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라틴어: Gaius Calvisius Sabin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아버지)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아들) 칼비시아 플라킬리아(딸)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손자)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9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 |
동기 |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 |
후임 | 가이우스 코케이우스 발부스 푸블리우스 알페누스 바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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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파스티 카피톨리니에는 아버지의 프라이노멘이 '가이우스'라는 것만 언급되었을 뿐 그 밖의 정보는 실려 있지 않다. 그는 로마로 귀화한 사비니인의 후예로 추정되며, 평민 씨족인 칼비시우스 씨족에서 최초로 행정관에 오른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였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편에 섰고, 기원전 48년 카이사르가 에페이로스에 있을 때 5개 코호트와 소규모 기병 분견대를 이끌고 아이톨리아로 이동해 그 일대를 장악하고 카이사르에게 식량을 공급했다. 또한 칼리돈과 나프파크토스를 폼페이우스파로부터 탈취했다.기원전 46년경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45년 아프리카 총독을 맡다가 이듬해 봄 로마로 돌아왔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오스에 따르면,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때 다른 의원들이 상황을 멍하니 지켜보는 사이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와 함께 카이사르를 지키려고 노력했다가 중과부적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당시 아프리카는 칼비시우스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가 대리 통치했다. 원로원은 곧 퀸투스 코르니피키우스를 아프리카 총독으로 선임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코르니피키우스를 내쫓고 사비누스를 아프리카 총독에 부임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제2차 삼두정치의 지지자가 되었고, 기원전 39년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다가 몇 달 만에 사임했다.
기원전 38년 옥타비아누스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토벌하기 위해 시칠리아 내전을 단행했을 때 해군 사령관으로 선임되어 폼페이우스의 부하 메네크라테스를 상대로 쿠마에서 맞붙었으나 크게 패했다. 이후 잔여 함대를 수습한 뒤 주력 함대와 합류하기 위해 이동했고, 폼페이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메사나 해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옥타비아누스를 압도하고 있던 폼페이우스는 그의 함대가 나타나자 철수해 옥타비아누스를 끝장낼 기회를 놓쳤다.
잔여 함대를 캄비시우스의 함대에 귀속시킨 옥타비아누스는 다시 바다로 나갔으나,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폭풍으로 수많은 배를 잃고 말았다. 결국 시칠리아 공략을 포기하고 본토로 돌아간 뒤, 남부 이탈리아에 군대를 집중시키고 해안 도시의 수비대를 강화해 적의 상륙 가능성에 대응했다. 그 후 그는 해전에서 연이어 패배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했던 메노도루스가 다시 폼페이우스에게 항복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지휘권을 넘겨야 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패망한 뒤, 이탈리아에서 질서를 회복하는 임무를 맡아 잘 수행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을 때 안토니우스를 비방하는 소문을 퍼트렸다. 당대에 퍼진 안토니우스에 대한 악성 소문 대부분은 그가 지어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31년 히스파니아 총독을 맡았고, 기원전 28년 로마로 귀환한 뒤 이민족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3. 후손
아들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는 기원전 4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아티카에서 발견된 그리스어 비문에는 "집정관 칼비시우스 사비누스의 딸 칼비시아 플라킬리아"가 언급되었다. 이로 볼 때, 그는 딸 칼비시아 플라킬리아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손자로 추정되는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는 서기 26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나 세야누스와 가까운 사이였다는 이유로 로마인의 존엄성을 모욕한 혐의로 고발당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로마를 전복하려는 세야누스 잔당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던 켈수스라는 이름의 대대장은 칼비시우스에게 뚜렷한 혐의가 없다고 보고했고, 티베리우스는 그에 대한 조치를 연기하기로 했다.그 후 티베리우스가 사망하면서 감시에서 벗어난 그는 칼리굴라 황제에 의해 판노니아 총독으로 선임되어 2개 군단을 통소랬다. 그러나 39년 칼리굴라를 타도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의심을 사는 바람에 칼리굴라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자 이에 불복하여 아내 코르넬리아와 함께 자살했다.