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9 04:17:02

옵티마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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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개념3. 성향4. 유래5. 허상의 개념인가?6. 옵티마테스의 행적과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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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Optimates

로마 공화국 후기 원로원파트리키 가문의 권위와 전통을 중요시한 정치 집단을 일컫는 용어.

2. 개념

옵티마테스는 라틴어 용어로, "최고의 인간"을 의미한다. 1854~1856년 <로마사>를 출간한 테오도르 몸젠이 처음 사용한 이래, 현재까지 공화정의 전통과 원로원의 권위, 파트리키 가문의 이권을 중요시하는 로마 정치인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평민의 편에 서서 파트리키 위주로 돌아가는 정치판을 바꿔보고자 노력한 이들을 포풀라레스(populares: "민중")라고 부른다.

3. 성향

앞서 말했듯 파트리키 가문의 권위와 전통을 중요시했으며 기존 원로원 중심의 로마 공화정의 체제를 지지했다. 때문에 반대파인 포풀라레스를 향해서 '저자는 왕이 되려고 한다' 식으로 프레임을 씌워서 제거하는 일도 많았다. 또한 성향이 성향인 만큼 원로원과 한 편이며 때문에 원로원 최종 권고는 그들의 무기였다. 물론 그 명목은 앞서 말한대로 공화정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

물론 옵티마테스라고 늘 원로원 최종 권고만 쓴건 아니다. 술라의 경우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으니. 단 술라의 경우 일반적인 옵티마테스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대신 술라는 옵티마테스쪽에 가까웠던 만큼 그 또한 그들 성향을 어느정도 따라서 종신독재관에 올랐으면서도 2년만에 자진해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4. 유래

옵티마테스라는 용어는 당대에도 종종 쓰이는 용어였는데, 특히 키케로에게 자주 쓰였다. 키케로는 에퀴테스 신분으로 로마의 고위 인사가 된 인물로, 자신의 출세를 용인한 로화 공화정에 대한 믿음을 간직했다. 그는 서신에서 옵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정치에 참여하고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자 하는 남성의 두 가지 범주가 항상 있었다. 하나는 대중에게 인기가 있기를 바라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최고의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대중을 기쁘게 하기를 바라는 자들은 포풀라레스로 간주되지만, 자신의 정책이 최고의 사람에게 승인되도록 행동하는 사람은 옵티마테스로 간주되었다.

키케로는 옵티마테스를 자유민을 포함하여 모든 계층에 속한 존경받고 올바른 생각을 가진 시민으로 정의했지만, 정치적으로 원로원 및 지도부를 옵티마테스와 동일시했다. 그들은 공공모임의 수석들이며, 원로원의 권위는 모두에게 존중받아야 할 가치 중 하나였다. 그는 여러 작품에서 이들에 대한 존경심을 여러 차례 밝혔다. 반면에 대중의 탐욕에 영합하고 선동하여 현 체제에 도전하는 자들을 공화국의 적으로 간주했으며, 그라쿠스 형제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를 포풀라레스의 전형적인 사례로 언급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을 저서에 남겼다.
누만티아를 파괴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훌륭한 인물로 뛰어난 군인이지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죽인 평범한 개인 푸블리우스 나시카보다 공화국에 더 유익하지는 않았다.

다만 키케로는 집정관을 맡았을 때 자신을 민중의 선택을 받은 대중 정치가라고 주장했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진정한 대중성'은 더 많은 권력을 얻으려고 대중을 선동하는 게 아니라 국가를 수호하여 궁극적으로 모두에게 이로운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이었다. 한편, 그는 카이사르를 가리켜 포풀라레스의 길을 일관되게 따라가면서도 동료 파트리키들에게서 인정받기를 열망하는 야망이 들끓는 자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행보를 같이했던 역사가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는 키케로와는 다른 관점으로 바라봤다. 그는 포에니 전쟁 까지는 원로원과 민중이 공화국을 함께 평화롭고 절제 있게 다스렸지만, 포에니 전쟁 후에 맞이한 영광과 번영이 가져온 도덕적 타락으로 인해 귀족은 자신의 존엄을 지나치게 과시하고, 민중은 자유를 남용하기 시작하면서 공동체가 두 파벌로 나뉘었다고 여겼다. 자신의 권리와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들이 공화국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면서 민중을 억누르자, 민중은 이에 맞서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낼 그라쿠스 형제 같은 이들을 내세웠고, 양자간의 충돌이 정치 혼란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살루스티우스는 공화국 초기 원로원(또는 귀족)과 민중의 투쟁 사례도 언급했지만, 대체로 포에니 전쟁 후 이러한 대립이 극렬해졌다고 설명했다. 다만 '옵티마테스'라는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혈통에 따라 귀족과 민중으로만 구분지었다.

5. 허상의 개념인가?

현대 학계에서는 '옵티마테스파'와 '포풀라레스파'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일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강하다. 고려말 권문세족신진사대부 간의 이분법적인 구분에 학계에서는 점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 보편화된 정당 정치와는 달리, 고대 로마 시대의 정치인들은 특정 정파끼리 뭉쳐서 상대 정파를 꺾고 정권을 장악한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로마에서 정치인으로 성공하려면 우수한 강령 또는 공약으로 민중의 인기를 끄는 게 아니라 혈통 또는 인맥을 통해 맺어진 클리엔텔라를 잘 활용해야 했다. 피후원자인 클리엔테스는 후원자인 파트로누스의 적절한 지원을 받고 그를 위해 일을 해야 했고, 파트로누스는 보다 많은 클리엔테스를 확보해 영향력을 키우는 한편, 그들을 적절히 보호해줘야 했다. 그러다보니, 고귀한 귀족 신분이라고 해도 민중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 반면에 민중의 지지를 얻더라도 귀족들의 인정을 별도로 받고자 노력해야 했다.

또, 현재 잘 알려진 인사들을 제외하고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을 옵티마테스 또는 포풀라레스로 구별했는지는 알 수 없다. 흔히 옵티마테스들이 포풀라레스 정치가들이 대중을 위해 개혁을 실시하는 걸 막기 위해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각자 이해득실을 따져서 협력과 견제를 번갈아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가령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농지법을 제시할 때, 이에 힘을 실어준 이는 "파트리키 중 파트리키" 가문 출신이며 원로원 최고참 의원이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였다. 그는 티베리우스의 장인으로, 사위의 입장에 공감을 표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다. 반면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에 정면으로 맞섰던 호민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는 평민 출신으로 기원전 165년 집정관에 오른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의 아들이었다.

로널드 사임은 로마 정치인들은 옵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 중 하나를 택하고 서로 대립한 게 아니라 더 많은 권력과 부, 명예를 얻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역사가 그룬은 1974년에 출간한 저서 <로마 공화국의 마지막 세대>에서 옵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라는 용어는 지극히 모호하며 실체와도 거리가 머니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두 용어를 아예 배제하는 것은 섣부르다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키케로가 선동적인 정치가들을 비난할 때 대중을 기만한 포풀라레스라고 비난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 자체가 포풀라레스가 대중의 권리와 이익을 수호하는 것을 공언한 정치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인식했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편, 로마 민중이 항상 포풀라레스를 지지하고 옵티마테스를 미워했다는 통념도 시정할 필요가 있다. 수백년간 로마 정계에서 맹활약하며 수많은 클리엔테스를 거느린 옵티마테스는 대체로 민중의 존경을 받았다. 로마 평민들은 귀족들이 제 이권만 챙긴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포풀라레스를 적극 지지하다가도, 정작 사회가 혼란해지면 귀족들의 영도하에 안정적인 삶을 누렸던 과거를 그리워하고 옵티마테스를 지지하곤 했다. 실제로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정치 공세로 키케로가 축출될 때 민중들은 적극적으로 지지했지만, 이후 클로디우스 패거리들의 정치 테러가 꾸준히 벌어지자 키케로를 그리워한 끝에 1년만에 복귀시켰다. 또한 그들은 포풀라레스 파 호민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시민권을 로마 시에서 이탈리아 전체로 확대하자는 법안을 제시했을 때 귀족들보다 더욱 심하게 반발했다. 로마 평민 역시 자신들의 특권이 위협받으면 강경한 반응을 보이는 건 귀족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6. 옵티마테스의 행적과 몰락

이렇듯 논란의 여지가 많은 용어이지만, 현 체제의 변화를 극도로 꺼리고 현상유지를 추구하는 이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 개혁에 극도로 반대하고 종국에는 죽여버린 자들은 무엇보다도 개혁을 추진하면서 원로원을 완전히 배제해버리고 민회만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한 것에 극도로 분노했다. 그들은 이를 왕이 되려는 행보라고 판단했고, 원로원 최종 권고라는 초법적인 조치를 내림으로써 처단했다. 그 후 그들은 자기들의 이권을 건드리고 민중을 선동해 정권을 뒤엎으려는 자들이 출현할 때마다 원로원 최종 권고를 단행해 처단했다.

한편, 그들은 특정인의 명성이 너무 높아져서 자신들의 영향력까지 위협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소 카토,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등은 특정 개인이 민중의 요구에 부합하여 개혁을 주도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들은 폼페이우스세르토리우스 전쟁에서 승리하고 해적들을 성공적으로 토벌하고 미트리다테스 6세를 무찌르고 동방 질서를 자리잡는 등 수많은 업적을 세우면서 명성이 하늘을 찌르자, 그의 위세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걸 우려해 동방 개편안이 수리되는 걸 막고 폼페이우스의 퇴역병들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문제도 고의로 질질 끄는 등 온갖 견제를 했다. 또한 카이사르가 삼두정치의 힘을 빌려 집정관에 당선된 뒤 농지 개혁 등 여러 개혁을 시행하려 하자, "카이사르가 집정관인 해에는 어떤 개혁도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며 또다시 온갖 방법으로 훼방놓았으나 실패했다.

로마의 정계를 주름잡은 파트리키들은 어떤 가문이나 개인이든간에 동료 정무관들 위에 군림하는 일을 극도로 꺼리고 자기들끼리 돌아가면서 고위직을 차지해야 한다고 여겼다. 신참자가 자기들과 동격이거나 심지어 윗선에 서는 일, 누군가가 고위직을 독차지하는 일 등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됐다. 공화국의 전통과 관습에 따라 순차적으로 진급하여 집정관을 맡은 뒤, 총독으로 부임하여 몇년간 일하다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원로원의 일원으로서 활동해야 했다. 그런 그들의 입장에서, 제대로 된 진급 절차도 거치지 않고 벼락 출세하여 위세를 떠는 폼페이우스나 평민 출신으로서 7번이나 집정관을 역임하고 나중에는 수많은 귀족을 해친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처조카로서 마리우스의 뒤를 따르겠다는 뜻을 대놓고 드러낸 카이사르는 경계대상이었다.[1][2]

특히 카이사르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갈리아 트란살피나, 일리리쿰 속주를 동시에 맡고 6만에 달하는 병력을 10년씩이나 이끌었다. 이는 한 개인이 누리기에는 지나치게 강력한 권한이었다. 그런 자가 마리우스의 길을 따르겠다고 하니, 그들로서는 카이사르를 어떻게든 배제해야 했다. 그래서 폼페이우스를 부추겨 카이사르와 상대하게 해서 카이사르를 꺾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다만 이 시점에서 카이사르의 총독직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애시당초 카이사르가 갈리아 속주의 총독이 된 것은 그곳이 이미 전쟁이 날 거라고 소문이 파다하게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위스인들의 조상인 헬베티아 인들이 갈리아 지방에 내려와 소동을 벌일 것이 거의 확실시되었던 것. 단순히 총독직을 오래한 것이 문제라면 그보다 더 오래 군대를 이끌로 있었던 옵티테마스들도 얼마든지 있었고[3] 무엇보다 정 그렇게 문제가 되었다면 민회에 가서 카이사르 총독직의 부당함을 호소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갈리아 총독에 임명되고 거의 10년간 그 자리를 유지한 것은 다 합법적인 절차를 거쳤기 때문이었다.[4]

사실 진짜 이유는 농지법이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총독 임기를 마친 후 집정권에 재도전할 생각이었고 이미 사전정지작업을 위해 안토니우스[5]를 로마로 보냈고 안토니우스는 호민관 선거에 입후보해 당선되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의 전공을 앞세운다면 집정관 당선이 매우 유력했으며 그렇게 되면 제일 먼저 농지법을 손볼 것이 뻔했다. 애시당초 농지법은 그라쿠스 형제의 비극을 불러온 유서깊은 옵티마테스와 포퓰라레스 간의 분쟁의 핵심이었으므로 원로원에서는 카이사르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고 결국은 원로원 최종권고를 카이사르에게 선언하였다.[6]

카이사르는 내전이 끝난 뒤 자신과 맞서다가 항복한 귀족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정계에서 변함없이 활동할 수 있게 해줬다. 그러나 그들은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을 맡아서 절대 권력을 장악하고, 집정관을 허수아비처럼 취급하고,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정한 대로 법안을 통과시키는 꼭두각시로 전락한 것을 지켜보고, 카이사르가 종국엔 왕이 될 거라 여겼다. 특정인이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던 그들로서는 이는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되는 사태였다. 결국 기원전 44년 3월 15일,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 '해방자'를 자처한 이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했다.

그러나 뒤이은 내전에서 해방자파가 카이사르의 후계를 자처한 제2차 삼두정치파에게 패하면서, 옵티마테스는 위세를 거진반 상실했다. 그 후 카이사르의 후계자들끼리의 내전 끝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아우구스투스는 교묘한 정략을 통해 공화정을 가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제정인 독특한 체제를 구축했다. 원로원 내 공화파는 이런 상황에서도 제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부활시키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로마는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로 굳어졌다.


[1] 물론 옵티테마스가 내세운 명분은 이랬지만 실제로는 카이사르가 포에니 전쟁 이후 그라쿠스 형제로부터 시작된 정통파 민중파의 후계자이고 이미 젊어서부터 민중파라고 선전한 카이사르를 눈엣가시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왕이 되려는 자'라는 타이틀은 옵티테마스가 로마를 개혁하려는 자들에게 원로원 최종권고를 써먹기 위해 내세웠던 전가의 보도였고. 이미 옵티테마스가 말하는 공화국의 전통과 관습따윈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로마의 패권이 전 지중해에 미치는 동시에 포에니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이 돌아오고 나서 자신들의 농지가 황무지로 변하고 거지가 되어 먹고살기 위해 재입대를 하고 또 자신들을 거느린 군사적 야심가(마리우스, 술라,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등)들의 사병이 되면서부터 거의 끝장나다시피 한 형국이었다.[2] 이미 순차적으로 진급하여 집정관을 맡은 뒤 총독으로 부임하여 몇년간 일하다 원로원의 일원으로 활동한다는 관습은 포에니 전쟁 이후 거의 의미가 없었는데 애시당초 이미 이 시점에서는 기존의 방식대로 하기에는(즉, 포에니 전쟁 이전의 도시국가 로마의 방식) 로마의 판도가 너무 넓어졌다. 그리고 원로원 의원들은 각자 라티푼디움을 경영하고 있었고 그들의 힘과 부는 이 라티푼디움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렇게 로마인들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야 할 영토를 자기네들끼리 처먹고 있었으니 당연히 이들은 민중들에게 인기가 없어서 선거로 선출하는 주요 직위들은 원로원 의원들에게 잘 돌아가지도 않았다. 당장 소 카토만 해도 젊었을 때 몇몇 직위를 맡은 것을 제외하면 집정관에 선출된 적이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3] 대표적으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원로원파의 명장으로 카이사르의 10년간은 아니었지만 무려 7년이나 미트리데테스 6세와 투닥거리고 있었다.[4] 정확히는 몇 번이나 로마에서 총독 임기를 합법적으로 연장받았다.[5] 우리가 잘 아는 그 안토니우스 맞다.[6] 단순히 갈리아 총독직 때문에 옵티마테스가 문제를 삼은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다. 애시당초 원로원 최종권고 자체가 갈리아 총독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카이사르에게 루비콘 강에서부터 혼자 돌아오라는 내용이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