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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

베트남의 역사
lịch sử của Việt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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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베트남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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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
Việt Nam Cộng Hòa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png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장.png
국기[1] 국장
1955 ~ 1975
표어 조국, 공정, 청렴
Tổ quốc, Công minh, Liêm chính
국가 공민에게 고함
지리정보
파일:attachment/vietnam-map.gif
면적 173,809 km2
위치 동남아시아
수도 사이공[2]
정치
정치체제 단일국가, 대통령제, 공화제, 양원제, 군정(1963~1967)
국가원수 대통령
경제
경제체제 자본주의
GDP $ 33억
1인당 GDP(명목) $ 44[3]
통화 남베트남 (Đ, đồng)
하위 행정 구역
44개
인문 환경
인구 약 21,000,000명
인구밀도 113/km2
언어 베트남어[4]
종교 불교. 가톨릭, 개신교, 유교, 도교
역사
1955년 10월 26일 제1공화국 수립
1967년 9월 3일 제2공화국 수립
1975년 4월 30일 멸망
설립 이전 베트남국
멸망 이후 남베트남 공화국
자유 베트남 임시 정부
1. 개요2. 역사
2.1. 설립 배경2.2. 베트남 제1공화국2.3. 군사정부2.4. 베트남 제2공화국2.5. 멸망2.6. 멸망 이후
3. 멸망 이후의 숙청4. 왜 망했는가5. 경제6. 군사7. 외교
7.1. 북베트남과의 관계7.2. 미국과의 관계7.3. 대한민국과의 관계7.4. 중화민국(대만)과의 관계
8. 남베트남의 해외 이주자9. 분리주의10. 역대 대통령11. 관련 문서

1. 개요

Việt Nam Cộng hòa(비엣남 꽁 호아)
越南共和(월남공화)

북베트남이라 불리던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대립하며 현 베트남의 남부에 존속하던 국가. 간단하게 남베트남(Nam Việt Nam), 남월(南越)이라고도 불린다.[5]

북위 17도 선을 경계로 현재의 베트남 남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도는 지금은 호치민 시로 개명된 사이공(Sài Gòn, 柴棍)[6]. 국가는 '공민에게 고함'.

지방행정은 44개 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참고로 통일 후인 현재 구 남베트남 지역에는 31개 성이 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남베트남을 월남(베트남)의 정통 정부로 간주했기 때문에 월남이나 자유월남, 베트남이라고 불렀고,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월남(베트남) 독립 동맹'의 정권이라 하여 월맹(베트민, Viet Minh)이라고 불렀다. 현재도 베트남 전쟁 관련 자료 등(특히 국방부에서 발간한 것들)에서 당시 명칭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베트남이 공산 국가로 통일되고 1992년 대한민국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교하자 대한민국에서는 월남이라는 표현을 마치 남베트남의 영구적인 명칭인 것처럼 추억 속에 봉인해 버리고(...)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베트남이라고 공식 표기하기 시작하였다. 기성 세대가 월남이라고 하면 십중팔구 베트남 공화국을 뜻한다.

2. 역사

2.1. 설립 배경

사실 이 일대는 원래 베트남 영토가 아니라 서기 192년부터 1832년까지 참파라는 나라가 따로 존재했고, 참파의 주 종족이었던 참인들은 베트남의 주요민족인 킨족과는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많이 다른 민족으로 참파인들이 쓰는 참어도 베트남어와는 크게 다르며[7] 대만 원주민들의 언어나 마인어, 필리핀어에 훨씬 가까울 정도이다. 그러나 베트남이 건국 된 이래로 꾸준한 남진 정책을 펴면서 밀려버리며 17세기에 빈사상태에 빠졌으며 참인들이 보트피플이 되며 언어적으로 비슷했던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일대로 이주하였고, 그 자리를 베트남인들이 차지하면서 국가가 찢어지고 종속국으로 전락한 끝에 1832년, 베트남에 완전히 흡수되었고 참족들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해버렸다.. 마찬가지로 수도 사이공이 있는 메콩 강 유역도 원래 프레이 노코르라 불리던 캄보디아 땅이었지만, 18세기에 베트남이 각종 이유를 들며 뜯어갔다. 베트남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남쪽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결국 찐(Trịnh, 鄭)씨의 북부와 응우옌(Nguyễn, 阮)씨의 남부로 분열되었고[8], 최종적으로 1802년이 되어서야 오늘날 베트남의 영토를 완성하고 통일을 이뤘다.

베트남 공화국이 성립된 배경을 살펴보자면 제2차 세계대전 시기부터 보아야 한다. 1940년 9월 일본 제국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했다. 당시 인도차이나는 나치 독일괴뢰 정권비시 프랑스의 관할하에 있었고, 프랑스 식민당국은 일본에 대항하기보다는 강화를 맺으려 했다. 일본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인도차이나에 군대를 주둔시킬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945년 3월 일본의 패전이 명확해지고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부가 자유 프랑스로 전향할 조짐이 보이자 일본은 쿠데타를 일으켜(명호작전) 베트남 제국, 캄보디아 왕국, 라오스 왕국이라는 괴뢰국들을 세워 인도차이나를 직접 지배했다.

1945년 8월, 베트남을 점령하던 일본이 항복한 이후 베트남을 관리하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도 실행하기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북쪽엔 중화민국군이, 남쪽엔 영국군이 베트남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이 두 세력이 들어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에 베트남은 관리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이 때를 노려 호치민이 이끌던 베트남 공산당이 전후 며칠 만에 베트남 북부를 장악. 9월 2일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프랑스 식민당국은 이를 눈뜨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는데 전쟁기간 동안 일본군은 이들을 억류하고 있던 상태였고 일본군이 항복한 이후 이들에 대한 억류조치를 풀지 않은 채 일본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 북부로 진입한 중국군은 자신들이 완전히 자리잡을 때까지 프랑스인들에 대한 억류조치를 풀지 않으면서 베트남 공산당의 이러한 행동을 사실상 방치하였다. 한편 16도선 이남의 영국군 주둔 지역에선 담당인 영국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들어오는 바람에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관할은 남베트남에 미치지 못했다.

1946년, 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베트남 내 중국군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돌아가면서 프랑스인들의 억류조치를 풀어주었고 풀려난 프랑스 식민당국은 일단 영국군의 주둔지인 베트남 남부로 가 행정권의 인수인계를 받으면서 베트남 남부를 재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되면서 베트남은 사실상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남베트남에서도 프랑스는 환영받지 못했고 반프랑스 분위기가 퍼져나가자 결국 프랑스는 일단 괴뢰국을 세우기로 판단, 사이공에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세운다. 이후 베트남 재정복의 야욕을 감추지 못하는 프랑스와 베트남 민주 공화국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자 1946년, 중국의 중재 아래 정전 협정에는 합의했으나 프랑스가 이 협약을 파기, 베트남 남부를 재점령해 괴뢰국인 베트남국을 선포하고 하이퐁[9]에 상륙, 베트남을 재침공한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베트남 독립 동맹(통칭 베트민)을 결성,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에 대항한다.

1954년,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민에게 처절하게 깨지고난 뒤 베트남에서 발을 빼기위해 미국과 소련에게 중재를 요청,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네바 회담이 열렸다.[10]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될 경우 인도차이나 전역이 공산화될 것이라는 우려에 빠져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제네바 협의에서 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 통칭 월맹)과 베트남국[11](남베트남)으로 분단된다. 정전선 설정에 관해서 논란이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프랑스는 북위 18도선을 고집했고[12], 월맹은 북위 13~14도선[13]을 주장했다. 저우언라이가 북위 16도선[14], 몰로토프가 16~18도선의 중간인 17도선을 중재하여 베트남은 17도선을 경계로 남북분단된다.

하지만 중재를 맡아 일단 전쟁은 끝내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이 회담에서 베트남은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한 뒤 2년 후 남북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총선거를 실시할 경우 공산세력이 압승을 거둘 것임이 확실했고 이럴 경우 베트남의 공산화는 불보듯 뻔한 상태였으므로 미국과 베트남 남부는 총선거를 거부한다.[15] 그리고 1954년 10월, 남부 베트남은 미국의 지원 아래 단독으로 베트남국 수립을 선언하고 바오다이가 황제, 응오딘지엠이 총리 직을 맡는다.

2.2. 베트남 제1공화국

1955년 10월 26일, 응오딘지엠은 국민투표를 통해 베트남국을 폐지하고 바오다이를 폐위,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응오딘지엠은 정치적 선전방송을 통해 바오 다이를 쾌락 추구자로 비난하고 자신은 국가를 위한 경이로운 일꾼으로 선전했다. 응오딘지엠을 행운의 상징으로, 바오 다이를 불행의 상징으로 띠운 선거 전략은 주효하여 바오다이는 98.2%의 찬성 투표를 통해 폐위되었다.[16] 하지만 진짜 문제가 있었으니...공화정을 세운 것까지는 좋았는데, 베트남국의 무지막지한 부패를 베트남 공화국이 그대로 계승하고 만다.

또한 북베트남에서 파견한 간첩의 세력이 커졌는데 실제로 베트남 전쟁 이후 남베트남에 암약하던 북베트남의 간첩이 다 까발라졌고 다 먼저 처형당했다. 북베트남 간첩의 대표적인 예가 야당의 유력 대통령 후보였던 쫑딘쥬였는데 간첩이 정부와 국회 등 국가 지도부 전체에 쫙 깔리니 국가 기밀이 북베트남에 유출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초기에는 응오딘지엠의 불교도 군벌 숙청과 치안력 회복 덕분에 6년 정도 평화를 누렸던 베트남 공화국이었지만, 북베트남이 국가정책으로 남베트남의 전복을 채택하고 남베트남의 게릴라, 베트콩에 대한 막대한 지원을 퍼붓기 시작하면서 베트남 공화국은 악명높은 베트콩의 준동으로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풍부한 쌀 수확 덕분에 북베트남보다 경제력이 앞섰지만[17] 미국의 원조를 받아 양성한 군인들이 대체로 무능하고 정치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특히 초대 대통령이던 응오딘지엠의 부패 정치 때문에 더 혼란한 상황이 벌어졌다. 초기에는 친불군부 숙청, 공화국 체제 수립, 정치깡패 및 불교도 군벌 정리를 통한 치안 안정, 북베트남의 무리한 토지 개혁과 종교 탄압 때문에 발생한 80만에 달하는 탈북민을 정착시키는 등[18] 그럭저럭 잘 출발하는 것 같았는데, 민주화를 요구하는 미국의 요구에 맞서기 위해 응오딘지엠이 내세운 것이 천주교도, 남베트남에선 소수인 북부 통킹인, 중부 안남인 중심 내각[19], 친족들로 정부를 채우는 족벌정치였고 미국의 입김을 줄이겠다는 이유로 조성된 가족정치 덕분에 공직을 맡을 사람을 뽑는 기준이 '친인척인가' 혹은 '가톨릭을 믿는가'였으니 말 다했다.[20] 또 응오딘지엠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독자적 성격을 강화했다.
파일:external/i.telegraph.co.uk/nhu_1882962f.jpg
쩐레쑤언
(Trần Lệ Xuân, 陳麗春, 1924~2011)
1963년 5월에 접어들어 지엠 정권의 불교 탄압에 분개한 베트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고승인 틱광둑(Thích Quảng Ðức, 釋廣德)이 소신공양으로 세계에 베트남의 상황을 알리고자 했으나 응오딘지엠 일당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딘뉴(Ngô Đình Nhu, 吳廷瑈)의 아내이자 역시 부패의 핵심 축 중 하나였던 쩐레쑤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마담 뉴(Madame Nhu)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는데 소신공양에 대해 매스컴에다가 이런 식의 소리를 지껄였다. 당시 영상
중놈들이 한 게 뭐가 있소? 기껏해야 한 사람 바비큐로 만든 것 뿐인데.
(What had the buddhist leaders done comparatively? The only thing they have done: They have barbecued one of their monks.)

이 재활용도 어려울 역대급 고인드립에 그 동안 쌓인 대중의 분노가 전국적인 규모로 폭발했다. 심지어 당시 미국 정부도 어이를 잃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여론의 분위기를 보고 드디어 때가 왔다고 판단한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 楊文明)[21] 장군을 위시한 고위 군사 사령관들이 작당하였다. 그 해 11월 1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응오딘지엠 정부를 무너뜨리고 군사혁명위원회를 설립한다. 응오딘지엠과 동생 응오딘뉴는 도망쳐서 교회에 숨어있다가 다음날 발견되어 사살당했다.[22][23] 미국도 이 새로운 군사정부를 승인한다.

2.3. 군사정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 된 즈엉반민은 베트콩과 대결하기보다는 대화를 통해 풀어 나가는 방향을 추구했다. 미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았다. 1964년 1월 30일 응우옌카인이 미국 지원하에 쿠데타를 일으켜 즈엉반민 정부를 전복시켰다. 그러나 그후에도 쿠데타가 계속되는 등 매우 불안정해졌다. 이를 틈타 베트콩이 농촌에서 세력을 불려나갔다. 또한 1964년 8월에는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며 미국베트남 전쟁에 개입해 무력 충돌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1965년에는 응우옌반티에우가 군사정부의 수반이 되며 안정을 되찾지만, 응우옌반티에우 정부는 자주적으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물리치지 못하고 미국에 의해 끌려다니며 자주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응우옌반티에우는 1967년에는 군정을 폐지하고 민정으로 복귀한다 선언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사람은 당연히 응우옌반티에우.

2.4. 베트남 제2공화국

민정으로 복귀하고 정치적으로는 어느정도는 안정을 되찾았지만, 앞서 말했듯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막장을 다시 시작하였다. 자기 힘으로 전쟁을 치르겠다는 진지한 태도를 가지지 않고 미군의 전투력과 쇼미더머니 신공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에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여담으로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재정 적자, 무역 적자, 인플레이션의 3박자가 겹치면서 그 앞선다는 경제도 점차 안습이 되고 농촌 지역의 상당수가 베트콩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면서 쌀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전락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정치적 혼란과 여러 이유로 병역기피도 만연하였다. 휴가를 제대로 보내주지 않는다거나 가족에게 가야 할 전사자 보상금을 장교가 빼돌린다던지 때문에 군대는 자주 농촌 마을들을 수색하여 징병을 해야 했다고 한다. 원래 수도인 사이공과 메콩 델타 일대만 하더라도 남북 베트남 분단 이전에는 오히려 베트남 공산주의자들 사이 단일 최대의 규모를 자랑했던 사이공 소비에트와 이를 지지한 빈농들이 다수인 지역이었다. 때문에 월맹이 1950년대의 토지 개혁을 둘러 싼 혼란을 극복하고 1960년에 본격적인 해방 전쟁을 선포하자 순식간에 수도권은 최전방이 되어버렸다. 1960년대 중반에는 아예 나라 전체가 베트콩에게 넘어갈 뻔하다가 미국이 이제까지 해 왔던 간접 지원에서 아예 대규모 지상군 파병을 하면서 겨우 살아 남았다.

응오딘지엠이 무능했고 국민들로부터 광범위하게 미움을 사긴 했지만, 남베트남 역대 지도자 가운데서 미국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국정을 추구할 만큼 그릇과 세력이 있었던 인물 또한 응오딘지엠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나마 미국에게 받아 먹을 건 다 받아 먹으면서도 독자적인 정책을 시도하던 응오딘지엠 시절과 달리,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북베트남의 선전 문구 그대로, 아예 1969년 파리 평화 회담 같은전쟁의 경과에 직결되는 중요한 회의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식으로 무시를 당하는 등 허울뿐인 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애당초 남베트남은 존립시기 내내 정상적이고 독자적인 행정 체계를 세우고 실행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래도 1970년 총선에서 불교세력이 대거 진출하는 결과가 나올정도로 그럭저럭 정상적으로 치러졌고 그나마 정통성을 세울 기회였지만 1971년 대선에서 부정선거가 펼쳐지는 바람에 안그래도 없던 정통성마저 아작나버리고 말았다. 응오딘지엠 이후부터는 미국이 아예 전쟁 자체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지 않았다면 남베트남은 실제 역사보다 10년은 일찍 망했을 것이라는 말도 간간히 나오는 편으로 이건 내부 자체 평가용 자료와 미국 측의 시선이나 모두 동의 하는 내용이다.[24] 베트남 공화국은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국내 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자립 경제 체제로의 변화가 필요했는데, 가장 무난한 쌀 산업은 이전에 말했듯이 농촌 지역이 베트콩 하에 들어가 육성할수 없었다. 결국 베트남 공화국 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기생하여 돌아가는 구조가 되어버렸다. 1970년대 중반에는 물가 상승률이 74퍼센트까지 올라 경제가 엉망이 되었다. 군 역시 부패해 국민들을 약탈하고 심지어 베트콩에 무기를 거래하기도 했다.

2.5. 멸망

파일:attachment/gotothepalace.jpg
독립궁(현 통일궁) 정문을 쳐부수고 들어오는 베트콩군의 전차(1975년 4월 30일 11시 30분 사이공)

1973년 1월에 파리 협정을 체결한 미국이 전쟁에서 손 털고 떠나버리자 베트남 공화국은 완전히 새 되고 말았다. 북베트남, 베트콩과의 교전은 공식적으로는 멈춰졌지만 북베트남은 협정을 파기하고 전쟁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74년 12월 18일부터 1975년 1월 8일까지 '남부 해방'에 대한 노동당 정치국 회의가 열렸다.

1975년 3월 10일에 시작된 북베트남의 막판 공세에서 남베트남군은 쑤안록에서 치열하게 싸운 18사단(역설적이게도 18사단은 원래는 최약체 사단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같은 일부 부대의 영웅적인 항전을 제외하면 일패도지,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병합되고 말았다.[25] 미국이 철수하면서 엄청난 군사지원을 해줘서 일시적으로 세계 순위권의 군사력을 가질 수 있었는데도 패퇴하고 만 것이다.

당시 베트남 공화국은 미국이 준 장비만으로도 공군력 세계 4위, 총 병력수 10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 순위권의 군사력이란 것은 잘 보면 빈 껍데기였다. 공군력도 숫자로만 4위, 실제 전력은 북폭을 할 능력도 없고 거의 다 지원기나 수송기 위주였다. 100만 병력이란 것도 정규군은 45만 수준이고 나머지는 민병대와 지방대이다, 민병대와 지방대는 실제 전투전력이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겉은 그나마 번드르르했지만 안은 엉망이었다. 미국이 준 무기의 규모는 정말 세계 순위권에 들 수준이었으나, 정작 그 순위권에 드는 규모의 무기를 굴릴 돈과 물자는 주지 않았다.

미국도 일부러 안 준게 아니라 베트남 전쟁의 수렁 때문에 경제난이 심각했고, 미 행정부가 지원을 위해 예산을 편성해 미의회에 허락을 받으려고 했으나 미 의회에서 더이상 부패 정권에게 지원은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삭감했고 여론도 이미 남베트남 지원에 반대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1975년의 최종공세 당시 남베트남군은 연료와 부품이 없어 비행기도 제대로 띄우지 못했고 탄약의 부족으로 전투에도 제한을 받았다. 전투 중에 탄약 아껴쓰라는 명령[26]이 내려올 지경이었다. 전술적으로도 미국식 전술과 미군의 지원에 너무 의지하게 된 것이 약점이 됐다. 미군만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군대가 미군처럼 싸우는데 익숙해져버렸으니.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이 지원하는 베트콩 게릴라를 잡으려고 전군을 국토에 넓게 분산시켰는데, 부족한 병력을 무리하게 넓게 펼치다보니 전 국토의 치안 유지 능력이 악화되었다. 결국 전략을 수정하여 주요 거점을 안전하게 확보한 다음 토벌에 나서기로 결정하고 대대적인 부대 재배치를 감행하였으나, 그 첩보를 입수한 북베트남이 부대 재배치가 이루어지는 빈틈을 노려 침공해왔다. 방어체계를 제대로 굳히기도 전에 전격전을 당한 것이다. 티우의 전략은 현재 병력으로는 모든 곳을 지킬 수 없으니 해안 주요도시 등 지킬 곳만 지키는 식으로 병력 재배치 계획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2군단 몰락을 가져와 전체적인 남베트남 육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27]

그리고 부패하고 무능한 베트남 공화국에 이미 민심은 떠나 있었다. 이로 인해 개전 초기에 100만이 넘는 병력 중 반 이상이 탈영을 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다.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미국을 맹비난하며 1975년 4월 21일 중화민국으로 망명했고, 그 후임인 쩐반흐엉 역시 4월 28일 하야하고 즈엉반민[28]에게 대통령직을 주었다. 즈엉반민은 4월 30일 결국 항복해버렸다. 북베트남의 지도자였던 호찌민은 생전에 베트남 공화국을 정복하는데 30년 이상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죽은지 몇년 뒤인 1975년 4월 30일 개전 1개월 만에 정권이 무너졌다. 이후 남베트남에는 북베트남의 괴뢰 정권인 '남베트남 공화국(Cộng hòa Miền Nam Việt Nam)'이 세워져 이듬해인 1976년 7월 2일 북베트남과 통합하여, 베트남 통일을 이루었다.

2.6. 멸망 이후

북베트남이 비록 무력으로 남베트남을 통일시키기는 했다만, 정작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은 남부 통치에서 고전을 거듭했다. 농촌의 사회주의화 개조 작업은 자영농 체제에 익숙해져 있던 남부 농민들의 저항에 직면했고, 새로히 협동농장에서 일하게 된 농민들은 저임금에 대한 불만으로 태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생산성은 오히려 이전보다 크게 떨어졌다. 또한 협동농장화가 완료된 북부 농촌과 사회주의 개조가 지지부진한 남부 농촌의 공존은 정부의 경제정책을 근저에서부터 뒤흔드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태풍이 연속적으로 들이 닥치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데다가 협동농장화되지 않은 자영농들의 농산물은 암시장으로 흘러들었고, 공무원들조차 배급이나 정부공급가가 아닌 암시장에 의존해 식량을 수급해야 했다. 베트남 정부에서는 이러한 경제문제를 해결하려고 물가조정조치 및 신 화폐 발행을 단행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별 효력을 얻지 못한채 물가상승률만 높여주는요인이 되었고 오히려 먹고살기 위해 다른국가로 배를 타고 이민가는 보트피플이 더욱 성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남부인들은 사이공 등의 도시에서 이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상납해가면서 암시장을 비롯한 시장경제 활동을 이어나가며 베트남 정부가 꿈꿨던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교란시켰다. 이러한 경제운용의 난맥상과 통일 후 장기간 이어져온 경기침체를 극복하려는 베트남 공산당 내 개혁파들의 노력이 1980년대 몇 차례의 개혁을 거쳐 결국 도이머이로 불리는 대대적인 시장화 개혁으로 이어졌다. 이는 중화민국과 국민당을 내륙에서 몰아냈지만 결국엔 개혁개방정책을 펴서 경제발전을 이록한 중국의 모습과 비슷하다.[29] 다만, 북부 출신들도 1954년 이전에는 자본주의 밑에서 살았으니 그것이 크게 낯설지 않았다.

지금도 구 북베트남 지역보다 구 남베트남 지역이 경제적으로도 훨씬 부유해서, GDP도 옛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호치민(사이공)이 북부의 수도 하노이보다 두 배나 높다. 정작 분단 시기에는 남베트남이 다소 앞서다가 얼마 가지 않아 가난해졌음을 감안하면 격세지감. 또한 이쪽 지역에는 해외로 도망간 사람들의 자손들이 투자를 하기 때문에 이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오늘날의 통일 베트남 내부에서는 구 남베트남 지역인 남부 지역과 구 북베트남 지역인 북부 지역 간의 갈등과 그로 인한 지역감정이 꽤 심하다. 북부 사람들은 남부 사람들을 보면서 황금만능주의자라고 비판하고, 반대로 남부 사람들은 북부 사람들을 냉혈한이라고 비판하면서 서로 경멸한다. 남베트남이 적화통일되면서 대대적인 학살과 보복을 당했으니 어쩔 수 없다.

3. 멸망 이후의 숙청

대다수 공산 국가들처럼 매우 잔혹한 숙청이 동반되었다. 1975년부터 10년간 사법적 과정없이 처형된 자들은 65,000명 정도며, 많이 잡으면 10만명 정도라고 한다. 미국의 연구자가 1990년에 발표한 논문이며, 굉장히 많이 인용된다. (당시 남북 베트남의 인구는 1973년 기준으로 북쪽이 2,393만, 남쪽이 1,937만). 다수가 처형되거나 혹은 수용소에 간 것도 사실이다. 남베트남에서 근무했던 군인, 공무원이 재교육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양민학살이나 심각한 부패 혐의가 없는 남베트남 관리나 지주 대부분도 재교육 캠프에 들어갔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야 석방되었고, 이 숫자는 100만명 정도 된다. 다만 공산정권은 특별히 베트콩에 잔혹행위를 하지 않았거나 부패혐의가 없는 남베트남 고위 관리들은 해외로 망명하도록 허가해주기도 했다. 물론 망명 간 사람들은 그냥 맨몸으로 추방당한 것과 같았기에, 미리 재산을 빼돌린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매우 빈곤하게 살았다.

베트콩 정부와 군대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은 북베트남군에서 남파한 인력이므로 애초에 숙청대상이 아닌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베트콩(정부)은 남파된 북베트남군+자생적 반정부주의자(소위 민족주의자)의 공생조직이었으므로, 남베트남이 패망할 무렵부터 베트콩은 서서히 공생조직에서 북베트남군 일색으로 교체되어 간다. 이는 베트콩 정부에서 법무장관으로 활동했던 민족주의자 계열의 반정부 지식인이 직접 목격한 것으로 얼마 전까지 남베트남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됐던 부대가 머지않아 다시 봤더니 온통 북베트남인(군)으로 채워져 있었고, 북베트남군 정치장교가 통제하고 있더라는 증언을 했다. 베트콩들 역시 1968년 일어난 구정 대공세로 인해 대부분의 간부들이 남베트남군과 미군에의해 토벌당했고 살아남은 민족주의계열 간부들은 거의없었고 남은건 남파된 북베트남 정치장교들이 대부분이었던것이다.

피해를 봤다면 민족주의 세력이 피해를 본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남베트남의 패망이 유력해질 무렵부터 베트콩 정부와 군대의 요직에서 밀려나기 시작했고, 이들이 밀려나면서 베트콩 정부가 북베트남 정부와 다를 바 없게 되자 북베트남은 베트콩 정부와의 상의도 없이 남베트남 패망 2년 후 일방적 합병선언으로 통일을 완수했다. 북베트남의 강력한 재교육 정책에 항의했던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은 재교육 캠프에 수용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민족주의 계열인사(베트콩 정부의 법무부 장관)는 결국 승리했음에도 보트 피플로 망명해 최종적으로 현재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이 내용은 그가 프랑스에서 발간한 자서전의 일부이며, 실제로 그 외에도 북베트남 정규군 출신으로 통일후 남베트남에 대한 정책에 회의를 품고 망명해 프랑스에 거주하는 전직 북베트남 장교들도 유사한 증언을 한 바가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베트콩 정부(와 군대) 내의 공산주의자 계열(대개 북베트남 남파인원)들은 당연히 문제가 안 됐고, 자생적 민족주의자(반정부) 계열은 통일 이후 가치 하락과 반항 정도에 따라 요직에서 제외 혹은 재교육 캠프행이 결정됐고, 남베트남 출신들도 마찬가지였다고 보면 된다.

최후의 남베트남 대통령이었던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30] 1980년대 한국의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서는[31]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나왔지만 실제로는 사이공 함락 후 간단한 조사를 거쳐 귀가시켰고, 후에 프랑스 망명을 허가해줬다. 그리고 나중에 즈엉반민이 해외에서 사망했을 때도 베트남 정부에서 유감을 표명했을 정도. 이는 즈엉반민의 경우 사이공 함락 당시 무조건 항복한 당사자라는 점, 그리고 해외 망명생활에서도 공산 베트남 정부에 대해 크게 비판적인 말을 하거나 하지도 않고, 비교적 조용히 살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베트남 현 정부에서도 크게 거슬려 하지는 않았다. 반면 남베트남계 이주민들은 즈엉반민을 곱게 보지 않는다. # 남베트남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응우옌까오끼(Nguyễn Cao Kỳ)의 경우도 2004년 베트남 방문을 허가해줬다.

이렇게 상당히 많은 사람이 처형되거나(약 10만), 재교육 및 수용소(약 100만)로 간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70~80년대 한국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도 약간의 과장이 들어간 것을 제외하면 팩트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오히려 리그베다 위키 시절의 서술이 엉터리였던 것.

4. 왜 망했는가

베트남 공화국/패망 원인 항목 참조.

5. 경제

베트남 공화국은 시장 자본주의 체제를 채택했다. 풍부한 쌀 수확량으로 북베트남이나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등보다 잘 살았고 당시 많은 전문가들이 베트남 공화국은 북진통일을 이룰 것이고 전후에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가는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베트남 공화국은 패망하였다. 패망 당시의 1인당 GDP는 한국의 14분의 1 정도인 44달러였고 통일된 공산베트남은 경제재제와 사회주의식 경제의 한계점으로 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한다.(당시 한국은 608달러) 베트남 공화국은 설립 당시 북베트남의 약 5배의 GDP를 자랑했으나 1970년대 이후 북베트남에 따라잡힌다. 그리고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 이후 미국의 원조에 점점 의존하여 결국 GDP의 10% 정도를 차지하는 소규모의 산업만을 보유하게 되었고 미국 없이는 못 사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6. 군사

베트남 공화국군 참조.

7. 외교

주로 제1세계 국가들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7.1. 북베트남과의 관계

철천지 원수

남베트남은 월맹 정권을 불법 반란 세력으로 보았고, 북베트남은 월남 정권을 프랑스의 괴뢰 정권베트남국을 계승한 미국의 괴뢰정권으로 보았다. 당연히 서로를 주적으로 삼았다. 남북한관계와 비슷하게 보면 되지만 이쪽은 전쟁을 거의 20년 가까이 치렀다. 그래서 통일 이후인 지금까지도 갈등이 남아있어 남부와 북부의 지역감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7.2. 미국과의 관계

말이 필요 없는 최대 우방이다. 미국은 최대 교역국이었으며, 베트남전 당시 가장 많은 병사를 파병했다. 또 반공 군사동맹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를 창설해 도미노 이론에 따른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으려 애썼다. 그런데 미국은 국내의 반전 시위등으로 1973년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남베트남은 미국이 남겨준 무기들로 버텨보려 애썼으나, 2년 이후 사이공이 함락되며 멸망하였다. 이후 미국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통일 베트남)에 경제 제재를 가함으로써 남베트남의 복수(?)를 해주었다. 남베트남이 멸망한지 20년이나 지난 1995년 수교한다. 이후 설명하겠지만 현재 많은 구 남베트남의 해외이주자는 대부분 미국에 거주하는 중이다. 베트남계 미국인도 구 남베트남의 국민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자유 베트남 임시 정부 청사도 미국에 존재하였다.

7.3. 대한민국과의 관계

베트남 공화국과 대한민국은 서로가 냉전 체제하에 분단된 국가와 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 국가라는 점을 공유해 좋은 관계를 유지할수 있었다. 대한민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사를 베트남전에 파견했다. 1956년 국교를 맺었고, 미국, 대만 등과 함께 당시 주요 우방 중 하나였다. 여담이지만 베트남 공화국이 패망하자 대한민국 제4공화국은 민주화 요구를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기 위해 베트남 패망이라는 사건을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다며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국민들도 불안해져 긴급조치 9호에도 별 저항을 하지 못했다.

7.4. 중화민국(대만)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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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월 22일, 타이베이를 방문한 응오딘지엠 대통령(좌측)과 응오딘지엠을 맞는 장제스 총통(우측)
베트남 공화국과 중화민국은 꽤 좋은 사이를 유지했다. 베트남 공화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1955년 중화민국과 수교했다. 중화민국 역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중시한 국가는 베트남 공화국이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했다. 각국의 수도인 사이공타이베이는 자매결연을 맺기도 했다. 베트남 공화국의 학생들이 중화민국으로 유학을 가기도 했다. 중화민국은 베트남전 당시 베트남 공화국을 지원했다.[32] 1975년 베트남 공화국이 패망하기 직전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이 중화민국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8. 남베트남의 해외 이주자

프랑스의 경우는 과거 베트남을 식민지로 하고 있었던 관계로, 지금도 베트남계 혼혈들이 있으나, 프랑스를 제외한 여타 서유럽 국가들, 호주-뉴질랜드, 미국캐나다북미나 그 이외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등에서[33][34] 베트남계 주민이 보인다면 대다수가 남베트남 시절 넘어왔거나[35], 남베트남 패망 이후 도망쳐 어떻게든 그 지역까지 흘러들어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비록 미국과 베트남이 수교하면서 본국과의 교류는 자유로워졌기는 했지만 그와 별개로 현 베트남 정부는 그들을 외국으로 도망가게 만든 1등 공신인지라 아직도 공산 베트남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상당한 수준이라고 한다.# 특히 미국에 남아있는 남베트남 시절에 넘어온 베트남 사람들 가운데 몇명은 네오콘보다 훨씬 극단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36] 흠좀무. 반대로 당시 동맹국이자 파병국인 한국에 대해서는 좋은 시선을 가지고 있고 넷상 월남참전동지회 페이지에도 미국, 한국, 대만, 호주, 태국 등의 참전용사들에게도 감사를 표하거나 월남군 출신들도 심심치 않게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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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웨스트민스터 리틀 사이공, 베트남계 미국인들이 황저삼선기를 들고 행진하고있다. 원출처의 설명 " A colorful procession of South Vietnamese flags (now a symbol of the Vietnamese-American community) leads the Tet parade in “Little Saigon.”"

남베트남의 국기인 황저삼선기는 현재 베트남계 미국인의 기로서 여러 주에서 공인되었다. 이로 인해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가 정상화된 뒤 미국에 건너온 베트남계 이주민과 베트남 공화국 패망기에 건너온 구 베트남 공화국 출신 이주민들 사이에 반목도 종종 벌어진다고 한다. 예를 들면 구 베트남 공화국 출신 이주민들이 가게에 황저삼선기(黃底三線旗)를 걸면 현 베트남 출신 이주민들이 뭐라 하고, 현 베트남 출신 이주민들이 현 베트남의 국기인 금성홍기를 걸면 구 베트남 공화국 출신들이 비난하는 등. 다만 구 베트남 공화국 출신이 압도적으로 숫자도 많고 베트남계 미국인들 사이 권위도 더 강하다. 1990년도에 반 호치민 시위까지 일어날 정도이니.

한국 웹 사이트 일각에서 아시안 프린스의 노래라고 잘못 알려진 Heart2Exist의 Who i am/25 Years(Tôi Là Ai/25 Năm, 2002)가 바로 이러한 이민자(들의 2세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무래도 앞서 말했듯 남베트남 패망 후 도망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베트남계 미국인은 정치적으로 다른 아시아인들과 달리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편이다. 2012년 미국 대선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아시아계 미국인의 77%가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를 뽑았지만 베트남계 미국인 사이에서는 공화당 롬니(54%) 후보의 득표율이 오바마(44%) 후보를 앞섰다. 참조. 다만 이것도 2000년대 초반까지 베트남계 미국인들의 공화당 득표율이 70%대가 나오던 거에 비하면 꽤 내려간 편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더 이상 나라도 없고, 거주하는 나라에 배경도 전혀 없는 관계로 잃을 게 없다라는 심정으로 사는 사람도 많다. 베트남계 갱들이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한다거나, 잔인하기로 유명한데는 이런 뒷이야기도 약간 있다. 관련이 있을지 모르지만 블랙 라군의 배경이 되는 도시 로아나프라는 베트남 전쟁에서 패전하여 피난온 군인들에 의해 형성된 도시라고 한다.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미국이나 프랑스같이 규모가 큰 베트남계 이민자 사회가 형성된 곳에서는 정치적 이유로 보트 피플로서 망명해 온 구세대 이민자들과 1990년대에 서방과 베트남의 관계가 정상화된 이후 유학이나 사업 등의 이유로 정상적으로 이민을 온 전후 세대 이민자들 사이의 갈등이 크다. 1990년대 이후 많은 수의 통일 베트남 출신 베트남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 원래 이민자들의 도시이며 베트남계 이민자 공동체도 큰 뉴욕에 정착하였으나, 이런 저런 문제로 이전부터 뉴욕에 정착해 있었던 기존 이민자 사회의 텃세 때문에 위치적으로 가까운 필라델피아로 내려가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걸쳐 필라델피아에는 상당한 규모의 베트남계 공동체가 생기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통일 베트남 내부에서 남부와 북부 간의 갈등과 그로 인한 지역감정이 심한 것과도 비슷한 양상이다.

9. 분리주의

베트남 공화국 체제 회복 운동 참조

10. 역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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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제2대 제3대 제4대
응오딘지엠 응우옌반티에우 쩐반흐엉 즈엉반민
군정(1963~1967) 지도자
즈엉반민 응우옌카인 즈엉반민 판칵스우
응우옌반티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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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즈엉반민이 3번이나 있다

11. 관련 문서



[1] 황저삼선기(Cờ vàng ba sọc đỏ/旗黃𠀧𪟄𣠶). 응우옌 왕조의 10대 군주 타인타이 황제가 고안한 것으로, 붉은색 가로 세 줄은 팔괘의 첫번째인 건(乾)괘를 형상화한 것으로 태극기 좌상단의 건괘와 같다. 황저삼선기의 노란색은 베트남인과 베트남의 토지, 붉은색은 베트남인의 피를 뜻한다. 베트남이 공산통일된 현재 이 깃발을 베트남에서 쓰는건 불법이다.[2] 지금의 호찌민 시.[3] 1975년의 수치로, 한창 잘 나간 시절인 1960년대에는 118달러까지 찍었으나 결국 계속된 전쟁으로 떨어진다.[4] 공식적으로는 베트남어인데 사회 지도층 사이에서는 프랑스어가 광범위하게 쓰였고 교육에서도 프랑스어가 많이 쓰였다.[5] 남월은 중국의 번속국이었던 고대 국가의 이름이기도 하다. 남월을 뒤집어서 월남이 된 것이니 엎치락 뒤치락이 된 셈.[6] 중국에서는 사이공은 西貢(서공)이라는 표기를 사용한다.[7] 베트남어는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의 언어로 분류되는데 반해, 참어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언어로 분류된다.[8] 이 당시 찐과 응우옌 세력의 경계선은 현대 베트남의 남북분단 경계선이던 17도선보다 좀 더 북쪽에 있었다. 하띤 성과 꽝빈 성의 경계가 당시 두 세력의 대략적인 경계.[9] 수도 하노이에서 동쪽으로 약 100㎞에 위치한 항구로, 최단진격거리에 상륙한 셈이다.[10] 더불어 이 회담에선 한국 전쟁의 전후 처리 문제에 관한 논의도 벌어졌다.[11] 이후 본 문서의 베트남 공화국으로 바뀜[12] 하띤 성과 꽝빈 성의 경계와 거의 동일하다. 옛 대월이 북쪽의 찐 씨 세력과 남쪽의 응웬 씨 세력으로 나뉘었을 때 두 세력의 경계와 이와 거의 동일했다.[13] 13도선의 경우 남베트남은 코친차이나와 안남 최남부 일대만 남으면서 남북간의 국력 차가 너무 커지게 된다.[14] 투아티엔 성과 꽝남 성의 경계와 거의 동일하다. 이 방안 대로라면 응우옌 왕조의 고도 후에는 북베트남령이 되며 다낭은 재수없게도 16도선이 도심을 정확히 관통하기 때문에 둘로 분단된다.[15] 대통령 아이젠하워와 국무 장관 덜레스도 선거를 하면 분명 호치민이 80% 이상의 득표로 승리할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민주적이고 정통성 있는 북베트남'이 민심을 얻어서 이긴다는 이상주의적인 전망이 아니라 일당독재와 공포정치로 북베트남을 장악한 공산당이 부정선거로 이길 것이 틀림없다는 전망이었다. 이미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소련군이 진주한 동구권에서 공포정치와 부정선거로 공산 정권을 수립한 전례가 있을뿐더러, 실제로 가톨릭 교도 탄압, 과격한 토지개혁과 농민 학살 등을 보여준 북베트남 또한 전형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독재체제로 의심되었으며, 선거를 감독할 예정이던 프랑스군이 남북을 가리지 않고 베트남 전역에서 난타당하다 손털고 나갔기에 공정한 선거는 물건너 갔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어찌됐든 이미 이 시점 베트남에선, 길게는 1930년대 응에안-하찐성 소비에트 봉기, 짦게는 45년 8월 봉기 이래 정당화된 정치세력으로서 공산당이 민족주의 정치의 주도권을 잡은 것이 사실이고, 미국과 남베트남측이 선거에 대한 진정성이 었었다면 프랑스 대신 미국 당국이나 제3국에게 감독을 맡길 수도 있었던만큼 이것이 미국과 남베트남의 결정을 합리화해주진 못한다. 더군다나 50년대는 아직 월맹이 미국측에게 정면대결하기 싫다며 OSS시절의 짦은 협력 관계를 들먹이던 시절이다. 당시 미국 입장에서 세계 각지의 공산당이 한 짓을 보고 월맹측의 진의를 의심하는 것이 타당한 판단이었을지라도 이렇게 국제 냉전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미국의 거시적 관점은 베트남이라는 개별국가와 민족의 역사적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인식론적 실패를 초래했고,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참담한 결과로 드러난다.[16] 하지만 선거 자체는 CIA가 배후에서 깊이 관여한 부정선거였다. 98.2%라는 결과도, 99%로 발표하려던 것을 미국에서 너무 비민주적으로 보인다고 지적해서 낮춰서 발표한 것.[17] 물론 지금의 동남아를 보면 알겠지만 최빈국이었던건 마찬가지였다.[18] 사실 이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당장 지금의 한국만 봐도 탈북자 재정착에 애로사항이 꽃피고 있는 게 현실이 아니던가? 당시 남베트남이 북베트남보다 잘 살긴 했는데 그래봐야 흔한 개도국 수준밖에 안 되었으니 나름 대단한 일이었다.[19] 응오딘지엠 본인도 북베트남령인 안남 지방 꽝빈 성 출생이었다.[20] 당시 남베트남의 종교 비중은 불교 신자가 90% 이상이었다.[21] 후일 사이공 함락시에 마지막 대통령이었다. 위의 사건 이후 불과 11년 반 후의 일.[22] 이 쿠데타는 사실 CIA의 지원을 받았다고 하며, 총 42000달러나 되는 뇌물을 건넸다고 한다. 또한 응오딘지엠 정부의 저런 망언에 남베트남을 지원하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조차 분노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감안하면 CIA가 쿠데타를 지원한 것은 단순한 독단이 아니라 미국 정부도 못해도 묵인한 것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쿠데타 지원 자체를 행정부 차원에서 지시했을지도 모른다.[23] 그리고 해외로 달아난 쩐레쑤언은 베트남 정부를 비난하면서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과거 냉전 시절에 반공 투사인 양 행세하기도 했으나 미국에선 용녀(Dragon Lady. 동양의 용과 달리 서양의 드래곤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수의 이미지가 강하다) 같은 악랄한 여자라는 비아냥만 쏟아졌으며, 냉전이 막을 내리면서 거지꼴로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2011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초라하게 죽었다.[24] 단적으로 17년 가을 현재 방영중인 켄 번즈의 베트남전 다큐멘터리만 봐도 미국측 내에서도 이런 비관적인 육성 증언들을 많이 들을 수 있고, 전임자들이 키워놓은 판을 패배자처럼 포기할 수 없다는 존슨 행정부의 부담감은 결국 전면 개입으로 이어졌다.[25] 결국 18사단을 이끌었던 살아남은 지휘관들은 전쟁후 숙청당했고 전투 후 포로로 붙잡혔던 장병들은 모조리 재교육수용소에 들어가야했다.[26] 적군이 눈에 보이면 쏘라고 할 지경이었다.[27] 중국의 국공내전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군도 이런식으로 주요거점을 중심으로 재배치를 감행하다가 마오쩌둥의 공산군에게 각개격파당하고 결국 장제스는 전쟁에서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쫓겨났는데 남베트남이 똑같은 전철을 밟은 것이다.[28] 1960년대 군사정부 수반을 역임한 즈엉반민 맞다.[29] 후술하겠지만 이런 흐름 때문에 일부 극단적인 사고를 가진 해외 거주 남베트남 이주자들이 현재 베트남 공화국은 경제 체제로는 자본주의 정책으로 흐르기 때문에 남베트남이 다시 수복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있다.[30] 1963년 미국 CIA의 지원을 받아 응오딘지엠 정권을 전복시킨 인물이기도 하다.[31] 이게 왜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건지 의아한 사람이 있을텐데, 당시까지는 반공교육이 정식으로 도덕 교과에 포함되어 있었다. 즉 기본적인 일상의 덕목반공이 들어갔다는 이야기. 반공교육은 90년대 중반에 끝났다.[32] 파병까지 하려 했으나 베트남 공화국 측이 강경하게 반대했다. 이는 아무리 베트남 공화국과 중화민국이 같은 반공 진영에 속해 있어도 베트남과 중국의 국민감정이 역사적으로 좋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전쟁 당시 일본군의 개입을 막은것과 비슷한 상황이라 보면 된다. 결국 나중에 이 제안을 받아들여 소수의 중화민국군이 참전한다.[33] 보트피플들이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홍콩이었다. 홍콩 식민정부는 1979년 베트남계 난민을 정식 수용하고 이들을 구룡성채 내의 난민촌으로 보낸다. 물론 구룡성채도 상태가 안 좋은 곳이었지만 최소 굶어죽진 않았고, 성채 해체 후에는 밖으로 나와 2세 이상은 홍콩화되었다. 태국에는 캄보디아를 거쳐 육로로 도망간 피난민도 많이 건너가 파타야나 라용 주 등에 정착했다. 월남전 당시 독립한 싱가포르는 인구 부족 해결 목적으로 베트남 난민을 정식으로 받아 들이며 이 인연으로 현재도 싱가포르는 베트남과 교류가 많은 편이다.[34] 물론 비단 홍콩이나 마카오로만 온 건 아니고 중국 대륙으로 온 보트피플도 상당수 있었기는 했으며 육로로 추방된 사람도 있다. 다만 이들 중 대부분은 베트남에서 대대로 거주하던 화교들인데 베트남의 화교 탄압 정책과 중월전쟁으로 인해 추방된 케이스다. 물론 일부 순혈 베트남인도 있었는데 이들은 공산주의자이거나 공산주의에 관대한 중도 성향이지만 모종의 이유(예를 들어 친중 성향이거나 완전한 친중은 아니지만 화교들과 친분이 있다든가, 혹은 북베트남 주도의 베트남 통일에는 찬성하지만 남베트남 유민들을 지나치게 탄압하는 것에는 반대하는 경우)로 베트남 공산당의 비위에 거슬리게 된 케이스다.[35] 단, 동유럽(20세기 후반에 공산주의국가였던 유럽국가들)이나 러시아 등 구소련 국가들 그리고 쿠바라면 해당되지 않는다. 구 공산권인 해당 국가들에 거주하는 베트남계 주민 대다수가 북베트남에서 해당 국가들로 돈 좀 벌려 일하러 들어왔다가 정착한 이들이 대다수라 현 베트남 정부와는 관계가 상당히 우호적인 편이기 때문이다. 한편 냉전시기에 공산권이었던 곳에는 동독이 포함되며, 그래서 독일 통일 후에 서독의 남베트남계 거주민과 동독의 북베트남계 거주민 사이에서 갈등이 꽤 심했다고 한다.[36] 예를 들어 현재 베트남 공화국은 경제체제로는 자본주의 정책으로 흐르기 때문에 남베트남이 다시 수복해야한다는 내용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