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라틴어: Quintus Servilius Caepio | |
생몰년도 | 기원전 183년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아버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세르빌리아누스(첫째 형)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둘째 형)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아들) 세르빌리아(딸) |
참전 | 루시타니아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40년 |
전임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퀸투스 폼페이우스 |
동기 |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 |
후임 |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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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루시타니아 전쟁을 종결시킨 인물이다.2. 생애
알바 롱가에서 유래한 여섯 파트리키 가문 중 하나인 세르빌리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기원전 253년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집정관을 역임한 이래 카이피오 지파에서 많은 집정관들을 배출했다. 그는 기원전 169년 집정관이었던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의 세 아들 중 막내였다. 맏형은 파비우스 막시무스 가문에 입양되어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세르빌리아누스로 개명했고, 기원전 142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둘째 형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는 기원전 141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는 기원전 140년 집정관을 역임했는데, 세 형제가 3년 연속 집정관 직을 맡는 것은 로마 공화국 역사에서 전례없는 일이었다.집정관을 맡기 이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기원전 140년 집정관에 선출된 그는 루시타니아 전쟁에 추가 병력을 보내려는 원로원의 뜻에 따라 스페인으로 출진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많은 로마 시민들은 스페인에 가기를 원하지 않았고, 세르빌리우스 씨족의 정적들은 "한 해에 신 병을 두 번 징집하는 것은 불법이다"라고 규정한 기원전 143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법을 거론하며 그가 군대를 모집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징집에 응하지 않는 자들을 잡아다 고문해 입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면서까지 군대를 억지로 모집했고, 기원전 140년 초 히스파니아로 이동했다.
그가 히스파니아에 도착할 무렵, 히스파니아 총독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세르빌리아누스는 루시타니아 반군 지도자 비리아투스와 "로마는 루시타니아인의 주권을 존중하고 루시타니아인은 로마인의 친구로 인정받는다"는 내용의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든 군공을 세우고 싶었기에 형이 체결한 협약이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원로원에게 적대 행위를 다시 시작하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원로원은 카이피오에게 루시타니인들을 도발하여 전쟁을 일으키도록 했다. 몇몇 루시타니아인이 로마군의 도발 행위에 분노하여 인근 마을을 공격하자, 그는 이를 빌미삼아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아르사 마을을 점령하고 카르펜타니아에서 비리아투스와 교전하여 승리했다. 비리아투스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도주했고, 카이피오는 루시타니아인과 동맹을 맺은 베토네스와 칼라이키 족의 영지를 파괴했다. 이후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추가로 합류하면서 로마군의 기세가 한층 더 오르자, 비리아투스는 더 이상 전쟁을 벌이는 건 무리라고 여기고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카이피오가 로마의 탈영병과 모든 무기를 넘겨야만 평화 협약을 맺을 용의가 있다고 하자, 그는 무기를 넘기는 것만은 불가하다고 여기고 친구 아우닥스, 디탈코, 미누로스를 로마군 진영으로 보내 요구 조건을 완화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세 친구는 카이피오로부터 비리아투스를 암살하면 막대한 돈을 주겠다는 제안에 혹했다. 그들은 선불금을 받은 뒤 밤에 돌아와서 비리아투스의 막사로 향했다. 위병에게 비리아투스와 급히 상의할 일이 있다고 말해 안으로 들어간 뒤, 두 사람이 잠든 비리아투스를 붙잡고 세번째 사람이 등에 칼을 꽂아 죽였다. 날이 밝자 비리아투스가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추종자들은 슬픔과 분노에 휩싸였다. 그들은 시신에 화려한 옷을 입히고 장작더미에 올려서 불태웠으며 제물을 바쳤다. 한편 3명의 공모자는 로마군 진영으로 돌아와서 남은 금액을 달라고 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카이피오는 "로마는 반역자들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그들을 쫓아냈다고 한다. 반면 아피아노스는 카이피오가 그들을 로마로 보내 남은 돈을 지불받게 했다고 기술했다.
기원전 139년 전직 집정관의 자격으로 지휘권을 1년 연장받은 카이피오는 여전히 로마에 저항하는 루시타니아 반군 토벌에 나섰다. 비리아투스의 뒤를 이어 루시타니 부족 연합군 지휘관을 맡은 타우탈루스는 기원전 139년 사군툼을 기습 공격했으나 수비대에게 격퇴되었고, 베티스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카이피오의 군대와 맞닥뜨렸다. 타우탈루스는 로마군에 맞섰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게 되자 결국 모든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카이피오는 지난날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가 루시타니아인들이 정착할 땅을 주겠다고 약속해놓고 루시타니아인들을 한 곳에 모아뒀다가 학살을 자행하는 바람에 비리아투스가 등장했다는 걸 잘 알았기에, 이번에는 약속을 지켜 그들에게 땅을 할당했다. 루시타니아인들은 재무관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 의해 발렌티아 식민도시에 정착했다. 이리하여 16년간 이어지던 루시타니아 전쟁이 막을 내렸다.
기원전 138년 로마로 귀환한 카이피오가 개선식을 거행했는지의 여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이후 형제 그나이우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와 함께 전직 집정관 퀸투스 폼페이우스의 뇌물 수수 혐의를 고발하고 법정에서 고발측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러나 재판관들은 고발자들의 권위가 자신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딸 세르빌리아를 낳았다. 아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는 기원전 106년에 집정관을 역임했고, 딸 세르빌리아는 기원전 102년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의 아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