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라틴어: Gaius Scribonius Curio | |
생몰년도 | 기원전 125년 ~ 기원전 53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조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아버지) 멤미아(아내)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76년 |
전임 |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
동기 |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
후임 | 루키우스 옥타비우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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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과 술라의 내전에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심복으로 활약했고, 로마 역사 최초로 도나우 강을 건너 트라키아, 모이시아 부족들을 토벌했다. 이후 20여 년간 원로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2. 생애
평민 집안인 스크리보니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조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는 변호사로서 활약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버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는 기원전 121년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동시대 사람들을 가장 유창한 인물"이라고 호평했을 정도로 탁월한 연설가였다. 그가 행한 많은 연설문이 출간되었는데, 기원전 106년에 태어난 키케로의 어린 시절에도 그의 연설문을 흔히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가 행한 모든 연설문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는 집정관 선거에 출마할 나이가 될 즈음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보다 약간 어렸으며,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퀸투스 바리우스, 푸블리우스 안티스티우스, 그나이우스 폼포니우스 루키우스 푸피우스와 동년배였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그가 기원전 125년경에 출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이별했지만, 그는 아버지처럼 훌륭한 연설가로 자라 정치 경력을 순조롭게 이어갔다. 먼저 기원전 98년 집정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를 고발했다. 혐의가 무엇이었고 재판 결과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키케로는 그가 이 재판에서 한 연설문이 세간의 화제가 될 정도로 훌륭했다고 밝혔다.
그는 기원전 91년 호민관을 역임한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인들에게 분배하는 정책을 지지했다. 드루수스가 암살당한 뒤 드루수스의 개혁 정책이 무효로 처리된 후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드루수스의 지지자들은 이탈리아인들을 선동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때 그 역시 조사받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다. 기원전 90년 호민관에 선임되었으나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가 민회에서 연설했을 때 사람들이 대거 떠나버려서 연설을 마칠 즈음에는 광장에 아무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수년간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던 그는 기원전 87년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를 상대로 원정을 떠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군대에 가담했다. 기원전 86년 3월 1일 미트디라테스 6세의 편을 든 아테네를 공략한 술라는 쿠리오에게 참주 아리스티온이 버티고 있는 아크로폴리스를 공략하라고 명령했다. 쿠리오는 아크로폴리스를 철저히 봉쇄했고, 수비대는 기아와 갈증에 시달린 끝에 항복했다. 아리스티온은 체포된 후 공개 장소에서 처형되었다. 기원전 85년 다르다니아에서 술라와 미트리다테스 6세간의 평화 협약이 체결된 후, 쿠리오는 비티니아 국왕 니코메데스 4세와 카파도키아 국왕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가 복위할 수 있도록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후 술라와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왔지만, 고대 기록에서는 그가 술라의 내전에 참여한 것에 대해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내전이 종식된 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보유했던 캄파니아 일대의 드넓은 토지를 받았다는 것만 전해진다. 기원전 80년 이전에 법무관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78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다른 후보인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가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였던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양자인 점을 고려해 철회했다.
기원전 77년 재차 집정관 선거에 출마해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와 함께 기원전 76년도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집정관이 된 그는 원로원에 술라의 내전 때 유피테르 신전이 불타면서 소실되어버린 시빌라 예언서를 복원하자고 건의해 관철시켰다. 또한 술라의 개혁을 폐지하는 안건을 민회에 제시한 호민관 그나이우스 시키니우스를 저지했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는 이 호민관이 귀족들에게 포위되었고, 무고한 호민관의 죽음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역사서엔 그런 내용이 없어서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것을 볼 때 그저 침묵했을 뿐이라고 추정된다.
기원전 76년 여름에 마케도니아로 출진한 그는 디라키움에서 휘하 5개 군단 중 한 군단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했다. 그 후 메데스의 트라키아 부족을 토벌했으며, 기원전 75년부터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마케도니아 총독이 된 뒤 다르다니 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을 물리치고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도나우 강을 도하했다. 총독 임기를 마치고 기원전 73년 즈음에 로마로 귀환해 개선식을 거행했다. 로마의 문헌학자 아스코니우스 페디아누스에 따르면, 쿠리오가 일찍이 고발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의 아들 메텔루스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트라키아 부족들을 토벌하고 로마로 귀환한 쿠리오를 고발했지만, 쿠리오가 그에 관한 혐의를 제기하자 고발을 철회했다고 한다.
쿠리오는 시칠리아 총독 시절 속주민들을 상대로 심각한 착취를 저질러 퇴임 후 고발당한 가이우스 베레스를 후원했다. 그는 재판이 개시되기 직전에 피고인석에 선 베레스를 안으며 "나는 당신이 정당하며 무죄 판결을 받을 거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칠리아인들의 변호를 맡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맹활약으로 유죄 판결이 불가피해지자, 베레스는 마실리아로 망명해야 했고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다.
기원전 66년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함께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를 투입하자는 안건에 지지를 표했다. 또한 이제 막 정치 경력을 시작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경계해 그에게 날카로운 공격을 연이어 가했다.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가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는 소문이 로마 각지에 확산되고 있을 즈음, 그는 원로원 회의에서 카이사르가 음모에 깊이 관여했을 게 분명하니 당장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기원전 63년 12월 5일 원로원 회의에서 로마 시내에서 음모를 꾸몄다가 체포된 카틸리나 추종자들을 재판 없이 처형하자는 제안을 지지했다. 다만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체포된 이들을 당장 처형하지 말고 종신 금고형에 처해둬야 한다고 주장했던 카이사르가 원로원 회의가 끝난 뒤 에퀴테스 무리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그가 카이사르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를 토가로 덮어줘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기원전 61년 1월 1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는 지난 해 12월 4일에서 5일 사이의 밤에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을 역임하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관저에서 보나 데아(Bona Dea: 순결과 출산의 신) 여신에게 바치는 비밀제의가 열렸을 때, 남자의 접근이 일체 불허된 그 제의에 몰래 잠입했다가 발각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를 신성모독 혐의로 고발했다. 로원이 법무관이 배심원을 구성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을 집행하려 하자, 호민관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가 반대했다. 이 법이 통과된다면 클로디우스에게 적대적인 법무관들이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려고 배심원들을 임의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쿠리오는 칼레누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현직 집정관 마르쿠스 푸피우스 피소 프루기 칼푸르니아누스와 함께 이번만큼은 민회가 배심원을 구성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원로원은 이를 거부했지만, 그의 아들이자 클로디우스의 친구인 쿠리오가 이끄는 클로디우스 추종자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어쩔 수 없이 피소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후 열린 재판 결과, 쿠리오는 31대 25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재판 당시, 키케로는 클로디우스가 비밀 제의에 몰래 침입한 게 분명하다고 증언했다. 이로 인해 클로디우스는 키케로의 정적이 되었고, 클로디우스를 지지했던 쿠리오 부자 역시 키케로를 적대시했다. 기원전 61년 6월 또는 7월, 키케로는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자신이 "비겁한 노인과 타락한 젊은이" 쿠리오 부자를 상대로 처절한 '전투'를 벌여야 했다고 토로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후 클로디우스의 공세에 밀려 망명을 떠나야 했던 키케로는 <In Clodium et Curionem(클로디우스와 쿠리오에 대항하여)>를 집필했다. 정확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쿠리오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삼아 부귀영화를 누리고 부도덕한 클로디우스를 지원한 것을 비난했다고 알려졌다. 키케로는 이 책을 출간하지 않았지만, 3년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항하여 젊은 쿠리오를 끌어들이려 했을 때 이 책 내용이 모종의 이유로 세간에 알려지는 바람에 낭패를 봤다.
학계에서는 쿠리오가 기원전 61년 감찰관을 수행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고대 사료에서는 이 해에 감찰관을 수행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에 불분명하다. 기원전 59년 카이사르가 집정관을 맡았을 때, 쿠리오는 카이사르의 모든 정책에 반대한 또다른 집정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를 지원했지만 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카이사르의 행보를 막아내지 못했다. 기원전 59년 10월 초, 루키우스 베티우스가 폼페이우스를 죽이려 했다가 체포된 사건이 벌어졌다. 베티우스는 쿠리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그리고 현직 집정관 비불루스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암살을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비불루스는 베티우스에게 직접 단검을 줬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이 증언을 믿지 않았고, 베티우스는 곧 옥사했다.
기원전 58년, 쿠리오는 망명자 신세가 된 키케로의 귀환을 요구하는 원로원 의원과 에퀴테스의 리더를 맡아서 성사시겼다. 기웑넌 56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위시키는 방식에 관한 원로원 내부의 논쟁에 참여했지만 "에리한 발언을 했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정확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기원전 55년엔 갈리아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면서 명성을 쌓아올리고 있는 카이사르를 비판하는 팜플렛을 출간했다. 기원전 53년에 사망했고, 아들 쿠리오는 그를 기리는 대규모 경기를 조직했다.
그는 기원전 90년 또는 89년 호민관 가이우스 멤미우스의 딸 멤미아와 결혼하여 외아들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를 낳았다. 그가 엄격한 생활 방식을 고수한 데 비해, 아들 쿠리오는 사치를 부렸고 질이 나빠보이는 친구들과 사귀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그는 250달란트에 달하는 빚을 짊어진 아들을 위해 갚아주기를 거부했으며, 아들의 친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집밖으로 여러 번 내쫓았다. 이렇듯 집안에서는 갈등을 자주 벌였지만, 정치에서는 아들과 한 몸이 되어 활약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뒤, 아들 쿠리오는 아버지가 경계하며 여러 번 공격했던 카이사르의 측근이 되었다.
3. 여담
그는 연설할 때 목을 좌우로 마구 흔드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가 집정관 시절 원로원 회의 때 평소처럼 좌우로 머리를 흔들며 긴 연설을 하고 있었다. 당시 동료 집정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는 통풍에 시달렸기 때문에 의자에 앉아있을 때도 붕대를 감고 습포제를 발라야 했다. 옥타비우스가 의자에 앉아서 동료의 연설을 지켜보고 있을 때, 쿠리오의 정적이었던 호민관 그나이우스 시키니우스가 이렇게 농담했다고 한다."기억하시오, 옥타비우스. 당신은 동료에게 목숨을 빚지고 있다는 것을. 그가 여기서 앞뒤로 흔들지 않았다면 파리가 당신에게 다가와 물었을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