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 라틴어: Quintus Marcius Rex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61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조부)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아버지) 클라우디아 테르티아(아내) 마르키우스 렉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68년 |
전임 |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
동기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
후임 |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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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기원전 4세기에 평민들이 집정관에 선임되는 것이 허용된 이래로 많은 집정관을 배출한 노빌레스 가문인 마르키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는 기원전 144년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아버지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는 기원전 118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는 기원전 148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손녀이며 기원전 79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장녀인 클라우디아 테르티아와 결혼해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과 정치적 동맹을 맺고, 기원전 71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다.기원전 68년 아내의 친척인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와 공동으로 집정관에 올랐다. 전년도 집정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가 두 사람이 집정관이 될 수 있도록 후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루키우스는 취임 직후 사망해버렸고, 그를 대신해 선출된 보결 집정관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마저 사망해버리는 바람에, 그는 임기가 끝날 때까지 단독으로 집정관을 맡았다.
당시 로마는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해적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 싸웠고,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는 해적들의 소굴인 크레타 섬을 정벌하고 있었다. 그는 3개 군단과 함께 기원전 67년 초 킬리키아로 진군해 크레타와 함께 해적들의 소굴이었던 킬리키아로 진격했다. 그러나 그는 해적들을 상대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지중해 해적 전체를 토벌하는 임무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부여되면서 킬리키아 총독으로서의 임무만 수행했다. 사료에서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그의 휘하에서 해군 지휘관을 맡았다가 오히려 해적들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러야 했던 것만 알려졌다.
기원전 66년 젤라에서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패한 루쿨루스가 구원을 요청했지만, 그는 병사들이 행진을 거부하고 있으니 도울 수 없다고 답했다. 또한 카파도키아 왕국의 국왕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가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패배해 생포되기 전에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역시 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해적 지도자들과 개별적으로 협상해 로마에 귀순하게 했으며, 아르메니아 국왕 티그라네스 2세의 사령관 메네마흐트가 로마에 귀순했을 때 그에게 일부 병력의 지휘권을 맡겼다. 또한 안티오키아로 여행해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필리포스 2세 필로로마이오스와 만나서 그를 셀레우코스 국왕으로 인정해주는 대신에 막대한 뇌물을 받아냈다. 한편, 그는 안티오키아에서 지진으로 손상된 왕궁과 경마장을 자기 재산으로 재건했다.
이후 원로원이 모든 동방 총독들이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수행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통제하에 있다는 포고령을 내렸고, 폼페이우스가 사절을 보내 새 총독을 임명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는 별다른 저항 없이 사임한 뒤 로마로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가 별다른 승리를 거두지 못했는데 개선식 거행은 말도 안 된다는 반발이 거셌기 때문에, 그는 수년간 개선식을 거행하지 못하고 유리한 결정이 내려지기를 기다리며 로마 근처에서 지냈다.
그러던 기원전 61년 초, 에트루리아에서 카틸리나를 추종하는 가이우스 만리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이들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받고 북상했다. 만리우스는 로마에서 카틸리나를 따랐던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기에 살기 위해 거사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며, 자신들을 보호해준다면 항복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이에 렉스는 무언가를 요구하고 싶다면 먼저 무기를 내려놓고 로마로 와야 한다고 답했다. 그 후 만리우스는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의 토벌대와 피스토리아에서 맞붙었으나 참패를 피하지 못하고 전사했다.
렉스는 카틸리나 반란이 진압된 직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는 그가 "모든 것을 부정직하고 불명예스럽게 팔아넘기는 데 익숙한 소수의 사람들의 음모로 인해 명예를 잃어버렸다"고 기술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세간에서는 그의 처남이었던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유산의 일부를 받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는 유언장에 클로디우스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클라우디아 테르티아와의 사이에서 프라이노멘이 전해지지 않는 아들 마르키우스 렉스를 낳았다. 그는 아내의 형제 중 큰형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에게 아들의 후견인을 맡겼다. 하지만 아들 렉스의 이후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