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9 02:02:21

유구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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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누미디아 왕국 3-3대 군주
ⵢⵓⴳⴰⵔⵝⵏ | 유구르타
파일:유구르타 알제리.jpg
제호 한국어 유구르타
베르베르어 ⵢⵓⴳⴰⵔⵝⵏ
라틴어 Jugurtha
가족 마시니사(할아버지)
마스타나발(아버지)
미킵사(양아버지)
가우다(동생)
옥시타스(아들)
생몰 년도 기원전 160년 ~ 기원전 104년
재위 기간 기원전 118년~기원전 105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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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합 누미디아 왕국 3-3대 군주. 누만티아 전쟁에서 활약해 로마인들의 호감을 쌓고, 이를 통해 양부의 두 아들과 함께 누미디아를 삼분했다. 이후 정치 공작을 통해 두 공동왕을 제거했고, 뇌물을 통해 숱한 로마 정치인들을 매수하여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러 무리수를 두다 로마인들의 분노를 샀고, 결국 유구르타 전쟁을 치른 끝에 파멸했다.

2. 생애

누미디아 왕국 2-3대 군주 마스타나발의 아들이다. 동생으로 가우다가 있었다. 아버지는 기원전 148년 마시니사 왕이 죽은 뒤 두 형제 미킵사, 굴루사와 함께 누미디아를 삼분했다. 그러나 굴루사와 마스타나발은 일찍 죽었고, 미킵사가 누미디아 전역을 통치했다. 이리하여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났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무척 총명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역사가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는 저서 <유구르타 전쟁>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유구르타는 자라자마자 강인하고 잘생겼으며, 무엇보다 지력이 투철해 사치와 게으름에 휘둘리지 않고 그 나라 풍습에 따라 말을 즐겨탔다. 그는 말 위에서 창을 능숙하게 던졌고, 달리기에서 동료들을 능가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모두를 능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이외에도 사냥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데, 사자와 다른 야수를 가장 먼저 쳐죽이며 두각을 크게 드러냈지만, 자신의 공적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살루스티우스에 따르면, 미킵사는 이토록 총명한 조카가 장차 자신의 두 아들 아드헤르발, 히엠프살 1세의 앞날에 위협이 되리라 여기고 경계했다. 그러던 중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누만티아 전쟁을 치르는 데 필요한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조카를 전쟁터로 보내 죽게 만들 작정으로 파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치는 역효과를 야기했다. 그는 아이밀리아누스 휘하에서 임무를 무척 착실하게 수행했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에 뛰어들어 많은 공적을 쌓았고, 로마 군인들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아이밀리아누스는 그런 그를 무척 총애했고, 누만티아 전쟁이 끝난 뒤 그를 집으로 보내면서 미킵사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이 훌륭한 젊은이를 친척으로 둔 당신과 그의 할아버지 마시니사는 진실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미킵사는 당대 로마 최고의 군인이자 지중해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이밀리아누스의 호의를 산 그를 더이상 배제할 수 없었다. 결국 기원전 121년, 왕은 계획을 변경해 그를 양자로 삼고 자녀들과 공동 상속인으로 삼았다. 기원전 118년 미킵사는 숨을 거두면서 두 아들과 그에게 왕국을 분할했다. 그러나 미킵사의 두 아들과 그는 곧 불화를 일으켰다. 그가 첫 모임에서 지난 5년간 미킵사의 건강이 좋지 않고 정신이 몽롱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칙령이 많았으니, 이를 무효화하자고 제안하자, 히엠프살 1세가 즉시 동의하며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너 같은 놈이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 된 것 역시 무효화해야 한다!"

이에 반감을 품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두 공동왕을 제거할 심산이었는지, 그는 즉위 1년만에 정치 공작을 벌이기 시작했다. 기원전 117년, 그는 히엠프살을 자신의 지지자가 소유한 피르미스의 별궁으로 오도록 유인한 뒤 암살해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드헤르발은 원로원에 이 사실을 알리고 유구르타와 전쟁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고 로마로 망명했다. 그는 원로원 회의에 출석해 유구르타가 자신들과 똑같이 왕권을 가졌는데도 불법적으로 히엠프살을 죽이고 자신을 쫓아냈다고 비난하며, 정의를 위해 유구르타를 처벌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유구르타는 누만티아 전쟁 시절 많은 로마인과 인맥을 맺어놨고, 막대한 뇌물을 의원들에게 뿌리기도 했기에, 원로원의 분위기는 유구르타 쪽으로 기울었다. 원로원이 보낸 사절단 역시 유구르타에게 매수되어 사건 보고서를 유구르타 쪽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작성했다. 결국 로마 정부는 유구르타를 징벌하는 대신 왕국을 둘로 나뉘기로 했다. 더 부유하고 인구가 더 많은 누미디아 서부는 그의 손에 들어갔고, 수도 키르타가 있는 동부 일대는 아드헤르발의 것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기원전 113년 아드헤르발을 재차 공격했다. 아드헤르발은 전초전에서 패배한 뒤 키르타 시로 피신했다. 그가 키르타를 포위하자, 아드헤르발은 로마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로마에서 파견된 사절단이 중재하려 했지만, 그는 사절들이 아드헤르발과 접촉하는 걸 막았고, 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아챙긴 사절단은 그냥 돌아갔다. 결국 1년간의 공성전 끝에, 로마인과 이탈리아인 상인들이 아드헤르발에게 목숨을 부지하는 대가로 항복을 제안하라고 요구했다. 아드헤르발은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여 그에게 협상을 제안했고, 그는 기꺼이 수락하겠다고 전했다. 그러나 정작 성문을 열고 나오는 아드헤르발을 체포한 뒤 잔혹하게 죽여버렸고, 키르타에 살던 로마인과 이탈리아인 상인들마저 학살했다.

키르타 학살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로마 민중은 매우 분노했다. 호민관 가이우스 멤미우스는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아 사태를 무마하려는 귀족들의 실상을 폭로해 이러한 여론을 더욱 키웠다. 원로원은 민중의 분노에 두려움을 느끼고 누미디아에 선전포고한 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를 사령관으로 선출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재빨리 아들 옥시타스와 몇몇 사절을 로마로 보내 막대한 뇌물을 또다시 건네려 했다. 베스티아는 이 사절들을 영접하려 했지만, 원로원은 유구르타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 전에는 어떤 사절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자국으로 돌려보냈다.

베스티아가 누미디아에 상륙하여 여러 마을과 요새를 공략하자, 그는 베스티아에게 찾아가서 30마리가 넘는 코끼리와 상당한 양의 금화를 건넸다. 이에 베스티아는 그와 평화를 이뤘다고 주장하며 로마로 귀환했다. 그러자 멤미우스는 베스티아가 유구르타에게 매수되었다고 주장했고, 원로원은 진상 조사를 위해 법무관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특사로 보냈다. 그는 롱기누스 앞에서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연기했다. 이에 롱기누스는 직접 로마로 와서 재판을 받으라고 요구했고, 그는 이를 따라 심복인 보밀카르와 함께 로마로 향했다. 재판 분위기는 유구르타에게 지극히 적대적이어서, 그가 유죄 판결을 받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그러나 그가 발언하려는 순간, 호민관 가이우스 베비우스가 거부권을 행사했다. 시민들은 그가 유구르타에게 매수되었다는 걸 눈치채고 격렬한 야유를 퍼부었지만, 재판은 그대로 무산되었다.

한편, 마시니사의 차남 굴루사의 아들인 마시바는 유구르타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누미디아의 왕이 되어야 한다며 원로원을 설득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보밀카르에게 암살자를 보내 마시바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마시바는 암살자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암살자는 법무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에게 체포되었다. 알비누스는 그와 보밀카르를 마시바 암살 사주 혐의로 기소했지만, 재판을 맡은 50명의 배심원들은 그에게 매수되어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원로원은 그에게 당장 이탈리아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그는 로마를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참으로 돈에 좌지우지되는 도시로다! 이제 돈으로 사들이는 자가 나타나면 로마는 곧 망할 것이다!"

기원전 110년,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휘하의 로마군이 유구르타를 토벌하려 시도했으나, 유구르타가 싸움에 응하지 않으면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 집정관 선거가 다가오자, 그는 선거를 주관하기 위해 로마로 향하면서 군대를 동생 아울루스에게 맡겼다. 아울루스는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나중에 이 사실이 고발될까 걱정하다가 공적을 세워 만회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유구르타가 보물을 보관해뒀던 수흘 마을을 공격했다. 그러나 유구르타의 첩자들이 사전에 이러한 적의 움직임을 간파했고, 그는 군단병들을 매수해 숲으로 유인했다. 그 후 누미디아군이 로마군을 포위했을 때, 리구리아와 트라키아 출신의 기병대가 적에게 매수되어 탈주했다. 누미디아군의 뒤이은 공세로 막심한 피해가 속출하자, 이제 싸워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아울루스는 항복했다. 유구르타는 패배한 지휘관과 병사들이 멍에 아래로 지나가게 한 뒤 2주 안에 누미디아에서 떠나라고 명령했다.

로마군이 그런 굴욕을 당하고 쫓겨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인들은 극심한 분노에 휩싸였다.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자들을 색출하기 위한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를 통해 수많은 로마 귀족들이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원전 109년 집정관에 선출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는 아프리카에 부임한 뒤 연이은 패배와 유구르타의 뇌물 공세로 기강이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군단병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고 군율을 엄격하게 집행함으로써 다잡아놓은 후 공세를 개시했다. 메텔루스가 뇌물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그는 이번만큼은 이기기 어렵다고 여기고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메텔루스는 여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메텔루스는 유구르타의 사절이 한 사람 씩 올 때마다 많은 요구를 했고, 이를 통해 인질, 무기, 코끼리, 포로, 탈영병들이 보내졌지만 모조리 제거되었다고 한다.

메텔루스는 바가 시를 공략한 뒤 유구르타가 파견한 사절을 회유하여 주군을 배신하게 했다. 이에 그는 기원전 108년 적군의 예상 진격로인 무툴 강 근처에 매복했지만, 사전에 간파한 메텔루스에 의해 완패했다. 이후 그는 소규모 병력만 꾸려서 유격전을 전개해 로마군을 괴롭혔다. 메텔루스는 이에 대응하여 누미디아를 초토화시켰지만, 이리저리 피하는 유구르타를 잡지 못했다. 그해 겨울 로마군이 안전한 후방으로 후퇴하자, 그는 바가 시민들을 회유해 로마를 배반하게 했다. 당시 바가에 주둔하던 로마군 사령관 티투스 투르필리우스 실라누스는 바가 시민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은 투르필리우스만은 석방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죽였다. 이에 부관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투르필리우스가 내통한 게 분명하다며 처형을 촉구했고, 메텔루스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친구였던 투르필리우스를 처형했다. 나중에 투르필리우스가 결백했다는 게 밝혀지자, 그는 이때부터 마리우스를 적대했다.

한편, 유구르타의 심복이었던 보밀카르는 누미디아가 초토화된 상황을 지켜보다가 주군의 수급을 베어 로마군에 바침으로써 안전을 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메텔루스와 내통하고 신하들을 꼬드겨 쿠데타를 모의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곧 들통났고, 유구르타는 보밀카르를 포함한 여러 신하를 처형했다. 이후 메텔루스는 유구르타가 숨은 탈라 시를 포위하여 40일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함락시켰지만, 이번에도 유구르타를 놓쳤다. 그는 이웃 나라인 마우레타니아 왕국으로 망명한 뒤, 보쿠스 1세에게 전 영토의 3분의 1을 줄 테니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로마는 신의가 없으며 이웃 나라를 파멸시키기 위해 안달하는 나라이니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하들 역시 그로부터 뇌물을 받아먹고 왕에게 로마와 항전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보쿠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군이 장악한 누미디아로 쳐들어갔다.

메텔루스는 이에 맞서려 했다가 마리우스가 집정관에 선출되어 지휘권을 이양받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노해 인수인계도 하지 않고 로마로 돌아가버렸다. 이후 새 지휘관이 된 마리우스는 누미디아-마우레타니아 연합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끝에 완승을 거두었다. 보쿠스가 화의를 요청하자, 마리우스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사절로 보내 유구르타를 넘겨야만 합의를 이룰 수 있다고 밝혔다. 보쿠스는 며칠간 고심한 끝에 기원전 105년 유구르타에게 "로마와 어떻게 맞서 싸울 지 논의하고 싶으니 궁전에 와달라"고 요청했다. 유구르타가 이에 응해 궁전에 이르자, 마우레타니아 병사들이 달려들어 그와 측근들을 모조리 포박하여 로마군에 넘겼다. 로마 측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보쿠스에게 누미디아 서쪽 영토를 넘겨줬고, 유구르타의 동생 가우다가 나머지 영토를 다스리게 했다.

그 후 로마로 압송된 유구르타는 기원전 104년에 열린 마리우스의 개선식 때 쇠사슬에 묶인 채 '전리품' 취급된 뒤 툴리아눔(Tullianum)의 지하감옥으로 보내졌다. 한 기록에는 그가 그곳에서 굶어죽었다고 하며, 다른 기록에는 목졸려 죽었다고 한다. 다만 함께 끌려간 아들 옥시타스는 이탈리아 생활에 적응했고, 동맹시 전쟁 때 로마에 반기를 든 가이우스 파피우스 무틸루스의 휘하에 들어가 로마군에서 복무하는 누미디아군의 탈영을 유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