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12 05:13:02

343 해군항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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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종류
2.1. 하야부사 부대(隼部隊)2.2. 츠루기 부대(剣部隊)
3. 특징4. 매체

1. 개요

第343海軍航空隊
제343해군항공대

일본 제국 해군 소속의 일본 제국 해군 항공대중 하나다. 1944년 1월 1일 창설된 하야부사 부대(隼部隊)가 모체이나 이 부대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 칠면조 사냥의 대상이 되어 부대가 전멸당하시피하여 해체되어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 일본 해군의 함대 전력이 대부분 소진되고 남은 공중전력은 본토 방공전에 투입되기 시작하면서 겐다 미노루 대좌의 제안으로 다시 설립되었고 이 부대가 사람들이 아는 제343 해군항공대이다.

2. 종류

하야부사 부대(隼部隊)와 츠루기 부대(剣部隊)가 있다.

2.1. 하야부사 부대(隼部隊)

최초의 국지전투기부대(局地戦闘機部隊)로 요격기 부대라서 원래는 N1K-J 시덴을 장비해야 했으나 시덴의 개발 지연과 생산량 부족으로 인해 A6M을 장비하면서 1944년 1월에 가고시마 해군항공대 기지에서 편성되었다.

항공기의 배치 숫자 면에서는 강력한 부대로 평가받았으나 인적 구성이 문제라서 분대장도 비행훈련소 정규과정을 얼마 전에 통과한 사람이며 분대원들은 1943년 11월에 긴급 조종사 양성을 위한 단축훈련을 받은 고히(甲飛) 10기로 구성되었으므로 숙련도가 매우 미흡했다.

1944년 2월에 일본 제국 해군의 중요 기지인 트루크 제도를 미군이 공습한 헤일스톤 작전이 발생하고 일본군이 점령한 북마리아나 제도에도 미군이 공습을 시작하자 해당 지역의 방위를 위해서 1944년 4월에 괌, 사이판, 티니안등에 배치되었으나 1944년 6월부터 벌어진 필리핀 해 해전에서 엄청난 타격을 입은 후 1944년 7월 10일에 해체된다.

지휘관은 타게나카 마사오(竹中正雄) 중좌이며 임기는 1944년 1월 1일에서 1944년 7월 10일까지이다. 부대 소속 항공기에 그려진 식별표기는 43이었으며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시에 있는 항공자위대 소속 기지 주변에 위치한 하마마츠 공보관(浜松広報館)에 전시된 A6M은 괌에 배치되었다가 미군에게 격파당한 하야부사 부대 소속의 전투기다.

2.2. 츠루기 부대(剣部隊)

1943년 9월 말에 설정한 절대방위선이 돌파당하고 일본 본토 공습이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일본군 수뇌부들은 일본 본토에서의 결전에 대비하여 결호작전을 진행하기 시작했고 일본 제국 해군의 입장에서도 일본 본토를 수비할 항공부대를 창설하여 적어도 본토 상공에서의 제공권은 확보하고자 했다. 그래서 당시 군령부 작전과 항공부 소속인 겐다 미노루 대좌가 츠루기 부대(검 부대, 剣部隊)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해서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343 해군항공대라고 하면 츠루기 부대를 말하는 것이다.

1945년 3월 13일부터 출격을 시작해서 1945년 3월 19일에 규슈 근해까지 접근한 미국 항공모함 부대를 상대로 제1차 구레 군항 공습에서 첫 전투를 진행했다. 1945년 4월부터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대규모 카미카제 작전인 기쿠스이 작전을 지원하면서 특공기의 진로를 확보하고 제공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투를 진행했다. 1945년 7월 24일에는 제2차 구레 군항 공습에서 방어전을 시행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소모전과 함께 미군의 항공력이 점점 더 강력해지면서 1945년 8월에는 343 해군항공대에도 더 이상 보충인원이나 항공기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가동 가능한 항공기도 20여대로 줄어들었다. 1945년 8월 12일의 공중전이 마지막 전투였으며 일본 제국이 패전한 후 미국 해병대 제22항공단이 343 해군항공대의 무장해제 및 장비인수를 진행하였다.

지휘관은 초대는 미네마츠 이와오(峰松巖) 대좌이며 임기는 1944년 12월 26일부터 1945년 1월 15일까지이다. 2대는 겐다 미노루(源田實 ) 대령이며 임기는 1945년 1월 15일부터 1945년 10월 7일까지다. 부대 소속 항공기에 그려진 식별표기는 343이다.

츠루기 부대라는 명칭도 부대 내부의 공모를 통해서 파사검정(破邪剣正)에서 따온 말이다. 그리고 츠루키 부대 휘하에 있는 부대들도 사기진작의 목표를 위해 독자적인 별명을 붙였는데 제301전투비행대대는 신선조(新選組), 제701전투비행대대는 유신대(維新隊), 제407전투비행대대는 천주조(天誅組), 제4정찰비행대대는 기병대(奇兵隊), 제401전투비행대대는 극천대(極天隊)다. 모두 막말(幕末)메이지 유신 시기에 활동했던 유명한 무력집단이나 부대 명칭으로 신선조는 신센구미의 명칭이었다.

3. 특징

당시 해군 당국은 신형 N1K-J 시덴의 성능을 살리고 효과를 높이고자 남방전선 등 전쟁기간 동안 살아남아 활동 중이던 에이스 조종사들과 숙련된 정비병들을 모아 만들었다. 덕분에 지극히 관료적인 군대 편성을 하는 일본군에서 지휘관부터 조종사까지 모두가 현장전문가/실무자들만으로 이루어진 몇 안 되는 부대였고 카미카제로 대표되는 특공 지원자들 중 기량이 좋은 조종사들을 뽑아 사카이 사부로, 무토 카네요시, 스기타 쇼이치 등 그 지옥도에서도 아직 살아있는 베테랑[1] 조종사들로부터 훈련과 교육을 받았으며 숙련된 정비병들과 통신병들 그리고 개량된 무전기 등 최신 장비들을 지원 받으면서 이 부대는 전력이 약화되던 일본 항공부대 중 가장 정예화된 부대가 되었다.

주력은 시덴이었으며 부대의 정찰기는 C6N 사이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군 내에서도 드물게 이들은 2기 페어의 공중전 편대를 구성하여 리더와 윙맨이 공중전을 벌일때 2기 합동의 연속 및 공동공격을 가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이 전술은 원래 대폭격기 전술로 이용되던 것이었으나 베테랑들로 구성된 덕분에 팀워크가 좋아 4기 편대를 기본으로 하는 미군 전투기를 상대로 하는 대전투기전술에서도 유효했다. 또한 당시 제로센의 몰락에 가장 큰 기여를 했던 문제인 무전기 문제도 개선을 끝마쳐 이전의 무전기보다 비교도 할 수 없게 우수해진 무전기도 장착된 상태였다.

지휘 통신망도 함께 강화되어 있었으며, 최적의 타이밍에 전투가 가능하게 연락장교를 다른 해군 부대와 육군에도 파견시켰다. (당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 심했다.) 또한 적의 빠른 요격을 위해 제 4 비행대의 사이운들이 사전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1945년 3월 19일 마츠야마 상공에서 F6F 헬캣F4U 콜세어로 이루어진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는 SB2C 헬다이버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등 종전까지 우수한 기록을 내었다. 그러나 이후 기지가 미군의 주 표적이 되고 미군 공중전력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강되었기에 수많은 피해를 입고 전과도 점점 줄었다. 여기에 더해서 에이스 부대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당시 상황이 워낙 안좋았고 조종사의 대규모 양성에도 실패한 결과 부대원의 절반 이상은 훈련도도 낮고 실전도 치루지 못한 파일럿으로 구성될 정도였다.

창작물에서라면 굉장히 활약했을 법한 이야기지만 이미 시기도 너무 늦은 후였고, 시덴의 항목에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일본의 상황이 극악이라 운용 가능 기체도 많지 않아 엄청난 활약을 펼치진 못했다. 당장 1945년 7월 24일 343 해군항공대의 기체 21기가 출격해 미군기 16기를 격추했다. 문제는 그날이 구레 군항 공습이었다. 미군 기록에 의하면 1747기가 출격한 그 전투 맞다. 아무리 격추비가 좋아도 저래선 티스푼으로 바닷물 퍼내기였다. 그래도 이들은 종전까지 높은 사기를 유지했고 일본 해군 안에서 최강의 항공대라 평가받았다.

종전 당시의 보고에 의하면 적기를 170기 격추했고 미귀환한 파일럿은 79명, 정찰대와 육상기지를 포함시 97명이었다. 이들이 시덴을 탑승해 적 항공기를 상대로 올린 교환비는 약 1 : 1.5였다. 저렇게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서 저만큼의 전과를 올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던 건 아니었다.

이 부대도 카미카제 특공 명령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단 한 번 받고 그 후로 받지 않았다. 이 당시 비행대장이 시가 요시오라는 인물인데, 자기 부대에 특공 명령이 내려온 걸 겐다 미노루로부터 듣고 니들도 같이 특공을 한다면 우리도 하겠다라는 식으로 겐다 미노루를 통해 대본영에 전달한 이후로 단 한번도 특공 명령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황통호지작전(皇統護持作戦)이라는 비밀작전에 겐다 미노루를 위시한 343 해군항공대의 일부가 가담했다. 작전의 목적은 일본 제국이 패전한 후에 연합군 점령하 일본이 된 상태에서 천황제 유지를 비롯한 일본의 국체가 결정되지 않았으며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이 천황제를 폐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결사대를 숨겨놓았다가 만일 천황제가 폐지될 것 같으면 미군 장교들을 암살하는 등 대규모 군사반란을 일으키겠다는 정신나간 작전이었다.[2] 일본 제국 해군쪽에서는 토미오카 사다요시(富岡定俊) 소장이 지시하여 겐다 미노루를 비롯한 좌관급 이하의 장교 및 겐다 미노루와 함께 결사대를 운영할 지원자를 모집했고 기간은 일생 전체기간인 평생으로 잡았고 23명과 결의를 했다.

그러나 더글러스 맥아더를 비롯한 미국의 수뇌부들이 천황제를 유지하면서 작전은 실행되지 않았으며 각지에 매복한 병력도 패전 1년 후에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심지어 토미오카 사다요시도 패전 2년 후에는 작전이 종료되었다고 알려주었지만 겐다 미노루는 명확하게 해산을 하지 않고 보좌관에게 해체를 살짝 알리는 등 뭉기적거리다가 항공막료장이라는 요직을 역임하고 참의원까지 선출되면서 권력을 누린 끝에 1981년 1월 7일에서야 토고 신사(東郷神社)의 와라쿠덴 홀에서 그 때까지 살아남은 17명 앞에서 황통호지작전의 종료를 선언하며 마무리된다.

4. 매체


1963년 1월 3일에 개봉한 일본 영화 "태평양의 날개"는 343 해군항공대 활동사실에 근거해서 만들었다.


[1] 예외적으로 당시 일본군 대표 에이스 중 한명이던 이와모토 테츠조는 203 항공대 소속이었다. 겐다가 열심히 에이스들을 끌어모으긴 했지만 당시 일본군 상황이 워낙에 막장이라 "에이스 조종사를 주시오"라고 해도 "여깄다"며 선뜻 에이스를 보내주는 부대가 거의 없었기에 겐다와 연줄이 있던 이들이 다수 모일 수밖에 없었다.[2] 진짜로 실행했다면 천황제 폐지는 당연한 일이고 쇼와 덴노도 전쟁범죄로 처벌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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