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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현대 기준 일본에서 Ethnic nationalism이 아닌 단순 Nationalism을 지칭할 때에는 '민족주의'(民族主義)라는 용어보다는 '내셔널리즘'(ナショナリズム)이라는 용어가 선호된다. 일본에서 '민족주의'는 전적으로 Ethnic nationalism을 의미하는데, 이는 과거 천황제 파시즘과 결합해 야마토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웠던 극우 민족주의를 연상시키는 데다가, (야마토 민족이 아닌) 류큐인이나 아이누인같은 전통적 일본 내 소수민족까지 배제하기 때문에 현재의 주류 보수우익에서 거리를 두는 편이다. 보수주의/분파 | }}}}}}}}} |
※ 아래 정보는 해산 당시를 기준으로 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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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익찬회 大政翼贊會[1] (たいせいよくさんかい) | ||
<colbgcolor=#eaeaea,#2d2f34> 영문 명칭 | Imperial Rule Assistance Association Imperial Aid Association[2] | |
한글 명칭 | 대정익찬회 | |
창당일 | 1940년 10월 12일 | |
해산일 | 1945년 6월 13일 | |
전신[3] | 입헌정우회, 입헌민정당, 국민동맹, 사회대중당 | |
후신 | 국민의용대[4] | |
이념 | 제국주의 국수주의 군국주의 천황제 파시즘[5] 범아시아주의 반공주의 | |
스펙트럼 | 극우[6] | |
청년조직 | 대일본청년당 | |
주소 | 도쿄도 코지마치구 (東京都麴町區) | |
총재 | 틀:대정익찬회 총재 참고 | |
부총재 | 오가타 다케토라 (緒方竹虎) | |
당가 | 대정익찬의 노래 | |
의 석 수 | 중의원 | 381석 / 466석 (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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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당시부터 1942년까지 대정익찬회 본부로 쓰인 도쿄회관 본관 |
여기서 대정(大政)은 연호 다이쇼(大正)가 아니라 정치, 국정의 동의어이다. 또한 익찬(翼贊)이란 단어는 중국의 고서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황제의 곁에서 마치 날개(翼)처럼 보좌한다는 뜻이다. 한국사에서는 조선시대에 세자를 호위하는 정6품 무관의 관직명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대정익찬회'라는 명칭은 '천황을 보좌하여 정치를 하는 모임'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상세
내각총리대신 취임 전까지만 해도 열정적으로 개혁을 외치던 고노에 후미마로는 1937년 총리 취임 후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1939년 돌연 내각총사퇴를 선언했고, 뒤이은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대외 정책의 실패로 사임했다. 뒤이은 아베 노부유키 내각과 요나이 내각은 고노에를 어떻게든 다시 앉히고자 했던 군부, 특히 육군의 농간으로 연이어 무너졌다.특히 인기가 많은 고노에가 혁신세력을 모아 기성 정당들을 선거에서 찍어누를 대안 정당을 만들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창당도 안되었는데도 벌써부터 '고노에 신당'이라는 이름까지 붙이는 등 이미 고노에의 총리 복귀가 기정사실화되었으니, 결국 1940년 7월 군부의 의도대로 고노에는 총리에 재취임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본디 군부의 시나리오는 고노에의 이름을 팔아서 정국을 통제하고 전체주의 군국주의 고도국방국가라는 일본 육군 통제파의 야망을 이룩하는 것이었으나, 고노에는 이번만큼은 군부의 꼭두각시 노릇은 안하겠다며 단단히 결심한 상태였고, 이 고노에 신당을 크게 확대시켜서 모든 권력을 철저하게 총리, 즉 자신에게 몰아주게 한다는 이른바 '신체제운동'을 발족시켰다.
고노에의 신체제운동은 권력이 골고루 분산되다 못해 산만할 지경이었던 메이지 유신 체제의 대안으로서, 사회 각계 각층을 총망라하는 강력한 대중조직의 건설을 제시했다. 고노에의 신체제에서 외면당할까 두려웠던 기성정당들[7]은 고노에 본인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자기들 스스로 당을 해산하고 신체제운동 합류를 선언하였고, 1940년 10월 '대정익찬회'라는 이름으로 결실이 맺어졌다. 고노에는 대정익찬회를 마치 일본공산당처럼 지방 말단 촌락의 세포조직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그 위로 쌓아올리는 일종의 피라미드식 조직으로 만들고, 그 최상부에는 총리인 자신이 앉아 사회 전체에 뻗친 조직력을 통해 강력한 정책 추진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를 원했으나 이런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는데, 그 누구도 고노에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걸 보고만 있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사실상 고노에를 총리에 앉혀준 군부는 정국의 주도권을 고노에에게 넘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또한 히라누마 기이치로 전 총리를 위시로 하는 관념우파는 파시즘도 서구사상이므로 배격하자던 양반들이었으므로 천황 뺨치는 권력이 총리에게 집중되는 꼴을 보고 막부의 재림이라며 손가락질을 해댔고, 기성 정치인들은 이런 초헌법적 기관이 생기면 제국 헌법은 뭐가 되느냐며 난리법석을 쳤다.
이렇게 반발이 거세지자 결국 내각에서 대정익찬회는 정치결사가 아니라 공공결사라는 해석을 내놓으면서 대정익찬회는 공식적으로 정당이 아닌 일종의 국민운동본부로 바뀌었고, 일본 파시즘은 실질적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정치운동으로 기획되었지만 정당이 되질 못했고, 권력기반으로 설계되었지만 그 어떤 권력도 창출할 수 없었으며, 전체주의를 표방했지만 대중조직은 될 수 없었던, 그야말로 되다만 파시즘, 미완의 파시즘을 상징하는 기구라고 볼 수 있다.[8] 결론적으로 군부가 쥔 권력을 조금도 가져오지 못한 허울뿐인 단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3. 역대 중의원 의원 총선거 결과
연도(회차) | 후보자 | 당선자 |
1942(21회) | 461 | 381 |
당시 중의원 정원이 466명으로, 대정익찬회 추천 의원(익찬정치체제협의회)이 원내 의석의 81.8%를 차지했다. 나머지 85석은 무소속 의원들로, 그 중 다수가 우익정당 동방회(東方會) 계열이었다.[9] 이는 태평양 전쟁 중 천황제 파시즘이 만연할 때 동방회와 입헌양정회를 제외한 모든 합법정당이 대정익찬회로 흡수된 특수한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비밀투표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선거가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는데, 전전 일본에서는 선거결과를 뒤집는다거나 투표과정에 부정을 행사하는 등 직집적인 방법이 아니라 연설을 못하게 막는다거나 전단물을 못붙이게 하거나 정부측 후보에 선거자금을 풍부하게 공급하는 등 비교적 간접적인 방법으로 선거에 간섭했으며 1942년의 이른바 익찬선거도 마찬가지였다.
4. 역대 총재
대정익찬회 총재 | |||
초대 고노에 후미마로 | 제2대 도조 히데키 | 제3대 고이소 구니아키 | 제4대 스즈키 간타로 |
5. 여담
엉뚱하게도 야인시대 합성물중 하나인 왜인시대에서도 언급되었다. 인트로에서 나레이션 양반의 대사를 통해 '제공해 주지 않는' 스폰서들 중 하나로 언급되었는데 문제는 또 다른 스폰서가 일본공산당이다.(...)[10]6. 같이 보기
[1] 신자체로는 大政翼賛会.[2] 일본어를 음차해서 그냥 yokusankai라고 부르기도 한다.[3] 제국의회에 의석이 있던 주요 4당을 강제로 합병시킨 것에 가까우며, 실제 익찬을 주도했던 세력은 절대다수가 의회주의 정치인들이 아닌 극우 전체주의 성향의 군부였다.[4] 본토결전에 대비한 향토방위대로, 공습 방어와 피해복구에 전 국민을 동원하기 위해 대정익찬회, 대일본익찬청년단, 대일본부인회를 통합하여 만들어졌다.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1945년 9월 2일에 해산되었다.[5] 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6] 고노에 후미마로 같은 귀족적 보수주의자들과 통제파가 주축이 된 일본 군부, 극단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극우파가 주류였다.[7] 당시 제국의회에 의석이 있었던 4개의 정당인 입헌정우회, 입헌민정당, 사회대중당, 국민동맹을 말한다.[8] 구 일본 제국과 천황제를 파시즘으로 볼 수 있냐는 문제는 지금도 학계의 논쟁거리이다. 천황제 파시즘 항목 참조. 일본사에서 파시즘이라고 하면 대정익찬회가 아닌 일본군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다.[9] 마찬가지로 우익정당인 입헌양정회(立憲養正會)도 후보를 내기는 했지만 전부 낙선했다.[10] 정황상 오프닝 BGM이 보병의 본령을 개사한 들어라 만국의 노동자라서 이런 괴상한 전개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