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라틴어: Gaius Calpurnius Pisō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칼푸르니누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조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67년 |
전임 |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 |
동기 |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
후임 |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칼푸르니우스 씨족은 로마의 전설적인 두번째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아들 칼푸스를 시조로 둔 평민 귀족(노빌레스)이다. 이 가문에는 여러 분파가 속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저명한 분파가 기원전 2세기 초부터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엄청난 위세를 떨친 피소 가문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67년 집정관 루키우스의 가족 관계는 고대 사료에서 전해지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기원전 112년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손자이며 기원전 68년 집정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의 사촌일 것이라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기원전 70년경 법무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69년 아울루스 가이키나와 섹스투스 에부스티우스의 상속 문제로 인한 재판 때 에부스티우스를 변호했다. 키케로는 저서 <브루투스>에서 그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와 함께 당대 최고의 변호사였다면서, "차분하고 수다스럽고 재치있는 연설가였지만, 실제보다 훨씬 더 똑똑해보이는 표정을 지었다"라고 평했다.
기원전 67년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와 함께 집정관을 맡은 뒤 '사기 선거 방지법'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선거에서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가 유죄 판결을 받은 자는 막대한 벌금을 내야 하고 원로원에서 추방되었으며, 평생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고대 사료에서는 이 법과 관련해 피소만 언급하며, 'Lex Calpurnia(칼푸르니아 법)'이라고 지칭했다.
그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경계해 이를 억누르려 노력했다. 특히 폼페이우스에게 3년간 지중해 전역의 해안 지대에 관한 임페리움을 맡겨 해적 토벌에 전념하게 하자는 호미노간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의 제안에 반대했다. 민회에서 논쟁이 격해졌을 때, 그는 폼페이우스의 지지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폼페이우스가 로물루스를 모방하고 싶다면, 그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오!"
이는 로물루스가 원로원 의원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전설을 들먹인 것이었다. 이에 군중은 격노했고,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가비니우스의 법이 끝내 통과되자 이미 모인 함대 선원들에게 당장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함대는 이미 브룬디시움에서 출항했다. 가비니우스는 피소를 집정관에서 몰아내기 위한 법안을 준비했지만, 폼페이우스가 이를 막았기 때문에 민회에 제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후, 그는 기원전 66년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총독으로 부임해 알로브로게스족의 폭동을 진압했다. 기원전 65년 로마로 귀환한 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속주민들을 착취하고 재판도 없이 처형한 혐의로 고발당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변론가 키케로가 변호에 나섰고, 그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에 앙심을 품었는지, 기원전 63년 말 카틸리나 음모로 인해 로마 정계가 흉흉해졌을 때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와 함께 당해 집정관 키케로에게 카이사르가 카틸리나 세력에 가담했을 게 분명하니, 증거가 없더라도 당장 고발하라고 설득했다. 키케로가 이를 따르지 않자, 그는 카이사르가 카틸리나 음모에 관여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이 소문을 믿은 에퀴테스들은 원로원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카시아르를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기원전 63년 12월 5일 로마에서 체포된 카틸리나 공모자들을 재판없이 처형하겠다는 키케로의 안건에 찬성했다. 훗날 로마 시민을 재판 없이 처형한 것에 대해 비난받은 키케로는 원로원에서 이를 처음 주장한 이는 자신이 아니라 피소였다고 변명했다.
기원전 61년 12월, 기원전 59년 집정관 선거를 준비하던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피소를 통해 역시 집정관 선거에 뛰어들 준비를 하던 루키우스 루케우스와 제휴를 맺으려 했다. 이후에 별다른 언급이 없기 때문에, 학자들은 그가 기원전 61년 이후 몇 년 사이에 사망했을 것이라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