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라틴어: Gaius Valerius Flacc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고조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증조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조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아버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형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사촌)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93년 |
전임 |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가이우스 코엘리우스 칼두스 |
동기 |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
후임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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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로마 공화국의 가장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으로 손꼽히는 발레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특히 그가 속한 플라쿠스 가문은 여섯 세대에 걸쳐 집정관에 선임될 정도로 로마 정계에 오랫동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조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227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219년 로마와 동맹을 맺은 사군툼을 포위 공격한 한니발 바르카의 인도를 카르타고 정부에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발발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를 맡았다. 증조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195년에 대 카토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고, 기원전 184년에 대 카토와 함께 감찰관을 맡았다.조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152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아버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명시되었을 뿐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형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86년에 보결 집정관을 맡았다. 사촌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100년 집정관을 맡았으며 프린켑스 세나투스를 역임했다.
그는 최고 행정관의 법적 제한 연령을 규정한 빌리우스 아날리스의 법에 의거해 기원전 96년 이전에 법무관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법무관으로서 루카니아 지방의 벨리아 시에서 온 여사제 칼리파나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할 것을 원로원에 제안해 승인을 얻어냈다. 기원전 93년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였던 마르쿠스 헤렌니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 해에는 로마와 그 너머 모두에서 별다른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이후 가까운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해 켈티베리아인들과의 전쟁을 치러 20,000명의 적병을 사살하고 지난날 원로원 의원을 큐리아 건물에서 불태웠던 벨구에다 시민들을 학살했다.
기원전 91~88년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고, 뒤이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가이우스 마리우스 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그는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과 갈리아 속주 총독을 연이어 맡으면서 이 상황에 별다른 입장을 표하지 않았지만, 그의 형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루키우스가 사망한 후 조카 루키우스는 삼촌이 있던 갈리아로 망명했다. 그는 갈리아에서 병사들에게 임페라토르로 선포되었고, 주화를 스스로 주조했다. 기원전 83년 술라의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즉시 술라의 편으로 넘어갔다. 기원전 81년 로마로 돌아와 히스파니아와 갈리아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했다.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에서 거둔 승리가 동시에 기념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