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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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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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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滿洲國
[1]
Mǎnzhōuguó
대만주제국
大滿洲帝國[2]

Dà Mǎnzhōu Dìguó
일본 제국괴뢰국
파일:만주국 국기.png 파일:만주국 국장.png
국기[3] 문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Manchu_State.png
1932년 ~ 1945년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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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滿洲國
(Mǎnzhōuguó)
大滿洲帝國
(Dà Mǎnzhōu Dìguó)
일본어: 滿洲國
(Manshūkoku)
大滿洲帝國
(Dai Manshū Teikoku)
러시아어: Государство Маньчжурия
(Gosudarstvo Man'chzhurija)
Великая Маньчжурская Империя
(Velikaja Man'chzhurskaja Imperija)
표어 五族協和的王道樂土
(5족협화의 왕도낙토)
국가 만주국 건국가
위치 만주
내몽골 동부 흥안성[4]
면적 1,192,081 km2
인구 43,233,954명(1940년)
수도 신징(新京)[5]
정치체제 입헌공화국 →
입헌군주제, 일당제[6]
정치이념 민본주의
국가원수 집정황제
연호 대동(大同) → 강덕(康德)
역대 집정/황제 1대 강덕제
정부수반 국무원 총리
→ 국무총리대신
역대 총리 1대 정샤오쉬
2대 장징후이
언어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러시아어
문자 한자, 가나 문자
종교 불교, 유교, 국가신토
민족 한족, 일본인,
몽골인, 조선인
주요사건 1932년 건국
1934년 황제 즉위
1945년 황제 퇴위→멸망
통화 , 위안[7]
성립 이전 중화민국, 봉천군벌
멸망 이후 중화민국, 소련 점령하 만주

1. 개요2. 연혁
2.1. 배경2.2. 만주철도회사와 관동군2.3. 만주 사변 발발2.4. 수립
3. 교통4. 실상
4.1. 만주는 한일 농민에게 기회의 땅이였을까?
5. 멸망6. 통치기구
6.1. 보갑제와 집단부락
7. 만주국 독립국설8. 기타9. 만주 지역에서 일본군의 범죄 10. 국가11. 군사12. 만주국이 배경 소재로 등장하는 영상매체13. 유사 사례14. 관련 문서


1. 개요

만주국은 일본에게 몹시 큰 존재감을 지닌 곳이었다. 자신들이 잘만 하면 '왕도낙토'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며 일본은 그곳에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역시 현지의 일본인들은 거들먹거리기만 했을 뿐, 그 결과 돌아온 것은 인과응보였다. 열심이었을지 몰라도 그것은 틀렸던 것이다.
- 야스히코 요시카즈평화헌법 개정을 반대하며 2007년 2월 11일자 도쿄 신문에 기고한 글.
1932년일본 제국이 중국 동북지방, 즉 만주에 세운 괴뢰국이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약 13년간 존속하였다. 만주국은 중국과 퉁구스 제민족 역사상 (명목상) 마지막 군주국이라고 볼 수 있다. 또 1934년 국호를 대만주제국으로 고치고 제국을 선포하였기에 마지막 제국으로도 볼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이 만주국 시기를 앞에 '괴뢰'라는 뜻의 '거짓 위(伪, 僞)' 자를 붙여 위만주국(伪满洲国), 줄여서 위만(伪满)이라고 부르거나, 중국 동북 지방이 함락[8]되었다는 뜻의 동북윤함구(东北沦陷区), 동북윤함시기(东北沦陷时期)라고 부른다.

2. 연혁

2.1. 배경

일본 제국은 러일전쟁으로 뤼순다롄을 점령했고, 포츠머스 조약 체결(1905년 9월 5일)을 통하여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이 지역의 조차권을 넘겨 받았다. 이 지역 이름을 관동주[9]라고 정하고 관동총독부를 신설(1905년 10월 17일)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만주국의 모태가 된다.

'관동총독부'는 이듬해 9월 1일 폐지되어 '관동도독부'가 되었지만 '총독'이 '도독'으로 바뀐 것이 전부이다. 이후 1919년 4월 다시 관동청으로 변경된다.

2.2. 만주철도회사와 관동군

만주국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만주철도회사(이하 만철)과 관동군이다. 만철은 1906년 11월 26일에 설립되어 1907년 4월을 기해 남만주철도를 관동도독부에서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를 경비하기 위해 새로 창설된 6개 독립수비대대가 관동군의 전신이다.

만철은 이름과 달리 일개 철도회사가 아닌 그 이상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만주 버전에 가까웠다. 실제 업무 범위는 철도 경영 외에도 광업, 해운, 항만, 부두, 발전, 숙박, 창고업, 제철, 조사 활동에 이르며, 출자 회사, 조성 회사, 지방 시설, 교육시설까지 포함한 식민지 경영을 위한 일본의 실질적인 국책 회사이다.

이 때문에 만철 성립 당시부터 초대 만철 총재 고토 신페이 입에서 "만주는 영사, 만철, 도독부의 이른바 3두 정치가 될 가능성이 있어 통일이 결여될 것이고, 여기에 육군과 해군까지 가세하면 5두 정치가 될 우려가 있다."라는 말이 나왔다.[10] 그리고 그러한 우려 때문에 "만철 총재는 관동도독 밑에 있어야 하겠지만, 동시에 도독부 고문으로서 외무대신의 감독 아래 도독부의 행정 일체에 참여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여 적극적으로 만주 경영 및 행정에 개입하게 되었다.

실질적인 만주 경영 외에 만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조사부를 통해 관동군의 브레인 기능을 한 것이다. 만주 경영 초기에 만철은 '동아경제조사국'을 설치하여 25년간 중일관계와 동아시아 전반, 나아가 세계 경제 전반의 동향 조사 및 연구를 맡았다. 이 자료들은 이후 만주국 성립에 없어서 안될 중요한 자료가 되었고,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이 성립되면서 관동군의 정책 입안 부대 구실을 하며 '경제조사회'에 흡수 되었고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조사 범위는 유럽까지 확대, '대조사부'로 확대되었다. 조사부는 인원이 2천명에 달하는 방대한 조직이었으며, 예산 규모가 대폭 확대되면서 파격적인 대우에 매혹된 제국대학 출신 수재들이 몰려들었다. 사실상 일본제국을 대신하여 현대의 정보기관씽크탱크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11]

관동군은 1919년 관동도독부가 폐지되고 관동청이 설치되면서 관동주 방위와 만철선 보호임무를 목적으로 하는 독립된 재만 군사기관으로 발족되었다. 철도 수비뿐만 아니라 일본의 만주 권익 보호, 대소 전략 수행의 주체로서 임무를 점차 담당해 나갔던 것이다. 이 병력은 만주사변 전에는 2년 단위로 교체 파견되는 주차사관과 6개 대대의 수비대대를 합쳐 약 1만 400명에 지나지 않았다.

2.3. 만주 사변 발발

1927년 일본군국민당의 1차 북벌로부터 일본 거류민과 권익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1차 산동파병을 단행했다가 외교적인 문제로 철수했지만,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진행되던 와중인 1928년에 2차 산동출병을 단행,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을 습격하면서 제남 사건을 일으켰다. 제남 사건 자체는 흐지부지하게 끝났으나 일본은 만몽분리정책을 추구하면서 만주와 몽골을 중국으로부터 분리하여 일본의 권익 영역으로 삼으려 했다. 고모토 다이사쿠 등 강경파는 만주로 퇴각하던 중화민국 육해공 대원수 장쭤린암살하는 등 극단적 수단까지 서슴지 않았으나 봉천군벌의 수장 장쉐량동북역치를 선택하면서 날아갔고 만몽분리정책을 추진하던 다나카 기이치 수상도 황고둔 사건을 처리하다가 덴노의 분노를 사서 날아갔다.

하지만 관동군의 일부 과격파 장교들은 여전히 이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과격파 장교들은 내부적인 문제로 당면한 경제 위기와 국내의 사회 혼란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 바로 대외적 모험 정책을 통해 그 출구를 찾게 되었다. 이 때 대공황으로 도탄에 빠진 농민들에게 육군이 추진하고 있던 '국방사상 보급 운동'을 통해 만몽의 기름진 평야를 보라며 "국내에서 눈을 외부로 돌려야 한다", "남의 것을 탐내는 것을 칭찬할 수는 없지만, 사느냐 죽느냐 하는 마당에 그 만몽의 기름진 평야를 좀 달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고 선동하였으며, 국가적으로는 일본 농민 50만명쯤 만주로 이주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1930년 말에는 만주 재류 일본인의 수가 22만 8700명에 달해 해외에 거주하는 최대 일본인 집단이 되어 사실상 일본 내지의 과잉인구를 배출하는 배출구 구실을 하였고, 그들은 이미 만주의 절대 권력을 장악한 상태였다.

일본의 만주 점령 계획은 어디까지나 소련에 대한 일본군의 전반적인 작전 계획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 중 하나일 뿐이였다. 이를 위해 관동군 작전주임 참모 이시와라 간지가 고급참모 이다가키 세이시로와 결탁, 이미 침략 준비를 완료해 놓았다.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의 음모로 류탸오후 사건이 일어났는데 육군 중앙부에 통보된 것은 18일 심야의 일이었고, 시데하라 기주로 외상은 19일 아침 식사를 하며 신문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건의 발생을 알았다. 관동군은 사건 발생 18시간 만에 봉천(심양), 안동, 장춘, 우장 등 남만주철도 지대의 중요 지점을 모조리 석권해 버렸다. 또한 관동군의 지원 요청을 받은 하야시 센주로조선 주둔 일본군은 국경을 넘지 말라는 중앙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21일 만주로 진입하였다. 일본 정부는 초기에는 사변 불확대와 국지 해결 방침안을 결의하였다가 사건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지경으로 진행되어버려 어쩔 수 없이 추후 승인하는 형태로 관동군에게 질질 끌려다녔다. 당시 정부가 군에 대한 견제력을 잃은 것이며, 군 중앙에서도 관동군을 통제하지 못했다. 자세한 것은 만주사변 문서 참조.

2.4. 수립

1932년 1월 28일 상하이에서 일본인 승려들이 습격을 받는 마옥산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열국의 관심을 만주에서 떼어내 상하이로 옮겨놓고, 그 사이에 하얼빈 점령이나 만주국 건국을 촉진하려는 계략이었다. 관동군의 의뢰를 받은 상해주재 무관 보좌관 다나카 소령에게 매수 당한 중국인들이 범인이었다.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고 각국의 시선이 세계적인 경제 대도시인 상하이에 집중된 사이에 만주국 설립에 착수했다.

관동군은 정부와 군 중앙의 견제를 뿌리치고 만주 각처에서 건국 운동을 벌이도록 선동했으며어차피 막장인 건 비슷했다, 그 연장선에서 관동군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부의 랴오닝성(遼寧省), 지린성(吉林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을 장악한 뒤, 1932년 3월 1일 만주국 성립을 선언하면서 청나라가 망하고 폐위된 황제 선통제를 집정(執政)이란 이름으로 국가원수 자리에 앉히고, 수도는 신징(新京)[12], 연호를 대동(大同)이라 하였다. 지금도 창춘에 당시 만주국 황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신흥 만주국은 일본 이하 17개국에 대해 승인을 요구하는 대외통고를 발했다. 그러자 열국은 단지 통고를 받았다는 회답을 했을 뿐즉, 영수증 발행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마저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일본 정부가 정식으로 만주국을 승인한 것은 1932년 9월 15일이었지만 이에 이르기 위해서는 5.15 사건에 따른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의 암살이라는 불상사를 거쳐야만 했다.

일본은 같은 해 9월 일만의정서(日滿議政書)에 조인하고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였으며, 이어서 엘살바도르, 바이마르 공화국, 이탈리아 왕국, 바티칸 시국, 불가리아 왕국, 스페인, 헝가리 왕국, 폴란드 등의 일부 나라가 승인하였다. 당연히 국제 연맹의 승인은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곧 만주국(그리고 배후의 관동군)은 1933년 열하사변을 일으켜 열하성마저 병탄했다.

나라별 반응은 다음과 같다.
  • 미국: '우리는 중국인을 동정하지만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줄 수는 없다. 아시아 문제는 아시아인이 해결해야 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자위를 위해 전쟁한다는 일본군의 명분과 달리, 일본군이 만주를 넘어서 진저우를 비롯한 중화민국 화북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미국은 상당히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서 스팀슨 선언을 발표하고 일본의 행동을 비판하며 만주국 불승인 정책을 고수했다.
  • 중화민국: 굉장한 충격을 받았고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제3차 초공작전1차 양광사변이 중지되었으며 왕징웨이나, 후한민 같은 반장파들이나 반란 중이던 광시 파벌들도 잠시 총을 내려놓고 초계파적인 협력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는 없었다. 이미 군사적 지원은 장쉐량이 거부했던 시점에서 물건너간 상황이고 섣불리 일본에 맞섰다간 전면전으로 번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소용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국제연맹에 제소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여겼다. 이후로도 만주국을 인정하진 않아 러허 사변 이후 일본이 산해관을 점령하며 내려오자 휴전을 위해 1933년 5월 31일 관동군 대표 오카무라 야스지 소장과 중국군 대표 웅빈 사이에 당고에서 성립된 이른바 당고정전협정으로 사실상 만주국을 인정하게 되었다[13]. 하지만 암묵적으로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국가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천지 차이이기 때문에[14] 일본은 중국의 만주국 승인을 여러 차례 요구했고 중일전쟁 초기의 협상에서 일본이 내건 조건도 장제스의 만주국 승인이었다. 이후 중국의 방침은 힘을 길러서 빠르면 1939년, 늦으면 1943년 쯤에 무력으로 만주를 되찾자는 것이었다.
  • 중국 공산당: 당시 중국 공산당의 세력은 확대일로이긴 했으니 국민당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게다가 중국공산당이 수립한 해방구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양자강 유역의 내륙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국민당에 포위된 상태였으므로, 일본군 및 만주국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이에 따라 장제스와 국민당이 조국을 침략해오는 일본군하고는 안싸우고 오히려 내전만 격화시키고 있다면서, 자신들과 함께 항일전쟁에 나서자는 선전공작을 강화하였다. 국민당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던 홍군은 장제스가 3차초공작전 중지를 결정하자, 대외적으로 이것을 홍군의 위대한 승리라고 언플 선전하면서 전력을 보강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 어찌하던 국민당군의 공격을 버텨낸 홍군은 자신감에 차올랐으며, 병력과 물자를 보충해서 전력을 끌어올린다.
  • 소련: 만주사변을 미일 항쟁의 개막으로 보아, 당분간은 시베리아에서 육군력을 증강하기 위해 일대 국가와 화평 상태 유지만을 생각했다.
  • 영국: 영국의 이권이 화중, 특히 양자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하이 쪽에만 관심이 있었다. 상하이 사변 이후에야 미국과 함께 움직이려고 하였지만 미국 스팀슨 국무장관의 강력한 공동 행동 제안은 거절하였다. 오히려 한다는 말이 일본과 같은 활동적 나라의 발전을 미개한 중국을 위해 방해하는 것이 어떻게 맞겠냐며 일본의 만주 침탈을 지지하다시피 했다.
  • 프랑스: 영국과 함께 1932년 국제연맹 총회에서 일본의 만주 점령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할 때 같이 찬성하였다. 끝.

만주국의 국토는 앞서 말한 동북 3성과 러허성에 이르렀으며, 인구는 3천만 명이 되었다. 1934년 3월 제정을 선포하고, 집정 푸이(선통제)가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하면서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고쳤다.

한편 일제는 내몽골에 역시 괴뢰정권인 "몽강자치연합정부"를 세웠다.

1908년 만주의 인구는 1583만 명이었지만, 만주국 건국 이전인 1931년에는 각지의 피난민과 이주민들이 들어오면서 4300만 명이 되어 있었다. 1941년 인구는 5천만 명으로 증가했다.

실상 일본은 만주와 몽골 지역을 일거에 점령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동북 4성과 몽골을 영역으로 하고 푸이를 우두머리로 내세운, 일본 군부가 제조한 중국인 정권이 바로 만주국이었다. 따라서 이후 군부가 만주의 실권을 장악하는 상황으로 이어짐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만주국이란 관동군이 세운 그야말로 완벽한 일본의 괴뢰국이었다.

3. 교통

남만주철도 참조

4. 실상

부의는 자신에게 주어진 지위가 청나라 황제가 아니라는 데 격분했지만, 결국 관동군 고급참모 이다가키의 위협에 굴복하여 집정으로 만족하여 이다가키가 준비한 문서에 조인했다. 이것이 바로 1932년 3월 10일부로 부의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에게 전한 서간이다.
  1. 폐국(弊國)은 금후 국방 및 치안 유지를 귀국에 위탁하고 그 소요 경비를 모두 만주국이 부담한다.
  2. 폐국은 귀국 군대가 국방상 필요로 하는 한, 기설(旣設) 철도, 항만, 수로, 항공로 등의 관리 및 신로 부설을 모두 귀국 또는 귀국이 지정하는 기관에 위탁함을 승인한다.
  3. 폐국은 귀국 군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각종 시설에 관해 극력 이를 원조한다.
  4. 귀국인으로서 달식명망(達識名望) 있는 자를 폐국 참의로 임명하고 기타 중앙 및 지방 관공서에 귀국인을 임명하되, 그 선임은 귀국 사령관의 추천에 따르고 해직은 동 사령관의 동의를 요건으로 한다.
  5. 상기 각항의 취지 및 규정은 장래 양국 사이의 정식으로 체결할 조약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러고 나서도 만주국을 국가로 인정하는 건 전세계에서 몇나라 뿐이었다. 명실상부한 괴뢰국이였다.

2년이 지나 1934년 명분상 부의를 집정에서 황제로 높여주고 연호를 강덕이라 칭했다. 하지만 막상 부의가 청나라 황제의 용포를 입고 즉위식을 거행하려 했자 일본인 비서 요시오카 야스나오가 거절하여, 즉위식 때는 일본 육군 원수의 대례복을 입고 거행했다. 그만큼 전 왕조의 의복 자체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만주국은 일본인, 한국인[15], 만주족, 몽골인, 한족, 회족[16]의 오족협화와 왕도낙토를 표방하였고 만주국에 사는 사람들을 뭉뚱그려 "만주인", 그리고 만주에서 쓰이는 중국어를 "만주어"라고 불렀다.

하지만 정치적 실권은 일본인 관동군사령관이 쥐었고, 황제 푸이를 비롯한 총리 및 각부 대신들은 장식품에 불과했다. 한 예로 전체 인구의 1.9%에 불과한 일본인이 고위 관료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였다.[17] 특히 관동군과 상의하여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총무처[18]와 약 10만에 육박하는 만주국 경찰[19]의 고위층은 대부분 일본인이 차지하였다. 그것도 모자라서 일본인 출신 만주국 차관이 만주족 출신의 장관보다 받는 급여 또한 2~3할 이상이나 높았을 정도를 본다면 대놓고 사기 치는 행위도 마다치 않았다. --어느 날은 황제가 직접 이 사실을 알고 혼조 시게루 사령관에게 항의하러 간 적이 있다 카더라 하지만...

경제 면에서도 일본 회사인 남만주철도, 소위 만철(滿鐵)이 전 철도는 물론이고 사회 인프라 상당 부분을 장악했고, 이외에도 미츠비시, 스미토모, 닛산 등의 재벌들이 진출하여 만주국의 경제권을 독점하였다. 그렇지만 조선과 다르게, 총독부나 일본 관청이 없어 간접적 지배는 표방할 수 있었지만 직접 통치는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화폐는 만주중앙은행에서 발행하는 만주 위안을 사용하였는데 지폐의 인쇄는 일본 내각 인쇄국에서 했고, 나중에는 조선 은행권처럼 일본의 전비 충당에 이용되었다.

1937년 12월에는 일본 치외법권을 폐지하고 만철 부속지의 행정권을 이양했지만 실상은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만주국 정부가 일본인의 각종 자유를 보증하고 일본인의 교육, 병무 등에 관한 사항은 일본 정부가 처리한다는 비밀협정을 일본과 맺었기 때문이었다. 바뀐 게 없다.

특히 만주국에는 국적법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는데, 일본인들이 만주국 국적 따위를 취득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0] 이 외에도 여러 민족들과 다양한 출신의 난립으로 인해 '만주국 사람'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계속 난항을 겪었다. 입법 시도도 여러 번 있었지만 모두 무위로 돌아갔고, 결국 만주국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만주국은 국적 요건을 규정하지 못하였다. 국민을 규정하지 못하니 당연히 국민이 선거를 치뤄서 성립하는 의회(국회)가 있을 리 없었고[21] 의회가 없으니 당연히 헌법도 없어서 정부조직법이 헌법 노릇을 할 지경이었다. 이와 같이 만주국이라는 체계는 껍데기일 뿐이고, 사실상 관동군이 통치하는 땅이었다. 다만 관동군 부대가 주둔할 때 만주국 정부에 주둔 비용을 지불하였다.

만주국 내에서도 오족협화는 일본인이 주인이 되고 한국인, 만주인, 몽골인, 중국인, 후이족을 하인으로 부리는 정도 이미지였다고 한다. 학교에서 급식을 줄 때에도 일본인 다음으로 한국인, 그 다음은 중국인 순서로 메뉴가 달랐다고 한다. 이는 군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만주군관학교의 경우, 일본인인 일계(日系) 후보생과 한국, 몽골, 중국인인 만계(滿系) 후보생에게 차등적인 급식을 내놓았다. 일계 후보생은 쌀밥, 만계 후보생은 수수/기장밥. 이를 두고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등 구 봉천군벌계의 항의에 일본이 내놓은 차등 급식의 이유가 걸작인데, 일본인은 쌀만 먹어왔기 때문에 거친 잡곡을 소화하기 힘들어서. 만주군에 복무한 이들의 증언에 나오는, 자대에 배치받자마자 국민당군 부대로 탈영해버린 중국인 장교와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의 군사분맹에서 활약한 한국인 장교의 비화가 괜한 것이 아니다. 후자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박승환.[22] 다만 만계 후보생들의 항의에 결국 일계 후보생과 같은 급식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간 만주국 출신 일본인 학생들이 본토에서 인력거를 끄는 본토의 일본인을 보며 '일본인이 이런 천한일을 하다니!' 하고 충격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거기다 일본 내에서는 만주국 경내를 관광버스로 돌면서 노천 시장의 '더럽고 비참한 만주인'들을 구경하는 코스가 큰 인기를 끌었다.

다만,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이주한 한국인의 일부는 일본제국의 2등 신민이란 지위를 십분 활용했다는 점이다. 당대 통념상 1등은 두말 할 것 없이 일본인, 2등은 국적상 일본인인 한국인, 그 다음이 만주인(만주족+몽골인+한족). 민족상 일본인도, 만주인도 아닌 점을 악용해 관동군과 만주군 부대의 브로커 혹은 밀수업자, 포주 노릇에 종사한 한국인도 상당하다. 오죽하면 당대 중국인들이 일본인을 '첫 번째 나쁜 놈(一鬼子)'[23], 한국인을 '두 번째 나쁜 놈(二鬼子)'이라고 했을까. 맨주먹으로 만주에 정착한 빈농들만 있던 것은 아니다.

한중 수교 이후 만주 일대의 조선족들을 취재한 소설가 조정래는 조선족들이 1945년 8월 15일을 '해방'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 때 난리라고 호칭함을 증언한 바 있다. 당시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저술한 소설 아리랑은 일본이 항복하자 한국인 마을부터 습격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훗날 중국 공산당이 만주 일대에 우세를 점하자 공산군에 조선족이 적극 가담하여 국민당군과 싸운 것도, 이런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의도가 없지 않다.

특히 제국주의 일본의 군 우월주의 분위기에 따라, 군인을 지망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지원하기도 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왜 안 갔느냐는 질문이 가능한데, 안 간 게 아니라 못 간 거다. 일본육군사관학교는 일본에서도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해군은 아예 일본 외지인을 받아주지도 않았다.[24] 한국인은 왕공족 내지 조선귀족 작위가 있을 정도의 고위층이거나, 정말정말정말 엘리트거나 한 극소수만 가능했다. 한동안 한국인의 입교를 받아주지 않기도 했고... 일본군 장교로 알려진 박정희도 엄밀히 말해 만주군 장교였다.[25]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 뒤, 성적우수자 자격으로 일본 육사에 지금의 학사 편입 비슷하게 입교한 것.[26] 만주군 출신자 따위를 일본군에 복무시키지 않았다. 이후 졸업과 동시에 현역임관이 아닌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만주군에 복귀시켰다.

의외겠지만 만주가 아닌 일본 본토에 거주하는 일본인이면서,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 인원도 상당하다. 점수가 아슬아슬하게 모자라거나 유력자제들 혹은 전사상자 유족들에게 치여 육사 입시에 떨어진 경우, 일본군은 아니긴 해도 어쨌든 군대에 장교로 갈 수 있으니 만주로 가라는 제안에 울며 겨자먹기로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그 관동군 규모에 비해서 군인으로서의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는 1.5 내지는 2군 취급이었던 셈.

4.1. 만주는 한일 농민에게 기회의 땅이였을까?

대공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일본은 만주의 풍부한 자원과 토지를 이용해 위기를 탈출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쇼와의 요괴라 불리게 될 기시 노부스케[27]를 선두로 일본 상공관료들이 그대로 만주국의 경제관료가 되었다.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 중앙의 관료가 주도하는 조직적인 공업건설, 도로와 철도 개통을 이루었다. 또한 많은 일본 농민을 만주로 이주시켜서 농지를 개척하였다. 계획상 100만호 500만명을 이주시켜 20년후 동북 예상 인구 5천만명의 1/10을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국토 개발이 한창인 신생 국가라는 이미지와 풍부한 천연자원 탓에 당시에는 많은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만주국으로 건너가 일확천금과 출세를 노리곤 했다.[28] 기록에 따르면 만주국으로 건너간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수가 많은 68만여 명에 달했다. 이른바 동양의 서부. 이 이미지를 확장한게 만주 웨스턴이다. 예를 들자면 놈놈놈.

하지만 실제론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의 대다수는 조선 내 처지와 별 다를 바 없었다. 만주국 관료들 중 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중국인들보다 훨씬 적었다. 이 시대를 다루는 경향 문학[29]을 보면 조선 내에서보다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만주로 이주했건만 현지 지주들에게 착취당하는 조선인 소작농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만주는 빈 땅이 아니다. 1930년 인구가 무려 2957만 5천 명에 달했다. 즉 바글바글 했다는 얘기.[30] 우리 조상님들이 만주에 가도 제발 농사 지어 달라며 놀던 땅은 없었다는 것이다.[31] 만주국은 총 인구중 89.9% 농사를 짓는 농업국으로 일본 총농가 호수의 46%에 달했다.

경지면적은 철령 이남 지방은 농가의 경지가 1~3정보인 경우가 많았고, 1정보(대략 1헥타르) 이하가 그 다음이며 6정보 이상은 매우 적다. 이북 지방으로 갈수록 0.7정보 이하이거나 아예 경지가 없는 농가가 많고 1~3정보 농가가 그 다음이다.

단위 생산량이 세계최강인 일본에서야 1~3정보면 중견 이상 자작농이지만, 논농사가 안 되어 밭농사만 짓는 만주 지방에서는 영세농이다.[32] 물론 수십~수백 정보의 대농경영이 있었는데 이들은 극영세농이거나 경지가 아예 없는 농민들을 고용하여 경작 하였다. 즉 소작농과 병행하여 고용농층이 존재하였다. 북부로 갈수록 대농가와 고용농 체제이고 중부는 중간이며 남부에는 영세농이 많은 편이다. 소작료는 무려 65%에 달해 살인적이었다.[33]

가뜩이나 미어터지는 만주의 농업상황을 악화시키는건 일본의 농업이민이었다. 일본에서는 마을이나 군을 단위로 모집되어 이민단을 조직하는데, 그 편성은 규모에 따라 집단이민단(200~300호), 집합이민단(30~100호), 그 이하의 이민은 분산이민이라고 하였다. 1945년 5월까지 송출된 일본인 이민은 32만 1,873명이며 계획 중 패전을 맞이한 사람과 중도 퇴단자를 빼고, 대강 27만 명이라고 한다. 이민자들을 위해 이민용지 취득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회사 만주척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회사 이름 같다. 또한 일본인 이민을 충당하기 위해 조선인 이민도 장려 되었다.

일본 정부와 만주척식회사는 이러한 집단 이민을 위해 매수나 침략 등의 방법으로 1067만 9247헥타르를 위득한다. 그 중 19%인 203만 8331 헥타르가 기경지였다. 일본 총 경지면적 607만 9천 헥타르의 1/3에 달한다. 집단 이주한 일본인에게는 1호당 10~20정보씩 경지가 배분되었다. 이민한 농민들은 일본 평균 1.6정보를 경작하는 자작농이 아닌 0.5정보 이하의 농지를 갖고 있던 영세농들이였다. 어느날 갑자기 10~20정보씩 주면 농지를 경영할 수가 없었다. 결국 중국인과 조선인들에게 소작을 줄 수 밖에 없었다.[34] 다시 말해서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소작농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소작이라는 것이 조선시대의 소작이 아니었다. 인근에 살던 현지 중국인(한족) 및 현지 원주민(만주족 등), 조선인을 강제로 끌고와서 시키는 일종의 노예노동이였다. 만주족 한족 소녀를 성노리개로 끌고 가던가 노동력 제공에 응하지 않은 가까운 중국인 부락민을 죽이거나 말이 필요하다고 말 소유주를 참살하는 일도 있었다. 말주인을 죽인 이민단원 다카하시(당시 25세)는 “만주에서는 어떠한 일을 해도 상관 없다”라고 생각하였는데 일본인 이민단원의 정서를 조금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행태 때문에 만주국 패망 이후 일본인 이민단은 민중의 공격을 받았다. 관계가 좋던 일본인들도 폭행까지는 안 당해도 더 이상 중국인 땅을 강제로 취한 채 중국인에게 강제 노동을 시킬 수는 없었다. 결국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일본 농민을 비롯한 히키아게샤들은 죄다 본토로 귀환하였다. 조선족 마을 역시 공격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본인에 비해 사이가 좋은 편이어서 수십만 명이 남게 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5. 멸망

1945년 8월 9일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동시에 실시된 만주 작전으로 관동군은 일거에 괴멸해버렸다. 이미 관동군의 정예는 남방전선으로 빠져나간 속 빈 강정이었다. 소련군의 진격으로 혼란에 빠진 뒤, 그대로 푸이가 체포되고 만주국도 무너졌다. 개전 7일만의 멸망. 그리고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지 2일후인 8월 17일에 국무총리대신인 장징후이가 주재한 중신회의는 임시수도인 퉁화에서 만주국의 해체를 결정하였다. 이후 만주 지역에는 소련군의 군정이 실시되다가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 인계받았고, 다시 국공내전을 거쳐 1949년에 최종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편입되었다.[35]

만주국 함락과 함께 거주 일본인들은 먼저 냅다 튀어버린 관동군에게 버림받고 소련군과 현지 원주민들의 무차별 공격과 약탈, 강간으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포화 속에서 살아남아 천신만고 끝에 귀국해서도 멸시와 고초를 겪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탓인지 만주국 태생 일본인들 중에는 공산당이나 좌파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 곳 출신 유명인으로는 성우 고 토미야마 케이, '내일의 죠'로 유명한 만화가 치바 테츠야[36], '천재 바카본' 시리즈의 만화가 아카츠카 후지오, 공포 만화로 유명한 히노 히데시,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 전자전대 덴지맨의 주제가를 부른 애니송 가수 나리타 켄, 성우 후지타 토시코[37] 등이 있다.
이렇게 해외에 체류하다가 식민지가 독립하면서 일본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히키아게샤라고 한다.

만주국 정부의 최후는 한 나라의 멸망치고는 다소 흥미롭다. 소련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하자 황제 푸이도 피난길에 올랐는데, 피난길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8월 18일 압록강 유역의 다리쯔(大栗子)에서 간단한 회의를 소집해서 만주국 정부를 공식적으로 해산했다. 만주국을 억지로라도 청나라의 후신이라고 볼 경우 국조가 창건한 나라를 후손이 공식적으로 해체한 몇 안 되는 경우이다. 당장 한중일 역사에도 후손이 다른 나라에게 선양하고 잘 사는 경우까지는 있었지만, 후손이 선양이 아닌 해산 선언을 한 것은 만주국의 사례가 유일하다.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깨버린 후백제견훤 같은 사례도 있지만.

6. 통치기구

만주국 정부는 국가원수로서 집정(執政, 후에 황제), 자문 기관으로서 참의부(参議府), 행정 기관으로서 국무원(国務院), 사법 기관으로서 법원(法院), 입법 기관으로서 입법원(立法院), 감찰 기관으로서 감찰원(監察院)을 두었다. 국무원에는 총무청(総務廳)이 설치되어 관제상으로 국무원 총리의 보좌 기관이었지만 실상은 일본인 관리의한 만주국 행정의 실질적인 핵심으로서 기능했다(총무청 중심주의). 그에 대한 국무원 회의의 의결이나 참의부의 자문은 형식적인 것에 머물렀고 입법원은 정식으로 개설조차 되지 않았다.
만주국의 모든 권력은 관동군에서 나왔다. 구체적으로는 관동군 제 3과와 제 4과로 불리는 곳이 정무 지도등 거의 모든 지시를 내렸다. 종래에는 관동군, 관동청, 영사관, 만철이 4두정치라고 불릴 정도로 파벌 대립이 심각 했다. 이에 32년 8월 8일 무토 노부요시 대장이 관동군 사령관, 관동장관,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삼위일체 지배권이 확립 되었고, 만철 총재도 실질적으로 관동군 지휘아래 들게 되었다.

일단 국제사회와 만주 주민들을 속이기 위해 뻥카로 내세우는 통치 체제는 다음과 같다.

만주국은 정부조직법(1932년 3월 공포)에 따르면 군주가 아닌 집정이 통치하고 의외로 입법 행정 사법 3권 분립이 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은 법률과 예산안을 의결하는 입법원은 만주가 멸망할 때 까지 결국 설치 되지 않았다. 그말인 즉슨 만주에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집정의 자문기구인 참의부가 있었고 법률 대신에 칙령이 있었다. 물론 무슨 칙령을 만들고, 고치고, 없앨건지 결정하는 것은 일본인 관리들의 손에 달렸다. 덕분에 내몽골처럼 순진하게도 중앙정부에 "의회가 생긴다는데 대표 선출이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웃지 못할 사례도 있었다.

또한 만주국에는 합법적인 정당이 없었고, 정치 조직인 만주국 협화회가 사실상 일당제를 실시했다.

국무원은 집정의 명령을 받아 행정권을 행한다. 국무원에는 민정·외교·군정·재정·실업·교통·사법의 행정 각부와 국부총리, 각부 총장을 둔다.

법원은 민사 형사의 소송을 심판한다. 이외 기밀·인사·주계·수용에 관한 사항은 국무총리가 각부로부터 분리해서 직접 관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위해 국무원에 총무청이 설치되어, 이것을 총무장관이 맡아 처리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총무장관이라는 것이 국무원의 요체로서 반드시 일본인이 임명되었으며, 각부 장관은 바지사장 중국인이였지만 각부 차장, 부서별 총무사장 이하 일본인 관리를 감독하는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각 일본인 관리는 관동군사령관에게 임명권이 있었으니 집정(푸이)→총리(정샤오쉬, 장징후이)→각부 장관(민정 짱스이, 군정 마잔산, 재정 아이신기오로 시치아)공식라인은 허울뿐이였다. 실제로 군벌출신 각부 장관은 성장을 겸임하기 때문에 국무원 건물로 업무를 보러 오지도 않았다. 결국 실제로는 관동청 3·4과→총무장관→각부 차장 혹은 총무사장라 실질적인 행정 라인이였다.

또한 중국계 장관들은 고의적으로 배제 시키고 총무장관이 주재하는 일본인 고급관리회의에서 모든 것을 결정 하였다. 그 대부분은 만철 직원 또는 식민지의 관리 출신이었다.

지방 조직으로는 각 성에 성공서가 있고, 성장 아래에 총무·민정·경무·실업·교육 등의 각 청을 두었다. 성급에서도 성장만 중국인이였고[38] 청장등 중요한 자리는 일본인이 차지 했다.

동북4성이라는게 사실 어마어마하게 크기 때문에 1934년 12월 펑톈·안동·금주·리허·지린·간도·빈강·용강·삼강·흑하로 쪼개고 내몽골 동부에 흥안 동·남·북 성을 만드는 등 총 14개로 쪼개어 중앙집권화와 치안유지의 용이성을 추구하였다. 면적이 넓기도 했지만 동시에 군벌 출신 성장들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의도도 있었다.

성 아래는 시, 현이 있고, 몽골인이 사는 서부 지방에는 현에 준하는 기가 설치되었다. 현에는 자치지도원이 파견되었다. 7월 자정국 폐지 후, 현·기제가 공포되어, 지도원은 현(기)참사관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참사관에게는 현정의 중요한 정무에 참여한다는 직능이 주어졌다.

만주국 성립 직후부터 치안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일단 만주국 건국 주체의 한 사람으로 군정부 총장(장관)까지 했던 마점산이 헤이룽장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외에도 구 군벌군, 중국공산당 계열 유격대(동북항일연군), 국민당 계열 부대, 유망민 농민 집단, 대도회·홍창회 같은 정통적인 민중의 비밀결사, 간도지방의 조선인 집단 등 총수가 무려 32만에 달한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인적자원은 치안대책을 위해 투입하였고 치안관계비가(군, 경찰등) 매해 세출의 35% 전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구군벌에서 받아들인 10만명으로 만주군을 만들었다. 만주군의 1차 임무는 만주국에 저항하는 항일 부대의 소탕과 같은 치안 유지였다. 관동군과 헷갈릴 수 있지만 일본군의 군사령부급 단위중 하나인 관동군은 대소전을 대비한 부대이고, 만주군은 만주국 관내의 중국인, 조선인들로 만주국내 치안유지를 주 목적으로 한다.

만주국 경찰은 비행기와 하천용 군함까지 보유하여 최대 10만명에 일는 무장병력을 거느린 또하나의 군대였으며 각종 행정까지[39] 관장하는 막강한 조직이었다. 지역마다 구성된 무장 자위단과 소속 단원수는 1935년에 241개, 7,146명이였으나 1936년에는 319개 1만 8,131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경찰행정은 민정부 경무사가, 성에서는 경무청이 담당했으며 조직상은 민정부 총장(장관)과 각 성장, 현장에게 보고해야 하나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고 어느 경우에도 일본 예비역 헌병 출신자가 지도하였다. 경찰관, 특히 고위 간부급에는 많은 일본인이 채용되었다. 현급의 지도자인 일본인 참사관이 현경찰대를 지휘하여 반만항일군과 교전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여기에 간도 협조회 특별공작반, 간도특설대, 선무반, 신선대, 자위단 같은 각종 특무조직이 있어 항일 독립군 토벌작전에 활용 되었다.

6.1. 보갑제와 집단부락

보갑제란 중국의 전통적인 가구를 묶는 조직으로 이걸 일본이 만주국과 대만에 채용하였다. 1933년 12월에 공포된 잠행보갑법에 따라 10호마다 패(牌)를 조직하고, 패를 모와서 촌내 갑(甲)을 만들어, 그위에 경찰서 관내의 갑을 모아서 보(保)를 삼는다. 이에 경찰서장 - 보장 - 갑장 - 패장 - 각호라는 지휘감독 계통이 만들어 진다. 형법의 내란·외환·공공위험죄나 징치반도법·동도비법 등을 위반하는 자가 패 안에서 나올 때 각호의 가장에게 연좌제로 벌금이 부과된다. 또한 보·갑은 경찰서장의 지휘감독 아래 자위단을 조직한다.

1934년 12월 창설 당시 983개 경찰서 아래 1267보, 2만 2403갑, 31만 4306패가 있었고 565만호가 조직되었다고 한다. 최초에는 치안조직이였지만 점점 행정조직화 된다. 1937년 12월의 시·가·촌제 공포 후는 보갑제가 가촌제로 개편된다.

또한 항일 운동세력들에게 식량, 의복, 인적 자원의 공급처가 될 수 있는 산간 마을을 패쇄하고, 새로 건설된 집단 부락은 일제의 치안 숙정이 강화되면서 주로 간도·지린성 등 동부 산악지대에 이루어졌다. 집단 부락 규모는 대체로 100호~200호 정도로 정방형으로 건설 됐다. 100호를 수용하는 표준 집단부락의 경우, 부지는 가로, 세로 각 100간(182미터), 면접 1만평에, 주위 사방에는 2.5m의 높은 담을 쌓고 네 모퉁이에 포대를 설치했다. 또한 담 위로는 가시철조망이나 전기철조망이 부설 됐으며, 담 바깥으로는 폭 3미터, 깊이 2미터의 호까지 만든 하나의 요새였다.

주민에게는 양민증이 발부 됐고 양민증이 없으면 반일분자 또는 통비분자 혐의로 바로 체포됐다. 부락 바깥으로 나가는 대문은 하나로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됐고 저녁부터 아침까지는 아예 문을 닫아야 했다. 만주에서 산다는 것은 하루 하루가 전투였다.

이들이 집단부락으로 모이고 난 후 빈자리인 산간부에서는 거주나 경작은 금지 되었고, 무주지대로 하거나 일본인 이민을 거기에 입식시키는 방법이 취해졌다. 반대로 집단부락의 경우 좁은 지역에 인구가 몰리고 농지가 턱없이 부족하게 되었지만 어차피 일본측은 그딴거야 알바 아니였다.

집단부락은 1935년도 1172개, 1936년도 3361개, 1937년 4922개로 해마다 늘어나 건설이 완료되어 가는 1939년도 말에는 무려 1만 3451개소에 달했다.

효과는 뛰어나 민중과 항일 독립군의 연락을 끊는 데 현저한 효과가 있었다.

7. 만주국 독립국설

뉴라이트나 일부 극우적 사람들이 만주국은 독립국이었다는 논리도 편다. 한국에서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중에서 유명한 건 5.18의 이덕일이라는 평가까지 받는 유사역사학김대령이 있다. 그가 주장하길 만주국 괴뢰설은 좌파사관이라 한다. 만주국은 독립국이며 그 주권이 만주족조선족에 있으니 간도가 한국땅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거기다 역사학적 판단은 보다 객관적인 준거에 근거하니 만주국은 괴뢰국이라 할 수 없다는 망언까지 하였다. 유사역사학적 판단이라면 맞는 말이다. 관동군의 국가였으니 독립국 맞는듯

실제로는 국제적으로 국가라고 홀로 뻥쳤던 일본 제국조차도 괴뢰집단이라 여기고, 심지어 황제였던 푸이 본인조차도 깨끗하게 인정한 사실이다. 심지어 당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조차 만주국 건립에 참여한 일본인 동료가 발을 빼려 하자 "괴뢰국을 만들어 놓고 도망치는 건 비겁하지 않은가?" 하고 힐난했다고 한다. 이미 당사자들도 만주국을 괴뢰국으로 인정했다는 증거.[40]

이런 만주국 독립국설은 간혹 박정희 전대통령의 혈서논란을 쉴드치기 위해 악용되기도 한다. 박정희는 어엿한 독립국인 만주국에서 군생활을 했으니 친일파가 아니라는 것. 물론 이는 설득력없는 물타기에 불과하다.

거기에 대쥬신제국사로 환빠 인증을 한 김산호도 대한민족통사에서 같은 소리를 한다. 아예 여기서 만주제국이라고 한국의 역사라고 헛소리를 주장하고 있다.

일본어 위키에서는 미국을 모델로 하여 다민족이 화합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독립국이었다고 서술된 부분이 있는데 그 독립을 승인했다는 곳이 추축국들인데 그 정도로 독립국이었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거기다 다민족 사회를 실현했다는 서술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도대체 뭘 보고 그런 헛소리를 하는 것인지...

8. 기타

만주국이 있던 시절을 살았던 인물들이 만주어에 능통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표준중국어를 익혔던 게 와전됐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면 만주국은 공용어 중에 하나인 표준중국어(한어 또는 중문)를 한어/중문이나 중국어라고 쓰기 싫어했고, 중화민국에서 독립한 나라임을 행세해야 하니까 명칭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만어', 즉 '만주어'라고 불렀다.

우리가 아는 만주족의 언어인 진짜 '만주어'는? 그냥 무시해 버렸다. 그 당시 어차피 만주어는 사멸했고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던 만주 원주민들은 만주국이 들어서면서 중국공산당의 한족과 연합[41] 하며 한족에 동화되어가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래서 만주 일대에 있었던 조선인들이 표준중국어를 배워서 쓴 것을 당시 만주국에서 쓰던 표현대로 '만(주)어에 능통했다'고 표현해서 와전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푸이의 일생을 다룬 영화 <마지막 황제>를 보면 만주국의 모습을 조금은 알 수 있다. 또한 국내에서 <만주의 아침이슬>인가 하는 제목의 해적판으로 출판된 적이 있던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만화 무지갯빛 트로츠키무라카미 모토카용(만화) 또한 만주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자료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도 만주국의 최후가 소설의 중요한 화두로 등장한다.

도쿄에는 2004년, 만주국 부활을 주장하는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모여 만든 만주국 임시정부도 있다. 사이트 주소도 있다! 대만, 미국, 브라질, 이탈리아 등의 국외에 지부까지 있는 듯. 물론 임의단체일 뿐이고 공식적인 능력은 없고, 진지한 망명정부보다는 초소형국민체에 가까운 듯. 작위나 여권(450엔)도 파는듯하다. 황제라는 사람도 자주 바뀐다. 물론 혼자 쇼하는 수준이라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중국 해커들이 사이트를 박살내서 복구할 엄두도 못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2017년 9월 기준으로 다시 복구한 듯. 시진핑, 리커창, 김정은과 홍콩행정장관을 전범으로 수배하였으며 현상금은 3만 달러(...)라고 한다.

후에 대한민국의 제3, 제4공화국에 특히 제4공화국에 큰영향을 주었다. 국가주도의 경제발전계획이나 주민등록제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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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국 주제에 별도의 입국비자까지 발행했다(...) 사진은 러시아계 미국인 피아니스트인 슈라 체르카스키의 여권에 찍힌 만주국 입국 비자. 만주국 외무성 발행으로 보인다.

<기동전사 건담 SEED>에 나오는 오브 연합 수장국은 이 나라를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추측이 있다.

여류 비행사 박경원1933년 만주국의 건국 1주년 축하 비행을 위해 도쿄 - 서울 - 평양 - 만주 루트의 동해 횡단 비행을 시도하기 위해 하네다 공항에서 이륙했다가, 시즈오카 현의 어느 야산에서 추락사하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인증한 '건국'이라고 쓰여진 훈장이 사실은 만주국의 건국 훈장인 것으로 밝혀져 친일파 셀프 인증을 한 격이 된 적이 있다.

심지어 보이스카우트도 따로 결성할 정도였다.만주국의 보이 스카우트 그렇지만 일본 보이 스카우트를 똑같이 해서 만들었으며, 소년병처럼 활용도 했다.

스포츠에서는 축구 대표팀도 있었다.만주국 축구 대표팀 야구팀도 결성해 일본의 도시 대항 야구 대회 토너먼트에 참여했다.

9. 만주 지역에서 일본군의 범죄

만주국은 소위 중국 내 일본인의 거대한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아편 같은 마약류를 대놓고 전매사업을 해서(우리나라 담배처럼) 그 자금을 중일전쟁, 만주사변 같은 전쟁비용이나 관동군 운영비용으로 쓴 건 예사고, 우리가 일제강점기 때로 알고 있는 일제의 수많은 잔혹한 행각들의 다수가 만주와 중국에서 일어났다. 일제는 한반도를 사실상 거의 일본 땅이라고 인식했다면 만주는 아직 덜 점령된, 미국으로 치면 땅을 넓힐 때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했던 서부 개척지쯤으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일제는 어쨌거나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자국 영토이고, 거주민이었던 한국인들도 일본의 '2등 신민' 정도로는 쳐주던 한반도 지역에서는 대놓고 막장 행각을 벌이기보다는 한국인들을 은근히 학대를 했다면, 굵직굵직한 초대형 민간인 대상 범죄는 대부분 만주/중국 지역에서 자행했다. 만보산 사건처럼 이간질을 벌이거나 한반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친일파에 대힌 회유, 독립운동가들의 조직적인 저항에 앙심을 품고 관동군을 동원하여 한국인, 중국인 부락을 통째로 몰살시키는 일은 비일비재하였다. 또한 아예 하얼빈 평방구 지역에는 관동군 방역급수부, 일명 731부대를 설치하고 민간인을 납치해 세균전에 대비한 대규모 생체실험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만주는 독립운동가들이 은신하기 좋은 곳이기도 했지만, 잡히면 한 방에 골로 가기도 좋은 곳이기도 했다.

10. 국가

나무위키에 등재되어 있는 국가(國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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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만주국 건국가(滿洲國建國歌).

1933년 제정되어 1942년까지 사용된 2번째 국가. 분위기는 동요 비슷해 보이나 사실은 제국주의와 괴뢰국의 상징.

국가의 성립 과정이 개판이었던 만큼 국가 지정도 마찬가지로 논란의 연속이었다. 원래 만주국 건국 선언과 거의 동시에 초대 국무총리였던 정샤오쉬(정효서)의 가사에 당시 일본 양악계의 거물이었던 야마다 코사쿠가 곡을 붙인 것이 첫 번째 국가였는데, 국가 제정의 속내는 사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만주국 선수단을 파견할 때 쓰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올림픽 위원회도 없는 나라에서 파견한 선수단을 받아줄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아니었으므로 이 계획은 망했고, 국가 자체도 잦은 변박과 특색 없는 가락 등 음악적인 문제와 지나치게 유교적이고 현학적인 가사로 보급에 실패했다.

결국 이듬해인 1933년에 두 번째 국가가 제정되었는데, 이 국가도 마찬가지로 정샤오쉬가 작사하고 '만주국 문교부선'이라는 애매한 이름의 작곡 주체가 표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 작곡은 당시 다롄에 머물고 있던 일본 음악인들인 타카츠 사토시와 소노야마 민페이, 무라오카 라쿠도가 맡았다. 이 국가는 첫 번째 국가와 달리 십팔사략에 나오는 유명한 에피소드인 소무(蘇武)의 이야기를 가사로 한 중국 민요의 가락을 소재로 해, 만주국 국민들의 다수를 차지하던 한족몽골인, 만주족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하지만 이 국가도 첫 번째 국가와 마찬가지로 유교적인 색채의 가사가 문제가 되었는데, 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식민지와 괴뢰 정권에 자신들의 국가신토 이념을 강제로 주입하던 일본 측이 이것을 결코 좋게 봤을 리 없었다. 결국 건국 10주년을 앞둔 1941년 10월에 정샤오쉬의 후임으로 제2대 국무총리가 된 장징후이를 회장으로 한 국가제정위원회가 발족했고, 여기서 가사와 곡을 심사해 새로운 국가를 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장징후이는 명목상의 회장이었을 뿐이었고, 위원회의 실제 운영과 감독은 총무청 홍보처장이었던 일본인 관료 무토 토미오가 담당했다. 특히 첫 두 국가들이 모두 중국어 가사를 기반으로 한 것에 비해, 이번에는 일본어 가사를 먼저 쓰고 나중에 그것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그 결과 일본서기의 천손강림을 강조한 가사와, 거기에 첫 번째 국가의 작곡가였던 야마다 코사쿠가 창가 풍의 곡을 입힌 니뽄삘 일본색 충만한 새 국가가 완성되었다.듣기


1942년부터 쓰이기 시작한 만주국 국가.

불과 10년 사이에 2번씩이나 국가를 갈아치웠기 때문인지, 만주국 정부에서는 50명의 성악가들로 '국가봉창단'을 조직해 전국에 가창 지도를 보내고 신징방송국에도 시도때도 없이 국가를 방송하도록 해 청자들에게 세뇌주입시키는 등 보급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 그 결과 첫 두 국가보다는 좀 더 자주 불려지게 되었지만, 실제 국가 행사에서는 오히려 기미가요가 더 많이 쓰였다.

1942년부터 1945년 해산 이전까지 쓰인 마지막 국가의 한국어 해석은 아래와 같다.
Filling the world with Divine light,
The Emperor's virtue is noble and worshipped.
Let us salute him with long life and prosperity
and we revere the emperor's deeds.
세상을 신성한 빛으로 가득 채우며,
황제의 덕성은 고결하며 숭배받는다.
우리는 황제의 장수와 앞날에 번영을 기원하며
우리는 황제의 업적을 찬미한다.

11.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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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旧日本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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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만주국이 배경 소재로 등장하는 영상매체

13. 유사 사례


그 외에는 괴뢰 국가 참고.

14. 관련 문서



[1] 1932~1934[2] 1934~1945[3] 중화민국/북양정부의 국기와 마찬가지로 국기의 다섯색은 만주의 다섯 민족을 나타내었는데 적색은 일본인, 청색은 한족, 백색은 몽골족, 흑색은 조선인, 황색은 만주족을 상징한다. 정식 명칭은 신오색기.[4] '후룬부이르'라고도 함.[5] 원래는 창춘이었으나 새로운 수도라는 의미에서 신징(신경)으로 개칭되었다.[6] 만주국 협화회가 사실상의 유일 정당이였다.[7] 하지만 주로 을 사용하였다.[8] 중국에서는 함락(陷落)을 룬셴(沦陷, 윤함)이라고 한다.[9] 관동이라는 명칭이 산해관 동쪽을 일컫기 때문에 헷갈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요동 반도 일대에 러시아가 관동주라는 이름을 붙였고 일본은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그 면적은 3,462km2이고 주요 도시는 해군 기지 뤼순과 무역항 다롄이다.[10] 결과적으로 보자면 일본 해군일본 육군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만주에 해군은 얼씬도 못했고 육군에서도 사실상 독립하여 대본영 직할이였던 관동군이 육군의 개입을 배제하고 만주를 지배하였다.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은 관동군의 폭주는 고토 신페이조차도 예측 불가능한 영역. 결과적으로는 신페이가 예측한 영사, 만철, 도독부에 관동군이 추가된 4두 정치가 되었다.[11] 일본은 총리 산하에 내각정보조사실이란 정보기관이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대기업의 정보네트워크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는데 그 연원을 따져올라가면 만철조사부에까지 이른다. 실제 2차대전 이후 만철조사부 출신들은 대부분 대기업 특히 종합상사의 정보계통으로 많이 흘러들어갔다.[12] 신경, 지금의 지린성 창춘(장춘)[13] 일본은 만주국 이상으로 더 확대하지 않고 중국은 장성 남쪽에 비무장 지대를 만들고 베이징 서남쪽으로 철수하여 상호 구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패배적 협정이다. 막상 협정을 맺고 나서도 일본은 내몽골과 화북을 계속 침략하여 몽골에서는 데므치그돈로브의 몽강 정권을, 화북에서도 괴뢰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때서야 중국도 만주국을 문제삼았다.[14] 예를 들면 한국 대통령이 북한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수교하려면 헌법부터 바꿔야 한다.[15] 1934년 기준 인구의 2.2%. 그러나 간도성 인구의 80%를 차지함.[16] 1934년 기준 인구의 95.5%[17] 이중에는 일본 정부의 각 성에서 파견 형식으로 보낸 일본인 관리들이 많았다. 이들은 타지에 나와있다는 명목으로 급여 등에서 상당한 특혜를 받았다.[18] 총무처 중심주의라고 해서 각종 정책들은 죄다 총무처에서 심의/결정하고 푸이와 중국인 장관들은 그냥 도장만 찍는 상황이었다.[19] 1936년쯤 되면 만주군보다 만주국 경찰이 더 머릿수가 많아질 지경이 된다. 관동군이 보기엔 군벌 출신 병사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만주군에는 이런저런 통제를 계속 가하면서 고위 장교들은 친일파로 채우고 머릿수를 줄여나갔고 반면 만주국과 함께 탄생한 경찰은 급속도로 키워졌다.[20] 아래에서 보듯, 한족이나 만주족, 조선인 등의 여러 만주국 구성원들과 같은 지위를 부여받는다는 게 불쾌하다는 차별적인 이유도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복수국적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국적법 때문이었다. 만일 만주국의 국적을 일본인이 취득하면 그 순간부터 이 사람은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만주국 국적으로 갈아탄 '일본계 만주국인'이 되는 괴랄한 상황이 나올 수 있어서 만주국의 국적을 정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본국이 국적법을 바꾸거나 만주국과 국적에 관한 특별 협약을 맺어놓으면 안되었냐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데, 대본영이나 일본군 등이 태평양 전쟁 시기에 보여준 꽉 막힌 행보로 보면 가능했을 리가 없다(...)[21] 중화민국을 본따서 입법부라는 조직이 있었으나 실질적 기능이 없이 그저 조직표에만 존재하는 조직이었다.[22] 박승환은 조선인민군의 창설요원으로 활동하지만, 여운형 암살 이후 인민군 파괴 공작에 나선 남조선 간첩으로 몰려 모진 고문 끝에 옥사했다. 훗날 만주군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박승환의 미망인을 소개받자 부동자세를 취하며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23] 본래 일본인의 멸칭인 르귀쯔(日鬼子)를 바꾼 것이다.[24] 극소수의 사례가 있긴하나, 육전대 등의 함선과 직접적으로 관련없는 병력에 한정된다. 외지인 수병은 까놓고 말해서 거의 없을 정도.[25] 만주국 육군 보병 제8단에서 복무. 8단 단장 당제영 상교의 부관장교로 종전을 맞았다.[26] 박정희의 사관학교 성적은 만주군관학교 수석졸업, 일본육군사관학교 3등 졸업.[27] 만주 경제개발의 중심이었고, 도조 히데키 내각에선 상공장관이었다. 도쿄 전범 재판에서 A급 전범 용의자였으나, 기소는 되지 않고 출소했다. 이후 자민당 창당을 주도했고 수상이 되었다. 또한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28] 당시 일본 정부에서는 만주국 이주를 추진하기 위해서 "누구나 대지주가 될 수 있다."라는 말로 유혹했고, 그 말에 혹한 빈민층이 대거 낚여서 이주했다.[29] 대표적으로 최서해의 탈출기[30] 얼핏 보면 한반도의 5배 크기에 인구가 같으니 빈 땅이 있었을 것 같지만, 한반도의 인구밀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서 그렇게 보일 뿐이다.[31] 원조 '서부' 이미지로 유명한 미국만 해도 기회의 땅은커녕 유럽인들이 막 진출했을 때 이미 네이티브 아메리칸들로 바글바글한 상황이였고, 흔히 서부를 '개척'했다는 것은 실상은 유럽인들이 네이티브 아메리칸들을 힘으로 몰아내고 땅을 강탈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즉 애진작에 빈 땅이란 개념은 남극 같은 지나치게 가혹한 케이스를 제외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32] 일본 농가 1호당 경지 면적은 1.6정[33] 조선에서는 병작반수제면 평타로 치지만 일본에서는 다이묘 7에 농민 3이면 농민이 죽어나가고 다이묘 6에 농민이 4면 괜찮다는 인식이 있었다. 65%면 7:3과 6:4 사이로 굶어죽지 않고 겨우 살아갈 정도이다. 그러나 수확량 자체가 일본보다 적기 때문에 일본농민보다는 어렵다.[34] 미즈호라는 농촌의 예를 들자면 1호당 22정보 중 17.1정보를 소작을 주었다고 한다. 삼강성(지린성) 이란현 지후리촌에서는 1호당 16정보 중 10정보 내외를 소작 주었다.[35] 만주 지역의 마적 떼와 만주군의 잔당들은 알아서 국민당군과 공산군으로 제각기 갈아탔다. 한동안 국민당군이 주둔했으나, 소련은 그들이 점령한 북한 지역에 공산군의 피난처를 제공했다. 훗날 조선족으로 분류될 이들이 공산군에 보충된 건 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순조롭게 중국 공산당은 만주를 냠냠. 이와 연관된 시대사는 간도 항목을 참조.[36] 출신지는 도쿄지만, 어린시절에 만주국에서 살았다.[37] 이 명단에 올라온 사람들 중 출생연도가 늦은 편이다. 1950년 출생[38] 34년 이후 간도성만 조선친일파 김석범[39] 관할 구역의 각종 현황파악(자동차나 수레 대수는 물론 넝마주이 숫자까지)은 물론 위생단속이나 자전거 타는법까지 일일히 지도,단속했다고 한다.[40] 여기에 대해서는 <키메라 만주국의 초상>이라는 책 289쪽을 참고할 것. 만주국에 비교적 양심적이고 객관적인 일본인의 저서이다.[41] 국민당은 만주족을 동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만주인들이 기존에 가진 기득권을 얻기 위해 그들을 탄압했으나 이는 오히려 만주족들이 정체성 유지에 더 노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동화가 안되었다. 그러나 상황이 반전되었다. 만주국이 세워지며 일본인들이 기존의 만주족과 한족이 가진 기득권을 가져갔고 이 과정에서 조선인도 이용되었다. 결국 만주족은 한족과 협력해야 했는데 국민당 세력은 위와 같이 탄압을 했던 전력이 있어 공산당에 협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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