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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레 외곽[1]에 정박하던 중 미 해군 함재기에 공습당하는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 |
1. 개요
영어 | Attacks on Kure and the Seto Inland Sea |
일본어 | 呉軍港空襲(くれぐんこうくうしゅう) |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7월 24일부터 28일까지 일본 제국의 4군항 중 하나인 구레 항에 남아있던 일본 제국 해군 연합함대 잔존 전력을 말살하기 위한 미-영 연합군 고속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대규모 공습이다. 구체적인 공습목표는 구레항과 주변에 잔존한 일본 제국 해군의 군함들이었다.
이 공습이 결정타가 되어 전쟁 후반까지 겉보기엔 세계 제3위의 해군력을 유지하던 일본 제국 해군의 수상함대는 사실상 소멸했다. 이후 일본 제국 해군은 수상함대를 거의 잃고 육상기지에 전개한 해군항공대와 해군육전대만 전력으로 보유하는 사실상 전투불능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해당 공습에서 큰 활약을 한 미 해군은 1945년 3월 9일의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커티스 르메이의 지휘하에 일본 본토 공습에서 큰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미합중국 육군항공대과 본격적으로 전쟁 이후의 지분을 생각한 다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전후에는 미국의 전통인 대규모 군비축소가 발생할 것이기에 강력한 경쟁자인 공군이 발생하는 것을 막으려고 미국 육군항공대는 쓸모가 없으니 이전처럼 육군과 해군을 보조나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미합중국 육군항공대는 이름만 육군 항공대지 실질적으로는 헨리 아놀드 원수가 직접 지휘하고 관리하는 독립된 병종이며 곧 공군으로 독립할 예정이었으므로 미국의 3대 병종간의 싸움은 이제 시작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2]
2. 배경
1945년 7월 당시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일본 제국 해군중장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3]이었다. 오자와 제독은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전력을 보존하여 패전 후를 대비하려고 했다. 1차대전에서 패배한 독일 제국의 경우를 보아도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과 베르사유 조약이라는 두번의 타격을 입고도 최소한의 해군전력은 보존했으며 패전후에 연합군에게 배상함 명목으로 넘어갈만한 중요한 군함들이 없으면 그만큼 쇼와 덴노에게 가해질 전쟁책임의 양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전파들은 남은 수상함을 모조리 해안 요새로 활용하여 결호작전에 따른 일본 본토 결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양측은 목적은 다르지만 어쨌든 함대의 출항을 막는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었다.그래서 보급 및 수송 목적으로 움직이는 소형함들을 제외하면 일본의 모든 대형함들은 항구에 숨어 있었다. 게다가 움직이고 싶어도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 (매우 투덜거리며)[4] 깔아 놓은 기뢰밭을 돌파해야 했다. 여기에 더해서 통상항로가 끊어지고 일본 국내에 비축된 자원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당장 대형함을 움직일 연료도 바닥나 있었다.
연합함대 최후의 전력이 이런 식으로 일본 본토의 구레 군항과 주변에 숨어있는 걸 본 미군 수뇌부는 골치 아파하면서도 후일 있을 일본 본토 상륙전에서 일본 해군이 방해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사전에 미리 연합함대의 전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미 구레는 3월 19일에 대규모 공습을 받은 바 있었는데 이때는 일본군이 마지막까지 남은 전력을 다한 결사적 저항을 했다. 실제로 1945년 3월 19일 제1차 구레 공습 당시 일본은 대규모 카미카제는 물론 N1K-J 시덴으로 구성된 343 해군항공대 같은 정예 요격기 부대까지 출동시켜 결사적으로 구레항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미군도 항공모함 CV-13 프랭클린이 대파되고 함재기 부대가 큰 피해를 입는 등 손실이 많았으며, 항구 폭격 자체는 실행되었지만 성과가 적었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의 전함 4척과 정규항공모함 1척, 경순양함 1척에 명중탄을 줘서 소파시키고 항공기 25대를 파괴하는 매우 적은 전과를 기록하는 동안 항공모함 2척이 큰 피해를 입고 27대의 항공기가 격추되고 59대가 항공모함 프랭클린이 불타면서 격납고 안에서 박살났으며 인명피해도 825명이나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1945년 7월의 시점에서는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카미카제의 소모로 더 이상 띄울래야 띄울 전투기도 없었고 그나마 남은 잔존 기체들은 본토 결전을 대비하여 출격을 극도로 자제하는 실정이었다. 반면 미군의 전력은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강화되고 있었다. 이미 F6F 헬캣, F4U 콜세어, P-38 라이트닝, 그리고 P-51 머스탱과 같은 최신 기체들이 대규모로 배치되어 태평양 상공을 장악하던 상태였고 사이판 전투, 오키나와 전투로 B-29 같은 폭격기까지 폭장량을 제대로 활용가능한 기지를 확보했으며 이오지마 전투로 비상활주로 및 호위기를 발진시킬 전진기지까지 확보한 상태였다. 그래서 도쿄 대공습과 같은 일본에게는 악몽같은 공습이 실현되던 때였다.
미 해군 제3함대 사령관 해군 대장 윌리엄 홀시 제독은 휘하의 고속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동원하여 구레를 공격하기로 했다. 미 해군은 해군 중장 존 S. 매케인 시니어 제독[5]이 지휘하는 TF38을 동원했고 영국 해군도 3함대에 편입된 TF57에 속한 항공모함 3척인 HMS 포미더블, HMS 인디패티거블, HMS 빅토리우스를 동원했다. 이 공격은 고속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일본 본토 공격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미국 해군이 주축이 된 작전이지만 홀시의 함대에는 영국 태평양 함대가 동행하고 있었다. 이는 태평양 전쟁에서 자국의 발언권을 강화하려는 윈스턴 처칠이 루즈벨트 생전에 담판을 통해 얻어낸 성과였다. 그래서 어니스트 킹과 같은 미국 해군의 수뇌부 입장에선 "아니, 우리가 잽스 애들 다 패죽여놔서 할 것도 없을 텐데, 와서 대체 뭐 하려고?" 수준의 취급을 받았었다. 딱히 틀린 생각도 아닌 것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 전장에서 영국은 1941년 후반 - 1942년 초에 남방 작전으로 일본군에게 한 번 거하게 털린 뒤 1942년의 실론 해전을 마지막으로 해서 1944년까지 태평양 전선에서 적극적인 전투 행동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키나와 전투에서 동시에 벌어진 대규모 카미카제 공습인 키쿠스이 작전에서 영국 태평양 함대가 막아낸 일본의 전력과 전과는 훌륭했으며 미군의 손해를 줄이는데 공적을 세웠다. 그래서 미국 해군의 전선 지휘관중 최고위 지휘관인 체스터 니미츠는 늦게나마 태평양 전쟁에 다시 적극적으로 참여한 영국 해군을 매우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홀시도 덕을 본 것이 있으니 영국 태평양함대를 무시할 수는 없었고 일본군이 아직 일본 본토에 얼마나 많은 항공전력을 보유하고 있는지도 불명확했으며 영국 태평양함대도 윈스턴 처칠이 강력한 명령을 내려서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데 절대 뒤로 빠지지 말라고 지시하는 등의 여러가지 사유가 발생했다.
따라서 홀시는 영국 태평양 함대 사령관에게 오사카와 시코쿠에 일본군 함대 및 기지가 있으니 그쪽을 처리해 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고 영국군 사령관은 그 정중한 요청을 흔쾌히 수락하여 구레 공습에서만 빠지게 된다. 실제로 일본 제국 해군이 구레 군항에만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 본토에 있는 중요 해군 기지인 진수부도 4곳이나 존재했으며 나름대로 일본 제국 해군의 전력이 분산배치된 곳도 있었기에 영국 해군이 구레 군항 외에 다른 곳을 공격하는 것은 합리적이었다.
3. 공습
구레 군항에는 1945년 3월 19일부터 1945년 7월 28일까지 9회의 공습이 가해졌는데 이걸 모두 합쳐서 구레 폭격(Bombing of Kure)이라고 부르며 그 중에서 1945년 3월 19일에 미국 제58 기동함대(Task Force 58)가 주도한 제1차 구레 군항 공습은 구레 공습(Attack on Kure)이라고 부르며 여기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제2차 구레 군항 공습은 1945년 7월 24일과 7월 28일의 2일간에 벌어진 구레 및 세토 내해 공습(Attacks on Kure and the Seto Inland Sea)이다.예시구레 폭격을 시기별로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천천히 살펴보면 기뢰를 투하해서 항로를 막고 구레와 주변에 있는 공업시설을 폭격해서 군함을 수리할 능력과 항공기 보급을 막은 후에 시가지를 폭격해서 수리 및 복구인원을 흩어버린 후에 군함과 군항을 폭격하고 마무리 공격까지 들어가는 체계적인 공습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1 | 1945년 3월 19일 | 제1차 구레 군항 공습 |
2 | 1945년 3월 30일 | B-29가 구레 및 히로시마 항로에 기뢰를 투하 |
3 | 1945년 4월 초 | B-29가 구레 항구와 군항에 근접해서 기뢰를 투하 |
4 | 1945년 5월 5일 | B-29가 구레에 위치한 히로 해군 항공기 공창(広海軍工廠)을 공습 |
5 | 1945년 5월 5일 | B-29가 구레 및 히로시마 접근 항로에 기뢰를 투하 |
6 | 1945년 6월 22일 | B-29가 구레에 위치한구레 해군 공창(呉海軍工廠)을 공습 |
7 | 1945년 7월 1일 | B-29가 구레 시가지를 폭격. 도시의 40% 파괴 |
8 | 1945년 7월 24일과 1945년 7월 28일 | 제2차 구레 군항 공습 |
9 | 1945년 7월 28일 | B-24가 잔존 군함을 공습 |
3.1. 7월 24일
1945년 7월 24일 날이 밝는 것과 동시에 말 그대로 하늘을 까맣게 메운 미합중국 해군 함재기들이 구레항으로 몰려들었다. 이 날 미 항공모함 부대가 띄운 소티는 무려 1,747소티로 그야말로 가공할 물량이었다. 이 정도 수준의 대규모 항공모함 항공대 공습은 전례가 없었다. 진주만 공습 때 일본군의 1, 2차 공격대의 총 소티가 350소티였으니 다섯배에 가까운 소티를 날린 것이다.이에 대응하는 일본 제국 해군의 전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항공 전력은 미약한 데다가 일본 본토 결전에 대비해서 출격 자체를 꺼리는 상황이었고 대공포도 태부족인 데다가 레이더도 당시 일본군의 기술력 덕분에 능력이 바닥을 달리던 상태였다. 이에 더해서 선박 수리 시설과 독 등 항구 자체를 대공 방어할 필요성 때문에 대다수의 함정에 설치된 대공포까지 대부분 철거해서 육상 진지로 이동한 상태였으므로 이번 폭격의 주요 목표인 대형함들 중에 그나마 대공 사격이 가능했던 건 사실상 중순양함 아오바 정도였다. 그래서 이세처럼 주포 고각을 최대로 올린 후 3식 통상탄을 마구잡이로 발사하는 것이 대공 사격의 전부인 경우도 많았다.
그나마 아오바는 대공 화기를 증설하고 군항의 얕은 곳에 정박해서 대공포 진지로서 나름대로 준비되었지만 이건 배의 수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일본 해군이 해상 대공포 진지로 활용한 경우였다. 구레 군항에는 그 외에도 전손 판정을 받아 대공 포대로 개조된 가이텐 모함 키타카미가 있었고 대공 화기를 떼어내지 않은 항공모함 카츠라기가 있었지만 아무리 대공 화기를 충실히 갖추었다고 해도 너무나 열세였다. 여기에 더해서 343 해군항공대를 주력으로 하는 요격기들이 구레 군항을 방어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요격작전에 돌입했고 늦게나마 주변 지역의 일본군 항공기들도 가세했으나 중과부적상태였다.
당연하게도 이런 식으로는 공습에 저항할 수 없다. 그래서 공습이 시작되자마자 가장 큰 목표였던 항공모함 아마기가 집중적으로 폭격을 얻어맞고 대파당했고 아마기의 함장 히라츠카 시로 대좌는 전원 퇴함 명령을 내려야 했다. 뒤이어 항공순양함 오요도도 폭격 당했다. 사실상 기함 역할을 한 두 함선이 얻어맞는 동안 구레 항의 나머지 대형함들도 신나게 폭탄 세례를 받는 중이었다. 대부분의 대형함들은 공습에 제대로 된 대응을 못 했고 항구 주변에 도배된 기뢰 때문에 도주조차 할 수 없었다.
운류급 항공모함 2번함 아마기와 3번함 카츠라기, 이세급 전함 이세와 휴우가, 공고급 순양전함 3번함 하루나, 아오바급 중순양함 1번함 아오바, 생존 구축함들, 그리고 러일전쟁[6] 때 쓰다 예비역으로 짱박혀 있던 걸 급하게 꺼내온 구식 장갑순양함 이와테와 이즈모까지 모조리 다 공격당했다. 그나마 수심이 얕아서 완전한 침몰은 면했지만, 대부분은 착저 상태로 상부 구조물만 을씨년스럽게 수면 위에 내놓은 상태였고 일부는 아예 전복된 상황이었다. 휴우가는 살아남았지만 27일에 좌초함으로써 함생을 끝냈다.
같은 시각 영국 해군은 오사카 항을 공격해 호위항공모함 카이요와 700톤급 호위함 2척을 격침시키고 단 4기의 항공기 손실만을 입었다.
3.2. 7월 28일
24일의 대공습 이후 잠시 휴식을 취한 미 해군은 항공 정찰 결과 의외로 다수의 대형함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추가 공습을 준비했다. 사실 24일의 공습으로도 대형함들은 대부분 중파 내지 대파되고 구획 일부가 침수된 상태였지만 미 해군은 진주만 공습 때 격침 당한 전함들을 대부분 되살린 자신들처럼 일본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가능성 자체를 없애 버리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일본은 미군처럼 대형 함선들을 건져서 수리할 능력도 기술력도 없었고 무엇보다 이미 필수 자원도 바닥난 상태였다. 상술했듯 전쟁 기간 내내 3번이나 대파당하고도 돌아온 전함도 아니고 중순양함급인 아오바도 수리를 못해서 기동 불능 상태의 해상 대공포 진지로 전용될 정도였다.28일의 공습은 그나마 중요 전력이었던 이세, 하루나, 아오바에 집중되었다. 이세는 16발, 하루나는 8발의 폭탄을 맞고 완벽하게 격침됐으며 아오바도 4발의 폭탄을 맞았다. 뒤이어 24일에 화를 면한 항공모함 카츠라기도 2,000파운드 폭탄을 맞고 중파당했고 이미 대파된 아마기도 확인사살로 폭탄을 맞았으며 오요도도 폭탄 4발을 더 맞고 전복되어 격침되었다. 그러나 아오바가 아직 안 죽었다고 판단한 미군은 오키나와에서 날아온 육군 항공대의 B-24 폭격기 79대를 추가로 투입했고 이들은 아오바에게 4발의 폭탄을 더 먹여서 숨통을 끊어 놓았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B-24 2기가 격추되고 14기가 피격되는 피해를 입었는데 정황상 아오바가 격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은 대부분의 대공포가 철거되어 대공사격이 불가능할 지경까지 놓인데다가 B-24와 싸우지도 않은 하루나가 B-24를 격추했다고 주장함으로서 마지막까지 추한 꼴을 보였다.
2일간의 공습으로 일본은 후술할 군함 손실과 함께 306기의 항공기를 손실하고 392기의 항공기가 손상되었다. 인원 손실도 커서 780명이 전사하고 2,000명이 부상당했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대공사격능력도 없고 연료가 없어서 이동도 불가능한 대형 군함들의 승조원을 육상의 대공포 진지 등 다른 곳으로 모두 재배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군함이 폭격을 맞아서 격침당할 때 피해가 발생한 것이 크다. 그리고 미국은 133기의 항공기가 격추되고 102명이 전사하여 상대적으로 매우 가벼운 피해를 보았다.
4. 결과
1945년 7월의 일본은 1941년 12월의 미국과는 다르게 이 피해를 복구할 여력이 전무했다. 1941년에 일본 제국 해군이 진주만 공습을 했을 때는 철저하게 전함을 노렸고 반격을 할 수 없도록 항공대도 같이 두들겼다. 그러나 정작 치명적인 수리 시설이나 특히 연료 저장시설은 그냥 내버려 둬서 재정비할 수 있는 여유를 줘 버리는 실책을 저질렀고 특히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우려대로 가장 중요했던 미국 태평양함대 항공모함들이 없었던 관계로 이들이 훗날 미군이 태평양의 제해권을 되찾는데 일등공신이 되는 빌미를 제공해 버렸다.반면 1945년에 벌어진 구레 군항 공습의 경우에는 일본 제국 해군은 이미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을 대거 상실하며 전쟁 우위를 잃어버렸고 이후 과달카날 전역에서 지독한 소모전을 마지막으로 공습도 포기하고 수세로 몰렸으며 미군의 공격 속에 필리핀해 해전, 레이테 만 해전으로 남은 항공모함 기동부대와 수상함대 주력도 박살난 데다 급기야 '일본 해군의 자랑'이라 불렸던 야마토급 전함마저 오키나와 특공으로 잃었다. 즉, 이미 전쟁 수행 능력은 사실상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구레 군항에 정박했던 함선은 아직 기동 가능하거나 수리 중, 심지어 건조 중이던 함선들이었으나 이들마저 이 공습으로 고철이 되었다.
인원 측면에서도 대본영을 비롯한 일본군 수뇌부의 실책으로 인해 수많은 제로센 에이스들과 함선 승조원들이 모조리 전사했고 인적 자원의 손실을 메꾼답시고 본토에서 지원 사업에 열중하던 기술자들까지 상당수 징집해서 알보병으로 소모해 버린 덕분에 생산은 커녕 보수 유지와 관리도 엉망이었고 공장 시설의 노후화로 인해 남은 기술자들은 생산된 제품의 수정 및 마무리 작업을 하기에도 모자라서 결국 제대로 기술훈련도 못받은 일반인들이 생산공정의 대부분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당연히 품질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1945년 3월의 도쿄 대공습부터 미군의 공습이 본격적으로 효과를 보인 후에는 공장 시설까지 모조리 파괴되었고 원자재는 아예 수급조차 되지 않았으니 미군과 같은 복원력은 불가능했다.
구레 군항 공습으로 일본 제국 해군이 상실한 전력은 매우 많다. 그래서 항공모함 1척[7], 전함과 항공전함 3척[8], 중순양함 2척[9], 경순양함 1척[10], 장갑순양함 2척[11], 구축함 1척[12], 보조함 2척[13], 잠수함 1척[14]을 상실하고 306기의 항공기 손실과 392기의 항공기 손상을 입은 일본 해군 연합함대는 더 이상 남은 게 없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군함들도 손상을 입어서 출격이 불가능한 상태였으며, 마지막 남은 대형함은 대파 당한 채 요코스카에서 정박 중이던 일본 해군의 마지막 전함[15] 나가토와 철저하게 은닉된 항공모함 준요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본토 상륙에 맞설 해상 세력은 완전히 소멸하여 고정 포대 역할이라도 할 만한 배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만주 전략 공세 작전에서 함경북도 청진과 쿠릴 열도에 소련 해군이 몇 척 안 되는 전투함과 중소형 상륙 함정들로 상륙 작전을 펼칠 때 이에 대응할 군함이 없었다. 과거의 일본 해군이었다면 정말 쉽게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냥 굴욕이다.
순양함급도 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로 이 공습으로 토네와 아오바, 오요도가 모두 날아가면서 중순양함은 고사하고 일본 본토에 기동 및 실전 투입이 가능한 순양함이 단 한 척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해외로 눈을 돌리면 싱가포르에 묘코급 중순양함 묘코와 타카오급 중순양함 타카오가 있긴 했지만 이들도 손상을 입어 이동불능 상태로 고정된 부유포대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전력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도 구축함급으로 내려가면 전투가 가능한 생존함이 몇 척 남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아카츠키급 구축함 히비키와 일본군 최고의 강운으로 유명한 카게로급 구축함 유키카제가 그들이다. 이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아 각각 소련과 대만에 배상함으로 넘겨졌다. 그리고 그 밑의 체급이었던 해방함 등 중소형함은 다수가 살아남았는데 어차피 대규모 해전 상황에서는 쓸 데가 없었기에 별 의미가 없었다.
잠수함들은 어느 정도 건재했지만 주 전력인 수상함대가 이미 전멸한 상황에다가 대서양에서 U보트를 지겹도록 상대하고 온 미 해군의 대잠 전력이 충실했기 때문에 큰 변수는 아니었다. 그래도 막판에 일본 제국 해군이 기존의 산개선이나 산개면 같은 답없는 전술을 버리고 잠수함이 스스로 자유롭게 항해하며 통상파괴전을 하라고 잠수함의 족쇄를 풀어준 덕분에 일본군의 잠수함들이 매우 늦게나마 전과를 조금씩 올리기 시작하고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대형 전과를 올렸는데 그게 바로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이다.
마지막으로 구레 군항 공습은 사실상 일본 제국에 해군이 따로 존재할 이유 자체를 없애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패전 당시에는 100만에 달하는 해군 장병들 대다수가 육상기지와 해군 항공대로 돌려져 있었고 따라서 일본 제국 육군에서 계속 육해군을 합쳐 육군이 사실상 통솔하는 통합군을 만들어 버리자고 제안하는 것을 해군이 거절할 명분이 이 공습과 함께 사라졌기 때문에 패전시까지 해군은 이 제안을 거절하는 데 꽤 애를 먹었다고 한다.
4.1. 피해를 입은 군함
4.1.1. 전함 및 항공모함
구레 군항 공습의 주요 목표였기 때문에 2일간의 공습으로 철저하게 타격을 입혔다. 여기에 더해서 구레 군항의 수리시설 자체와 도크 및 건조중이던 군함도 공습을 받아서 파괴되었기에 항공모함 호쇼처럼 피해가 작은 경우를 제외하면 중파 이상의 군함들은 아예 수리도 불가능했으니 사실상 격침이었다. |
출처, US National Archives |
일본 전함 중에서는 최고의 수훈함인 공고급 순양전함 최후의 생존함. 대부분의 군함들과 마찬가지로 부포와 대공화기 대부분이 철거되어 육상으로 옮겨진 상태였기에 공습에 제대로 저항할 수도 없었다.
3월 19일의 공습으로 폭탄 1발, 6월 22일에 직격탄 1발[16], 7월 24일의 공습으로 폭탄 1발을 맞았으나 피해는 적었다. 그러나 7월 28일에는 8발의 폭탄을 맞고 확실하게 격침.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24일과 28일의 명중탄이 20발인데 명중탄과 지근탄의 기준이 미국과 달랐기 때문에 생긴 차이.
3월 19일의 공습으로 폭탄 1발, 6월 22일에 직격탄 1발[16], 7월 24일의 공습으로 폭탄 1발을 맞았으나 피해는 적었다. 그러나 7월 28일에는 8발의 폭탄을 맞고 확실하게 격침.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24일과 28일의 명중탄이 20발인데 명중탄과 지근탄의 기준이 미국과 달랐기 때문에 생긴 차이.
- 이세급 전함 이세 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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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가와 함께 세계에서도 둘 뿐인 항공전함.
3월 19일의 공습으로 폭탄 2발을 맞았고 7월 24일의 공습에서는 폭탄 4발을 맞아 함장을 포함한 50명이 전사했으며 28일의 공습에서는 16발의 폭탄을 맞고 격침 당했다. 2번 주포탑에 3식 통상탄이 장전된 채로 격침되었기 때문에 포탄 제거를 위해 허공에 발포한 것이 최후의 포격이었다.
3월 19일의 공습으로 폭탄 2발을 맞았고 7월 24일의 공습에서는 폭탄 4발을 맞아 함장을 포함한 50명이 전사했으며 28일의 공습에서는 16발의 폭탄을 맞고 격침 당했다. 2번 주포탑에 3식 통상탄이 장전된 채로 격침되었기 때문에 포탄 제거를 위해 허공에 발포한 것이 최후의 포격이었다.
- 이세급 전함 휴우가 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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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G-490239, US National Archive, 출처 |
7월 24일의 공습으로 폭탄 10발을 맞아 함장을 포함한 204명의 전사자를 냈고 27일에 좌초되면서 격침.
- 운류급 항공모함 아마기(天城) 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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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17] |
7월 24일의 공습으로 500파운드 폭탄과 2,000파운드 폭탄에 맞아 대파되었고 아마기의 함장 히라츠카 시로 대좌는 전원 퇴함 명령을 내려야 했다. 28일의 공습에서 폭탄 여러 발을 추가로 맞은 후 29일 오전 10시에 옆으로 쓰러지면서 전복되며 격침.
- 항공모함 류호(龍鳳) 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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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호 영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3월 19일의 1차 구레 군항 공습에서 폭탄 3발과 로켓탄 2발을 먹고 Total loss(전손. 全損) 판정을 받았다. 이로 인해 항공갑판과 엘리베이터, 보일러가 파손되어서 작전용으로는 완전히 사용 불능이 되었다. 그러나 4월 1일 도크에서 침수로 들어온 물을 빼냈고 다시 띄우긴 했으나 수리할 가치가 없다고 판정되었다. 이후에는 폐선으로 간주되어 그냥 정박해 있었으며 7월 24일과 28일의 구레 군항 공습에서는 이미 무력화된 상태라서 거의 공격 받지 않아서 살았다. 결과적으로는 살아남은 셈이 되어서 위의 사진과 같이 남아 패전 후 스크랩. 덕분에 전후 생존함이라 보는 경우도 많다. 물론 이전의 공습에서 진작 항공모함의 기능은 상실되어서 별 쓸모는 없었다.
- 운류급 항공모함 카츠라기(葛城) 중파, 비행갑판 파괴로 작전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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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배와 달리 대공 화기가 철거당하지 않았기에 그나마 저항할 수 있었다. 24일에 500파운드 폭탄 1발, 28일에 2,000파운드 1발을 먹고 13명의 전사자와 12명의 부상자 발생.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항공모함의 항공갑판은 야전에서 응급수리가 가능할 정도로 수리가 빠르고 쉬운 경우가 많으나 중파 판정까지 받고 비행갑판 파괴로 작전불능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이유는 내상이 심하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나온 것처럼 비행갑판에 난 구멍이 매우 크며 주변의 항공갑판도 위쪽으로 돌출된 상태다. 이런 현상은 폭탄이 내부 깊숙한 곳에서 폭발하고 폭발위력이 함체 내부를 모조리 박살내다가 비행갑판 위까지 솟아오르면서 화산처럼 폭발위력이 분출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응급수리가 불가능하고 수리시설이 갖추어진 항구에서의 수리에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중상을 입고 그냥 물 위에 떠 있는 상태나 다름이 없는 상태다. 사실상 위에 언급한 류호보다 상태가 약간 양호한 정도라고 보면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항공모함의 항공갑판은 야전에서 응급수리가 가능할 정도로 수리가 빠르고 쉬운 경우가 많으나 중파 판정까지 받고 비행갑판 파괴로 작전불능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이유는 내상이 심하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나온 것처럼 비행갑판에 난 구멍이 매우 크며 주변의 항공갑판도 위쪽으로 돌출된 상태다. 이런 현상은 폭탄이 내부 깊숙한 곳에서 폭발하고 폭발위력이 함체 내부를 모조리 박살내다가 비행갑판 위까지 솟아오르면서 화산처럼 폭발위력이 분출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응급수리가 불가능하고 수리시설이 갖추어진 항구에서의 수리에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중상을 입고 그냥 물 위에 떠 있는 상태나 다름이 없는 상태다. 사실상 위에 언급한 류호보다 상태가 약간 양호한 정도라고 보면 된다.
- 추가로 구레항에서 건조 중이던 항공모함 아소도 폭격으로 화재가 나서 추가 공정이 불가능해졌고, 당시엔 이미 전력에서 이탈한 구식함이었지만 카와치급 전함 셋쓰(摂津)도 구레항 인근에서 공습으로 좌초되었고, 인양 후에도 추가적인 공습을 받아 완전히 격침되었다.
손상을 입은 군함은 항공모함 호쇼로 1발이 피격된다. 폭탄 1발이나 로켓탄 1발이 명중했으며 15일만에 수리를 완료했다. 그러나 호쇼의 크기가 너무 작고 구식이라서 제대로 된 함재기를 출격시킬 수 없어서 이미 연습항공모함으로 전환된 상태라 쓸만한 전력이 아니었다. 사실 이 때쯤 가면 함재기를 제대로 운용할 조종사도 매우 부족해서 일본에서 항공모함 자체를 제대로 운용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4.1.2. 순양함
순양함도 합계 5척이 격침되면서 일본 본토에서 가동 가능한 순양함은 아가노급 경순양함 4번함 사카와밖에 없었고 1944년 11월 30일에 취역해서 훈련도 제대로 안된 상태였으며 이미 연료부족으로 보일러를 정지한 상태인채 군항에 계류된 상태에서 육상에서 전기선을 연결해서 사용하는 등 출격 및 전투수행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므로 사실상 가용가능한 순양함도 구레 군항 공습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
저승에서 3번이나 살아 돌아와 마지막까지 구레를 수호하던 일본 본토 최후의 중순양함. 일본에 귀환한 중순양함은 아오바와 토네 2척이지만 토네는 구레에서 도망간 데다 일본군 공식 기록에 경순양함으로 기재되어 있으니 논외이다. 생존한 중순양함이라면 타카오와 묘코가 있지만 이들은 싱가포르에서 대공 포대가 된 후 영원히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므로 아오바는 정말로 일본 본토 최후의 중순양함이었다.
3월 19일의 공습으로 폭탄 1발, 7월 24일의 공습으로 폭탄 1발을 먹고 착저. 7월 28일의 공습에서는 함재기로부터 폭탄 4발, B-24 폭격기 편대로부터 폭탄 4발을 더 먹고 후미 부근이 절단되면서 격침되었다. 용골이 부러지고 선체가 절단될 수준이었으므로 완전히 파괴된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
다른 군함과 달리 착저 이후에도 미군과 일본군 모두 침몰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28일에 중요 목표물로 선정된 이세, 하루나와 달리 대공 전투가 가능했기에 최후까지 저항했다. 마지막 공습에서 미 해군과 육군항공대가 연속 공격을 가한 것도 구레 군항 공습 중 유일한 사례이며 이 날을 끝으로 대공 전투가 가능한 일본 해군 수상함 전력은 사실상 전멸했다.
3월 19일의 공습으로 폭탄 1발, 7월 24일의 공습으로 폭탄 1발을 먹고 착저. 7월 28일의 공습에서는 함재기로부터 폭탄 4발, B-24 폭격기 편대로부터 폭탄 4발을 더 먹고 후미 부근이 절단되면서 격침되었다. 용골이 부러지고 선체가 절단될 수준이었으므로 완전히 파괴된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
다른 군함과 달리 착저 이후에도 미군과 일본군 모두 침몰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28일에 중요 목표물로 선정된 이세, 하루나와 달리 대공 전투가 가능했기에 최후까지 저항했다. 마지막 공습에서 미 해군과 육군항공대가 연속 공격을 가한 것도 구레 군항 공습 중 유일한 사례이며 이 날을 끝으로 대공 전투가 가능한 일본 해군 수상함 전력은 사실상 전멸했다.
-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利根) 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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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바와 더불어 살아서 돌아온 유이한 중순양함이지만 일본군은 끝까지 경순양함으로 분류했다. 3월 19일의 공습 이후 히로시마현 에타지마시의 섬으로 이동했으므로 구레 군항에 정박한 군함은 아니다.
7월 24일에 9대의 함재기의 공격으로 폭탄 3발을 맞고 착저하고 28일에 본격적인 공습을 당해 격침되었다.
7월 24일에 9대의 함재기의 공격으로 폭탄 3발을 맞고 착저하고 28일에 본격적인 공습을 당해 격침되었다.
- 항공순양함 오요도(大淀) 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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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즈모급 장갑순양함 이즈모(出雲) 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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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상으로는 1등순양함(중순양함)이지만 사실은 구식 장갑순양함이었다. 퇴역후 군축조약에 따라서 무장을 제거하고 보관중이었다가 훈련함으로 전환 후에 수상함 손실이 늘어나자 다시 재취역하려고 했으나 격침된다.
7월 28일의 공습으로 지근탄 3발을 맞고 격침된다. 구식 군함이라 제대로 된 수밀격벽과 벌지가 갖추어지지 않아서 침수속도가 매우 빨랐다.
7월 28일의 공습으로 지근탄 3발을 맞고 격침된다. 구식 군함이라 제대로 된 수밀격벽과 벌지가 갖추어지지 않아서 침수속도가 매우 빨랐다.
- 이즈모급 장갑순양함 이와테(磐手) 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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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모와 마찬가지로 문서상으로만 1등순양함인 장갑순양함이었다.
7월 24일에 지근탄 3발을 맞고 격침된다. 이즈모와 동일하게 구식군함이라서 지근탄으로 발생한 침수를 제대로 막지 못해서 침몰한다.
7월 24일에 지근탄 3발을 맞고 격침된다. 이즈모와 동일하게 구식군함이라서 지근탄으로 발생한 침수를 제대로 막지 못해서 침몰한다.
4.1.3. 보조함
마츠급 구축함 나시가 격침되어 구축함 1척이 격침되고 제2호형 해방함 제4번함과 제30번함이 격침되어 해방함 2척이 격침되었으며 센토쿠급 잠수항공모함 I-404은 공습으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는 데 실패하여 격침된다.구레항 인근에서도 잠수모함 코마와시(駒橋)가 격침되어 잠수모함 1척이 격침되었고 건조공사중이던 잠수함 I-205도 침몰했다. 경항공모함 카이요도 기뢰에 의한 손상으로 좌초된 상태에서 공습을 맞고 배수펌프가 작동하지 않아서 복구를 포기하고 방치된 상태가 되었으므로 격침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손상된 군함은 경순양함 키타카미 1척과 구축함 4척과 호위구축함 1척 및 수송선으로 개조된 야쿠모급 장갑순양함 1번함 야쿠모 1척이다.
4.2. 생존함
구레에 있던 대형함들은 모조리 개박살났지만 경항모 호쇼는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 외에도 가이텐 모함 키타카미, 오래 전에 군함으로서의 수명이 끝난 류호, 중파된 카츠라기 정도가 생존했지만 이들 모두가 중파 이상의 손상을 입어서 출격과 임무수행이 불가능했으므로 군함으로는 쓸모가 없었다. 이외 중소형함들은 상당수가 살아남았으나 어차피 바다로 나가 봐야 격침당할 운명이었고 그걸 빼도 애초에 나갈 연료도 없었다. 일본이 계속 저항하면 추가 공습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당한 후에 항복했다.전후 생존함들은 파손이 심각하여 항해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판명한 소수를 제외하고 일본 해군이 귀국하는 구 일본군 장병들과 민간인들을 수송하는 것과 패전과 함께 쓸모없어진 기뢰 제거 등을 수행하기 위해 바로 해체되지 않고 상당기간 유지했다. 하지만 일본의 해군성이 해산하고 제2복원성으로 1945년에 전환되면서 해당 기간 동안 복원함이라는 임시 분류하에 임무를 수행하다가 해상보안청 소속으로 변경된 후 전후 처리가 완료된 다음에 스크랩 처리되어 해체되었고, 일부는 전쟁 피해국에 배상 명목으로 공여되어 함명을 변경한 뒤 사용되었다.
5. 일본어 위키백과에서의 극우 유저들의 왜곡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呉軍港空襲'이라는 문서명으로 구레 군항 공습을 서술하고 있다. 다만 영어 위키백과와 차이점이 있는데 영어 위키백과는 구레 군항에 가해진 전체적인 공습을 다루는 문서를 만든 다음 1945년 7월의 구레 군항 공습과 1945년 3월의 구레 군항 공습을 각각 다른 문서로 분리해 서술하고 있는 반면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3월의 공습과 7월의 공습을 모두 '呉軍港空襲' 문서에 포괄해 서술하였다.여기에 대해 일본군이 어느 정도 전과를 거둔 3월 공습을 같이 서술하여 일본군이 나름 잘 싸운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서술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있다. 하지만 3월에 공습을 했든, 7월에 공습을 했든 어차피 구레에 가해진 대규모 폭격이어서 같은 문서 내에 서술해도 무방한 것도 사실인 만큼 이 부분은 문서를 읽는 개인이 판단할 문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呉軍港空襲 문서 서술에는 주요한 특징이 있는데 '大破着底(대파착저)', '転覆(전복)', '浸水擱座(침수각좌(침수좌초))'라는 말이 지속적으로 남발한다는 것이다. 해당 문서 기준으로 2008년 2월까지만 해도 대파착저라는 말이 남발되었으며참조 이후 침몰로 바뀌어 서술되긴 하였지만 2017년에 어떤 이용자가 침몰을 죄다 대파착저로 고쳐 놓는 일도 있었다.참조 굳이 침몰을 대파착저, 전복, 침수각좌로 기입하고 바꾸는 의도가 무엇일지는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결국 침몰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위한 서술인 것이다. 대표적으로 일본어 위키백과의 진주만공격(真珠湾攻撃)에서는 구레 군항 공습과 비슷하게 군항인 진주만에서 미국 전함들이 공습으로 가라앉았으나 대파착저라는 말은 없고 미국의 전함 4척을 모두 침몰로 표기하므로 일본의 군함만 침몰시 대파착저를 쓴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여기서 대파착저의 의미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대파착저는 선박이 '대파'에 해당하는 타격을 입어 선저가 바다 밑바닥에 닿을 만큼 가라앉았으나 바다가 깊지 않아 선박의 일부가 해수면 위에 남아있는 상태를 뜻한다. 즉, 천해(얕은 바다)에서 가라앉으면 '대파착저'가 되는 것이고 선박의 높이보다 수심이 깊은 바다에서 가라앉으면 '침몰'이 되는 것이다. 결국 대파착저는 그냥 침몰이며, 소위 말하는 '킬 카운트'에는 당연히 침몰로 기록된다. 굳이 따지자면 침몰되었다고 쓰면 되지, 굳이 대파착저라는 말을 쓸 이유가 없는 셈이다.
대파착저와 침몰을 구분할 실익이 없지는 않다. 첫 번째로는 인양 및 재활용의 난이도 문제이다. 얕은 바다에 가라앉은 대파착저 쪽이 훨씬 난이도가 낮다. 일단 육지에 가깝고, 작업자들이 선박 구조물 위에 올라가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니 침몰에 비해 훨씬 난이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이 경우의 대표적 사례가 진주만 공습 당시 착저한 콜로라도급 전함 4번함 웨스트버지니아로, 결국 살아남아 레이테 만 해전에 참전하여 수리가오 해협 해전에서 니시무라 함대를 증발시키는 것에 기여한다. 정작 미합중국 해군은 웨스트버지니아를 'sunk' 취급했다. 침몰로 처리했다는 뜻이다.
두 번째로는 군함에게 요구되는 일부 능력, 특히 전투 능력의 유무다. 대파착저든, 침몰이든 자력으로 항해할 수 없는 상태이므로 사실상 선박으로서의 의미는 다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배와 선원이 모두 수장되어 어떤 행위도 없는 침몰 상태와 달리 대파착저의 경우 해수면 밖의 구조물이 기능하면 군함으로서의 역할을 일부분이나마 수행할 여지가 있다. 이의 대표적인 경우가 강구트급 전함 2번함 마라로, 마라는 한스 울리히 루델의 폭격으로 침몰했으나 수심이 얕은 군항 내에서 침몰했기에 대파착저 상태가 되었다. 선수부가 박살난 마라는 항해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지만 3번 포탑과 4번 포탑은 여전히 가동되었고 레닌그라드 공방전 내내 12인치짜리 인민의 불벼락을 갈기며 끝까지 분전했다.
원양에서 침몰하는 것보다 대파착저하는 편이 일반적으로는 더 좋다. 인양하거나 재활용하지 않더라도 착저한 군함을 그대로 고정포대, 방공포대 등으로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며 이렇게 하려다 실패한 사례가 비스마르크급 전함 2번함 티르피츠와 야마토급 전함 1번함 야마토이다. 티르피츠는 작정하고 모래톱 위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하필 떨어진 게 지진폭탄 톨보이라서 해저 바닥의 모래톱이 붕괴되면서 전복되고 말았고 야마토는 목적지인 오키나와로 가기 전에 미군의 항공어뢰 세례를 야무지게 먹고 침몰한다. 작정하고 시도하는 대파착저도 어렵기 때문에 전복 혹은 침몰 위기에 처한 군함을 가까스로 대파착저 상태로 만들어 놓는 것도 함장의 능력이라면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된 콜로라도급 전함 4번함 웨스트버지니아도 이런 경우인데, 배가 전복될 것 같자 함장이 자침 명령을 내린 것이기 때문이다(자침할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튼, 대파착저는 그냥 침몰이지만 앞서 언급한 실익에 해당되는 경우라면 '침몰(대파착저)'라고 기입하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1945년 7월 기점에서 이에 걸맞은 일본 제국 해군 함정이 구레 군항에 있었는지는 심각한 의문이 있다. 1945년 8월 15일에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났는데[18] 7월에 이미 박살난 군함을 어떻게 써 먹을 시간 자체가 없다. 이 시점이면 미국은 트리니티 실험으로 맨해튼 계획을 성공으로 끝마치고 나서, '일본 어디에 원자폭탄을 떨궈야 더 맛깔나게 히로히토가 고개를 숙일까?' 라고 생각하던 시점이며 일본 제국은 이미 총기, 탄약, 연료 같은 기본적인 물자도 없어서 1억 총옥쇄니 뭐니 하며 민간인들에게 죽창을 쥐여주고 있었다(결호작전). 민간인들이 결호작전에서 쓸 만한 개인 장구조차 확보하지 못하는 개막장 상황에 처했던 당시 일본 제국에게는 군항에 착저한 대형 군함을 수복해 써먹을 능력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더 따져보면 대파착저 자체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 군항 내에서 공습을 맞아 '대파착저한' 이유는 미합중국 해군에게 제해권과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가장 기본인 연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19]. 군함은 대양에 나가 적 해군과 싸우고 제해권을 확보해야 의미가 있다. 그런데 작전에 제대로 나가지도 못하고 수심이 얕은 항구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항공폭탄 얻어맞고 가라앉은 것이다. 대파착저는 야마토 다마시이(大和魂) 분전의 상징이 아니라 제해권과 제공권 상실과 연료 부족이라는 무능의 상징인 것이다.
여러 지적이 있었는지 2021년 8월 기준으로 呉軍港空襲 문서에서는 침몰이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외부의 관심이 적어지자마자 사진 하단의 부연설명을 시작으로 다시 침몰을 대파착저로 조금씩 재수정하면서 기록하더니 2025년 1월의 시점에서는 이전처럼 대파착저로 명칭을 모두 되돌려놓았다.예시[20]
6. 대중매체
- 맨발의 겐 1권에서 원폭을 맞기 전 히로시마는 무사한데 폭음이 들리는 것을 보고 나카오카 겐의 아버지인 나카오카 다이키치가 "구레가 폭격당하고 있군."이라고 무심하게 얘기하는 부분이 있다. 시기상 구레 군항 공습을 얘기한 것으로 보인다.
- 영화 '남자들의 야마토(Yamato / 2005년)'에서 1945년 3월 19일 실행된 1차 구레 군항 공습이 잠깐 등장한다. 군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부상병들이 목발을 들고 입총질로 미군기들을 격추하려고 하는 게 웃음 포인트. 하지만 이들은 전쟁 때문에 정신이 상당히 나가 버린 것 같다. 제정신인 사람들은 그걸 보고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2016년 작 이 세상의 한구석에에서 여주인공인 스즈가 쿠레로 시집 가서 살다 공습을 경험한다. 스즈의 소꿉친구는 중순양함 아오바의 승조원으로 나오며 온갖 사망 플래그를 다 찍었지만 배가 공습으로 격침되는 와중에도 끝내 살아남는다.
- 십이국기에 이 공습 당시 물에 빠졌다가 십이국의 세계로 넘어온 마츠야마 세이조라는 노인이 등장한다.
- 대체 역사소설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미-영-독 3국이 중심이 된 연합국이 필리핀해의 함대결전에서 승리한 뒤 마지막 야마토급 전함 무사시를 비롯한 일본 제국함대(그래봐야 20척 이하)가 숨어있는 구레를 항모 11척에 Me 262까지 동원해 공습한다. 이때 영국군의 톨보이가 첫 데뷔전을 보이는데, 지진 폭탄이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무사시가 정박한 구레항의 바닥을 헤집어 놓으면서 일본 함대를 처절히 박살낸다. 원래 역사의 톨보이가 독일군의 전함 티르피츠를 격침시키는 데 동원되었음을 생각하면 뭔가 묘하다.[21]
[1] 에타지마(江田島) 코요(小用)항[2] 이러한 3대 병종간의 싸움은 점점 심해져서 나중에는 전후 핵무기의 관할권을 두고 벌어진 항공모함 유나이티드 스테이츠의 취소와 제독들의 반란 및 최초의 미국 국방부장관인 제임스 포레스탈의 자살 등 수많은 사건이 발생한다.[3] 이 사람은 대장 이상으로의 승진을 끝까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4] 기뢰 살포는 육군 항공대 자체의 소관이 아니라 미국 해군 측의 요청으로 진행한 것이다. 커티스 르메이는 '이거 할 시간에 일본 도시를 하나라도 더 박살내야 한다.'라며 투덜거리다가 상관인 헨리 아놀드 장군에게까지 불만을 드러내서 헨리 아놀드가 해군참모총장인 어니스트 킹에게 해당 건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다가 어니스트 킹이 그러면 우리 해군은 철수할거니까 육군항공대와 육군이 알아서 잘하라는 차가운 답변을 받고서야 그냥 해군의 말을 들어주는 것으로 종료된다.[5] 2008년 미국 대선 공화당 후보였던 존 매케인의 할아버지다. 매케인 집안은 이때부터 시작해서 4대가 다 해군에 복무했다.[6] 당시 기준으로도 40년 전이다. 21세기로 치면 베트남 전쟁 때 쓴 무기를 꺼내서 쓴 꼴이다.[7] 운류급 항공모함 아마기[8] 이세급 전함 이세와 휴우가,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9]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와 아오바급 중순양함 아오바[10] 오요도[11] 이즈모급 장갑순양함 이즈모와 이와테[12] 마츠급 구축함 나시[13] 제2호형 해방함 제4번함과 제30번함[14] 센토쿠급 잠수항공모함 I-404. 단, 이건 폭탄/어뢰/로켓으로 인한 직접 격침이 아니라 공습으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는 데 실패하여 격침된 것이라 집계에서 자주 빠지기도 한다.[15] 미카사가 있었던 관계로 나가토가 일본 해군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전함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미카사는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었던 데다가 당시에는 기념함 신세이며 아예 군축조약으로 정박한 부두에 콘크리트를 부어서 완전히 고정하면서 육지의 건물로 만들어놓아서 항해가 불가능하였고, 그러므로 "전력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정규 전함"은 나가토가 끝이었기에 사실상 마지막 전함이라고 봐도 된다. 당장 대전 말에 모든 전함을 상실했다고 알려진 크릭스마리네도 엄밀히 말하자면 도이칠란트급 전함 하노버와 슐리지엔이 남아 있었지만 그마저도 하노버는 표적함이었고 슐리지엔도 해전에서의 가치는 0에 가까웠기 때문에 아무도 전력으로 집계하지 않았다.[16] 7발이라고 기록된 자료도 있지만 지근탄 포함인 듯.[17] 참고로 3번째 사진은 공습 직후의 모습은 아니고 패전 후인 1946년 아마기를 스크랩 처리할 당시의 모습이다. 다만 공습 이후 일본은 좌초된 함선들에 손도 대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던 상황이므로 사실상 공습 직후와 차이가 없다고 보면 된다.[18] 쇼와의 옥음방송 기준. 일본 제국의 항복 문서 조인 기준으로는 1945년 9월 2일이다.[19] 2011년 12월 일본에서 제작, 개봉된 영화 야마모토 이소로쿠에 '아부라가 나인다(연료가 없다).' 라는 대사가 나오기도 했을 정도로 일본 제국은 고질적인 연료 부족에 시달렸다. 심지어 당시는 무츠가 살아 있던 시점(과달카날 전역)으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하긴 했어도 아직 일본 제국 해군이 제대로 활동하고 있었다.[20] 이렇게 지속적인 서술 왜곡 및 올바른 수정 삭제로 인해 일본어 위키백과는 다른 항목은 일반적인 위키백과 수준의 양호한 신뢰도를 유지하지만 유독 구 일본군 항목에서는 신뢰도가 매우 떨어지는 것으로 유명하다.[21] 이 작품에서는 독일의 비스마르크급 전함과 야마토급 전함의 운명이 서로 묘하게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