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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주(歐洲)에서 황제라고 부른 것은 라마(羅馬)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후 일이만(日耳曼)과 오지리(奧地利)는 라마의 옛 땅으로서 황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덕국(德國)은 일이만 계통을 이어 마침내 황제로 칭호를 정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의관과 문물은 모두 명나라의 제도를 따랐으니 그 계통을 이어서 칭호를 정한들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또한 청나라와 우리나라는 다같이 동양에 있으므로 일이만과 오지리가 라마의 계통을 이어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1897년) 9월 26일 양력 4번째 기사[1]
덕국(德國)은 일이만 계통을 이어 마침내 황제로 칭호를 정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의관과 문물은 모두 명나라의 제도를 따랐으니 그 계통을 이어서 칭호를 정한들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또한 청나라와 우리나라는 다같이 동양에 있으므로 일이만과 오지리가 라마의 계통을 이어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1897년) 9월 26일 양력 4번째 기사[1]
로마 제국이 476년 서부를 상실한 이후 '과연 누가 로마 제국을 계승한 나라인가?'에 대해 제기된 주장들이다. 지중해 지역을 천 년 넘게 지배한 로마 제국의 이름값은 서로마 제국이 상실되고 남은 동로마 제국이 멸망해 가는 와중에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따라서 과거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에서 흥기한 세력들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켜가면서도 로마 제국이라는 일종의 챔피언 타이틀을 얻고 싶어하였다. 자기네들의 주장만 늘어놓았다는 점에서 일종의 병림픽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유럽 세계의 패권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반복 중인 떡밥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로마 계승 의식은 혈통적인 계승이나 민족주의 사관의 계승 의식과는 다르다. 그리고 혈통 계승 문제는 한참 전에 최초의 왕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멸문되면서 끝났으며 이후의 세습왕조도 줄곧 바뀌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이라는 정체성은 끝까지 유지되었다. 예를 들어 오토 1세 시절의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민족적 의미의 로마인과 랑고바르드인, 프랑크인 등을 구분했고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 제국의 경우에도 총대주교좌를 유지하고 정교회를 법적으로 보호하였다. 즉 오토 1세의 신성 로마 황제의 칭호나 오스만 제국 술탄의 '로마 황제' 칭호는 '서방의 지배자', '지중해의 패자', '기독교[2]의 보호자'라는 의미이지 혈통 조작 같은 게 아니다. 그러므로 제3의 로마란 개념은 당대의 타이틀이자 통치, 대외적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관련 문서 전반에 걸쳐 혼동되는 사안이지만 제3의 로마는 로마 제국에 대한 국가적 계승의식이 아니다. 명나라의 계승국가는 청나라지만 정작 조선이 명나라에 대한 국가적 계승성과 별개로 소중화사상을 내세운 것 처럼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당대에 저 동쪽으로 도망간 동로마(비잔티움)는 로마가 아니다는 주장 역시 국가적 의미에서 로마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었다. 고로 국가로서의 로마는 다들 관심 없었다.
'제3의 로마'라는 명칭을 쓴 것은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당대 대공이었던 이반 3세가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인 조이 팔라이올로기나와 혼인한 명분을 앞세워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노바 로마)에 이어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자칭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래서인지 러시아-튀르크 전쟁이나 제1차 세계 대전 등에서는 각자 로마 제국의 후계국을 자칭한 러시아 제국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그래서 아래 목록에 여러 자칭 로마가 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이 러시아 제국이다. 제3의 로마라는 단어는 후대 학자들이 아닌 중근세 러시아인들이 자국 이데올로기로 만든 용어이고 때문에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제3의 로마는 러시아이기 때문이다.
번외로 나폴레옹에 의한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이후 신성 로마 제국에 이은 세 번째 제국을 주장한 사례들이 있는데 프랑스 제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이 해당된다.
2. 동로마 제위 계승
마지막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죽은 후, 그 마지막 혈통이었던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는 황제 직위를 프랑스의 샤를 8세, 스페인의 이사벨 1세[3]&페르난도 2세[4] 부부왕 등에게 팔았으나 정작 프랑스나 스페인 왕들은 이 칭호를 거의 쓰지 않았다.동로마 정통 제위 | 니케아 이외의 동로마 잔존국(비정통) | 자칭 제국(비정통) |
동로마 제국(니케아 제국 포함)[5] | 트라페준타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모레아 전제군주국 (1479년 이피로스의 멸망으로 계승 종결)[6] | 불가리아 제국(제1제국, 제2제국, 제3제국) 라틴 제국 세르비아 제국 오스만 제국 모스크바 대공국(루스 차르국·러시아 제국) (오스만 공화 혁명과 러시아 공산 혁명, 불가리아 공산화로 계승 종결) |
2.1. 불가리아
역사상 최초로 차르 칭호를 사용한 불가리아의 시메온 1세가 칭제한 것에는 그의 아버지인 칸[8] 보리스 1세의 개종이 큰 영향을 미쳤다. 보리스는 외교적 고립[9]에서 벗어나는 것과 종교적 통합[10]이라는 2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었는데, 밀라노 칙령 이래 로마 황제가 기독교 세계의 세속 군주 가운데 서열 1위였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형식상으로나마 로마 황제의 우위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11] 그래서 이전까지 대등한 관계였던 동로마 황제를 비록 명분일 뿐이지만 불가리아 칸보다 상위의 존재로 인정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불가리아인들의 저항 때문에 기독교화 정책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 저항의 중심에 선 인물은 바로 보리스의 첫째 아들 블라디미르였다. 블라디미르는 보리스의 재위 기간 중에는 기독교화 정책에 대해 적극적인 의견 표명을 하지 않았으나, 아버지가 자신에게 양위하자 본색을 드러내고 반기독교 정책을 펴며 이교도 국가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보리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장남을 폐위하고 동로마식(?)으로 눈을 뽑아버린(...) 후, 주교였던 3남을 환속시켜 즉위하도록 했으니 그가 바로 시메온 1세였다.
블라디미르의 폐위와 시메온 1세의 즉위는 불가리아의 기독교화가 더이상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시메온 1세에게 한 가지 과제를 던져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면서 동로마 황제와 대등한 관계라는 명분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가 생각한 해결책은 바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가 했던 것처럼, 로마 황제로 즉위하는 것이었고, 913년에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를 칭하면서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그의 칭제는 기독교 세계의 성직자 서열 1위였던 교황에게 대관식을 받은 카롤루스의 칭제보다도 명분이 떨어졌기에, 그는 동로마의 어린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에게 딸을 시집보내서 황제의 장인으로서 공동 황제가 됨으로써 진짜 로마 황제가 되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동로마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여, 섭정단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니콜라오스와 밀약을 맺음으로써 실현되는 듯했으나, 니콜라오스가 쿠데타로 실각[12]하면서 무산되었다.
그러자 시메온 1세는 또다시 동로마를 군사적으로 압박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동로마 해군 제독 출신의 로마노스 레카피노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콘스탄티노스 7세의 장인이 되어 공동 황제 로마노스 1세로 즉위한 뒤에는 더더욱 그 야망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후, 시메온 1세는 무력으로 로마노스 1세를 축출하기 위해 이슬람 세력인 시아파 파티마 왕조를 끌어들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로마노스 1세가 파티마 왕조의 사신을 회유하면서 실행하지 못했고, 더이상 군사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시메온 1세는 콘스탄티노스 7세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낼 것을 포기하고, 로마노스 1세의 제위를 인정하는 대신, 로마노스 1세는 시메온 1세가 불가리아인의 황제를 칭하는 것은 묵인하게 되었다. 이로써 시메온 1세은 비록 진짜 로마 황제가 되진 못했지만, 황제 칭호를 인정받아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면서 로마 황제와 대등한 관계가 된다는 목표는 달성하게 되었고,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대제라는 칭호를 받은 유일한 불가리아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시메온 1세가 이룩한 전성기는 동로마의 혼란기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기에, 시메온 1세 사후 동로마가 중흥을 이루면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1014년의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불가리아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클레이디온에서 차르, '사무일'을 제압한 일명 '불가록토노스' 바실리오스 2세[13]는 여유롭게 불가리아를 천천히 말려죽이면서 1018년에 불가리아 제1제국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했다.
이후 불가리아는 100년 이상 동로마의 지배를 받았는데, 동로마는 보편 제국답게 불가리아인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같은 로마인으로 대했으나, 불가리아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차르를 자칭한 인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반란은 동로마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동로마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끈 마누일 1세가 사망한 후 즉위한 황제들이 실정을 거듭하자 기회가 찾아왔다.
1185년에 막대한 세금과 부역에 반발하며 차르를 칭하고 봉기한 페터르 4세와 이반 아센 1세 형제는 진압에 나선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2세의 군대를 격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100년 이상 지속된 동로마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독립을 쟁취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을 건국했다.
1331년부터 1371년까지 재위하며 불가리아 제2제국의 문화적 전성기를 이끈 황제 이반 알렉산더르의 시대에, 불가리아의 수도 터르노보는 그 화려함을 인정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제2의 콘스탄티노폴리스' 라고 할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이후 이반 알렉산더르도 터르노보를 제2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여기게 되었는데
그러나 로마 제국을 계승했노라고 자처한 인물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가리아 제2제국은 무너졌다. 이반 알렉산더르가 첫 번째 황후에게서 얻은 아들 이반 스라치미르가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를 황후로 맞아들인 것에 반발하여 독립 왕국을 세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반 알렉산더르의 뒤를 이어 정통 황제로 즉위한 이반 시슈만은 즉위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데다 유능한 인물이라고 하기도 어려워 강력한 지방 귀족이 도브루자 공국이라는 독립국을 세우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제대로 방어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황제를 자칭하고 있는 형 이반 스라치미르는 이반 시슈만을 돕기는커녕 그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 매일반이었고, 결국 3분된 불가리아 제2제국은 하나씩 하나씩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했다.
이후, 1393년에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터르노보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된 이후 러시아로 망명한 불가리아 성직자들이 이 개념을 소개하여 러시아도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고 주장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후 불가리아는 거의 500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878년에 불가리아 공국이 수립되어 부분적인 독립을 승인받았고, 1908년에 불가리아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독립했다. 해외에서는 불가리아를 왕국이라고 칭하고 불가리아의 군주를 왕이라고 불렀으나, 불가리아인들 스스로는 그들의 군주를 차르라고 부르면서 불가리아 제2제국의 계승을 표방했다.[14] 그러나 불가리아 왕국은 1차 대전에서는 동맹국 편에 섰다 패전해서 군비 제한을 받게 되고 2차 대전에서는 추축국 편에 참전했다가 패전하는 등 동맹을 계속 잘못 고른 끝에 2차 대전 종전 이후 마지막 차르가 폐위됨으로써, 건국된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멸망하고 말았다.
2.2. 라틴 제국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킴으로써 동로마를 일시적으로 멸망시키고 수립한 라틴 제국도 로마를 계승했다고 주장했는데, 정식 명칭이 로마니아 제국이었다. 여기서 로마니아는 동로마 제국의 별명으로 로마인의 땅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였다.[15]그런데 라틴 제국은 여기에 언급된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짧은 역사를 가진 나라인데, 건국된 지 1년 만인 1205년에 초대 황제 보두앵 1세가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칼로얀[16]에게 포로로 잡히면서 국가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했고, 이후에도 황제 피에르가 동로마 유민들이 건국한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군대에게 포로로 잡히는 등 굴욕이 계속되었다. 보두앵의 뒤를 이은 앙리가 탁월한 명군이었고 앙리 사후에도 섭정으로 군림했던 욜랑드와 장 드 브리엔이 유능했기에 버틴 것이지 이 셋이 아니었다면 더 빨리 멸망했을지도 모를 국가였던 것이다. 결국 라틴 제국은 장 드 브리엔 사후 4차 십자군의 물주였던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의존하며 간신히 연명하다가, 건국 60주년도 되기 전인 1261년에 동로마 유민들의 나라인 니케아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이 부활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직접 라틴 제국의 계승을 주장하진 않았으므로, 본 문서에서 논하는 국가적 차원의 로마 계승 의식과는 무관하다.
2.3. 세르비아
중세 세르비아도 로마 제국 계승을 주장했는데, 세르비아는 영토를 크게 넓히고 국력을 크게 키운 왕 스테판 우로시 4세[17]가 1346년에 황제를 칭했다. 그냥 단순히 '세르비아 황제'라면 별문제가 아니었겠지만, 그 칭호가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였기에 세르비아는 제3의 로마를 칭한 나라가 되었다.[18] 실제로 그는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잡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려고도 했지만, 세르비아와 지나치게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은 피하려던 베네치아의 반대로 백지화되었다.그 후 세르비아 제국은 1355년에 뒤를 이은 스테판 우로시 5세가 아직 어렸던데다가 무능했기에 1371년에 그가 죽으면서 공중분해되었다. 이후 세르비아의 지방 귀족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가 세르비아 공국을 창건하고 그 아들인 스테판 라자레비치 시대에 오스만 제국의 봉신으로서 나름 번영을 누리지만, 그 다음 대인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죽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됐다.
2.4. 오스만 제국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메흐메트 2세 역시 로마 황제(Kayser-i Rûm)를 칭하며 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운 근거는 두 가지였는데, 먼저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한 제국을 통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이슬람 세력이 줄곧 보아온 쪽은 서유럽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 당연히 오스만을 비롯한 이슬람권에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라 부르며, 프랑크인들이 보내온 사자가 그리스의 왕 따위 운운하지 못하게 했다. 이슬람권 입장에서도 동로마는 예언자 무함마드 시절부터 지목해 온 신학적 차원에서 언젠간 정복해야 할 거대한 적이면서도 동시에 문화적, 제도적, 과학적 측면에선 또 스승뻘인 문명이기도 했기에 적이었던 동로마의 '로마'로서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건 본인들에게도 용납할 수 없었다. 즉 '로마 제국의 수도를 손에 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을 수도로 정한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후 '이스탄불'로 이름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데, 그 유래는 알 수 없으나[19]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일단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10세기 아랍의 기록에 이미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도시로', 또는 '그 도시에' 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이스 틴 폴린(εις την Πόλιν)' 에서 유래한 것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전에도 이미 튀르크인들 사이에서 쓰이고 있었다. 오늘날처럼 이스탄불이 공식 명칭이 된 것은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인 1930년의 일이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후 오스만 제국의 공문서에 가장 널리 보이는 명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이름을 오스만어로 발음한 코스탄티니예(قسطنطينيه/Kostantiniyye) 이며, 이 밖에도 이스탄불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스탐불', '스탐볼',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인 '이슬람볼' 등이 쓰였다. 18세기 이후 오스만인들 스스로가 프랑스어로 표기한 이스탄불 지명을 보면 Constantinople(콩스탕티노플) 혹은 Stambul(스탕뷜)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한성이 서울로 자주 불렸음에도 공식명칭은 한성이었듯이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공식 명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이었고, 이스탄불은 비공식 애칭 정도일 뿐이었다.[20]
두 번째 근거는, 로마 황실과 오스만 황실은 따져 보면 사실 먼 친척이라는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2대째 군주인 오르한은 1346년에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6세의 딸과 결혼한 일이 있는데[21], 오르한이 자신의 조상인 만큼 동로마 황녀도 자신의 조상이고. 즉 동로마 제국 황실은 자신의 친척이라는 주장이다.[22]
오스만에서는 아시윽파샤자데(Âşıkpaşazâde), 기독교 측에서는 동로마 망명 역사가였던 테오도로스 스판두니스(Θεόδωρος Σπαντουνὴς)를 비롯한 15세기부터 전해 오는 역사서들은 오스만 제국이 아나톨리아 북서쪽 비티니아 지방 일대에서 활동하던 네 명의 베이가 연합하면서 세워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네 명 중 한 명이 바로 지도자 격이자 이후 오스만 황가의 시조가 된 오스만 가지(Osman gazi)이고, 다른 한 명은 투라한 베이(Turahan bey), 나머지 두 명은 미하일 코세스 베이(Mikhael Kosses bey)와 에브레노스 베이(Evrenos bey)라고 전하는데, 미하일 코세스나 에브레노스 모두 그리스어로 된 기독교식 이름이다.
건국 전승 자체가 이러할 만큼 오스만 제국은 성립 바로 전만 해도 동로마 제국의 핵심 영토 중 하나였던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통혼과 개종을 통해 수많은 동로마인들을 흡수하여 계승 의식을 주장했다. 그 와중에 이슬람교로의 개종은 상당히 유연하게 이루어졌고, 심지어 렘노스 섬의 영주들을 필두로 적지 않은 수의 기독교 동로마계 영주들은 15세기 말까지도 개종을 안 하면서 파디샤에게 그 지위와 지배권은 그대로 인정받으며 버틸 만큼 최대한 마찰 없이 동로마 제국의 인적, 물적 인프라를 흡수하였다.
오스만 제국 내의 동로마 세력 역시 오스만 제국을 동로마 제국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하였다. 이는 오스만 왕가의 기원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첫번째 설은 오스만 1세의 할아버지인 쉴레이만 샤가 콤니노스 왕조의 후예라는 것이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조카인 요안니스 콤니노스가 소아시아 원정 중 음해를 당해 셀주크 제국으로 망명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술탄의 사위가 되었는데 그의 아들인 카메르가 후일에 쉴레이만 샤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번째 설은 오스만 왕가가 동로마 제국의 미천한 농민의 후예라는 것이다.
위의 두가지 이야기 모두 신빙성은 없지만 첫번째 설은 동로마 귀족 출신들 사이에서 퍼진 내용이고, 두번째 설은 동로마 평민 출신의 예니체리 사이에서 퍼진 내용이다. 이를 통해 동로마 제국의 유민들 역시 오스만 왕가의 기원을 동로마 제국에서 찾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연속성에 주목하는 연구는 이곳에 소개되어 있다. 이밖에 모굴한국이나 히바 한국 등에서도 오스만 제국을 주로 룸(Ruhm / Rum)으로 칭했다.
튀르키예 내부에서는 오스만을 로마의 연속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 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상을 요약하자면 이미 과거 로마의 왕조들은 다른 이민족 황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스만 황실은 또 다른 로마의 이민족 왕조라는 입장이다. 또한 오스만의 파디샤들은 즉위식때 로마를 정복하여 로마 제국을 통일하겠다는 선서를 했다. 그저 고대 로마가 다신교를 믿다가 이후 기독교화된 것처럼 이번에는 이슬람교화 됐다는 것이다.
반면 서유럽인들은 대체로 오스만을 로마 제국의 후계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오스만같은 이교도 국가는 기독교 국가인 로마의 정통성을 계승할 수 없었다. 다만 그리스 정교회는 오스만 제국이 로마 제국을 계승했다고 보았는데, 당장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에 제국 내 반가톨릭 성향의 중심인물이었던 예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Γεννάδιος Σχολάριος)를 임명한 일이었으며 원래 로마 황제가 주는 은십자가까지 손수 장만해서 제공했다.
또한 메흐메드 2세 이후의 파디샤들이 스스로를 로마의 황제로 생각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후로 “로마의 카이사르(카이세리 룸)”라는 칭호(당연히 로마의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서 유래한 말이다)가 쓰이기 시작한 것이 그 증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실제 비석 등에는 “카이사르”라는 말이 거의 쓰이지 않았다. 또한 “카이사르”는 하나의 문장 안에서 고대 이란의 왕을 가리키는 말인 “키스라(Kisrā)”와 대구로 쓰일 때가 많았는데, 이를 보았을 때 “카이사르”란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동서 바다의 왕을 겸할 만큼 위대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법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저자의 좁은 식견으로는 오스만 제국을 로마 제국의 뒤를 이을 나라로 적극 평가하는 문서 역시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의 지배층이나 문인에게 오스만 제국이란 아바스 왕조에서 시작된 무슬림 왕조와 오구즈 칸에게서 시작된 튀르크계 왕조를 계승하는 존재였을 뿐, 거기에 로마 제국은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사용한 적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카이사르는 칸이나 파디샤보다 사용 빈도가 훨씬 더 낮았다.
≪오스만 제국≫ - 오가사와라 히로유키
그러나 위의 오가사와라의 주장처럼 오스만 제국이 로마 계승성을 표방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오스만에서 로마에서 유래한 칭호를 과시용으로 쓰기는 했지만 그것을 로마 계승 의식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오스만 시절에도 오스만의 황제는 임페라토르나 바실레우스를 칭하는 게 아니라 이슬람의 칭호인 술탄과 튀르크 고유의 칭호인 ‘칸’을 칭하다가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 파디샤를 차용해 사용했다. 오스만 황실 입장에서 '로마 황제'는 '이슬람의 칼리파', '튀르크족의 대칸' 같이 필요에 따라 시기적절하게 꺼내서 과시할수 있는 여러 타이틀 '중 하나'에 더 가까웠고, 오스만 제국의 로마 계승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기록은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행정 및 문화 엘리트에 편입된 구 동로마 유민들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 비석 등에는 “카이사르”라는 말이 거의 쓰이지 않았다. 또한 “카이사르”는 하나의 문장 안에서 고대 이란의 왕을 가리키는 말인 “키스라(Kisrā)”와 대구로 쓰일 때가 많았는데, 이를 보았을 때 “카이사르”란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동서 바다의 왕을 겸할 만큼 위대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법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저자의 좁은 식견으로는 오스만 제국을 로마 제국의 뒤를 이을 나라로 적극 평가하는 문서 역시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의 지배층이나 문인에게 오스만 제국이란 아바스 왕조에서 시작된 무슬림 왕조와 오구즈 칸에게서 시작된 튀르크계 왕조를 계승하는 존재였을 뿐, 거기에 로마 제국은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사용한 적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카이사르는 칸이나 파디샤보다 사용 빈도가 훨씬 더 낮았다.
≪오스만 제국≫ - 오가사와라 히로유키
다만 저런 현상은 오스만 뿐만 아니라 동로마 유민들이 살았던 모든 국가들에게서 나온 현상이다. 당장 오스만 이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라틴 제국에서조차 저런 현상이 나타난다. 망국의 생존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새 국가의 군주를 칭송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만과 다른 국가들은 큰 차이가 있다.
첫번째로 다른 국가들의 경우에는 동로마 유민들이 선택권이 있었지만 오스만의 경우는 처음부터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스만 치하의 총대주교들만 해도 파디샤에게 밉보이면 총대주교로 남을 수 없었고 때문에 오스만 황제와 적극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좋든 싫든 필수적인 것이었다. 오히려 동로마 황제에게까지 파문을 선언하던 세계총대주교가 파디샤에게 칭송하고 충성하기만 했다면 당시의 교회적 관점에서 그것은 그리스 정교회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위치에 있는지를 말해주었을 뿐이다. 사실 오스만 내에서 공식적으로 파디샤를 칭송하던 총대주교들조차도 대개 뒤에서는 선을 긋거나 우회적으로 돌려깠다. 다른 정교회 국가들에 세계총대주교가 파견한 인사들이 기독교인들이 왜 이교도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느냐는 물음에 대한 공식적인 답변이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충성하는거다", "우리 죄로 말미암아 벌받고 있는 중이다"라는 식의 논리였다는 점을 보면 이게 진실에 더 가깝다.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는 이후 공산화, 독재정권이 들어선 슬라브권, 동유럽권 정교회 국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23] 이 교회들이 자국의 공산당, 독재자를 인정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는 것에 그 이상의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될 말이다.
두번째는 오스만은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면서 동로마의 정치/경제/사회 구조를 파괴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그 자체도 파괴했고, 로마의 중요한 정체성인 기독교(정교회)에 대해서도 총대주교청을 어용교회로 만들어 지배했다. 그런 오스만을 동로마 유민들이 가톨릭이나 다른 정교회 국가들보다 정말 진심으로 호의적으로 여겼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그 예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에도 기독교인 엘리트층이 지속적으로 가톨릭이나 다른 국가의 정교회(주로 러시아)와 교류하면서 오스만 밖으로 이주하면서 그리스인 디아스포라를 만들었고 다른 국가의 동로마 유민들은 하나같이 오스만을 비난했다.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수백 년 전의 일 가지고도 라틴인들에게 부정적인 여론이 었는데, 오스만의 정복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 호의적인 감정을 품었다면 그거야 말로 이상한 일이다.
정리하자면 동로마 유민들은 오스만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고 때문에 이것을 오스만의 관점에서만 서술하는 것은 피상적인 견해다. 대부분의 동로마인들이 자신들이 피정복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인 이익과 위험 앞에서 표면적으로 파디샤를 군주로 인정했지만 동로마와 오스만의 국가적 계승성이나 정체성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예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도 메흐메트 2세에게 은십자를 바쳤지만 그 이후에도 우회적으로 무슬림들을 비난했고 오스만에 맞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한 동로마인들을 순교자로 칭송했다. 후술한 예루살렘 총대주교 안테모스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같은 사건으로 오스만 내의 기독교인들의 지위가 악화되고 파디샤의 명으로 고위 성직자들이 체포되어 처형 위험까지 가는걸 경험한 인물이다.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적극적으로 오스만 제국과 파디샤를 찬양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보라, 자비로운 주님께서 어찌 우리 교회의 진실하고도 온전함을 보존하셨는지; 그는 무에서부터 강력한 오스만 가문의 제국을 불러일으켜서 이들이 정교회 신앙에서 멀어져가던 로마인의 제국을 대체하게 하셨으며, 이 새로운 제국을 다른 제국들 위에 올리시며 이 또한 하느님의 뜻이란 걸 천명하셨노라.
≪교부들에게 호소≫, 18세기 후반의 예루살렘 총대주교 안테모스
≪교부들에게 호소≫, 18세기 후반의 예루살렘 총대주교 안테모스
(피리 레이스 제독의 항해서를 인용하며) 언젠가는 로마 땅에서 일어난 정복자가 마그레브 전체를 지배하며 세우타를 정복하고 수피들의 교당을 번영시킬 날이 오리라... 피리 레이스가 1526년 항해서를 술레이만 대제에게 헌상했을 때 그는 그가 헌정한 주군이 다스리는 땅을 '로마땅 (Diyar-i Rum)'이라 불렀다... (중략) 16세기 오스만 항해사들이 그들의 주군에게 충성을 표할때, 이들은 대부분 파디샤를 '로마의 지배자'라고 불렀지, '오스만 가문 (Al-i Osman)'이라 부르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들이 충성을 서약한 대상은 대체적으로 그들의 주군이 다스리는 땅에 대한 것이었지, 가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Isom-Verhaaren, C. 2014. "Was there Room in Rum for Corsairs?: Who was an Ottoman in the Naval Forces of the Ottoman Empire in the 15th and 16th Centuries?" Osmanli Arastirmalari-the Journal of Ottoman Studies (44)≫
≪Isom-Verhaaren, C. 2014. "Was there Room in Rum for Corsairs?: Who was an Ottoman in the Naval Forces of the Ottoman Empire in the 15th and 16th Centuries?" Osmanli Arastirmalari-the Journal of Ottoman Studies (44)≫
"술탄에게 가까운 지배층(askeri)는 출신 밀레트를 불문하고 일반 신민(reaya)과 정체성 차원에서 구분짓기를 원했으며, 여기서 택한건 '로마인'이란 정체성이었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오스만 제국에게 있어 '로마인 (Rum)'이란 단어가 가졌던 의미와 중요성을 세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를 사용하는 정교회 밀레트로서 '로마인'과 무슬림들도 표방한 '로마인'으로서의 차이이다. 전자는 정교회를 믿는 하나의 피지배 집단이었지만, 후자는 오스만 궁정에서 활동하는 관료, 시인, 예술가들이 선호한 사회문화적 정체성이었다. 두번째는 제국 내에서 지정학적 중요성을 표방하는 '루멜리아'로서의 중요성이었다.... (중략) 제국의 심장이 뛰는 땅은 루멜리아와 (서부) 아나톨리아뿐이었다. 그리고 세번째 의미는 제국 자체의 국격과 술탄들의 지위 자체를 높여주는 선언으로서 '로마의 황제 (kayzer-i Rum)'이란 칭호가 가지는 중요성이었다.
ERGUL, F. ASLI. "The Ottoman Identity: Turkish, Muslim or Rum?" Middle Eastern Studies 48, no. 4 (2012)
ERGUL, F. ASLI. "The Ottoman Identity: Turkish, Muslim or Rum?" Middle Eastern Studies 48, no. 4 (2012)
현대의 튀르키예 공화국은 튀르키예의 로마 계승성을 부정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과 단절하고 근대 튀르키예 공화국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로마의 계승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튀르키예 민족주의를 통한 국가 수립 및 통합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문서를 참고할 것. 현대 튀르키예 공화국은 로마 제국보다도 오스만 제국과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국가들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편이다. 다만 공화국 시대에도 문화적으로는 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계승성을 인정하기도 했고, 튀르키예 관광청 같은 정부기관의 홍보서적이나 학술 서적에서도 이에 대한 담론들을 다루기는 한다.
2.5. 러시아
근현대에 보여준 강대국의 면모로 동로마계 후계제국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사례. 구글에 '제3의 로마'를 검색하면 러시아를 말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러시아는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러시아의 이반 3세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Третий Рим)'로 부르며 동로마 제국을 계승했다 주장했다. 당대의 러시아가 로마 제국의 뒤를 이었다고 주장한 근거는 크게 두 가지인데, 먼저 이반 3세가 아내로 맞아들인 소피아 팔레올로기나(결혼 전에는 조이 팔레올로기나)가 동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딸이었다. 보다 자세히 이야기하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동로마 제국의 신하국인 모레아 전제군주국[24]의 공작인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콘스탄티노스의 동생이었는데, 그 딸이 소피아였다.
사실 이 결혼은 당시의 교황이 제안하여 이루어졌다. 당시 토마스와 그 가족은 1460년에 모레아 공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함에 따라 로마에 머물고 있었다. 교황으로서는 러시아에 가톨릭의 영향력을 확대하여 최종적으로는 동서 교회의 일치를 노린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역효과가 났던 셈이다.[25]
이반 3세가 내세운 또 다른 주장은 종교가 같다는 것이었는데, 러시아의 국교인 동방 정교회는 키예프 공국의 대공 블라디미르 1세(재위: 980~1015)가 동로마 황제의 누이를 대공비(妃)로 맞이하며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리고 모스크바 대주교좌가 총대주교좌로 위상이 격상되고, 동로마 제국과 여러 동유럽 정교회 왕국들이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해 멸망하거나 상하관계에 놓이면서 러시아는 독립성을 지켜 동방 정교회 세계에서 유일하게 건재한 곳이 되었다.
이 외에도 로마가 일곱 언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모스크바도 일곱 언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라는 근거 중 하나로 썼으며, 근거로 실질적으로 활용되진 않았지만 러시아 역시 동로마 멸망 후 동로마의 유민들을 흡수-보호하였다는 점도 고려할 만하다.
이반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칭하며 동로마 제국의 관직명이나 궁정 의례 등을 대거 받아들였으며, 차르라는 칭호를 러시아 군주의 칭호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아들인 이반 4세가 처음으로 차르라는 칭호를 썼다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반 3세는 국내적으로만 차르라는 칭호를 썼을 뿐 그것을 대외적으로도 사용하지는 못했다. 이걸 대외적으로도 공식화한 사람이 이반 4세.
이후 표트르 1세의 대에 이르러 모스크바 총대주교좌가 교황을 제외한 총대주교들의 인정을 받음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과 같은 방식으로 동로마의 제관이 러시아 차르의 머리 위에 올라가게 된다. 종교적 중립성을 띄고 보면 신성 로마 제국이 가톨릭에 의한 서로마의 계승자라면, 이쪽은 정교회에 의한 동로마의 계승자가 되는 셈. 물론 서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동로마 황제 주장을 처음에는 대놓고 무시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국력을 차츰차츰 키워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파리를 점령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굳이 강대국과 척을 질 필요가 없는데다가, 어차피 러시아가 주장하는 동로마의 종교적/정치적 계승은 서로마 중심의 서유럽과는 무관하므로 외교 문서에도 꼬박꼬박 황제라고 써주면서 대충 황제 대접을 해주었다.[26]
이후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여섯 차례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벌어졌을 때에도 이 주장이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는데, 예카테리나 2세는 그리스 계획을 표방하여 새로이 정복한 옛 크림 칸국 영토에 도시를 건설하면서 오데사, 헤르손, 세바스토폴, 심페로폴 등 그리스식 이름을 붙였다. 또한 이교도의 폭정 하에 신음하는 발칸반도의 정교회 신자들의 해방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수복이라는 명분으로 6번의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되풀이하면서 러시아군은 그리스, 불가리아 같은 오스만의 지배를 받던 정교회 지역의 지지를 받으면서 최종목표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가까운 지점까지 진군했다. 마지막 전쟁인 6차전(1877~1878)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부터 서쪽으로 불과 16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이는 러시아가 너무 강해져 밸런스가 무너질 것을 우려한 서유럽 열강의 개입으로 인해 러시아가 주도하는 동로마 영토 회복은 결국 무산되었다. 이후 혁명으로 전복될 때까지 러시아 제국 영토에서 옛 로마 제국 영토였던 지역은 동로마 제국에서 변방지역인 크림반도 남부 일대, 조지아, 아르메니아 지역에 불과했다.
러시아 혁명 후 적백내전이 터지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밀린 백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제4의 로마로 선포하기도 했다.
결국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가 된다는 러시아인의 태고의 꿈은 결국 실패했다. 중세와 그 이후 17세기 벌어진 기독교 세계의 대분열은 결국 모스크바에 있는 차르들의 국가는 로마가 되지 못할 것이란 현실을 못박았다. 그러나 세기말적인 형태든, 혁명적인 형태든 간에 러시아인들이 품고 있던 세계 구원의 메세지는 근대에 들어와서 대단히 놀라운 변화를 겪었다. 제3의 로마 대신 3차 인터내셔널이 모스크바가 주도하는 세계 질서의 중심이 되었고, 제3의 로마 이념의 많은 부분이 이식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3차 인터내셔널 또한 일종의 신성한 종교적 제국이고, 그 근원은 비록 세속화되었다 한들 정교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제3차 인터내셔널은 이름과 달리 국제적인 기관이 아니라 러시아 민족 고유의 체제였던 것이다.
니콜라이 베르다예프, 제정 러시아 말기~소련 초기 러시아 문필가, 사상가
니콜라이 베르다예프, 제정 러시아 말기~소련 초기 러시아 문필가, 사상가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세운 소련은 로마 계승을 주장하지 않았고 쌍두독수리 문장도 낫과 망치로 바꿔버렸다. 그러나 암암리에 러시아인들의 계승 의식 자체는 계속해서 이어져 왔다. 재미있는 점은 막상 로마 계승을 주장하지 않았던 소련 시절이 러시아 역사에서 유일하게 정치, 문화적으로 로마 제국에 가장 가까운,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상으로 세계적인 패권을 행사하던 시절이었다는 사실이다. 소련이 공산권의 맹주국으로서 가졌던 정치적인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고 문화적으로도 소련식 공산주의 문화가 지구 절반에 퍼져 있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소련이 대전기에 핀란드를 넘보고 발트 3국과 몰도바를 병합한 명분이 제정 러시아 시절의 영토 수복이었으니 은연 중에 러시아 제국에 대한 계승 의식이 있었으며 이는 로마 계승 의식과 이어진다고도 유추할 수 있다.
오늘날 러시아 연방은 독일연방공화국이 신성 로마 제국을 자처하지 않는 것처럼 로마를 자처하진 않지만 러시아 제국에서 쓰던 쌍두독수리 문장을 부활시키는 등 소련 시절보다는 로마와의 연관성을 부정하진 않는다.
3. 서로마 제위 계승
서로마 정통 제위 | 자칭 제국(비정통) |
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27] (이후는 동로마 제위와 궤를 같이함) | 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제1제국)[A]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계승 종결)[A] 프랑스 제국(제1제국, 제2제국) 독일 제국(제2제국) |
3.1. 동로마 제국
의외로,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폐위시킨 자로부터 황제의 권한을 이양받아 서로마의 정통 제위를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으며, 동시에 로마 분열기에도 한쪽의 황제가 공석이면 다른 쪽의 황제가 다음 황제를 정하는 전통이 있었기에, 이러한 퍼포먼스가 없더라도 서로마 제국위는 자연스럽게 동로마 제국에 종속된다.다만 이런 논리에는 약간의 결함이 있는 것이, 정작 제노는 오도아케르의 서로마 지역 지배를 인정한 바도 없었고 오히려 죽을 때까지 4년동안 서로마 황제임을 자부한 율리우스 네포스를 정통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고토 재정복 사업을 통해 서로마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한 시기가 있었으며, 라벤나에 서로마의 본토였던 이탈리아를 담당하는 총독부를 설치하고 지배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랑고바르드족의 침공으로 인해 이탈리아 북부에서 동로마의 영향력이 약화되었고[30], 8세기에는 라벤나 총독부까지 함락되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영역이 남부로 축소되었다. 이후에도 이탈리아 남부는 지속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지만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 인해 위태로워졌고, 11세기에는 이슬람 대신 노르만족이라는 새로운 위협이 등장했다. 그리고 1071년에 로베르 기스카르에 의해 동로마의 마지막 이탈리아 영토인 바리가 함락되었고, 이후 동로마는 콤니노스 왕조 시기에 남이탈리아 탈환 시도를 하긴 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3.2. 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의 제위를 계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상 파괴 운동 등으로 교황과 마찰을 빚자 교황 레오 3세가 카롤루스에게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씌워줌으로 인해 서로마 제위가 이중계승되게 되며 이와 관련된 문제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간의 갈등이 빚어진다. 교황 측의 근거인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문서는 이후 위조문서임이 드러났기에 이는 사실상 교황에 의해 서로마 제국위가 새로 만들어 버린 셈인데, 문제는 황제위를 만든 교황은 동서 대분열 전까진 동로마 제국 라벤나 총독부에 성직자 임명 등을 보고하는 등 동로마 제국에 종속된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이후 동서 대분열을 통해 동로마와 로마市의 종속 관계가 끊어지면서 동로마와 교황의 종속 관계도 끊어지게 된다.신성 로마 제국 후기에 이르러서는 이웃나라들에 비해 중앙집권화가 매우 뒤떨어진 황제의 권위는 땅바닥을 뚫을 정도로 추락하고, 각 제후국들이 선제후 못지않은 자주적인 외교권과 주권을 가지며 제국의 역할이 유명무실화되자 볼테르를 비롯해서 후대인들에게 반쯤 조롱이 되어버린 감도 있지만, 그래도 로마市를 포함한 당대 서방인들에게는 대부분의 시기에 걸쳐 서유럽의 로마로 대접받은 건 엄연한 사실이다. 자세한 건 신성 로마 제국/오해 문서 참조.
3.2.1. 프랑스 제국
아이러니하게도 신성 로마 제국을 무너트린 나폴레옹의 제국이 프랑크 왕국 시절의 신성 로마 제국위 계승으로 정당화되기에 신성 로마 제국의 후예가 신성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셈이 되어버렸다. 실제로 나폴레옹도 프랑스 제국을 프랑크 왕국의 후계국이라고 자처했으므로 억지로나마 서로마 제국 계열로 분류할 수도 있다.[31] 혁명 프랑스를 토대로 한 막강한 국력으로 유럽을 평정했기에, 힘으로 주변국을 찍어누르고 제국의 칭호를 얻은 국가라 할 수 있다.서유럽에선 이전에도 제국을 칭할 법한 강대국들이 많았지만, 프랑크 왕국 이후로 한 국가가 유럽으로 인지되던 지역의 거의 전부를 완전히 압도했던 적이 없어서 함부로 황제의 칭호를 주장하지 못했다. 예외적으로 가톨릭의 공인을 받은 독일 제후들이 있긴 하지만, 이는 상당히 예외적인 자리였다. 나폴레옹 이전의 프랑스 왕국 역시 신성 로마 제국의 자리를 노렸으나, 그 때마다 독일 제후들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의 견제를 받아서 실패했다.
그런데 혁명기 프랑스는 독보적으로 강했고 혼자서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힘으로라도 제압할 수 있었기에 황제 칭호를 교황에게 강요하여 가져온 것이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이 황제 칭호를 칭하는 근거가 지정학적인 과거 프랑크 왕국의 위치에 프랑스가 있다는 점과 순전히 '압도적인 군사력' 뿐이고, 혈통이나 정치체계 계승을 통해 갖춰지는 정통성도 없었기 때문에 위에서도 언급했듯 주변국들이 참칭이라고 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나폴레옹의 칭제방식이 가장 로마적이라는 점이다. 로마의 황제가 되기 위해선 강력한 군사력과 시민의 지지 두 가지가 필요했는데 국민투표라는 시민의 지지와 강력한 군부의 지지를 등에 업어 황제에 등극한 것이다. 이는 군주의 칭호에서도 드러나는데 나폴레옹의 공식 칭호는 프랑스인의 황제(영어로는 Emperor of the French)로 이는 로마인의 황제란 칭호에 모티브를 얻었을 확률이 높다.[32]
물론 나폴레옹 시대 이후 로마 제국의 후예를 함부로 자칭하는 분위기는 수그러들었지만, 힘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편법으로 황제를 자처하는 식민 제국 국가들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해서 '황제 인플레 현상'이 19세기 이후에 벌어지게 된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 뒤 인도 제국을 수립해서 대영 '제국'을 자처한게 좋은 예이다.
3.2.2. 오스트리아 제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선거에서 선제후들의 투표로 선출되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1452년 프리드리히 3세의 대관식 이후[33]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제국의 해체까지 줄곧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라인강 서쪽의 제국 영토를 상실하게 되면서 계속 합스부르크 가문에 투표를 해오던 성직 선제후국들이 프랑스 제1공화국에 합병되었고, 남은 세속 선제후들도 프랑스 편을 들기 시작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재위 계승이 위태로워졌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 선포는 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당시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프란츠 2세는, 1804년 신성 로마 제국과는 별개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34]를 아우르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했다. 따라서 프란츠 2세는 2년간 신성 로마 황제와 오스트리아 황제를 겸하다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오스트리아 황제 재위만이 남았다. 비록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지만 남은 독일어권 국가들을 규합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1815년의 빈 회의 이후에 결성된 독일 국가들의 회의기구인 독일 연방의 의장국이 되어 독일 통일을 주도하려 했으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하며 오스트리아 제국은 독일 연방에서 축출당했다. 그 후 대타협을 거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개편한 오스트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했고, 군주제 폐지와 영토 상실을 겪으며 군주정이 사라진다.여담으로 의외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35] 가문은 동로마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혈통이 모계로나마 섞여 있긴 하다. 바로 몬페라토 후국을 계승했기 때문인데 자세한 설명을 하자면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8세의 딸 비올란테가 이리니라는 이름으로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후 이리니의 남동생으로 몬페라토 후작이 된 조반니 1세가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버려 남계 후손이 없어지자 몬페라토 후작위는 안드로니코스와 이리니 사이에서 태어난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에게 돌아갔고, 그 후 몬페라토 후국은 약 200년간 팔레올로고스 가문이 통치하게 되었다. 1533년, 몬페라토의 팔레올로고스 가문도 남계 후손이 끊겨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9세의 딸이었던 마르게리타 팔레올로가는 만토바 공작이었던 페데리코 곤차가와 혼인하여 몬페라토 후작위는 곤차가 가문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 후 페데리코 곤차가의 증손녀인 마르게리타 곤차가는 로렌 공작 앙리 2세와 혼인하였는데, 둘 사이에서 태어난 클로드 프랑수아즈는 훗날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여 신성 로마 황제가 되는 프란츠 1세의 증조모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은 팔레올로고스 가문과 아주 미약하게나마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36] 동로마 황실과의 혼인으로 동로마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러시아, 오스만의 사례에서 볼 때 오스트리아도 나름의 명분을 주장할 여지는 있기는 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이를 내세운 적은 없었다.[37]
3.2.3. 독일 제국
1871년에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지역을 통일한 독일 제국은, '카이저' 라는 칭호[38]를 사용하며 신성 로마 제국의 뒤를 이었노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는 다른 주장들과는 달리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가톨릭 군주가 통치했던 서로마 제국과[39] 신성 로마 제국과는 달리 독일 황제는 개신교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가였던 호엔촐레른 가문만 두고 보면 개신교 가문이었음에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신분을 가진, 신성 로마 제국의 7선제후 중 하나였다. 즉, 원칙상으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될 자격이 충분했기 때문에 종교가 개신교도더라도 아예 명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이들이 가장 크게 비판 받은 건 아무리 프로이센 왕국에게 군사적으로 털렸다지만, 최소한 독일계 가톨릭 국가들의 맹주 노릇은 하던 오스트리아를 빼놓은 통일이라는 점이었다.[40] 그래서 독일 제국 성립 이후에도 제국 내의 국민들 사이에는 소독일주의에 만족하지 않고 오스트리아까지 포함한 대독일주의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런 배경으로 훗날 나치 독일은 강력한 범게르만주의를 발판삼아 독일과 오스트리아 양국의 열렬한 호응 하에 안슐루스(대독일 통일)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나치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고 독일의 엄청난 흑역사로 남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다시 갈라졌고 그와 함께 지금까지도 안슐루스의 원인인 대독일주의는 외세에 의해 금지되었다.
3.2.3.1. 나치 독일
나치 독일은 독일 민족국가의 적통임을 주장하며 신성 로마 제국을 제1제국, 독일 제국을 제2제국, 자신들을 제3제국이라고 주장하였다.[41]안슐루스를 통해 오스트리아와 하나가 되면서 독일계 양대 국가를 통일하였기 때문에 아예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지만, 황제도 없고, 총통이던 히틀러는 종교관이 의심을 받으나 가톨릭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으며, 나치 독일의 패악질로 인해 깔끔하게 묻혔다. 게다가 당시 나치는 독일 민족국가의 적통임을 주장하긴 했어도 직접적으로 로마의 후예라는 주장은 하지 않았다.
4. 기타
4.1. 이탈리아의 주장
한편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의 본토였다는 것과 오스만 제국과 유사하게 로마를 수도로 하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먼저 이탈리아 통일 당시의 운동가인 주세페 마치니의 구호 가운데 '황제들의 로마 다음에 교황들의 로마가 있었고, 이제 인민들의 로마가 올 것이다' 라는 것[42]이 있고, 마치니는 이 구호를 내걸고 공화제로서의 이탈리아 통일을 주장하고 튀니지를 식민지화하고 그것을 시작으로 이탈리아가 지중해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래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이탈리아 왕국도 공식적으로 제3의 로마라고 자칭은 하지않았지만[43] 로마 제국의 후계자라는 의식이 강했던 만큼 정복활동을 벌여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 리비아를 식민지로 두었고(이탈리아 제국) 이를 통해 로마제국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러했다. 다만 에티오피아를 정복하려다가 굴욕을 당하기도 했고, 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었음에도 영토를 얼마얻지못해 정국이 혼란에 빠지기도 했기 때문에 당대에도 미국, 영국, 프랑스에 비하면 로마제국 흉내를 내려고는 하지만 실제 국력은 그에 못미치는 2류 열강 취급이기는 했다.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것을 차용하여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제3의 로마(Terza Roma)' 라고 했는데, 황제의 로마와 교황의 로마 다음에 파시스트 로마가 도래했다고 연설한 것. 그리고 역시 마치니의 주장을 빌려와 영토 확장을 부르짖었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추축국으로 참전했다.
한편 로마 공화국의 정체성을 계승했으며, 이 유지를 자국이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공화정 로마의 계승자를 자처했던 경우도 상당히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저서에서 알 수 있듯 중세와 르네상스를 통틀어 제국으로서 로마가 아닌 공화국 로마의 가치를 지향했던 이탈리아 통일론자들은 상당히 유서 깊으며 영향력 있는 지식인 세력이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이나 14세기 로마 민중 봉기의 지도자였던 콜라 디 렌초처럼 혈통, 권위, 국력, 지정학적 요소 등으로 연속성을 주장했던 위의 군주국들과는 다른 의미로 로마의 공화주의와 시민 중심의 정치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44][45]
현 이탈리아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로마의 계승을 주장하지 않고 있으나 위에 나왔듯이 민간 대중 사이에서의 로마에 대한 계승성과 자부심은 강하게 남아 있다. 특히 현 로마시 시민의 경우 그 성향이 두드러진다.
4.2. 그리스의 주장
19세기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그리스 왕국은 스스로를 동로마 제국의 정통 후계자라고 생각했고, "발칸반도 남쪽 끝부분의 영토로 만족하지 말고 '그리스인'이 살고 있는 지방 모두를 우리 영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이를 '대그리스주의'. 또는 당시 그리스인이 붙인 이름을 따라 '메갈리 이데아(Μεγάλη Ιδέα, 위대한 이상)'라고 한다. 문제는 '그리스인'이냐 아니냐의 기준을 '역사적, 인종적으로 그리스와 관련된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로 잡았다는 것. 이에 따르자면 오늘날 그리스는 물론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이 존재하는 아나톨리아 해안은 물론이며 그리스인이 숨어살던 카파도키아 고원과 그리스계 폰투스인이 사는 폰투스까지 모조리 정복해야 한다. 즉 발칸 반도 남단 전역과 아나톨리아 반도 전역을 정복해야 하는 셈. 바로 아래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튀르키예 대국민회의와 전쟁을 벌여 아나톨리아를 탈취하려 했던 것도, 욕심이라면 욕심이었지만 그 이전에 이러한 민족주의적 사상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이것은 튀르키예 민족으로서는 지극히 곤란한 것이었는데, 대그리스주의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물론 멀리는 트레비존드와 안티오키아까지 점령해야 하는 것으로 이는 튀르키예인의 거주지역과 완전히 겹치는 것이었다. 그리스 왕국의 첫번째 국왕인 오톤이 메갈리 이데아를 실천하겠다고 크림 전쟁에 참전했다가 패배하고 결국 퇴위하면서 꿈이 되는가 싶었지만 요르요스 1세가 정세를 잘 활용해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하나하나씩 얻어가면서 꿈이 실현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우여곡절이 있어서 1897년에 크레타섬에 반란이 일어나는 김에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가 역공을 당해 그간 얻었던 영토를의 일부를 다시 뱉고 막대한 배상금을 오스만 제국에게 내주는 등 등 순조로운 영토확장이 진행되었던것은 아니었고, 1900년대 들어서 침체되었다. 하지만 1912년~13년도에 두차레에 걸쳐 치러진 발칸전쟁에서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를 상대로 이기면서 크레타 섬과 남트라키아, 테살로니카 일대를 얻었고, 거기에 더해 1차 세계대전에서 그리스가 승전국이 되고 오스만 제국이 패전국이 되어 해체되면서 메갈리 이데아가 완전히 실천되는듯 싶었다.하지만 추가적인 영토확장 시도는 오스만 제국의 잔당을 모아서 반격한 아타튀르크에 의해서 분쇄 되었고 신생 튀르키예와의 협상을 통해서 인구교환을 통해서 아나톨리아 지방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철회한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또한 당시 영국군이 주둔중이라는 특성상 점령에 실패하여 새 로마를 점령하는 것 또한 실패하였다.
현대 그리스에서는 'Βυζαντινή Αυτοκρατορία(비잔디니 아프토크라토리아; 비잔티움 제국)'나 'Ανατολική Ρωμαϊκή Αυτοκρατορία(아나톨리키 로마이키 아프토크라토리아; 동로마 제국)' 같은 표현이 쓰인다.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후술하지만 로마와 연관이 되는 동로마 제국조차도 잘 안 쓰이고, 그냥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해놓은 걸 볼 수 있다. 위의 '바실리아 톤 로메온'이란 말은 그냥 '로마 제국' 정도의 뜻이라서 현대 그리스 입장에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비잔티움 제국을 그냥 '로마 제국'으로 칭해 버리면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2세기 중반(BC 146년)[46]에서, 오스만으로부터 독립하는 1830년까지 무려 2천 년 가까이 자기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는 민족으로 보일 수 있다.
현대 그리스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계승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로마성을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계승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오스만 제국의 다문화적인 모습은 부정하는 현대 튀르키예인들과도 비슷한 모습이다.
그리스의 동로마 제국에 대한 계승 의식은 이탈리아의 고대 로마에 대한 인식과도 대조할 수 있다. 이탈리아도 스스로를 고대 로마의 후예로 여기고 이탈리아가 로마가 시작한 장소임을 강조하며 로마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타성을 가지고 고대 로마에 근대 이탈리아의 민족 의식을 적용해서 로마를 이탈리아만의 민족 국가로 여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와 가장 큰 접점을 가지고 있는, 동로마 제국으로 넘어가기 전까지의 고대 로마는 가장 전형적인 보편제국의 예시이다. 비록 이탈리아가 '로마의 장녀'란 표현을 써도 될 정도로 깊은 연관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로마를 이탈리아만의 민족 국가로 보기엔 매우 곤란하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과 그리스의 관계는 고대 로마와 이탈리아의 관계보다 더 복잡하다. 공화정기나 제정 초기까지의 그리스 본토나, 넓게 보아 아나톨리아 서부와 마케도니아 등을 포함하는 에게 해 연안의 확실한 그리스권은[47] 로마 본국 이탈리아의 라틴인이라는 외세 내지는 외래종족의 통치를 받았던 점이 확실하지만, 가장 많이 땡겨잡으면 카라칼라의 212년 시민권 확산 이후, 내지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280년대 사두정치 및 '수도와 궁정을 로마 시와 이탈리아 밖에도 둘 수 있다는 개념'의 첫 도입 이후, 혹은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완성 이후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동로마 중후기에는 (비단 4차 십자군에 의한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다종족적 제국이라기보다는 점점 민족국가에 가까워졌던 점도 고려해야 한다. 10세기부터는 기록에 '로마인'이 마치 '아르메니아인'처럼 종족개념으로 나오기 시작하며, 11세기 후반의 저작물 중 하나에는 영어로 번역하면 'a Roman by birth', 즉 '출생에 의한 로마인'이라는 대목이 나오는데[48], 근현대적 의미의 국적 개념이 없던 중세 시절, 저 구절은 종족적인 의미의 로마인, 즉 '로마족'(Roman ethnicity)이라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이러다가 그리스인들이 로마라는 이름에서 탈피한 것의 효시는 그리스 독립전쟁이라고 한다. 그리스가 독립한 과정이 처음에는 자력으로 독립하려다가 오스만으로부터 반독립 상태였던 이집트의 메흐메드 알리가 보낸 군대에게 거의 진압되었다가 결국 서유럽의 힘을 빌려서 독립한 것이기 때문에 그 대가로 서유럽계 왕족을 왕으로 세워야 했다. 그리고 당시에 이미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다지만 로마라는 국호로 독립하기에는 서유럽과 가톨릭 교회를 자극할 우려가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여전히 오스만의 수도였으며 로마 시절부터 면면히 이어오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직은 (그리스인들이 보기에는) 오스만의 충실한 어용이 되었기 때문에, 차마 로마라는 국호를 쓰기 어려웠다. 영어 위키백과 Roman people(로마인)에도 로마인(Romioi)이라는 말은 적극적으로 독립을 위해 싸우는 이들보다는 여전히 오스만 치하에 있는 이들을 더 연상케 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오스만 치하에서 게으른 노예로 있던 로마인과 대립되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용감한 자유의 투사인 그리스인(Hellene) 상이 형성되었다는 대목이 있다.[49] 물론 그리스인들이 자국(민)에 대해서 로마(인)이라고 부르는 용례는, 한국인들이 서울을 한양, 조선을 한국이나 삼한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돌려부르거나 혹은 문학적인 용도로 쓰이는 옛 이름으로는 여전히 간혹 쓰인다고 한다.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서적으로는 'The Byzantine Hellene', 'Romanland', 'Being Byzantine', 'Hellenism in Byzantium', 'Byzantium and the Modern Greek Identity' 등이 있다.
4.3. 루마니아의 주장
루마니아는 România[50]라는 국명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로마인의 땅을 뜻한다. 동로마 제국의 여러 국호 중 하나이며 라틴 제국의 정식 명칭에 사용된 명칭인 로마니아와 일맥상통하는 명칭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루마니아는 국호에서부터 대놓고 로마 제국의 계승을 주장하는 나라인데, 그 근거는 루마니아인이 고대 로마의 주류 민족이었던 라틴족에 속하고, 루마니아어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라는 것이다. 이러한 로마 계승 의식은 루마니아 국가에서도 나타나는데, 아직도 이 핏줄 속에 흐르는 로마인의 피를이나 전투의 승리자가 된 트라야누스의 이름이 있음을이라는 가사가 대표적이다.한편 루마니아는 로마 계승을 주장하면서도, 로마에게 정복당한 선주민들의 나라인 다키아 역시 계승했음을 주장하고, 로마군에 저항하다가 자결한 다키아의 마지막 왕 데케발루스를 민족 영웅으로 추앙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금의 루마니아의 정체성은 아우렐리아누스가 다키아 속주를 포기하면서 남겨진 로마 정체성을 가진 다키아 사람들이 현 루마니아 지역에 남아서 만들어진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둘의 계승성을 주장한다 하여도 심하게 모순되지는 않는다. 이런 나라들은 유럽에 무수히 많고, 아랫동네인 불가리아에서 트라키아인(즉 로마인), 남슬라브족, 불가르족을 자신들의 3대 조상으로 여기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4.4. 특이 사례 1- 미국
미국은 로마 제국 계승과 전혀 무관한 근대의 신생국이고, 미국 스스로도 대내외적으로 로마 계승을 주장한 적이 없다. 국장과 같은 상징물이나 표어 등이 로마의 그것과 조금 비슷한 부분[51]은 있으나, 어디까지나 단순한 모방 및 변형에 불과하며 진지하게 로마의 정통성을 고려하지는 않았다.그럼에도 그 위상과 성격 면에서 미국과 로마의 유사성을 진지하게 지적하는 학자들이 많다. 로마 공화정의 정치 요소를 미국의 정치 체계가 근대식으로 계승하였음은 물론이고 다민족-다인종 사회를 기반으로 한 보편제국이라는 성격을 똑같이 가지고 있으며, 압도적인 국력을 통해 이룩한 미국 중심의 1극 패권 체제인 '팍스 아메리카나'는 로마 제국의 그것인 '팍스 로마나'와 사실상 같다. 그리고 로마는 지중해를 평정하여 지중해 무역 질서에 안정을 가져왔고, 미국은 세계 바다를 지배하면서 세계 무역 질서에 안정을 가져왔다는 점도 유사하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미국을 '21세기의 로마'로 표현하는 사례가 많다. 즉 위에 언급한 로마의 계승을 주장한 다른 국가들이 통치 및 외교상 이념이자 정통성이라는 명분의 성격이라면, 미국은 그 실질적인 위치와 위상 면에서 로마와 유사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미국이 로마라고 하는 것은 진지하게 후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미국의 위상을 로마에 비유하는 것이다. 즉 로마 제국을 공식적으로 계승한 적도 로마 제국을 인식한 적도 없는 미국이 정작 로마 제국 멸망 이래 로마 제국과 가장 유사한 나라라는 아이러니.
4.5. 특이 사례 2- 유럽연합
유럽연합 역시 통합의 기원은 로마 제국의 역사성과 무관하며, 유럽연합 스스로도 대내외적으로 로마의 계승을 주장한 적이 없다. 허나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다시 유럽이 하나의 체제로 통합되면서, 유럽연합이 장차 새로운 로마 제국의 형태를 띌 수 있다는 진지한 분석들이 많았다. 유로화가 등장하고 유럽의 통합 과정과 그 효과가 특출나게 나타났던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자주 나왔던 분석이다.그러나 그리스 경제위기를 필두로 한 유로화 사태,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 무엇보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인 브렉시트를 거치며 유럽연합이 과연 성공할 것인지 회의감이 생겨났다. 이로 인해 유럽연합과 로마의 비교는 수그러들고 있다.
한편 유럽연합 내에서 독일의 영향력이 매우 커지면서 유럽연합이 독일의 '제4제국'이 되어가고 있다는 다른 방향의 주장도 있다. 본래는 소설가와 음모론자들이나 하던 주장이었으나 이후 반 EU 성향의 극우 정치인들도 이 표현을 사용하며 독일의 영향력을 비판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유럽연합 문서 참조.
5. 한국 인터넷 문화에서
- 본 문서에 계속 나오듯이 이 제3의 로마란 주제는 역덕후 사이에서 끊이지 않고 재생산되는 떡밥이자 밈이 되다시피 했다. 그래서 아예 더더욱 막나가서 블라디보스토크가 제4의 로마였으니 블라디보스토크를 점유했던 발해의 후예인 조선과 대한민국은 로마의 후예라는 논리 등등 대한민국이나 조선이 진정한 로마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드립도 있다. ### 물론 당연히 진지한 논쟁이 아니라 제3의 로마라는 밈을 이용한 개드립이다.[52]
- 스폰지밥 버전 # 왼쪽 눈과 오른 쪽 눈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다.
- 김규삼의 네이버 웹툰 은탄에서 패러디로 쓰였다. 조선의 장군 견장손의 판저옥 군단이 서진을 거듭하여 오랑캐에게 멸망당한 제국까지 진출했다고 전하고 신하들이 견장손이 올린 장계를 낭독하는데... #마마. 본디 서쪽에 찬란한 문명이 있어 우리 조선은 이를 흠모하여 문물을 받아들였나이다.하지만 모두에게 햇볕을 쬐어주던 위대한 문명도 쇠하여 마침내 오랑캐가 발호하여 침탈하니 찬란한 문명은 진흙속에 던져져 짓밟히고 거룩한 정신은 오랑캐의 놀림거리가 되었나이다.문명을 이끌던 제국은 갈가리 찢겨 오랑캐의 먹이로 사라졌으나 아직 운명은 사라지지 않았으니 슬퍼하긴 이르옵니다.아비가 죽으면 아들이 뒤를 잇듯이 동쪽에서 문명을 계승한 우리 조선국이 있으니 중화가 멸망한 지금 우리가 이제 중화이옵니다.이곳을 함락하면 천하에 조선이 로마를 계승한 것을 선포하시고 국호를 새로이 하소서동로마조선제국
[1] 유럽인들의 로마 계승 의식이 조선인의 소중화 의식과 비슷한 게 많음을 알 수 있는 사료이다.[2] 이건 제정이 시작되고 한참 후에 덧붙여진 개념이다. 가톨릭/정교회를 의미한다.[3] 카스티야 여왕이자 아라곤 왕비[4] 아라곤 국왕이자 카스티야의 공동 국왕[5] 동로마 유민들의 나라인 니케아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환도에 성공했기에 정통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학계에서 사용하는 황제 넘버링 역시 4차 십자군 이전의 것을 계승하여, 니케아의 요안니스 3세, 요안니스 4세를 요안니스 1, 2세가 아닌 요안니스 3, 4세라고 부른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 이후의 동로마 황제 넘버링은 니케아의 넘버링을 물려받았기에 요안니스 5세가 요안니스 5세라고 불리는 것이다.[6] 트라페준타와 이피로스는 동로마 유민들이 세운 나라였지만 니케아와는 달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동로마를 재건하는데 실패하여 정통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황제 넘버링 역시 4차 십자군 이전의 것을 계승하지 않고 아예 처음부터 따로 센다. 모레아는 트라페준타, 이피로스와는 달리 재건된 동로마 제국의 지방 정권으로서 수립된 나라였는데, 본국이 멸망한 이후 장기간 존속했다면 정통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겠지만, 본국이 멸망하고 얼마 안 가서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되어 정통으로 인정받지 못한다.[7] 기리틀리는 크레타 섬, 유난은 이오니아에서 유래하였다.[8] 지금의 불가리아는 슬라브계 국가가 되었지만, 본래 불가리아를 세운 불가르족은 튀르크계 유목민이었고, 불가리아의 군주들은 유목 사회의 전통에 따라 칸을 칭했다.[9] 당시 불가리아는 북쪽의 대 모라비아 왕국과 남쪽의 동로마 제국에게 동시에 압박받으며 양면 전쟁을 치르는 상황이었다.[10] 불가리아의 원주민인 트라키아인은 트라키아가 로마령이었던 시절 로마의 기독교 국교화에 의해 기독교인이 되었고, 이주민인 슬라브족은 슬라브 신화의 신들을 믿었으며, 또다른 이주민이자 지배 계급인 불가르족은 텡그리 신앙을 믿었기에, 당시 불가리아에는 3가지 종교가 공존하고 있었다.[11] 서로마 말기에 로마를 약탈한 알라리크와 가이세리크, 서로마를 멸망시킨 오도아케르 등 게르만족 군주들이 군사력으로 로마를 제압했음에도 불구하고 칭제하지 않고 왕을 칭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12] 총대주교직은 유지했으나 섭정 자격은 상실했다[13] 그는 클레이디온 전투가 끝난 뒤, 불가리아군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학살하여 불가르족 학살자를 뜻하는 '불가록토노스'라는 별명을 얻었다.[14] 그래서 불가리아 왕국을 불가리아 제3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5] 이를 통해 역설적이지만 동로마를 멸망시킨 세력이 동로마가 로마 제국임을 인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서방 세력이 카롤루스의 대관식 이래 동로마를 '그리스인들의 제국'이라고 폄하하던 경향이 있긴 했지만, 그들도 좋든 싫든 동로마가 로마라는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고, 동로마의 땅을 정복하고 로마를 계승했다고 선언함으로써, 동로마가 로마임을 몸소 입증한 것이다.[16]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2세의 별명인 '칼로얀니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17] 1331년부터 1355년까지 재위. 스테판 두샨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린다.[18] 서유럽인들은 당시 동로마를 '그리스 제국'이라고 폄하했고, 그래서 서유럽에서 나온 역사서에서는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황제'라고 해놓은 서술을 볼 수 있다.[19] 웬만한 중,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를 펼쳐보면 으레 나오는 이야기이며, 시오노 나나미도 《로마인 이야기》를 비롯한 각종 서적에서 이 같은 소리를 했다. 심지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이슬람에서 음운 변동을 거친 끝에 '이스탄불'이 되었다고 주장하기도.[20] 다만 수도방위사령관 비슷한 관직을 이스탄불 아아스(İstanbul ağası)라 하고 대한민국의 서울시장 정도 되는 자리를 이스탄불 에펜디시(İstanbul efendisi)라 하는 등 일부 관직명에도 이스탄불이 들어가기는 했다.[21] 당시 동로마 제국은 소년 황제 요안니스 5세의 섭정단 세력과 원래 섭정이었으나 정적들에게 쫓겨나 황제를 칭한 요안니스 6세(요안니스 칸다쿠지노스)가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요안니스 6세는 자신의 딸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오르한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로 인해 내전에서 승리했다. 다만 정략결혼 이외에도 오스만군이 동로마 제국의 영토 곳곳을 약탈하는 것을 묵인하는가 하면, 갈리폴리 반도의 요새 하나를 내어주는 등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22] 다만 오르한 이후 즉위한 무라트 1세는 동로마 황녀가 아닌 다른 부인에게서 얻은 자식이기에 실질적으로 피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23] 여기가 아니더라도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를 막론하고 공식 교회가 세속권력에게 공개적으로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시피하다.[24] despotate라는 말 자체에 '전제군주'라는 뜻이 있어서 '전제군주국', 또는 '전제공국'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 용어는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에는 제위를 계승할 장남 이외의 황자들에게 지방에 영지를 주며 내려주는 칭호였다. 즉 '전제군주'보다 '공작'으로 번역하는 쪽이 실상에 더 가까우며, 모레아도 '모레아 공국'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25] 다만 소피아의 증손자 표도르 1세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여 류리크 왕조가 단절됨으로써 그녀의 혈통 역시 단절되어서, 이후 혼란 시대를 거쳐 집권한 로마노프 왕조에는 동로마 황족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26] 참고로 유럽권에서 ‘황제’라는 칭호는 로마와의 연관성을 증명해야만 쓸 수 있었고 아니면 유럽 외 다른 지역의 황제위를 가져야 했다. 그래서 스페인은 왕 작위에 머물렀고 영국은 인도 제국을 만든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예외로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이 있다.[27] 오도아케르는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후 서로마 황제의 어의와 권한을 동로마 황제에게 넘기고 이탈리아의 왕을 주장하였다.[A] 교황에 의한 서로마 제위 계승.[A] [30] 역병의 문제가 심했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이전까지 동로마는 막대한 재정흑자를 기록해 남는 힘을 투사해 고토를 수복한 거지만 원정 도중 발생한 역병으로 재정적자에 시달렸으며 군대는 제대로된 보급과 급료를 받지 못해서 약탈에 의존하는 바람에 민심을 잡지도 못했다.[31] 사실 프랑스라는 국가 자체가 프랑크 왕국이 분할상속되면서 생긴 서프랑크 왕국이 그 시작이기 때문에 프랑크 왕국의 후계국이라 할 수 있긴 하다.[32] 중세 후기 필리프 2세 때 왕(국)의 칭호가 영어로는 King(dom) of the Franks(즉 프랑크인이라는 사람들의 왕)에서 of France(즉 프랑스라는 영역의 왕)로 바뀌었다가 다시 사람들의 왕으로 돌아간 것이지만 역사적 함의는 다르다. 중세 초중기 동안 쓰인 of the Franks에는 게르만족의 대이동 이래 남아 있었던 부족적인 함의가 있는 반면, 근대에 쓰인 of the French는 근대 민족주의(내셔널리즘)적인 함의가 있다.[33] 1438년 알브레히트 2세가 독일왕으로 선출되기는 했으나 황제로 대관식을 하기 전 사망했다.[34]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보헤미아 왕국처럼 신성 로마 제국에 포함되는 곳도 있었고,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처럼 제국 밖의 영토도 있었다.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등의 경우 오스트리아 제국 선언과 상관없이 종속된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여전히 별개의 국가였다.[35] 정확하게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36] 동로마는 황제의 사위 자격으로 계승한 경우도 종종 있고 콤니노스 왕조 이후로는 귀족 가문들이 혼맥으로 얽혀서 사실상 한 집안이 되어버렸다. 팔레올로고스 왕조 또한 혈통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알렉시오스 1세까지 나오게 된다.[37] 합스부르크 가문과 통혼했던 카스티야-아라곤의 트라스타마라 왕가가 동로마 황제 작위를 구입했지만 가톨릭왕 부부의 적선에 가까운 행위였어서 부부가 작위를 구입하고는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 바람에 그냥 사라져 버렸다.[38] 널리 알려진 상식이지만, 카이저라는 칭호는 고대 로마 제국의 황제 칭호인 '카이사르'에서 유래했다. 위에 서술된 러시아의 '차르'도 마찬가지.[39] 엄밀히 말하면 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후 불과 25년 뒤에 멸망했지만...[40]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가 있어야 진정한 독일 통일을 이룰 수 있다며 오스트리아가 합류하기를 원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에 소속되지 않았던 헝가리-크로아티아 등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었고, 결국 양측은 완전히 갈라섰다.[41] 엄밀히 따지면 독일어로 제국은 카이저라이히(Kaiserreich)고 나치 독일은 제3 라이히(Reich), 그냥 국가라고 말했다. 참고로 호엔촐레른 왕조 독일 제국도 공식 명칭은 독일국(Deuches Reich)였다.[42] 영어로는 다음과 같다. 'After the Rome of the emperors, after the Rome of the Popes, there will come the Rome of the people.'[43] 애초에 황제(Imperatore d'italia)가 아닌 왕(Re d'Italia)의 칭호를 사용했다.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의 첫 의회였던 토리노 의회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이탈리아의 국왕으로 추대했기 때문. 이탈리아 왕국의 전신인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입헌군주정이었다.[44] 이 중 베네치아는 초기에는 동로마 제국의 속주로 지냈던 세월도 깊어서 따지고 보면 동서로마와 모두 닿는 접점이 있었고, 본인들도 이런 점을 어필했다.[45] 정작 로마는 멸망하기 전까지 황제권이 전제군주화 되었음에도 공화주의적 전통을 포기한 적도 없고 황제는 시민들의 지지를 통해 즉위한다는 명분을 포기한적이 없었다. 황제의 공식 명칭에서도 드러나는데 보통 주권국의 국왕은 무슨나라의(of) 왕or황제를 칭했는데 반면 로마제국은 로마인의 황제라는 시민의 의한 선출이라는걸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칭제는 나폴레옹이 쏠쏠하게 써먹었다.[46] 기원전 146년 공화정 로마가 아카이아 동맹을 격파하고 코린토스를 파괴한다. 이 시점에서 그리스는 완전히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47] 즉 非 그리스-로마적인 문화, 언어, 종족성 등이 여전히 상당히 남아 있었던 이집트, 레반트, 아나톨리아 중-동부 내륙 등의 지역은 배제한.[48] 영어 위키백과 Roman people(로마인) 중, 'In chronicles written in the 10th century, the Rhōmaîoi begin to appear as just one of the ethnicities in the empire (alongside, for instance, Armenians) and by the late 11th century, there are references in historical writings to people as being "Rhōmaîos by birth", signalling the completion of the transformation of "Roman" into an ethnic description.'[49] 'Roman self-identification among Greeks only began losing ground with the Greek War of Independence, when multiple factors saw the name 'Hellene' rise to replace it. Among these factors were that names such as "Hellene", "Hellas" and "Greece" were already in use for the country and its people by the other nations in Europe, the absence of the old Byzantine government to reinforce Roman identity, and the term Romioi becoming associated with those Greeks still under Ottoman rule rather than those actively fighting for independence. Thus, in the eye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a Hellene was a brave and rebellious freedom fighter while a Roman was an idle slave under the Ottomans.'[50] 다만 루마니아어에서도 도시 로마를 가리킬 때는 그냥 Roma라는 철자를 쓴다.[51] 미국의 국조가 흰머리수리, 흔히 독수리라고 하여 로마 제국의 독수리와 연관성이 있어 보이지만 로마 제국의 독수리는 검독수리다. 표어에 라틴어가 쓰인 것은 유럽계에게 통용되던 언어이기 때문에 쓴 것. 부족한 역사와 전통을 가리기 위해 그랬다는 말도 있다. 결국 로마를 계승하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한 결과물은 아니지만, 이미 유럽의 여러 나라에 깊게 뿌리박힌 로마의 문화유산을 간지난다고 가져다 쓴 것이기에 역시 로마의 영향이라곤 할 수 있다.[52] 청와대 국민청원에 대한민국을 로마의 후예로 선포하라는 청원이 올라온 적도 있다. 대통령 기록관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