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ثورة الزنج [1]Zanj Rebellion
869년 ~ 883년간 이라크 남부에서 벌어진 흑인 노예들과 일부 아랍/베두인들의 반 아바스 반란. 비록 진압되었지만, 한때 바스라와 와시트를 점령하며 바그다드를 위협하였고 아바스 왕조의 쇠퇴와 이슬람 세계의 분열을 가속화시켰다. 10여년간 이라크 남부를 초토화시켰지만 아랍계 주민들을 납치하고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는 극단성 때문에 칼리파 알 무타미드의 형이자 권신이던 알 무와파크가 대대적인 토벌에 나서 진압하였다.
2. 배경
반란의 거점이 된 이라크 남부(수메르)의 습지대. 선입견과 달리 이라크 남부는 사막이 아닌 습지대가 꽤 있다.
동아프리카에서 잡혀온 흑인 노예는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지중해 권역에서 매매되었고, 정통 칼리파들의 정복으로 서아시아의 패권을 잡은 이슬람 왕조들도 흑인 노예를 애용하였다. 특히 아랍 인들은 630년대에 이라크를 정복한 후, 그동안 동로마, 아랍, 페르시아 간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메소포타미아의 관개 시설을 수리하여 농업 생산력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또한, 늘어나는 인구 부양을 위해 남부 습지 지대에 대한 개간과 염전 산업도 활성화되었는데, 이러한 사업들의 노동력은 흑인 노예들이 떠받들어야 했다. 이에 노예들은 2차 피트나로 우마이야 왕조가 흔들리자 689~690년, 그리고 694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우마이야, 그리고 그를 이은 아바스 정부는 노예들에 대한 당근과 채찍 정책을 쓰며 이라크 남부를 개간해 나갔다.
863년부터 바레인 일대에서 시아파 반란을 꾀하던 알리 이븐 무함마드라는 이가 있었다. 스스로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후손을 자처하며 주민들을 규합하던 그는 868년, 지역 유지들의 반발에 바레인을 포기하고 북상하여 바스라로 거점을 옮겼다. 그는 바스라의 두 파벌이 대립하는 틈에 재차 반란을 시도했으나 양 파벌 모두 그를 외면하였고, 결국 알리 이븐 무함마드는 이라크 남부 습지대로 도주하였지만 사로잡혀 와시트로 압송되었다. 이후 뛰어난 처세술로 석방된 알리는 바그다드로 향하여, 이번엔 자이드 이븐 알리 (자이드파의 6대 이맘)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지지자들을 모았다. 그리고 869년, 재차 바스라로 향한 그는 습지대에서 일하던 노예들에게 자유와 부를 약속하며 인원을 모았다. 카와리지 사상의 '아비시니아 노예도 출중하다면 칼리파가 될 수 있다'는 평등주의를 강조한 결과 알리는 많은 흑인 노예들을 휘하에 두었고, 사히브 앗 잔즈(흑인들의 수장)이라 알려지게 되었으며 일대의 베두인들 역시 합류하였다. 다만 카와리지 사상을 근거로 들긴 했지만 기존의 자이드 사상 역시 유지되었다.
3. 반란의 시작
9세기 후반 이라크 일대
869년 9월, 알리는 수백의 노예 병력을 거느리고 두자일 운하를 건너 진영을 세웠다. 며칠 후 이둘 피트르에 도착한 반군은 그곳에 있던 진압군을 격파한 데에 이어 재차 파견된 4천의 토벌군을 격파하며 기세를 올렸고, 알리는 이때 잡힌 포로 전원을 처형하였다. 그 후 반군이 나아가자 그 진격로에 놓인 마을의 주민들은 복속하거나 도주하였고 일대의 원로들은 알리에게 주인들에게 노예를 돌려준다면 막대한 보상금을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알리가 그 제안을 거절하면서 전투는 계속 이어졌다. 바스라 총독이나 주민들의 노력이 실패하자 잔즈 군은 이라크 남부를 마음껏 누비며 약탈하거나 세금을 거두었고 10월 중순에 마침내 바스라로 진격하였으나 민병대에게 대패하였다. 고무된 바스라 민병대는 비무장한 주민들의 마중을 받으며 나흐르 샤이탄으로 철수한 반군을 향해 배를 타고 진격하였으나 알리가 운하 양변에 배치한 매복에 당하며 전멸하였고 오직 몇명만이 도시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3.1. 알 우불라 함락
분수령이 된 '뗏목 전투' 이후 바스라 주민들은 더이상 정면 대결에 나설 수 없었고, 심각성을 인지한 아바스 칼리파조 역시 본격적으로 개입하기로 결정하며 줄란 알 투르키 휘하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6개월 간의 전초전 끝에 줄란은 반란군이 숨은 습지대에서 정규군이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잔즈 군이 아바스 진영에 대한 야습을 가하여 큰 피해를 입자 바스라로 철수하였고 그후 줄란은 사이드 이븐 살리흐 알 하집으로 대체되었다. 한편 알리는 나흐르 아비 알 카시브 서편에 도시를 세우고 알 무크타라로 명명하여 거점으로 삼았으며 이후 그는 직접 군을 이끌지 않고 궁에 머물며 현장 지휘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본래 아바단 공격을 염두에 두던 알리는 대신 바스라 근처의 알 우불라를 목표로 삼았다.줄란이 임명한 태수 아불 아흐와스 알 바힐리는 수륙 양면으로 공격하는 잔즈 군에 맞섰으나 870년 6월 28일 저녁 티그리스 강변의 성문이 뚫리며 도시는 함락되었다. 아불 아흐와스와 그 아들은 전사하였고, 잔즈 군은 도에 불을 지었다. 오밀조밀 지어진 목조 건축이 대부분이던 우불라 시내는 전소되었고, 주민들은 살해되거나 수로를 통해 도주하려다 익사하였다. 잔즈 군은 약탈에 나섰으나, 대부분의 물품이 화재로 소실되었기에 크게 건진 건 없었다. 그러나 우불라 파괴의 소식은 일대에 퍼졌고, 같은 운명을 겪을 것을 두려워 한 아바단 주민들이 잔즈 측에 항복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후 아바단에 입성한 잔즈 군은 시내의 무기를 압수하고 노예들을 입대시키며 군세를 강화한다.
3.2. 아바즈 장악
아바단의 물자로 보강된 잔즈 군은 두자일 동쪽 줍바로 향하였고, 주민들은 저항하는 대신 도주를 택했다. 줍바 시내와 부근을 약탈한 잔즈 군은 목표인 아바즈 (수크 알 아흐와즈)에 당도하였고 수비대장 사이드 이븐 야크신이 철수하고, 주민들 역시 도주한 덕에 도시를 쉽게 장악한 잔즈 군은 남아있던 총독 이브라힘 이븐 무함마드 이븐 알 무답비르를 사로잡아 그 재산과 노예들을 압수하였다. 다만 잔즈 군은 아바즈를 지배하지 않고 곧 철수하였고, 이듬해인 871년에 아바스 조의 지배가 복구되었지만 점령 자체는 일대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고 바스라 주민들 중 다수는 더 안전한 내륙 방면으로 이주하였다.871년 알리는 알리 이븐 아반 알 무할라비를 아바즈로 파견해 두자일의 다리를 파괴하고 일대를 장악하게 하였다. 다만 다리에 다다르자 잔즈 군은 이브라힘 이븐 시마 알 투르키의 정부군과 조우하여 대패하였다. 알리 이븐 아반은 아바즈로 향하려 했으나 발의 부상이 악화되자 줍바로 귀환하였다. 그후 아바즈 방면 사령관이 된 이브라힘은 군을 둘로 나눠 알리 이븐 아반을 추격했는데, 부관 샤힌이 이끄는 병력은 알리 이븐 아반에게 대패하였고 샤힌도 전사하였다. 같은날 저녁 알리 이븐 아반은 패전보보다 더 빨리 이브라힘의 진영으로 가서 더 적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공격해 격파하였다. 이브라힘은 철수하였고, 알리 이븐 알반은 줍바에 주둔하다가 바스라 공격을 위해 소환되었다. 이후로도 잔즈 군은 873년과 875년 다시 아바즈를 점령한다.
3.3. 바스라 봉쇄
871년 봄 압바스 조정은 부가르즈를 파견해 사이드 이븐 살리흐에게 더 적극적으로 싸울 것을 압박하였다. 6월 사이드는 알 무크타라로 진군, 잔즈 군과 조우하여 부상당했음에도 승리를 얻었다. 그는 전리품을 챙기고 잔즈 측에 사로잡힌 여인들을 풀어주었다. 이후 사이드는 진영을 세워 추후 진격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7월 중순 반격을 결심한 알리는 부관 야흐야 이븐 무함마드 알 바흐라니와 술레이만 이븐 자미, 아불 라이쓰 알 이스바하니를 파견하였다. 잔즈 군은 준비되지 않은 압바스 진영에 야습을 가하여 대패를 안겼다. 잔즈 군은 사이드의 병력 대부분을 죽이고 진영에 불을 질렀다. 정부군의 사기는 저하되었고, 이에 더해 아바즈 쪽에서 보급이 늦어지자 사이드는 병사들에게 급료 지급을 연기해야 했다. 그는 만수르 이븐 자파르 알 카야트로 대체되었고, 공백기 동안 부그라즈가 바스라를 수비하였다. 잔즈 측은 함대를 편성하고 자체 주화를 주조할 정도로 성장하였다.바스라 봉쇄에 나선 잔즈 군은 도시 주변의 마을들을 파괴하였고, 접근하는 선박들을 공격하였다. 압바스 조정이 파견한 일련의 보급선은 바스라의 물자 부족을 해결하지 못함은 물론 오히려 잔즈 측의 보급품으로 활용되며 상황을 악화시켰다. 이에 만수르 이븐 자파르는 보급선에 호위함을 더하였고, 바스라의 보급난은 완화될 수 있었다. 그후 만수르는 수륙 양면으로 알 무크타라로 진격하였으나 또다시 매복에 당하여 대패하였다. 병력 대부분은 전사하였고, 나머지는 티그리스 강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하였다. 만수르는 도주하였고, 나흐르 마킬에 위치한 야흐야 이븐 무함마드의 진영에는 570개의 정부군 수급이 전시되었다. 이후 만수르는 잔즈 군에 직접 맞서기 보다 바스라 보급선을 지키는 데에 주력하였다. 다만 잔즈 군이 줍바를 공격하고 만수르가 그에 집중하자 호위함을 붙이는 작전이 와해되었고, 다시 바스라는 고립되었다.
3.4. 바스라 파괴
압바스 군대가 카와리지, 자이디, 이사의 반란에 대처하는 동안 잔즈 반군은 기존의 우불라, 줍바에 이어 아바즈를 점령하고 아바단을 복속시켰다. 야흐야 이븐 무함마드의 봉쇄가 1년 가까이 이어진 끝에 871년 8월 알리는 마침내 야흐야와 알리 이븐 아반 알 무할라비에게 바스라에 대한 총공세를 지시하였다. 수비대는 부그라즈 휘하 50명의 기병대와 부라이흐 휘하의 민병대가 전부였다. 9월 7일 잔즈 군은 공격에 나섰고, 3일 간의 격전 끝에 부그라즈와 부라이흐는 도시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바스라에 입서한 잔즈 군은 수만의 주민들을 학살하고 모스크 등 시가지를 파괴하였다.이후 줍바로 돌아간 알리 이븐 아반은 원군을 이끌고 합류한 아불 라이쓰 알 이스바하니와 바스라 지역 사령관 만수르 이븐 자파르 알 카야트와 맞섰다. 비록 아불 라이쓰가 독단적으로 공격했다가 패하였지만 한달 간 군세를 재정비한 알리 이븐 아반은 우선 만수르의 부관을 야습으로 격파하였다. 이에 만수르가 반격에 나서자 대결하여 격파하였다. 만수르는 운하를 건너 도주하려다 살해되었다.
3.5. 알 무와파크의 남하
제국의 주요 항구였던 바스라의 파괴와 사령관 만수르의 전사는 압바스 조정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바스라 학살 직후 무함마드 알 무왈라드의 토벌군이 파견되었지만 늪지대로 물러난 야흐야 이븐 무함마드에게 패하고 후퇴하였다. 반군은 우불라의 정부군 진영을 약탈하고 바스라를 재점령하였다. 결국 872년 2월 실권자 알 무와파크가 직접 무플리흐와 함께 남하, 역시 슾지대로 물러난 잔즈 군대를 쫓아 그 거점인 알 무크타라를 목표로 진군하였다. 4월 무렵 반군은 각지에 흩어져 있었기에 알 무크타라에는 잔즈 지도자 알리 이븐 무함마드 휘하의 병력만이 있었다. 압바스 군대가 공격하자 도시는 크게 동요하였고, 많은 여인과 아이들이 운하로 도주하려다 익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형을 이용한 잔즈 군대의 반격에 무플리흐가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고, 그후 압바스 군은 혼란에 빠져 다수의 사상자와 포로를 남기고 철수하였다. 무플리흐는 며칠 후 부상이 도져 사망하였다.우불라에서 병력을 가다듬은 알 무와파크는 티그리스 강을 따라 진군하던 야흐야 이븐 무함마드의 첩보를 접하고는 타쉬티무르 앗 투르키에게 병력을 주어 추격하게 하였다. 알 무크타라로 기병대를 파견하고 (만수르의 후임) 후제스탄 총독 아스가준의 공격을 받아 약화된 잔즈 군대는 손쉽게 격파되었다. 아스가준이 보낸 함대에 의해 퇴로가 차단된 야흐야 이븐 무함마드는 격렬히 저항했으나 결국 부상을 입고 도주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5월 사마라로 압송된 야흐야 이븐 무함마드에 대해 무타미드는 무대를 조성하게 하여 공개적으로 그를 고문하였다. 200대의 채찍을 맞고 손과 다리가 잘린 그는 칼로 난도질당한 후 토막내어져 불태워졌다. 알 무와파크는 여세를 몰아 재차 알 무크타라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진영에 전염병이 돌아 미루어졌다. 얼마 후 알 무와파크는 토벌군을 파견한 후 자신은 소수의 병력과 후방에 남았다. 압바스 군은 사로잡힌 몇몇 마을들을 점령하고 사로잡힌 여성들을 해방하였으나 잔즈 군의 반격에 후방의 알 무와파크 진영까지 공격당하자 결국 그는 철수하였다. 늪지대에 고립된 백여명의 병사들은 몰살되었다.
3.6. 아바즈 재점령
바다와르드에서 병력을 재정비하던 알 무와파크는 돌풍이 불어 발생한 화재로 진영이 전소되자 7월 와시트로 회군해 군대를 해산하였다. 한편 같은해 무플리흐에 이어 카와리지 전선에 나선 마스루르 알 발크히는 하디싸를 수복하고 카와리지 포로를 잡아 사마라로 귀환하였다. 873년 알리 이븐 아반 휘하의 잔즈 군대가 후제스탄을 재차 침공, 총독 아스가준을 전사시키고 5월 아바즈를 점령하였다. 다시 충격에 휩쌓인 압바스 조정은 무사 이븐 부가 알 카비르에게 잔즈 전선을 일임시켰다. 9월 14일 칼리파의 배웅과 함께 출정한 그는 무플리흐의 아들 압둘 라흐만를 지휘관으로 삼아 파견하였다. 압둘 라흐만은 초반에는 패했지만 반격하여 다수의 반군을 전사시켰고, 알리 이븐 아바단 휘하 잔즈 병력은 슾지대로 도주하였다. 압둘 라흐만은 부관 타쉬무르를 파견하였고, 후자는 숲에 불을 질렀다. 알리 이븐 아반은 탈출했지만 다수의 반군이 사로잡혔다.하지만 병력을 증원받은 알리 이븐 아반이 결사대를 꾸려 압바스 진영을 야습하자 압둘 라흐만은 패배하고 아바즈로 철수하였다. 다만 압둘라흐만 역시 병력을 재정비한 후 반격하여 승리하였고, 알리 이븐 아바단은 재차 슾지대로 철수하였다. 그후 압둘 라흐만은 알 무크타라 부근 바얀으로 진군해 그곳에서 한동안 반군과 대치하였다. 그는 역시 무사에 의해 파견된 바다와르드의 이브라힘 이븐 시마와 함께 잔즈 핵심부에 지속적인 공격을 퍼부었고, 바스라에 배치된 이샤크 이븐 쿤다즈는 적의 보급망 차단에 주력하였다. 양측의 공방전은 1년 넘게 이어졌고, 마침내 875년 중반 무사가 파르스 방면 사령관으로 전임되고 카와리지 전선에서 능력을 보인 마스루르 알 발크히가 잔즈 방면 사령관이 되었다.
876년 데이르 알 아쿨 전투에서 알 무와팍크가 야쿱 이븐 라이스가 이끄는 사파르 군을 격파하자 압바스 조는 잔즈 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다.
3.7. 와시트 파괴
야쿱에 맞서기 위해 압바스 장군 마스루르가 이라크 남부의 병력을 불러들이자 잔즈 반군은 더욱 활개를 치며 일대를 습격하였다. 알리는 술레이만 이븐 자미 휘하의 주력군을 와시트 남쪽의 알 하와니트로 파견하였다. 잔즈 군은 압바스 함대를 파괴하며 진군, 수차례 압바스 군을 패배시켰으나 와시트 수비를 맡은 아부 무아드 알 쿠라이쉬의 습격에 격퇴되었다. 이후 잔즈 군은 재차 진격하여 아부 무아드를 격파하고 와시트 인군을 약탈했으나 압바스 원군에 크게 패하고 철수하였다. 877년 압바스 조정은 아가르트미쉬와 쿠샤이쉬 휘하의 토벌군을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술레이만 이븐 자미에게 패하였고, 쿠샤이쉬가 전사하였다. 잔즈 군은 압바스 진영을 약탈하였고, 알리 이븐 무함마드는 쿠샤이쉬의 수급을 전시하게 하였다. 그후 알 하와니트로 진군한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압바스측 지휘관 아부 타밈을 전사시키고 그의 진영을 약탈하였다.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타킨 알 부카리가 이끄는 압바스 군을 거짓 후퇴로 유인한 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해 격파하였다. 승리 이후 그는 회군하려 했으나 다른 장군 술레이만 알 줍바이는 병력을 이끌고 타킨 알 부카리의 진영을 공격하였다. 진영의 압바스 군이 완강히 저항하자 잔즈 군은 철수하였고, 전력을 회복해 돌아왔으나 이미 타킨 알 부카리는 병력을 철수시킨 후였다. 따라서 잔즈 군은 압바스 진영을 약탈한 후 진영으로 귀환하였다. 한편 회군 허가를 받은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남은 병력을 술레이만 알 줍바이에게 맡기고 알 무크타라로 돌아갔다. (878년 초엽) 하지만 줄란 앗 투르키과 무함마드 이븐 알리 알 야쉬쿠르즈가 이끄는 압바스 군에게 잔즈 군이 패하자 다시 복귀한 그는 다시 승리를 거두고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공세에 나선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7월 무렵 와시트 턱밑의 알 루사파에 당도, 마타르 이븐 자미가 이끄는 수비대를 격파하고 도시를 약탈한 후 불태웠다. 다만 신중했던 그는 여세를 몰아 와시트까지 공격하는 대신 알 무크타라로 회군, 8월 8일에 당도하였다.
잔즈 군이 떠난 후 마타르 이븐 자미는 잔즈 영역을 습격하였고, 이에 반격에 나선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8월 31일 알 루사파로 귀환하여 압바스 군을 격퇴하고 일대를 평정하였다. 879년 초엽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정예 병력을 이끌고 북상, 앗 샤디디야에서 격전 끝에 타킨 알 부카리를 격파하였다. 이에 와시트 지역 사령관 아흐마드 이븐 라이싸와야가 남하, 양측은 이틀간 치열히 싸웠다. 다만 3일째에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적군을 거짓 후퇴로 유인해 격파하였고, 아흐마드 이븐 라이싸와야는 겨우 도주하였다. 자신감을 얻은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증원 병력이 당도하자 와시트 공격에 나섰다. 총독 무함마드 알 무왈라드는 패퇴하였고, 하루에 걸친 치열한 시가전 끝에 도시는 점령되었다. 바스라, 아바즈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주민들이 살해되었고 도시는 약탈당한 후 불태워졌다. 이후 잔즈 군대는 폐허가 된 와시트를 떠나 쿠파 방면의 준불라 일대를 약탈하였다.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보급을 위한 운하를 파고 준불라에 계속 주둔했으나, 아흐마드 이븐 라이싸와야의 반격에 패배한 후 타히싸로 철수하였다.
3.8. 알 무와팍크의 진압
잔즈 반란의 최대 범위 (879년)
879년 잔즈 군대는 다이르 알 아쿨 부근의 잡불, 앗 누마니야, 자르자라야까지 진출하는 등 이라크 중부에 이르렀다. 이에 사와드 지역 주민들이 바그다드로 피난하는 등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해 말엽 반군의 일망타진을 결심한 알 무와팍크는 아들 아불 압바스 아흐마드 (후의 알 무타디드)에게 1만 기병과 보병, 그들을 운송할 하매를 주어 출정시켰다. 아흐마드는 잔즈 선발대를 거짓 후퇴로 유인해 격파한 후 와시트에 주둔하였다. 금요 예배를 드린 후 재차 출정한 그는 남쪽의 알 우므르에 진영을 세우고 잔즈 세력권을 지속적으로 습격하였다.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세 방향으로 북상하며 압바스 군을 끌어내려 하였지만 아흐마드가 말려들지 않자 정공에 나섰다. 알 루사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잔즈 군은 패하였고, 아흐마드는 결과에 만족한 채 알 우므르 진영으로 돌아갔다. 이후 증원된 잔즈 군은 진영을 공격하며 적을 유인하려 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잔즈 군이 유인에 속아 격파당하였다. 아흐마드는 기세를 이어 함대를 이끌고 진군했으나, 그의 전함이 본대와 분리되어 공격을 받아 간신히 탈출하였다.
그는 운행 도중 무단 이탈한 승무원 세 명을 참수하고 전투 시에 선박을 버리는 자는 사형으로 다스릴 것이라 공표하였다. 그후 재차 진군한 아흐마드는 와시트 남쪽에서 잔즈 군을 격파하고 압다시를 회복, 억류되었던 여인들을 구하였다. 뒤이어 잔즈 거점 알 마니아로 진격한 그는 격전 끝에 반군을 매복지로 유인해 격파하였고, 알 마니아를 불사른 후 포로들을 구출해 알 우무르 진영으로 돌아와 주둔하였다. 880년 9월 알리 이븐 무함마드의 지시로 아바즈에 주둔하던 알리 이븐 아반이 이라크의 술레이만 이븐 자미 측으로 합류했다는 소식을 정한 알 무와팍크는 아흐마드를 지원하기 위해 이듬달 친히 출정하였다. 알 무와팍크와 합류한 아흐마드는 함께 남하하며 포로로 잡은 잔즈 병사들을 학살하였고, 재차 알 마니야로 진격하였다. 얼마 간의 전투 끝에 중과부적이라 여긴 잔즈 군은 도시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알 무와팍크는 이들을 추격하였고, 아흐마드는 도시의 성벽을 파괴하고 주민 대부분을 학살했으며 수천의 여인들을 구출하였다. 그후 알 무와팍크는 아흐마드에게 알 하와니트의 술레이만 이븐 자미를 공격하게 하였다.
비록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없었지만 아흐마드는 밤까지 격전을 벌였고, 전향한 이로부터 술레이만 이븐 자미가 타히싸의 알 만수라에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아흐마드는 이를 부친에게 알렸고, 알 무와팍크는 그곳으로 진격하였다. 보급품과 선박을 정비하고 병사들에게 수당을 지급한 그는 운하를 막기 위한 인부들과 물품들을 준비한 후 도로를 정비하며 진군하였다. (880년 11월 말) 비록 악천후로 지연되었지만 압바스 군은 알 만수라에 당도하였고, 격전 끝에 여러 장교들이 사로잡히는 피해를 입었다. 다만 잔즈 지휘관 술레이만 알 줍바이가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며칠 후 사망하였다. 압바스 군은 알 만수라에 총공세를 가하여 점령하였고, 잔즈 수비대는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소수의 병력과 도주하였고, 다수의 여인과 아이들 및 정부군 장교들이 석방되어 와시트로 호송되었다. 알 마니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라 알 무와팍크는 알 만수라에서 노획한 많은 식량과 돈, 가축을 팔아 병사들의 급료로 지급하였다. 17일간 알 만수라에 머물며 알 무와팍크는 그 성벽을 허물고 해자를 메우게 하였다.
또한 그는 잔즈 병사를 잡아오는 이에 대한 포상제를 확립했고, 항복한 반군은 좋은 처우와 사면을 베풀며 이탈을 유도하였다. 누사이르 아부 함자에게 술레이만 이븐 자미의 추격을 맡긴 알 무와팍크는 지라크 앗 투르키로 하여금 타히싸에 남아 잔즈 잔당을 소탕하게 하고는 와시트로 회군하였다. 아바즈 출정을 위해 군대를 정비하던 그는 타히싸가 평정되자 지라크에게 누사이르 아부 함자와 합류, 티그리스 강을 따라 내려가며 최종 목표인 알 무크타라 방면의 잔즈 병력을 소탕하게 하여다. 881년 초엽 알 무와팍크가 아바즈를 평정하는 동안[2] 누사이르 아부 함자와 지라크는 (반란의 발상지인) 우불라에 당도, 전자는 잔즈 군의 습격에 진영을 방어하러 귀환하고 후자는 잔즈 군을 매복해 격파하였다. 그후 지라크는 적의 수급들을 대동한 채 와시트로 돌아가 승전을 알렸다. 이 소식이 퍼지며 2천의 반군이 누사이르 아부 함자에게 귀순하였고, 토벌군에 편성되었다. 2월 중순 무렵 아바즈를 떠난 알 무와팍크는 19일 알 무크타라 인근에 당도, 제장들을 소환하였다. 이후 압바스 군은 알 무와팍크의 지휘 하에 도시를 포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