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3-21 15:27:24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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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오대십국시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Tang_dynasty_%28Chinese_characters%29.svg.png
존속 기간618년 ~ 907년 (289년)
공식 명칭대당국, 당조
위치중국
수도618년 – 684년, 705년 – 904년
장안(長安)
684년  – 705년, 904년 – 907년
낙양(洛陽)
인구수7세기 5천만명
9세기 8천만명
정치 체제전제군주제
국가 원수황제
주요 황제초대 당고조 (618년 - 626년)
2대 당태종 (626년 - 649년)
3대 당고종 (649년 - 683년)
6대 당현종 (712년 - 756년)
9대 당덕종 (779년 - 805년)
11대 당헌종 (805년 - 820년)
16대 당선종 (846년 - 859년)
20대 당애종 (904년 - 907년)
언어중세 중국어
종족한족, 선비족, 돌궐족 등
종교불교, 도교, 유교  등
주요 사건618년 건국
626년 현무문의 변
644년 – 668년 고구려-당 전쟁
670년 – 676년 나당전쟁
690년 – 705년 측천무후의 집권
755년 – 763년 안사의 난 발발
780년 양세법 시행
805년 영정혁신
808년 – 846년 우이당쟁
835년 감로의 변
875년 – 884년 황소의 난 발발
907년 멸망
성립 이전수나라
멸망 이후오대십국시대
파일:Tang_Dynasty_circa_700_CE.png
8세기 당나라의 강역

1. 소개2. 출신?3. 역사
3.1. 초당(初唐)3.2. 성당(盛唐)3.3. 중당(中唐)3.4. 만당(晩唐)3.5. 후계국가
4. 행정 구역5. 평가6. 역대 황제7. 계보8. 추존 황제9. 임시(비정통) 황제10. 관련인물, 항목11. 여담

1. 소개

수나라(隋)에 이은 중국의 통일 왕조로 618년에 수의 당국공이자 선비족 혼혈인 이연[1]이 건국해 907년 애제 때 후량주전충에게 멸망하기까지 289년간 20대의 황제가 다스렸던 국가였다. 수도는 장안이었으며 고, 중세 중국 제 2의 도시인 낙양이 부수도로 기능하였다. 장안은 인구가 100만이라 칭할 정도로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2]

전한에 이어 전통 중국 문물을 발전시킨 왕조이자 동시에 대외 활동을 활발하게 추진해 '세계제국'이라고 불릴 정도의 국제적인 요소가 가장 짙었던 왕조로 평가받는다.[3] 대외 원정도 활발해서 서쪽으로는 고창국(지금의 키르기스스탄 지역에 있었던 국가) 등 실크로드 주변 국가를 멸망시키거나 서역 땅을 통치하려고 관리와 군대를 보내 애를 쓰기도 했고, 북쪽으로는 돌궐(괵튀르크. 동돌궐서돌궐)과 회흘(위구르), 토번(티베트), 남방의 베트남과도 전쟁 혹은 교류를 하였다.

한국사에서는 백제의 맹공과 고구려의 협조(내지 방조)로 인해 위기에 빠졌던 신라 세력을 지원, 반전시켜 삼국통일을 수행하게 한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4] 또한 일본이 백제 멸망 이후 견당사를 보내 중국 문물을 수입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670년대부터는 초반의 성장세가 꺾이고 신라, 토번, 돌궐 제2제국, 발해 등에게 연달아 패하거나 휘둘렸으며 지배 체제의 모순과 문제점, 지배층들의 이해 관계의 상충으로 인하여 안록산의 난 이후 이민족들과 중국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당나라 정부 자체의 동요는 물론 사회 및 경제적으로도 불안이 가중되어 쇠퇴의 길을 밟았다.

2. 출신?

중국 한족에 의해 편찬된 기록이나 한국의 사료[5]를 보면 모두 당을 기마민족 정권보다는 한족(또는 한족화된 선비족) 정권으로 여기고 있었다. 당 왕조 멸망 후에 한족들의 인식으로는 당나라 당시 이미 선비족은 호한융합이 되어 사라져버렸으며 당 왕실은 스스로 한족임을 자칭하고 당이 한족 포용 정책을 펼쳤다는 점을 들어 한족의 국가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게 지금까지도 이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당 황실의 혈통에 대해서는 선비화된 한족설, 한족화된 선비족설, 호한 혼혈설 등이 있다.[6] 중국의 진인각이나 장경, 요미원 등의 학자는 한족화된 선비족이라는 이 학설을 제기하고 있다. 이미 선비족 왕조는 북위 효문제 이래 적극적인 한화 정책을 펼쳤으나 북주 때는 오히려 선비화 정책에 힘을 실었고, 한족과의 동화에 맞서 선비족의 순수성을 지키자는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당대 초기까지 황실에까지 북방 유목민족 풍습의 잔재가 남아 있었을 정도.[7]

당 왕조 수립의 주체는 북주 시대 6진을 중심으로 형성된 군벌인 8주국 관롱집단이라 불리는 세력으로, 이들은 선비족 왕조인 북주에서 무장으로 활동하며 집안끼리의 통혼을 통해 연척으로 맺어져 있었다.[8] 북주의 우문씨와 수의 양씨, 당의 이씨 모두 당시 실세인 무천진 군벌, 소위 관롱집단(關隴集團)이라 불렸던 세력에서 나왔다. 실제로 수문제(양견) 역시 북주 때만 해도 보육여견(普六茹堅)[9]이라는 선비족 성명을 갖고 있기도 했고(수 왕조 개창 전후에 개명) 당고조(이연)의 어머니도 관롱집단의 일원인 독고씨에서 나왔다. 즉 수나 당 모두 선비족 왕조인 북주의 왕실과 같은 혈통에서 나왔다.

물론 한족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10] 애초에 측천무후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계기도 씨족지라고 해서 오랜 과거부터 존재하며 다른 한족들을 차별하던 문벌귀족들의 족보를 모아 제거하여 다수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살아남은 가문은 명나라까지도 살아남는다.

3. 역사

618년 당고조 이연, 수 공제에게 선양받아 당나라를 건국
626년 현무문의 변
630년 당나라, 설연타와 연합해 동돌궐을 정복
644년 고구려를 침공, 고구려-당 전쟁 발발
645년 주필산 전투에서 고연수의 고구려군을 격파
645년 안시성 전투에서 패배
647년 울독군산 북쪽에서 설연타를 격파
651년 노실필과 당이 연합하자 을비돌육가한은 토화라로 도주
658년 소정방이 서돌궐을 정복하고 안서도호부를 쿠차로 이전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의 5천 결사대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와해, 백제 멸망
663년 나당 연합군이 백강 전투에서 백제 잔당군과 왜군을 크게 격파
668년 계필하력과 이세적이 평양성을 총공격, 고구려 멸망
670년 가르친링이 대비천 전투에서 당군을 궤멸시키고 안서 사진을 점령
670년 나당전쟁 발발
675년 신라군이 매소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실상 한반도 점유에 실패
680년 왕방익이 이려하에서 반군을 섬멸시키고 열해에서 10만여 명을 격파
683년 고종이 사망하자 중종 이현이 즉위
684년 중종이 폐위되고 예종 이단이 즉위
690년 예종이 폐위되고 측천무후가 즉위. 국호를 주, 수도를 낙양으로 천도
697년 대조영걸사비우를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유민 및 말갈족 일파가 당나라 영주에서 탈출, 천문령 전투에서 이들을 추격하던 당군을 격파
698년 대조영, 동모산 일대에서 발해를 건국
705년 측천무후가 사망하고 중종이 복위되어 당나라 부활
710년 위황후안락공주 모녀가 중종을 독살시키고 상제 이중무를 옹립
710년 임치왕 이륭기와 태평 공주가 난을 일으켜 위 황후 일파를 제거시키고 예종을 복위
712년 이륭기, 예종에게 선위를 받아 현종으로 즉위
722년 소발률이 내전으로 당에 복속
727년 토번의 명장 실뤄라를 이간계로 제거
732년 발해의 장수 장문휴가 당의 등주 기습
741년 고선지가 달해부를 평정
747년 고선지의 1만 군대가 서역 원정 개시, 연운보에서 토번군을 격파하고 소발률을 점령
750년 고선지가 2차 서역 원정 개시, 사마르칸트와 석국을 점령
751년 고선지의 당군이 아바스 왕조와 탈라스에서 접전, 돌기시의 반란으로 탈라스 전투 패배
755년 ~ 763년 안사의 난 → 이형 숙종으로 영무에서 즉위
762년 숙종이 사망하고 이예가 대종으로 즉위
763년 복고회은의 난
763년 토번의 장안 함락
779년 대종이 사망하고 덕종 이괄이 즉위
780년 양염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용조제를 폐지하고 양세법을 시행
781년 토번이 이때부터 농우 지방에 진출하기 시작
782년 제나라가 당의 변주를 공략하고 당으로부터 독립 선언
782년 토번과 당이 청수 동맹을 결의
783년 주비의 난으로 장안이 함락
787년 당의 명재상 이필의 노력으로 당과 위구르 제국의 관계가 개선
789년 토번의 명장 줘치수가 당의 북정도호부에 진출하여 북정 도호부가 폐지됨 → 서역 전역 상실
793년 남조가 당에 사신을 파견해 속국이 되기를 맹세
794년 당과 남조와 연합해 토번을 침략
805년 덕종이 사망하고 순종이 즉위하나 환관들의 퇴위 강요로 아들 헌종에게 양위
815년 제나라가 하음전운원의 200만 석을 불태우고 낙양을 습격
816년 오원제의 난
819년 이사도가 유오에게 암살되고 운주가 신라-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 제나라 멸망
820년 헌종이 환관 진홍지에게 살해당하고 목종 이유가 즉위
824년 목종이 사망하고 이담이 경종으로 즉위
826년 경종이 환관들의 권력 쟁탈전으로 살해되고 환관 왕수징에 의해 문종 이앙이 즉위
829년 남조가 당의 검남을 공격하고 성도성을 점령
835년 당의 재상 이훈과 문종이 환관들을 말살시켜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이훈은 피살당함(감로의 변)
840년 문종이 환관들에게 시해당하고 이찬이 무종으로 즉위
847년 무종이 사망하고 선종 이침이 즉위
848년 토번과 당이 주전파의 토번군을 협공하여 패배시킴
848년 장의조가 군사를 일으켜 농우 일대의 토번 세력을 침략함
859년 강남에서 구보의 난이 일어남
859년 선종이 사망하고 의종 이최가 즉위
863년 안남도호부를 재건
868년 방훈의 난
873년 남조를 침략해 성도성을 탈환
875년 ~ 884년 황소의 난
888년 희종이 사망하고 소종 이엽이 즉위
900년 황태자 이유가 대신의 반란으로 즉위
901년 이유가 폐위되고 소종이 다시 복위
904년 소종이 주전충에게 살해되고 이축이 애종으로 즉위
907년 주전충이 애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후량을 건국

3.1. 초당(初唐)

당국공 이연의 둘째아들인 이세민은 아버지[11]에게 수 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 것을 진언하고[12], 여러 곳에서 높은 전공을 세우며 건국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에 이연은 이세민을 천책상장(天策上將)에 봉하는 등 크게 신임하였다 이에 불안해진 장남이자 황태자 이건성삼남 이원길이 이세민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등으로 세민은 위기를 맞고, 심지어 형제들간의 모임에서 이 든 을 마시고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이에 이세민은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궁궐 안에서 형 이건성과 이원길을 살해하고(현무문의 변), 직접 황태자에 봉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연은 스스로 이세민에게 제위를 물려주게 된다. 일각에선 당태종이 자신이 먼저 쿠데타를 일으키고는 이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변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마치 조선 태종 이방원이 정도전이 자신을 치려고 했다며 무인정사를 일으킨 것처럼

태종 이세민은 국가의 제도를 총체적으로 정비하여 정관의 치라는 태평성대를 이루어냈다. 외부로의 확장도 활발해서 서돌궐 등 수나라 때부터 눈엣가시였던 새외세력을 연달아 격파하지만 다만 고구려를 침공해(고구려-당 전쟁) 안시성주 등의 활약으로 실패한 점이 오점으로 남았다. 뒤를 이은 고종은 황후 측천무후의 진언에 따라 신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침공하여 승리한다. 내친김에 신라까지 정복하려 하였으나(나당전쟁) 예상치 못한 신라의 완강한 저항과 토번 전선의 악화가 겹쳐 실패하고 만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토번 전선과 한반도 전선에 둘 다 발을 담그고 있었고, 토번 전선에서 무너지게 되자 신라까지 포기하게 된 것이다. 이후 무후의 궁궐에서의 힘이 점점 커지고, 고종이 늙어 힘이 약해지면서 무후는 사실상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후 무후는 몇 명의 황태자를 죽이거나 몇 명의 황제를 폐위시키거나 한 뒤 국호를 주나라(周)라 칭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른다. 전례없는 중국 최초의 여황제 탄생으로 당(唐)은 사라질 뻔 하였으나, 이에 반감을 가진 중신들이 그녀가 병든 말년에 정변을 일으켜 무후는 국권을 내놓고, 무후에 의해 폐위되었던 중종이 복위했다가 다시 제2의 여황제가 되고 싶었던 위황후와, 황태녀(…)를 생각하고 있던 위후의 딸 안락공주에 의해 독살되었다.

3.2. 성당(盛唐)

측천무후와 고종의 딸인 태평공주는 올케 위황후, 조카 안락공주와 대립했고, 예종(중종의 동생. 마찬가지로 무후에 의해 폐위되었음)의 아들인 이융기가 고모인 태평공주와 손을 잡고 아버지를 복위시켰다. 이후 정치적으로 큰 힘을 얻은 태평 공주와 황태자가 된 이융기가 대립하기 시작했고, 이융기가 황제로 즉위한 후 태평 공주가 숙청되면서 당나라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현종(이융기)의 시대는 국가의 재정비와 교류의 발달로 '개원의 치(712년 ~ 740년)'라는 태평성대를 열게 되었다. 서양 문화와의 교류가 가장 활발하게 이어진 시점으로, 실크로드 지역의 군사적 장악으로 멀리는 비잔티움 제국과 연결될 정도였다. 그러나 말년(741년 ~ 755년, 천보난치)에 하필이면 현종이 며느리(…) 양귀비에 푹 빠지게 된다. 양귀비에 의해 현종은 아예 정사에 손을 놓고, 정국은 재상 이임보 (뒤이어 양국충) 등 몇몇 지도층과 양귀비의 일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게다가 당시 지방의 치안을 담당한 절도사들의 세력이 커지고, 그 중 가장 힘이 강했던 안록산안사의 난을 일으키면서 궁궐이 함락당하고 양귀비가 그녀에게 반감을 품은 군병(軍兵)들의 강요에 의해 자살하는 사태를 겪었다.

3.3. 중당(中唐)

이후 당나라는 심하게 막장트리를 타게 된다. 바로 절도사의 난립 + 토번의 흥성 때문이다. 당나라는 건국 당시 균전제와 연계한 군사 제도인 부병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토지 지급량이 줄어들면서 과중한 군역에 못이겨 군역을 피해 도망치는 도호화가 진행되었고 이는 당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측천무후, 당 현종 시기부터 심각한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은 번진을 설치 했다. 이 때까지의 번진은 어디까지나 변경지역에 국한되었는데 안사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내지에도 번진을 설치하는 내지번진이 설치된 것이다. 이로서 당조는 수도 인근 지방 일부와 당을 지지하는 강남지방의 번진(순지 번진)을 제외하곤 잠재적인 적들에게 둘러 싸인 형국이 된다 절도사들의 군사력은 급속히 강해지고, 절도사들끼리 서로 결탁하여 중앙 정부로 조세를 보내지 않았다. 게다가 심지어 중앙 정부의 군사력은 규모와 훈련, 사기 모두에서 최악의 막장 군대가 되는 등 당나라는 총체적인 쇠퇴를 겪게 된다. 특히나 번진은 물론 당 황실에서도 부병제를 대신하여 용병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재정 부담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한때는 절도사들을 진압해서 지방 통치를 반짝 복구해 그럭저럭 120년을 버티지만, 외부적으로는 토번(티베트)과 회흘(위구르 제국)의 강성으로 당은 장안까지 위협받는 시기였다. 또 요동만주 지방은 거란발해의 세력권이었다. 또 이정기의 치청 번진 등은 사실상 반독립 왕국이었다.

이 때 활약한 황제가 두 사람 있는데 바로 (숙종, 대종 다음인) 덕종과 (순종 다음인) 헌종이다. 덕종은 양세법을 실히하여 재정을 충실히 했고 당조에 적대적인 하북 3진을 치러 나섰지만 전선이 지지부진했던 사이에 장안에서 주차-이회광의 난이 터지고, 그거 진압한 후에도 토번-회흘과 중앙아시아를 두고 계속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화해했다. 덕종의 노력은 헌종에게 이어진다. 특히 헌종 시기가 되면 친위 부대인 신책군이 설치되고 이를 이용해 적대적인 번진을 모두 진압한다. 이에 번진의 재정과 군사력을 회수하고 감시를 강화하는 등 큰 소득을 거두었다("원화중흥"). 그렇지만 헌종은 말년에 마약 금단에 빠지고 불교를 맹신하는 등의 행위를 하다 환관에게 독살당하고 만다. 다시 당조는 막장으로 흘러간다.

3.4. 만당(晩唐)

이후 당은 환관들이 좌지우지하는 나라로 서서히 몰락한다. 최후의 중흥 군주 당선종 때부터 시작된 연속된 반란 크리는 당희종 때 터진 황소의 난을 통해 당나라에게 그야말로 페이탈리티를 먹이고 말았다. 사실 당조가 적대적인 번진에 맞서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당에 충성하던 순지였던 강회(강남-회수) 지역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강남개발이 어느 정도 진전되었고 상업이 발달하자 강회 지역은 부유해졌다. 당조는 이 지역에 과중한 세금을 매기고 이를 이용해 신책군을 만들어 당조에 적대적인 번진에 맞섰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 지역은 당의 착취에 저항하게 되었다. 이미 구보의 난, 방훈의 난 등이 있었고 끝내 소금 밀매상 출신인 황소가 나옴에 따라 당은 확실하게 골로 가게 된다. 농민 반란군에 불과했던 황소군은 막장이었던 중앙군을 마구 격파하면서 유유히 장안에 입성하였고, 주민들의 지지까지 얻으며 다음 왕조를 예고하였으나, 전열을 가다듬은 관군에 포위되고, 심복이었던 주온이 배신하여 관군에 합류하면서 황소의 난은 진압되었다. 하지만 주전충은 자신의 이름을 파자해 인왕중심(人王中心)이라고 해석하는 등 이미 야심을 품고 있었고, 이미 당나라는 막장 크리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전충이 황소군을 자기 세력으로 흡수하는 등 세력을 키워 당나라를 멸망시키니, 전충(全忠)이란 이름이 무색해져 버렸다. 당의 애제를 끝으로 당은 289년만에 멸망한다.

3.5. 후계국가

오대십국시대에 오대의 하나인 후당과 십국의 하나인 남당은 당나라의 후계 국가를 자칭했으나 후당의 경우 왕조의 연결성은 불분명하다. 후당 황가는 애당초 사타족이었으니 아예 연결성이 없고 남당은 남오의 승상 서온의 양자였던 이변(남당)이 남오를 찬탈하여 세운 나라이다. 이변은 당 황족인 이각의 후손이라 자칭하긴 했다.

4. 행정 구역

파일:당 행정구역(도호부 포함).jpg

당나라의 행정 층위는 3단계이다. 도(道)-주(州)-현(縣).

원래 고대 중국의 행정구역춘추전국시대에 각 국은 자신의 영토에 군(郡)이 설치하였다. 그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36군(郡)을 설치하였다. 한(漢)대에 이르러서 전국을 9주(州)로 나누어 최상위 행정 구역으로 주(州)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원래 주(州)는 삼국지에 나오는 형주서주같이 광역 행정 구역이었다. 그러다 시대가 점점 흘러 진(晉)나라를 거쳐 5호16국시대에 이르러 주(州)는 광역 행정 구역에서 그 치소를 가리키는 지역명[13]으로 변화하였고, 주가 분할되어 그 수는 계속 늘어났다. 당(唐) 태종은 최상위 행정 구역으로 10도(道)를 설치하였고, 광역 행정 구역의 도(道)는 한국과 일본에도 도입되었다.[14]
명칭한자치소현재지명 비고
경기도京畿道장안(長安)섬서성 시안시현종 설치
도기도都畿道낙양(洛陽)허난성 뤄양시
관내도關內道장안(長安)섬서성 시안시
하동도河東道포주(蒲州)산서성 윈청시 융지시
하북도河北道위주(魏州)허베이성 한단시 웨이현
하남도河南道변주(汴洲)허난성 카이펑시
회남도淮南道양주(揚州)장쑤성 양저우시
농우도隴右道선주(鄯州)칭하이성 하이둥시 러두구
산남도山南道
산남동도山南東道양주(襄州)후베이성 샹양시현종 분할
산남서도山南西道량주(梁州)섬서성 한중시
검남도劍南道익주(益州)쓰촨성 청두시
강남도江南道
강남동도江南東道소주(蘇州)장쑤성 쑤저우시현종 분할
강남서도江南西道홍주(洪州)장시성 난창시
검중도黔中道검주(黔州)충칭시 펑수이 먀오족 투자족 자치현
영남도嶺南道광주(廣州)광둥성 광저우시

5. 평가

중국사에서 당은 한이 만들어 놓은 중국 문화의 토대 위에 주변국의 문화를 잘 흡수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완성, 동아시아 전체로 퍼뜨려서 고대 동아시아 세계를 완성한 중원왕조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봐도 상당히 중요한 국가 중 하나다. 우선 한국사에서는 잘 알다시피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시대를 종식시킨 바 있다. 또한 당의 서역 침략은 결과적으로는 탈라스 전투를 끝으로 패배하였지만 그 전에 서돌궐이나 고창국 등을 제압하면서 상당기간 영향력을 행사했고, 중앙아시아의 문화가 대륙으로 전파되었다.

한나라의 멸망 이후, 중국 대륙은 위진남북조시대라는 극도의 혼란기를 겪었는데, 이 혼란기는 근 370년이나 이어지는 꽤나 긴 시기였다. 흔히 한나라는 유럽의 고대 로마와 비교되곤 하는데, 로마 또한 고대 통일 제국을 완성하였으나 멸망 이후 다시는 통일 제국을 등장시키지 못한 반면, 중화 문명은 한나라의 멸망 이후 극도의 혼란기와 이후 등장한 수나라 역시 단명하는 등, 여러 차례 위기가 왔음에도 끝내 당나라라는 안정되고 장기적인 통일 왕조를 등장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다시 말해 당나라의 존재 의의는 중국 대륙의 재통일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그것을 성공하지 못한 유럽 및 서양사학계에서는 위진남북조시대와 함께 요주의 연구 대상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나라는 중원 바깥의 이민족이라도 인재는 적극적으로 등용했다는 점도 인상적인데, 당장 한국계로서 당나라에서 활동한 인물로도 이정기, 고선지, 흑치상지, 설계두, 장보고,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등등이 당나라에서 무인이나 관료로 활동한 유명인이다. 외국인 유학생도 허용하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는데, 837년 당나라 국학에서 공부하는 신라인 학생이 216명이나 되었고, 사비 유학생은 제외한 것이다. 국비 장학생은 당나라까지 왕복 교통편과 의복이나 식비 같은 체제비, 책값까지 지원해주었다. 외국인 관리를 뽑는 빈공과(훗날 제과로 이름 변경) 자체를 폐지시켜버린 훗날의 명나라 등과 비교하면 당나라는 매우 국제적인 사회였다.[15][16] 이러한 이유로 현대 중국인들에게 중국 역사상 가장 좋아하는 왕조 시기를 꼽으라 하면 대부분 당나라 시기를 꼽을 정도로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영광스러운 과거로 인식되고 있는 듯 하다. 당나라가 멸망한지 5백여년이 지난 명나라때에도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대명(大明)'이 아닌 '대당(大唐)'인이라고 소개하는 부분이 최부표해록에 나오며 해외의 차이나타운도 중국인들은 당인가(唐人街)라고 부를 정도로 당나라에 대한 인식은 좋은 편. 한(漢)이 민족적인 개념이라면 당(唐)은 문화적인 개념에서 중국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의 이미지는 서양에서도 굉장히 좋은 편이다.

이러한 당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통일신라발해, 일본[17], 베트남 등 동아시아 전체 문화 역시 당의 영향을 받아 재구축되며, 특히 율령제와 불교, 유교에 기초한 통일적인 세계 형성은 세계사에서 특히 주목받는 주제이다. 균전제 - 조용조 - 부병제 - 율령제 - 3성 6부제로 상징되는 당 중기까지의 국가 체제는 특히 중국 고대 국가관의 완성으로 평가받으며, 반대로 당 후기 이후 격변하게 된 국체 또한 고대를 넘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제도적인 변화로 주목받는다.

그리고 당삼채로 대표되는 도자기 등은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때 화려하면서도 이국적이고, 자유로운 풍조를 띄게 되었으며, 이러한 문물은 이슬람을 거쳐 유럽에도 일부 영향을 주게 된다. 특히 종이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문명으로 넘어가 전 세계로 퍼지게 된 중요한 사건은 빼놓을 수가 없다. 불교도교의 교단이 확립되어 다양한 종파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것도 당의 시대이며, 문학적으로도 이태백, 두보, 백거이, 한유, 이고 등의 문학적 업적이 후에 고문(古文)의 표본이 되었다. 반면 절도사환관 등의 문제에서 보이듯이 권력의 통제와 국가 통치의 구조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다지 좋지 못한 상황이 계속 펼쳐졌으며, 결국 이러한 문제에서 온 내전과 국력의 소모는 당의 멸망에 크게 일조했다.

여담으로 사람들이 과거 중국의 미녀들은 다 육덕 뚱뚱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당나라식 미인이며 애당초 풍만한 것과 뚱뚱한 것은 다르다! 과거에는 보통 동서양을 막론하고 풍만한 여성을 미인으로 여겼지만 중국은 옛날부터 마른 여성을 미인으로 쳤다. 예외적으로 당나라때는 중앙 아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아 풍만한 여자들이 인기였다.

덤으로 후한, 명나라과 함께 역대 최강의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환관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이름이 높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당헌종(현종이 아니다. 11대 황제인 헌종이다) 이후 황제들은 환관이 옹립했고, 환관이 시해 혹은 폐위한 황제들도 여럿 있을 정도.

관료제의 발달과 행정력의 정교함은 유명한데, 당시 행정력의 단편중 하나를 일례로 들자면 일본 승려 엔닌이 당을 여행하며 집필한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당나라에선 당으로 들어오는 외국인들을 모두 체계적으로 관리하였다. 각 도시마다 관료들이 엔닌 일행이 오고 가는 가는 것을 중앙에 보고 했고 엔닌 일행이 도착 전에 이미 도착지에선 엔닌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중앙 정부에서 각 지방의 입, 출입을 통제하에 놓고 있었다는건데 이것이 1200년 전의 행정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놀라울 따름.[18] 또한 지름길이지만 출입이 불가능한 지역이라 엔닌은 뇌물을 써서 통과하게 해달라고 고위 관료에게 청탁 했지만 당나라에선 관리가 뇌물을 받지 않는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기록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당시는 당이 리즈 시절이 아니라 행정력이 무너져 가던 당 말기 시절이란 것이다.[19]그냥 그 관리가 청렴했던게 아닐까?

6. 역대 황제

대수 묘호 이름 출생 사망 연호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 기간 능호
1대 고조(高祖) 이연(李淵) 566년 12월 21일 635년 6월 25일 무덕(武德, 618년 5월 ~ 626년) 618년 6월 18일 626년 9월 4일 8년 78일 헌릉(獻陵)
2대 태종(太宗) 이세민
(李世民)
598년 1월 28일 649년 7월 10일 정관(貞觀, 627년 ~ 649년) 626년 9월 4일 649년 7월 10일 22년 309일 소릉(昭陵)
3대 고종(高宗) 이치(李治) 628년 7월 21일 683년 12월 27일 영휘(永徽, 650년 ~ 655년)
현경(顯慶, 656년 ~ 661년 2월)
용삭(龍朔, 661년 3월 ~ 663년)
인덕(麟德, 664년 ~ 665년)
건봉(乾封, 666년 1월 ~ 668년 2월)
총장(總章, 668년 2월 ~ 670년 2월)
함형(咸亨, 670년 3월 ~ 674년 8월)
상원(上元, 674년 8월 ~ 676년 11월)
의봉(儀鳳, 676년 11월 ~ 679년 6월)
조로(調露, 679년 6월 ~ 680년 8월)
영륭(永隆, 680년 8월 ~ 681년 9월)
개요(開耀, 681년 9월 ~ 682년 2월)
영순(永淳, 682년 2월 ~ 683년)
홍도(弘道 683년 12월)
649년 7월 15일 683년 12월 27일 34년 165일 건릉(乾陵)
4대 중종(中宗) 이현(李顯) 656년 11월 26일 710년 7월 3일 사성(嗣聖, 684년 1월 ~ 684년 2월) 684년 1월 3일 684년 2월 26일 54일 정릉(定陵)
5대 예종(睿宗) 이단(李旦) 662년 6월 22일 716년 7월 13일 문명(文明, 684년 2월 ~ 684년 8월)
광택(光宅, 684년 9월 ~ 684년 12월)
수공(垂拱, 685년 ~ 688년)
영창(永昌, 689년 1월 ~ 689년 11월)
재초(載初, 689년11월 ~ 690년 8월)
684년 2월 27일 690년 10월 8일 6년 223일 교릉(橋陵)
당(唐) → 무주(武周)
1대 무측천(武則天) 무조(武曌) 624년 2월 17일 705년 12월 16일 천수(天授, 690년 9월 ~ 692년 3월)
여의(如意, 692년
4월 ~ 692년 9월)
장수(長壽, 692년 9월 ~ 694년5월)
연재(延載, 694년 5월 ~ 694년12월)
증성(證聖, 695년 1월 ~ 695년 9월)
천책만세(天冊萬歲, 695년 9월 ~ 695년 11월)
만세등봉(萬歲登封, 695년 12월 ~ 696년 3월)
만세통천(萬歲通天, 696년 3월 ~ 697년 9월)
신공(神功, 697년 9월 ~ 697년 12월)
성력(聖曆, 698년 ~ 700년 5월)
구시(久視, 700년 5월 ~ 701년 1월)
대족(大足, 701년 1월 ~ 701년
10월)
장안(長安, 701년 10월 ~ 704년)
신룡(神龍, 705년~ 707년 9월)
690년 10월 18일 705년 2월 22일 14년 129일 건릉(乾陵)
무주(武周) → 당(唐)
복위 중종(中宗) 이현(李顯) 656년 11월 26일 710년 7월 3일 경룡(景龍, 707년 9월 ~ 710년 6월) 705년 2월 23일 710년 7월
3일
5년 130일 정릉(定陵)
임시 - 이중무(李重茂) 695년 714년 당륭(唐隆) 710년 710년 710년 -
복위 예종(睿宗) 이단(李旦) 662년 6월 22일 716년 7월 13일 경운(景雲, 710년 7월 ~ 712년 1월)
태극(太極, 712년 1월 ~ 712년 4월)
연화(延和, 712년 5월 ~ 712년 8월)
710년 7월 25일 712년 9월 8일 2년 45일 교릉(橋陵)
6대 현종(玄宗) 이융기
(李隆基)
685년 9월 8일 762년 5월 3일 선천(先天, 712년 8월 ~ 713년 11월)
개원(開元, 713년 12월 ~ 741년)
천보(天寶, 742년 ~ 756년 7월)
712년 9월 8일 756년 8월 12일 43년 340일 태릉(泰陵)
7대 숙종(肅宗) 이형(李亨) 711년 10월 19일 762년 5월 16일 지덕(至德, 756년 7월 ~ 758년 2월)
건원(乾元, 758년 2월 ~ 760년 윤4월)
상원(上元, 760년 윤4월 ~ 761년 9월)
보응(寶應, 762년 4월 ~ 763년 6월)
756년 8월 12일 762년 5월 16일 5년 278일 건릉(建陵)
8대 대종(代宗) 이예(李豫) 726년 11월 11일 779년 6월 10일 광덕(廣德, 763년 7월 ~ 764년)
영태(永泰, 765년 ~ 766년 11월)
대력(大曆, 766년 11월 ~ 779년)
762년 5월 18일 779년 5월 23일 17년 5일 원릉(元陵)
임시 - 이승굉(李承宏) ? ? 대룡(大龍) 763년 763년 -
9대 덕종(德宗) 이괄(李适) 742년 5월 27일 805년 2월 25일 건중(建中, 780년 ~ 783년)
흥원(興元, 784년)
정원(貞元, 785년 ~ 805년 5월)
779년 6월 12일 805년 2월 25일 25년 265일 숭릉(崇陵)
10대 순종(順宗) 이송(李誦) 761년 2월 21일 806년 2월 11일 영정(永貞, 805년 5월 ~ 805년 12월) 805년 2월 28일 805년 8월 5일 184일 풍릉(豊陵)
11대 헌종(憲宗) 이순(李純) 778년 3월 17일 820년 2월 14일 원화(元和, 806년 ~ 820년) 805년 8월 9일 820년 2월 14일 14년 165일 경릉(景陵)
12대 목종(穆宗) 이항(李恒) 795년 7월 26일 824년 2월 25일 장경(長慶, 821년 ~ 824년) 820년 2월 20일 824년 2월 25일 4년 5일 광릉(光陵)
13대 경종(敬宗) 이심(李湛) 809년 7월 22일 827년 1월 2일 보력(寶曆, 825년 ~ 827월 2월) 824년 2월 29일 827년 1월 2일 2년 308일 장릉(莊陵)
임시 - 이오(李悟) ? 827년 - 826년 826년 -
14대 문종(文宗) 이앙(李昂) 809년 11월 20일 840년 2월 10일 대화(大和, 827년 2월 ~ 835년)
개성(開成, 836년 ~ 840년)
827년 1월 13일 840년 2월 10일 13년 28일 장릉(章陵)
15대 무종(武宗) 이염(李瀍) 814년 7월 1일 846년 4월 22일 회창(會昌, 841년 ~ 846년) 840년 2월 20일 846년 4월 22일 6년 63일 단릉(端陵)
16대 선종(宣宗) 이침(李忱) 810년 7월 27일 859년 9월 10일 대중(大中, 847년 ~ 860년 10월) 846년 4월 24일 859년 9월 10일 13년 142일 정릉(貞陵)
17대 의종(懿宗) 이최(李漼) 833년 12월 28일 873년 8월 15일 함통(咸通, 860년 11월 ~ 874년 11월) 859년 9월 13일 873년8월 15일 13년 340일 간릉(簡陵)
18대 희종(僖宗) 이현(李儇) 862년 6월 8일 888년 4월 20일 건부(乾符, 874년 11월 ~ 879년)
광명(廣明, 880년 ~ 881년 7월)
중화(中和, 881년 7월 ~ 885년 3월)
광계(光啓, 885년 3월 ~ 888년 1월)
문덕(文德, 888년 2월 ~ 888년 4월)
873년 8월 16일 888년
4월 20일
14년 251일 정릉(靖陵)
임시 - 이온(李熅) 건정(建貞, 886년) 886년 886년 -
19대 소종(昭宗) 이엽(李曄) 867년 3월 31일 904년 9월 22일 문덕(文德, 888년 4월 ~ 888년 12월)
용기(龍紀, 889년)
대순(大順, 890년 ~ 891년)
경복(景福, 892년 ~ 893년)
건녕(乾寧, 894년 ~ 898년 8월)
광화(光化, 898년 8월 ~ 901년 3월)
888년 4월 20일 900년 11월 16년 159일 화릉(和陵)
임시 - 이유(李裕) - 900년 901년 3달 -
복위 소종(昭宗) 이엽(李曄) 867년 3월 31일 904년 9월 22일 천복(天復, 901년 4월 ~ 904년 윤4월)
천우(天祐, 904년 윤4월
~ 907월)
901년 1월 904년 9월 22일 16년 159일 화릉(和陵)
20대 애종(哀宗)[20] 이축(李柷) 892년 9월 27일 908년 3월 26일 천우(天祐, 904년 ~ 907년) 904년 9월 26일 907년 5월 12일 2년 228일 온릉(溫陵)

7. 계보

이경
이이
.
.
.
.
.
凉. 이고
.
.
.
이희(李熙)
이천석
이호
이병
1. 이연
2. 이세민
3. 이치
이홍 4. 이현 5. 이단 이현(李賢)
이중무 6. 이융기 이수례
이종 7. 이형 이승굉
8. 이예
9. 이괄
10. 이송
11. 이순 이온
,(이형의 현손/玄孫),
12. 이항 16. 이침 이오
13. 이담 15. 이염 14. 이앙 17. 이최
18. 이현 19. 이엽
이유 20. 이축

8. 추존 황제

묘호 시호 이름 연호 재위 기간 비고 능호
- 덕명황제(德明皇帝) 고요(皋陶) - - 고조 추숭 -
- 선천태상황제(先天太上皇帝) 이경(李敬) - - 현종 추숭, 노자의 부친 -
성조(聖祖)
대성조(大聖祖)
고상대광도금궐현원태상천황대제
(高上大廣道金闕玄元太上天皇大帝)
이이(李耳) - - 현종 추숭, 노자 -
서량 태조
(西涼太祖)
흥성황제(興聖皇帝) 이고(李暠) - 400년 ~ 417년 고조 추숭, 서량의 시조 건세릉(建世陵)
헌조(獻祖) 선황제(宣皇帝) 이희(李熙) - - 고조 추숭, 고조의 고조부 건초릉(建初陵)
의조(懿祖) 광황제(光皇帝) 이천석(李天錫) - - 고조 추숭, 고조의 증조부 계운릉(啓運陵)
태조(太祖) 경황제(景皇帝) 이호(李虎) - - 고조 추숭, 고조의 조부 영강릉(永康陵)
세조(世祖) 원황제(元皇帝) 이병(李昞) - - 고조 추숭, 고조의 부친 흥녕릉(興寧陵)
의종(義宗) 효경황제(孝敬皇帝) 이홍(李弘) - - 중종 추숭, 고종의 5자 공릉(恭陵)
- 양황제(讓皇帝) 이헌(李憲) - - 현종 추숭, 예종의 장자 혜릉(惠陵)
- 봉천황제(奉天皇帝) 이종(李琮) - - 숙종 추숭, 현종의 장자 -
- 승천황제(承天皇帝) 이담(李倓) - - 대종 추숭, 숙종의 3자 순릉(順陵)

9. 임시(비정통) 황제

시호 이름 연호 재위 기간 비고
상황제(殤皇帝)
소황제(少皇帝)
이중무(李重茂) 당륭(唐隆) 710년 710년 위황후에 의해 즉위, 17일만에 폐위
광무왕(廣武王) 이승굉(李承宏) - 762년 토번에 의해 즉위
강왕(絳王) 이오(李悟) - 826년 환관 이극명에 의해 즉위, 헌종의 6자
폐황제(廢皇帝)
양왕(襄王)
이온(李熅) 건정(建貞) 886년 ~ 887년 886년 ~ 887년 주매에 의해 즉위, 숙종의 현손
성황제(成皇帝)
덕왕(德王)
이유(李裕) - 900년 ~ 901년 소종의 장자, 유계술에 의해 즉위

10. 관련인물, 항목

11. 여담

중국의 자동차 제조사인 BYD에서 생산하는 BYD 탕의 이름의 유래가 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1] 아예 선비족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2] 때문에 관중 지역의 식량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었던 당대 후기에는 거의 국가 대부분의 식량 공급을 강남 지역의 생산력에 의지하게 된다.[3] 다만 대외적인 활동이 활발했고 국제적인 요소가 많았다고 평가받고 있으나 한계점도 분명하였다.[4] 물론 이 과정에서 통일신라(대신라)나 발해와 군사적으로 충돌하기도 했다.[5] 조선 시대 필수 교재였던 동몽선습 같은 것.[6] 당 황실에서는 스스로 노자의 후손이라고 칭했다.[7] 당 태종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가 당 태종 사후 출가했다가 당 태종의 아들인 당 고종의 황후가 되거나, 당 현종이 자신의 아들인 수왕(壽王) 모(瑁)의 왕비였던 양귀비를 여도사로 삼았다가 다시 자신의 후궁으로 삼기도 한 것이 당 황실에 남아 있었던 유목민족 풍습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첩을 아버지 사후 아들이 물려받거나, 아들의 아내를 아버지가 차지하기도 하는 등은 북방민족에게는 익숙한 풍습이었지만 유교 윤리에 따라 살던 한족에게는 말 그대로 근친상간이나 마찬가지였고 짐승이나 할 짓이었다.[8] 옛부터 '8주국'의 관롱집단은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무천진 출신의 선비족 장수 집안끼리만 혼인을 하였다.[9] 보육여가 성이고 견이 이름이다.[10] 애초에 갈족처럼 일부 정복 민족이 지나친 탄압 정책을 펴자 난을 일으켜 그들을 말살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선비족 계통의 일부 분파도 이러한 난에 구성원들이 거의 다 죽어서 몰락하기도 했다.[11] 이연은 수나라 황제였던 양광과 이종사촌 관계였다.[12] 당시 수나라는 대운하건설과 고구려 원정 실패 등으로 민심을 크게 잃었다.[13] 예를 들어 삼국지를 보면 종종 강릉성과 형주성을 혼용해 적곤 한다. 그냥 혼용해서 적으면 괜찮은데 형주성과 강릉성이 별도의 성으로 나오는 자아분열(?)을 보여줘서 독자를 혼돈에 빠트리기까지 한다. 이는 삼국지 연의가 명대 나관중의 소설이고, 이처럼 지역명으로 형주는 강릉을 의미하게 되었다.[14] 한국은 고려 성종10도를 설치하여 현종대에 5도 양계가 되었고, 조선왕조에 8도가 되어 현재 대한민국과 북한의 도제도에 이르렀다. 일본은 율령국을 제도화할 때 5기 7도로 도입되었고, 메이지시대폐번치현으로 폐지되어 홋카이도를 제외하고 사라지게 되었다.[15] 조선시대부터 중국 유학생 출신이 싹 사라지고 국내 과거 시험에서 장원 급제한 사람들이 대두되는 것도 명나라 즈음부터 중국이 상대적으로 폐쇄적으로 노선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 직전인 고려 말 이색, 이인복도 원나라 유학생 출신이다.[16] 단, 당나라의 개방적 태도는 측천무후 같은 일부 권력자의 의지가 컸으며 실제로는 지배층인 관롱 집단 그들이 과연 순수한 한족 혈통이었는지는 차치하고 의 순수 혈통과 한족에 대한 부심이 엄청나서 이민족들과 혈통을 보증할 증서가 없는 한족들을 차별하고 있었다. 선비족 같은 예외가 아닌 이민족들은 거주 지역의 제한을 받았으며 장사도 마음대로 개업하고 다닐 수 없었다. 대단치 않은 이유라도 빌미가 있으면 태형 혹은 감옥에 갇혔다. 그래서 관롱 귀족 계통처럼 예외적 취급을 받거나 신라인처럼 어느 정도 호의를 받고 있는 이민족이 아니라면 마음대로 다니기도 힘들었다. 측천무후도 혈통이 순수하다고 믿는 한족들에 의하여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이민족 출신 사람들을 자주 쓴 것이다. 당나라에 대해서는 Edward H. Schafer의 The Golden Peaches of Samarkand: A Study of T'Ang Exotics 참조.[17] 일본에서는 당이 멸망한 후 송이나 명, 청나라 때까지도 중국을 가리켜 '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신라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후에도 일본에서 조선을 '계림(신라의 별칭)'이나 '고려'라고 부르기도 한 것과 비슷하다.[18] 이러한 행정력은 동양뿐 아니라 서양의 행정 시스템까지 받아들인 현대 중국조차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는 시스템이다. 물론, 전반적인 시스템 자체는 현대 중국이 훨씬 정교하고 우수하지만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나 행정력 자체는 당나라보다 못하다. 당장 지금의 중국에서는 공무원들이 현장 시찰을 나가지도 않고 사진을 합성해서 시찰했다고 속여 보고하는 경우도 많다.[19] 이게 얼마나 놀라운 것이냐면 관리들이 만족스러운 수준의 봉급과 식읍을 충분히 제공하고, 부패한 관리에 대한 처벌 시스템이 국가 말기까지 제대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보통 공무원은 예나 지금이나 국민의 공복이라는 명분이나 막강한 권력을 대가로 봉급이 적게 책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재산을 불리기 위해 뇌물에 대한 유혹을 쉽게 거부하지 못한다.그럼에도 당은 국가 말기까지 공무원들이 뇌물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행정 시스템이 청렴하고 체계적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20] 원래 묘호는 후당명종 이사원이 추증한 경종(景宗)인데, 그리고 이 애종이라는 묘호는 후량주전충선양 받고 올린 시호는 애황제(哀皇帝)인데, 이는 이사원이 경종이라는 묘호를 채택하다가 중간에 취소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주전충이 올린 시호인 애자를 따서 묘호를 애종으로도 호칭되었다.[21] 아래 항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