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1.4px" | 기원전 715년 | 기원전 509년 | 기원전 449년 | 기원전 431년 |
누마 마르키우스 |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 퀸투스 푸리우스 |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 |
기원전 420년 | 기원전 390년 | 기원전 332년 | 기원전 304년 | |
스푸리우스 미누키우스 | 마르쿠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칼루사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 | |
기원전 254년~기원전 243년 | 기원전 243년~기원전 221년 | 기원전 221년~기원전 213년 | 기원전 213년~기원전 212년 | |
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 | (공석) | |
기원전 212년~기원전 183년 | 기원전 183년~기원전 180년 | 기원전 180년~기원전 152년 | 기원전 152년~기원전 150년 | |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 |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 (공석) | |
기원전 150년~기원전 141년 | 기원전 141년~기원전 132년 | 기원전 132년~기원전 130년 | 기원전 130년~기원전 114년 |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 |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무키아누스 |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 |
기원전 114년~기원전 103년 | 기원전 103년~기원전 89년 | 기원전 89년~기원전 82년 | 기원전 82년~기원전 63년 |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 |
기원전 63년~기원전 44년 | 기원전 44년~기원전 13년 | 기원전 13년~기원후 379년 |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 (로마 황제가 겸임) | }}}}}}}}}}}}}}} |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라틴어: Quintus Mucius Scaevola | |
생몰년도 | 기원전 140년 ~ 기원전 82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증조부)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조부)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아버지) 켈리아(아내) 무키아 테르티아(딸)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95년 |
전임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
동기 |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
후임 | 가이우스 코엘리우스 칼두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폰티펙스 막시무스. 친구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훌륭한 웅변가이자 법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기원전 82년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추종하는 이들에 의해 피살당했다.2. 생애
그의 집안은 평민 가문인 무키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215년에 법무관을 역임한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를 시작으로 로마 정계에 잇따라 진출했다. 푸블리우스의 두 아들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와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는 각각 기원전 175년과 174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175년 집정관 푸블리우스의 아들 푸블리우스도 기원전 133년 집정관을 맡았고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농지 개혁에 찬동했으며, 동생 퀸투스와 함께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역임하고 법률에 관한 저서를 남겼다. 그의 사촌으로 '아우구르(Augur)'라는 별칭으로 불린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는 민사 분야에서 뛰어난 변호사로 활약했다.그의 집안은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삼촌 퀸투스는 일찍이 리키니우스 집안에 입양되어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이름에 추가했으며, 이 가문의 대표자 중 한 명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어릴 때부터 그와 절친한 관계를 맺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두 사람은 같은 나이였으며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가 집정관이던 해에 태어났다고 한다. 이에 따른다면, 두 사람은 기원전 140년에 출생했을 것이다. 크라수스는 그의 사촌이자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아우구르의 딸인 무키아와 결혼해 두 딸 리키니아 프리마와 리키니아 세쿤다를 낳았다.
스카이볼라는 민법에 관한 저서 "민법에 관하여"를 집필했다. 그는 한 권의 책으로 민법에 관한 간략한 가이드를 만들었고, 18권에서 각 민법이 적용된 일반적인 사례를 서술하고 이에 관한 논평을 달았다. 이 저서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으나 다른 저자들에 의해 인용 및 발췌된 부분은 전해진다. 그는 종종 법정에서 변호사로 출석해 상당히 우수한 변론을 했다. 키케로는 저서에서 스카이볼라가 법률 문제에 관한 탁월한 통찰력을 갖추고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능력을 갖췄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스카이볼라는 "법학자 중 최고의 웅변가"이며 그의 친구인 크라수스는 "웅변가 중 최고의 법학자"라고 평했다. 스카이볼라는 친척인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아우구르와 함께 키케로에게 민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기원전 115년, 스카이볼라는 유피테르 신전의 사제단에 배속되었다. 기원전 110년경 재무관을 맡으면서 정치 경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기원전 106년에 호민관을 역임했다. 그는 호민관으로서 에퀴테스 대신 원로원 의원이 법관을 구성되어야 한다는 법을 반포한 집정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를 친구 크라수스와 함께 지지했다. 기원전 104년 또는 103년에 크라수스와 함께 조영관을 맡아 로마 민중이 처음으로 사자를 목격했다고 알려지는 대규모 서커스를 개최했다. 기원전 100년 12월 원로원으로부터 원로원 최종결의를 선고받은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처단하고자 모인 귀족 무리에 가담했다. 기원전 98년 이전에 법무관을 맡았고 알려지지 않은 지역에서 총독을 맡았다.
기원전 95년, 그는 친구 크라수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스스로 로마 시민이라고 자처하며 로마에 거주하는 모든 이탈리아인에 대해 조사를 엄격하게 실시해서 시민권을 증명하지 못한 사람들을 도시에서 추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두 사람이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추종하는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려는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의 파벌의 지시를 수행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집정관 임기를 마친 후 갈리아 총독[1]에 부임한 크라수스가 강도떼를 물리친 뒤 원로원으로부터 예외적으로 개선식을 거행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에 스카이볼라는 이런 예외를 허용한다면 장차 국가의 안위에 화근이 될 지도 모른다"며 반대했고, 원로원은 결정을 철회했다.
기원전 90년대에 아시아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갈수록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를 의식해 아시아 속주들의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기 위해 가능한 한 선정을 베풀고자 노력했다. 그는 이전 총독들의 묵인 하에서 막대한 돈을 속주민들로부터 착취하던 세리들을 법에 따라 엄중히 다스렸다. 세리와 속주민간의 이익이 충돌할 경우 후자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리고 세리들에게 착취한 돈을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특히 밀린 세금을 받아낸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함부로 살상한 세리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또한 로마인과 관련이 없는 경우 그리스인들이 그리스 고유의 법에 따른 재판을 받는 것을 보장한다는 칙령을 반포했으며, 모든 관료들은 임지로 부임할 때 속주민들에게 여행 비용을 물릴 수 없고 오로지 자신의 재산으로 충당해야 한다는 칙령도 내렸다.
속주민들은 그의 이같은 행보에 열렬히 환영했고, 스카이볼라가 떠난 후 그를 기리기 위해 연례 축제를 벌였다. 원로원 역시 "이제부터 스카이볼라가 취한 정책은 아시아로 부임한 총독과 법무관들의 표본으로 삼는다"는 내용의 특별 결의안을 반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지 9개월만 속주를 통치하고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에게 직임을 인계한 뒤 로마로 돌아왔다. 기원전 92년, 그를 대신하여 직임을 수행한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가 속주민 착취 혐의로 고발당했다. 루푸스는 유죄를 선고받고 재산 몰수 및 추방형에 처해지자 아시아로 망명하여 속주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세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던 로마의 에퀴테스들이 복수를 꾀했지만, 명망높은 가문 출신에 따르는 이들이 많은 그를 직접 공격하기엔 부담이 크니 부관이었던 루푸스를 타겟으로 삼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스카이볼라는 기원전 89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사망한 뒤 그의 뒤를 이어 폰티펙스 막시무스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88년부터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내전이 발발했지만, 그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다. 기원전 88년 술라가 로마를 점령하고 마리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자는 제안을 원로원에 제출했을 때, 사촌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아우구르는 반대했지만 그는 침묵했다. 1년 후 마리우스가 로마에 입성하여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지만, 그는 목숨을 건졌다.
기원전 86년 1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장례식에 참석한 그는 마리우스파 인사인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가 휘두른 검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핌브리아는 그가 입은 상처가 심각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를 고발했다. 재판관이 고발 사유를 묻자, 핌브리아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는 칼자루를 검으로 끝까지 치지 않았다."
그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위해한 것에 대해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미트리다테스 6세를 무찌르고 술라를 토벌하는 임무를 맡은 집정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가 되어 동방으로 떠났다가 플라쿠스를 살해하고 군단을 자기 휘하에 두었으나 기원전 84년 부하들이 술라에게 귀순하자 자살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많은 귀족들이 술라의 내전을 단행한 술라에게 귀순했지만, 그는 로마에 그대로 남은 채 폰티펙스 막시무스로서 직임을 수행했다. 기원전 82년, 프라이네스테(오늘날 이탈리아의 팔레스트리나)에서 술라군에게 포위된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법무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다마시푸스에게 전령을 보내 로마에 남아있는 인사들에게 로마를 떠나 카르보와 합류하라는 지령을 보냈다. 마리우스는 이에 더해 처리해야 할 사람들의 명단도 함께 보냈다. 브루투스는 숙청 명단을 확인한 뒤 원로원을 소집한 후, 자객들을 풀어 명단에 든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 중에는 스카이볼라도 있었다. 그는 베스타 신전 안으로 피신했지만, 암살자들은 성역인 그곳에 침입해 그를 죽였다. 이후 그의 유해는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티베르 강에 던져졌다.
그는 켈리아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해 딸 무키아 테르티아를 낳았다. 무키아 테르티아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결혼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폼페이아 마그나를 낳았다. 기원전 62년 말 간통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남편으로부터 이혼 통보를 받은 뒤 기원전 60년경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와 결혼해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를 낳았다.
[1]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인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총독인지는 명확히 명시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