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라틴어: Gnaeus Domitius Calvinus | |
생몰년도 | 기원전 96년 ~ 기원전 20년 이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평민귀족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아버지)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해방자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기병장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53년 |
전임 |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
동기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 |
후임 | 폼페이우스 메텔루스 스키피오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40년 |
전임 |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
동기 |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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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가. 본래 옵티마테스파였지만 카이사르의 내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편에 섰고,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제2차 삼두정치를 지지했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오래된 평민 귀족 집안인 도미티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이 집안은 삼니움 전쟁 때 집정관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이후로 2세기 동안 역사의 무대에서 별 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 마르쿠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는 기원전 79년 가까운 히스파니아 총독을 역임했다. 기원전 62년, 아시아 총독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란쿠스의 부관으로 복무했고, 기원전 59년 호민관을 역임했다. 당시 집정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의 갈등이 벌어졌을 때 비불루스를 지지했으나, 카이사르가 농지법을 통과시키는 걸 막지 못했다.호민관 임기가 끝난 후 옵티마테스 파의 절대적인 지원에 힘입어 기원전 56년 총독을 역임했으며, 법무관 선거 중에 벌어진 선거 위반 사례를 검토하는 사법 협의회를 이끌었다. 당시 그는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 재판 때 재판관을 맡았다. 베스티아는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루푸스로부터 유권자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키케로의 변론 덕분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폭력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무죄를 선고받은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루푸스의 재판에도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54년 집정관 후보로 출마했다. 이 해의 집정관 선거는 로마 공화국 역사상 최악의 선거로 악명을 떨쳤다. 후보로 출마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가이우스 멤미우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 그리고 그 모두 표를 얻기 위해 막대한 뇌물을 선거인단에게 뿌리고 현직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지원을 얻어내려 사력을 다했다. 이로 인해 후보 4명 모두 고발당했고, 비록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차기 집정관은 좀처럼 선출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기원전 53년 여름이 되어서야 정치 세력들의 합의로 그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가 최종적으로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기원전 52년 집정관 후보로 출마하려는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와 메텔루스 스키피오,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그리고 푸블리우스 플라우티우스 힙사이우스의 지지자들이 서로 패거리를 결성했다. 옵티마테스파인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밀로가 한 편이 되었고, 카이사르 파인 풀케르와 힙사이우스가 이에 맞서 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곧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고, 로마 시는 대혼란에 휩싸였다. 그는 루푸스와 함께 혼란을 수습하려 했지만 돌을 얻어맞기만 하고 후임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관저를 떠나야 했다. 결국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에 의해 특별 권한을 맡아 혼란을 수습하였고, 기원전 52년 집정관을 일단 단독으로 맡았다가 9월부터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동료 집정관이 되었다. 한편 칼비누스의 집정관 임기 동안 법무관은 직위에서 물러난 직후가 아니라 5년 후에야 총독으로 부임할 수 있다는 법안이 논의되었다. 이 법안은 빠르면 이듬해에 통과되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편을 바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편을 들었다. 기원전 48년 초 카이사르의 발칸 반도 원정에 참여했다. 카이사르는 디라키움 공방전을 치르는 동안 그에게 제11군단과 제12군단을 맡겨 시리아에서 폼페이우스의 지원군을 이끌고 이동중이던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상대하게 했다. 두 군대는 마케도니아에서 전투를 벌이지 않고 대치했다.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마르쿠스 파보니우스에게 8개 코호트를 맡겨 할리아크몬 강가에 진을 치게 하고, 자신은 카이사르의 또다른 부관인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상대하러 출정했다. 칼비누스가 파보니우스를 압박하자, 파보니우스는 스키피오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스키피오는 돌아와서 칼비누스와 계속 대치했다.
기원전 49년 여름 카이사르가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패한 뒤 그와 합세하러 이동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가 먼저 행동에 나서 그의 군대로 진격했다. 칼비누스는 폼페이우스가 대군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다는 걸 모른 채 스키피오와 계속 대치했다. 그러던 중 폼페이우스의 진영에서 탈영한 갈리아 기병들이 칼비누스에게 폼페이우스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곧장 철수했고, 테살리아의 아이기니오스에서 카이사르와 합세했다. 이에 스키피오는 폼페이우스와 합세했다. 이후 벌어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군의 중앙 부대를 이끌어 대승에 기여했다. 그 후 카이사르는 이집트로 달아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면서 그를 소아시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소아시아에 도착한 그는 폼페이우스의 고참병이었다가 카이사르에게 귀순한 이들로 구성된 제36군단을 포함한 3개 군단을 소집하여 그곳의 질서를 잡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중 폰토스 왕국의 군주 파르나케스 2세가 로마 공화국이 내전을 치르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야망을 이룰 때가 왔다고 여기고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카파도키아, 비티니아, 소 아르메니아를 잇따라 공략하여 영역을 확장했다. 로마의 동맹국이었던 카파도키아, 비티니아 군주들이 칼비누스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그는 이 당시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치르며 위태로운 지경에 몰려있던 카이사르의 구원 요청에 따라 2개 군단을 보내버렸기 때문에 그들을 당장 도울 여력이 없었다. 이에 시간을 끌기로 하고, 파르나케스 2세에게 "당장 빼앗은 모든 영토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로마와 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그 후 제36군단을 이끌고 코마나로 이동했고, 최근에 현지인들로부터 징집한 1개 군단, 갈라티아 2개 군단, 카파도키아 보병 10,000명, 그리고 기병 1,000명이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파르나케스 2세는 카파도키아에서 철수하는 건 동의했지만 소 아르메니아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니 마땅히 가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협상 용의가 있다고 꾸준히 알렸지만, 칼비누스는 그가 수비하기 불리한 칼리키아에서 물러나 방어에 용이한 소 아르메니아에 전력을 집중하는 것일 뿐 실제로 평화 협상을 할 생각이 없다는 걸 간파하고 소 아르메니아로 진군했다. 파르나케스 2세는 막대한 제물을 제시하며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청했으나 소용이 없자, 니코폴리스 인근으로 후퇴했다. 그는 도시 앞 평원에 주력군을 숙영시키고 인근 숲에 기병대를 매복시킨 뒤 적이 몰려오길 기다렸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하게 해, 칼비누스가 "적이 겁을 집어먹고 싸우길 꺼리는구나"라고 오판하여 방심한 채 쳐들어오길 기대했다.
그러나 니코폴리스 시에서 7마일 떨어진 곳에 숙영지를 세운 칼비누스가 의외로 협상에 진지하게 임하는 바람에 로마군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자, 파르나케스 2세는 이러다 매복이 발각될 걸 우려해 매복한 군대를 본진으로 돌아오게 했다. 그 후 협상이 결렬되자, 칼비누스는 니코폴리스 근처로 이동하여 또다른 숙영지를 건설했다. 하지만 적군이 도시 인근 고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무리하게 공격하지 않았고, 파르나케스 2세 역시 유리한 지형을 버리고 적과 교전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양측은 서로 대치만 할 뿐 쉽사리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카이사르가 칼비누스에게 보낸 2명의 전령이 폰토스 장병들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상황이 위급하니 군대를 더 보내달라"는 카이사르의 메시지를 가져왔다. 파르나케스는 이 메시지가 로마군이 철수하거나 불리한 전투를 감행하게 하기를 희망하고, 그들을 풀어줬다. 칼비누스는 카이사르의 메시지를 받은 뒤 깊이 고민하다가, 폰토스군을 하루속히 격파하고 카이사를 돕기로 마음먹고 다음날 군대를 이끌고 적을 향해 진군했다. 그리하여 벌어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칼비누스는 크게 패하고 본거지로 퇴각했다.
기원전 47년 여름 카이사르가 소아시아에 나타나자 즉시 가담하여 젤라 전투에 참가했다. 젤라 전투는 폰토스 왕국군의 완패로 끝났고, 그는 파르나케스 2세를 추격해 시노페에서 따라잡고 항복을 강요했다. 그 결과 파르나케스가 가지고 있던 영역이 보스포로스 왕국에 귀속된다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 후 카이사르는 로마로 떠났고, 그는 소아시아에 남아 질서 유지에 힘썼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했고, 탑수스 전투 후 2개 군단과 함께 티즈드라 시 공방전을 이끌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되었을 때, 그는 로마에 있었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떠나면서 그를 기원전 43년 기병대장으로 삼아 자신 대신 로마를 통치하게 할 계획을 세웠지만, 암살당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그 후 제2차 삼두정치파에 속한 그는 기원전 42년 브룬디시움에서 함대를 이끌고 먼저 건너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게 증원군을 수송하려 했지만, 도중에 카이사르를 암살한 '해방자파'에 속한 루키우스 스타티우스 무르쿠스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함대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다. 그의 함대 대부분은 병사들과 함께 침몰했고, 그 자신도 죽은 것으로 여겨졌지만 전투 후 5일 만에 브룬디시움으로 돌아왔다.
기원전 40년 삼두정치를 결성한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후원으로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다. 그러나 연말이 되기 전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와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에게 직임을 넘겨야 했다. 그 후 가까운 히스파니아와 먼 히스파니아의 총독을 맡아 기원전 36년까지 다스렸다. 케레탄 부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부관 한 명이 이끄는 부대가 병사들의 적전 도주로 인해 패배했다. 그는 백인대장 프림필리우스를 포함한 모든 도주자를 막대기로 구타하여 죽이라고 명령하여 군기를 바로잡은 후 본인이 직접 반란을 토벌했다.
그는 임페라토르로 선포되었고 기원전 36년 7월 17일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때 승리를 기념하여 히스파니아 도시에서 제공한 대부분의 금을 얼마 전에 불타버린 레지아 시의 재건에 기부했다. 한편 그는 개선식에 쓰고 싶다며 옥타비아누스로부터 많은 조각상을 빌렸다. 개선식이 끝난 뒤 옥타비아누스가 반환을 요구하자, 그는 그 조각상들을 신전에 바쳤다고 하며, 사람을 보내 데려가라고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신성 모독을 두려워해 그냥 선물을 보낸 것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을 전하는 고대 문헌은 전해지지 않으나, 기원전 20년에 세워진 비문 하나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고 고위 사제직을 역임했던 것을 볼 때 그때까지 살아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언제, 어디서 사망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