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 라틴어: Lucius Furius Purpurio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스푸리우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조부) 스푸리우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96년 |
전임 |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퀸투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
동기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후임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대 카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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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갈리아인과 리구리아인을 선동해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에서 봉기를 일으킨 카르타고인 하밀카르를 진압했다.2. 생애
투스쿨룸에서 로마로 이주한 파트리키 가문인 푸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며, '로마 제2의 건국자'로 일컬어지는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의 후손이다. 기원전 5세기부터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 목록을 담은 파스티 카피톨리니(Fasti Capitolini)에 따르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스푸리우스(Spurius)라는 프라이노멘을 가졌다고 한다.제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210년 아펜니노 반도 남쪽에서 활동하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통솔하는 군대의 대대장을 맡았다. 기원전 200년 법무관에 선임된 그는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를 통제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던 중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에도 카르타고에 돌아가지 않고 갈리아 키살피나에 은신하던 하밀카르가 로마인들이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착수하느라 이쪽에 관심을 두지 않는 틈을 타 갈리아인과 리구리아인을 선동했다. 그는 로마가 조만간 한니발 바르카를 도운 그들에게 보복할 것이니 그 전에 떨쳐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수브레스족, 보이족, 케노마니족 등 갈리아 부족들과 일부 리구리아 부족들이 이에 호응에 반기를 일으킨 뒤 하밀카르를 사령관으로 선출했다.
하밀카르는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의 로마 식민도시인 플라켄티아를 기습 공격해 함락 후 철저하게 파괴했다. 여세를 이어가 크레모나를 포위했지만 거센 저항에 부딪치자 포위해서 굶겨죽이려 했다. 한편, 원로원은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벌어진 사태를 전해듣고 이탈리아에 남아있던 집정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에게 진압을 명령했다. 하지만 코타가 아직 갈리아 키살피나에 도착하지 않은 사이, 현지에 주둔한 2개 군단을 이끌던 푸르푸레오가 크레모나로 진격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갈리아군과 리구리아군은 완패하여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1]
나중에 현장에 도착한 집정관 코타는 자기가 군공을 세울 기회가 사라진 것에 화가 나 푸르푸레오를 에트루리아로 쫓아보내고 로마에 반기를 든 갈리아인과 리구리아인들에게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각지를 약탈했다. 푸르푸레오는 이에 대응해 로마로 예기치 않게 찾아와서 원로원에 개선식을 거행할 권리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일부 원로원 의원은 그가 배정받은 속주를 무단으로 떠났으니 불법이라며 반대했지만, 원로원은 그가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을 허락하기로 결의했다. 이 개선식에는 군인과 포로가 한 명도 참가하지 않아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기원전 196년, 그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당시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두 지휘관은 마케도니아 방면 지휘권을 맡아서 군공을 세우길 갈망했다. 하지만 전직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국왕 필리포스 5세를 격파한 뒤 휴전을 맺었고, 기원전 196년 초 마케도니아 사절이 로마에 도착하여 최종 협약을 체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집정관은 마케도니아의 지휘권을 갈망해, 필리포스 5세를 이 기회에 끝장내야 하니 전쟁을 재개하자고 강력히 권했다. 그러나 호민관 퀸투스 마르키우스 라일라와 가이우스 아티니우스 라베오는 민회에서 35개 부족을 소집해 모든 부족이 평화 조약 체결을 찬성한다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결국 두 집정관은 북이탈리아 방면에서만 군사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따로 이동하다가 리구리아에서 합류해 그 일대를 파괴하고 보이족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뒀다. 이후 로마로 돌아와서 보이족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하여 개선식을 재차 거행했다.
기원전 192년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2개의 유피테르 신전을 봉헌했다. 기원전 189년 원로원이 임명한 사절단 중 한 사람이 되어 아파메이아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와 회담을 가진 뒤 양국의 경계선을 정하고 배상금을 매년 정해진 값에 지불하고, 소아시아 전역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며, 거의 모든 함대를 파괴하고 전투 코끼리를 로마로 옮기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기원전 187년 로마로 돌아온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가 갈라티아를 상대로 거둔 승전을 기념해 개선식을 치르게 해달라고 요구하자, 그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등 대부분의 사절과 함께 만리우스가 원로원의 허락을 받지 않고 갈라티아인들과 전쟁을 벌였고, 페르가몬 왕국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으며, 트라키아인들의 급습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 아군에게 손실을 입혔다며 개선식은 고사하고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불소가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을 허락했다.
기원전 185년 감찰관 선거에 출마한 그는 다른 후보들과 함께 대 카토를 실각시키려 했다 그들은 카토가 편협하고 지나치게 엄격하다며, 자신들이 감찰관이 된다면 최대한 온건하고 관용적인 검찰관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카토는 자신이 급진적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도덕 정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선거 결과 카토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에게 패배했다. 기원전 183년 알프스를 넘어 로마에 정착하려던 갈리아의 3개 부족에 찾아간 사절단에 참여했다. 사절단은 갈리아인들이 이전에 빼앗아간 재산을 원주민에게 돌려주고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1] 일부 기록에는 하밀카르가 이때 전사했다고 나와 있지만,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가 전하는 다른 기록에는 탈출에 성공한 뒤 여전히 로마에 맞서는 갈리아인들을 이끌다가 기원전 197년 민키우스 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집정관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패하고 생포된 후 개선식에 끌려가 광장에서 목졸려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