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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b0000> 가족 |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 계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 어머니 아티아 · 누이 소 옥타비아 | ||
부인 | 첫째 부인 클로디아 풀크라 · 둘째 부인 스크리보니아 · 셋째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 ||
자식 | 딸 대 율리아 · 양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티베리우스 · 양아들 대 드루수스 | ||
전투 | |||
내전기 | 무티나 내전 · 해방자 내전 · 페루시아 내전 · 시칠리아 내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
전투 | 필리피 전투 ·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 · 악티움 해전 · 칸타브리아 전쟁 · 갈루스의 아라비아 원정 · 쿠시-로마 전쟁 · 게르마니아 전쟁 · 토이토부르크 전투 | ||
반란 | 일리리아 대반란 | ||
기타 | |||
장소 | 아우구스투스 영묘,(), · 판테온 | ||
기타 | 칭호 ·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라틴어: Lucius Marcius Philippus | |
생몰년도 | 기원전 102년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아버지) 성명 미상의 여인(첫번째 아내) 아티아(두번째 아내)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아들) 마르키아(딸)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56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 |
동기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 |
후임 |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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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아우구스투스의 계부다.2. 생애
처음으로 독재관과 감찰관을 역임한 평민 씨족인 마르키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코그노멘인 필리푸스를 단 첫번째 인물은 기원전 281년 집정관인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였다. 또한 기원전 186년과 기원전 169년에 집정관을 맡은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활약했다. 아버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법률에 해박하여 훌륭한 법률가, 변호사로 유명했으며, 기원전 91년 집정관을 맡아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인들에게 분배하는 법안을 추진한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심각한 갈등을 벌일 만큼 강경한 옵티마테스파였다. 그러면서도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에서 마리우스파와 술라파 양자 사이에서 승자의 편에 서서 생존할 만큼 시세의 흐름을 보는 능력이 뛰어났다.학계에서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정한 연령에 따른 관직 서임 규제령과 그의 경력 연대기를 토대로 그의 출생을 기원전 102년으로 추정한다. 그는 일찍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 결혼해 기원전 80년경 아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를 낳았고 뒤이어 딸 마르키아를 낳았다. 기원전 62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법무관을 맡았고, 법무관 임기가 만료된 후 시리아 속주에 총독으로 부임하여 2년간 관리했다. 기원전 58년 또는 57년에 로마로 돌아온 직후 재혼했다.
재혼 상대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고종 사촌 동생이며 법무관과 율리우스 법에 따라 캄파니아 토지를 평민들에게 분배해 주는 20인 위원회 위원을 지냈던 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누나 율리아의 딸인 아티아였다. 아티아는 일찍이 가문 최초로 원로원 의원이 된 뒤 마케도니아 총독을 역임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와 결혼했으며, 옥타비우스와의 사이에서 아들 옥타비아누스와 딸 소 옥타비아를 낳았다. 필리푸스는 아티아와 결혼한 후 아티아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두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는 옥타비우스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아티아 자녀들을 생각해 정식 입양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친자녀처럼 생각해 정을 쏟았고, 두 아이의 예절 교육을 직접 담당해 그들이 훌륭한 품성을 갖고 상류층들을 상대로 정략적,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다양한 체험을 몸에 익히게 했다. 이는 후일 옥타비아누스 남매가 그들의 양자들에게 정을 쏟고, 로마 사회에서 성공한 비결이 되었다. 그와 아티아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다.
기원전 56년,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에 의해 추방되었다가 폼페이우스의 주선 덕분에 최근에 복귀할 수 있었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집을 복원하도록 허용해달라는 요청을 지지했다. 또한 루카에서 제1차 삼두정치를 갱신한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뜻에 따라 정무를 수행했다. 기원전 54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를 위해 8명의 전직 집정관들과 함께 판사에게 관대한 처사를 내려달라고 요청해 무죄 판결이 내려지는 데 일조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원로원이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최종권고를 내리기로 결의했을 때, 그는 원로원 회의에 불참했다. 이후 많은 의원들이 로마로 진격하는 카이사르를 피해 폼페이우스를 따라 발칸 반도로 피신했을 때, 필리푸스는 나폴리에 머물렀고 나중에 카이사르에게 내전과 정치 생활 전반에 참여하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받아냈다.
그 후 가족을 돌보는 데 주력하며 조용히 지내던 필리푸스는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카이사르가 유언장에서 자신의 의붓아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양자로 지명되고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로마가 카이사르 암살극으로 인해 극도의 혼란에 휩싸인 상황에서 의붓아들이 로마로 갔다간 화를 면치 못하리라 여기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카이사르의 이름과 재산을 물려받기를 포기하고 은거하라고 조언했다. 옥타비아누스는 필리푸스의 조언을 받고 고심했지만, 이내 로마로 가서 카이사르의 이름과 재산을 물려받고 정계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그 후 원로원에서 새로 나타난 카이사르의 '아들'에게 어떤 영예를 수여해야 할지를 놓고 토론할 때, 그는 포럼에 옥타비아누스의 동상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기원전 43년 초, 필리푸스는 무티나 내전을 벌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전쟁을 멈추라고 설득하기 위해 원로원이 파견한 사절단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가 설득에 응하지 않으면서 임무는 실패로 끝났다. 이후 필리푸스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데, 아마도 몇 년 사이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기원전 38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계모 아티아의 누이인 소 아티아와 결혼했다. 딸 마르키아는 소 카토의 아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