계는 친구나 모녀(크라미 첼은 18세, 필 닐바렌은 52세.)처럼 나온다. 다만 필이 크라미의 편을 들어줬어도 안 좋은 기억, 울고 싶은 기억, 죽고 싶어지는 기억이 많다고 하며 크라미도 과거 회상을 할 때 '노예로서 닐바렌 가문에서 '사육'되던 나날.'이라고 표현했다. 애초에 크라미를 노예가 아닌 친구로 보는 엘프는 필 한 명뿐이다. 단적인 예로 5권에 등장한 엘프는 크라미를 '노예 한 마리'('노예 한 명'이 아니다.)로 취급한다.[134] 투믹스 웹툰.[135] 19화까지.[136] 손오반, 크리링, 트랭크스한테 사이어인들은 우주의 악마라고 말할 정도로 노예 생활의 피해를 입었다.[137] 란스와 록키는 란스Ⅵ 초반 한정.[138] 란스Ⅸ에서 란스의 노예 2호가 된다.[139] 본래 노예였으나 어릴 적 아지르의 목숨을 구한 대가로 황제의 오른팔이 되었다. 하지만 아지르가 초월 의식을 할 때 그를 배신해 자기가 대신 초월하고 제국을 멸망시켰다.[140] 실사 영화판 한정. 실사 영화판은 스켈레토에게 끌려가서 노예가 되지만 마지막에 그의 친구들에 의해 풀려난다.[141] 히어로즈 오브 메이플에서 빵 몇 조각 받고 맞으며 일했다고 묘사된다.[142] 검은 마법사가 샤렌 4세로 위장한채 정신이 망가지기 일보직전인 켈라드에게 접근하여 '우리는 생존자가 단 1명이라도 남을때까지 영원히 샤레니안을 수호한다=나(샤렌 4세)는 샤레니안의 마지막 남은 생존자이다=우리는 영원히 샤렌 4세(검은 마법사)를 수호한다' 란 말로 현혹하여 자신의 충실한 노예로 만들어버렸다.[143] 한때 노예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된 적도 있었지만 본인이 자진해서 다시 노예가 되었다. 물론 주인인 이와타니 나오후미는 그녀를 매우 신뢰하고 있는지라 사실상 형식적인 주종관계에 지나지 않는다.[144] 스토리 진행 중 자기가 저질러온 악행들이 다 밝혀져 어머니인 여왕의 명으로 노예문(=노예에게 거는 마법)이 걸려 노예 상태였다가 17권 기준으로 해방.[145] 둘 모두 세라가 재산을 환수받자 해방되어 각각 일반 하녀와 평범한 아가씨로 돌아왔다.[146] 콰이곤 진을 만나기 이전[147] 클리그 라스가 해방시켜줌[148] 노예 대우를 못이겨 반란을 일으켰었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149] 마레즈 개간지를 두고 갈등을 일으켰다가 로이드의 도움 없인 특산물 라코나타 옷감을 생산할 수 없게 되면서 거액의 수도세를 내게 되었다. 이후 프론테라 남작령이 백작령으로 승작하고 자신의 영지가 그 봉신으로 떨어지면서 사실상 로이드의 노예로 전락했다.[150] 도혜옥에게 입양된 이후 초등학교 때 구박받다가 중졸이 된 채 국밥집에서 사실상 노예로 착취당한 적이 있다. 참고로 부려먹었던 사람은 연민정의 친모인 도혜옥으로 연민정이 자기 엄마의 인성을 닮아 인간말종이 된 것에 가장 큰 일조를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151] 작중 나온 이들은 초신성과 실버즈 레일리가 휴먼숍에서 깽판을 부린 덕에 탈출할 수 있었다.[152] 작중에서는 노예가 아니라 '펫숍'의 상품이라고 나온다.[153] 키스샷(시노부)의 노예였으나, 지금은 주인.[154] 암살단에 가입한 이후 프리덤 크라이에선 노예들을 해방시킨다.[155] 과거에 아버지로테슈 자작에게 사기를 쳐서 노예가 되었다. 노예 처지에서 벗어나려고 주인의 아들을 유혹해 아들을 낳았으나 배신당하여 도망쳤고, 덫에 걸린 걸 황제 소비에슈에게 발견되어 정부가 됨으로써 소설의 갈등 시작을 만들었다.[156] 에델로즈와 비슷하다.[157] 시즌1까지만.[158] 이들은 제레프를 부활시키려고 하는 마스터 하데스에 의해 낙원의 탑에 갇혀 불행한 삶을 살아왔다.[159] 젬마가 길드 마스터였던 시절 한정.[160] 이쪽은 일단 미닛맨 장군이자 정착지 지도자, 혹은 브라더후드의 부사령관, 인스티튜드 소속 바운서, 레일로드의 현장 요원이긴 하지만.[161] 특히 렌죠지 베루, 하야미 히로가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162] 원인은 이그니스.[163] 가끔식 노예경매장이 열리는데, 할 짓 없는 석상들이 노예를 자처한다. 경매로 노예를 사고, 금액을 노예에게 주고 일을 시키는 일종의 인력대기소다. 물론 뉴비가 나오면 경매가가 미친듯이 치솟는 걸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