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라틴어: Marcus Fulvius Flacc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풀비우스(조부) 퀸투스 풀비우스(아버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장남)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차남)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삼남)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64년 |
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 루키우스 마밀리우스 비툴루스 |
동기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 |
후임 |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메살라 마니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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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기원전 4세기에 투스쿨룸에서 로마로 이주한 뒤 로마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노빌레스 가문인 풀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는 각각 마르쿠스와 퀸투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조부 마르쿠스는 기원전 305년 집정관 마르쿠스 풀비우스 쿠르부스 파이티누스와 기원전 299년 집정관 마르쿠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 중 한 사람일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기원전 305년 집정관이 그의 조부라면, 아버지는 기원전 296년 평민 조영관을 맡았던 퀸투스 풀비우스일 것이다. 그는 풀비우스 씨족으로서 '플라쿠스(Flaccus)'라는 코그노멘을 사용한 첫번째 인물이다.기원전 271/270년에 호민관을 맡은 그는 레지오에서 반란을 일으킨 로마 시민들을 채찍과 참수형으로 다스리는 것에 반발하며 "조상의 관습에 따라 채찍형과 사형을 로마 시민에게 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를 묵살하고 형벌을 가했다. 그 후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와 함께 '두 개의 강 연결 책임자(duoviri aquae perducendae)'로 선임되어 아니오 강에서 테베레강으로 연결하는 아니오 베투스 수로를 건설해 로마에 물을 공급하는 임무를 맡았다. 덴타투스는 임명된 지 5일 만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가 홀로 공사를 감독해야 했다.
기원전 264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카우덱스가 제1차 포에니 전쟁의 포문을 여는 동안, 그는 로마에 종속되지 않은 에트루리아의 마지막 도시 국가인 볼시니아와의 전쟁을 치렀다. 작년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가 그보다 먼저 전쟁을 시작했지만 도시를 포위공격하던 중에 전사한 바 있었다. 그는 볼시니아를 공략하고 수비대 전원을 십자가형에 처한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하고 수많은 조각상들을 로마로 가져왔다. 이후 볼시니인들이 섬겼던 계절과 정원 및 과일 나무의 신인 베르툼누스(Vertumnus) 숭배 의식이 로마 사회에 퍼졌다.
기원전 246년 독재관 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 휘하 기병장관으로 선임되어 집정관들을 대신해 행정관 선거를 실시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237년, 기원전 224년, 기원전 212년, 기원전 209년 집정관을 역임하고 기원전 231년 감찰관을 맡았고 기원전 213년 기병장관, 기원전 210년 독재관에 선임되는 등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또한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의 동맹시였다가 한니발 바르카에게 돌아선 카푸아를 공략하고 철저히 파괴했다. 차남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212년 법무관을 맡았으나 1차 헤르도니아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참패한 뒤 무능과 책임 회피 등을 이유로 고발당하자 해외로 망명했다가 기원전 209년 집정관을 맡은 형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으로서 로마에 귀환했다. 그리고 막내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맏형 퀸투스 휘하에서 레가투스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