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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사이공시의 가라유키상의 모습. |
1. 개요
[ruby(唐行, ruby=からゆ)]きさん19세기 후반부터, 주로 메이지 정부 시절 일본 제국에서 취업사기나 인신매매로 팔려서 주로 동아시아‧동남아시아‧만주‧러시아(시베리아)‧영국령 인도‧미국‧호주 등의 유곽에서 일하게 된 일본인 매춘부(유녀 혹은 오이란) 여성들을 일컫는 말.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동북아와 동남아, 그리고 인도 등 아시아 전역에 걸쳐 '황색 노예 매매'로 알려진 일본인 매춘부들의 네트워크가 있었다.[1]
2. 상세
규슈의 나가사키 및 구마모토 지역의 하층계급 출신이 많았으며 뚜쟁이격인 제겐(女衒)이라는 중개 알선업자의 손을 거쳤다. 가라유키상이란 단어의 唐[2]은 외국이나 외국의 것을 뜻하며 문자적 의미는 "해외로 나간 사람들"이다.대부분 빈민 출신인 가라유키상은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모집되었다. 보통 제겐 또는 핀푸(일본어로는 [ruby(嬪夫, ruby=ピンプ)]라고 불렀음)[3]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알선업자들이 일본 전역(농촌이나 어촌 등)을 돌아다니면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소녀들[4]에게 일자리 알선을 미끼로 외국행을 제안했다. 그렇게 젊은 여성들을 물색하여 해외에서 일하게 해 주겠다고 부추겨서 표적이 된 여성들이 제안에 동의하면 급여 선지급 등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부모에게 제공했다. 그렇게 되면 부모는 딸을 브로커 등의 처분대로 맡기겠다고 약속하는 증서에 서명하게 된다. 이렇게 부모에게 돈을 건넨 후 다시 이들을 포주에게 넘기면서 알선업자들은 차익을 챙기게 된다.[5]
이후 표적이 된 여성들이 외국에 도착하는 순간 감언이설에 속은 사실을 깨닫지만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이미 때가 늦은 상황이므로 부모가 받은 선금은 물론, 브로커 수수료, 교통비 등을 전부 빚으로 떠안은 상태라 성매매를 거부할 수 없게 된다. 사실상 돈 올가미에 걸려 성노예가 되는 것이다. 이탓에 이런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사례도 적잖았다고 한다. 이처럼 가라유키상의 모집과 집단송출은 명백한 불법행위인데도 일본 경찰은 이를 묵인했는데, 이는 가라유키상들이 서양 열강들을 따라잡는 데 필요한 외화를 벌어주는 애국자라는 인식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메이지 정부, 원정 성매매 일본여성 50만명 관리했다
참고로 가라유키상들의 주된 목적지는 중국, 필리핀, 보르네오 섬, 태국, 인도네시아 등이었다. 중국을 제외하면 주로 유럽 속국이었던 동남아시아 국가들로서 유럽이나 미국 군대 주둔에 따라 수요가 많았던 곳에 파견되었다. 더 멀리는 만주, 하와이, 북아메리카(캘리포니아), 아프리카(탄자니아 잔지바르)까지 퍼져나간 경우도 있었다.
이런 가라유키상들의 해외 진출에 대해 당시 일본 정부와 여론은 막대한 외화를 벌어다주는 일꾼으로서 낭자군(娘子軍)이라는 이름으로 선전하였다. 서구 열강에 막 나라의 문을 열었을 때 일본은 해외에 수출을 할 상품이 제대로 없었다보니 가라유키상을 해외로 보내고 그녀들이 매춘으로 버는 수익을 정부 재정에 쓰려고 했기 때문에 가라유키상을 무려 애국자라고 치켜세웠다. 심지어 근대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인 후쿠자와 유키치도 "매춘부의 해외 수출은 적극 장려해야 하며, 막아서는 안 된다."고 말할 만큼 가라유키상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가라유키상이 가장 많았던 1910년 무렵 일본 전체 수출 금액의 10%가 가라유키상들이 해외로 나가 매춘을 해서 벌어들여 일본 본국에 송금하는 돈이었다는 말도 있다. 링크1, 링크2, 링크3, 링크4, 링크5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해외로 나간 가라유키상들의 수는 대략 30만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일설에 의하면 이렇게 가라유키상들이 매춘을 통해 벌어오는 수익으로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를 전비를 마련했다고도 한다. 이들은 해외에서 정보수집 등의 활동도 함께 수행하였다.[6]
동시베리아 아무르강 하류 니콜라예프스크(니항)에 있던 일본군을 위한 가라유키상 위안소 주변 일본인 거주지
당시 일본 정부와 여론이 가라유키상들을 애국자라고 칭송한 이유는 단순하게도 부국강병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유럽 열강들로부터 군함이나 대포 등을 구입할 필요가 있었는데 두드러진 수출품들이 없었지만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반드시 외화가 필요한 상황이라 가라유키상들이 몸을 팔아 송금해 오는 금전은 메이지 정부에게는 귀중한 외화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이긴 그늘의 공로자는 바로 가라유키상이었다. 가라유키상들은 주로 시마바라 지방이나 아마쿠사 지방 출신자가 많았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그녀들을 시마바라족, 아마쿠사녀, 여군부대라고 불렀다. 하지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이겨 국제적으로 일본의 평가가 올라 일등국을 자인하게 되자, 일본 정부는 가라유키상을 매춘부, 천업부, 밀항부 등으로 부르면서 "일등국인 일본의 수치"로서 업신여겼다. #
당연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가라유키상의 전성기는 메이지시대 말기로, 이들은 여론에서 외화 획득의 첨병으로서 낭자군(娘子軍)이라고 미화되어 불릴 정도로 활약하였다. 가라유키상들이 외화를 획득하는 방식은 일차적으로 현지의 일본인 선원 등을 상대함으로서 외화(은화)유출을 방지하는 역할이었다. 항구에 내린 선원들이 술과 여자로 기분을 푸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게 외국 여자를 상대로 하면 그 돈은 그대로 해외로 흘러나가 사라져 버리므로, 기왕이면 해외에서도 일본 여자를 상대하게 함으로써 은의 유출을 최대한 방지하자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간 김에 외국인 상대로도 영업해서 부수입도 함께 버는 식이었다. 가령 백인에게는 금화로, 일본인에게는 은화로 요금을 받는 식이었다. 이렇게 벌어오는 외화가 1910년 경 일본 전체 수출금액의 10%에 달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가라유키상 이야기 구체적으로는 1920년 성매매 금지 이전까지 가라유키상은 약 50만 명이 1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메이지 정부, 원정 성매매 일본 여성 50만명 관리했다
2.1. 일제시대 조선인 여성들도 인신매매
동아일보 1924. 09. 02.자 2면을 보면 북화태(북 사할린섬)로 남용석 등의 인신매매 상인에 의해 최근 팔려간 여성이 4명이고, 북화태로 팔려간 조선인 여성만 이미 30여명으로 일본인 가라유키상 상인, 조선인 인신매매상에 의해 조선인 여자가 악마의 밥이 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조선인 여성들이 팔려간 북화태 아항은 오늘날의 사할린 섬 북부의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이며, 일본군이 1918~1925년 시베리아 침략 무렵 무력으로 점령하였고, 석탄생산지와 어업항으로 현재까지 유명하다.일제시대 사할린섬 북부의 오하는 지표면에서 석유를 생산할 수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3. 가라유키상들의 쇠퇴
이렇게 가라유키상들의 활동은 메이지 시대 말기에 그 절정을 이루었으나, 일본 사회가 성장하고 가라유키상 여성들에 대한 관점도 "국가의 수치"로 바뀌어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1920년 매춘금지령과 더불어 해외에 있는 일본인 사창가들도 없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가라유키상은 대부분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돌아와도 일본의 사회적 멸시 분위기 탓에 자살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가령 1905년부터 중국 상하이와 싱가포르, 인도 뭄바이 등에서 일한 '시마키 요시'라는 여성은 귀국 후 주변의 냉대 탓에 결국 목숨을 끊었을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생계가 막막하거나 본국과의 연고가 없는 사람들은 그냥 현지에 남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1941년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공격했을 때 영국군을 상대로 정보를 빼내서 일본군을 도운 가라유키상들도 있었다. 이렇게 워낙 많은 가라유키상들이 해외에서 활발히 활동한 덕분인지 당대에 동양 전체가 일본인 매춘부들로 가득 차 있었다는 기록마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7]더불어 당대 일본인들은 비서구인을 열등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가라유키상으로 활동하던 일본 여성들은 자신들이 중국인 남성이나 동남아 토착민에게 성접대를 한다는 사실에 굴욕감을 느꼈다고 한다.[8] 실제로 보르네오 원주민, 말레이시아인, 중국인, 일본인, 프랑스인, 미국인, 영국인 및 모든 인종의 남성들이 가라유키상들을 이용했다.[9] 하지만 '오사키'라는 일본 여성은 "가라유키상들은 일본인, 중국인, 백인, 원주민 같은 모든 인종의 남성들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취급했었다"고 말했으며 가라유키상들의 "가장 역겨운 고객"은 일본인 남성이었고 중국인 남성을 묘사할 때는 "충분히 친절하다"고 평가했으며 영국인과 미국인이 2번째로 좋은 고객이었고 원주민 남성은 섹스를 가장 빠르고 가장 잘했다고 평가하였다.[10]
패전 후 가라유키상은 전쟁 전 일본의 치부로서 그 실상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가라유키상 생활을 하다가 일본으로 돌아온 여자들은 주위 사람들한테 매춘부라고 욕을 먹거나 따돌림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72년 야마자키 도모코(Yamazaki Tomoko)가 <산다칸 하치만 사창가>라는 책을 내면서 일본 사회에 알려졌다. 이 책은 쿠마이 케이 감독이 <산다칸 8번 창관 망향>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했으며, 다나카 기누요가 이 영화로 베를린 국제 영화제/은곰상 :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 가라유키상에 대한 여러 연구서적이나 르포 등이 이어졌다.
4. 처우
다이쇼 시대 말기부터 쇼와 시대 전기까지 가라유키상으로 활동했었던 '기타가와 사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보르네오 섬에서는 손님을 받았을 때 받는 돈은 포주와 가라유키상 여성이 수입의 50%를 반반씩 나누어서 차지하고 여기서 다시 자기(가라유키상) 몫의 50% 중 선불금으로 받은 빚 변제가 25%, 나머지 25%의 돈을 의복과 생활용품, 식비 등의 잡비로 썼다고 한다. 그래서 추가로 빚을 지지 않기 위해서는 1달에 최소한 20명 이상의 손님들을 받아야만 했다고 한다.[11] 만일 1달에 100엔쯤을 모으고 싶으면 120명은 받아야 했다고 한다. 심지어 필리핀에서는 가라유키상들이 주 1회의 임질 검사와 월 1회의 매독 검사를 받아야만 했는데 그 비용은 전부 가라유키상 본인들이 자비로 부담해야만 하였다. 그것도 실금액의 2배로 말이다. 가라유키상 이야기항구에 배가 들어오는 경우에는 업소에 손님이 넘쳐 하룻밤에 무려 30명의 손님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롱타임(숙박)은 10엔, 숏타임(일만 치르고 가는 것)은 2엔에 주어지는 시간은 길어야 5분이었으며 제한시간을 넘기면 할증요금이 추가로 붙는 그런 구조였다고 한다. 심지어 휴일도 사실상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쉬고 싶어도 마음대로 못 쉬었다고 한다. 다만 막상 돈이 별로 없는 현지인은 그리 선호하지 않아 접객거부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가라유키상들이 상대하는 손님들은 대개 부유한 서양인이나 해외로 나온 일본인들이었다고 한다.
가라유키상들이 살았던 해외 각지에는 지금도 그녀들이 묻힌 무덤과 묘비가 남아있는데, 그나마 이런 경우는 말년이 그나마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말라리아를 비롯한 풍토병이나 성병, 폐병 등에 걸려 더 이상 매춘을 못 하게 되자 바다나 정글에 버려진 채로 무덤도 없이 죽어간 가라유키상들이 많았다고 한다. 사실 그런 비참한 최후는 가라유키상들만 그랬던 게 아니고, 에도 막부 시절 일본에서 유명했던 요시와라 유곽에서 일했던 유녀(매춘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성병에 걸려서 더 이상 일을 못 하게 되면 쫓겨나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고, 그 시체들을 대충 멍석에 말아 강가나 절 근처에 버리거나 매장하는 식으로 방치했다.
5. 여담
가라유키상을 다룬 이마무라 쇼헤이의 동명의 다큐멘터리 영화도 있다. 다행히 유튜브에 전편이 올라왔고 한글 자막도 달려 있다.#오늘날 반대로 일본에서 성매매와 연관된 유흥업에 종사하는 외국인 여성들은 쟈파유키상(ジャパゆきさん)이라고 하는데 다른 동아시아, 중남미, 동유럽 출신들이 대다수다.
가라유키상 이전의 일본에서도 일본인 여성을 해외에 노예로 팔아넘기는 경우가 있었는데, 16세기 일본 전국시대에서 약 50만 명의 일본인들이 서양 상인들한테 화약통 1개당 여자 10명이라는 식으로 동남아나 인도 등지로 팔려나갔다는 말도 있다.화약값 대신 팔려나간 일본인 노예들[12][13]
이와 별개로 가라유키상은 아니지만 1972년 8월 1일 태국의 출입국 당국은 일본인 여성들이 관광객으로 가장하여 입국한 뒤에 마사지로 막벌이를 하고 있다고 비난한 적이 있었다.[14]
6. 번외편(특수위안시설협회)
이 가라유키상과는 차이가 있지만 태평양 전쟁 패전 직후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탄생한 조직이 일본에 존재하였다. 바로 미군 전용 위안부들이라고 할 수 있는 특수위안시설협회 소속의 일본인 위안부, 즉 '빵빵걸'들이 그것이다. 본래의 창설 목적은 일본에 주둔하게 될 미군들이 성범죄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원래의 목적은 사라지고 외화벌이가 주된 목적이 되었다고 한다.참고로 이 '빵빵걸'들은 전후 일본의 외화벌이에 큰 도움이 되었었는데 일본의 1952년 획득 외화 중 무려 1.5억 달러가 이들 빵빵걸들의 주일미군 상대 매춘으로 인한 '외화벌이'였던 걸로 추정될 만큼 이 '빵빵걸'들로 인한 외화벌이는 당시 일본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즉, 당초 일본에 주둔한 연합군 소속 점령군 장병들의 성범죄를 막기 위한 일명 「육체의 방파제」란 처음의 목적과는 다르게 시간이 흐를수록 '국가의 외화벌이'로 그 설립 목적이 완전히 변질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이러한 모습은 외화벌이를 위해 해외로 나갔던 가라유키상들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출처
7. 관련 문서
[1] Fischer-Tiné 2003, pp. 163–90.[2] 옛날에는 일본에서 당나라가 곧 외국을 의미했다.[3] 영어 Pimp가 어원이라는 설이 있다.[4] 주로 14~16세인 소녀들이 이렇게 해서 선박에 몸을 실었다[5] 이렇게 얻은 수수료 차익을 모아 직접 해외에서 사창가 경영에 뛰어든 자도 있었다. 참고로 이렇게 인신매매당한 여성들은 빚을 갚을 때까지 매춘으로 일해야 했다고 한다.[6] Jamie Bisher (2006). White Terror: Cossack Warlords of the Trans-Siberian. Routledge. p. 59. ISBN 978-1135765958. Retrieved May 17, 2014.[7] Harry La Tourette Foster (1923). A beachcomber in the Orient. Dodd, Mead and company. p. 235.[8] Yamazaki & Colligan-Taylor 2015, p. 8.[9] Yamazaki & Colligan-Taylor 2015 , p. 63.[10] Yamazaki & Colligan-Taylor 2015, p. 67.[11] 즉, 1달 동안 손님을 20명 이상 받지 못하면 채무 상환과 생필품 구매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뜻이다.[12] 다만 해당 블로그에서 인용한 영문 캡처본에선 이와 같은 주장은 명백한 결함(obvious flaws)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13] 영어 위키백과에선 공신력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삭제되었다. #[14] 「"태국에서 무허가 안마"」 「아사히 신문」 1972년 8월 2일 조간, 13판, 18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