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침하는 바이에른급 전함 1번함 바이에른과 2번함 바덴.
자침하는 데어플링어급 순양전함 1번함 데어플링어.
1. 개요
Scuttling of the German fleet in Scapa Flow (1919년 6월 21일)제1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19년 6월 21일 독일 제국 해군 대양함대가 집단으로 자침한 사건이다. 비록 억류된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역사상 이런 대규모 함대가 스스로 자침한 일은 유례가 없었던 큰 사건이었다. 한때 영국을 위협하며 세계 2위의 전력을 자랑하던 독일 대양함대는 카이저 빌헬름 2세의 야망과 함께 북해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이 독일 제국의 항복으로 끝난 직후인 1918년 말엽 이후부터 승전국들은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패전국들의 국가 해체와 국방력 약화, 새로운 국제질서 성립 등이 논의되는 과정에서도 즉각적이면서 실질적인 전리품으로서 협상국이 탐내고 있던 것은 바로 독일 해군 대양함대였다.유틀란트 해전 때도 별로 손해를 입지 않았고 대전이 종결될 때까지 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했으며 영국 해군 다음 가는 세계 2위의 막강한 수상함대의 해군력을 보유한 독일 해군은 승전국인 영국의 지시로 주력 함대를 오크니 제도에 위치한 천혜의 군항 스캐퍼플로(Scapa Flow)로 이동시킨 상황이었다. 이 함대는 해군대장 루트비히 폰 로이터(Ludwig von Reuter) 제독이 1,800명 가량의 인원만을 이용해 움직였는데, 함 승조원들 중 대다수 특히 무장 운용 인원 등은 연합국의 무장 해제 요구에 따라 하함시키고 항해 및 유지 보수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들만 남겼기 때문이다. 이들은 식량과 피복 등을 지급해야 할 독일 정부의 상황이 말이 아니다 보니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 못한 채 열악한 상황에서 함내 감금 생활을 해야 했다. 이들을 감시하던 영국 해군 수병들도 스쳐지나가며 본 독일 수병들의 꾀죄죄하고 굶어 비실대는 모습에 볼 때마다 불쌍하다고 회고한 이들이 있었을 정도였다.
해전의 핵심이 여전히 거함거포주의이던 이 시기에 독일이 보유한 온갖 종류의 전함들은 결코 가만히 둘 수 없는 막강한 전력이었다. 이들 수상함대 전력을 독일로부터 압류하고 이를 자국 함대에 편입시켜 전력을 증강시키고자 하는 것이 협상국의 공통된 바람이었다. 특히 청년학파의 득세 때문에 대형함 경쟁에서 완전히 뒤처져 버린 프랑스가 제일 열성적이었는데 전쟁 전에 만들어둔 주력함 70만 톤 계획안이 전쟁으로 파탄난 것을 일거에 만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영국 입장에서는 계륵에 가까웠는데 독일 군함들을 자군에 편입시켜 써먹기는 성능이 애매한데다가[1] 부품과 탄약이 호환되지 않아 유지보수 및 운용에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프랑스한테 주기에는 아깝기 때문이다.[2]
3. 자침
로이터 제독은 영국 해군 함대의 눈을 피해가며 억류된 모든 함정들에게 자침 준비를 지시하며 기회를 노렸다. 때마침 1919년 6월 21일 스캐퍼플로의 영국 해군 함대가 훈련을 위해 대대적으로 출항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예정대로 영국 해군 함대가 출항하자 로이터 제독은 오전 10시 30분, Z 상황(자침)을 알리는 11호 명령을 내렸다.명령을 수신한 각 함의 승조원들은 일제히 해수 밸브를 열고 자침을 시작했으며, 몇 달에 걸쳐 철저히 준비한 덕에 승조원들 대부분이 재빠르게 밸브를 열자마자 단정에 올라 타거나 갑판 위로 올라와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
이 사실을 스캐퍼플로의 해군 육상 부대로부터 전달받은 영국 해군 함대가 부랴부랴 스캐퍼플로로 돌아와 자침을 막으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자침을 끝까지 수행하려던 독일 해군을 제압하기 위해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이미 대부분의 군함들은 해수가 가득 차서 해저에 착저하여 자침이 끝났거나 이미 해수가 너무 많이 들어와서 침몰을 막을 수 없는 상태에 빠진 지 오래였으므로 좌초에 그친 군함 몇 척을 건지는 걸로 끝났다. 제압 과정에서 쾨니히급 전함 SMS 마르크그라프(Markgraf) 함의 함장 발터 슈만(Walter Schumann) 대령 등 9명의 독일 해군 장병들이 사살됐으며, 일부는 이들을 1차대전 최후의 전사자로 여기고 있다.
4. 결과
1930년, 인양되는 데어플링어급 순양전함 3번함 SMS 힌덴부르크 |
1930년, 해체되는 SMS 힌덴부르크 |
1933년, 뒤집힌 채 예인되는 카이저급 전함 4번함 SMS 프린츠레겐 루이트폴트 |
단 몇 시간 만에 당시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해군 함대가 자침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소멸했다.
침몰한 전함만 카이저급 전함 5척, 쾨니히급 전함 4척, 바이에른급 전함 2척 총 11척이며 만재배수량 기준 총 톤수는 30만 톤이 넘는다. (모두) 독일 해군 측이 심혈을 기울여 건조한 최신예 드레드노트급 전함들이었다. 물론 쾨니히급과 카이저급이야 주포가 시원찮은 소구경이었기에 넘어간다고 하더라도[3] 바이에른급은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에 버금가는 15인치 주포를 탑재한 신형 초드레드노트급 전함이라서 그 당시에도 매우 아까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여기에 더해서 순양전함 5척, 순양함 8척, 구축함 50척도 같이 자침했다. 이로서 독일 해군 대양함대는 카이저 빌헬름 2세의 야망처럼 완전히 소멸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급히 돌아온 영국 해군 함대가 어떻게든 침몰을 저지하고 이미 침몰한 군함들을 건져올리고 수리하려고 애썼으나 훗날 다시 건져내서 표적함으로 쓴 바이에른급 전함 바덴[4] 정도를 제외하면 이미 착저 시의 충격으로 바닥이 파손되었거나 해수의 대량 유입으로 인해 내부가 망가져서 대부분의 함선이 수리 불가 판정을 받았다. 따라서 이들 함선들은 순차적으로 인양돼서 고철로 해체되거나 방치된다. 바덴의 경우 15인치 포를 장착한 함선이었던 만큼 이후 주포를 가지고 여러가지 테스트가 수행되기도 했다.
로이터 제독 이하 1,773명의 생존자들은 영국 해군에 억류되어 있다 도로 독일로 송환됐으며, 로이터 제독은 이듬해인 1920년 1월에 퇴역하여 군생활을 마감했다. 슈만 대령 등 사살된 9명은 스캐퍼플로 현지의 육지 묘역에 안장됐다.
5. 반응 및 영향
독일 해군의 군함으로 배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당연히 자침 결정에 분노했다. 하지만 영국은 독일 해군의 집단 자침에 괘씸해하면서도 내심 이 자침을 반겼었다. 독일 해군 대양함대의 주력함 배분 문제를 두고 열강들 간에 갈등이 있었는데 자침 사건으로 이 갈등이 자연적으로 해결되고, 특히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프랑스에게 전리품이랍시고 전함을 넘겨주는 일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독일 해군 전함들을 놓친 프랑스는 매우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당사자인 독일 국민들은 상당수가 크게 비통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배후중상설이 한참 떠돌고 있던데다 그런 소문이 아니더라도 자국의 자존심이던 막강한 대양함대가 스스로 비극적인 결말을 선택했으니 비통하지 않을 수 있나…….
하지만 자침 소식을 내심 반가워하던 것과는 별개로 분노한 영국이 강경하게 돌아서면서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 해군에게 드레드노트급 전함이긴 하지만 당시 2선으로 밀려난 상태였던 나사우급 전함 4척과 헬골란트급 전함 4척의 보유를 인정하려던 것이 취소되고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의 보유만 허용하면서 해당 전함들은 모두 몰수 처분당했다. 그리고 몰수당한 전함들은 해체되어 매각대금이 배상금으로 지불되거나 승전국에게 인도되어 표적함으로 소모되었다. 덕분에 독일 해군에 남은 것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전드레드노트급 구식전함 몇 척에 불과했다.
이 사건과 베르사유 조약으로 연안해군 수준으로 완전히 쪼그라든 독일 해군은 전간기의 혼란으로 인해 대양해군을 재건할 수 있는 지식과 인력과 인프라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나치가 집권한 이후 크릭스마리네가 Z 계획으로 대양해군의 재건을 시도했으나 20년 만에 백지 수준으로 전락한 대형 수상함 관련 지식과 인력, 인프라는 크릭스마리네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마저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인해 결국 크릭스마리네는 U보트를 위시로 한 비대칭전력 위주로 운용되었다. 그나마 잠수함은 보유를 금지당했음에도 네덜란드에 위장 조선회사를 세워 건조 및 운용 노하우를 유지해 비교적 빠르고 성공적으로 재건했다.
이 날 이후로 독일 해군은 독일 제국 시절 대양함대의 위용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모든 해외 영토를 상실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모든 영토를 상실하면서 해안선이 독일 제국 시절에 비해 엄청나게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냉전 시기 재건된 독일연방군은 전쟁 발발 시 나토의 본격적인 지원이 올 때까지 바르샤바 조약군의 대공세를 받아내는 탱커 역할로 육군과 공군 위주로 전력 확충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후 대양해군을 육성해야 할 필요성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물론, 냉전기의 독일 해군은 발트해로 나오려는 소련 해군 발트 함대와 국가인민군 해군, 폴란드 해군을 1차로 저지해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어 현대적인 범용 프리깃을 위시한 수상함 전력과 파나비아 토네이도 공격기까지 있는 대규모 해군 항공대를 보유한 양질의 해군 보유를 허가받았으며, 진짜 연안 해군에 머무른 동독 해군을 압도했다. 사실 독일 해군이 냉전기에 제약당한 것은 U보트의 공포에 따른 잠수함 전력으로, 명품 잠수함으로 유명한 209급 잠수함은 수출만 하고 자국 해군은 사실상 잠수정 수준의 206급 잠수함 정도만 보유하다 21세기에야 212급 잠수함을 도입했다.
사실 독일군은 과거 프로이센군 시절에만 해도 해군력은 보잘 것 없었고 육군에 몰빵하는 전형적인 육군국이었으니 어찌보면 다시 독일 군사력의 원래 모습인 육군적 전통으로 되돌아간 것이라 할 수도 있다. 18세기 7년 전쟁 당시 프로이센은 그래도 유럽에서 알아주는 강대국치고는 보유한 해군력이 고작 8척의 갤리선과 5척의 포함뿐이었고 이는 19세기에도 별반 나아지지 않아서 1848년 1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덴마크 해군이 독일의 무역로를 마비시켜버림에도 이에 대해 독일계 국가들이 변변찮은 대항 하나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는 육상에서 잽싸게 이겨 전쟁을 끝낸 덕에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개전 후 프랑스 해군이 독일 영해를 해상 봉쇄해버려 전쟁이 늦게 끝났으면 독일이 고사할 뻔했다. 심지어 이 때는 프랑스 해군이 해외 식민지 관리와 본토에서의 오락가락하는 지령 등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허술한 봉쇄를 했음에도 이랬다. 이때 위기감을 느꼈던 경험으로, 빌헬름 2세가 세계 정책을 추진하면서 잠시나마 독일 역사에서 유례없었던 강대한 대양함대를 보유하게 되었지만 이러한 독일의 미약한 해군적 전통으로 인한 경험의 부족은 세계 2위에 달하는 독일 해군의 물리적 전력에도 불구하고 1차대전 당시 해전에서의 졸전으로 이어졌고 결국 대양함대의 자침과 함께 빌헬름 2세의 꿈도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다.
사실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등의 전통적인 해양강국들이 강력한 해상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은 바로 지도만 펴놓고 봐도 알 수 있듯이 대서양에 바로 접해있다는 지정학적인 입지조건 덕분이었다. 독일의 전신인 신성로마제국이나 프로이센이 당시에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음에도 영국, 스페인, 프랑스와는 달리 해외 식민지가 거의 없었던 이유는 상대적으로 대서양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지리적인 위치조건 때문이었고 이로 인해 프로이센은 해군을 길러 바다로 나가기보다는 육군을 육성해 동유럽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길을 택했다. 그나마 블라디보스토크를 제외하고서는 아예 부동항이 없어 대양으로의 진출에 큰 곤란을 겪던 라이벌 러시아보다는 나았다는 게 위안이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한 척의 유보트가 이곳에 침투하여 리벤지급 전함 로열 오크를 격침시킨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U-47의 함장 귄터 프린 대위다. 자침 사건 이후로 독일 해군의 한이 서린 곳이자 이후로 번듯한 수상 함대를 소유하지 못하게 된 독일 해군이 잠수함으로 적 군항 한복판에서 적 수상함을 격침시키는 아이러니한 사건이었다. (이 작전이 기획된 이유와 결과는 유보트 문서 참조) 당연 독일 국내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며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여 괴뢰 정부를 세우기에 이르자 이번엔 반대로 프랑스 해군에서 독일 해군이 자신들의 함선을 운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툴룽 항에 정박한 대규모의 함대를 자침시키기도 했다.[5] 하지만 툴룽 항에서 자침시킨 함대의 규모는 스캐퍼플로 함대에 비하면 소규모였고 일부 함선은 독일군이 인양해서 수리 후 다시 활용하기도 했다.
사건 현장인 스캐퍼플로는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영국 본토 함대(Home fleet)의 주요 거점으로 사용하였으나, 전쟁이 끝나고 영국 해군의 규모가 크게 축소되면서 해군 기지로는 쓰이지 않고 있다. 현재 이곳엔 버려진 해군 시설과 침몰선의 잔해, 양차 대전 전몰자들의 묘지와 추모 시설 등이 남아 있으며, 다이버들의 관광 명소로도 유명하다.
이 때 침몰한 함선의 강재 일부는 방사선 관련 정밀기기의 부품으로 재활용되기도 한다. Low-background steel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특히 쾨니히급 4번함 크론프린츠 함의 잔해가 애용되었다. 심지어 제국 해군 함선 잔해의 일부는 우주 탐사선 보이저 호의 정밀부품을 만드는 데에 재활용되어, 이제는 바다가 아닌 심우주를 항해하고 있다.
6. 관련 문서
[1] 13.5인치 이상의 공방능력을 갖춘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득실거리던 영국 입장에서는 바이에른급을 제외하면 자국 해군에 편입시키지 못 하더라도 크게 아쉽지는 않은 전력이었다.[2] 1차 대전이야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서 영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은 거지만 둘은 전통적인 앙숙이었다.[3] 둘 다 305mm의 구경으로 이 정도면 12인치 수준밖에 안 된다. 영국 해군 전함들이 대부분 13.5인치 이상의 주포를 장착하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이 시점에서 화력은 상당히 부족한 편이다.[4] 바덴이 대형함 중 홀로 살아남은 이유는 그날 아침 바덴의 승조원들 중 상당수가 다른 임무로 투입되어 있는 상황이었기에 다른 배들보다 해수 밸브를 여는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이었다.[5] https://en.wikipedia.org/wiki/Scuttling_of_the_French_fleet_in_Toul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