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라틴어: Marcus Claudius Marcellus | |
생몰년도 | 기원전 95년 ~ 기원전 45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아카이아 속주 피레우스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조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아버지) 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동생)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사촌)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51년 |
전임 |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메텔루스 스키피오 |
동기 |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
후임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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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옵티마테스 파로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섰다. 파르살루스 전투 후 숨어지내다 친척인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청원을 받아들인 카이사르가 사면령을 내리자 로마로 귀환하다가 측근에게 살해당했다.2. 생애
고대 로마의 명문 귀족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씨족 내 평민 분파인 '마르켈루스' 일족의 일원이다. 선조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로 분전했으며 시라쿠사 공방전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기원전 91년 조영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아들이었으며, 3번 집정관을 역임한(기원전 166년, 기원전 155년, 152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손자였다. 동생 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49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사촌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50년 집정관을 역임했다.그는 어렸을 때 소 카토의 친구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두 귀족은 기원전 64년에 재무관을 함께 맡았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의무를 흠잡을 데 없이 수행했지만, 재무관 임기가 끝나는 날에 친구들의 요청에 따라 임의로 대출해줬다. 그러자 소 카토는 그의 집 앞에 가서 대출을 취소하게 한 뒤 동료를 집으로 데려갔다. 이 일이 있은 후에도 두 사람의 우정은 지속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63년 카틸리나 일당이 나라를 전복시키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그는 당장 음모를 꾸민 자들을 잡아들여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해 10월 20~21일 밤에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함께 로마에서 대규모 학살이 있을 예정이니 속히 떠나라는 익명의 편지를 받고 키케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키케로는 이를 음모가 실존한다는 증거로 삼았고, 이를 토대로 카틸리나 일당을 처단했다.
기원전 62년 조영관을 맡은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56년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를 폭력 혐의로 고발했을 때 키케로의 요청에 따라 밀로를 변호하여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기원전 54년 키케로와 함께 사르데냐 총독 기간 동안 속주민들을 학대한 혐의로 기소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루스를 변호하여 또다시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기원전 52년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를 살해한 혐의로 밀로가 기소되자, 다시 변호를 맡았지만 이번에는 유죄 판결이 내려졌고 밀로는 추방당했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독재관 시절 제정한 법에 집정관이 될 때 반드시 충족해야 할 나이 제한과 관직을 역임하는 간격 등이 규정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그는 늦어도 기원전 54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51년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다. 그는 동생 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사촌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폼페이우스 편에 서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공격했다. 그는 카이사르가 얼마 전에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의 누보 코무스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행위를 불법으로 간주했고, 갈리아의 모든 속주에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미리 임명하고, 사령관이 로마에 부재하는 중에 집정관 출마하는 걸 금지하자고 제안했다. 동료 집정관 루푸스가 반대했지만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호민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무산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소 카토와 함께 카이사르를 로마에 소환하여 재판에 받게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기원전 50년 말까지 갈리아에 남아있는 걸 받아들였다. 한 번은 누보 코무스 원로원 의원들이 로마에 찾아와서 자신들을 로마 시민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하자, 그는 채찍을 가한 뒤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로마 시민 여러분. 이제 집에 가서 당신들의 상처를 카이사르에게 보이시지요."
그러나 카이사르에 대한 공격은 쿠리오의 거부권 행사 때문에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그는 쿠리오와 협상할 것을 제안했지만 원로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기 종료 후에도 막하에서 카이사르를 공격하는 활동을 이어가다가 기원전 49년 1월 1일 폼페이우스의 지지자들이 카이사르에게 최후 통첩을 내릴 걸 요구했을 때 "원로원에만 종속될 군대를 먼저 소집하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직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가 "쓸데없는 걸로 시간 끌지 마라"며 경고하자,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쳐들어오자, 그는 폼페이우스를 따라 그리스로 갔다. 그러나 카이사르에 대한 적대 행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으며, 전쟁에서 승리한 후 대숙청을 감행하려는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다. 파르살루스 전투 후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 시에 은거해 그곳에서 철학 탐구에 몰두했다. 세네카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 시기 미틸레네에 은거한 그를 찾아갔다고 언급하며, "브루투스는 그로부터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느끼고 그 어느 때보다 열성적으로 고귀한 철학을 추구했다"라고 주장했다.
키케로는 그를 로마로 다시 데려오고 싶었기에, 그에게 일련의 편지를 보냈다. 기원전 46년 9월, 키케로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당신과 같은 결정을 따르지 않은 사람들은 전쟁을 재개하려 하거나 아니면 저처럼 승자를 믿고 이탈리아로 돌아갔습니다. 당신은 중간 결정을 내렸습니다. 첫번째 선택은 완고한 것이고, 두번째는 비겁한 것이라고 생각될 겁니다. 나는 대다수(심지어 모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가 당신의 결정을 현명하고, 많은 사람이 위대하고 용감한 정신의 결정이라고 생각한다는 걸 인정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 당신은 분명한 조치를 내려야 합니다. 특히 제 생각에는 모든 재산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부족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키케로가 3차례나 편지를 보내 귀환을 설득하자, 그는 결국 생각해보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이후 카이사르의 장인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가 원로원 회의 때 그를 사면하자고 주장하자,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즉시 동의하며 카이사르에게 사면을 간절히 청했다. 카이사르는 키케로 등 여러 원로원 의원의 의견을 물은 뒤, 그가 로마로 돌아올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기원전 46년 10월 중순에 키케로에게 편지를 보내 감사를 표했지만, 어투가 "나 같은 사람을 위해 굳이 나서주니 고맙다"라는 식으로 다소 차가웠다.
그는 이후에도 미틸레네 시에서 미적거리며 로마로 돌아가려 하지 않다가, 기원전 45년 5월 23일이 되어서야 로마로 돌아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배가 피레우스에 이르렀을 때, 측근인 푸블리우스 마기우스 칠로가 단검으로 그를 공격해 목과 머리를 찔러 죽여버렸다. 칠로가 현장에서 자살해 버렸기에, 살인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전날 피레우스에서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눴던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키케로에게 이 소식을 알리며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가장 영광스러운 남자가 가장 사악한 자의 손에 가장 잔인한 죽음을 당했고, 그의 존엄으로 인해 적들로부터 목숨을 건진 사람은 그의 죽음을 초래한 친구를 찾았다."
루푸스는 아테네에 동료를 묻고 싶었지만, 종교적 금지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에 따라 아카데미 체육관에 묻었고, 나중에 아테네인들이 그를 기리는 대리석 기념물을 세웠다. 카이사르가 그를 암살했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정작 키케로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이를 부정했다. 키케로는 푸블리우스 마기우스 칠로가 광기에 걸렸고 돈 문제로 얽혀 있어서 죽였을 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