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12 20:40:37

일본군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일본 제국 성립 이전의 일본의 군대에 대한 내용은 일본/군사사 문서를,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국방을 맡는 준군사조직에 대한 내용은 자위대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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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 구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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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871년 1월 4일 (메이지 4)
해체 1945년 9월 2일 (쇼와 20)
본부 육군성: 도쿄도 우시고메구(현 신주쿠구)
해군성: 도쿄도 고지마치구(현 지요다구)
후신 자위대(1954~)
군통수권자/대원수 메이지 덴노,(1871~1912),
다이쇼 덴노,(1912~1926),
쇼와 덴노,(1926~1945),
육군대신 오야마 이와오(초대)
시모무라 사다무(마지막)
해군대신 사이고 쓰구미치(초대)
요나이 미쓰마사(마지막)
참모총장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신노(초대)
우메즈 요시지로(마지막)
군령부총장 니레 카게노리(초대)
도요다 소에무(마지막)
병영형태 징병제(20세남성부터 3년제)
편제 일본제국 육군(Imperial Japan Army, IJA)
일본제국 해군(Imperial Japan Navy, IJN)

1. 개요2. 역사3. 최고 통수권자4. 계급5. 편제6. 병과7. 문제점8. 근대화의 선봉9. 보급
9.1. 외양9.2. 실상9.3. 콩나물과 관련된 일화9.4. 민간인 수탈
10. 한반도의 일본군
10.1. 한반도와 남만주의 일본군 만행
11. 대중매체
11.1. 한국11.2. 중국11.3. 서방권11.4. 일본11.5. 참고 서적11.6. 관련 학설11.7. 관련 전투 및 사건11.8. 관련 문서11.9. 일본군의 재건 가능성

1. 개요

일본 제국 시절의 군대이자 일본 자위대의 실질적인 전신. 현대 일본의 국가 방위를 책임지는 단체인 자위대는 비록 조직도 역할도 사실상 군대이지만 법적으로는 군대가 아니라 준군사조직이기 때문에 이 '일본군'이란 칭호는 자위대가 아니라 그 이전, 1945년 8월 15일 패망하여 완전히 해산하기 이전의 일본 제국의 군대를 의미한다. 종종 그 일제의 군대는 옛 일본의 군대라 해서 '구 일본군'이라고도 하지만, 상기한대로 자위대는 군대로 취급받지 않기 때문에 그냥 "일본군"이라고 해도 구 일본군을 지칭하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따라서 일제의 군대는 보통은 그냥 '일본군'이라고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정확한 표현이다. 당시 그들이 자칭하던 정식 명칭은 "대일본제국 육군"과 "대일본제국 해군"이었지만 보통 칭할 때는 이렇게까지 길게 부르지 않는다. 따라서 이 문서는 일본 패망 전 일본 제국의 군대에 대하여 서술한다.

아니면 '황군'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천황의 군대"라는 뜻이다. 그 앞에 '무적'이라는 수식어는 꼭 붙였는데, 참고로 황군이라는 표현은 30년대 초에도 생소했다. 하지만 이들의 패악질 때문에 중국인들은 대륙을 점령한 일본 육군의 신멸작전으로 대변되는 수많은 약탈 행위를 보며 누리 황(蝗)자를 써서 황군"", 즉 "메뚜기 떼 같은 군대"라고 부르며 이를 갈았다고 한다.

2. 역사

일본군/역사 참고

3. 최고 통수권자

메이지헌법에 따르면 일본군의 최고 통수권자는 덴노다. 이는 원조인 독일 제국 헌법과 같다. 심지어 영국도 군 통수권 자체는 국왕이 쥐는만큼 군주제 하에서 이 조항만은 오늘날에도 의외로 보편적이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촉진하는데 기여한 조항으로 볼 수 있는데 총리 이하 민간 정부가 육해군에 대해 지나치게 간섭하면 통수권 간범이라는 명목으로 디스를 할 명분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메이지 덴노 당시의 일본은 그저 원로와 웅번 출신 정계 거물들의 과두정에 가까웠는 바 이 조항은 그저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했다. 이 시절에는 군정계의 거물들이 이전에 한솥밥을 먹던 처지라 나름 일치단결해서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니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10~20년대이래 이런 거물들이 자연사하고 원로나 거물 정치인과 군인 간 네트워크가 끊기면서 문제는 불거졌다.[1]

당장 워싱턴 조약, 런던 조약 당시 해군력 제한으로 타격을 받은 해군이 민간 정부를 이러한 명목으로 공격했다. 덕분에 민간의 영향력은 꽤 약했으며 오히려 전현직 장성들이 이러한 영향력을 이용해 총리대신이나 각 부 대신[2]을 해먹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민간정부에서 군을 통제하는 시늉만 해도 바로 육군대신과 해군대신들이 나가버려서 내각을 붕괴시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나중에는 이누카이 쓰요시처럼 총리를 암살할 정도로 막나갔다.

도조 히데키는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 특기할 수 있는데 본인이 육군 내에서 상당한 거물이었고, 각종 대신을 본인이 겸임한 체제 하에서 독재적 권한을 행사했는데 이러한 영향력은 심지어 메이지 헌법에 명시된 덴노의 통수권마저 위협할 정도로 강했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도조 히데키사이판 전투 패배로 사퇴 후에도 여전히 막후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만, 그 도조 히데키도 해군은 어찌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역사로 말미암아 현행 일본국 헌법 하에서 통수권은 총리대신에게 있음을 규정하게 되었다.

4. 계급

일본군/계급 참고.

5. 편제

일본군/편제 참고.

6. 병과

일본 육군의 군사특기는 보병, 기병, 전차병, 야포병, 산포병, 야전중포병, 공병, 철도병, 고사포병, 비행병, 통신병, 선박병, 치중병, 항기병, 병기병, 헌병 등이었다. 일본 해군의 군사특기는 수병, 정비병, 기관병, 공작병, 목공병, 위생병, 주계병 등이었다.

그 중 일본군에 대해 별도로 설명이 되어 있는 문서들은 다음과 같다.
  • 야포병
  • 위생병: 현대 한국군의 의무병, 간호장교, 군의관.
  • 주계: 현대의 경리, 보급 및 전투일지 작성을 담당.
  • 치중병: 병참 수송병. 주로 자동차나 말을 사용했다.
  • 헌병: 헌병경찰이라고도 한다. 일본 육군은 프랑스의 장다르므리 나시오날을 참고하여 헌병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프랑스와는 달리 별개의 병종은 아니고 육군의 하위 병과였다. 해군은 따로 헌병이 없었으며 필요에 따라 해군 대신이 육군 헌병을 지휘하였다. 일본 본토에서는 군사 경찰 역할을 하였지만, 한반도와 같은 식민지에서는 경찰과 병립하여 치안유지를 담당하였다. 일본군이 육군과 해군, 관동군이 난립하는 것처럼, 경찰 업무 역시 일본제국 경찰, 일본군 헌병, 고등경찰, 특별고등경찰의 4개 조직이 난립했다. 다만 조선총독부 경무총감이나 각 도의 경무국장 자리는 100% 헌병 출신이 담당하여 지휘권은 확실하였다.

7. 문제점

일본군/문제점 참고.
조선과의 관계는 조선군(일본 제국) 참고.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일본의 전쟁범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일본군/병영부조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육해군 대립: 일본군의 해군과 육군은 서로 협력하지 않았다. 일본제국이 삼국 동맹 조약을 맺기까지 혼란이 많았다. 특히 미국의 유학파인 야마모토 이소로쿠, 이노우에 시게요시요나이 미쓰마사추축국 동맹을 강력히 반대해서 유명해졌다. 그러자 한 신문사에서 '해군 좌파 삼인방'이라 비하하기까지 했다. 또한 일본제국의 해군성에 일본제국의 육군이 군대를 이끌고 포위하거나 위협하기도 했다. 일본제국 내에서는 일본제국 해군의 승리라고 알려진 미드웨이 해전의 경우, 육군성은 해군성과 해군에 스파이를 보내서 일본제국 해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전한 것을 알게되었다. 물론 해군도 육군이 임팔 작전에서 패배한 사실을 육군에 심은 스파이를 통해 알았다.

8. 근대화의 선봉

2차대전 때 저지른 온갖 구시대적 악행이 익히 알려진지라 유명하지는 않지만, 일본의 개화기의 최선봉에 선게 일본군이었다. 이런 현상은 일본뿐만 아니라 전면적인 근대화를 거친 국가들이 다들 거친 과정이기도 한데, 사람을 부품처럼 틀에 딱딱 맞게 규격화시키고 육성하는 사회체제 중에서는 군국주의 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국민개병제가 실시되고 대륙 단위 제국주의가 굴러가던 19세기 유럽 꼬라지를 생각하면 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그 절차를 반세기쯤 늦게 따라가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니 같은 현상이 안 일어나면 그게 이상하다.

비록 보신전쟁에서 최신식 문물이 들어왔지만 보신전쟁의 신식 문물은 신식 총기같은 무기류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나마도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은 대부분 무사 출신의 사족들이라서 일반 백성들에겐 신식 문물 전파가 없다시피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창설되고 대대적으로 징병제가 실시되기 시작하자 일본 백성들에게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육식을 거의 하지 않고 채식과 어류만 즐겨먹던 일본인에게 일본군은 육류를 배급하여 제대 후에도 고기를 찾는 사람이 대폭 늘어나게 하였고[3], 게다짝이나 짚신을 신던 사람들에게 구두를 지급했으며, 일본식 옷만 입던 사람들에게 최초로 서양식 옷을 입게 해주었다.

또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이 처음으로 기차를 타게 된 이유가 군대 입영때문이었으며, 굉장히 낮았던 성관계 시작 연령도 군대 입영 검사 이후까지 늦추게 되었다.(그런데 입영 검사 후에 매음굴로 달려가서 성병 옮아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일단 군대에서 군인으로 쓰려면 일단 글자는 알아야 했으므로 기초적인 교육을 실시해주기도 했다.

또 아무리 무지렁이라도 하사관이나 상등병을 달고 제대하게 되면 시골에서 한자리를 꿰찰 수 있게 되는 등 나름대로 신분 상승의 기회를 주기도 했다. 일본군도 알게모르게 능력지상주의 같은 것이 있었는데 대체로 중학 중퇴나 졸업정도로 어느정도 배운 학력에 체력 괜찮고 눈치 빠르면서 단체 생활을 적응 잘 하는 인원이면 상등병이나 하사관 되기가 쉬웠다고 한다. '일본의 군대'란 책에 따르면 “러일전쟁 이후의 시기가 되면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정도의 계층이 지역의 민중 가운데 천황제 이데올로기 침투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계층에 속하게 된다.”. 실제로 위의 책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심상소학교(4년제부터 6년제까지) 수료 정도의 인원과 고등소학교 졸업 (심상소학교 수료후 2년) 정도의 인원, 그리고 소학교 중퇴 정도의 인원과 무학의 인원들 사이에서 상등병 이상으로의 진급 비율은 엄청나게 유의미한 차이가 났다. 헌병 병과에서는 시험을 봐서 상등병부터 시작하는 코스도 있었고 타 부대에서도 일정 학력 이상의 인원은 훈련 후 시험으로 상등병이나 오장 계급부터 군생활이 가능했다. 그러니 같은조건이면 중학 정도는 다녔었던 적이 있던 인원이 더 인정받기는 쉬웠다. 다만 중학졸업 등의 고학력자라도 체력이 심하게 약하고 군대문화에 적응 못하는 경우 병신취급받고 일등병으로 전역하는 건 일반인들이 알던 일본군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4][5]

한편 일본인은 문맹의 무학자도 글자를 가르쳐가며 군복무를 수행했으나 일자무식에 완전 무지랭이라면 군대서 인정받기는 어려웠다[6]

9. 보급

9.1. 외양

일본 육군에서는 20년대부터 개선이 시작되어 27년에 드디어 취사병이 채용되어 30년대부터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7] 이러한 개선으로 인해 군대에 대한 지원율이 높아질 수 있었다. 해군은 진작부터 제대로 된 대우를 했고 그 덕분에 병력을 지원제로 채우는 위엄을 보일수 있었다.

그 이후로부터 중일전쟁이 본격화되기 전의 일본군은 서류상에서는 제대로인 주둔지에 있다면 보급과 복지 수준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식사는 다양한 종류의 고기채소, 생선, 간식 등이 매 끼에 있었고 그 양도 결코 적지 않았다.[8] 간식으로는 사이다양갱, 찹쌀떡 등이 나왔다. 또한 서양의 커다란 건빵을 현재 한국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먹고 보관하기 좋은 모양으로 개량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 그리고 일부 건빵에 별사탕이 들어가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도 일본 육군이다.[9]

최정예라 불리며 일본의 수도인 도쿄일본 왕궁을 지키는 근위사단의 시설은 준수한 편에 속했다. 내무실은 전부 침대형에 2층짜리 건물에도 엘리베이터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1928년에 준공한 보병 제3연대의 병사가 대표적으로, 새로운 철근 콘크리트 4층 건물로 만들어졌다. 당시로는 최신식 엘리베이터 4대와 리프트 2개가 있었고 화장실은 모두 수세식, 난방은 모두 증기 난방을 채용하고 있다. 다만 입대해서 사용하는 병사들은 시골 출신자가 많고 수세식 화장실의 고장이나 엘리베이터의 고장이 속출하여 속을 썩었다"고 한다(<陸軍建立史>, <<銀星>>, 제6권,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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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반합을 당시 일본군도 사용하고 있었다. 32년에 제정된 92식 반합을 주로 사용했다. 이 반합은 M31로도 불린, 독일이 31년에 제정한 코흐게쉬어 31형 반합(Kochgeschirr 31)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야마토급 전함의 경우 아직까지 해먹을 쓰던 당대의 함선에 비교할 때 초호화급인 침대를 두어 야마토 호텔이라고 불렸으며 실제로 야마토와 무사시의 사관 식당은 전쟁 전 일본의 해운회사들이 운영하던 호화여객선의 식당에서 일하던 실력좋은 요리사들을 장교들이 급여를 십시일반해 고용해서 운영했다.

게다가 공간 절약이 생명인 잠수함도 승조원 대비 침상 비율이 1:1이었을 정도다. 미 해군 잠수함이 1.5~1.75:1 정도였으며 소형 잠수정크릭스마리네U보트는 2:1의 비율을 보인 것에 비해 엄청난 비율이다. 대신 반대급부로 일본 해군 잠수함들이 싣고 다닌 어뢰는 1척당 6~10발이 다였다. 그것도 수상배수량 3천 톤이 넘는 이호형 잠수함들이 그랬다. 2천 톤 대의 미국 잠수함들이 어뢰를 24발씩 탑재했고 배수량이 1천 톤도 안되는 독일 해군의 7형 유보트들도 14발의 어뢰를 챙겼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적은 수량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보급선이 닿는 한 본토의 국민들이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일단 군인부터 먹이고 봤다. 패전 직전의 야마토 승조원의 증언 중에는 "매운 카레라이스사과바나나, 마카로니가 들어간 사라다가 맛있었으며, 내가 이러한 것을 먹어도 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는 말도 있다. 일본 해군은 육군보다 그나마 상식적인데다 전시 이전엔 지원으로만 수병을 뽑았기에 보급에 좀 더 신경 쓴 점도 있다.[10] 그러나 육군 역시 기본적으로는 해군과 마찬가지로 주둔지에서는 해군보단 좀 떨어지지만 민간 서민 식사 이상으로 좋은 급식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군의 보급에서 좋은 점은 딱 여기까지라서 문제다.

9.2. 실상

파일:attachment/일본군/JPrison02.jpg 파일:attachment/ejs19459-water_fall.jpg
일본군의 보급이 정상적이었을 때에 잡힌 일본 육군 포로 일본군의 보급이 끊어진 후에 라바울에서 잡힌 기아 상태의 일본 해군 포로들
輜重輸卒が兵隊ならば蝶々トンボも鳥のうち 焼いた魚が泳ぎだし 絵に描くダルマにゃ手足出て 電信柱に花が咲く
치중병이 군인이라면 나비와 잠자리도 새일 것이고, 구운 물고기가 수영을 하고 그림 속의 달마에 손발이 돋고 전봇대에 꽃이 필 것이다.
러일전쟁 당시의 일본군에서 유행하던 노래. 가사만 봐도 구일본군이 보급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구일본 빠질하는 자칭 밀덕 극우들은 여기에 대해 변명하기 위해 이 노래에 등장한 '輜重輸卒'은 차부 노릇하다 징집된 일개 병졸일 뿐이며 일본군에는 '輜重兵'이라고 하는 병참 전문 하사관이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그랬는지는 둘째치고 보급을 우습게 봤다는 사실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구일본군 리즈시절(?)이라고 자랑하던 러일전쟁 때 벌써 인식이 이따위였으니 본격적으로 막장행각이 시작된 중일전쟁 이후에는 훨씬 더 심해졌다는 뜻이다.

일본군의 보급은 전쟁이 벌어지기 전이나 특정 부대나 주둔지 등 특수한 곳에서만 정상적이었고, 전장 등 나머지 장소에서는 기본적인 보급 상태가 굉장히 열악했다. 오죽했으면 미군으로부터 입수한 전투식량으로 연명한 부대의 영양상태가 더 좋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일본군은 2차대전기까지도 야전취사 장비를 구비하는 데 이상하게 소극적이어서 전장에서 제대로 밥을 먹으려면 지급받은 쌀과 반찬으로 밥과 국을 만들던가 민가에서 징발해야만 했다. 게다가 식량은 보급하면서 식량을 조리할 연료는 알아서 구해다 조리하라는 식으로 일체 보급이 없어 개개인이 문자 그대로 알아서 연료를 찾아다녀야 했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 초반까지는 모든 군대가 비슷했다. 1차대전 초반 이전의 모든 군대는 식량을 던져주면 사병 개개인이 알아서 조리해먹는, 즉 재료만 던져주는 식이었고 삼삼오오 모여 당번을 정하든 혼자 해먹든 알아서 조리해 먹었다. 그러던 것이 1차대전 초반 이후 참호전으로 인하여 대군이 좁은 전역에 고착되어 연료가 부족하고[11] 더구나 연료가 있어도 조리 과정에서 발생한 연기로 인해 포격받기 일쑤인 상황이 되자[12] 후방에서 조리하여 전방으로 추진하는 식으로 바뀌게 된다. 그 이전에는 취사병이라는 병과 자체가 군의 정식 편제에 없었다. 취사병과가 보편화되고 그에 따른 야전취사 장비를 적절히 보급하는 게 일반화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저 모양이었다는 것은 일본군의 수준을 바닥까지 보이는 것이다. '군대는 먹어야 진군한다' 말을 곰곰히 생각해본다면 초등학생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게다가 일본군은 사방팔방에서 다수의 인원이 불을 피우고 조리를 하였기 때문에 대량의 연기와 불꽃으로 인해 부대의 위치가 더더욱 쉽게 노출되었고, 덕분에 나무가 무성한 정글에서조차 미군의 정찰에 쉽게 발각되어 탈탈 털리는 경우들이 상당히 많았다. 더구나 전문적으로 조리를 익힌 취사병들이 소량의 연료만 써서 대량으로 취사하는 것과, 소규모 단위로 전투병들이 사방팔방에 불을 피우고 찔끔찔끔 조리하는 것은 시간의 활용과 연료 소모와 음식의 품질 면에서 효율성의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전문 취사병들에게 맡기면 다른 부대원들은 전투 임무에 더 효율적으로 투입되며 조리 시간의 제약과 취사의 부담에서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도 재료만 던져준 것은 바보짓 그 자체였다.

더구나 다수의 인원이 연료를 구해 조리하는 과정은 주변 민가에 엄청난 민폐를 끼쳤고, 결국 군인들이 점령지의 식량만 약탈한 게 아니라 땔감으로 쓰려고 멀쩡한 문짝이나 가구 같은 것도 거뒀을 정도로 철저하게 수탈을 했고, 이는 반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일본군은 약탈만 한 게 아니라 미군에게 협력했다는 죄목이나 기타 대단하지 않은 명목으로 수시로 민간인살해하거나 혐의자가 1명만 있어도 해당 마을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식으로 잔혹한 지배 정책을 펴서 태평양 전쟁 전역에 미군과 협력하는 수많은 게릴라가 나오게 된다.

게다가 전쟁 중에 병사의 수가 급속히 팽창하여 수백만에 달하는 병력을 모으게 되자, 복지는 어느새 뒤켠으로 밀려나 버렸다. 게다가 연합군의 공격으로 결국 보급마저 끊겨 태평양 등지에서는 몇 달을 굶은 병사들이 마침내 포로를 죽여 인육을 먹는 사건도 자주 목격되어 연합군과 일본 양측에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게다가 배고파서 먹은 건 그나마 정상참작의 여지라도 있지 그냥 재미로 먹은 막장스런 경우도 존재하는데 조지 워커 부시의 아버지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도 이것 때문에 죽을 뻔했다(치치지마 식인 사건 항목 참고). 중국 등에 주둔한 부대들도 민간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것이 주요 업무들 중 하나였고 당연하게도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식량 보급의 중요한 부분을 그런 조달에 의존하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부터 거대한 규모로 팽창한 군대를 유지하기에는 부적합했다. 일본군은 아예 전선 후방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식량을 조달하는 둔전 부대를 따로 운영했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교전지 근방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약탈로 일관했다.[13]

장교사병의 차이도 심각했다. 초기 일본군은 병사들에게 쌀만을 지급하고 부식을 살 돈을 따로 줬다. 그래서 가난한 병사들은 부식비를 모았다가 월급에 보태 송금했는데 이러한 탓에 쌀밥만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결국 반찬 없이 백미로만 밥을 먹으니 영양 불균형으로 각기병이 유행했다. 이 때문에 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많은 병사들이 각기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2차대전 종전까지 병사들은 장교의 잔반이 사병 식사보다 낫다라는 소리를 할 정도로 장교들은 다른 반찬들이 잘 나왔기 때문에 그런 거 없었다. 또 장교가 사병의 식단을 착복한 사례도 있었다. 따라서 사병들의 식단은 장교들의 식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했다.

영양 문제는 위에서 나온 각기병이 유명하지만 이러한 비타민 문제를 빼더라도 문제가 있었다. 영양학적으로 쌀이 밀보다 영양의 균형이 좋고 생각보다 단백질이 많은 편이지만 쌀과 밀 둘 다 필수 아미노산이 적다는 문제가 있다. 동양 식단에서 이걸 보완해주는 게 , 그 가운데서도 간장이나 된장 종류다.[14] 각기병 문제가 아니었더라도, 이러한 부식이 없는 식생활을 했더라면 나중에라도 단백질 결핍 등의 문제가 나타났을 것이다.

그나마 해군은 백미 외의 다른 부식류를 충실히 하면 각기병 발병율이 낮아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던 반면, 육군은 '각기병은 영양불균형 때문에 생기는 병이 아니라 미생물전염병'이라면서 그냥 쌀밥을 먹였다. 당시 육군 군의총감(軍醫總監)이었으며 일본의 대문호이기도 한 필명인 모리 오가이로 잘 알려진 모리 린타로 장군 때문인데, 그는 독일 유학 경험이 있는 저명한 의학박사였지만, 각기병 미생물 원인론을 신봉했던 것이 문제였다. 당시는 각기병의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나 당장 일본에서 각기병을 부자병, 에도병 등으로 불렀으며 이 에도병 증상이 나타날 경우 메밀국수[15]를 먹으면 증세가 나아지더라 하는 경험적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모든 민간요법이 무턱대고 따라할 치료법은 아니지만, 효과가 있음이 알려진 방법임에도 단순히 독일 의학계에서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히 무시한 모리 오가이의 책임은 크다.

결과적으로 일본 육군은 한 상비사단 분의 해당하는 병력인 1만여 명이 각기병에 걸려서 사망하거나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반면, 일본 해군은 각기병 발병자가 없었다. 이는 각기병의 원인이 비타민B 부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1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계속되었는데 해결책으로 제안된 현미보리 혼식이 당시의 서민층 식사여서 병사들이 심한 소외감을 느낀다[16]는 의견이 컸고, 또한 야전취사에서 현미 및 보리가 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국군 역시 한국전쟁 당시 야전취사를 할 때는 조리에 시간이 걸리는 보리를 빼버리는 일이 많았다. 특히 집단 취사가 거의 배제된 일본군의 특성상 보리는 줘봤자 제대로 조리할 여건 자체가 안 나온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이 말은 그냥 만 주고 밥은 각자가 해먹으라는 소리로, 주둔지와 야전에서의 식사가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영양학적 문제는 1943년 이후 갑자기 상대적으로 나아졌는데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보급 체계가 붕괴되면서 아무거나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미군영국이나 독일 시민보다 잘 먹던 사람들이지만 노획한 전투식량이 매일 전원에게 줄 정도로 풍족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얼마나 보급이 빈약한지 짐작이 불가능할 정도다. 다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보급은 매우 풍족한 편이었다. <영웅 김영옥>에서 김영옥의 회고에 따르면 유럽 전장에서 식량 배급은 말할 것도 없이 초콜렛, 담배와 같은 기호식품조차 중분히 보급되었고, 미8군 사령관이었던 벤 플리트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이스크림과 같은 특식도 자주 나왔다고 한다. 태평양 함대는 한 때 보급 받은 전투식량이 너무 많아 고생한 적도 있을 정도.

사실 처음부터 일본군의 기본적인 보급 자체가 다른 나라와 크게 차이가 났다. 주적인 미군은 1인당 4톤의 보급물자를 지원받는 반면에 일본군은 1인당 0.9kg(2파운드) 정도만 받았다. 0.9톤을 잘못 쓴 게 아니라 진짜로 0.9kg이다. 차이가 그야말로 넘사벽이다. 물론 미군이 제법 많이 받는 것도 있고, 기본적으로 동양인과 서양인의 체급 차이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일본군의 보급량은 독보적으로 처절하다.

9.3. 콩나물과 관련된 일화

러일전쟁 당시에 러시아군으로 수프만 쑤어먹어서 괴혈병으로 고생할 때 일본군은 콩을 키워 콩나물을 만들어 먹어서 괴혈병을 예방한 적이 있다. 물론 이것이 '결정적인' 승리 요인은 아니었다.

사실 러시아에서도 콩나물이 나오기는 했으나 서양 식문화에서는 완두, 렌틸콩, 병아리콩 등만을 식용 콩으로 사용하고 한국, 일본의 대표적인 콩 품종인 대두콩은 대부분이 콩기름과 사료 목적으로만 사용했고 식용인 줄 몰랐기에 러시아인들은 대두 콩나물을 먹지 않았다. 이 점은 미국도 마찬가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포로로 잡혔을 때 배식으로 나온 대두콩을 먹을 줄 몰라서 그냥 굶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콩으로 가득한 러시아군의 식료품 창고를 보고 콩나물을 먹을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다. 식문화의 차이가 전투병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는 사례다.

문제는 콩나물 자체가 아니다. 콩나물이 자라고 적군이 괴혈병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이 전장이 고착 상태에 빠진 전선임을 눈치챌 수 있다. 이 전선은 전설의 203고지였다.

9.4. 민간인 수탈

태평양 전쟁 후기 일본 민간인들의 삶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는데, 당시 일본 민간인들의 1인당 하루 식량 배급량은 규정상 약 매일 1인당 20g의 쌀, 100g의 과일과 야채, 50g의 밀가루, 설탕, 조미료, 해조류 등이 포함된 300g 정도였는데 보통 사람은 하루에 600g 정도의 식량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 양조차도 모자란 배급 식량에는 나와야 할 쌀이 나오기는 커녕 이나 고구마조차도 없었고 전쟁 이전 돼지들 사료로나 주던 콩껍질이나 고구마 줄기 같은 게 잔뜩 섞여있었다. 여기에 4인 가족 기준으로 단백질을 공급해줄 정어리가 2마리 배급[17]되었고, 규정상 15세 이하 어린이와 60세 이상 노인에 한해 1달에 딱 1번 과자가 배급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 어린 시절 태평양 전쟁을 체험한 노인들의 증언으로는 그런 건 없었다고 한다. 양도 질도 엉망인 무언가를 배급 식량이랍시고 받은 당시 일본인들은 소위 '천장죽'이라 부르는 을 끓여 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죽이 어찌나 맹물처럼 맑은지 천장이 다 비쳐보인다는 씁쓸한 농담에서 '천장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0. 한반도의 일본군

1910~1945년 사이의 한반도에 있던 일본군에 대해서는 조선군(일본 제국) 항목을 참고할 것.
조선 군인이란 신분도 있었는데 이들은 1907년에 해산당한 대한제국군 가운데 잔류해 일본군에 편입된 이들이다. 그 밖에 일본군에 편입이 아니라 입대한 인원은 일본군/조선인을 참고할 것.

10.1. 한반도와 남만주[18]의 일본군 만행

  • 1875년 운요호 사건
  • 1894년 6월에 전주화약으로 이미 동학농민운동이 해산되었는데도 억지로 군대를 보내어 한성에 눌러앉았다. 6월 21일에는 조선의 내정 개혁을 요구하면서 경복궁을 기습으로 점거했고 동시에 조선군 군영을 공략하여 한성을 장악, 흥선대원군을 꼭두각시로 내세우고 김홍집을 시켜 갑오개혁에 들어갔다. 이어서 7월 25일과 28일에 각기 해상과 육상에서 청군에게 선전포고 없이 선빵을 날리며 청일전쟁을 시작했으며 이러한 내정간섭에 반발하여 동학농민운동도 다시 봉기했다.
  •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때 이토 히로부미의 명령으로 체결 장소인 덕수궁을 대거 점령하고 고종황제와 관료들이 체결을 거부하게 될 때 언제든지 공격할 태세를 취하면서 대기하였으나 체결이 성사되면서 덕수궁에서 철군하였다.
  • 1907년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 때 해산에 분개하여 교전을 벌였던 대한제국 군인들을 제압하고 대거 사살 및 체포하며 그야말로 잔인무도한 만악과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에도 해산당한 대한제국 군인들이 대거 합류한 의병이나 독립군과 연이은 교전을 벌였고, 급기야 호남에서 남한 대토벌 작전을 벌여서 이들을 말 그대로 쓸어내버렸다. 그 과정에서 벌인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다.
  • 1919년 3.1 운동 때는 일본군과 일본 경찰이 합동 소탕작전을 벌인 끝에 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와 조선의 양민들을 대거 학살하였고, 육군이나 헌병은 물론 해군 병력까지 출동시켜서 만세운동을 저지하며 진압하는 강경책을 일삼았다. 이후에도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을 저질렀고, 그 외 전국 각지에서 항일운동 및 만세운동을 하는 자들은 모조리 집단학살을 하였다.
  • 1920년에 참전한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에서는 홍범도, 김좌진 등이 이끌었던 조선 독립군에게 대거 병력이 전사하는 참사를 낳았다.[19] 일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만주에 있는 조선 양민들을 모조리 잡아서 학살하였다. 1940년 한중 연합군 때에도 기습 작전에 휘말려서 대거 전사하였고, 일부는 숙영지로 도망갔거나 탈영하는 사태를 빚었다.
  • 1941년 태평양 전쟁을 계기로 조선의 무고한 청년 및 소년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일본군에 강제로 편입시키고 연합국과의 교전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에 따라 35년 만에 한반도에서 모두 철군하였다.

11. 대중매체

11.1. 한국

주로 구한말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및 드라마 등에서 빠짐없이 나온다. 여기서 나오는 일본군들은 한국 배우의 연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으나 역할상 조선인들을 폭행하고 잡아 죽이는 잔인하고 포악하며, 그 밖에도 소녀들을 속이거나 납치하여 일본군 위안부로 끌어가는 만행도 저지르고, 한국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는 가장 나쁘며 포악한 존재로 나온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의 특성상 현재의 일본 자위대는 주요 소재로 안 다루는 편이라 현대가 배경이던 한국 드라마에는 자위대가 없지만, 한국 영화 한반도에서 대한민국 해군해상자위대가 대치하는 장면이 나온 적은 있으나 마지막에 아무 일 없이 서로 철수하였다.

문학 역시 예외 없이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작품이면 글귀에 일본군의 악행과 만행이 나오고, 조선왕조를 소재로 한 역사소설에도 임진왜란을 거쳐서 일본군이 자주 등장한다. 구한말 및 근대를 소재로 한 소설 등에는 운요호 사건강화도 불평등조약, 동학농민운동을미사변 등을 거쳐 자주 그리는 편.

연극에서는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연극 배우들이 일본군 연기를 맡으며 일본군의 만행과 악행을 재현한다.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관객이 현장에서 바로 볼 수 있다는 특성을 보면 일본군의 모습이나 만행 등을 생생히 재현하는 셈이다.

그 밖에도 일부 3.1절 만세운동 재현행사 때 일본군으로 분장한 엑스트라들이 나와서 만세운동을 진압하는 재현을 거쳐서도 나오는데, 여기에서도 일본군은 악질적이고 살인마와도 같은 존재로 나온다.

통상적으로 한국에서 묘사하는 일본군의 이미지는 덧니가 나오고 콧수염을 기른 일본인의 모습(일명 ‘나까무라’)으로 나오는 편이 많다.

다만 영화 놈놈놈이나 마이웨이와 같이 악랄한 측면보다도 일본군의 멍청함과 병신스러움이 더 드러나는 특이한 때도 있다. 특히 영화 암살의 경우 그냥 스톰트루퍼(...)

11.2. 중국

중국 배우의 연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으나 역할상 중국인들을 폭행하고 잡아 죽이는 잔인하고 포악한 존재이며, 그 밖에도 소녀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끌고 가는 만행도 저질렀으니 한국과 같이 중국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는 가장 나쁘고 포악한 존재인 편이다. 일본군이 저지른 각종 만행들이 워낙 많고 잔혹하다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다. 중국의 악역(일본병사) 전문 배우는 "악당은 가장 비참하게 죽어야 한다"는 말로 일본군의 역할을 표현한 바 있다. 애초에 중국에도 '쪽바리'와 비슷한 어감의 '워누'(倭奴)라는 욕이 있으니 일본군을 미화시킬 수가 없는 환경이다.

다만 홍군(중국인민해방군의 전신)의 이야기를 다루는 대하드라마라면 악랄한데 엄청 잘 싸우는 것으로 묘사할 때도 있다. 2011년 방영한 <상해, 상해> 같은 드라마에서는 팔로군의 기습을 받은 일본군 트럭 속 소년병 엑스트라가 머리에 총알 관통상을 입는데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눈을 부릅뜬 채 절명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팔로군 게릴라의 공세가 멈추자마자 트럭의 포장을 걷고 압도적인 기관총 화력으로 팔로군 게릴라를 학살하는 것으로 묘사. 물론 일본군이 잘싸웠다는걸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홍군의 뻥튀기된영웅적인 투쟁을 강조하려면 적이 그만큼 강력하다고 보여줘야 하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실제로는 국민당이 주력이었고 공산당은 항일보다 세력확장에 더 치중하고 팀킬까지 저지르고 다녔지만.[20]

중국 온라인 FPS 광영사명 온라인에서는 중일전쟁 배경의 코옵 모드[21]에서 일본군이 적으로 등장하는데 사살해 보면 소속이 "일본군" 이 아니라 대놓고 그냥 "鬼子" 라고 표시되고 적들 중에서 상하이 맵의 상급 장교는 사살시 "전범(战犯) xx 사살" 이란 메시지가 뜨는 등 센카쿠 열도맵의 자위대[22]와 달리 게임 내 취급부터 경멸과 혐오가 가득 들어있다.

11.3. 서방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이었으므로 대부분의 일본군은 당연히 악역으로 나온다. 미국 쪽 매체에서는 대개 태평양 전쟁의 지옥 같았던 경험담이 들어가 엄청 쓰레기 같은 미치광이들로 묘사한다. 다만 소수로 동정적인 묘사를 하는 매체도 있다. 예를 들어 그린호넷케이토 같은 경우 일본군이었지만 난징 대학살을 목격하고 분노하여 같은 부대원들을 죽이고 탈영했다는 식의 뒷설정도 들어갔다. 다만 작품의 기초적인 설정 자체가 각이 딱 잡혀 있지 않아서 중국인이나 한국인으로 설정이 바뀌는 때가 있다. 심지어 코믹스 중 가장 후기 시간대를 다루는 코믹스에서 케이토는 히로인 포지션의 여성이다.

한때 한국에서 친일 논란이 일었던 더 퍼시픽은 의외로 무미건조하게 일본군을 조명한 편이다. 옹호의 시선 그런 것도 없이 일본 넷 우익들이 보면 뒷목 잡고 쓰러질 연출을 가감없이 넣어놓았다. 특히 오키나와 민간인들을 인간 폭탄으로 미군들에게 내보내 그 자리에서 폭사시켜 버리는 장면 등 일본군 막장 전설의 고증이 리얼하기에 한 화에서만 "Kill Japs"와 "Fucking yellow monkeys" 같은 과격한 대사가 쉴 새 없이 남발되고, 상술한 묘사를 포함하여 당시 일본군의 막장 행태와 병신스러움이 아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 현대 일본의 위상이 한때 세계경제 2위까지 했고 지금도 세계적인 경제대국인 데다 잘 나갈 당시 적극적으로 자국의 문화를 미화, 포장하여 수출하여 서구에서 상당한 숫자의 와패니즈들, 즉 서양판 일빠들을 만들어 놓았다. 일본에 관한 것이라면 거의 뭐든지 신비주의적으로 보며 동경하는 이들에게 있어 총 들고 빵빵 쏴대는 적군을 앞에 두고 군도를 들어 "반자이!"라 외치며 돌격하는 일본군은 마치 무슨 판타지 군대를 보는 듯해 신선함!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물론 와패니즈들을 서방권 전체의 주류라고 볼 수는 없으며, 절대적으로 소수인 것이 현실. 미국 등지에 오타쿠 정보 전문 사이트에서 일본군이 사무라이들의 군대로 미화되는 경우도 종종 보이거나 이것 때문에 키배가 벌어지기도 한다.

가지고 있는 장비의 병신같지만 생긴건 신기한 참신성(?) 때문인지 의외로 콜렉터에게 인기가 있으며 특히 헬멧과 군모의 괴랄한 조합 때문인지 디자인상으로는 관심을 가지는 서양 밀덕들이 많으나 어디까지나 콜렉션을 위한 것 뿐이지 실용성이나 여러 면에서 일본군은 서양 밀덕들에게 까이는 쓰레기 장비들로 이루어진 군대다.저런 일본군에 탈탈 털린 중국군은 의문의 1패 오히려 밀리터리 계열 서브컬쳐에 프로토타입 드립과 스토리가 진행되기 위한 과도한 정신력 드립에도 일조한 면이 있어서 개연성 있는 전쟁 스토리를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도 대대손손 까이는 도움이 안되는 군대.

11.4. 일본

사실 일본군의 막장스런 실태는 일본인들도 꽤 잘 아니 주로 반전(反戰)을 주제로 하는 작품에서 일본군 내부의 부조리나 사건사고가 곧잘 나온다. 반면 유명한 사카이 사부로를 비롯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적과 싸우며 좋은 성과를 거둔 몇몇 인물들을 영웅담의 소재로 곧잘 쓴다. 물론 한편으로는 상당히 미화시켜 보여주거나 하는 때도 있지만 의외로 이쪽이 더 마이너하며 크게 인기도 없다. 애초에 보통 과거 역사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다.

일반적으로 일본 매체 내에서 일본군 내의 가혹행위나 부조리는 반전소설에서도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이는 독일과 매우 대조적인데, 독일의 여러 영화들은 2차대전을 묘사할 때, 나치를 옹호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클리셰처럼 나치 독일의 군사조직들, 즉 슈츠슈타펠 뿐만 아니라 독일 국방군까지도 각종 만행이나 사악함을 반드시 짚고 넘어간다. 독일에서 만든 영화 특전 유보트(Das Boot)는 잠수함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이런 면이 잘 안 나타났기 때문에 독일 내에서 나치 시절의 군인을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문제는 일본 영화에서는 아예 그런 거 없다는 점. 그러니 일본의 2차대전 영화들은 1950년대부터 제작되었지만, 대부분 일본군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키며 미화하며, 스스로 "국가를 지키기 위해 희생했다"는 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버마의 하프>나 <호타루> 같이 극우와 거리가 먼 반전 영화도 마찬가지며, 전쟁의 비극은 그리되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잠시 구타나 일본군의 육해군 갈등이 묘사되긴 하는데, 아마 일본인 감독이라면 이런 장면은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만 공통적으로 일본 군부가 고의로 전쟁을 일으켰다거나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의 막장 군대다운 면모는 보통 안 보여준다. 이에 대해 자국민에게 "자국군이 악당이었다"라고 생으로 들이밀면 당연히 기분 나빠할 것이므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얘기하는 의견도 있지만, 일본 사회가 과거사의 반성을 제대로 안했다는 뜻이다. 몇몇 부분 한정으로는 나타내기도 한다.

2003년에 방영한 <사탕수수밭의 노래>의 경우 방공호에서 아기가 울자 뺏으려는 일본군 본토 병사를 오키나와인 교사가 말리자 "이래서 오키나와 인이 나약하다고 소리 듣는 거다. 이번 전쟁에서 지면 너희 오키나와 놈들 때문이다"라면서 총으로 사살하려고 하거나 오키나와인 출신으로 징집된 아버지가 찾아낸 부상당한 미군 파일럿을 포로 대우고 뭐고 사살하려고 하는 일본군 장교가 나온다. 다만 이 경우는 오키나와 전투가 일본 우익들도 빼도 박도 못하게 일본군이 자국민에게 저지른 막장짓도 있고 오키나와 도민들도 기억하기 때문에 일본군에 대한 전적인 미화가 힘들다.

현대 독일인들은 나치 독일군의 만행을 부정도, 미화도 않는다. 이에 비해 일본은 일본군의 만행을 미화하거나 전범들을 영웅시까지 하니, 독일과는 참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독일도 과거를 곱씹으며 반성하기보다는 '흑역사니까 잘 수습하고 덮어버리자'에 가깝기 때문에 국내에 알려진 것처럼 아주 깨끗한 건 결코 아니지만[23] 일본은 그것을 2차 창작으로 이어 상품화하는 경우도 있다는 게 문제다.

가끔 일본산 가공전기 등에서는 멀쩡해 보이는(?) 모습으로도 있다. 그래서 일본산 가공전기지만. 게다가 대부분의 매체에서는 해군은 미국과 동급으로 나온다.

그러나 모든 일본 매체가 일본군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게게게의 키타로로 유명한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의 작품 중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만화들이 있는데, 거리낌 없이 묘사하는 당시 일본군의 막장 행태가 나오니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작가 미즈키는 지옥과 같은 동남아시아 전선에 갔었고 왼팔도 잃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으니 어설픈 동경이나 자기합리화가 아닌 생생한 당사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 일품이다.

오시이 마모루 작품에서는 일본군은 그리 안 나오지만 군대가 되려는 자위대가 자주 나오는 편으로 일단 작품상의 자위대는 까이는지 안 까이는 건지 모르는 애매모호한 세력으로 나오는데 일단은 전반적으로는 약해보이게 나온다. 일설에 따르자면, 오시이는 운동권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고도 한다. 계엄령이 떨어져서 자위대 소속 치안군이 도쿄에 주둔하게 되는 패트레이버 2번째 극장판에서 여러가지 추태를 보이는데, 그 중 걸작인 것이 비행선이 추락하면서 가스가 누출되자 집단으로 패닉에 빠져서 멈춰있는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다가 전부 떨어지거나 하는 등의 추태를 보인다. 이 가스는 후에 착색가스로 밝혀졌다.

11.5. 참고 서적

  • 가타야마 모리히데 저 《미완의 파시즘》
  • 야마다 아키라 저 《일본 군비확장의 역사》
  • 위톈런 저 《대본영의 참모들》
  • 요시다 유타카 저 《일본의 군대》
  • 후지와라 아키라 저 《일본군사사(日本軍事史)》
  • 노나카 이쿠지로 외 공저 《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 - 태평양 전쟁에서 배우는 조직경영》 (원제: 《실패의 본질 - 일본군의 조직론적 연구》)
  • 가토 요코 저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한도 가즈토시 저 《쇼와사》
  • 니얼 퍼거슨 저 《제국》, 《증오의 세기》
  • 이노세 나오키 저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 호사카 마사야스 저《쇼와 육군》
  • 야마모토 시치헤이 저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
  • 쿠로노 타에루 저 《참모본부와 육군대학교》

11.6. 관련 학설

11.7. 관련 전투 및 사건

11.8. 관련 문서

11.9. 일본군의 재건 가능성

일본 우익세력의 염원이 평화헌법 개정[24]을 통한 군대의 보유 즉 일본군 재건이다. 현행 자위대를 선전포고권과 교전권을 가진 정식 군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중국의 군사력 팽창과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반감으로 2000년대 이후 일본내에서 평화헌법 개정에 대한 여론이 조금씩 높아져 가고 있다. 미국 또한 미-일 군사동맹을 아시아태평양 지역 패권 유지의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25] 일본의 군사력을 보다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기를 암묵적으로 원하고 있다. 2018년 현재 아베 신조 정권이 장기집권 태세를 갖추어 나가면서 평화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재건방법은 두 가지이다.
  • 현행 자위대에서 규모만 증가시켜 미군 내지는 유럽형 군대로 만드는 것.
  • 징병제를 부활시켜 일제강점기 당시의 일본군으로 회귀하는 것. 이 경우 많은 반대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다.[26]

[1] 마침 1차대전 당시 독일도 일본제국과 유사하게 민간 정부가 군인을 통제하지 못해 문제로 군사독재가 이루어졌다.[2] 육군대신, 해군대신 외에 군과는 직접 관계 없는 부서들, 예를 들어 아라키 사다오 전 육군 대신은 예편 후 문부상을 했다.[3] 당장 8,90년대에 우리나라 경양식점서 팔던 돈가스나 함박스테이크나 카레라이스, 오므라이스같은 화양식 메뉴들이 원래는 일본군 짬밥에서 유래했거나, 군대에서 주로 배급되거나한 메뉴여서, 군 복무한 사람들은 저런것들을 제법 먹어보고 전역했다.[4] 그런데 사실 이것도 꽤 골때리는 부분이, 굳이 상급학교인 중학교가 아니라 고등소학교 수학자를 최상급으로 쳤다는 점이다. 즉 중학 다닐 정도로 공부한 자원은 개인주의와 염전사상에 물들어 상대적으로 군복무에 적합하지 않은 인원으로 봤던 것이다. 당시 일본 사회의 대학진학률상 중학교 나왔으면 어느정도 공부한 자원인 건 맞지만 그정도로도 군복무 부적응을 걱정해야 할 정도면 일본군 내부가 얼마나 맛간 상태였는지 알만하다. 다만 당시 중학생은 주로 도시출신 인원들이었고 고등소학교 출신들은 시골의 자작농이나 소지주 정도의 출신배경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애시당초 고등소학교란 곳이 소학교 졸업하고 더 큰 도시의 중학교 가긴 애매한데 공부 좀 더 할 여유는 되는 중학교 없는 시골지역 학생들이 주로 다니는 곳이기도 했으니 배우고 못배우고의 문제도 있지만 그냥 도시출신 도련님들 쓰는것보다 어느정도 체력좋고 기본적 지식은 있는 시골출신 돌쇠들 쓰는게 낫다고 평가한 것이다. 실제로 시골출신들은 군대적응력이나 만족도가 꽤 높았다고 한다.[5] 어쨌던 저렇게 군대 내에서 처리하기 버거웠던 고급(?)인력들의 병역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갑종간부후보생' 과 '을종간부후보생' 이라는 제도가 있었으니, 전자의 경우는 고등교육 받은 자들을 훈련시킨 후 예비역 장교로 임관시켜서 얼렁뚱땅 군 복무를 때우게 만든 제도요, 후자의 경우는 구제중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훈련시킨 후 예비역 오장으로 임관시켜서 얼렁뚱땅 군 복무를 때우게 만든 제도였다. 기본적으로 1944년 이전의 일본군은 소위 '지휘부담'이 있는 인원은 어찌하던 받지 않으려고 무지막지하게 애를 썼다.[6] 조선인 일본군을 특별지원병으로 모병할 때는 4년제 심상소학교 수료 이상의 학력을 모집했다. 참고로 한국군은 건군기에는 문맹자도 일부 징병했으나 현대에는 중졸 이하는 징병하지 않는다.[7] 엄밀히 말하면 이전의 일본군도 마냥 개판은 아니었다. 시스템이 정비되며 계속 좋아지고는 있었던 것이다.[8] 1930년 전후의 일본군 식단을 대충 보자면 '밥, 카레, 우메보시 미소된장국' '밥, 생선구이, 단무지, 어묵국' '밥, 돈가스...' 이런 식.... 거기다 병사들 사기떨어진다는 이유로 각기병에도 불구하고 보리 혼식을 안 하고 쌀밥을 줬을 정도인데, 1930년대에 조선은 고사하고 일본 시골에서도 저렇게 먹을 수 있는 집은 없었다. 지금 기준으로도 한끼 그럭저럭 먹었다 싶은 정도의 메뉴가 된다. 카레라이스니 니쿠쟈가니 돈가스니 하는 소위 화양식이란 음식들의 기원이 대체로 군대 짬밥 메뉴들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시골 출신이거나 도시 빈민 출신 병사들에게는 군대 짬밥이 대단한 별식이었다.[9] 혹한지에서의 열량보충용으로 단당류를 추가한 것이다. 건빵항목참조.[10] 이오지마 같은 격오지에서도 해군의 급양이 훨씬 좋아서 지휘관인 구리바야시 장군이 해군 지휘관과 협조, 육해군 급양을 동일하게 하기도 했다[11] 비만 오면 진창이 되는 곳에서 마른 장작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상상해 보라. 더욱이 대규모 병력이 한 곳에 죽치고 대치 상황을 벌이고 있는데 연료가 남아나겠는가?[12] 이러한 이유때문에 병사들이 고향에 보낸 편지중에는 고체 알코올좀 보내달라는 편지도 있다. 연기가 나지않기에 포병으로부터 안전하고 그나마 음식을 따뜻하게 먹을수 있으니까.[13] 중세 유럽군대의 미칠듯이 느린 진군속도의 원인중의 하나가 바로 이 보급문제였는데, 당시 기술로는 이동수단이 마땅찮기도 했고, 더군다나 한번에 많은 수의 보급품을 보낼 수 없으니 현지조달하느라 밍기적거리면 시간다까먹고 진군 속도는 떨어질수밖에...[14] 단순히 콩만으로는 안 된다. 흡수율이 낮고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하기 때문. 발효를 거쳐 미생물을 섞어 먹어야 약간이나마 채울 수 있다.[15] 당시에는 도정과정이 완벽치 않아 메밀국수에 메밀껍질이 그대로 들어가 있었는데, 도정되지 않은 메밀 껍질 부분에 비타민 B가 포함되어 있어 실제로 각기병에 효과가 있었다.[16] 지금은 쌀밥이 흔한 밥 취급받고 콩밥 등의 혼식이 신경 쓴 건강식이라며 주목받지만, 쌀 생산량이 떨어졌던 전근대까지만 해도 100% 쌀로만 지은 쌀밥은 부의 상징이였고 혼식은 가난의 상징이였다. 오죽하면 윗 동네의 목표인 지상락원이 '이팝(쌀밥)에 고깃국 먹는 것'일 정도.[17] 정어리는 그리 큰 생선이 아니다. 정어리 2마리 정도면 현재 대형마트 등지에서 파는 통조림 한 캔 정도의 분량인데 이게 80g 정도이다. 80g의 생선으로 하루 4인 가족의 단백질을 보충하라는 것이다.[18] 독립군의 주 활동 무대이기도 했으며, 러일전쟁 이래 일본의 세력권이었다.[19] 청산리 대첩은 명백히 대첩이 아닌 전투가 맞으며 이에 관한 논쟁은 과거 인조이재팬에서 서울대 교수가 넷우익에게 팩트로 발린 적이 있다. 또한 두 전투를 합쳐도 일개 중대는 커녕 소대 혹은 분대급 전과이며 대거 병력이 전사한 참사로 비유하는 것은 맞지 않다.[20] 아예 마오는 지금이 세력을 불릴 기회라고 세력을 불리는데 집중했고 심지어는 일본에게 중국을 침략해줘서 감사하다고 하기까지 했다.마오쩌둥 '일제 침략에 감사' 발언은 사실[21] 상하이 사변, 루거우차오 사건[22] 물론 공식 사이트에서는 "침략자 일본 도적떼(日寇)" 로 칭해지긴 하지만 게임 내에서 직접적으로 자위대를 멸칭으로 부르지는 않는다.[23] 냉전 시대 미국의 필요에 의해 재무장을 하면서 최소한의 표시를 한 것에 불과하다. 사실 유태인 학살을 제외하면 소련 내에서의 슬라브인 학살, 집시 학살 등은 아예 인정하지 않고 있다.[24] 보통 일본의 우익들은 "보통국가화"라고 부른다.[25]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안보전략에서 대서양과 유럽 방위를 위한 제1 동맹국은 영국이고, 태평양과 아시아 방위의 제1 동맹국은 일본이다.[26] 아무리 역사왜곡을 해도 조금만 알면 당시의 일본군이 귀족에 가까운 특권계층으로 변질된 집단인데. 덴노만 해도 좋게보지 않는 일본 국민들이 그런 특권을 지는 자들이 부활하는걸 바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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