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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 총독부의 영역 (진홍색) |
1. 개요
아프리카 총독부(라틴어: Exarchatus Africae, 그리스어: Εξαρχία της Αφρικής, 영어: Exarchate of Africa)는 580년대 후반에 마우리키우스 황제에 의해 창설되어 동로마 제국의 북아프리카 영토를 통치한 총독부이다.라벤나 총독부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서방 영토를 관리했으며 라벤나 총독부가 랑고바르드의 침입으로 이탈리아 일부에 국한된 영역을 가진데 비해 마우레타니아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대부분, 히스파니아 남부, 샤르데냐와 코르시카 등을 포함한 꽤 넒은 영역을 지배했다. 698년 우마이야 왕조에 멸망했고 잔존세력은 709년에 세우타가 항복하며 완전히 사라진다.
2. 역사
534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령에 따라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이끄는 동로마군이 반달·고트 전쟁을 개시하여 반달 왕국을 정복함으로서 북아프리카가 로마의 영역으로 돌아왔다. 그 후 카르타고를 수도로 하는 아프리카 대관구가 신설되었다. 아프리카 대관구는 북아프리카 본토와 사르데냐, 코르시카까지 책임졌고, 민사 행정은 카르타고의 장관이 맡았고, 군대는 민병대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베르베르인들이 제국의 치하에 불복해 계속 반란을 일으킨 까닭에, 아프리카의 상황은 항상 불안정했다. 더욱이 아바르족의 발칸 반도 침략과 사산 왕조의 동방 전선 침략,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략이 맞물리면서, 동로마 제국은 북아프리카까지 책임질 여력이 없었다.584년,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라벤나 총독부를 신설하여 랑고바르드족의 침략을 저지하게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북아프리카에도 총독부를 개편하여, 총독이 민정과 군정을 동시에 맡아서 책임지도록 하였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아프리카 총독은 겐나디우스 1세다. 그는 591년에 작성된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서신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겐나디우스 1세는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고대 라틴어 비문 모음집)>에서 확인된 비문에 따르면, 베르베르인들의 반란을 연이어 진압했으며, 마우리키우스로부터 명예 집정관의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겐나디우스 1세 이후 아프리카 총독에 부임한 인물은 대 헤라클리우스였다. 그는 동방 전선에서 활약했으며, 마우리키우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598년에서 600년 사이에 총독에 부임한 뒤, 큰아들 이라클리오스와 아프리카 속주의 대지주 로가스의 딸 파비아 에우도키아를 결혼시키는 등, 아프리카에서 기반을 다졌다. 602년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를 추도하는 행사를 개최했다고 한다. 608년 포카스의 폭정으로부터 제국을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아들 이라클리오스와 함께 공동 집정관으로 선포되었으며, 카르타고의 조폐국은 집정관 의복을 입은 이라클리오스 부자를 묘사한 동전을 주조했다. 아들 이라클리오스가 원정군을 이끌고 발칸 반도로 진격할 때, 그는 아프리카에 남았다. 610년 10월 이라클리오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무혈입성하여 포카스를 죽이고 새 황제로 즉위했다. 니키우(Nikiu)의 요안니스에 따르면, 대 헤라클리우스는 아들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기뻐했지만, 곧 사망했다고 한다.
이후 대 헤라클리우스의 조카 니키타스가 618년 사산 왕조군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이집트를 상실한 뒤 아프리카 총독에 부임해서 628년 또는 629년까지 맡다가 사망했으며, 이 시점에는 서고트 왕국의 공세로 스페인 남부의 동로마 제국 영역을 상실하고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의 세우타 요새만 유지했으며 코르시카도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함락당한다. 이후 수십년에 걸친 공백기를 지나 니키타스의 아들 그레고리오스가 645년 아프리카 총독에 부임했다. 그는 카르타고에서 칼케돈 공의회파와 단성론파간의 분쟁을 어떻게든 마무리 하려고 애썼지만, 칼케돈파가 대세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단성론파가 대세인 아프리카 속주간의 갈등이 워낙 심각해서 뜻대로 되지 못했다.
646년 알렉산드리아가 아랍군에게 공략 당하면서 이집트 속주가 이슬람 세력에 넘어가자, 그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하기로 마음 먹고, 이단인 단의론을 강요하는 정부에 맞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카르타고에서 독립을 선포했다. 아랍측 사료에 따르면, 그레그리오스는 자신의 초상화가 담긴 동전을 주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까지 어떤 동전도 발견되지 못했다. 647년, 제3대 정통 칼리파 우스만은 압둘라 이븐 사드에게 2만 병력을 이끌고 카르타고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아랍군이 쳐들어오자, 수페툴라에서 결전을 벌였다. 전투 양상은 팽팽했지만, 압둘라 이븐 앗 주바이르가 2만 군대를 추가로 이끌고 도착하면서 전세는 아랍군에게 급격하게 기울었다. 결국 그는 전사했고, 그의 딸은 아랍군에게 붙들려 이집트로 끌려가다가 도중에 낙타에서 떨어져 죽었다.
아랍군은 수페툴라를 약탈한 뒤 카르타고 총독부를 공격했지만, 동로마군이 요새에서 결사 저항하자 공략을 포기하고, 후임 총독 게나디오스 2세로부터 330,000노미스마타, 즉 금 2톤을 공물로 받는 대가로 떠나기로 했다. 게나디오스는 콘스탄스 황제에 충성을 맹세하고, 이슬람 세력과 콘스탄티노폴리스 모두에게 공물을 바쳤다. 여기에 군대를 재건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자, 그는 세금을 대폭 늘렸다. 이에 민심은 이반했고, 베르베르인들은 제국에 대한 충성맹세를 철회했다. 특히 남부 튀니지 일대는 총독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이렇듯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던 664년, 콘스탄스 2세는 총독부와 공작령의 내부 구조를 테마 제도처럼 고치는 업적을 달성하긴 했으나 시라쿠사로 황궁을 옮긴 뒤 게나디오스에게 공물을 더 보내라고 요구하자 칙사를 추방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665년, 엘레우테리오스가 이끄는 수비대가 봉기했다. 그는 스스로 총독으로 자처하였고, 콘스탄스 2세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게나디오스 2세는 카르타고에서 축출된 뒤 다마스쿠스로 도망쳐서 우마이야 왕조의 초대 칼리프 무아위야 1세에게 자신이 총독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무아위야 1세는 즉시 우크바에게 군대를 맡겨 이집트로 보냈다. 게나디오스는 이들을 따라갔으나, 665년 말 알렉산드리아로 도착한 직후 사망했다. 우크바는 게나디오스가 사망한 뒤에도 원정을 지속하여 아프리카 속주를 약탈하고 이를 저지하려고 시칠리아에서 달려온 동로마 장군 니키포로스를 격파한 후 이집트로 회군했다.
이후 우마이야 왕조 치하 아랍군은 꾸준히 북아프리카를 공략하였고, 695년 북아프리카 속주의 주도 카르타고를 공략했다. 이에 레온티오스 황제는 요안니스와 아프시마로스에게 해군을 맡겨 카르타고를 탈환하게 했다. 두 장군은 697년 기습 공격을 감행해 카르타고를 성공적으로 탈환하고 아랍군을 카이로로 축출했다. 아프시마로스는 게르만 혈통의 장군인데 비해 요안니스는 파트리키오스 신분이었다고 하니, 요안니스가 아프리카 총독을 맡았을 것이다. 그러나 698년 알 칼리프 말리크 이븐 마르완의 반격으로 카르타고를 도로 내줘야 했고, 함대는 크레타 섬으로 철수했다.
카르타고 탈환 실패로 인해 698년에 공식적인 아프리카 총독부는 붕괴되었다. 그리고 카르타고는 이집트와 함께 로마 제국의 주요 곡물 생산지였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의 식량 수급에 상당한 악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동로마 제국의 지중해 서부 영토의 유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서고트 왕국에게도 이슬람의 전진은 위험요소이기 때문에 698년의 카르타고 공방전에서 카르타고 수비군의 상당수가 서고트 왕국의 국왕인 위티자가 동로마 제국의 동맹군으로 파병한 서고트족 군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패배할 때까지 열심히 싸웠고 그 결과 고대 카르타고는 다시 한번 폐허가 되었다.#
3. 잔존 세력
카르타고가 함락된 이후에도 아프리카 총독부의 잔여 지역은 세우타의 요새 사령관인 돈 훌리안을 중심으로 해서 계속 저항했다. 돈 훌리안은 동로마 제국의 타그마(Tagma)의 사령관 직책을 보유한 것으로 보이며 서고트 왕국에게도 변경백 지위를 받아서 겸임함으로서 해당 지역의 지휘권을 어느 정도는 통합했으며 베르베르인과의 협조를 통해 이슬람 침공군에 대한 수비전을 진행했다. 그래서 돈 훌리안은 동로마 제국에게 임명받지는 않았으나 실질적인 아프리카 총독부의 최후의 총독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들의 저항은 상당하여 우마이야 왕조의 기록에서도 대서양에 도달하긴 했는데 세우타를 확보하지 못해서 완전한 점령이 어렵다고 기록할 정도였다.하지만 무사 이븐 누사르가 탕헤르까지 함락시켰고 그의 해방노예 출신 부하인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발레아레스 제도를 포함한 동로마 제국의 섬 지역에 설치된 요새와 도시를 모조리 함락시키면서 세우타는 동로마 제국과의 해상 통로 및 통신로가 끊어진 채 혼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고트 왕국은 돈 훌리안과 세우타를 도울 생각은 안하고 자기네들끼리 치열한 왕위 계승 전쟁을 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 승리에 가까운 수준까지 온 로데리크가 돈 훌리안이 인질 겸 수학의 목적으로 이베리아반도에 보내놓은 딸을 겁탈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돈 훌리안이 폭발하면서 709년에 세우타와 함께 우마이야 왕조에 항복한다.[1] 해당 시점이 아프리카 총독부의 잔존세력이 사라지는 시점이며 이에 따라 동로마 제국은 아프리카를 영원히 상실했다.
이런 와중에도 사르데냐는 이슬람의 공격을 받기는 했으나 해적의 약탈에 가까운 수준이라서 어떻게든 방어에 성공한다. 하지만 아글라브 왕조의 시칠리아 정복으로 시칠리아가 함락당하며 시칠리아 토후국이 만들어지면서 해상 교통로가 차단당하며 동로마 제국과 연락이 끊어졌다. 결국 의도하지 않았는데 80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분리독립하면서 아프리카 총독부의 마지막 조각이 사라진다.
4. 역대 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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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에서 7세기 동안 사산 왕조와 이슬람 제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서 벌어진 다수의 전란으로 인한 극심한 혼란으로 기록이 대부분 소실되었기 때문에, 아프리카 총독부의 역대 총독 명단을 완전히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위의 명단은 '그나마' 기록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총독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