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 라틴어: Quintus Caecilius Metellus Numidic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98년 이후 사망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아버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형) 카이킬리아(누이) 메텔루스 피우스(아들) |
참전 | 유구르타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09년 |
전임 |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
동기 |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
후임 |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카우루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유구르타 전쟁에서 유구르타를 상대로 승기를 잡았지만 최종 승리를 좀처럼 거두지 못하다가 클리엔테스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지휘권을 넘겨야 했다. 그 후 마리우스의 대표적인 정적으로 활동했다.2. 생애
저명한 노빌레스 가문인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씨족의 일원이다. 전승에 다르면, 이 가문은 팔레스트리나의 창건자이자 불의 신인 불카누스의 아들인 카이킬리우스의 후손이라고 한다. 기원전 3세기부터 원로원에 진출한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은 기원전 284년 집정관에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덴테르를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고위 행정관을 여럿 배출했다. 특히 기원전 140년대에 파트리키 가문인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가문과 정치적 동맹을 맺은 이래 고위 행정관에 어떤 가문보다 많이 배출했다.그는 기원전 142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의 둘째 아들이었다. 형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는 기원전 119년 집정관을 맡은 뒤 기원전 118년 달마티아 총독으로 부임해 달마티아인들을 성공적으로 복종시킨 뒤 기원전 117년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했다. 누이 카이킬리아는 기원전 104년 법무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와 결혼했다. 한편, 그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정복자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의 조카였다.
그는 젊은 시절에 그리스로 유학가서 철학과 수사학을 공부했다. 이후 쿠르수스 호노룸(Cursus honorum, 명예로운 경력)을 역임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고대 사료에는 기원전 112년 법무관으로서 로마에 곡물을 공급하는 지방을 통치했다는 것만 알려졌다. 그는 일찍부터 청렴결백한 인물로 명성이 자자했다. 뇌물을 절대로 받지 않았으며, 뇌물 수수 혐의로 고발당한 사위를 변호하는 것을 단호히 뿌리쳤다. 한 번은 그가 법무관으로서 속주민들을 착취한 혐의로 고발당했는데, 그는 법원에 당당하게 출두한 뒤 장부를 제출하며 이를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그 장부에는 많은 에퀴테스와 귀족들의 비리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이에 판사는 일이 커질 것을 우려해 장부 공개를 거부하고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한편, 로마 공화국은 기원전 112년부터 유구르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기원전 110년, 집정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휘하의 로마군이 유구르타를 토벌하려 시도했으나, 유구르타가 싸움에 응하지 않으면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 집정관 선거가 다가오자, 그는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로마로 향하면서 군대를 동생 아울루스에게 맡겼다. 아울루스는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나중에 이 사실이 고발될까 걱정하다가 공적을 세워 만회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유구르타가 보물을 보관해뒀던 수흘 마을을 공격했다. 그러나 유구르타의 첩자들이 사전에 이러한 적의 움직임을 간파했고, 그는 군단병들을 매수해 숲으로 유인했다. 그 후 누미디아군이 로마군을 포위했을 때, 리구리아와 트라키아 출신의 기병대가 적에게 매수되어 탈주했다. 누미디아군의 뒤이은 공세로 막심한 피해가 속출하자, 이제 싸워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아울루스는 항복했다. 유구르타는 패배한 지휘관과 병사들이 멍에 아래로 지나가게 한 뒤 2주 안에 누미디아에서 떠나라고 명령했다.
로마군이 그런 굴욕을 당하고 쫓겨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인들은 극심한 분노에 휩싸였다.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자들을 색출하기 위한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를 통해 수많은 로마 귀족들이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원전 109년 집정관에 선출된 메텔루스는 아프리카에 부임한 뒤 연이은 패배와 유구르타의 뇌물 공세로 기강이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군단병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고 군율을 엄격하게 집행함으로써 다잡아놓은 후 공세를 개시했다. 메텔루스가 뇌물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유구르타는 이번만큼은 이기기 어렵다고 여기고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메텔루스는 여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메텔루스는 유구르타의 사절이 한 사람 씩 올 때마다 많은 요구를 했고, 이를 통해 인질, 무기, 코끼리, 포로, 탈영병들이 보내졌지만 모조리 제거되었다고 한다.
메텔루스는 바가 시를 공략한 뒤 유구르타가 파견한 사절을 회유하여 주군을 배신하게 했다. 이에 유구르타는 기원전 108년 적군의 예상 진격로인 무툴 강 근처에 매복했지만, 사전에 간파한 메텔루스에 의해 완패했다. 이후 유구르타는 소규모 병력만 꾸려서 유격전을 전개해 로마군을 괴롭혔다. 메텔루스는 이에 대응하여 누미디아를 초토화시켰지만, 이리저리 피하는 유구르타를 잡지 못했다. 그해 겨울 로마군이 안전한 후방으로 후퇴하자, 유구르타는 바가 시민들을 회유해 로마를 배반하게 했다. 당시 바가에 주둔하던 로마군 사령관 티투스 투르필리우스 실라누스는 바가 시민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은 투르필리우스만은 석방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죽였다. 이에 부관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투르필리우스가 내통한 게 분명하다며 처형을 촉구했고, 메텔루스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친구였던 투르필리우스를 처형했다. 나중에 투르필리우스가 결백했다는 게 밝혀지자, 그는 이때부터 마리우스를 적대했다.
이후 메텔루스는 유구르타가 숨은 탈라 시를 포위하여 40일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함락시켰지만, 이번에도 유구르타를 놓쳤다. 유구르타는 이웃 나라인 마우레타니아 왕국으로 망명한 뒤, 보쿠스 1세에게 전 영토의 3분의 1을 줄 테니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로마는 신의가 없으며 이웃 나라를 파멸시키기 위해 안달하는 나라이니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하들 역시 그로부터 뇌물을 받아먹고 왕에게 로마와 항전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보쿠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군이 장악한 누미디아로 쳐들어갔다. 메텔루스는 보쿠스 1세를 상대하기 위해 군대를 이동시켰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지휘권이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보다 앞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메텔루스에게 집정관 입후보를 위해 로마로 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메텔루스는 마리우스가 지휘권을 빼앗으려는 마음을 품고 있음을 눈치채고 마리우스의 요청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24살에 불과한 자신의 아들 메텔루스 피우스가 집정관 후보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조소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입후보 기일 12일 전에 집정관 출마를 승인했다. 이는 마리우스가 집정관 후보로서 선거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려는 술책이었지만, 마리우스는 곧장 로마로 돌아온 뒤 집정관에 입후보한 후 전쟁을 조기에 끝내지 못하는 메텔루스를 무능하다고 비난했다. 전쟁이 길어지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시민들은 마리우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원로원이 메텔루스의 지휘권을 연장하려 하자, 시민들은 민회에서 투표를 통해 저지한 뒤 마리우스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메텔루스는 이 소식을 접하자 몹시 분노해 인수인계도 하지 않고 로마로 돌아가버렸다. 그 후 마리우스는 유구르타 전쟁을 종결시킴으로써 로마의 영웅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원로원은 전쟁이 이미 메텔루스에 의해 실질적으로 승리했다고 여겼고, 메텔루스가 개선식을 거행하고 누미디쿠스라는 칭호를 받게 했다. 그 후 마리우스가 기원전 104년부터 기원전 100년까지 집정관을 연이어 맡는 동안, 메텔루스는 원로원에서 마리우스의 가장 강력하고 끈질긴 정적이 되었다. 기원전 103년, 메텔루스는 사촌인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카프라리우스와 함께 BCE 102년 감찰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당시 호민관으로서 마리우스와 연합한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와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사투르니누스는 "로마 인민의 위대함을 모욕하는 것에 관한 법률"(lex Appuleia de maestate)을 채택하여 공화국의 이익을 해치는 모든 행위에 대해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 법에 근거하여 아라우시오 전투의 참패를 초래한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를 추방한 뒤, 여세를 몰아 메텔루스를 공격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규합하여 메텔루스의 집을 포위해 사임을 요구했고, 뒤이어 원로원 의사당을 포위해 압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메텔루스가 끝까지 버티면서 결국 실패했다.
기원전 102년이 되자 호민관의 1년 임기가 만료되어 사투르니누스는 호민관에서 내려오자, 새로 감찰관에 부임한 메텔루스는 사투르니누스와 그의 동맹자인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를 원로원에서 축출하고자 했다. 하지만 두 번째 감찰관인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카프라리우스가 반대하자 결국 포기했다. 이후 사투르니누스의 지지자인 루키우스 에퀴티우스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아들을 사칭하자, 메텔루스는 로마 시민권을 박탈했다. 사투르니누스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누이 셈프로니아에게 에퀴티우스를 조카로 인정하라고 압력을 가했지만, 셈프로니아가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기원전 100년 또다시 호민관에 선임된 사투르니누스는 로마의 빈민들에게 분배하는 빵 가격 제한을 대폭 인하하는 법과 시칠리아, 아카이아, 마케도니아, 갈리아 등지에 퇴역 군인들이 모여 사는 도시를 건설하게 하고, 이탈리아의 토지들을 민중에 분배하는 농지법을 무력을 통해 민회에서 통과시킨 뒤, 사투르니누스는 원로원에 민회에서 통과된 모든 법안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지 않으면 20달란트의 벌금을 부과하고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모든 원로원 의원은 새 법을 지지하겠다고 밝혔지만, 메텔루스만은 끝까지 거부했다. 이에 사투르니누스는 원로원 의사당에서 메텔루스를 몰아내기 위해 관원들을 보냈다. 메텔루스를 추종하는 이들이 들고 일어나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메텔루스를 끌어내지 못하자, 사투르니누스는 민회에서 메텔루스 때문에 아무도 땅을 받지 못할 거라고 선동했다. 이로 인해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자, 메텔루스는 결국 로마를 떠나야 했다.
메텔루스는 로도스에 정착하여 철학을 연구했다. 그러던 중 사투르니누스가 집정관 당선인 가이우스 멤미우스를 살해했다가 원로원으로부터 원로원 최종결의를 선고받고 가이우스 마리우스에 의해 토벌된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호민관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는 메텔루스의 귀환을 허가하는 법안을 제출했지만, 가이우스 마리우스에 의해 저지되었다. 아들 메텔루스 피우스는 아버지를 로마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열성을 다해 노력했고 이로 인해 '피우스'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러나 마리우스파가 극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좀처럼 귀국시키지 못했다.
기원전 98년 메텔루스의 사촌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가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이후 메텔루스의 복귀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고, 원로원은 호민관 퀸투스 칼리디우스의 제의에 따라 메텔루스를 복귀시키기로 결의했다. 당시 민심은 마리우스파 전직 호민관이었던 푸블리우스 푸리우스가 광장에서 살해당할 정도로 마리우스에게 등을 돌리고 메텔루스 편을 들었기에 이것이 가능했다. 마리우스는 메텔루스가 복귀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는지 동방으로 여행갔다.
메텔루스는 로마에 복귀한 후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키케로는 기원전 90년 호민관 퀸투스 바리우스 세베루스 하브리다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을 기록했지만, 키케로 본인이 이 소문의 신빙성을 의심했을 정도로 당대인들에게 헛소문으로 취급되었다.
메텔루스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의 사이에서 메텔루스 피우스를 낳았다. 메텔루스 피우스는 기원전 80년에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대표적인 술라파 인사로서 술라의 내전과 세르토리우스 전쟁에서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