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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不凍港|Ice-free port | Незамерзающий порт연분홍색 원이 부동항, 파란색 원이 비부동항이다. |
겨울에도 바다가 얼지 않아 1년 내내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항구를 뜻한다.
물의 어는점은 0℃지만, 해수는 소금과 미네랄이 녹아 있어 최대 2℃ 정도의 어는점 내림이 발생해 -2℃ 이하가 되어야 빙결이 일어난다. 그리고 해수가 냉각되면 표층과 심층 사이에서 계속해서 대류가 일어나는데, 물의 밀도가 4℃ 주변에서 가장 높기 때문에 4℃까지 냉각된 물은 밑으로 가라앉고 덜 차가운 물이 계속 표면으로 올라오기 때문. 거기에 바다는 파도가 치고 조석에 의해 물이 계속 움직인다. 그리고 이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바다가 얼어붙으려면 정말 추운 날씨가 장기간 지속되어야 한다. 그나마 서해처럼 얕고 좁은 바다에선 물의 전체 부피에 비해 냉각되는 표면적이 넓은 편이라 강추위가 지속되면 파도가 약한 갯벌 쪽에 살얼음이 생기기도 하지만, 동해처럼 깊고 넓은 바다에선 이조차도 훨씬 드물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나라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지만, 북극 근처의 국가들은 겨울이 되면 바닷물이라도 난류가 흐르지 않는 한 그대로 얼어붙기 때문에 대부분의 항구가 사실상 기능을 상실한다. 게다가 일단 항구가 얼어붙게 되면 거기에 정박된 선박들은 갇혀 버리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항구 전체가 얼어붙으면서 얼음에 의해 배가 파손되는 상황까지 발생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상선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해군 함정들도 사실상 부유포대의 가치밖에 없는 쇳덩어리로 전락하게 된다. 그래서 북극권 국가들에게 부동항의 확보는 매우 중요하다.
2. 러시아와 부동항
북극권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러시아는 과거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바다로 진출하기 위한 부동항 확보를 최우선 목표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 위해 역사적으로도 오랫동안 적극적인 남하 정책을 펼쳐 왔다. 표트르 대제 즉위 초기, 러시아가 운영하는 대규모 무역항은 북극해의 일부인 백해에 있는 아르한겔스크 한 곳 뿐이었고 이런 아르한겔스크조차 1년에 고작 3개월만 가동이 가능한 곳이어서 러시아의 해상 무역은 대단히 제한적이었고 타국과의 교류, 무역 분야에서 다른 국가들에게 크게 뒤쳐지고 있었다.그러나 표트르 대제의 팽창 정책과 예카테리나 2세의 남진 정책이 성공하여 러시아가 발트 해의 리가와 흑해 북안의 오데사를 비롯한 항구들을 확보한 이후부터 곡물과 원자재 수출로 막대한 무역 이익을 얻었고, 이러한 항구를 기반으로 러시아 해군은 표트르 대제 때부터 성장을 시작하여 상당한 거대함대로 팽창했다. 이를 통해 미뤄본다면 부동항의 중요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러시아가 대외 팽창을 시도한 근본적인 이유가 부동항을 얻기 위해서란 것은 낭설이다. 부동항을 얻기 위해 추진했다고 알려진 러시아의 시베리아와 아메리카 진출은 결과적으로 포르트 아르투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얻었지만 일차적인 목표는 모피를 구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사업이었다. 진출 과정도 모피를 제공하는 담비와 해달의 서식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경향을 보인다. 중앙아시아로의 진출도 부동항 때문이 아니라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무역과 그 국가들을 병합하기 위함이었고,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기반으로 해서 아프간과 이란, 인도로 진출하려 했다. 아시아로의 진출 또한, 부동항 때문이 아니라 대중 무역과 중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유럽 방면으로의 진출은 유럽의 강대국들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한 완충지대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드넓은 북유럽 평원은 국경의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천혜의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큰 분쟁이 발생한 흑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1차 대전 개전 직전, 유능한 재무 장관인 표트르 바크가 니콜라이 2세에게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제정 러시아의 대외 무역은 육로 무역이 중심이고 해상 무역은 수출보다는 수입의 비중이 더 높아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확보해 흑해를 완전히 러시아의 내해로 만들지 않는 이상 흑해의 부동항도 그렇게 큰 이익을 주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러시아가 부동항에 집착한다는 인식이 퍼진 이유는 영국 때문이다. 이 당시 영국은 러시아와 전세계를 무대로 대립과 충돌을 반복한 그레이트 게임을 치루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팽창이 인도와 지중해에 대한 영국의 패권을 위협한다고 판단했는데, 이 과정에서 영국은 러시아가 팽창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계산했다. 해양국가인 자신들의 관점을 그대로 대입헤서 러시아도 바다로 진출하고 싶을테니 부동항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팽창을 한다는 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2.1. 흑해
흑해 연안의 항구는 모두 부동항이며, 러시아는 흑해 연안에 접한다. 그러나 흑해라는 바다는 다른 문제가 있는데, 흑해 밖의 넓은 바다로 나가려면 튀르키예의 중심 도시이자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 한복판을 관통하는 보스포루스 해협-마르마라해-다르다넬스 해협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었다.러시아가 나폴레옹을 꺾고 본격적으로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확대한 19세기에는 이스탄불을 가진 오스만 제국이 최전성기인 16세기보다는 약체화된 상태였지만, 수도 코스탄티니예를 러시아가 휘젓고 다니도록 놔두지 않을 역량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만약 두 나라가 외부 개입 없이 싸울 경우에는 러시아가 이긴다고 예측할 수 있을 만큼 국력의 추가 러시아 쪽으로 기울어 있었지만, 변수는 유럽의 세력 균형을 맞추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도울 의사가 충분했다는 점이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서 지중해로 넘어와도 대서양으로 나갈 경우에는 영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브롤터 해협을, 인도양으로 나갈 경우에는 역시 영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또 빠져나와야 한다. 그러므로 영국 입장에서는 나중에 직접적으로 러시아와 충돌하느니 오스만 제국을 지원해서 러시아가 지중해로 나오기 전에 미리 막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따라서 크림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을 지원해 러시아가 흑해를 빠져 나오기 전에 막았던 것이다.
지금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현재 튀르키예는 1930년대에 체결한 몽트뢰 협정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의 협정을 근거로 국적을 막론하고 순양함 이상급 함선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상선이 아닌 함선의 통과는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보스포루스 해협은 한강 하구 정도의 폭밖에 되지 않아서 소련의 초대형 함선이 통과하기는 어렵다.
여담으로, 보스포루스 해협 봉쇄는 마치 오스만 제국이 모든 선박을 막아 세워 현대 러시아 연방의 천연 가스 공급 차단과 유사한 봉쇄 조치로 인식되는 경우가 있지만, 실제로는 교전 국가 선박의 출입만을 막는 것이었다. 중립국이나 적대 국가가 아닌 나라의 선박은 잘만 마르마라해를 지나 다녔으며 유럽 국가들의 신항로 개척 또한, 오스만의 해협 봉쇄 때문이 아니었다. 1453년 5월 29일 이후로도 동방 무역은 정상적으로 작동했으며 향신료 가격 또한 폭등하는 일이 없었다.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오스만 제국의 레반트 지역 및 유럽 국가들의 무역 거점 장악, 1510년대 맘루크 왕조 정복과 같은 사건 등으로 인해 동방 무역이 오스만의 손에 놓여서 유럽 국가들 입장에서는 동방 무역을 지속하는 것 자체가 적대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게 막대한 재원을 상납하는 일이 되어 이전에 비해 상당히 부담스러워졌던 점이 작용했다. 게다가 신항로 개척의 핵심 국가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오스만 투르크가 동방 무역을 장악하기 훨씬 전부터 신항로 개척을 시작했다. 포르투갈의 경우,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당하던 시점에 이미 보자도르 곶을 넘어 세네갈에 도달하고 카보 베르데 군도를 탐험하고 있었다.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국력을 유럽과 발칸반도로 투사하기 시작한 러시아는 지정학적 이유, 정교회의 종주, 슬라브의 맹주, 동로마 제국의 뒤를 이은 제3의 로마라는 다양한 명분으로 남진 정책을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로 인해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격화되었고, 해협 봉쇄는 양국이 충돌할 때마다 시작하는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발칸 반도로의 진출을 위해 러시아 쪽에서 오스만 제국을 찌르면 오스만 측은 해협 봉쇄로 회답해버리고, 평상시 흑해 무역 루트가 전부 막혀버린 러시아는 경제적 피해에 대한 보복으로 오스만 제국에게 더 강한 공세를 취했다. 크림 전쟁 초반에는 러시아가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지만 러시아의 팽창에 위협감을 느낀 영국, 프랑스 등이 크림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을 지원해, 옛 동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정교회의 본산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얻는다는 러시아의 꿈은 끝나버렸다.
수백년 동안 흑해의 패권을 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대립은 제1차 세계 대전 와중에 벌어진 러시아 혁명과 터키 공화 혁명으로도 해소되지 않았으며 냉전은 물론이거니와 현대까지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2.2. 발트해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칼리닌그라드
사실 표트르 대제의 발트해 연안 확장 정책은 부동항 확보를 위한 러시아의 최초의 시도로 평가하지만, 이것은 부동항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발트해로의 진출을 위해서였다. 애초에 표트르 대제가 수만의 인민을 희생해가며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도 부동항이 아니다. 그 전까지 쓰던 아르한겔스크보다는 결빙기간이 짧아서 훨씬 낫긴 하지만, 한겨울에는 얼어붙었다. 그밖의 발트해 연안의 상당수 항구 도시들도 마찬가지이다.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2월)평균 기온은 영하 6도 정도로 부동항인 무르만스크(영하 10도 정도)보다 따뜻하지만 발트해의 염도가 낮아 부동항이 아니다. 참고로 일반적인 바다의 염도가 약 3.5%내외인것에 비해 발트해는 약 0.3~0.6%로, 생리식염수(0.9%)보다 낮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는 발트 해는 겨울엔 언다는 문제도 있고 여기도 흑해와 비슷하게 북해로 빠져나가려면 덴마크, 스웨덴 사이의 좁은 해협을 거치거나 독일의 킬 운하를 거쳐야한다. 거기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가장 수심이 얕고 염도가 매우 낮은 핀란드만의 동쪽 끝에 있는데다 대륙에 둘러싸여 겨울엔 대부분이 언다.
단순한 항해상의 난점뿐만 아니라 저 두 해협은 전략적, 정치적으로도 역사적 숙적인 영국, 프랑스, 독일이 까딱하면 잠가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안정적인 해로가 아니다.
게다가 어찌저찌 북해로 나와도 영국, 프랑스의 레이더들이 계속 경계하며 위치를 추적한다. 거기다가 북해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려면 영국 북쪽이나 영국해협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건 미국이 있는 한, 아예 불가능이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때도 그랬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진출 이후 오스만 제국에서 보스프루스 해협을 걸어 잠그는 건 항상 비공식적인 선전포고로 통했다. 북방의 덴마크 해협도 마찬가지. 게다가 이건 러시아의 외교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시베리아가 아직 개척되지 않았을 시절 바다로 나가는 방법은 대서양밖에 없었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 이 세 나라 중 하나 이상의 국가와는 계속 동맹 상태여야만 했다. 그래야만 안정적으로 바다로 나갈 수 있으니까. 저 세 나라가 모두 적이면 러시아는 해양으로 나갈 수 없어서 무역을 할 수 없어지므로 가뜩이나 척박한 땅에 생필품 부족으로 생활은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칼리닌그라드는 발트 해에 면해 있으므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비슷한 지정학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부동항이라서 더 낫지만, 문제는 소련 해체 이후 월경지가 되어 나토 가입국에 포위되었단 점이다. 그리고 1945년의 소련이 제정러시아도 아니고 칼리닌그라드 병합은 애초에 나치즘 뒤에 있는 프로이센 군국주의의 정신적 수도를 소멸시켜버리겠단 정치적 의도가 전적이지 부동항 관련된 경제적 문제는 애초에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2.3. 동해의 블라디보스토크, 북극해의 무르만스크
그 외에는 동해의 블라디보스토크나 북극해의 무르만스크 정도가 쓸 만한 항구이다. 두 항구 위치가 각각 러시아의 동남쪽 끝과 서북쪽 끝이다. 이 두 곳의 겨울 평균기온은 -13℃ 정도로, 다시 말해 겨울에 종종 얼어붙기도 해서 여기조차 부동항은 아니지만, 쇄빙선을 이용하면 그럭저럭 쓸 수 있다고 한다. 특히 무르만스크항은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제한없이 대서양에 접근이 가능한 부동항으로 12월부터 길게는 5월까지 얼 수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대체하는 북서부 최대 항구로 기능한다. 북대서양 난류덕분에 북극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한겨울에도 영하 12~13도 이하로 잘 떨어지지 않기에 가능하다.하지만 지정학적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도 흑해 / 발트해보다 그나마 나은 정도이지 상황은 비슷하다. 여기에서 동해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태평양으로 빠져나오려면 일본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러일전쟁 때도 동해를 드나들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좁은 대한 해협에서 일본군 해군이 기다리고 있다가 전투가 벌어져 러시아의 발트 함대가 격멸되었다.
무르만스크도 노르웨이, 핀란드와의 국경과 멀지 않은 편인데, 이 두 나라는 한국이나 일본만큼 강한 상대가 아니고 여기서 출발하면 노르웨이 북쪽 바다에서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 사이의 노르웨이해를 지나,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 사이를 거쳐서 대서양으로 나올 수 있고, 영국 해군의 영향력도 전성기에 비하면 계속 낮아져가고 있기 때문에 최근 러시아의 여러 바다 중 가장 투자가 많이 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다만 영국 역시 미국이 주둔하고 있어 쉽지는 않다.
러시아의 조선에게 막대한 지원병력을 주는 대신 절영도[1]를 조차하려던 시도도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의해 쉽게 막혔고 이후엔 청나라의 뤼순을 조차하고, 1903년에는 대한제국의 용암포를 점령하고 대한제국에게서 용암포를 조차 받았지만 영국, 일본, 미국의 반대에 부딪혀 다시 뱉어냈다.[2] 제2차 세계 대전 때 소련이 원래 폴란드에게 넘어갈 영토이던 동프로이센의 일부를 칼리닌그라드라는 이름으로 삥뜯은 것도, 미국이 일본 전역을 점령했을 때 홋카이도를 강력하게 요구하던 것도 괜히 그런 게 아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가 다시금 부각된 것 역시도 6.25 전쟁 이후 미국과 비등한 전력으로 성장한 냉전 시기 소련이 가장 노리기 쉬운 부동항을 가진 지역이기 때문이다. # 또한 여기를 얻으면 미국의 지원을 받고 발전하는 일본을 매우 쉽게 견제할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해서 필요한 곳이었다.
러시아 제국 시기에는 정부 내에서 블라디보스토크 무용론이 나올 정도로 러시아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관료들의 지속적인 반대에도 블라디보스토크 유지를 강조하던 황제 알렉산드르 2세까지 유지에 회의적인 입장을 얘기할 정도였으며 이 블라디보스토크 무용론은 수년 동안 러시아 정부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2.4. 냉전과 현대
20세기를 거치면서 쇄빙선 기술이 등장하고 잠수함이 등장하면서 소련은 부동항 문제에서 많이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탄도 미사일 원자력 잠수함은 소련의 연근해에서도 손쉽게 서방 국가들과 미 본토를 핵무기로 타격할 수 있게 되어서 소련의 행동보폭은 제정 러시아 시기 당시와 비교하면 많이 자유로워지게 되었다. 소련은 탄도 미사일 원자력 잠수함들을 각각 무르만스크와 캄차카 반도에 배치하여 미국의 본토를 겨냥했다.다만 서방 국가들의 견제 방식도 변하게 되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는 덴마크 해협 및 아이슬란드 부근의 좁은 해로 일대에 소련 잠수함들을 저지하는 GIUK 갭을 설정하였다. 미국과 NATO는 GIUK 갭 해저에 음향감시체계들을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부설하고 대잠초계기와 호위함을 비롯한 각종 대잠 자산들을 지속적으로 순찰시켜서 소련 잠수함의 대양 진출을 견제했다.[3]
소련은 영향력 확보 차원에서 해외에 해군기지들을 마련했는데, 시리아의 타르투스 항, 베트남의 깜라인만, 쿠바의 아바나 항에 자국군의 해군기지들을 설립했다. 다만, 전술했듯 이미 부동항 문제에서 자유로워진 소련이라 부동항 확보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21세기에는 소련 붕괴의 여파로 러시아의 국력은 냉전 당시에 비하면 크게 후퇴했다. 그러나 지구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얼음이 크게 녹으면서 한 편으론 러시아에게 기회의 장이 열린 셈이 되어버렸다. 북극의 얼음 면적이 줄어든다는 것은 곧 러시아의 부동항이 늘어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는 북극해 항로를 확보하려고 사활을 걸고 있으며 다른 열강들도 북극해 항로를 확보하고자 러시아와 경쟁하고 있다.
2.5. 여담
과거 러시아가 한반도에 부동항을 얻으려 침략한다는 식의 설명이 많았으나 러시아는 고종이 영흥만 조차를 공짜로 해주고 보호령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가겠다고 했다가 번복했음에도 크게 반발하지도 않았고,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얻자마자 1861년 쓰시마 점령을 시도했지만 영국에 의해 저지되고 나서도 일본과의 관계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가 얼어붙는 겨울철에는 나가사키 항구에서 월동을 보낼 정도.그리고 러시아가 이미 청나라를 두들겨패서 만주를 영향력 하에 두고 삼국간섭으로 러시아령 다롄을 얻어내자 한반도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줄어들었고 오히려 한반도 대부분을 일본에게 분할하고 만주 특히 요동반도에 집중 하려고 했다. 그러나 항구의 기능을 하려면 석탄 저장고와 대규모의 선박 수리시설, 장비 인력자원을 공급할 그 배후의 도시가 필요했다. 당시 한반도의 교통 인프라는 수레도 다니기 어려울 수준으로 좋지 않았고, 이미 요동에는 철과 석탄이 풍부해서 한반도의 자원까지 끌어올 필요가 없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기존 종점인 블라디보스토크가 부동항이 아닌데다가 인구가 희박한데 반해 만주의 경우 풍부한 자원과 인력 그리고 시장이 발전하고 있었다. 또한 다롄은 수천킬로미터의 철도를 우회할 필요없이 만주와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외항인 톈진과 한반도를 동시에 장악하는 천혜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만주 횡단철도를 기존의 시베리아 철도와 연결하여 부설했다.
그러나 그렇게 공을 들였음에도 러일전쟁의 패배로 다롄을 일본에 남만주 철도부설권과 함께 빼앗겼다. 이미 부설해둔 만주 횡단철도 반쪽만 유지하다 러시아 내전때 전부 잃어버렸다. 나중에 만주 전략 공세 작전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되찾았지만 이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중국과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1955년에 반환했다.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나 무르만스크보다 안정적인 부동항과 항로를 확보 하려면 캄차카 반도 혹은 쿠릴 열도를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다. 안정적으로 대양으로 나가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데 이는 군사적인 이유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대형 군함이 안정적으로 대양으로 나가는 항로는 무르만스크로 북유럽을 돌아 대서양으로 가거나, 쿠릴 열도와 캄차카 반도로 태평양으로 나가는 것 뿐이다.[4] 다만, 해당 지역도 블라디보스토크보다 훨씬 위에 자리잡은 곳이기에 완전한 부동항은 아니다. 러시아 정부에서 매장된 석유와 근해의 어류자원와 함께 쿠릴 열도의 영유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20세기 후반부터 눈에 띄게 나타난 지구 온난화로 인해 북극항로를 쓸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는 것 같다.
3. 대한민국과 부동항
당연히 대한민국에 소재한 모든 항구는 부동항이다(...).대한민국 최대이자 세계에서도 순위권에 드는 강력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부산항이 대표적이며, 그 외에 인천항, 군산항 등도 있다.
하지만 남북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러시아 입장에서는 통일 한국의 부동항을 이용한 수혜를 볼 수 있다.
먼저 현 남한 지역의 항구들, 특히 부산항은 러시아와 너무 멀기 때문에 러시아에 직접적으로 이득을 가져다줄 가능성이 적다. 부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철도 교통으로 이동하는데만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그에 따른 운송 측면에서의 비효율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다만 북한의 라선항은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블라디보스토크와 바로 접해있는데다 지금도 북한 및 만주 지역의 수요를 감당하는 큰 규모의 항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