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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ribunus militum집정관 또는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를 보좌하고 비상시 레가투스를 대신하여 군단을 이끌 권한을 부여받은 로마군의 군사 계급. 흔히 '군사호민관'으로 오역되는 경우가 많으나 최근에는 대대장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2. 상세
트리부누스(tribunus)는 부족장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 트리부스(tribus)에서 유래한 용어로, 트리부누스 밀리툼은 병사들의 부족장을 의미한다. 로마 왕국 시절, 로마에 속한 부족장들은 전시에 부족민들을 이끌고 국왕이나 국왕의 대리인의 소집령에 응할 의무가 있었다. 로마 공화국이 수립된 후에는 집정관의 소집령에 응했다. 그러다 전쟁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뜻밖의 변수에 대처할 수 있는 조직력과 지휘 체계가 요구되면서, 부족 단위로 묶이던 로마군은 레기온(군단)으로 재편성되었다. 또한 최고 지휘관인 집정관과 이를 보좌하는 트리부누스 간의 협력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집정관이 트리부누스를 직접 선정하는 것이 관례로 자리잡았다.매년 새로 선출된 두 집정관은 각기 2개 군단을 부여받았고, 각 군단마다 일반적으로 여섯 트리부누스를 선임했다. 이들은 파트리키 출신 청년들로 5년 이상 전투 경험이 있어야 했다. 또한 2개월마다 2명씩 차례로 군단을 지휘했으며, 지휘권이 없을 때는 병사 및 전상자 목록 관리 등 군사 행정을 담당했다. 또한 그들은 딜렉투스(dilectus)라고 불리는 예비대를 매년 특정한 날짜에 원로원 건물 앞에 소집시키고 인원을 점검했다. 17~46세 로마인 남성은 딜렉투스 소집령에 따를 의무가 있었으며, 이를 따르지 않는 자는 로마 시민으로서 특권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비난을 받고 사형 등 극형에 처해지거나 노예로 전락할 수 있었다.
기원전 444년, 집정관 권한이 있는 트리부누스, 일명 집정 무관이 별도로 선출되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이 직책은 파트리키들이 플레브스들의 정치 참여 욕구를 달래기 위해 신설되었다고 밝혔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집정 무관에 선출된 이들 대부분이 파트리키인 점을 들어 신빙성이 없다고 간주한다. 많은 학자들은 집정관 2명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선이 늘어나자,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군대를 통솔할 지휘관의 수를 대폭 늘리기 위해 집정 무관을 신설했다고 추정한다. 트리부누스 사이에서 뽑히는 집정 무관은 기원전 367년까지 꾸준히 선임되면서 나중에는 집정관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로마군과 정계를 좌지우지했지만, 파트리키가 집정 무관을 대부분 차지하는 현실에 강한 불만을 품은 평민들이 집정관 제도를 부활시키고 그 중 한 자리를 평민이 차지하는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이 제정된 후 자취를 감추었다. 일부 학자들은 로마가 라티움의 패권을 확고히 하였으니 이전처럼 많은 지휘관을 둘 필요가 없게 되자 집정 무관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고 추정한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트리부누스 밀리툼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켄투리오로 강등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 조치에 불만을 품었다. 켄투리오는 일반 병사가 승진할 수 있는 최고 계급인데 파트리키 신분의 젊은이가 그 자리까지 차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기원전 342년 로마군 반란 이후, 로마 정부는 병사들을 달래기 위해 트리부누스 밀리툼은 켄투리오가 될 수 없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기원전 311년, 호민관 루키우스 아틸리우스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가 로마 시민이 24명의 트리부누스 중 6명의 트리부누스를 투표로 선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로마 시민이 선출하는 트리부누스의 숫자가 점차적으로 늘어났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할 무렵엔 24명 트리부누스 모두 로마 시민에 의해 선출되었다. 다만 전쟁 중에 더 많은 군단을 소집해야 할 경우 집정관이 트리부누스를 추가로 임명할 수 있었다. 이렇듯 시민들이 트리부누스를 뽑는 제도가 확립되자, 이전에는 집정관과 친분이 있는 자제들이 주로 맡던 트리부누스는 정계에 이름을 날릴 야망을 품은 파트리키 및 부유한 평민 자제들이 시민들에게 눈도장을 받기 위해 경쟁하는 직책으로 변모했고, 나중에는 쿠르수스 호노룸에서 제일 먼저 맡아야 하는 직책으로 손꼽혔다.
기원전 4~3세기, 로마군은 삼니움 전쟁, 피로스 전쟁, 포에니 전쟁 등 대규모 전쟁을 연이어 치르면서 트리부누스 밀리툼들이 교대로 군단을 맡는 시스템의 한계를 느꼈다. 이들은 전투를 치른 경험은 있었지만 군단급 군대를 지휘한 경험은 부족했고, 지휘권이 분산되었기에 군단을 효율적으로 이끄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유구르타 전쟁에서 유구르타에게 매수된 트리부누스가 전장에서 이탈해버리거나 군대를 잘못 이끌어서 막대한 손실을 입는 등 수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군단 전체를 통솔하는 직책인 레가투스(Legatus)가 도입되었다. 레가투스는 집정관의 친구나 정치적 동지인 경우가 많았고, 대규모 군대를 이끈 경험이 풍부했다. 레가투스는 초기엔 임시직이었지만 기원전 1세기 초 동맹시 전쟁 후 정규 직책이 되었고, 트리부누스는 그런 레가투스의 참모 역할만 맡게 되었다. 따라서 대대장으로 번역하는 최근 한국어 번역도 이 시기에 대해서는 엄밀히 말하면 오역이 된다. 신분, 역할, 연령대를 볼때 차라리 조선 시대 관직인 종사관으로 번역하는 게 보다 적합해 보인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을 치를 때 군공을 세우겠다는 야심을 품었지만 전쟁 경험은 부족한 젊은이가 가득한 트리부누스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고, 단지 젊은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회유하는 수단으로만 활용했다. 그 대신, 수많은 전장에서 활약한 켄투리오들을 굳건히 신임했다. 카이사르가 집필한 갈리아 전기에는 켄투리오들의 활약상이 많이 실려 있지만, 트리부누스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또한 카이사르는 켄투리오 중 가장 나이 많은 인물을 프라이펙투스 카스트로룸(Praefectus Castrorum)에 선임했다. 이 인물은 평시에는 숙영지 건설을 전담하고, 레가투스가 부재할 때 적군이 급습할 경우 군단을 임시로 이끌 권한이 주어졌다.
로마 제국 시기에는 국경 지대에 주둔한 군단마다 3개 계급의 트리부누스가 있었다. '트리부누스 라티클라비우스(Tribunus laticlavius: 튜닉에 넓은 보라색 단이 있는 부족장)'는 원로원 의원의 자제가 주로 맡았다. 이 사람은 여섯 트리부누스 중 최고 직위였으며, 공식적으로 레가투스의 부관을 맡았다. 그는 레가투스의 참모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훈련을 전담하고 사법 권한도 행사했다. 또한 레가투스가 없거나 중상을 입어서 군단을 정상적으로 이끌 수 없는 경우에는 지휘권을 임시로 맡았다. 그렇게 1~3년간 직무를 수행한 뒤 로마로 돌아가서 정치 경력을 이어갔다.
나머지 다섯 트리부누스는 트리부누스 앙구스티클라비우스(Tribunus angusticlavius: 튜닉에 좁은 보라색 단이 있는 부족장)으로 일컬어졌다. 이들은 에퀴테스에 속한 청년들로, 군단에 속한 코호르스들의 명목상 지휘관이었다. 숙영지 정문의 보안을 점검하고, 보급품을 감독하고, 의무실 상태를 관리하는 등 행정 업무를 주로 수행했다. 군사 회의에 참석해서 레가투스에게 조언할 수는 있었지만, 실질적인 역할은 트리부누스 라티클라비우스가 전담했기에 자리를 지키기만 했고, 전투시에도 지휘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타키투스는 이 직책을 맡은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가 책임감을 진지하게 느끼지 않고 음란한 오락을 즐기는 동료들과는 달리 자신의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했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고대의 몇몇 기록에 따르면, 6개월 동안 트리부누스를 맡는 트리부누스 섹스멘스트리스(tribunus sexmenstris)'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일명 7번째 트리부누스로 일컬어졌으며, 120명 가량의 기병대를 지휘했다. 군대 주둔지 인근 지역의 부유한 시민들이 종종 이 직책을 역임함으로써 명예를 얻곤 했다고 전해진다. 그 외에 국경지대에 배치된 군단에 속하지 않고 도시를 지키는 부대에 배속된 트리부누스도 있었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한편 적어도 티베리우스 황제 재위기인 기원후 1세기부터는 프리무스 필루스(=군단 수석 백인대장)를 역임한 다음 트리부누스 앙구스티클라비우스로 승진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게 된다. 물론 이들은 에퀴테스 계급에서 갓 부임한 초짜들과는 달리, 당연히 전투시에도 코호르스의 실질적 지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 전 시기에 에퀴테스 계급 청년으로서 갓 부임한 트리부누스 앙구스티클라비우스는 군생활에 닳고닳은 백인대장들에게 꽤 치이는 입장이었으나, 이 시기부터 등장하는 군단 수석 백인대장 출신 트리부누스 앙구스티클라비우스는 휘하 백인대장들 대부분이 군생활 후배였기에 해당 코호르스의 실권을 완전히 휘어잡게 된다.
로마 제국이 대혼란에 휩싸인 군인 황제 시대의 황제 갈리에누스는 원로원 의원이 주로 맡았던 레가투스를 폐지하고 오직 군대에서만 경력을 쌓은 인사들을 지휘관에 선임해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전쟁 경험이 부족한 귀족 및 기사 계급 청년들이 부임했던 자리인 트리부누스 밀리툼은 그때부터는 전적으로 백인대장에서 승진한 인원들이 채우게 되었고, 물론 휘하 백인대장들도 직접 지휘하게 되어 그야말로 대대장으로 번역해도 문제가 없는 직책이 되었다. 즉 그전까진 트리부누스 밀리툼들은 어디까지나 군단(=레기오)의 참모 장교였고 코호르스 자체의 지휘는 프라이펙투스 코호르티스 혹은 최선임 백인대장이 했으나, 이 시기 이후부터는 최선임 백인대장들 중에서 승진한 인원이 트리부누스 밀리툼이 되어 코호르스를 지휘하게 된 것이다. 한편 트리부누스 밀리툼이 하던 참모 장교 역할은 신설된 '프라이포시투스'들에게 넘어갔다.
또한 다름아닌 이 시기부터 군단 최선임 백인대장인 프리무스 필루스 또한 아예 부대 지휘에는 손을 놓고 행정보급 및 병력관리 업무에만 치중하게 되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군단들의 규모를 1/5~1/4로 확 줄였는데도 군단 예하 부대인 코호르스의 규모는 그닥 변하지 않았기에 트리부누스들의 중요도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부터 제국 동부에서 트리부누스들은 코미스로도 불리게 된다. 다만 여기서 프리무스 필루스가 제1코호르스의 제1백인대 자체를 지휘하지 않게 되는데, 이 때부터는 제1코호르티스 제1백인대장은 그냥 따로 있게 되고 그전까진 군단 수석 백인대장이었던 프리무스 필루스는 완전히 군단 주임원사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보면 된다.[1]
다만 제국이 7세기 중후반에 이슬람 제국 맹진 및 아바르족에 의한 일리리쿰 야전군의 궤멸 같은 큰 일을 겪으면서 라틴어 보존에 그전처럼 열의를 쏟을 여유가 없어지자, 그전부터도 군내 편제명에서 그리스어 코미스란 은어에 점차 밀리던 트리부누스란 명칭은 어느 순간 로마군에서 쓰이지 않게 된다. 백인대장 칭호인 라틴어 켄투리오만은 켄티리온이란 그리스어화된 명칭으로 여전히 11세기까지만해도 로마군에서 80~100명급 부대 지휘관에게 쓰이고 있었던 걸 보면, 역시 당대 로마에서도 트리부누스란 호칭은 백인대장인 켄투리오보다 상징성은 덜했던 모양이다. 다만 엉뚱하게도 9~10세기에 고대 로마군 역사 매니아인 레온 6세가 켄티리온 밑에서 40~50명급 부대를 지휘하던 지휘관 명칭인 펜테콘타키스의 명칭을 트리부누스로 바꾸어 이 칭호를 복구하기로 맘 먹은 탓에, 한동안 트리부누스는 고대 로마 시기엔 엄연히 하급자였던 켄티리온(=켄투리오)의 지휘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11세기의 혼란기에 고대 로마군으로부터 내려오는 부대들 대부분이 전멸하거나 해체되는 비운을 겪으면서 트리부누스 호칭 또한 이 시기에 사라지고 만다.
[1] 즉 백인대장단에 있던 군인이 승진한다면 프리무스 필루스나 트리부누스 밀리툼 둘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