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만리우스 아키디누스 풀비아누스 라틴어: Lucius Manlius Acidinus Fulvian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조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아버지) 루키우스 만리우스 아키디누스(양부) 술피키아(어머니)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형제) 만리우스 아키디누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79년 |
전임 |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루스쿠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동기 |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후임 |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아울루스 만리우스 불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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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투스쿨룸 출신이었다가 기원전 4세기 중반에 로마로 이주한 뒤 여러 고위 행정관을 배출한 노빌레스 가문인 풀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플라쿠스(Flaccus)'라는 코그노멘을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로, 기원전 264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아버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237년, 기원전 224년, 기원전 212년, 기원전 209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카푸아 공방전에서 맹활약했다. 형제로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있었다.그는 일찍이 기원전 210년 법무관이었던 루키우스 만리우스 아키디누스의 양자가 되었고, 파트리키 가문인 만리우스 씨족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88년 가까운 히스파니아에 법무관으로 부임한 뒤 기원전 185년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군사 작전을 이끌었다. 기원전 186년 칼라구리스 시 인근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켈티베리아인들을 격파해 2천 명을 사살하고 2천 명을 생포했다. 그 후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켈티베리아인들을 완전히 복종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공공 경기장에서 군중의 박수갈채를 받는 것만 허용되었다.
기원전 183년 알프스산맥을 넘어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로 이동한 갈리아 부족과 협상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갈리아인들은 로마 사절단과 협상한 끝에 이전에 탈취했던 재산을 돌려주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또한 그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와 함께 아퀼레이아 시 건설을 지휘해 기원전 181년에 완료되었다. 아퀼레이아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179년 형제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대 플리니우스 등 후대 역사가들은 친형제가 집정관에 선출된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매우 독특한 사건이라고 묘사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웅변가에 대하여>에 따르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는 스키피오 집안을 대표하여 집정관 선거에서 아키디누스를 투표한 뒤 그 사람에 대해 평해보라는 주변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 생각에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고 훌륭한 시민도 아니다."
두 집정관은 리구리아에서 작전을 수행했지만, 플라쿠스가 전공을 세우고 개선식을 거행한 것에 비해 그는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의 아들 만리우스 아키디누스[1]는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참전한 기원전 171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레가투스였다고 한다.
[1] 리비우스는 프라이노멘을 밝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